사건, 갈등, 그리고 성장

 

나는 군대에서 장군 운전병을 했다 (육군본부 작전처장). 최상위 부대에서 최고 고위급 인사를 모시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 여지껏 잊혀지지 않는, 목회에도 큰 도움이 되는 교훈이 있다.

 

모시는 분의 보직 상 장거리 운행이 잦았다. 장거리 운행을 하기 전에 운전병이 꼭 해야 할 일은 정비대에서 차량을 점검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거리 운행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차량 정비를 받지 못한 적이 있다. 게다가 얼마전 차량 정비를 받았던 터라 별 문제 없겠거니 생각했다.

 

그때가 여름 가까웠던 것 같다. 사건은 그때 터졌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향하고 있는데, 천안 쯤에서 갑자기 차가 서 버린 것이다. 나는 매우 당황했다. 일이 벌어지자 장군은 나에게 차량 점검 여부부터 물었다. 점검을 못 받았다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러면서 수송대에 전화해 빨리 일처리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그 이후의 사건 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시간이 많이 흘러 정확하게 기억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때 견인차에 끌려 이동 도중 차 안에서 장군이 나에게 했던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장군 그 때 나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다.

 

"사건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진 후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그러니, 앞으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을 조속히, 그리고 잘 수습하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라."

 

인생을 더 살아보니, 그리고 적지 않은 세월 목회를 해 보니 그때 장군의 교훈이 얼마나 지혜로운 것인지 알겠다. 사건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터진다. 갈등은 우리의 뜻과는 반대로 발생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은 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사건과 갈등이 있어야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빈공간, 또는 어긋난 공간을 매울 수 있는 기회도 온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과 갈등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는다. 괴로운 일이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사건과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사람의 인격과 자질은 바로 그곳에서 드러난다. 사건과 갈등을 통해 더 나은 인간관계, 공동체를 만드느냐, 아니면 사건과 갈등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자질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살다보면 원치않는 사건과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사건과 갈등을 습관적으로 만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건과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무책임하게 회피하거나, 사건과 갈등을 통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 또한 매우 큰 문제이다. 아픔 없이 성장하는 생명은 없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10. 17:16

장자의 명분과 복

(창세기 28:10-22)

 

(퀴즈: 야곱 이야기는 창세기 몇 장부터 시작되는가? 쉽게 외우는 방법은?) 창세기는 네 명의 족장(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의 50장 중 반은 아브라함 이야기, 반은 야곱 이야기이다(야곱 이야기는 그래서 창세기 25장부터 시작된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 이론에 따르면,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이야기는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비범한 탄생, 갈등, 떠남, 성장, 되돌아옴. 야곱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화적 영웅의 서사 구조를 담고 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탄생은 범상치 않았다. 그의 태생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이 말씀을 듣고 태어난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야곱이 된 것이다. (발꿈치를 잡았다.)

 

에서와 야곱의 성장과정을 보면, 성향 상 우두머리(장자)는 에서가 되어야 하는 게 맞다. 에서는 장성해서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성격이어서 그냥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드리는 일을 했다. 아버지 이삭은 장자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유약해 보이는 야곱을 사랑했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보이지 않게 시작된다. 하루는 사냥에서 집으로 돌아온 에서가 너무 배가 고파서 야곱의 떡과 팥죽을 요구한다. 야곱은 평소에 자신이 쌍둥이 동생으로서 장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야곱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만든 떡과 밭죽을 에서의 장자권을 사는 데 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25:32). 그리고, 이어지는 진술은 이렇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25:34).

(우리는 인동 장씨인데, 우리 집에는 족보가 없다. 할머니께서 백령도에서 피난 나오시면서 가지고 다니기 힘들다시며 족보 없는 이에게 파셨다고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사회 시간에 족보 조사해 오는 숙제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우리는 그냥 인동 장씨, 예수파로 써가라 하셔서 그렇게 숙제를 해 간 적이 있다.)

 

그 이후에, 에서와 야곱의 삶을 보면,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2634절과 35절 두 절에 에서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데, 참 안타까운 장면이 나온다. 에서는 이방인 아내들을 맞이한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이것이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을 성경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26:34-35).

 

에서의 이방인 아내들이 왜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을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당연히, 에서의 이방인 아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을 것이고, 자신들이 섬기던 신을 그대로 섬겼을 것이다. 가정에서 신앙적인 충돌이 일어났을 것이다.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는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갈등이 증폭된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죽을 날을 얼마 안 놓아두고 마지막으로 축복을 해주려 한다. 이 축복은 일반 축복과 달리, ‘유언이고 상속이다. 요즘도 부모가 죽기 전에 유언과 상속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싸움 하는 집안이 심심치 않게 있다. 부모에게 를 더 많이 물려 받기 위해서 자녀들이 경쟁한다. 그래서 노인들 사이에서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자식들에게 먼저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고 한다. 그래야 자식들이 끝까지 잘한다고 한다.


에서와 야곱 사이에도 아버지의 축복을 두고 경쟁이 벌어진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승자는 야곱이었다. 야곱은 변장을 하여, 형 에서에게 내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다. 아버지 이삭이 내린 축복은 이것이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만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7:27-29).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렇게 갈망하는 물질과 명예와 형통의 복이 이 말씀에 다 들어 있다. 자녀들에게 물질을 직접 주지 말고 (줘 받자 탕진하거나 싸움 할 가능성이 크다), 날마다 이 말씀을 주면 좋다. 인간은 복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라고 베푼 것이 나중에 큰 문제를 발생시키는 근심으로 변질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야말로 복이 된다. (오늘 밤, 자녀들에게 이 복을 빌어주고 주무시라.)

 

기회를 놓친 에서에게는 이런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다.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27:39-40). 참으로 안타까운 축복이다. 에서의 주소는 척박 시 척박 구 척박 동이다. 칼을 믿고 살아야 하고, 아우를 섬기며 살아야 하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는가.

 

이렇게, 에서의 말 대로,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형에게서 두 가지를 빼앗아 간다. 장자의 명분과 복.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나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27:36).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이상하지 않는가? (나만 이상한가?) 야곱이 에서에게서 빼앗은 것은 장자의 명분과 복이다. 장자의 명분과 복은 실물이 아니다. 야곱에 에서에게서 실제로(실물로는)는 빼앗아 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 사건 이후, 더 어려워진 것은 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야곱이다.

 

야곱은 이 일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다. 고향을 떠나는 일이 쉬운가? 집 떠나면 고생이다. (이민자인 우리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지 않는가?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힘들게 사는가? 서로 위로해 주라. 충청도 사투리로, 고생이 많아유~) 야곱은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만나 적도 없는 하란 땅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친다.

 

장자의 명분과 복을 차지한 야곱과 그것을 빼앗긴 에서의 삶이 어떻게 다른 지 보자. 대표적인 예로 결혼 문제를 보라. 이삭은 야곱에게 가나안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왜 그런지는 위에서 언급했다. 야곱은 아버지의 당부를 지킨다. 그런데, 에서는 지키지 않는다.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에서는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래서 그는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 한다.

 

야곱은 계속 말씀 위에, 복 위에 있고, 에서는 계속 거기서 벗어난다. 결정적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만난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13).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약속은 땅과 자손의 복, 그리고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바로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칭하고, 거기에서 제단을 쌓는다. 예배 드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한다. 서원이란 하나님과의 신실한 약속을 말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20-22).

 

위대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많은 명언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으로서 가장 위대한 도전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극복을 위한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복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야곱이 장자의 명분과 복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저절로 장자가 되고, 복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자와 복은 소망이고 약속이다. 야곱에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서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곱의 위대함은 조지프 캠벨의 말 대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킨 것에 있다. 야곱은 원래 장자가 아니었고, 복을 받을 위치에 있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장자와 복에 대한 소망과 약속을 받고, 그것을 이루어 갔다. 차남으로 태어났고, 유약했고, 엄마 치마폭에서만 놀았던 야곱은 성경의 인물 중 가장 입지전적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소망대로 장자와 복을 일구어 낸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며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야곱이 받았던 약속과 소망을 똑같이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여러 민족, 여러 사람 중에 장자이며, 하나님의 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이렇게 주께 나아와 예배 드리는 이유는 야곱처럼 장자의 명분과 복을 믿기 때문이며, 힘들고 어렵지만, 그 약속과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멈추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장자의 명분과 복이 여러분에게 임한 줄로 믿는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 임한 줄로 믿는다. 약속과 소망의 말씀을 붙들고, 그 약속과 소망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서로 지치지 않게 격려하며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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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6. 13:54

소금과 빛과 의

(마태복음 5:13-20)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백미라고 불린다. 지금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인류의 삶 곳곳에 베어 있어 그 가르침의 놀라움이 많이 퇴색되어 있지만, 그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많이 들어봐서 낯섦이 덜 할 뿐,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일은 쉽지 않다.

 

일례로, 산상수훈의 첫 가르침은 에 관한 것이데,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과 우리들이 생각하는 복 사이에 많은 차이를 보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1) 심령이 가난한 자, 2) 애통하는 자, 3) 온유한 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이다.

 

유교사상 아래 있는 동양국가에는 오복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 장수하는 것, 2) ():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것, 3) 강령(康寧):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 4) 유호덕(攸好德): 도덕 지키기를 좋아하는 것, 5) 고종명(考終命):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하면 대개 두 가지를 꼽는다. 물질적 부와 건강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를 맞아 세배를 할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서 서로 물질적 부와 건강을 빌어주는 덕담을 주고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보면,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행복)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한다. 명예, 자식, 외모가 그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유교사상이나 서양의 헬라철학사상에 얼마나 물들어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요즘 세상에서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같은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보취급 받는다. 요즘 세상은 자신의 행복 또는 성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 대해 인정사정 안 봐주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처럼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아 먹는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고, 묵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한다. 물론 절대자에 대한 기복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우선적으로 알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소망이 없고 모르는 자는 결코 1) 심령이 가난한 자, 2) 애통하는 자, 3) 온유한 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자는 참된 복,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복을 사모할 수 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키워드는 세 가지이다. “소금, , 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소금, , 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모두 어떤 현실을 가르쳐 주는 메타포이다. 우리는 빛과 소금에 대하여 많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빛과 소금이 무엇을 뜻하는 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는다. 왜 예수님은, 또는 성경의 저자는 소금과 빛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아이텐티티(정체성)를 말하는 것일까?

 

먼저 소금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성경에서 소금에 대한 이야기는 출애굽기와레위기에 처음 등장한다. 우선 각각의 말씀을 보자.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 30:35)”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2:13).

 

출애굽기 30장은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다. 성막(지성소, 성소, 바깥뜰) 중 성소에는 분향단을 설치하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그때 향을 만들고 그것에소금을 쳐서 성결하게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소금은 일차적으로 성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레위기 2장은 5개의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중 소제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소제(Grain Offering)는 곡식을 빻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소제를 드릴 때는 소제물에 다른 첨가물(누룩이나 꿀)을 넣으면 안 되고, 반드시 소금을 넣어야 한다.

 

누룩은 실제보다 부풀리는 데 사용된다. 꿀은 달콤하지만 불에 타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 누룩은 자기과시, 과장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꿀은 달콤하지만 시험이 오면 악취를 내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불에 타면 유향처럼 향기를 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꼭 이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번제는 일차적으로 죄 사함을 위해 드려지는 제사이다. 그런데, 소제에는 죄 사함의 의미가 없다. 소제는 다른 제사와 더불어 함께 드려지는 게 일반적인데, 왜 그러냐면, 소제는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믿음으로 신실하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제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제에는 다른 무엇이 아닌 소금이 들어가는 것이다. 소금은 불변성, 방부성,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실함(변함없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소금 언약이라고 부른다. 소금 언약을 말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은 두 군데이다. 첫째는 민수기 1819절 말씀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18:19). 둘째는 역대하 135절 말씀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 13:5).

 

신실함(변함없음)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로, 빛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이 말씀은 이 단어 때문에 굉장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착한 행실이 그것이다. 여기서 착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칼로스인데, 이는 착한 또는 선한이라고 번역한다. 여기서는 착한 행실로 번역했지만, 요한복음 1011절에서는 선한 목자라고 번역한다.

 

착한 또는 선한은 매우 신학적인 용어이다. , ‘착한 행실은 사람들 보기에 착한 행실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행실을 말한다. 일례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애를 태우신다. 이게 요즘 계산법으로는 안 맞는 수지타산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한 행실이 아니라, ‘멍청한 행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착한 행실이다. ? 한 사람이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한 생명쯤은 헌신짝처럼 보는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마음이다.

 

세상의 이 된다는 것은 남들(사람들) 보기에 착한 사람 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라는 단어 또한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메타포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이러한 모습, ‘소금과 빛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이 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 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가 잘하는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신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외적인 의즉 외형주의에 그쳤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내적인 의이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잘 지켰다. 그런데, 그들은 외형적으로만 그 말씀을 지켰다. 살인만 안 했지, 마음 속에는 미움이 가득했다. 물론, 살인을 외형적으로 하지 않는 것 자체도 중요하다. 그러나, 마음에서는 미워 죽겠는데, 마음으로는 백 번도 더 죽였는데, 살인만 안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살인만 안 했지, 그 앞에서 또는 안 보는 데서 상대방에 대하여 라가(Raka, 심한 모욕을 주는 욕)’라고 하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남을 미워하면 죽음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무디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100명 중 1명은 성경을 읽고, 99명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증언으로 그들이 이끌리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개 우리들,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과 의를 세상에 보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런 말씀을 듣고, 스트레스가 확 밀려오는 지 모르겠다. 사실, 이것은 육신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으로서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born again)’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실성,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는 일은 어렵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매우 자연스럽게 소금과 빛과 의를 세상에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born again)는 미움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는 정욕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는 원수까지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영원하신, 그리고 신실하신, 참된 복이시고 행복이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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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3. 19:35

아브라함과 가나안 땅

(창세기 12:1-9)

 

창세기 11장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하란 땅에서 죽는 것으로 끝난다. 데라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이다. 그 중에서 하란은 롯을 낳았는데,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일찍, 우르에서 죽었다.

 

데라의 둘째 아들 나홀은 우르에 남고자 했던 것 같다. 데라는 아브라함과 아버지 없는 손자 롯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 땅으로 간다. 성경은 데라와 그의 가족이 겪은 인간적인 감정을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미루어 짐작하건데, 자식을 잃은 상심이 매우 컸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데라가 우르를 떠나 정착하게 된 곳을 하란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데라가 우르를 떠나 원래 가고자 했던 곳은 가나안이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하란 땅에 머물러 살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하란 땅은 우르와 함께 달을 숭배하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데라가 우상을 숭배하던 하란에 그의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는 기록은 그의 어두운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 (두란노 주석 참조)

 

11장의 아브라함 가족 이야기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준다. “사래는 임신을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11:30). 먼저 죽은 데라의 셋째 자식 하란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둘(밀가, 이스가)이 있었다. 그런데, 장남인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향년 205세에 하란 땅에서 생을 마감한다. 아마도, 먼저 죽은 막내 아들을 그리며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란 땅을 떠나지 않았던 것일 거다.

 

12장에 들어서면, 이야기의 초점이 아브라함에게로 옮겨간다.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떠나.. 가라이다. 이는 너 스스로 가라”, “너 자신을 위해 가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의 떠남은 자발적인 동시에,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순종이라는 것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희생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브라함이 떠나야 하는 곳은 세 가지로 표현된다. “너의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 그리고 그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표현된다. 떠나야 할 것은 확실한데, 도착해야 할 곳은 불분명해 보인다.

 

사실, 이게 함정이다. 인간의 심리는 확실한 것에 거하고자 한다. 보장된 유익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은 보장된 유익이고,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떠나, 불분명한 곳, “하나님이 보여 줄 땅으로 떠나야 한다.

 

그런데, 그의 떠남은 보장된 모든 유익에서 떠나는 것, 손해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종은 그런 것이 아니다. 순종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신다.

1) 큰 나라를 만들어 주겠다.

2) 너에게 복을 주고 너의 이름을 크게 하겠다.

3) 네가 복덩어리가 되고,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첫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사래)가 불임 상태에서 주어진 약속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 땅을 떠난 이유는 두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동생의 아들이라 큰 아버지인 자신이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둘째는 자식이 없는 자신의 가정에 조카 롯을 아들 삼기 위함이다. 아마, 이 둘 다 이유였을 것이다. 나중에 보면, 아브라함을 아들이 계속 안 생기자 롯을 실제로 자신의 유업 이을 자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떠나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모든 유익을 버리는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에게는 이익이다. 순종해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면 거기에서 많은 자식을 얻어 큰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과 관련된 약속을 해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3). 이것은 아브라함의 교만의 요소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교만해지기 십상이다. ‘나 건드려봐! 하나님이 가만히 안 놓아둘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이 말씀은 복과 저주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을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이후의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어떻게 지키시는 지 보게 된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 애굽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아리따움에 반해 그녀를 취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정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려 그 위기를 모면하게 하신다. 위기만 모면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얻어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도록 복을 내리신다.

 

순종은 하나님과의 거래(Deal, 또는 Business)가 아니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고 믿음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뻐함이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핵심 포인트는 4절과 5절 말씀에 있다. 먼저 5절 말씀을 보면 이렇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일단 떠났다. 하나님은 그가 떠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이 그것이다. 그는 그곳을 떠났다. 이것만 해도 정말 잘 한 것이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는 떠나는 것 조차도 못한다. 죄가 관영한 곳에 머물며 영혼이 죽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 떠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우울하게 죽어간 곳, 그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곳 하란을 마침내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떠난 아브라함이 어떤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느냐 이다. 데라가 가족을 데리고 우르를 떠날 때 그의 목적지는 원래 가나안이었다. 그런데, 그는 도중에 자신의 어두운 영적 상태와 어울리는 하란에 그만 주저 앉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시하신 목적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신앙인은 이 구절을 보며 마음이 조마조마해야 한다. 과연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보여 줄 땅,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까? 5절은 이렇게 전한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사실, 여기에서 박수와 아멘이 쏟아져야 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 바울에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에게 회심했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서려는 것을 보며 이렇게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2-3). 그러면서 아브라함을 증거 삼아 이야기 한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자. 우리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이고, 도착해야 할 하나님이 보여 주신 곳()’은 어디인가? 성경은 일차적으로 공동체에 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공동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이고, 반드시 도착해야 할하나님이 보여 주신 곳은 어디인가?

 

우리 교회 공동체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너무도 자명하다. 지난 몇 년 간 교회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했던 과거의 시간에서 떠나야 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성령을 떠난 육체의 일을 이렇게 말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5:19-21).

 

물론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분명 회개해야 할 일도 있겠지만, 사도 바울이 열거한 육체의 일 중, 많은 것들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교회 공동체를 지키신 분들은 참 대단하신 분들이다. 여러분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시라.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려 했던 수많은 날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대견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라.

 

교회 공동체가 왜 어려움을 겪는가?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 떠나야 하는가? 교회를 떠나면 되는가? 주님의 몸인 교회를 왜 떠나는가? 우리가 떠나야 할 것은 교회가 아니라, 육신의 일이다. 교회에서 잘 발생하는 육신의 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 등과 같은 것에서 떠나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육신의 일을 떠날 생각은 안 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우리는 떠나야 한다. 과거의 그 어려웠던 시간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 육체로 마칠 수 없다. 갈라디아에서 제시하고 있는 가나안 땅’, 즉 성령의 열매는 이렇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느니라”( 5:22-24).

 

우리는 아브라함이다. 우리는 아브라함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래서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성령으로 시작한 일, 끝까지 성령으로 마치는 은혜가 우리 교회, 아브라함 공동체에 임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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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30. 19:17

라마 나욧 같은 교회

(사도행전 6:1~7, 사무엘상 19:18~24)

 

역동적인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66권의 성경 중 사도행전만큼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성경도 드물다.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나면 메너리즘에 빠지고 원치 않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잘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때마다, 우리는 멈추어 서서,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면밀히 살펴 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초대교회도 처음에는 매우 순탄하게 성장하는 것 같았다. 예수님의 승천 후,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120 여명의 열 두 사도와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능력에 힘 입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복음을 힘차게 전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투옥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했다. 가는 곳 마다 거침 없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했고,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도 고쳐주는 기적을 베풀었다. “금과 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은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내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능력인 줄로 믿는다! 삶에 어려움이 있거든, 능력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라!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일어날 줄로 믿는다!

 

초대교회의 절정은 432절 이하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4:32-35).

 

무서운 광경이다. 요즘, 이단들이나 하는 일이,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일어났다. 신천지에 빠져서 재산을 탕진하고, 남편과 자식들까지 모두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요즘에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종말론적 신앙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분별이 필요한 말씀이다.

 

아무튼, 이렇게 무섭게잘 성장하던 초대교회에 어려움이 닥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어떻게 교회를 어렵게 했는지,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 한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이는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3-4).

 

6장에 가면, 초대교회는 또다른 어려움을 만난다. 우리가 읽은 말씀이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교인이 많아졌다는 뜻은, 그만큼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 하던 일 중에 구제 사역이 있었다. 과부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옛날 과부는 먹고 살기 정말 힘들었다. 성경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회적 약자 삼인 방(나그네, 고아, 과부) 중 하나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이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 중심의 교회였다. 그렇다 보니, 구제하는 일에 히브리파 과부들이 헬라파 과부들보다 더 잘 챙김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헬라파 과부들의 마음이 상했다. 누구든지, 어떤 이유에서든 차별 받으면 마음이 상하는 법이다.

(일례로, 배식을 하는데, 히브리파 과부 식판에는 찡긋이 윙크하며 고등어 몸통 부분을 놓아주며 맛있게 드세요!’하면서, 헬라파 과부 식판에는 고등어 대가리나 꼬리 부분을 놓아주며 본 척 만 척 하면, 마음이 안 상하겠는가!)

 

무엇이든지, 몰입을 방해하는 3가지의 요인이 있다. 안정성의 위기, 의미의 위기, 활력의 위기가 그것이다. 이것을 신앙에 대입해 보면,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도 다르지 않다.

 

안정성의 위기란 이런 것이다. 직장에서 언제 잘릴 지 모르면, 그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게 쉽지 않다. 예전에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한국을 강타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명 대사가 나온다. “회사는 전쟁터이지만, 밖은 지옥이다.” 미생은 지옥으로 떠밀리지 않으려고 전쟁터 같은 회사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계약직 직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몰입이 떨어진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이니까, 신앙에 몰입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꾸어 가야할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든든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임무이다. 교회 안에서 다툼이 있고, 차별이 있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면 안 된다.

(<시골교회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읽다 보니까, 시골의 한 교회 목사님이 동네 부녀회 회원들이 교회 일을 잘 도와주어서 교회가 잘 세워져 나가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동네 부녀회 회원들이 교회를 도와주는 이유가 자기들이 안 도와주면 교회가 망할까 봐 불쌍해서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그래서 세상을 걱정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도움을 주는 든든한 교회를 만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사람도 보면, 어떤 사람은 걱정시키는 사람이 있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걱정시키는 사람은 안정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걱정해주는 사람은 안정성을 확보한 사람이다. 이렇듯,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겠는가? ‘걱정시키는 교회’? 아니면, ‘걱정해주는 교회’? 우리는 할 수 있다. Yes, we can!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의미의 위기이다. 의미의 위기는 지금 현재 이 일을 왜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위기도 여기서 온 것이다. 그들이 왜 구제사역을 시작했는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의미를 잃어버리니까,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을 차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춘기 때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이 의미이다. ‘나는 누구니? 나는 왜 살지?’ 사춘기 때는 엄청 고독하다. 그러면서 성장한다. 사춘기를 보내면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인생이 참 힘들어진다. 부모나 선생님은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들이 다른 무엇보다 삶의 의미를 스스로 잘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의미의 위기가 와서 신앙의 몰입이 안된다. “내가 지금 왜 교회에 나오고 있지? 내가 지금 교회에서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이것에 대한 확실한 의미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지 않으면, 신앙의 몰입은 굉장히 힘들다.

 

오바마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한 어느 인터뷰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독서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독교인에게 의미는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고대교회 교부였던 제롬은 이런 말을 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여 신앙의 의미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오늘 말씀 7절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의미를 충만히 찾아가는 교회를 세워가자.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세 번째 위기는 활력의 위기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가 구제사역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유가 정확히 나온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2). 제자들이 말씀도 전하고 구제도 하고, , 이것저것 하느라 너무 분주하다 보니, 이것도 제대로 못하고, 저것도 제대로 못해서 결국 활력을 잃은 것이다.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것이다. “과도한 업무에 몸과 마음이 지쳤다.”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도 마찬가지다. 교회 사역을 과도하게 하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지친다. 사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이 행한 일이 바로 일곱 명의 집사를 세운 일이다. 교회는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누구 하나의 헌신으로 세워가는 곳이 아니다. 공동체는 더불어 함께 하는 곳이다. 요즘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헌신이 몇몇 사람들에게만 집중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큰 교회에 몰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큰 교회 가면 헌신 안 해도 되니까. 앉아 있으면 다 해주니까.

 

갈라디아서 6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의 법은 혼자서 성취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짐을 질 때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서로 짐을 질 때 교회는 활력이 생긴다.

 

우리가 이제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세워 나가야 할 교회는 안정성 있는 든든한 교회, 세상을 걱정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로해 주는 교회, 그리고, 지금 왜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아는 교회, 또한, 서로 짐을 지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 나가는 활력 있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한 마디로, ‘라마 나욧 같은 교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나와 여러분이 함께 꿈꾸고 세워 나가야 하라 교회의 비전이다. 사무엘상하의 말씀은 다윗 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 중에서 19장은 다윗을 시기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라마 나욧이라는 곳으로 도망친다. 그는 그곳에서 선지자 사무엘과 함께 은신하여 생활한다. 그때도 정보 기관이 있었다. 사울은 정보통을 통하여 다윗이 라마 나욧에 은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전령(특공대, 델타포스, 네이비실)을 보낸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울의 전령들이 라마 나욧에 이르면 이상하게도 그들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 잡혀 갑자기 예언을 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전령들은 다윗 죽이기라는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그들의 삶이 변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세 번 연거푸 벌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울 왕이 직접 간다. 그런데, 사울 왕에게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도 라마 나욧에 도착하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런 속담도 생겨났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 교회만 오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교회! 성경의 말씀이 성취되는 교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우리 모두 열심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나가며 연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라마 나욧같은 교회를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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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6. 11:08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8~2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진술이 가장 중요하다. 이 진술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뜻과, 하나님의 뜻에 종속된다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부정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다. ,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모두 선하다(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어떠한 이유에서 건 미워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죄의 개념이 생긴다. 죄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과 3장의 언어로 다시 옮기자면, 죄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해 보자.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지 판단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는 선악의 판단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악이다.

 

(어제 최순실이 특검에 출두하면서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자백을 강요하고 있어요!” 이 뉴스를 접하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페이스북에 한 마디 남겼다. “그러면 자신이 한 짓은 민주주의인가?”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자신에게 불리하면 악이 된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했다는 데 있다. 그들에게 선은 '내 욕망의 성취'일 뿐이며 욕망이 성취되지 않고 좌절되면 그것이 악이다. 죄는 선과 악의 기준이 사사로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악이 판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과 악이 사사로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선을 선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으로 규정한다. 이제 인간은 악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이게 바로 죄이다.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가 나온다. 몹시 배고픈 여유가 길을 가다가 포도나무를 발견했다. 여우는 포도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포도를 따먹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포도가 너무 높이 달려서 결국 그것을 못 따먹었다. 여유는 포도 따 먹는 것을 단념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 포도는 분명 신포도일거야!”)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나는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리할 때는 따먹고 싶은 맛 있는 포도였다가, 자신에게 불리하고 따먹지 못하게 되니까 신포도가 되는 것이다. 포도는 그대로인데,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위치냐에 따라서 그 포도의 선과 악이 갈린다.

 

결국 동산 중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된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져처음 본 것은 자기들이 벗은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보였다는 뜻이다. , 자기애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나스키소스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그 이야기에서 나르시스즘이 생겨났다.

 

(나르키소스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모습에 매료되어 결국 우물에 빠져 죽는다. (이 외에도 여러 판본이 있다. 그것이 우물에 비친 모습인 것을 알고, 굶어 죽었다는 판본, 또는 자살했다는 판본) 나르키소스의 뜻은 또는 무감각이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잠을 자는 것처럼 죽은 모습이고, 자기 이외에 타자 또는 사물에 대하여 무감각해진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해져 자기 자신 밖에 안 보인다.)

 

죄에 빠지면, 즉 선악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애에 충만해지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불화와 두려움과 죄의식과 핑계가 그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거니셨다. 그들이 죄 짓기 전에는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숨는 행위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들은 죄의식을 느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가 그것이다. 죄를 짓기 전에 그들은 벗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즉 죄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핑계를 댄다.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죄를 전가 시킨다. 이들이 왜 이렇게 핑계를 댈까? 자기애 때문이다. 자기 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것도 선과 악에 대한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다. 선과 악의 판단이 사사로워진 것이다. 자기는 선하고, 남은 악해 보이는 것이다. 아니, 자신은 선하게 판단하고, 남은 악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자기는 잘못 없고, 남이 잘못한 것이다.

 

이게 참 비극이다. 왜 그런가? 아담과 하와가 어떠한 관계인가? 2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시고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어 주신다. 하나님은 잠이 든 아담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이끌어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돕는 배필을 보고 아담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가 결혼식 때 선포하는 말씀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죄가 들어가니까 아담에게서 하와가 분리된다. 이들은 더 이상 한 몸이 아니게 된다. 아담은 자기 살겠다고,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아내를 팔아 먹는다. 이런 현상이 하와에게서도 발견된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자신은 선한 것으로 판단하고, 뱀은 악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보았듯이,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31절에서도 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죄란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부정하게 한다. 죄는 선한 것을 악하게 만든다.

 

죄는 결국 불화를 조장한다. 죄가 없을 때는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 모든 것이 불화가 조성된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하와와 뱀, 즉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구원이란, 화해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이 말씀에서부터 시작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 화해란 다른 말로 해서, 자기애 때문에 자기 자신만 보던 눈을 나 아닌 다른 피조물(타자)에게로 돌리는 것, 피조물을 넘어 나를 지으신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구원이란, 화해란, 주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물으실 때 숨어서 자기 자신만 보는 게 아니라,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서 그들을 돌보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뵙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회 공과 3과에서 묻는) “네가 어디 있느냐?”의 질문은 위치 정보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존재 정보를 묻는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구글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필요한 것이다.) 불화 가운데 있냐, 화해 가운데 있느냐.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 있느냐, 나 몰라라 하고 있느냐.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뵙고 있느냐, 숨고 있느냐.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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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6. 11:06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

(고린도전도1:10-18)

 

에큐메니컬 주일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

 

요즘 굉장히 이 용어가 오해 받고, 잘못 쓰인다. 복음주의의 반대인 것처럼 쓰인다. 그래서 복음주의 진영(WEA)과 에큐메니컬 진영(WCC)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복음주의는 예수만이 구원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보수주의고, 에큐메니컬은 예수 외에 다른 것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진보주의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2013 WCC 총회가 한국 부산에서 열렸을 때 한국의 보수교단에서는 WCC 총회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오해고 무지에서 비롯된 웃픈일이다.

 

에큐메니컬의 진정한 의미는 복음을 위해’ (분열된) 교회가 연합하고 일치를 이루자는 뜻이다. 공산당처럼 커다란 한 덩어리 조직을 만들자는 의미가 아니다. 연합기구를 만들어서 무슨 조직처럼 힘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계속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교회는 예루살렘교회가 효시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유대교의 한 분파였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고스란히 지키며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면서, 유대교 율법과 전혀 상관 없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율법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문화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유학 와서 에모리에서 수업 듣는데, 재채기 하면 옆 사람이 왜 그랬슈?”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왜 그랬슈가 아니고, ‘갓 블레슈였다. 미국인들은 재채기 하면 영혼이 날아간다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갓 블레슈해준단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다. 우리는 그저 재채기를 시원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채기는 힘차게 해야 제 맛이다. 이처럼, 문화가 다른 사람한테,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예루살렘 모교회에서 분리된 교회가 안디옥 교회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모교회이지만 유대인들이 주를 이룬 교회였고,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들이 주를 이룬 교회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의 한 분파로 머물지 않고, 완전히 분리되어 하나의 종교가 된 것은 이방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다. 그러한 일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사도 바울이다. 일부러 분열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유대인들 중심의 복음서이지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이방인들 중심의 복음서이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의 복음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이방인들(헬라철학)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용어들이다. (로고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 없이 많은 교회의 분열이 있었다. 그 중에는 곱틱교회와 영지주의 교회도 있다. 곱틱교회는 쉽게 이집트교회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는 곱틱어를 썼는데, 그 때문에 고틱교회라 불린다. 이들은 단성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라는 주장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정통교리는 양성론을 주장한다. 이는, 예수는 100% 인간, 100% 신이라는 주장이다. Vere homo, vere deus라고 한다.

 

영지주의 교회의 실체는 이집트의 나그함마디라는 곳에서 발견된 문서 때문에 주목을 받았는데, ‘나그함마디 문서는 복음을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한 문서를 말한다. 이집트 곱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사해문서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발견 중 하나라고 불린다.

 

그 이후, 교회는 계속 분열한다. 가장 유명한 분열은 1054년에 있었던,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의 교회 간의 분열이다. 이것을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뜻이다. 그 당시, 동로마제국의 교회와 서로마제국의 교회는 성령이 어떻게 발출하느냐는 논쟁이 한창이었다. 동로마제국의 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발출한다고 주장했고, 서로마제국는 성령이 성부와 그리고 성자로부터발출한다고 주장했다. 서로의 입장을 받아들이 수 없는 나머지, 서로의 교회는 서로를 파문한다. 즉 서로 이단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분열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바, 1517년 로마가톨릭교회는 또 한 번의 분열을 겪는다.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태동인 종교개혁이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년 되는 해인데,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 중이다.

 

개신교는 그 이후에 엄청난 분열을 겪는다. 루터의 신학을 따르는 루터교가 생겼고, 칼빈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개혁주의(우리가 잘 아는 장로교)가 생겼고,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 때문에 생겨난 교파가 바로 영국의 성공회이다. 앤 볼린이라는 여인을 사랑한 헨리 8세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캐서린과 이혼한다. 그것을 교황청이 인정해주지 않자,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하여 만든 교회가 성공회이다.

 

영국의 성공회 신부로서 18세기 타락한 영국사회를 변화시킨 메토디스트 무브먼트(Methodist Movement)를 일으킨 존 웨슬리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감리교회다. 원래, 존 웨슬리는 메토디스트 무브먼트를 영국 성공회에 남아서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운동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하나의 교단이 되었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크고 발달되어 있다.

 

한국에 개신교는 1884-5년에 들어왔는데, 미국 북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교회의 아펜젤러가 함께 인천 제물포 항을 통해서 들어왔다. (누가 먼저 땅을 밟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정황을 미루어 보아, 아펜젤러 목사가 먼저 한국 땅을 밟았을 거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아펜젤러 목사는 결혼한 상태여서 부인과 함께 왔다. 미국의 Lady First 문화를 생각할 때, 아펜젤러가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을 것이다.) 아펜젤러는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갔다.

 

이 둘이 서울에 세운 첫 교회가 각각 새문안교회(장로교)와 정동제일교회(감리교)이다(1887). 그후, 한국 감리교는 분열을 안 하는데, 한국 장로교는 수도 없이 분열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WCC 가입 문제로 예장통합(장신대)과 예장합동(총신대)이 나뉜 것이다. 그 후로, 현재 한국의 장로교는 200여개 넘는 교단으로 나눠져 있다.

 

개괄적인 역사를 통해 교회가 어떻게 분열되었는지 살펴보았지만, 교회의 분열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위협으로 다가왔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대표적으로 그것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의하면, 고린도교회는 크게 네 개의 파벌이 존재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베드로파), 그리스도파.

 

이들 파벌은 모두 특징이 있다. 바울파는 유대교 율법주의와 전통적인 헬라 철학 사상에 거부감을 가졌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볼로파는 학문적 성향이 강해서 철학과 수사학을 중요시했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마 이들은 설교 잘하는 목사를 좋아했을 것이다.) 게바파는 유대교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마 율법 전통을 중요시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파는 쉽게 말해 중도파, 또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파였을 것이다. 특정 인물에게 속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그룹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이들은 성령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직접 교제하는 삶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름으로 볼 때는 가장 정통 같지만, 성향으로 볼 때는 이단적인 경향이 가장 강한 분파이다. 직통계시 같은 거 하는, )

 

이러한 분파 때문에 고린도교회는 근본적으로 시끄러웠다. 교회가 시끄러운 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제다. 그러니, 교회가 시끄러운 것 가지고 너무 낙담할 필요 없다. 오히려, 안 시끄러운 게 이상한 거다. 교회가 시끄러운 거 가지고 낙담하고 시험에 드는 사람은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잘 모르고, 성경을 잘 모르는 것이다. 교회가 시끄러운 거 가지고 너무 낙담하지 말고 너무 시험에 들지 마시라. 원래 사람이 모이는 곳은 다 시끄러운 법이다.

 

다만, 에큐메니컬 주일을 맞아,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얻었으면 좋겠다.

 

고린도교회의 분열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 핵심은 이거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따라해 보자.

 

그런데, 이게 가능한가?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게 인간인가? 우리가 프로그래밍된 로봇이 아니라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공산당원인가? 우리가 김일성 어버이 수령님 모시는 북한 주민인가? 도대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게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일차적으로, 이들의 분열은 단순히 파벌 문제가 아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성경에 정경으로 채택된 복음서도 4개나 된다.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복음서도 엄청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언급한 영지주의 문서(나그함마디 문서)도마복음서이다. 중국집에 가면, 짬뽕 먹고 싶은 사람이 있고, 짜장면 먹고 싶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어야 하니까, 우리가 함께 중국집 가면 짬뽕이든 짜장면이든 하나로 통일해서 먹어야 하는가?

 

본문에서 쓰인 분쟁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스키마이다. 이는 , 간격, 분열, 불화를 뜻한다. , 어떠한 이슈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서로 미워하는 것(불화)’이 문제인 것이다. 중국집 갔는데, 짬뽕 먹는 사람이 짜자면 먹는 사람보고, 짜장면 먹는다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짬뽕을 안 먹고, 짜장면을 먹어? 이 상종 못한 놈!”이러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쓰인 합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다르티조이다. 이것은 원문에서 분사 완료 수동태의 형태(과거의 한 시점 표현)로 쓰여졌는데, 이는 그들이 분쟁 이전의 온전했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을 바라는사도 바울의 마음을 담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합하라라는 말은 짬뽕 먹을지, 짜장면 먹을지 통일해서 한 가지만 먹어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리고 이것은, 서로 양보해서 그냥 모두 짬짜면먹으라는 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짬뽕 먹는 사람은 짜장면 먹는 사람을 인정해주고, 짜장면 먹는 사람은 짬뽕 먹는 사람 인정해 주라는 뜻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왜 먹느냐는 것이다. 중국집 가서, 짬뽕 먹는 사람이나, 짜장면 먹는 사람이나 왜 그것을 먹는가? 짬뽕을 좋아해서? 아니면 짜장면을 좋아해서?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이 중국집 가서 짬뽕이든 짜장면이든 먹는 이유는, 배고파서이다.

 

, 그리스도인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아주 근본적인 것, 십자가의 도 때문이다. 에큐메니컬이란 그런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위해서 서로 연합하고 일치하는 것이다.

 

엘까미노 리얼에 있는 옛날 짜장면집에 가서 우리 모두가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서로 묻는다. ‘여기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묻는 거 자체가 참 이상한 일이다. 중국집에 왜 왔겠는가? 식당에 왜 가나? 배고프니까 가는 거다. 그런데, 밥을 먹다 보니, 김 집사가 내가 먹는 짬뽕을 안 먹고, 짜장면을 먹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가서 따진다. ‘당신 왜 짬뽕 안 먹고 짜장면 먹어? 정말 웃겨? 웃기는 짬뽕이네!’ 그러면서 둘이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갈라선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렇게 물어보자. 교회에 왜 왔는가? 교회 와서 서로에게 여기 어쩐 일이세요?’라고 물으면 정말 이상한 것이다. 교회에 왜 왔는가? 오늘 말씀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십자가의 도때문에 우리 모두는 교회에 온 것이다.십자가의 도를 위해서, 연합하고 일치하고,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것이 주님의 뜻 아니겠는가?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은 복잡한 개념이 아니다. 어떤 이념처럼 생각하지 말라. 복음주의 진영, 에큐메니컬 진영, 이런 큰 개념을 생각할 것도 없다.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의 도를 위해서 서로 연합하고 일치하고 협력하고 양보하고 용서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다. 다른 생각을 갖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문제다.

 

짬뽕 좋아하시는 분? 짜장면 좋아하시는 분? 짬뽕 좋아하시는 분들만, “짜장면 맛있게 드세요!” 짜장면 좋아하시는 분들만, “짬뽕 맛있게 드세요!” 다 같이 따라해 봅시다. “우리, 탕수육 같이 시켜 먹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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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6

창조와 신앙

(창세기 1:1-5)

 

요즘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성경과 관련된 배경지식이 엄청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창세기의 말씀만 해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전된 창조신화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아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통치하던 지역의 문명을 말한다. 요즘의 이란, 이라크 지역이다. 그 지역에서 발전된 문명을 이해하지 않고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 요즘 학계의 정설이다.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는 세계적으로 많은 발견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와 관련된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를 담고 있는 에누마 엘리쉬, 구약성경의 최고본인 사해사본’, 그리고 영지주의 문서인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가 그것이다.

 

이 문서들은 20세기 성서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에서 에누마 엘리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잠깐 살펴보면 이렇다.

 

위로 하늘이 아직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고 아래로 땅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을 때 태고의 압수, 그들의 아버지, 그리고 그들 모두를 낳은 모체, 티아맛이 그들의 물을 하나로 섞고 있었다. 그때에는 들판도 형성되지 않았었고, 갈대밭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신도 나타나지 않고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았고, 운명도 결정되지 않았을 때 신들이 그들 가운데서 창조되었다.

 

에누마 엘리쉬를 보면 마르둑과 티아맛이라는 신들이 등장하는 데, 그 이야기에 의하면 세상은 이 두 신의 전쟁을 통해 창조된다. 창조와 질서의 신 마르둑이 혼돈의 신 티아맛을 물리치며 탄생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마르둑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했다. 마르둑을 통해서 그들은 세상의 지배를 꿈꾼 것이다.

 

많이 알려진 대로,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기 때 문서화되기 시작했다. 바벨론의 에 굴복된 유대인들(이스라엘)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자신들의 신, ‘야훼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 굴복된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이스라엘)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마도, 많은 이들(일반인들, 대중들)은 바벨론의 질서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바벨론이 힘에 의해 재편한 세상에 순응하면서 사는게 상책(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부류가 있었다. 특별히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그들을 P문서 그룹이라고 한다. P문서는 Priest, 즉 제사장 문서이다. 이들은 바벨론이 이 세상의 질서, 절대적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던 때에, 그들을 향해 “NO”를 외친다. 그들의 용감한 외침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은 태초에 마르둑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하며 세상 질서를 편입한 바벨론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이다.

 

이러한 일은 오랜 세월이 지나 또 한 번 일어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고, 헬레니즘 문명이 왔을 때, 세상은 로마라는 나라의 힘에 의해서 질서가 재편되었다. 그들은 그 세상을 팍스 로마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낸 이는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로 불렸다. 그는 온 세상의 신으로 불렸다. 그는 주피터(제우스) 신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았다.

 

그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이 생산한 문서 중에 복음서가 있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는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1-3).”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똑 같은 고백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창세기에서도 그렇고, 복음서에서도 그렇고, 이 세상은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고백이다. 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단순히 과학적 사실의 근거로만 삼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이 세상(하늘과 땅)에 대한 긍정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그냥 아무렇게 존재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존재는 신적인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는 거룩한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것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거룩하게 보지 못하고, 폄하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창조신앙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어떠한 면 때문에 그 존재를 무시하고 차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불경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 국제사회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IS 대원들의 테러를 보면, 그들은 테러를 저지르기 전에 알라 아크바를 꼭 외친다. 이는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뜻이다.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납득되는 일인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테러를 저지르면서 그가 예수는 위대하다, 예수 믿으세요!’라고 외친다면, 그것이 납득되는 일인가?  증오속에는 구원이 없다.

 

우리가 상대방(존재)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의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그 존재를 보면서 꼴보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떠한 존재(생명)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그 일 때문에 인상이 찌푸려지더라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때문이다. 자연재해나 질병, 인간의 이기심, 탐욕, 배신감, 잔악성 등은 세상을 선하게 바라보기 참 힘들게 하는 요소들 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일을 통해서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가? 바로 창조신앙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것 외에 우리가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은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창조되었다는 고백이 가지는 두 번째 의미는 세상의 절대화에 대한 거부이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살면서 그들의 힘과 문명을 경험하면서 바벨론 세계의 절대성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중 대부분은 바벨론에 동요되어 그들의 힘을 숭배하고 그들이 심어준 가치관에 순응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똑 같은 일이 로마제국 시대, 즉 예수님 시대에도 반복되었다. 유대인들(이스라엘)은 로마제국(황제)의 힘에 압도되어 그들에게 순응하면서 살았다. 지도자 그룹(사두개인)도 있지만 그보다 서민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사케오이다. 사케오는 로마의 세금징수법에 순응해서 그들의 세금징수원으로 살았다. 그것이 그의 삶을 안락하게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케오는 예수님을 만난 뒤 그러한 삶의 방식(로마제국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따라 살게 된다.

 

우리가 흔히 이렇게 행동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흔히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일례로, 요즘 부모들이 왜 그렇게 자녀들 교육에 신경을 쓰고, 자녀들을 소위 명문대에 들여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가? 그렇게 해야지만 자신들이 경험한 절대적인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수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때에 아버지와 함께 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재를 창조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구속되면 안 된다. 우리는 다분히, 현재 내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서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이것은 철저하게 기복신앙에 불과하다.

 

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인간이 보기에 좋은 것으로 바꿔 놓는 것이다(속회공과 2).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여기며,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못살게 구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한 고백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든 활동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어느 것도 무시하거나 차별하고 증오하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내가 경험하는 세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하는 세상에 함몰되어 그것이 절대적인 양 얽매이지 않는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창조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나와 우리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속회공과 2과 질문)”,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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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4

들으라

(신명기 6:4-9)

 

주룩 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오랫동안 비가 안 오다, 이렇게 비가 계속 오니, 사람들의 생활은 불편할지 모르나, 만물들은 얼마나 좋겠는가? 산들이 기뻐 푸르게 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푸르름은 그들의 기쁨이다.

 

아모스서의 이 말씀이 생각났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니리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12).

 

요즘 시대를 말해주는 말씀이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다. 요즘, 먹거리가 풍부하다고 그것이 인간의 건강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먹는 게 풍성해서, 오히려 비만과 암이 옛날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늘었다. 정말 안전한 먹거리를 우리가 생산해서 먹는가? 대기와 땅과 바다가 모두 오염되어 버렸는데?

 

요즘, 기독교 신자들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인터넷에 널린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가지고 말씀이 풍성하다고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만 늘었다. 육신의 건강이 먹거리가 풍성해져서 음식을 많이 먹는 데서 오는 게 아닌 것처럼, 심령의 건강이 설교말씀을 전자기기를 통해 아무 때나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데서 오지 않는다.

 

이렇게 물어보자. (속회공과 1과에서도 묻는 질문이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려고 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 자녀들에게 막상 신앙을 가르치려고 하면 걸리는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교회도 오래 다녔고, 말씀도 많이 들은 것 같 같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을 가르치려니,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들통날까봐, 말씀을 못 가르친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막상 가르쳐 놓으니, 아이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엄마, 말씀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되어 있는데, 왜 우리는 놀러가?”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가르쳐 놓으니, 아이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엄마, 말씀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는데, 왜 아빠, 엄마는 맨날 욕만해?” 사실, 이런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게 겁난다. 자기 자신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기갈이, 다른 게 기갈이 아니다. 요즘,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설교)말씀에의 접근성이 쉬워졌다 할지라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설교가 인터넷에 모아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다가와, 히브리서 412절의 말씀처럼, 나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못하고, 내 마음이 생각과 뜻을 주님의 생각과 뜻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말씀의 기갈을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풍성함에 빠져, 온전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말씀을 보면, 몇 가지 동사가 나온다. 처음에는 들으라(hear)’는 동사가 나온다. 그리고 사랑하라(love)’, ‘새기라(be upon your heart)’, 가르치라(impress), ‘강론하라(Talk about them)’, ‘(손목에) 매라(Tie)’, ‘(미간에) 붙이라(Bind)’, ‘기록하라(Write)’가 나온다. 이 동사들은 모두 일맥상통하는 단어들이다. 이중에서, ‘새기라는 것은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고,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것은 자녀에게 각인시키라는 뜻이다. 강론은 언제든지 말씀에 대하여 토킹라는 뜻이다.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세 가지를 잘 해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 듣는 행위는 귀로 하는 게 아니다. 듣는 행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말씀은 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머물러야 한다. 엔터테인먼트와 훈련의 다른 점은, 엔터테인먼트는 귀를 즐겁게 하지만, 훈련은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이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나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 말씀을 듣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하나님이 좌정해 계시는 곳)’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말씀을 듣는가! 누가복음 645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과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 들고,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않으려면, 우리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 아이들은 먹을 게 너무 많으니까, 음식 귀한 줄 모른다. 누가 먹을 것을 줘도 감사할 줄 모른다. 너무 흔해서 탈이다. 똑같다. 말씀에 대한 접근성이 쉬워지니까, 말씀 귀한 줄 모른다.

 

둘째로,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뉴스를 보니, 소비부진의 주범이 사교육비라고 한다. 한국 가정은 애들 공부시키기 위해 사교육비 지출을 최대한 확보하느라, 먹고, 입고, 노는 것을 다 줄인다고 한다. 고등학생 자녀 둘을 둔 가정에서는 사교육비가 한 달에 평균 500만원 정도가 지출된다고 한다.

 

그만큼 세상이 힘들어졌다는 뜻이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기 힘든 환경이라는 뜻이다. 대입시험에 성경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적으로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기회와 명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디모데 후서의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 시절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아이들 세대의 기독교인구가 줄어드는 이유는 아이를 덜 낳아서 인구가 감소된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씀의 기갈 가운데 사는지, 아니면 말씀의 풍요로움 가운데서 사는지를 판단해 보려면 현재 부모로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가정 일이니 일일이 알기는 힘드나, 여러분 각자가 판단해 보면 알 것이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또는 내가 지금말씀의 기갈이 아니라, 말씀의 풍성함 가운데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려면,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는 말씀은 바깥으로 보이는 행동을 말한다. 더욱이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써서 불이라는 말씀은 신앙을 드러내 놓는 것을 말한다.

 

마음 속으로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하면 뭐 하겠는가? 마음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사실 이게 가장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요한1서에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1 3:18).

 

<아빠의 한 시간을 사고 싶어요>라는 웹툰이 있다. 아이가 아빠한테 묻는다. “아빠, 아빠는 한 시간에 얼마를 벌어요?” “?” “그냥요!” “아빠는 한 시간에 20달러 벌어.” “아빠, 10불 있으세요?” “?” “그냥요, 뭣 좀 사려고요!” “쓸데 없는 것 사면 안 돼!” 얼마 후, 아이가 20불을 들고 아빠에게 왔다. “아빠, 20불 드릴 테니, 아빠의 1시간을 저에게 주실 수 있죠? 아빠랑 1시간만 놀고 싶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는 것 같지만, 실은 말씀의 기갈 가운데 살 때가 많다. 말씀의 풍요 가운데 산다는 것은, 1) 말씀을 듣는 것, 단순히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에 새겨서, 그 말씀으로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 2) 자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 3) 말씀대로 행하는 것, 이 세가지가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말씀의 풍요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기갈 가운데 있으면서 풍요롭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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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1

세례와 시험

(마태복음 3:13-4:11)

 

오늘은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다. 16일이 주현절인데, 주현절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드러난 일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세상에 드러나는 일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성경은 동방박사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에 드러났는지를 알려준다. 왕의 별을 보고 헤롯 대왕을 찾아가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냐고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세상에 드러냈지만, 그 일 때문에, 아기 예수님은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천사의 현몽으로 인해 위기를 모면한다.

 

주현절기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이 세상에 그리스도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이다.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은 누구인지 그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내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모순된 일이다. 세례는 일반적으로 죄 씻음의 행위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았다는 것도 굉장히 모순된 일이다. 시험은 일반적으로 연약한 피조물이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시험을 받으셨을까?

 

우선, 다른 이들이 세례를 받았던 이유와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던 이유에 차이가 있다. 다른 이들은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았지만,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은 이유는 15절 말씀 때문이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죄 씻음을 위한것이 아니라,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는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그 분의 뜻을 가리킨다. 그게 무엇인가? 구원이다. 예수님은 세례 받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이제 그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를 행하시는 분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건 사람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말하는데,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과 동일한 한계를 갖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표시이다. 세례는 단순히 죄의 씻김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 결단해야만 한다. 그 운명은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예수를 뜯어 말린 이야기를 보도한다. 그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례를 거부할 수도 있었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고, 십자가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 그런 유혹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했다. 그래서, 세례는 순종과 똑같은 말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 바로 뒤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세례를 통하여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세상에 정체가 드러나면 시험을 당한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서 많은 시험이 닥치는 것을 종종 본다. 조그마한 일에서 감당할 수 없는 큰 일까지 일어난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교회 가다 큰 사고를 당해서 두 딸은 잃은 분도 있다. 그분은 교회 가다 그런 일을 당해서 무서워서 더 이상 교회를 못 다니겠다고 말한다. 처음에 말했듯이, 예수님도 아기 예수 때 동방박사를 통해 세상에 정체성이 드러났을 때 죽을 위기에 처해졌었다.

 

교회 오는데 아무 일 없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적어도 여러분은 예수 믿는데 있어 마귀의 극심한 방해를 벗어난, 어느 정도 단계에 올라 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평생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시험 받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본다.

 

첫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배고플 때,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이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생각나게 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배고픔을 느끼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그들을 죽이려 한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면, 우리는 쉽게 신앙을 포기하려 든다. 그러한 유혹은 우리의 신앙을 끊임 없이 괴롭힌다. 그럴 때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둘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성전 꼭데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였다. 우리도 끊임 없이 이러한 유혹을 받는다. 특별히 예수를 잘 믿는 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오류이다. 주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수도 없이 하나님을 시험한다. ‘하나님, 내가 주님께 헌신했으니까, 나한테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요구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것을 안 들어 주면, 교회를 떠나겠다고 협박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 또는 헌신을 빌미 삼아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고,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늘 말씀에서도 나오지만, 시편 9111절과 12절에서 하나님은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신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편 91:11-12). 이것 뿐만이 아니다. 주님께서 해 주신 약속도 있다.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시험한다. 그러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세 번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이다. 예수님께 드리운 시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불의하지만 손쉬운 길을 택하느냐, 아니면 그 길을 단호하게 거부하느냐의 문제이다. 이스라엘은 끊임 없이 이러한 시험을 받았다.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신을 택할 것을 끊임 없이 유혹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이야기 이다. 그들의 제사장과 하나님의 제사장 엘리야가 한 판 대결을 벌이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이 아닌 것에 경배하도록 유혹 받고 강요 당한다.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자꾸 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이루어 보겠다는 놀부 심보에 불과하다. 그런 마음이 들면,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물어보자.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말 그런가? 정말로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인가?


사람은 무엇인가에 정신이 팔리는 이유는 그것을 할 때, 그것을 통해서, ‘살아 있다고 느끼지 때문이다. 마약하는 사람이 왜 마약하는가? 그거 할 때 살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돈 버는 데 미친 사람이 왜 돈돈하는지 아는가? 돈을 셀 때, 돈 냄새 맡을 때 살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라. 왜 그 일을 하는가? 그거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기 때문이 아닌가? (~ 살 것 같아.)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와 광야에서 시험 당하신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과 그 이후에 우리가 어떠한 일을 겪게 되는 것과 그 결과가 무엇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정체를 밝히면, 시험을 당한다. ‘저는 시험을 안 당하는데요라는 분은, 두 가지 중 하나다. ‘귀신이거나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거나.’

 

시험을 당하거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보다 먼저 시험을 당하신 주님께서 도우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1)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2)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3)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리의 구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온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했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를 세례를 받은 것이고, 시험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긴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것에서 구원을 경험시켜 주겠다고 하는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언제나, 어느 때든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만 구원이 있음을 선포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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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 16:57

세례 요한의 죽음

(마가복음 6:17-29)


이것은 피에타 상이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의 시체를 안고 있는 조각상이다. ‘피에타는 라틴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25세 때 제작한 작품이며,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새겨진 작품이다. 그 후로,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세상 어디에도 그분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는데…”라며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작품의 특징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보다 젊다는 것이다. 이는 신성한 처녀인 동정녀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이다.

 

지금, 어머니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했다. 자식을 잃었다. 피에타상을 바라보며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한 어머니 마리아에게 위로를 받으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신학적으로 비판 받는 일이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군가의 위로 없이는 살 수 없는 큰 슬픔을 저마다 안고 살아가는 가냘픈 생명이다.

 

죽음은 언제나 슬프다. 오늘 말씀도, 죽음이 등장한다. 세례 요한의 죽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례 요한의 죽는 장면을 볼 때다, 그의 탄생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더 큰 슬픔과 안타까움과 의문이 몰려든다. 물론, 마가복음에는 세례 요한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어쩌면, 마가복음만 읽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죽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덜 슬플 수도 있다. 그러나, 4개의 복음서를 받아 든 우리들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뒤늦게 아들(늦둥이)을 얻는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해 보라. 금이야 옥이야 키웠을 것이다. 특별히, 사가랴는 요한의 탄생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아들 요한의 탄생을 놓아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가까지 지어 불렀다. 그 중에서 아기 요한을 이렇게 말하는 장면은 가슴 찡하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니리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1:76-78, 80).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요한이 태어났을 때 너무 기뻤으며, 그가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존귀한 자라고 믿었다.

 

세례 요한이 죽을 때, 물론, 나이 많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요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들의 자식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는 것을 목격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허무한 죽음을 보면서도, 여전히 요한이 태어날 때처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릴 수 있었을까?

 

세례 요한의 죽음은 허무하다. 그의 탄생과 그의 사역에 비추어 보면 정말로 그의 죽음은 허무 그 자체다.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비참한 죽음, 참으로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말씀에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이다. 이 사람은 헤롯 대왕과 말타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다. 이 사람에게는 큰 윤리적 잘못이 있었는데, 동생 헤롯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의 아내와 이혼했을 뿐만 아니라, 동생에게서 아내를 빼앗아 결혼했다.

 

이 일로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부도덕한 일을 비판하는데, 그것 때문에 그들의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나마 헤롯 안티파스는 요한을 참 선지자로 생각하여 그의 메시지를 무서워했는데, 오히려 헤롯의 부인이 된 헤로디아는 요한에 대하여 이를 갈았다. 그래서 그를 죽일 명분을 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헤로디아는 헤롯의 생일을 맞아 음모를 꾸민다.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자신의 딸 살로메가 신명나는 춤을 추게 만든 뒤, 헤롯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여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는 약속을 받아 낸다. 이때를 기회로 삼아, 헤로디아는 살로메에게 주문하기를 헤롯 왕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라고 지시한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큰 소리 뻥뻥 친 헤롯은 차마 자신의 체면을 구길 수 없어, 헤로디아와 살로메의 요구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얹어가져다 준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자신을 미워한 한 여인의 음모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에서 이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전도 여행을 보내신 이야기에 삽입되어 나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대한 가벼운 차림으로 전도 여행에 나설 것을 주문하신다. 사실 가진 게 많으면, 그거 신경 쓰느라, 본질을 놓칠 수가 있다.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하나님 나라) 전파에 있지,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지 않다. 물론 너무 없어도 그거 신경 쓰느라 본질을 놓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굴의 기도를 날마다 드려야 한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언 30:8).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인생의 짐들을 최대한 간편하게 하는 게 좋다. 이게 좀처럼 쉽지 않겠지만,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한 자들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서 간편한 삶(simple life)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의 영성으로 여겨져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말라 고쳤다”.

 

여기서 회개하라고 전파한 것은 단순히, ‘회개하시오!’라고 말한 게 아니라, 복음을 전파했다는 뜻이다. 제자들의 선포는 예수님의 왕 되심과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믿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왕 되심과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그분을 따라 그 나라를 사는 자들은 삶이 간편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은 먹고 마시는 것’, ‘소유하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이 주신 계명의 핵심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 ‘는 쉽게 말해,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고, ‘평강은 쉽게 말해,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희락이 온다.

 

그런데, 하나님과 잘 지내고, 이웃과 잘 지낼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데서 온다.

 

세례 요한의 죽음과 관련하여 꼭 인지해야 하는 말씀은 다음 구절이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12-14).

 

복음을 전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친 것은 제자들인데, 이름이 드러난 것은 제자들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다. 이것을 기독교적 도덕(미덕)으로 보지 말라. 제자들(우리들)의 이름은 없고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은 단순히 도덕적인 일, ‘미덕과 겸손이 아니다.

 

우리는 겉말로는, “우리의 사역을 통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정작 속으로는 나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내가 행한 사역을 통해서 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을 때, 우리가 그토록 가볍게 시험에 드는 것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드러내고 싶으면 드러내라.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데 좀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면 어떤가! 괜찮다. 서로 이름을 드러내고 많이 칭찬해주시라. 지금 나는 기독교의 도덕(미덕)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이런 말씀, 너무 식상하지 않나? “집사님, 권사님, 집사님(권사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마시고,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세요!” 이렇게, 예수의 이름과 나의 이름 드러내는 일을 경쟁이라도 하듯 동일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은 단순히 겸양과 겸손이 아니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면, 우리는 겨우 우쭐해지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에서만 끝나지만,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즉 예수의 이름은 구원 사건이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으로보았을 때 매우 허무한 죽음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의 죽음을 그냥 그렇게 허무하게 그린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남과 연관되어 묘사된다. 앞서 말했듯이,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제자들의 파송 이야기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의 이름, 즉 하나님 나라의 드러남 앞에서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어떤 죽음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인 슬픈 죽음,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드러난 것에 대한 복음 증거의 죽음인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허무해보여도, 하나님 안에서는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죽음이다.

 

요한복음에서 묘사되고 있는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제자도의 마지막 길은,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예수의 이름은 흥하여야 하고, 나의 이름은 쇠하여야 하는것이다. 나의 이름은 아무리 드러나고 흥해 보았자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지만, 예수의 이름은 세상을 구원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구원하는 이름, 예수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내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과는 비교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드러내며 사는가?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내 이름만을 드러내고 죽는 것만큼 허무한 인생은 없다. 내 이름이 비록 세상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나를 통하여 예수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면, 그렇게 세례 요한처럼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구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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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2. 20. 05:38

현몽을 간구하는 기도

(마태복음: 1:18-25)

 

주여, 현몽하여 주옵소서.

꿈 속에서든, 어디에서든

주의 뜻을 밝히 보여 주옵소서.

우리는 어리석어

사건의 실체를 알지 못하나이다.

갈팡질팡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마리아의 혼전 임신 소식을 듣고

그를 가만히 끊고자 했던

의로운 요셉에게 현몽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기대어 사는

우리들에게도 현몽하여 주셔서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시고

우리의 나아갈 바를 가르쳐 주옵소서.

현몽의 은혜를 통하여

요셉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주의 뜻을 역사에 드러냈던 것처럼

우리도 현몽의 은혜를 입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하나님 나라를 역사에 드러내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20. 05:26

현몽

(마태복음: 1:18-25)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아예 없고,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이 땅에 오신 일)을 매우 형이상학적으로 묘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1-4 ㅡ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공부가 필요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조차 일관적이지 않고, 오히려 매우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잘 된 일이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다각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리아를 중심으로 전해진다. 마리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마리아 주변에서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말해준다 (세례요한과 그의 엄마 엘리자베트, 그리고 그의 아버지 사가랴). 그 뿐 아니라,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신실하게 붙들고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도 보여준다 (시므온).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인 마태복음은 마리아의 남편요셉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오늘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결혼은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첫 단계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부모(아버지)에 의해서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는 신랑과 신부가 어렸을 때 진행되는 일이다. ‘네 딸하고, 우리 아들하고 결혼시키자.’  둘째, 신랑과 신부가 성인으로 성장해 실제 결혼이 가까워졌을 때, ‘약혼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때부터는 서로의 관계가 법적 구속을 받는데, 이 관계를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법적인 약혼 파기로만 가능하다. 약혼 기간은 대개 1년 정도 되며, 약혼 기간에 신랑과 신부는 육체적 접촉을 하지 않으며, 서로의 순결을 지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실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다. 이때 신랑은 큰 잔치를 벌이며,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을 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 이 문구에서 성령으로라는 말을 빼면, 마리아는 약혼한 상태에서 요셉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임신했다는 뜻이 된다.

 

요즘과는 달리,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약혼 기간에 여인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임신하는 일은 통탄할 일이었다. 이것은 모세율법에 의하면 간음죄에 해당하는데, 이 죄는 죽음으로 다스려진다. 그 당시 약혼 기간에 간음죄를 저지른 여인은 돌에 맞아 죽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하여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상식과는 다른 행동을 선택한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9). 이 문장 자체는 매우 비논리적이다. ‘의로운가만히 끊고자 하여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구절이다. ‘의롭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킨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그가 취해야 하는 행동은 간음한마리아를 돌로 쳐 죽였어야 한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간음한 마리아를 돌로 쳐죽이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그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의로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의로움이란 단순히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은 율법의 문자를 넘어서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사람이다. 율법은 생명을 살리는 법이지, 생명을 죽이는 법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살릴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성이라고 증거한다.

 

그의 의로움의 절정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이 엄청난 일을 앞에 놓아두고, 요셉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그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마리아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정말 의로운 사람은 어떻게 살릴까를 고민하지, 어떻게 죽일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진실과 지혜는 바로 그 때 뜻밖으로하나님의 선물로 다가온다.

 

요셉은 이 일로, 아마도, 잠 못 이루며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고민에 지쳐 잠들었을 것이다 (영어로, drift off to sleep, 스르르 잠들다). 바로 그때, 요셉은 꿈을 꾼다. 성경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20). 요셉의 꿈 속에 주의 사자가 나왔다. 그리고 현몽한 사자는 요셉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니리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20-21).

 

문제적 심리학자, 프로이트라면 이것은 요셉의 무의식에 대한 표출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곤혹스러운 일에서 해방되고 싶은 요셉의 욕망이 표출되고 해방된 순간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경건한 심리학자, 융이라면 이것은 집단무의식에 대한 표출이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 표출된 사건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최근에 발전한 뉴로사이언스는 이것을 잠자는 동안 일어난 마리아 임신 사건에 대한 요셉의 기억 통합 작용(memory consolidation process)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은 요셉의 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에서 꿈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어떠한 진리가 드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실체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다. 우리는 늘 실체를 경험하지 못하고 산다. 실체가 드러나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가령,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실체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최순실 국정논단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실체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그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한국의 역사는 많은 것이 바뀌게 될 것이다.

 

현몽을 통해 마리아 임신 사건에 대한 실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간음 사건이 아니라, 성령 사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를 세상에 보내신 사건이다. 이것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보충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2-23).

 

마리아 임신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뜻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사건은 이해할 수 없는 기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은 꿈 같은 일이었다. 구약성경을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다. 구원은 그들에게 언제나 꿈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꿈 같은 일이 꿈을 통해서현실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이제부터 벌어진다. 꿈을 통해 진리가 드러났다. 그리고 요셉은 잠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24).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잠에서 깨어난 요셉이 이제 어떻게 행동하게 할까라는 것이다. 요셉의 의로움은 그러한 계시(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일)를 받은 것이 아니라(물론 의로운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계시도 받았겠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시가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 계시를 받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서 완성된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행동했다.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25). 참 조마조마한 이야기이다. 만약,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 ‘참 이상한 꿈이 다 있군하면서 그 꿈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그리고 율법대로 마리아를 돌로 쳐 죽였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역사가 바뀌지 않는 건, 또는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는 건, 꿈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는데도, 그것을 우리가 삶의 현실에서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책임공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힘들고, 사는 게 힘든 것은 모두 너 책임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로움’,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약속 따로, 믿음 따로,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요셉은 행동의 근거를 경건(율법 또는 자기 의)이나 문화에서 찾지 않고, 믿음에서 찾았다. , 그는 믿음으로 행동했다. 그는 하나님에게 믿음을 두었고, 하나님의 뜻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마음을 바꿨고, 행동을 바꿨고, 역사를 바꿨다. 믿음은 내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도 바꾸는 일이다. 만약 요셉이 마음만 바꿨다면, 그는 마리아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요셉이 마음은 바꾸지 않고 외적인 행동만 했다면, 그는 마리아를 데리고 왔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살다가 마리아에게 무슨 짓을 했을 지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믿음은 마음과 행동을 모두 바꾸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평화의 촛불을 켰지만, 왜 우리는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요셉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없이 하는 행동은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이고, 상대방에게도 상처가 된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새로운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교회 공동체니까 교회 공동체 내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왜 교회 공동체 내에 평화가 없는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5:23-24).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진리이고 실체이고 하나님의 계시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요셉은 진리가 드러났을 때, 실체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났을 때, 그것을 받아들여 마음(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역사를 바꿨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진리의 말씀을 듣고, 형제에 대한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서, 역사를 만들며 사는가? 말씀을 통해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하는 행동만큼 허무하고 공허한 게 어디 있는가? 마음을 바꾸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행동으로만 마리아를 데리고 오니까, 평안도 없고 역사도 안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나와서 예배드리는 행위만 하니까 예배 드린 후에도 여전히 삶의 문제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고민 가운데 있고, 그 고민을 놓아두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어떠한 현몽(말씀, 계시, 실체)’을 받으셨는가? 성경에서 요셉은 현몽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지만, 우리는 일차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 삶의 문제가 있고, 구원이 간절하시거든, 우선 성경을 보시라.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뜻밖에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셨거든, 요셉과 같이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 보시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인,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시라. 주님께 마음을 두고, 주를 의지하는 자, 주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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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신앙, 시각과 청각의 미학에서 촉각과 후각의 미학으로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신앙인들)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현대(개신)교회에서 매우 부정한 것으로 작동하고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지, 교회 와서 또는 매체를 통해 목사의 설교를 듣는 행위가 아니다.

 

매체를 통해 듣는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 있다. 원래 매체를 거치면 매체 건너편에 있는 존재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현대인들의 의식은 그렇게 인식하도록 진화되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TV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존재를 유명인(celebrity)으로 인식하며 그들의 존재를 부러워한다.

 

롤랑 바르트는 미학을 논하며 미학의 요소를 시각과 청각으로 제한한다. 미학에는 촉각이나 후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는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매체를 통해 접하는 연예인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는 그들을 오직 시각과 청각으로만 접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없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시각과 청각으로 접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아름답게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촉각과 후각으로 하는 것이다. 남녀가 처음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시각과 청각을 통해서다. 그러나 그들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점점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 있는 관계는 애잔할지는 몰라도 현실성이 없다. 타자의 존재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넘어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갈 때 온전히 파악된다. 그래서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 연인의 사이에는 언제나 불협화음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서로의 실체를 맞닥뜨리며 그 존재를 감당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이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서만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려는 자에게서는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힘들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인은 길가요, 돌밭이요, 가시덤불에 불과하다. 귀만 커져 마음이 완고할 뿐 아니라, 박해와 핍박을 한 시도 못 견디고, 염려와 유혹과 욕심에 취약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미학의 개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 가톨릭의 예배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에 머물렀다. 사람들은 미사(Mass)에 참석해 사제가 들어올리는 빵과 포도주를 보며, 사제가 읊조리는 말씀을 들으며 자신들의 구원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사제의 그러한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 행위를 더 많이 보고자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느라 분주했다.

 

루터는 중세의 그러한 미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가 아닌, 촉각적이고 후각적인성도의 교제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루터는 미사(특별히 성만찬; 개신교에서는 미사를 예배라 한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가 내어 주신 몸을 끌어 안아 그 안에서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라 강조했다. 성도의 교제는 멀리서 바라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접촉하는 것이고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피냄새와 땀 냄새를 맡는 것이다.

 

현대(개신)교회의 신앙인들은 매체를 통해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보고 듣는일을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성도의 교제를 가로 막을 뿐만 아니라, 신앙을설교 듣는 일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되는 설교 동영상은 본교회의 교인들을 위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부득이한 이유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해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지 못한 이들의 영적 조화를 돕기 위한 봉사의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영적인 성장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듣는 행위는 청각의 작용이 아니라, 존재의 작용이다. 신명기 6장의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4-5). 이 말씀에서 보듯이, ‘듣는 행위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이지, 귀만 쫑긋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사실 설교는 성경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은 약간의 풀이가 필요하겠으나, 성경 자체가선포되고 기록된하나님의 말씀이니 그것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말씀을 잘못 해석하느니 그냥 읽는 게 훨씬 낫다고까지 말한다.

 

신앙은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제, ‘보고 듣는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신앙생활은 그만 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끌어 안고, 사느라 거칠어진 성도의 손을 마주 잡고 그들의 피냄새와 땀냄새를 맡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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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2. 17. 12:47

그리고, 비가 왔다

 

시선이 마주치기 전까지

구름은 움직이지 않는다

엄마는 신발을 들고

아가는 엄마를 든다

목인사를 건네며

바삐가는 바람에게

길을 묻는다

낙엽이 대신 대답한다

친구가 오지 않아 슬펐던 가을은

장마같은 눈물을 남기고 떠나갔다

가늘어진 목구멍 사이로

저녁은 휘파람 소리를 내고

산등성이에 다다른 하늘은

구름과 시선을 맞춘다

 

등을 더듬는 구름아

그건 산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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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