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7. 11. 03:06

사랑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눅 10:25-37)


오늘 말씀은 어느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 질문에서 비롯된 말씀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질문한 이가 율법 교사이므로 그에 맞게 다시 질문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교사는 율법교사 답게 똑 부러지게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는 신명기 65절과 레위기 1818절을 인용한 대답이다. 이 두 구절이 성경의 핵심을 요약한 구절이다. 이것을 간단히 줄이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달콤해 보이지만 실제는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랑만큼 큰 사건은 없다.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후의 모습을 바꾼다. 사랑하기 전과 사랑한 후의 모습은 같을 수 없다.

 

사랑은 변화와 희생을 동반한다. 변화와 희생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변화와 희생 없이 사랑을 하려는 자는 사랑을 하려는 게 아니라 향락을 즐기는 것일 뿐이다. 사랑은 우리를 성장시키지만, 향락은 우리를 타락시킨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사랑인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게 사랑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참으로 쉽지 않은 거다. 변화와 희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변화와 희생에 대한 염려는 전혀 안 하게 된다. 변화와 희생이 두렵고, 귀찮은 이유는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이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은 변화와 희생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데만 힘쓰면 된다. 그러면, 변화와 희생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런 다음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런 다음에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하나님 뜻 안에 거하게 된다.

 

이런 말도 해볼 수 있겠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런 다음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다.

 

율법교사의 대답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또다시 질문한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해 주신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완전히 뒤엎는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내려간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예루살렘이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거반 죽게 되어 길 가에 버려졌다. 마침 그곳을 두 사람이 지나갔다. 한 사람은 제사장이고 다른 이는 레위인이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동일한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성전의 일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결이었다.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이들이 어쩐지 거반 죽게 되어 길 가에 버려져 있는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간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왜 그랬을까? 그들에게는 사람보다 일이 더 중요했다. 강도 만난 자가 거반 죽게 되었다는 것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는 뜻일 텐데,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부정한 것 (시체 또는 피 흘리는 것)’을 만지면 부정해져서 정결의식을 거쳐 다시 정결해지기까지 성전의 일을 담당하지 못하게 된다.

 

일 중심으로 삶을 살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한다. 일 중심으로 삶을 살았던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강도 만난 자는 이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귀찮게 만드는 존재에 불과했다.

 

교회에서도 보면 일 중심으로 인간 관계를 생각할 때 언제나 다툼이 발생한다. 어느 집단이나 마찬가지다. 직장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다. 특별히, 직장생활이 힘든 이유는 직장이라는 곳이 원래 일 중심집단이기 때문인 것이다. 일 중심이다 보니, 직장 동료가 이웃이 되지 못하고, ‘골칫거리가 된다. 일을 잘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일을 못하면, ‘죽여 살려한다.

 

다른 곳을 몰라도, 가정과 교회는 일 중심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지, 일이 중심이 되면 다툼만 일어난다. 일 중심이면 모든 것이 다 짐스러워진다. 그러나, 사람이 중심이고, 사랑이 중심이면 모든 게 가벼워진다.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을 발음하면 입술이 닫히고 사랑을 발음하면 입술이 열린다 사람은 사랑으로 서로를 열 수 있다.” – 김은주 <달팽이 안의 달>

 

강도 만난 자를 구한 것은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니고, 여행 중인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든 자는 다름 아닌 사마리아인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변화와 희생이 따른다. 강도 만난 자를 사랑한, 불쌍히 여긴사마리아인은 그를 위해 기꺼이 변화와 희생을 감수한다. 사마리아인은 가던 길을 멈추는 변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는 희생을 감수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는 희생도 감수한다.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변화와 희생이 동반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꺼려하고,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를 꺼려한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맺으며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를 물었지만,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신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교사가 질문한 것에 대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중심으로 이웃을 가려냈다. 그들의 입장에서 강도 만난 자는 이웃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귀찮게 만드는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다른 말로 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은 자들이었다. 그냥, ‘그 일을 하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물으라. 다른 말로 해서,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나는 정말로 이웃을 사랑하는가?’를 먼저 생각하시라. 다른 말로 해서, 어떠한 일을 하는 데 드는 비용과 희생, 변화 등을 먼저 계산하지 말고, 사랑의 마음과 긍휼의 마음을 먼저 가지시라. “사랑하십시오. 그런 다음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거꾸로 하지 마시라.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그런 다음 사랑하십시오!” 이건 사랑이 아니라, 향락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시고,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이웃을 더욱더 사랑하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할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고백하자. “사랑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절당한 메시아  (0) 2016.07.21
충만하다는 것  (1) 2016.07.18
오병이어 이야기 (메시아적 만찬)  (1) 2016.06.17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오시는 예수  (2) 2016.06.17
누가 크냐  (0) 2016.06.17
Posted by 장준식

곡성(谷城)의 곡소리(哭聲)

ㅡ 영화 곡성을 보고

* 주의: 핵심 내용이 스포일러 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영화를 본 뒤 읽어보세요.

 

영화 제목은 곡성(哭聲)이지만, 촬영지는 곡성(谷城)이다. 곡성의 곡소리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들려오는 곡소리이다. 원래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는 곡성이 아니라 함성(야호~)’이 들려야 한다. 그런데 어쩐지 곡성에서 곡소리가 난다

 

영화는 성경 말씀을 띄우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누가복음 2438-39). 실제 영화에서는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의 구절이 빠져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 2437절부터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영화에서 누가복음 37절의 말씀은 없다. 빠진 그 부분은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이다.

 

곡성은 종교영화는 아니지만, 누가복음의 말씀이 모티브를 이룬다. 영화가 모티브로 사용하는 말씀은 예수가 부활한 뒤 열 한 제자(원래는 열 두 제자이지만 가룟 유다는 자살해 죽은 상태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평안을 빌며 하신 말씀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산 자의 모습으로 자신들 앞에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그들이 여전히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세 번에 걸쳐 자신이 고난당하고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때마다 제자들은 예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 무지가 예수의 부활 이후에도 이어진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 눈 앞에 나타난 예수가 인 줄로 알았다.

 

사실 누가복음에서 콕 짚어서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24:37)고 명시적으로 기록한 이유는 그 당시 예수의 부활을 놓고 논쟁을 벌이던 이단사설에 대한 반박 때문이다.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제자들이 본 것은 육체를 가진 예수의 몸이 아니라 그의 영(환영)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영지주의라는 이름으로 초대 기독교 사이에 널리 퍼진 이단사설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었다.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서)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성경은 의심믿음의 적으로 생각한다. 바로 그 의심이 영화의 핵심 모티브이다. 인류의 역사는 의심과 배신의 역사라 불러도 될 정도로 의심과 배신에 의해서 생명을 망치고 그르쳐 왔다. 영화는 바로 그 의심과 배신을 통해서 인간의 생명과 행복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여준다. 누가복음에 있는 다른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10:23).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복된 눈을 갖고 있지 못하다.

 

산 좋고 물 좋은곡성(谷城)에서 곡소리가 난다. 평온하던 마을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살인 사건 중에 가장 끔찍하고 가슴 아픈 존속살인사건이 줄을 잇는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사건과 점차 얽혀 드는 한 경찰(곽도원 분)의 의심과 의심이 드는 일본인(준 쿠리무라 분)을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건의 전말은 밝혀진다. 그 사이에 전혀 의심이 안 가는 미친사람, 무명(천우희 분)이 있다.

 

절박한 상황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면서 가장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의심 없이따라간다. 종구(경찰관, 곽도원 분)는 자신의 딸이 귀신 들리자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인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사람들의 의심을 물리치는 그 무당의 이름은 일광’(황정민 분). 사람들은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딸을 귀신에게서 구하고자, 마을에 감도는 액운을 떼어내고자 종구는 일광의 말 대로 큰 굿 판을 벌인다. 일광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 엄청 기가 센 귀신이 붙었다.

 

영화를 보면 그 귀신이 바로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광이 바로 그 일본사람 귀신을 내쫓기 위해 굿판을 벌이는 중이라고 의심 없이 생각한다. 여기에서 감독은 편집의 기술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 신명 나게 굿판을 벌이는 일광과 교차되는 장면은 자신의 은신처에서 자기의 방식대로 굿판을 벌이는 일본사람 귀신의 모습이다. 일광의 굿판이 진행되는 과정에 맞춰 일본사람 귀신은 일광의 굿판에 일격을 당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감독의 명백한 트릭이다. 편집이 가능한 영화(영상)의 묘미라 할 수 있다.

 

사실, 일광과 일본사람 귀신은 한통속이다. 감독은 일광의 환복(換服) 장면을 통해 그 복선을 깐다. 일본사람 귀신이 입고 있는 팬티와 일광이 입고 있는 팬티는 같다. 그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굿판을 벌인 것은 그들이 힘을 합쳐 물리쳐야 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무명(미친사람, 천우희 분)이다.

 

지금은 모든 불결한 것을 분리시켜 가두어 놓는 시대(미셸 푸코)이기에 정신병원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미친사람이 영화에 등장한다. 누가복음의 말씀을 끌어다 쓴 영화의 흐름 안에서 그 미친사람은 거라사 광인을 생각나게 한다.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거라사 광인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본다.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8:28).

 

무명(천우희 분)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인물이다. 사건 현장에 나타나 돌을 던지며 주목을 끌어보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녀가 사건 전담 경찰인 종구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말해주지만 결국 그 말을 믿은 종구조차도 동료 경찰과 마을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 받는다. 사람들 모두가 외면하고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 무명은 그저 미친사람이 아니라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복된 사람이다.

 

일본사람 귀신과 일광의 적()의심 많은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실존을 꿰뚫고 있는 무명이었다. 일본사람 귀신은 자신을 섬기고 있는 일광을 불러들여 무명을 향해 협공을 날리지만 결국 의심 많은 종구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그것 때문에 분노를 품은 일본사람 귀신과 일광은 종구의 가족에게 비극을 안겨주려는 계획을 꾸민다. 그것을 막을 수 있은 존재는 오직 무명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두 장면이 오버랩 된다. 하나는 가족을 필사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종구와 무명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사람 귀신을 물리치고자 그의 은신처를 한 방 중에 홀로 찾아간 가톨릭 부제(신부가 되기 전 단계에 있는 성직자)와 귀신의 만남이다. 이 두 장면에서 의심의 모티브는 극적으로 작용한다.

 

종구는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다 어느 골목에서 무명을 만난다. 무명은 종구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가족을 구하려면 이웃집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절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안된다고 말한다. 종구는 의심과 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무명을 대면한 탓에 기겁을 해서 도망치던 일광은 종구의 갈등을 깨는 역할을 한다. 무명은 종구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무명은 종구에게 의심을 품지 말고 자신의 말을 믿을 것을 주문한다.

 

부제는 귀신에게 속은 것에 분해 귀신을 물리치고자 용감하게도 귀신의 은신처를 찾아 간다. 부제는 은신처에서 좌정하고 있는 일본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그가 귀신이라는 것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꾸짖는다. 그런 부제에게 귀신은 메시지를 전한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 이 말에 부제는 자신의 확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가 귀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확신에 의심을 갖는다.

 

종구는 무명을 의심하지 말았어야 하고, 부제는 귀신을 의심했어야 한다. 종구는 무명의 말을 믿었어야 하고, 부제는 귀신의 말을 믿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이 없었다. 종구는 결국 의심하지 말아야 할 무명을 의심해서 그녀를 등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의 의심은 결국 그의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간다. 부제는 결국 의심해야 할 일본사람을 의심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 자신의 확신을 의심한 탓에 귀신을 물리치지 못하고 귀신의 또다른 희생자가 된다.

 

산 좋고 물 좋은 곡성(谷城)에서 나는 곡소리(哭聲)는 연약한 인간이 자처한 곡소리이다.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인간은 믿어야 할 것에 의심을 두고 의심을 가져야 할 것에 믿음을 두는 어리석은 존재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구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이란 무엇일까? 산 좋고 물 좋은 곡성에서 곡소리가 아니라 함성소리(야호~)가 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종구는 의심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 부제는 믿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 의심은 이토록 생사를 가르고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살인마(귀신)’와 같은 것이다. 예수는 의심 많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우리는 어떠한가. 종구와 부제처럼,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파멸과 구원을 오락가락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8:48).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마성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0) 2016.10.04
도마뱀 집사  (1) 2016.07.20
초월적 질서에서의 해방  (1) 2016.06.02
할 수 있을 수 없음  (0) 2016.05.30
신자유주의적 주체와 교회  (1) 2016.05.22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8. 21:41

남은 자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슥 3:1~10)


주여, 우리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사탄이 우리를 하늘 법정에 고소하고 있나이다.

재판장이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탄의 부당한 고소에서 건져 주옵소서.

주께서 선언하신 대로 

우리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이니이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우리가 심판 받았으나

그 가운데서 살아남아 연단받은 남은 자이니이다.

환난이 모든 것을 앗아가도 희망을 잃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는

주의 백성이니이다.

나무가 잘려 나가 그루터기만 남았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희망과 구원의 씨앗을 발견하는 우리는

주의 백성이니이다.

'희망은 맨나중에 죽는다'는 말처럼

희망을 잃은 모든 사람이 죽어가더라도

그들에게 끝까지 부활의 희망을 전하다가

맨나중에 죽는 우리는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여, 우리를 남은 자 되게 하옵소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되게 하사

희망을 잃은 자들의 희망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7. 21:51

회복을 간구하는 기도

(슥 2:6~13)


우리를 억압하는 북방 바벨론에서,

가나안 신들이 모이는 북방(차폰)에서

도망치기를 명하시는 주여,

우리가 힘써 도망치겠사오니

우리를 주의 거룩한 땅 시온으로 들이시옵소서.

우리가 노래하며 기뻐할 것은

주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셔서 머물 것이기 때문이니이다.

우리가 범죄하여 주께서 우리를 떠나시고 

우리는 질곡을 짊어졌나이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우리에게 회복을 약속하셨사오니,

주여, 오셔서 우리 가운데서 머무시옵소서.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한 게 회복이 아니라,

주의 능력을 이용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을 취하는 것이 회복이 아니라,

열 명의 나병 환자 중 다시 주께 돌아온 단 한 명의 나병 환자처럼

주께 돌아와 주와 더불어 사귐을 갖고 주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참된 회복인 줄로 믿사오니,

주여, 우리가 주 안에, 주가 우리 안에 머물게 하옵소서.

우리를 소유 삼으시고 다시 택하신 주여,

우리 안에 머무시는 주만 바라보며 잠잠히 있겠사오니, 

그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7. 7. 03:59

여름 나무


나무가 손 끝에 매니큐어를 발랐다.

한 여름

허공을 떠도는

태양의 심장을 더듬더니

열정이 차올라

아무렇지도 않게

빨개졌다.

곧, 사건이 터질 태세다.

아, 뜨겁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흔적  (1) 2016.10.07
네가 아픈 이유  (0) 2016.08.04
메시아  (0) 2016.07.03
프리지아  (1) 2016.07.02
마음  (1) 2016.06.11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6. 21:46

성벽이 되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슥 2:1~5)


주여, 우리 삶에 친히 성벽이 되어 주옵소서.

희망을 잃고 절망하는 자들에게

친히 희망의 성벽이 되어 주옵소서.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에게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 삶 가운데로 오셔서

'불로 둘러싼 성벽'이 되어 주옵소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성벽을 쌓는 일과 같사오나, 

주께서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주께서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수고가 헛된 줄로 아오니,

주여, 헛된 성벽을 쌓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께서 친히 성벽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게 하옵소서.

주께서 친히 '불로 둘러싼 성벽'이 되어 주시면 우리 삶 가운데 영광이 머물겠나이다.

주 만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며 온전케 하시나니,

주여, 우리 삶 가운데로 오셔서 친히 성벽이 되어 주옵소서. '불로 둘러싼 성벽'이 되어 주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5. 21:31

네 뿔들을 물리쳐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슥 1:18~21)


주여, 언제까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우리의 성장과 자유와 행복을 방해하는 네 뿔들 때문에 

우리가 주저 앉아 있나이다.

그들의 힘과 권세에 억눌려 우리가 숨을 쉬지 못하고 있나이다.

네 뿔들은 우리의 삶의 사방을 맴돌며

이런저런 모양을 취해 

우리의 생명과 평안을 위협하고 있나이다.

사회적 부정, 부조리, 전쟁과 테러의 위협, 도덕적 타락, 성적 타락, 정치적 부패, 폭력성, 양극화 현상,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와 알려고도 하지 않는 막지, 또는 그와 같은 것들이 

우리의 생명과 평안을 위협하고 있나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사

우리의 삶의 자리를 흩뜨리고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드는 뿔들을

물리쳐 주시고 떨어뜨려 주옵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선한 말씀과 위로의 말씀을 주사

머리를 들게 하옵소서.

뿔들을 두렵게 하고 꺾어버릴

대장장이들을 속히 보내 주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7. 3. 09:18

메시아


내가 지금 말을 걸고

마음으로 신뢰를 보내고 있는 사람은

그저 아무나가 아니라

심지어 죽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야.

그 사람은 마술사나 연금술사,

또는 사기꾼이 아니라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아니 만나게 될 사람 중에,

아니면 평생 만나지 못하게 될 사람 중에

눈빛이 가장 선한 사람이야.

나는 이 사람이 들려준 인생 이야기가 좋더라.

우선 꾸밈이 없고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없는

화창한 날의 구름 같은 이야기야.

모르겠어,

내가 이 사람에게 자꾸 빠져드는 이유는

아마도 이 사람의 심장소리 때문인 것 같아.

이 사람의 심장소리는

어느 새로운 문명의 아침에서 들려오는 북소리 같아.

그 소리를 들으면

하늘이 열리고

별이 쏟아지고

태양이 녹고

달이 빛나.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구원이 돌진해 오는 것 같아.

나는 이 사람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보기로 마음 먹었어.

그래서

나는 숨을 죽이기로 했고

감각을 가만히 내버려두기로 했고

무엇보다,

도망치지 않기로 했어.

이제야 심장이 슬프지 않네.

들어봐,

내 심장이 이렇게 뛰잖아.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가 아픈 이유  (0) 2016.08.04
여름 나무  (3) 2016.07.07
프리지아  (1) 2016.07.02
마음  (1) 2016.06.11
고맙다  (0) 2016.04.24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7. 2. 03:00

프리지아

 

너를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싸이렌이 울렸다.

바다에서 선원들을 홀리던 싸이렌이

어떻게 육지까지 왔을까,

생각하는 순간 싸이렌이 멀어졌다.

내 머릿속의 생각과는 달리

내 눈 앞을 지나는 싸이렌은

빨간 색을 칠한 네모난 자동차였다.

저건 아픈 사람을 실어 나르는 장치인데,

너를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싸이렌이 울렸다는 건

내가 아프다는 뜻일까.

뜨거운 태양이 도착하지 못한

구름 잔뜩 낀 여름날 아침인데,

싸이렌이 멈춘 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건

노란색 프리지아였다.

오늘은 아무래도

프리지아 꽃을 든 남자처럼

심장박동이 거칠어질 것 같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름 나무  (3) 2016.07.07
메시아  (0) 2016.07.03
마음  (1) 2016.06.11
고맙다  (0) 2016.04.24
  (1) 2016.04.20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1. 22:03

거짓 평안을 물리쳐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슥 1:7~17)


주여, 우리는 어떠한 평안을 누리고 있나이까?

땅을 두루 다니는 붉은 말을 탄 주의 천사가 보고 하기를,

"온 땅이 평온하고 조용하더이다" 말하지만,

이것은 바벨론과 바사의 힘과 폭력에 의한

거짓 평안이 아니니이까?

주여, 우리에게 선한 말씀과 위로의 말씀을 주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로 믿사오니,

거짓 평안을 가져다 주는 안일한 대적들을 물리쳐 주사

황폐한 우리의 심령과 삶의 터전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주여, 거짓 평안을 가져다 주는 썩은 동화줄 같은 것들, 영원하지 못한 것들, 있다가도 없는 것들, 주의 심판 날에 바람처럼 사라질 것들을 붙들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의 선한 말씀과 위로의 말씀을 붙들게 하셔서 

주께서 약속하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위로하시고 다시 택하여 주사 

우리의 삶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케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1. 22:00

돌아오기를 간구하는 기도

(슥 1:1~6)


주여, 황폐한 상태에 놓여 있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전혀 변화되지 않은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돌아와야 할 것은 우리 자신들이오나, 

오히려 주께 돌아오시라고 한탄을 늘어 놓고 있는 우리의 불경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은 황폐하였나이다.

우리는 성전의 기초만 놓고 황폐한 채로 내버려 두고 있나이다.

주여, 선지자들을 통하여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떠나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그 음성이 

우리의 귀에 들리게 하옵소서.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멸망 당한 조상들을 본받지 말게 하옵시고,

오직 마음을 돌이켜 주께 돌아와

황폐한 마음과 성전을 어서 빨리 회복하게 하옵소서.

주여, 주께로 돌아가는 길을 평탄케 하옵소서. 주께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7. 1. 08:49

호산나를 간구하는 기도

(막 11:1~11)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를 형통케 하소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이는 정의와 겸손의 왕이시나이다.

주는 로마황제나 로마장군처럼 군마를 타고 오지 않으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나이다.

그들은 힘과 폭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거짓 평화를 전해주나,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왕은 겸손과 사랑으로 우리를 섬기시며 하늘의 참 평화를 가져다 주시나이다.

주여, 세상의 욕망과 정욕이 투영된 호산나를 외치지 말게 하옵소서.

그런 호산나를 외치는 자는 결국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거나 주를 떠나게 될 것이니이다.

주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이가 전해주는 정의와 겸손을 사모하며 호산나를 외치게 하옵소서.

힘과 폭력에 의한 구원과 형통을 물리쳐 주시고, 오직 정의와 겸손이 깃든 구원과 형통을 베풀어 주옵소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형통케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