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6. 8. 5. 10:55

"Love is eternal. No matter how short it was. That's the mystery of love." - Reverend Junsik Chang *


"사랑은 영원하다. 그것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의 신비이다. 장준식 목사


* 이것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한 후배의 문병 중에 내가 말씀을 전하며 한 말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던 후배에게‘사랑의 영원성'이 가슴에 와 닿았던 모양이다. 후배는 이 문구를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남기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8. 4. 05:04

네가 아픈 이유

 

네 눈이 아픈 이유는 불필요한 것을 봐서 그래

네 입이 아픈 이유는 불필요한 말을 해서 그래

네 귀가 아픈 이유는 불필요한 것을 들어서 그래

네 위가 아픈 이유는 불필요한 것을 먹어서 그래

네 심장이 아픈 이유는 불필요한 것에 가슴 뛰어서 그래

네 머리가 아픈 이유는 불필요한 것에 마음 써서 그래

네 손이 아픈 이유는 불필요한 것을 만져서 그래

네 다리가 아픈 이유는 불필요한 곳에 가서 그래

네 인생이 아픈 이유는 불필요한 희망을 꿈꿔서 그래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을 걷다가  (0) 2016.10.07
흔적  (1) 2016.10.07
여름 나무  (3) 2016.07.07
메시아  (0) 2016.07.03
프리지아  (1) 2016.07.02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8. 3. 21:48

아주 특별한 날을 간구하는 기도

(슥 14:1~11)


주여,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처럼(고진감래)

큰 환란 끝에 새날이 오게 하옵소서(묵시적 종말론).

환란과 고통까지도 주관하시는 주여,

주께서 친히 오셔서 우리를 괴롭히며 생명의 위협을 가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물리쳐 주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기 위해 감람 산 위에 서실 때 

그 위엄 앞에서 땅이 갈라지고 태양도 빛을 잃겠나이다.

주께서 승리하신 그 날에는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겠나이다.

환란 끝에 새날이 오면

해와 달이 땅을 밝힐 필요 없이

오직 주의 빛이 세상을 비추이겠나이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흐르고 여름과 겨울에도 흐르는 생수가 솟아나

우리 모두가 그 물을 마시겠나이다.

그 아주 특별한 날을 우리가 사모하고 사모하오니,

빛과 생수를 주셔서 생명이 넘치며 풍성하게 하시고,

친히 우리의 왕이 되셔서 다시는 저주가 없이 평안히 살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8. 3. 08:10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기를 간구하는 기도

( 13:1~9)

 

주여,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을 열어 주옵소서.

그 샘에 나아가 우리의 죄와 더러움을 씻게 하여 주옵소서.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겼던 죄와 더러움을 씻게 하시고,

주의 말씀을 혼란케 하는 거짓 예언에 귀기울였던 죄와 더러움을 씻게 하시며,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그릇된 말과 행동을 했던 죄와 더러움을 씻게 하옵소서.

주께서 여신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에서만 우리가 깨끗해질 수 있나이다.

그 샘에서 씻은 자들만이 주와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나이다.

주여, 우리는 선지자가 아니요 농부이니이다.

주여, 우리는 창조주가 아니요 피조물이니이다.

주께서 여신 샘에 들어가 죄와 더러움을 씻어내고

주 앞에 정금과 같이,

새벽이슬과 같이 나오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8. 1. 02:55

탐심을 물리치기를 간구하는 기도

(12:13~21)

 

주여, 탐심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나이다.

소출을 쌓아 놓은 것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평안하다고 생각하지 말게 하옵소서.

쌓아 놓은 소출에 기대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명은 소유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 있나이다.

우리는 소유가 많아야 생명이 상하지 않고

남들보다 우위에 올라설 수 있다고 생각하나이다.

우리는 그러한 탐심에 사로잡혀

주께서 주신 생명을 어리석은 부자처럼

돈 세는 데만 쓰고 있나이다.

주여, 우리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는 피조물이니이다.

주여,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니이다.

탐심에 사로 잡힌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주를 향하여 부요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소유하는 데 정신 팔지 말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데 집중하게 하옵소서.

자기연민 속에서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 자 되지 말게 하시고

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들에 핀 백합화를 바라보며

주께 모든 것을 맡기게 하시고,

오직 생명을 주시는 주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29. 23:50

나귀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11:1~6)

 

주여, 맞은편 마을에 매여 있던 나귀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 쓰임 받는 나귀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쓰시겠다 할 때 풀려나는 나귀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쓰시는 나귀는 매여 있을 수 없나이다.

주께서 쓰시겠다 할 때 나귀를 풀어주지 않는 자를

어찌 복되다 할 수 있겠나이까.

주여, 매여 있는 나귀가 되지 말게 하시고

주께 쓰임 받기 위해 풀려나는 나귀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 쓰임 받는 나귀로 헌신할 때

묶고 있던 모든 것이 풀려나게 하옵소서.

주여, 풀린 나귀, 쓰임 받는 나귀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의 것이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29. 23:12
길 떠나는 자들을 위한 기도

(삼상 6:10~12)


주여, 얼마나 얼마나 주저 앉고 싶은 지 모릅니다.

주여, 얼마나 얼마나 가던 길을 멈추고 싶은 지 모릅니다.

서 계신 주여, 우리를 일으켜 주옵소서.

앞 서 가시는 주여, 우리를 이끌어 주옵소서.

여호수아의 팔과 다리를 굳세게 하시고

그의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신 주여,

우리의 팔과 다리, 그리고 마음에 힘을 주셔서

주께서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하게 하옵소서.

스룹바벨의 길을 평탄케 하신 주여,

우리의 길도 평탄케 하옵소서.

높은 산을 낮춰 주시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옵소서.

벧세메스로 법궤를 실어 나르던 어미 소의 눈물을 기억하시는 주여,

주의 부르심에 가냘프게 응답하여

뚜벅뚜벅 그 길을 걸어가는 연약한 주의 종들을 붙들어 주사,

눈물 흘리며 기도할 때 위로하시고 새힘을 주옵소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 아브라함과 늘 함께 하셨던 주여,

길 떠나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내리셨던 동일한 복을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가 가는 길이 암사슴의 발걸음 같이

힘차고 소망차게 하옵소서.

주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29. 21:33

애통을 간구하는 기도

(슥 12:10~14)


주여,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옵소서.

그것들 없이 우리가 어찌 '찔린 자'를 보며 애통할 수 있사오리이까.

주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렸나이다. 바로 그가 '찔린 자'이니이다. 그 찔린 자를 보며 독자를 위하여, 장자를 위하여 애통하고 통곡하듯 가슴 치며 눈물 흘리게 하옵소서.

그의 찔림은 우리를 위함이요 그의 상함도 우리를 위함이니이다.

그의 찔림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고 그의 상함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나이다.

주여, 찔린 자를 바라보며 애통하게 하옵소서. 그 애통함 없이 우리가 어찌 마음을 돌이켜 주께로 나아갈 수 있겠나이까.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서 전사한 요시야 왕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였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옆구리를 찔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온 세상 각 사람이 따로 애통하게 하옵소서.

찔린 자를 바라보고 애통하여 마음을 돌이켜 주께로 나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옵소서. 

'찔린 자'는 우리의 구원이시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1. 22:34

존 도미닉 크로산의 책 <어두운 간격>의 마지막 단락문장이다. 실재(reality)를 자신들이 다 알고 있는 양 떠벌리는 종교꾼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실재를 뒤엎으며 신비와 초월을 통해 참된 실재(하나님나라)를 향해 나아가려는 참목자들의 설 자리는 자꾸 줄어드는 것 같다. 이 현실이. 그래서 이 시대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용기 내는 게 정말 힘들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1. 22:31

추적추적 비 내리는 가을, 나는 지금 2년 전 작고하신 안석모 선생님의 <욥을 위한 변명>을 읽고 있다.

이 책에는 내가 단 댓글 두 개도 나온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신학적 성찰은 <몸신학>이다. ", 주님, 몸이 생명입니다. 몸이 진실입니다. 몸이 하나님이십니다."

죽음이 시야에 들어온 이들의 성찰은 언제나 위대하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1. 22:31

그리스도교인은 "참된 예언자가 되어 번민할지, 거짓 예언자가 되어 이 사회에 넘쳐나는 유혹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찾고 썩은 고기를 즐길지"를 선택해야 한다.

<토머스 머튼>

 

번민과 즐거움 사이에서 오는 갈등은 고독하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1. 22:30

우리 자신인 하나님의 밭은 하나님의 날카로운 쟁기를 견디어야만 하는 것이다. 밤을 견디어낼 수 없는 자는 하나님의 예술을 알지 못한다.

ㅡ 토마스 뮌처 (도로테 죌레, 신비와 저항, 142)

 

토마스 뮌처의 루터에 대한 비판은 매우 날카롭다. 특별히 뮌처는 루터의 칭의론을 맹렬히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뮌처가 보기에 루터의 칭의론은 고난 속으로 들어가는 예수의 길을 함께 가지 않으려는 달콤한 그리스도론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달콤한 그리스도는 독이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7. 21. 22:28

"가장 나쁜 피조물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이 종속되어지는 공권력에 대한 것이다. 정부의 공권력에 사로잡히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워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살아가기 위한 걱정에 갇혀 있게 되며, 인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상실한다."

(도로테 죌레, 신비와 저항, 142)

 

이 말은 죌레가 토마스 뮌처의 신비주의에 대하여 분석하면서 한 말이다. 이것은 국가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해야만 하는 정치신학의 가장 핵심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에게도 이런 도전적인 질문이 들어왔었다. 물론 예수님은 지혜롭게 넘기셨지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게 무슨 뜻인가. 그런데 정말 이것으로 충분한가.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21. 21:58

새출애굽을 간구하는 기도
(슥 10:1~12)


봄비(늦은 비)를 내려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주여, 우리는 봄비를 내리시는 분이 누구인지 망각한채 허탄한 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불쌍한 백성이니이다.
먹고 사는 문제와 쾌락 앞에서 바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날마다 무너져 내리는 부끄러운 백성이니이다.
주여, 우리를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곤고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마옵소서.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드라빔과 복술자에게 허탄한 위로를 구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가 애굽을 떠나 주께서 주신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겠사오니,
고난의 바다를 지날 때 바다 물결을 치시옵소서(strike).
나일의 깊은 곳이 마르게 하시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게 하시며
애굽의 규가 없어지게 하셔서,
주의 도우심으로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의 삶 가운데 날마다 출애굽의 역사가 있게 하셔서
봄비를 내려주시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서 주신 열매를 먹게 하시고,
주의 구원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새출애굽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7. 21. 08:11

거절당한 메시아

(마가복음 12:1-12)

 

예수님은 산헤드린 회원들(대제자장들, 서기관들, 장로들)권위 논쟁을 벌였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 이 말은 산헤드린 회원들 스스로 자신들만이 참된 권위가 있고, 자신들을 통하지 않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스스로 권위 있는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맞서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은 독선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만이 최고라고 교만에 절어 있다.

 

교만은 약이 없다. 교만은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한다. 오직 자기 자신만 보게 한다.

 

예수님은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보여주신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대신 농사짓게 하고 타국에 가 있는 중이다. 때가 이르러 주인은 농부들에게서 소출을 얻으려고 종을 보낸다. 그런데, 그들은 소출을 내어 놓기는커녕 종을 잡아 능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한다.

 

이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그리고 주인은 그들이 적어도 아들은 존대하리라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농부들은 엉뚱한 생각을 한다. 만약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면 농부들 자신이 그 포도원을 차지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아들을 잡아 죽인 후 포도원 밖에 내던진다.

 

포도원은 하나님이시고, 농부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축소판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말씀을 전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열매를 맺기 원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성경의 대표적인 선지자인 이사야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5:1-2).

 

사실, 이 이야기는 예수의 부활의 관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언한 이야기로 읽어야 이해가 더 확실해 진다.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마친 후, 예수님은 느닷없이 머릿돌이야기를 하신다. 머릿돌 이야기는 시편 118편의 말씀이 근거이다. 그 말씀을 보면 이렇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118:22-23).

 

건축자가 버린 돌은 쓸모 없는 돌이다. 그런데, 그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기이한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버린 돌은 그냥 버린 돌이다. 건축 자재로 쓸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건축 자재로 쓸 수 없는 돌, 건축자가 버린 돌을 머릿돌 삼으셨다.

 

이것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증언한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편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의 사고(생각, 기대)를 완전히 뒤엎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의 사고에는 말세에 메시아가 와서 악을 심판하고 의인을 신원해야 하는데, 그러한 메시아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발생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버리고 죽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온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로 인정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들이 거절하여, 버림받고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시편의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요, 그들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자들은 거절당한 메시아예수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믿지 못했다.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는 우리의 사고(생각, 기대)를 전복시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 듣는 것, 생각해 온 것에만 절대적으로 기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거절한 그것이 사실은 우리에게 메시아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포도원 농부들처럼, 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교만하고 자기 생각에만 갇혀 있으면 실제로 주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와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을 능멸하고 죽이고 거절할 수 있다.

 

요즘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기독교에서는 뜨거운 이슈다. 그런데 몇몇 열린 사고를 하는 기독교인들 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학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특별히 창조론을 말할 때 과학이 기독교의 진리를 흔들어 놓는 마귀인양 호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만약 21세기에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보내신 메시아가 바로 과학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학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기름부음 받은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을 열어 놓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민감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따라 움직이며 행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온통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예상이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지 모르니, (아마도 모든 일이 우리의 예상과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거절당하는 메시아가 없도록 날마다 깨어 기도하는 신실한 믿음의 자녀가 되자.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