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20. 2. 25. 06:51

들꽃

 

삼신 할매가 점지해 준 씨를 타고

예언의 계곡 넘어

바람보다 먼저 도착한 너는

 

푸르고 검은 하늘의 눈동자에

고양이의 그것보다 빛나는 열정을

아지랭이처럼 나른하게 박아 놓는다

 

무엇인가 너는

나무의 손끝을 떨게 만드는

오후의 무심한 시간보다

아득한 곳을 상상하게 만드는

 

무너져가는 담장 옆에 둥지를 틀고

이제 막 솟구치려하는 푸른 잎사귀보다

간절하게 생명을 갈구하는 너는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물었지

여기를 지나가고 싶냐고

그러면 수수께끼를 맞혀야 한다고

그렇게 너는 묻는다

 

나는 답을 모른다

답을 모르기에 꺾여야 하는 것은

너의 목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놀이터  (0) 2021.05.26
안녕. 안녕. 안녕.  (0) 2020.03.14
백만개의 미소  (0) 2020.02.11
바이러스  (0) 2019.12.04
신발  (0) 2019.10.03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2. 25. 03:37

따뜻한 마음, 따뜻한 사회를 간구하는 기도

(19:9-18)

 

주님,

주의 말씀은 참 따뜻합니다.

춥고 배고픈 사람,

마음 아픈 사람이 없도록

배려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우리는 언제쯤 그런 주님의 따스한 마음을 닮아

따스한 사회를 이룰 수 있게 될런지요.

우리의 삶이,

우리의 사회가 비록 따뜻하지 못할지라도,

따뜻한 주님의 말씀 덕분에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따뜻한 마음과 따뜻한 사회를 이루어 나가려

노력하고, 인내하고, 또 노력할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따뜻한 마음을 갖고

따뜻한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일에 서툴어도

주님 말씀 의지하며 나아가오니,

주여, 힘을 주소서.

주의 말씀이 결국 승리할 것을 믿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25. 03:34

따뜻한 마음따뜻한 공동체

(레위기 19:9-18)

 

레위기가 법률이라는 것을 알면매우 차갑고 재미 없을 것이다라는 선입관이 생긴다. 물론 레위기 앞쪽에 나오는 제사법(제의)에 대한 부분은 현재 지구 상 어디에서도 실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레위기의 제사법은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된 바벨론 포로기 때, 그리고 제사를 경험한 적이 없는 많은 이들을 상대로 쓰여진 것이다.

 

인간에겐 다른 동물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인간은 경험을 하지 않아도, 상상력을 통해 무엇인가를 경험한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을 생각하고 창조해 낼 수 있다.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성경 공동체의 상상력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상적인 사회이다.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영국에서 살았던 토마스 모어는 성경의 이러한 이상적인 상상력을 자신만의 필치로 옮겨 적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유토피아>라는 책이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의 없다라는 뜻의 ‘ou’와 장소라는 뜻의 토포스가 합쳐진 말이다. 그래서 유토피아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사실,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장소를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경험할 수 있다.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인간이 가진 능력 중에, ‘상상력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그저 동물의 왕국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렇게 문명 사회를 찬란하게 이룬 이유는 모두 상상력덕분이다.

 

상상력이 없으면, 일차적으로 경제생활이 불가능하다. 경제라는 구조를 유지해주고 지탱해 주는 제1 요소는 이다. 그런데, 이라는 것은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돈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지금 여기에 ‘100짜리 지폐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것이 100불이라고 굳게 믿고, 100불을 향해 탐욕을 내지만, 실상, 이 지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이 100불이라는 상상력을 부여하고, 그 모든 상상력을 우리 인간이 공유하며,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성막 안에서 벌어지는 레위기의 제의(제사법)는 엄청난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 상상력이야 말로 신적인 능력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제의(제사법)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다.

 

레위기에서 계속하여 상상하는 세계는 에덴동산이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하여 참된 생명을 얻는 그러한 세상이다. 무지막지하게 비참한 현실 속에서 고통 받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상상력을 통하여 그러한 비참한 현실 속의 고통을 넘어서고 있다. 지금 그들은 죽음의 영역에 던져져 버린 부정한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통하여, 죽음의 영역에서 건짐(속량)을 받아,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질 것(속죄)를 굳게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상상력 없이 절대 불가능하다. 두 눈으로 자신들의 처해진 상황만을 보고 말았다면, 그들에게는 더 이상 살아갈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 눈으로 보이는 현실만 본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을 상상하고 갈망했다.

 

이스라엘이 상상한 에덴동산은 거룩한 세상이다. ‘거룩이라는 말은 굉장히 신학적인 용어이다. 속된 것이 제의를 통해서 정결해지는 것이고, 정결해진 것이 하나님의 성별을 통해서 거룩해진 것이다. ‘거룩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뜻이다.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 품 안에 그의 생명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다.

 

레위기의 전반부, 그리고 절정을 이루는 레위기 16장은 죽음의 영역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인생들이 어떻게 제의(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지, , 거룩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속한 인생으로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레위기의 후반부, 레위기 17장부터는 하나님께 속한 인생이 어떻게 생활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이 있다.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렐레스의 아들의 이름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에게 헌정한 책이거나, 아니면, 그의 아들에 의해서 편집된 책으로 여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에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 중에서 도덕적인 미덕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말한다. “도덕적인 미덕은 습관의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시중에 나와 있는 습관에 대한 모든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라 보면 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서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좋은 삶/행복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증이라고 보면 된다.

 

헬라어로, 습관은 Ethos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런 미덕은 습관이라는 말을 조금 고쳐서 도덕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62). , 그는 Ethos(습관)에서 Ethics(도덕/윤리)가 왔다고 말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그가 주장하는 것은 도덕적 미덕은 어떤 것도 우리 안에서 저절로 생겨나지 않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도덕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따라, 많은 이들은 습관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습관이 도덕/윤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습관을 통해 형성된 도덕/윤리가 좋은 삶/행복한 삶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레위기에서 말하는 좋은 삶/행복한 삶에 대한 생각은 많이 다르다. 레위기에서의 좋은 삶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한 삶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습관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력의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끊임없이 습관을 기를 것을 강조하지만, 레위기는 끊임없이 상상할 것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으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은 습관을 기를 것이다. 그들은 추수할 때 이삭을 많이 남겨놓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도둑질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거짓말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거짓 맹세와 하나님 모독을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억압과 착취, 그리고 임금 체불을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장애인에 대하여 배려하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불의하고 불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비방과 원망을 하지 않는 습관,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습관을 기를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은 습관을 기르기 보다, 계속하여 상상할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더 이상 아무런 걱정과 근심이 없고, 어떠한 욕심도 필요 없고, 절망과 눈물이 필요치 않는,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력 넘치는 삶에 대하여 끊임없이 상상할 것이다.

 

무엇이 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습관을 들이느라 고생하는 것보다, 상상력을 통해서 유토피아가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는, 그러한 거룩한 삶이 더 따뜻하고 창조적으로 보인다.

 

나는 이러한 상상력의 극치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그대로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이 말씀을 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로 더할 수 있겠느냐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6:25~34).

 

우리가 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삭을 남겨두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도둑질하고 거짓말을 하는가? 우리는 왜 거짓 맹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가? 우리는 왜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임금체불을 하는가? 우리는 왜 장애인을 배려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불의하고 불공정한 재판을 일삼는가? 우리는 왜 비방하고 원망하고 원수를 미워하는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다는, 바로 그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하나님께 속한 자로,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당신의 품 안에 감추어두신 것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상하지 못하고, 그저 두 눈으로 보이는 것들에만 현혹이 되어, 내 생명이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며, 자기의 생명을 자기가 어떻게 좀 살게 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며 욕심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전반에 흐르고 있으며, 레위기가 우리에게 강력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그 거룩한 상상력을 배우자. 그 상상력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레위기를 공부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레위기에서 상상력을 배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속죄를 받아,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염려하는 비참한 인간이 아닌, 우리의 생명을 당신 품에 감추어두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누리며 사는, 좋은 인생, 행복한 삶을 사는 참으로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러한 따뜻한 마음으로, 따뜻한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배자  (0) 2020.03.16
내어줌 - 종의 노래 4  (0) 2020.03.11
'위의 것을 찾으라'의 의미  (0) 2020.02.21
집(생명)으로 가는 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0) 2020.02.21
미니스트리  (0) 2020.02.11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2. 21. 03:02

위의 것을 찾기를 간구하는 기도

(골로새서 3:1-17)

 

주님,

위의 것을 생각하며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실현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 신비를 다 깨닫지 못해

생명에 대하여 무지하고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우리의 삶이 고독하고 아프고 고통스럽더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생명이 영광 중에 드러날 것을 믿기에

인내하며 견디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우리의 생명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믿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21. 02:57

위의 것을 찾으라의 의미

(골로새서 3:1-17)

 

왜곡된 율법주의와 헬라 철학의 이원론이 만들어낸 헛된 사상과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금욕주의와 그릇된 겸손에서 비롯된 자기 폄하를 가져왔다. 이것의 문제는 율법이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구원하는 게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종교적 금욕이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는, 이상한 구원론에 빠지게 된다.

 

이것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바울은 골로새 교회 지체들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고 권면한다. 1절에서는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고, 2절에서는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한다. 이 두 개의 말을 종합해 보면, 위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라는 뜻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위의 것이란 무엇인가?

 

언뜻 보면, 2절 말씀에서처럼, ‘위의 것땅의 것과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땅의 것을 하찮고 저등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 여지가 높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2장에서 나오는 자기 폄하로 이어지게 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자기 폄하는 몸의 학대로 이어진다. 금욕은 몸의 학대가 아니라, 몸을 살리는 일어야 한다. 그런데, 잘못된 생각은 몸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몸을 학대하게 된다. 이 점을 늘 조심해야 한다.

 

바울(실제 저자는 바울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을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므로, 그냥 저자를 바울로 쓴다.)의 의도는 단순히 하늘과 땅을 공간적 의미로 대조하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현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기에, ‘라는 말로 표상하는 것이다. 반면에, ‘땅의 것이라는 말도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땅의 것이란 하나님 나라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실현되지 않는 영적 세계를 말한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왜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는 지에 대한 것이다. 그에 대한 실마리는 1절과 3절이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존재이다.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정말 위대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다. ‘감추어져 있다라는 말은 헬라어 크륍토의 완료 수동태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우리의 생명은 위에 계신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다. 그렇기에, 땅에 속한 자들(, 하나님의 통치 안에 머물지 않는 자들)은 볼 수 없고, 해할 수도 없다. 이그나티우스를 비롯한 초대교부와 순교자 유스티노스 같은 순교자들은 이것을 아주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이 하나님 안에 있기에, 그들은 이 땅에서의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느끼는 지에 대한 여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지금 이렇게 생명이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다라는 말을 설명하고 있는 나도 이것을 설명하고 있으면서,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예전에, 오히려 공부가 덜 됐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별 생각 없이 안다고 생각했으니, 이제 공부를 좀 더 한 지금, 오히려 그 신비를 잘 알지 못하겠다. 아마도, 그것이 신비인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신비를 안다고 말하는 게 교만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과, 우리의 생명이 진짜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동경과 함께,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 종말이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 타고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실체가 밝히 드러나는 때를 말한다. 그래서 바울도 4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나는 우리 인생의 소망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매우 혼란스럽고, 생명에 대한 신비가 풀리지 않은 상태라, 무엇이 참된 생명이고, 참된 삶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고독한 것이고, 때론 방황하는 것이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너무도 아는 게 없다. 그렇다고 알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생명은. 그것은 하나님이 종말에 자기 안에 품고 계신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revelation)’해 주셔야 아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좌우충돌하더라도, 그리고 너무 절망스럽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견디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인생은 견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전쟁터 같다. 차라리 전쟁터이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아는 게 아닐까 싶다. 바울은 말한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 이것은 굉장히 영적인 말이다. 몸을 학대하라는 말이 아니다. 땅에 있는 지체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욕심, 탐심등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마음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다.

 

보이는 것과 싸우는 것은 오히려 쉽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은 쉽지 않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이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보여지는 삶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워서 이기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을 나열하고 있다.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8-9).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에서 지면, 실제로 보이는 삶은 망가진다. 무엇보다, 인간 관계가 깨진다.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고 보듬어야 할 인간이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인간의 생명을 가장 심하게 훼손하는 것은 인간의 악독한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에 진 사람의 말은 독을 뿜어낸다. 독사가 따로 없다. 그래서 그 말로 사람을 죽인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 즉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 안에 사는 사람, 위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자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12-14). 이것은 위에서 말한,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8-9)는 것과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위의 것과 땅의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 현실이 바로, 우리를 더욱더 위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며, 갈망하게 만든다. 삶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 생명의 신비가 온전히 드러나, 모든 고통 속에서 해방될 날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삶을 살면서, 이러한 저러한 일들로 혼란을 겪고 고통스럽더라도,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에, 그리고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드러날 것이기에,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한 번 잘 견뎌내 보자. 우리가 실수하고, 죄를 짓고, 우리의 삶이 뒤죽박죽이더라도, 우리의 생명을 품고 계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비록 거미줄처럼 가느다랗게 보일지라도, 그 희망이 우리를 살릴 것이다. 구원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숨기고 계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어줌 - 종의 노래 4  (0) 2020.03.11
따뜻한 마음, 따뜻한 공동체  (0) 2020.02.25
집(생명)으로 가는 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0) 2020.02.21
미니스트리  (0) 2020.02.11
무엇을 기억하는가?  (0) 2020.02.10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2. 21. 02:55

(생명)으로 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신명기 34:1-8)

 

주님,

집에 가고 싶습니다.

생명이 집에 가고 싶습니다.

생명을 갈망합니다.

참 생명을 갈망합니다

모세의 죽음이 속죄가 되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듯이,

이그나티우스의 순교가 속죄가 되어

교회가 굳건하게 세워졌듯이,

이사야의 순종이 속죄가 되어

곤고한 자들이 흑암 가운데서도

힘을 내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생명의 집으로 가는 이 길,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마침내 그 집에 다다르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21. 02:52

(생명)으로 가는 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34:1-8)

  

지난 주, 개인적으로 참 좋은 문서를 많이 읽었다. 기억에 또렷이 남는다. 첫째, 초대 교부인 이그나티우스의 편지가 기억에 남는다. 이그나티우스는 안디옥의 감독이었는데, 그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를 돌보며, 목회하다, 순교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살던 시대는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시대였다.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고, 로마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이중으로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늘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가 쓴 서신들(Letters) 중에서,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Romans)는 정말 압권이다. 길지 않다. 그런데, 거기에는 자신이 로마 당국에 죄수로 잡혀 곧 죽게 될 것을 알지만, 자신이 순교당하는 것을 막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 나온다. 이그나티우스가 순교를 두려워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는 순교를 통해서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가는 것”, 이것은 진정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죽음(순교)’을 통해서, ‘생명에게 다가서고자 했던, 그의 열망을 볼 수 있다.

 

순교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불이여, 십자가여, 야수와 싸우는 것이여, 뼈들을 비트는 것이여, 사지를 토막 내는 것이여, 내 몸 전체를 분쇄하는 것이여, 악마의 잔인한 고문들이여, 오라, 나로 하여금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게만 하라!”(5:3).

 

순교는 순식간에 목숨이 끊는 행위가 아니라, 죽기까지 모진 고통을 당해야 하는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그나티우스가 그러한 고통의 순간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갈 수 있다면, , 참된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문서를 보고, 그냥 세 글자만 머리에서 떠올랐다. “미친놈!”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의 순교를 막지 말라고, 방해하지 말라고,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당부하며, ‘순교에 따른 고통을 감내하겠다고,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이그나티우스는 자신 안에 생수가 있는데, 그것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오라!”(7:2).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이것도 정말 대단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저는 부패하기 쉬운 음식이나 이 세상의 맛좋은 것들을 전혀 즐기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그리스도의 육체인 하나님의 빵입니다. 음료수로는 저는 그분의 피를 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영원한 애찬입니다!”(7:3).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이그나티우스의 서신을 보고 놀라고 있는데, 또다른 문서를 만났다. 이사야서이다. 이사야 50장에는 세 번째 종의 노래가 나온다. 이사야서에는 네 개의 종의 노래가 나오는데, 이그나티우스의 서신을 마음에 품고 묵상하고 있는 동안 만나게 된 이사야의 종의 노래는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 이그나티우스는 어떻게 그러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어떻게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것을 기뻐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이사야서에서 찾은 기분이었다.

 

이사야서의 세 번째 종의 노래학자들의 혀와 학자들의 귀를 주님께서 주셨다는 고백을 담고 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시고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이사야 50:4). 종은 고백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혀와 귀를 어떻게 훈련시키셨는지. 종은 학자들의 혀를 가지고, 곤고한 자(지치고 약한자)에게 힘이 되는 말을 전한다. 종은 깨우쳐진 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종의 노래의 압권은 이 구절이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을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이사야 50:5-6).


이그나티우스만 그런 게 아니라, 이그나티우스는 이사야의 영성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 같았다. 물론, 이그나티우스의 영성은 이사야에게서 왔다기 보다는, 이사야의 종의 노래처럼 동일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시간 순서 상으로, 이사야가 먼저 있었고, 이사야의 말씀을 회당에서 낭독하며 이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이 다음에 있었고, 그 이후에 이그나티우스는 이사야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본받아 순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고난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면, 생명을 얻게 되는 데, 고난 받는 것을 불사하더라도, 그 생명에 이르겠다는 불굴의 의지(욕망)를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욕망을 어떻게 이루고 있는가 돌아볼 일이다.

 

우리는 생명을 갈망하고 있는가? 우리가 생명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일까? 우리는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사는 게무엇인지, 정말 알고 있는가?

 

마음에 남는 시를 한 편 읽었다. 이그나티우스의 서신과 이사야의 종의 노래로 씨름하고 있는데, 그래서 생명이란 무엇인지,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 시가 내게로 왔다.

 

<우리 명랑이랑 둘이>

ㅡ 황인숙

 

우리 명랑이랑 둘이

광화문을 다 걸어 보네

살랑살랑 햇살이

겨울을 어루만져 잠재우고

이상하게 조용한

한낮

우리 명랑이가

은행에를 다 들르고

버스에 다 타 보네

저 인간이 맨날

어디 나가나 궁금했지?

뭐하고 다니나 궁금했지?

버스를 내려

비탈길을 걸어서

알지, 명랑아?

우리 집이지?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네 계단,

한 층, 두 층, 세 층, 네 층,

다 왔네!

상자에 담겨 나갔다가

단지에 담겨 돌아왔네

, 우리 예쁜 명랑이……

 

이 시를 읽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한 동안 먹먹해서, 아무 말 못하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명랑이는 시인이 키우던 개다. 그런데, 그 개가 죽었다. 시인은 명랑이를 집에 놓아두고, 매일 집 밖을 나섰다. 물론 시인은 생명을 위한 일을 하러 돌아다니느라, 개와 함께 시간을 못 보냈을 것이다. 자신을 집에 남겨두고 집을 나서는 주인을 보며, 개는 궁금했을 것이다. “저 인간은 뭐하고 다니나?”

 

시인은 그런 개의 마음을 몰랐다. 그것을 알았다면, 자신이 어디를 가는 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지, 그곳에 개를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개와의 그 간절한 나들이는 개가 죽고 나서야 이뤄진다. 죽은 개를 상자에 담아, 시인은 그가 다니던 곳을 간다. 따스한 햇살이 드는 광화문도 가고, 은행도 들르고, 버스도 타고, 집 앞 골목길도 걷고, 계단도 오른다. 그런데, 그 계단은 ‘4에서 끝난다. 아마 시인은 죽음을 이렇게 표현하려고 한 것 같다. 시인의 개는 상자에 담겨 나갔다, ‘단지에 담겨 돌아왔다.


이 모든 문서를 읽으며, 동시에 들여다 본 문서는 레위기 신학이다. 이 문서는,이렇게 생명을 얻기 위하여 아등바등 살고 있는 우리네 인생이 사실은 죽음의 영역에 놓여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한 문서다. 레위기 문서에서 가장 마음을 두들긴 내용은 속죄에 대한 것이다. 레위기 공부를 통해서 속죄가 무엇인지,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은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히 배우겠지만, 그 속죄를 온몸으로 떠 안았던 모세의 삶이 내 심장을 파고 들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신명기의 마지막 장이다. 오경의 마지막 내러티브(이야기)이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저 멀리 보이는 가나안 땅을 보면서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드디어 가나안 땅에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을 축복하며 죽는다.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는 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며 의아해 한다. 흔히 우리는 그가 반석에 물을 내는 사건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냈기에, 그 죄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오경의 내러티브 구조에서, 모세의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라, ‘속죄의 의미를 지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레위기 신학에 이런 문장이 있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을 신명기 전체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세의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심지어 모세는 고난받는 중재자이고, 가나안 땅 밖에서의 그의 죽음은 일정 정도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은 것으로 묘사된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우리는 모세의 죽음을 대세자장의 죽음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 수 있다. 대제사장의 속죄 사역은 폭력적인 죽음과 결부된 피의 죄책으로부터 땅을 정화해 주고, 사람을 죽이고 도피성으로 피신했던 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그 자신의 죽음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중재자였던 모세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이 그들의 유업인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마이클 모랄레스, <레위기 신학>, 321).

 

우리는 집(생명)으로 가고 싶어한다. 오경의 내러티브(이야기) 구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는 이미 에덴동산을 떠나 죽음의 영역에서 죽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다시 집(생명)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모른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 길을 잃고 집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살고 있는 우리가 집(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속죄이다. ‘속죄는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이다.

 

시인을 깨우쳐 준 것은 명랑이의 죽음이다. 박해를 두려워 하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쳐 준 것은 이그나티우스의 죽음이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깨우쳐 준 것은 종의 죽음이다. 가나안 입성을 압 둔 이스라엘을 깨우쳐 준 것은 모세의 죽음이다. 십자가 위에서 발생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우치고 있는가?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

 

(생명)으로 가는 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느 비즈니스의 점원이 하는 말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알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삶을 주님께 드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이다. 나는 생명을 얻었고, 우리의 이웃들이 그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명랑이가, 이그나티우스가, 여호와의 종이, 모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묻고 있다.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Posted by 장준식

순교의 광기?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어떤 '광기'가 느껴진다.

 

그의 편지에 대한 어떤 신학자의 평가처럼, 순교를 향한 그의 태도는 '자기 학대 경향'을 보이기도 하고, '순교자 정신의 광채'를 보여주기도 한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자기의 순교를 막지 말라는 당부를 전한다. "저는 방해 없이 저의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행운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1:2). 이그나티우스는 순교를 행운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순교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4:1).

 

그는 말한다. "저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기를 원합니다"(3:2). 그에게 순교는 세상이 그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게 해주는 수단 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음 구절은 순교에 대한 그의 광기 또는 광채를 보여준다. "불이여, 십자가여, 야수와 싸우는 것이여, 뼈들을 비트는 것이여, 사지를 토막내는 것이여, 내 몸 전체를 분쇄하는 것이여, 악마의 잔인한 고문들이여, 오라, 나로 하여금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게만 하여라!"(5:3).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독히도 갈망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은 생명에 이르게 한다. 온전한 지식이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주장은 이그나티우스를 비롯한 초대 교부들의 사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장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면서, 그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의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열정도 타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부패하기 쉬운 음식이나 이 세상의 맛좋은 것들을 전혀 즐기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그리스도의 육체인 하나님의 빵입니다. 음료수로는 저는 그분의 피를 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영원한 애찬입니다!"(7:3).

 

교회는 순교자의 핏값으로 세워졌다는 말이 있다. 그 진술의 중심에 이그나티우스가 있다. 우리가 이그나티우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선다면, 우리도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게 될까?

 

순교의 '광기'는 고사하고, 순교의 정신, 또는 광채를 찾아보기 힘든 이 시절에, 우리의 신앙은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신앙이 얕아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그나티우스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세상에 두지 마십시오"(7:1).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

 

골로새서는 거짓 교훈을 바로 잡기 위해 애쓴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교훈은 왜곡된 유대주의와 헬라의 이원론이 혼합하여 만들어낸 헛된 사상과 가르침을 말한다.

 

왜곡된 유대주의와 헬라의 이원론이 만나면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무엇보다 육신을 부정하게 되고, 학대하게 되며, 거짓 겸손에 사로잡히게 된다.

 

왜곡된 유대주의는 율법을 오용하게 만든다. 이는 율법의 몇 가지 행위를 철저히 지키는 것을 통해 표출되는데, 음식 규정이나 절기 규정 같은 것을 통해서 종교적 금욕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율법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종교적 금욕주의가 발전하게 되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 대신 율법이 생명을 준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종교적 금욕주의를 통해 구원 받는다는 사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이 헬라의 이원론과 만나게 되면 몸에 대한 자기 비하는 겉잡을 수 없게 번진다. 플라톤의 사상에 뿌리를 둔 헬라철학은 물질세계를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물질세계를 영원의 세계의 그림자로만 볼 뿐이다. 그래서 이원론의 세계에서 구원이란 악한 물질세계를 탈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몸을 비하하게 만든다. 몸을 벗어버리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몸을 정당하게 학대하기 위해서 종교적 금욕주의는 매우 요긴한 도구가 된다. 복음도 이렇게 변한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말을 서슴치 안고 한다.

 

자신의 몸을 비하하는 것은 그릇된 겸손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몸에 대한 폭력이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자기의 육신은 저급한 것이니 금욕을 통해 절제하고 통제하고, 괴롭히고 학대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한 것을 효과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이요, 그러한 것을 철저하게 실행하고 실천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거짓된 가르침에 머물게 된다.

 

골로새서는 이러한 헛된 사상과 가르침에 일침을 가하며, 이러한 사상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것을 이미 성경에서 이렇게 2천년 전부터 경고했는데, 아직도 못알아듣고, 자기 비하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잘못된 금욕은 생득적인 기쁨을 제어하고 빼앗는다. 이러한 헛된 사상과 가르침에 물들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몸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고백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

 

우리는 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날마다 은총과 자비를 간구하며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인 것을 실감하고 절감하고 간절히 고백하기 위해서, 한 가지 해볼 수 있는 것은 율법을 과감하게 어겨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아주 잘 하고 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현대 그리스도인 중에 이것을 잘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는가? 현대인들은 안식이 무엇인지 모르고, 거룩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늘 불안한 인생을 산다. 그러니, 현대 그리스도인은 "몸의 주인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지중에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웃긴 이야기 같지만, 사실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를 선포하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자비가 함께 하길 빈다.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초기 기독교문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The Epistle to Diognetus>를 보면 정말 멋진 말이 나온다.

 

"In a word, what the soul is in a body, this the Christians are in the world"(ED, 6:1).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혼이 몸에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정체성을 지니고 이 세상을 산다면, 이 세상은 어떠한 세상이 될지, 상상만 해도 멋지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영혼이다. 그리스도인이 그 역할을 잘 감당하면, 이 세상은 영혼이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지만,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당연히 이 세상은 영혼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영혼이 아름다우면, 그 사람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고 칭찬을 하게 된다. 그런데, 영혼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시간 낭비와 괴로운 일도 없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의 증언대로라면, 이 세상이 살 만한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달린 것 아닌가. 이러한 중차대한 사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인생을 허투루 살 수 없는 게 분명하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질 뿐 아니라,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된 것 같아, 우쭐하기까지 하다. 저자가 누구인지, 물론 편지에서 밝히는 저자는 "사도의 제자(a disciple of the Apostles)'이지만, 이렇게 멋진 말을 하는 그가 매우 궁금하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0. 2. 11. 03:19

백만개의 미소

 

백만개의 미소

탈출하지 못한 자의 절망

바람의 무심한 마음은

먼지에게 전이되어

땅바닥만 쓸쓸하게 만들고 있다

 

레드우드(Redwood)의 몸 가장 높은 곳에 난 손가락이

땅바닥의 존재들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이런 날은 흐리거나 비가 와 줘야 하는데

하늘이 너무 맑아

레드우드의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저주를 눈치 채는

땅바닥의 존재는 아무도 없다

 

해가 뜬지 세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꺼질 줄 모르는 등불은

어제를 그리워하는 것인지

내일을 기다리는 것인지 모르게

쏟아지는 햇살을 비켜가고 있다

 

아이야,

손가락을 좀 치워주렴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저주는

저주가 아니라 웃음거리일 뿐이야

 

레드우드가 손가락을 치울 때

그 사이로 쏟아지는

백만개의 미소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녕. 안녕. 안녕.  (0) 2020.03.14
들꽃  (1) 2020.02.25
바이러스  (0) 2019.12.04
신발  (0) 2019.10.03
하품  (0) 2019.10.02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2. 11. 03:18

미니스트리를 간구하는 기도

(출애굽기 32:30-34)

 

주님,

모세의 미니스트리를 비롯한

주의 종들의 미니스트리를 기억합니다.

그들의 미니스트리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없었을 지 모릅니다.

그들의 순종과 헌신 덕분에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우리도 미니스트리를 하는 거룩한 자리에 있게 된 줄 믿습니다.

미니스트리는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중재요 속죄인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미니스트리 없이 하나님의 가능성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니스트리를 하면 하나님의 가능성은

현실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손과 발에 포개어

그분이 하신 미니스트리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이어가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11. 03:16

미니스트리

(출애굽기 32:30-34)

 

오경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다 보면, 발견되는 것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미니스트리이다. ‘Ministry’, 우리는 이것을 사역이라고 부른다. 사역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사역교회의 일로 여겨진다. 교회에서 하는 일을 우리는 보통 사역이라고 부른다.

 

우리도 사역을 한다. 작년, 2020년도를 준비하며, 우리는 5가지의 핵심 사역에 대하여 논의했다. 우리교회의 5가지 핵심 사역은 다음과 같다.

 

1) 주일예배 (찬양예배+온가족성찬예배)

2) 소그룹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

3) 교육/훈련 (세화성서아카데미)

4) 에클레시아 사역 (2021년 론칭 목표)

5) 차세대 (청년/청소년/아동부)

 

이것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은 주일예배에 집중하고, 차세대 사역(특별히 청년사역)에 집중하기 위해서 수요예배를 청년예배로 전환하는 방안과 수요일, 또는 목요일에 청년사역(청년예배/친교를 돕는 일)을 하고, 어른들이 청년들을 돕는 사역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하여 논의했다. 이것을 내리사랑 사역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어른들이 청년들을 돕고, 청년들이 청소년을 돕고, 청소년은 어린이를 돕는 사역의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주중/주말, 소그룹 모임 활성화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소그룹 모임의 활성화를 위하여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또한 속회라는 이름을 좀 더 부드럽고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이름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누었다. 무엇이든지, 제도적 용어에서 선교적 용어로의 전환의 필요성과 중요성도 함께 이야기 나누었다.


우리교회의 이러한 사역 방침은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난 3년간 여러분과 함께 교회를 세워 나가며, 많은 만남과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사역의 방향이다. 교회의 사역을 이러한 방향으로 정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시대와 우리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이 지역의 요청이다. 교회를 향한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요청은 선교적 교회로 거듭나기 Born again as a Missional Church’이다. 이것을 위해서 필요한 키워드는 단순함과 집중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신 아래, 교회의 사역을 단순하게 만들고, 집중력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의 정신이 곧 우리의 정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갈망한다!”

 

시적인 표현을 쓰자면, ‘사역이 우리에게 왔다.’ 사역은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사역은 오는 것이고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고 한다. 사역은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 어느날 우리는 하나님이 사역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사역은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오경의 내러티브는 이러한 사역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오경의 내러티브를 읽어나가면서 매우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한다. 바로, 창세기 3장에서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추방 사건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의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다 갑자기 3장에서 분위기가 바뀐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으로 인해 선하고 아름다운 동산,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오경의 내러티브 맥락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사건을 보면서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다. “아담(잇쉬)은 하와(잇샤)를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을 수 없었을까?”

 

에덴동산의 내러티브(narrative)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것은 하와이다. 이것은 여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 다만,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잇샤', 즉 나와 동일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말하는 것이다. '나와 동일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목격하고 들었을 때, 아담의 반응은 어떠해야 했나? 우리가 에덴동산의 내러티브에서 목격하는 아담(잇쉬)의 반응은 하와(잇샤)와 동일하게 죄를 짓는 모습이다.

 

정말 궁금한 게 있다. “아담은 이 사태를 막을 수 없었을까?” 아담은 하와의 죄를 목격했을 때, 동일하게 죄를 짓는 게 아니라, 그를 대신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대속물로 내어 놓고, '속죄(atonement)'할 수 없었을까? 가능성도 있었지만, 에덴동산의 내러티브에서 우리가 보는 아담의 행동은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속죄를 하지 못하고, '잇샤'와 동일하게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경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다 보면,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아담과는 다른 길을 걸었던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모세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것은 하나님의 집, 즉 에덴동산에 오른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성경공부를 하신 분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이해될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세화성서아카데미를 통한 교육/훈련은 우리교회의 핵심 사역 중 하나이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의 심층적인 깊이로 들어가게 도와드리는 성경공부에 꼭 참여하시라. 시간이 맞지 않아 못 참석하시면, 동영상 시청을 꼭 하시라. 힘들게 촬영해서 업로드 해드리는 이유다. 이 사역을 위해 힘쓰는 미디어팀의 헌신을 잊지 마시라.)

 

우리가 읽은 본문이다. 모세는 시내산 정상에 오른다. 그곳은 에덴동산이고, 성막의 지성소이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는 바람에 인간들이 에덴동산 바깥에서 유랑하며 죽음의 영역에서 살았는데, 인류는 비로소 출애굽사건을 통해, 시내산에 올라(에덴동산에 들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다시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다시 옮겨진 것이다.

 

그런데, 에덴동산인 시내산 꼭대기에서 새로운 아담인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사이에, 산기슭에 머물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죽은 줄 알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자신들을 인도해낸 이라고 선포하며 축제를 벌였다. 그 사건으로 인해, 출애굽하여 겨우겨우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게 될 기회를 얻는 이스라엘은 또다른 추방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죽음에 처해질 것인가, 생명을 얻을 것인가(구원 받을 것인가)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것은 바로 모세의 미니스트리(사역)’ 덕분이었다. 죽음에 처하게 된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30).

 

속죄(atonement)’는 오경의 내러티브의 핵심이다. 오경의 문학구조 내에서, 오경의 중심은 레위기 16장에 있다. 레위기 16장은 대속죄일에 대한 내러티브가 나오는 것으로, 오경의 내러티브는 레위기 16장의 속죄를 수렴했다 발산한다. ‘속죄는 죄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옮기는 속량이고, 죄의 영역에서 더렵혀진 것을 깨끗케 하는 정결이다. 그리고 속죄는 그리함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모세는 다시 시내산 정상에 올라, 즉 에덴동산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한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상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1-32).

 

여기서 우리는 미니스트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모세에게서 아담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내는 위대한 미니스트리를 발견한다. 아담은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와를 위하여 속죄하지 못했다. , 아담은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인 하와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놓지 못했다. 만약,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하와를 위하여 모세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놓고 속죄했다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니스트리는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중재요 속죄다. 미니스트리 없이 하나님의 가능성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미니스트리를 하면 하나님의 가능성은 현실이 된다. 일명, '아담신학'은 그렇게 실패한 에덴동산에서의 '속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극복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둘째 아담으로 소개한다( 5). 첫째 아담은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는 속죄에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아, 속죄에 성공한다.

 

요한복음도 '아담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동산(에덴동산의 메타포)에 있을 때, 예수님의 시신을 보러 찾아온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불렀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한다( 19:41, 20:15). 예수님은 동산지기, 즉 아담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오경의 내러티브의 중심은 레위기 16, '속죄'이다. 오경의 모든 이야기는 '속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속죄에 성공하면, 즉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서 생명을 얻지만, 속죄에 성공하지 못하면, 즉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죽음에 이르게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니스트리는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중재요 속죄다. 미니스트리 없이 하나님의 가능성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미니스트리를 하면 하나님의 가능성은 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미니스트리는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가 미니스트리를 어떻게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현실로 드러나느냐, 아니면, 드러나지 못하고 죽게 되느냐가 결정된다. , 미니스트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가능성, 즉 죽음 가운데서 생명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교회에 주신 미니스트리를 생각하며, 오늘날, 그리고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를 묵상해 보면 좋겠다. 어떠한 행동과 어떠한 말이 속죄가 되는 것일까?(생명을 창조해 낼 것인가?) 이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갖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우리의 영원한 대속물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간구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미니스트리를 믿음으로 감당해 나가자. 그러면, 우리의 삶과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 생명이 풍성하게 넘치게 될 줄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2. 10. 04:28

놓아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주여 나를 놓아 주소서.

생명이 아닌 것에 매어 있다면,

나를 풀어 자유케 하소서.

한 숨이 나오고

맥박이 거칠며

몸이 아프다 절규하는

우리의 가엾은 생명을 돌보아 주소서.

숨 쉬고 있는 거 같으나

죽어 있는

우리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늘을 나는 공중의 새보다 못한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풀보다 못한

걱정과 근심에 휩싸여

인생의 폭풍 가운데

심하게 멀미하고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여 주소서.

생명을 받았으나

죽음의 일만 생산해 내고 있는

이 죄로 물든 생명을 거두어 주소서.

주여 나를 놓아 주소서.

한 번의 숨만이라도

평안의 숨이 되기를 소망하나이다.

매어 있던 나귀를 풀어주셨듯이,

주여 나를 풀어 놓아 주소서.

나에게 주신 생명이

생명으로 흐르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만난다는 것의 의미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만남(모에드)의 장막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이와에드)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노아드티)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만남의 장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 29:42~43).

 

이것은 성막 제도 전체의 중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인데, 이 구절의 중심 단어는 '만나다(모에드)'라는 말이에요.

 

'만난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이죠. 우리는 그동안 누군가를 수도없이 만났는데, 진짜로 만난 적이 없을 수도 있죠.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누군가와 수도 없이 만나지만, 실제로는 만나지 않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을 수도 없이 만나러 교회에 오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사랑이 없으면 만난 게 아니고,

앎이 없으면 만난 게 아니고,

내어줌이 없으면 만난 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 모두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사랑 없이,

앎 없이,

내어줌 없이

만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공허한 일만 되풀이하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우리의 삶은 공허한 것이겠죠.

 

만나는 일(모에드)은 참 신비로운 일이에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면, 만나는 일의 신비를 깨닫게 되겠죠.

 

"주님, 만남의 신비를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이 저를 만나주시고, 제가 주님을 만났듯이, 제 삶 속에서의 모든 만남 가운데서 사랑과 앎과 내어줌이 있게 하셔서, 생명의 공허가 아니라 생명의 충만이 있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