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0. 2. 10. 04:28

놓아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주여 나를 놓아 주소서.

생명이 아닌 것에 매어 있다면,

나를 풀어 자유케 하소서.

한 숨이 나오고

맥박이 거칠며

몸이 아프다 절규하는

우리의 가엾은 생명을 돌보아 주소서.

숨 쉬고 있는 거 같으나

죽어 있는

우리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늘을 나는 공중의 새보다 못한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풀보다 못한

걱정과 근심에 휩싸여

인생의 폭풍 가운데

심하게 멀미하고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여 주소서.

생명을 받았으나

죽음의 일만 생산해 내고 있는

이 죄로 물든 생명을 거두어 주소서.

주여 나를 놓아 주소서.

한 번의 숨만이라도

평안의 숨이 되기를 소망하나이다.

매어 있던 나귀를 풀어주셨듯이,

주여 나를 풀어 놓아 주소서.

나에게 주신 생명이

생명으로 흐르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만난다는 것의 의미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만남(모에드)의 장막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이와에드)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노아드티)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만남의 장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 29:42~43).

 

이것은 성막 제도 전체의 중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인데, 이 구절의 중심 단어는 '만나다(모에드)'라는 말이에요.

 

'만난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이죠. 우리는 그동안 누군가를 수도없이 만났는데, 진짜로 만난 적이 없을 수도 있죠.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누군가와 수도 없이 만나지만, 실제로는 만나지 않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을 수도 없이 만나러 교회에 오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사랑이 없으면 만난 게 아니고,

앎이 없으면 만난 게 아니고,

내어줌이 없으면 만난 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 모두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사랑 없이,

앎 없이,

내어줌 없이

만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공허한 일만 되풀이하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우리의 삶은 공허한 것이겠죠.

 

만나는 일(모에드)은 참 신비로운 일이에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면, 만나는 일의 신비를 깨닫게 되겠죠.

 

"주님, 만남의 신비를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이 저를 만나주시고, 제가 주님을 만났듯이, 제 삶 속에서의 모든 만남 가운데서 사랑과 앎과 내어줌이 있게 하셔서, 생명의 공허가 아니라 생명의 충만이 있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아담의 실패 - 아담신학

 

아담(잇쉬)은 하와(잇샤)를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을 수 없었을까?

 

에덴동산의 내러티브(narrative)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것은 하와이다. 이것은 여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 다만,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잇샤', 즉 나와 동일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말하는 것이다.

 

'나와 동일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목격하고 들었을 때, 아담의 반응은 어떠해야 했나? 우리가 에덴동산의 내러티브에서 목격하는 아담(잇쉬)의 반응은 하와(잇샤)와 동일하게 죄를 짓는 모습이다.

 

아담은 이 사태를 막을 수 없었을까? 아담은 하와의 죄를 목격했을 때, 동일하게 죄를 짓는 게 아니라, 그를 대신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대속물로 내어 놓고, '속죄(atonement)'할 수 없었을까?

 

가능성도 있었지만, 에덴동산의 내러티브에서 우리가 보는 아담의 행동은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속죄를 하지 못하고, '잇샤'와 동일하게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일명, '아담신학'은 그렇게 실패한 에덴동산에서의 '속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극복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둘째 아담으로 소개한다( 5). 첫째 아담은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는 속죄에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아, 속죄에 성공한다.

 

요한복음도 '아담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동산(에덴동산의 메타포)에 있을 때, 예수님의 시신을 보러 찾아온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불렀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한다( 19:41, 20:15). 예수님은 동산지기, 즉 아담이라는 것이다.

 

오경의 내러티브의 중심은 레위기 16, '속죄'이다. 오경의 모든 이야기는 '속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속죄에 성공하면, 즉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서 생명을 얻지만, 속죄에 성공하지 못하면, 즉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그리고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떠한 행동과 어떠한 말이 속죄가 되는 것일까? 이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갖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우리의 영원한 대속물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여, 우리의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를 속죄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나는 작은 교회 목사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부르심/소명)

 

도시의 큰 교회를 가고 싶어하는 목회자는 많아도, 시골의 작은 교회를 섬기고 싶어하는 목회자는 별로 없다.

 

나는 작은 목회를 해본적이 한 번도 없는데,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작은 교회'라고 부른다. 내가 전하는 메시지의 무게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작은 교회 목사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나보고 작은 교회 목사라고 말한다.

 

목회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재정의 압박이 아니다. 목회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작은 교회에서 큰 목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나의 노력과 내 메시지의 무게를 몰라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겸손하게 나의 이야기를 해본다. 나는 3대째 목회자이다. 우리 집안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은 목회자를 배출한 집안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명문대를 졸업했다. 유치원만 안 나왔지, 고등교육의 모든 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그러한 나의 배경을 '분뇨'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과 내가 닮은 점이다.

 

나는 교회에서 학교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교단 목사들에게서 가장 꼴보기 싫은 점은 출신학교를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삼는 점이다. 목사가 됐으면 그만이지, 그리고 하나님께 부름 받았으면 그만이지, 자신이 교육 받은 학교가 무슨 소용인가.

 

레위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불렀다". 그래서 원래 레위기의 히브리 제목은 '와이크라'이다. 출애굽기 마지막 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성막(하나님의 거처)을 완성했지만,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모세가 비로소 성막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교제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모세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 주셨기 때문이다.

 

'부르심', '소명'이 없으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주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없다. '부르심, '소명'이 없으면 우리는 한 가지의 일도 주님을 위해 할 수 없다. 그렇게 부름 받은 자가 '목사' 아닌가. 그런데, 왜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자기 마음대로 들락날락 거리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배제한 채, 자신들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기의 왕국을 세우고 있는 집단은 결국 스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요즘 시대에는 '감독'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소명을 입증하는 것이요, 도시의 큰 교회를 가지 않는 것이 자신의 소명을 입증하는 것이다. 카르텔을 이용하여 감독을 하고, 카르텔을 이용하여 도시의 큰 교회로 자리를 옮겨놓고, '하나님의 부르심' 운운하는 것만큼 역겨운 일도 없다.

 

나는 내 자리에서 '나나 잘하자' 다짐해 본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곳에서 그것이 내 삶의 전부인양, 그냥 그렇게 살고 싶다. 부르심이 없는 곳엔 절대 기웃거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심이 있다면, 지옥이라도 가겠다. 이것은 내가 의로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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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2. 10. 04:19

기억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미가 6:1-8 / 마태복음 5:1-12 / 고린도전서 1:18-31 / 시편 15편)


주님,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고,

우리가 이렇게 살 만한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구원이 십자가에,

, 하나님의 사랑에 있건만,

우리는 우리 손으로 구원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허탄한 자랑을 버리게 하시고,

오직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10. 04:17

무엇을 기억하는가

(미가 6:1-8 / 마태복음 5:1-12 / 고린도전서 1:18-31 / 시편 15편)

 

성경에는 기억하고 있으면 참 좋은 말씀들이 많다. 오늘 우리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도 기억하고 있으면 좋은 구절들이 있다. 마태복음의 말씀은 전부 기억하고 있으면 좋다. 어떤 삶이 복 있는 삶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미가(Micha)의 말씀 중에는 8절을 기억하면 좋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6:8). 미가는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가 선지자의 메시지와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매우 비슷하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같은 문제 의식을 가졌다는 뜻이다. 미가는 다른 곳에서 이런 말을 한다.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7:3). 두 손으로는 악을 부지런히 행하면서, 와서 예배만 드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신앙생활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아주 중요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고린도교회는 분열이 매우 심했는데, 분열이 심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그 복음 안에 충분히 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의 말씀 중에는 두 개의 구절을 기억하면 좋다. 첫째,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둘째,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우리는 살면서 뜻하기 않게 삶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 위기는 스스로 만든 위기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닥쳐오는 위기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라. 다른 무엇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삶의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다.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최대한 많은 구절을 기억해 두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구원해 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신다. 오늘 선포한 미가서의 말씀에서도, 미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억하라!”라고 외친다.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6:5).

 

인생에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첫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다. ,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력을 무엇을 기억하기 위해서 쓰는가. 에덴동산에서의 두 번째 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과 관계 없는 지혜를 제공했다. 우리의 기억력이 하나님과 관계 없는 것을 기억하는 데만 쓴다면, 우리의 인생은 쓸모 없는 인생이 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데 열심을 다 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복된 인생이 될 것이다. 이것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자, 생명을 얻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