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0. 2. 21. 03:02

위의 것을 찾기를 간구하는 기도

(골로새서 3:1-17)

 

주님,

위의 것을 생각하며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실현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 신비를 다 깨닫지 못해

생명에 대하여 무지하고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우리의 삶이 고독하고 아프고 고통스럽더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생명이 영광 중에 드러날 것을 믿기에

인내하며 견디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우리의 생명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믿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21. 02:57

위의 것을 찾으라의 의미

(골로새서 3:1-17)

 

왜곡된 율법주의와 헬라 철학의 이원론이 만들어낸 헛된 사상과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금욕주의와 그릇된 겸손에서 비롯된 자기 폄하를 가져왔다. 이것의 문제는 율법이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구원하는 게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종교적 금욕이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는, 이상한 구원론에 빠지게 된다.

 

이것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바울은 골로새 교회 지체들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고 권면한다. 1절에서는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고, 2절에서는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한다. 이 두 개의 말을 종합해 보면, 위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라는 뜻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위의 것이란 무엇인가?

 

언뜻 보면, 2절 말씀에서처럼, ‘위의 것땅의 것과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땅의 것을 하찮고 저등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 여지가 높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2장에서 나오는 자기 폄하로 이어지게 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자기 폄하는 몸의 학대로 이어진다. 금욕은 몸의 학대가 아니라, 몸을 살리는 일어야 한다. 그런데, 잘못된 생각은 몸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몸을 학대하게 된다. 이 점을 늘 조심해야 한다.

 

바울(실제 저자는 바울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을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므로, 그냥 저자를 바울로 쓴다.)의 의도는 단순히 하늘과 땅을 공간적 의미로 대조하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현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기에, ‘라는 말로 표상하는 것이다. 반면에, ‘땅의 것이라는 말도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땅의 것이란 하나님 나라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실현되지 않는 영적 세계를 말한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왜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는 지에 대한 것이다. 그에 대한 실마리는 1절과 3절이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존재이다.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정말 위대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다. ‘감추어져 있다라는 말은 헬라어 크륍토의 완료 수동태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우리의 생명은 위에 계신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다. 그렇기에, 땅에 속한 자들(, 하나님의 통치 안에 머물지 않는 자들)은 볼 수 없고, 해할 수도 없다. 이그나티우스를 비롯한 초대교부와 순교자 유스티노스 같은 순교자들은 이것을 아주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이 하나님 안에 있기에, 그들은 이 땅에서의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느끼는 지에 대한 여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지금 이렇게 생명이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다라는 말을 설명하고 있는 나도 이것을 설명하고 있으면서,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예전에, 오히려 공부가 덜 됐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별 생각 없이 안다고 생각했으니, 이제 공부를 좀 더 한 지금, 오히려 그 신비를 잘 알지 못하겠다. 아마도, 그것이 신비인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신비를 안다고 말하는 게 교만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과, 우리의 생명이 진짜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동경과 함께,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 종말이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 타고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실체가 밝히 드러나는 때를 말한다. 그래서 바울도 4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나는 우리 인생의 소망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매우 혼란스럽고, 생명에 대한 신비가 풀리지 않은 상태라, 무엇이 참된 생명이고, 참된 삶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고독한 것이고, 때론 방황하는 것이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너무도 아는 게 없다. 그렇다고 알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생명은. 그것은 하나님이 종말에 자기 안에 품고 계신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revelation)’해 주셔야 아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좌우충돌하더라도, 그리고 너무 절망스럽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견디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인생은 견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전쟁터 같다. 차라리 전쟁터이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아는 게 아닐까 싶다. 바울은 말한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 이것은 굉장히 영적인 말이다. 몸을 학대하라는 말이 아니다. 땅에 있는 지체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욕심, 탐심등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마음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다.

 

보이는 것과 싸우는 것은 오히려 쉽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은 쉽지 않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이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보여지는 삶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워서 이기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을 나열하고 있다.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8-9).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에서 지면, 실제로 보이는 삶은 망가진다. 무엇보다, 인간 관계가 깨진다.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고 보듬어야 할 인간이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인간의 생명을 가장 심하게 훼손하는 것은 인간의 악독한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에 진 사람의 말은 독을 뿜어낸다. 독사가 따로 없다. 그래서 그 말로 사람을 죽인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 즉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 안에 사는 사람, 위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자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12-14). 이것은 위에서 말한,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8-9)는 것과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위의 것과 땅의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 현실이 바로, 우리를 더욱더 위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며, 갈망하게 만든다. 삶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 생명의 신비가 온전히 드러나, 모든 고통 속에서 해방될 날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삶을 살면서, 이러한 저러한 일들로 혼란을 겪고 고통스럽더라도,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에, 그리고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드러날 것이기에,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한 번 잘 견뎌내 보자. 우리가 실수하고, 죄를 짓고, 우리의 삶이 뒤죽박죽이더라도, 우리의 생명을 품고 계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비록 거미줄처럼 가느다랗게 보일지라도, 그 희망이 우리를 살릴 것이다. 구원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숨기고 계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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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2. 21. 02:55

(생명)으로 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신명기 34:1-8)

 

주님,

집에 가고 싶습니다.

생명이 집에 가고 싶습니다.

생명을 갈망합니다.

참 생명을 갈망합니다

모세의 죽음이 속죄가 되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듯이,

이그나티우스의 순교가 속죄가 되어

교회가 굳건하게 세워졌듯이,

이사야의 순종이 속죄가 되어

곤고한 자들이 흑암 가운데서도

힘을 내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생명의 집으로 가는 이 길,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마침내 그 집에 다다르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21. 02:52

(생명)으로 가는 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34:1-8)

  

지난 주, 개인적으로 참 좋은 문서를 많이 읽었다. 기억에 또렷이 남는다. 첫째, 초대 교부인 이그나티우스의 편지가 기억에 남는다. 이그나티우스는 안디옥의 감독이었는데, 그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를 돌보며, 목회하다, 순교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살던 시대는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시대였다.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고, 로마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이중으로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늘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가 쓴 서신들(Letters) 중에서,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Romans)는 정말 압권이다. 길지 않다. 그런데, 거기에는 자신이 로마 당국에 죄수로 잡혀 곧 죽게 될 것을 알지만, 자신이 순교당하는 것을 막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 나온다. 이그나티우스가 순교를 두려워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는 순교를 통해서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가는 것”, 이것은 진정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죽음(순교)’을 통해서, ‘생명에게 다가서고자 했던, 그의 열망을 볼 수 있다.

 

순교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불이여, 십자가여, 야수와 싸우는 것이여, 뼈들을 비트는 것이여, 사지를 토막 내는 것이여, 내 몸 전체를 분쇄하는 것이여, 악마의 잔인한 고문들이여, 오라, 나로 하여금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게만 하라!”(5:3).

 

순교는 순식간에 목숨이 끊는 행위가 아니라, 죽기까지 모진 고통을 당해야 하는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그나티우스가 그러한 고통의 순간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갈 수 있다면, , 참된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문서를 보고, 그냥 세 글자만 머리에서 떠올랐다. “미친놈!”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의 순교를 막지 말라고, 방해하지 말라고,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당부하며, ‘순교에 따른 고통을 감내하겠다고,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이그나티우스는 자신 안에 생수가 있는데, 그것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오라!”(7:2).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이것도 정말 대단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저는 부패하기 쉬운 음식이나 이 세상의 맛좋은 것들을 전혀 즐기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그리스도의 육체인 하나님의 빵입니다. 음료수로는 저는 그분의 피를 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영원한 애찬입니다!”(7:3).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이그나티우스의 서신을 보고 놀라고 있는데, 또다른 문서를 만났다. 이사야서이다. 이사야 50장에는 세 번째 종의 노래가 나온다. 이사야서에는 네 개의 종의 노래가 나오는데, 이그나티우스의 서신을 마음에 품고 묵상하고 있는 동안 만나게 된 이사야의 종의 노래는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 이그나티우스는 어떻게 그러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어떻게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것을 기뻐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이사야서에서 찾은 기분이었다.

 

이사야서의 세 번째 종의 노래학자들의 혀와 학자들의 귀를 주님께서 주셨다는 고백을 담고 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시고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이사야 50:4). 종은 고백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혀와 귀를 어떻게 훈련시키셨는지. 종은 학자들의 혀를 가지고, 곤고한 자(지치고 약한자)에게 힘이 되는 말을 전한다. 종은 깨우쳐진 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종의 노래의 압권은 이 구절이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을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이사야 50:5-6).


이그나티우스만 그런 게 아니라, 이그나티우스는 이사야의 영성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 같았다. 물론, 이그나티우스의 영성은 이사야에게서 왔다기 보다는, 이사야의 종의 노래처럼 동일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시간 순서 상으로, 이사야가 먼저 있었고, 이사야의 말씀을 회당에서 낭독하며 이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이 다음에 있었고, 그 이후에 이그나티우스는 이사야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본받아 순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고난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면, 생명을 얻게 되는 데, 고난 받는 것을 불사하더라도, 그 생명에 이르겠다는 불굴의 의지(욕망)를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욕망을 어떻게 이루고 있는가 돌아볼 일이다.

 

우리는 생명을 갈망하고 있는가? 우리가 생명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일까? 우리는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사는 게무엇인지, 정말 알고 있는가?

 

마음에 남는 시를 한 편 읽었다. 이그나티우스의 서신과 이사야의 종의 노래로 씨름하고 있는데, 그래서 생명이란 무엇인지,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 시가 내게로 왔다.

 

<우리 명랑이랑 둘이>

ㅡ 황인숙

 

우리 명랑이랑 둘이

광화문을 다 걸어 보네

살랑살랑 햇살이

겨울을 어루만져 잠재우고

이상하게 조용한

한낮

우리 명랑이가

은행에를 다 들르고

버스에 다 타 보네

저 인간이 맨날

어디 나가나 궁금했지?

뭐하고 다니나 궁금했지?

버스를 내려

비탈길을 걸어서

알지, 명랑아?

우리 집이지?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네 계단,

한 층, 두 층, 세 층, 네 층,

다 왔네!

상자에 담겨 나갔다가

단지에 담겨 돌아왔네

, 우리 예쁜 명랑이……

 

이 시를 읽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한 동안 먹먹해서, 아무 말 못하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명랑이는 시인이 키우던 개다. 그런데, 그 개가 죽었다. 시인은 명랑이를 집에 놓아두고, 매일 집 밖을 나섰다. 물론 시인은 생명을 위한 일을 하러 돌아다니느라, 개와 함께 시간을 못 보냈을 것이다. 자신을 집에 남겨두고 집을 나서는 주인을 보며, 개는 궁금했을 것이다. “저 인간은 뭐하고 다니나?”

 

시인은 그런 개의 마음을 몰랐다. 그것을 알았다면, 자신이 어디를 가는 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지, 그곳에 개를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개와의 그 간절한 나들이는 개가 죽고 나서야 이뤄진다. 죽은 개를 상자에 담아, 시인은 그가 다니던 곳을 간다. 따스한 햇살이 드는 광화문도 가고, 은행도 들르고, 버스도 타고, 집 앞 골목길도 걷고, 계단도 오른다. 그런데, 그 계단은 ‘4에서 끝난다. 아마 시인은 죽음을 이렇게 표현하려고 한 것 같다. 시인의 개는 상자에 담겨 나갔다, ‘단지에 담겨 돌아왔다.


이 모든 문서를 읽으며, 동시에 들여다 본 문서는 레위기 신학이다. 이 문서는,이렇게 생명을 얻기 위하여 아등바등 살고 있는 우리네 인생이 사실은 죽음의 영역에 놓여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한 문서다. 레위기 문서에서 가장 마음을 두들긴 내용은 속죄에 대한 것이다. 레위기 공부를 통해서 속죄가 무엇인지,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은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히 배우겠지만, 그 속죄를 온몸으로 떠 안았던 모세의 삶이 내 심장을 파고 들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신명기의 마지막 장이다. 오경의 마지막 내러티브(이야기)이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저 멀리 보이는 가나안 땅을 보면서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드디어 가나안 땅에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을 축복하며 죽는다.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는 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며 의아해 한다. 흔히 우리는 그가 반석에 물을 내는 사건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냈기에, 그 죄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오경의 내러티브 구조에서, 모세의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라, ‘속죄의 의미를 지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레위기 신학에 이런 문장이 있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을 신명기 전체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세의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심지어 모세는 고난받는 중재자이고, 가나안 땅 밖에서의 그의 죽음은 일정 정도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은 것으로 묘사된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우리는 모세의 죽음을 대세자장의 죽음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 수 있다. 대제사장의 속죄 사역은 폭력적인 죽음과 결부된 피의 죄책으로부터 땅을 정화해 주고, 사람을 죽이고 도피성으로 피신했던 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그 자신의 죽음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중재자였던 모세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이 그들의 유업인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마이클 모랄레스, <레위기 신학>, 321).

 

우리는 집(생명)으로 가고 싶어한다. 오경의 내러티브(이야기) 구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는 이미 에덴동산을 떠나 죽음의 영역에서 죽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다시 집(생명)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모른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 길을 잃고 집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살고 있는 우리가 집(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속죄이다. ‘속죄는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이다.

 

시인을 깨우쳐 준 것은 명랑이의 죽음이다. 박해를 두려워 하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쳐 준 것은 이그나티우스의 죽음이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깨우쳐 준 것은 종의 죽음이다. 가나안 입성을 압 둔 이스라엘을 깨우쳐 준 것은 모세의 죽음이다. 십자가 위에서 발생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우치고 있는가?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

 

(생명)으로 가는 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느 비즈니스의 점원이 하는 말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알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삶을 주님께 드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이다. 나는 생명을 얻었고, 우리의 이웃들이 그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명랑이가, 이그나티우스가, 여호와의 종이, 모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묻고 있다.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