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5'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2.15 순교의 광기?
  2. 2020.02.15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
  3. 2020.02.1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순교의 광기?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어떤 '광기'가 느껴진다.

 

그의 편지에 대한 어떤 신학자의 평가처럼, 순교를 향한 그의 태도는 '자기 학대 경향'을 보이기도 하고, '순교자 정신의 광채'를 보여주기도 한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자기의 순교를 막지 말라는 당부를 전한다. "저는 방해 없이 저의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행운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1:2). 이그나티우스는 순교를 행운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순교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4:1).

 

그는 말한다. "저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기를 원합니다"(3:2). 그에게 순교는 세상이 그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게 해주는 수단 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음 구절은 순교에 대한 그의 광기 또는 광채를 보여준다. "불이여, 십자가여, 야수와 싸우는 것이여, 뼈들을 비트는 것이여, 사지를 토막내는 것이여, 내 몸 전체를 분쇄하는 것이여, 악마의 잔인한 고문들이여, 오라, 나로 하여금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게만 하여라!"(5:3).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독히도 갈망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은 생명에 이르게 한다. 온전한 지식이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주장은 이그나티우스를 비롯한 초대 교부들의 사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장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면서, 그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의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열정도 타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부패하기 쉬운 음식이나 이 세상의 맛좋은 것들을 전혀 즐기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그리스도의 육체인 하나님의 빵입니다. 음료수로는 저는 그분의 피를 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영원한 애찬입니다!"(7:3).

 

교회는 순교자의 핏값으로 세워졌다는 말이 있다. 그 진술의 중심에 이그나티우스가 있다. 우리가 이그나티우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선다면, 우리도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게 될까?

 

순교의 '광기'는 고사하고, 순교의 정신, 또는 광채를 찾아보기 힘든 이 시절에, 우리의 신앙은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신앙이 얕아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그나티우스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세상에 두지 마십시오"(7:1).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

 

골로새서는 거짓 교훈을 바로 잡기 위해 애쓴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교훈은 왜곡된 유대주의와 헬라의 이원론이 혼합하여 만들어낸 헛된 사상과 가르침을 말한다.

 

왜곡된 유대주의와 헬라의 이원론이 만나면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무엇보다 육신을 부정하게 되고, 학대하게 되며, 거짓 겸손에 사로잡히게 된다.

 

왜곡된 유대주의는 율법을 오용하게 만든다. 이는 율법의 몇 가지 행위를 철저히 지키는 것을 통해 표출되는데, 음식 규정이나 절기 규정 같은 것을 통해서 종교적 금욕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율법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종교적 금욕주의가 발전하게 되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 대신 율법이 생명을 준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종교적 금욕주의를 통해 구원 받는다는 사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이 헬라의 이원론과 만나게 되면 몸에 대한 자기 비하는 겉잡을 수 없게 번진다. 플라톤의 사상에 뿌리를 둔 헬라철학은 물질세계를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물질세계를 영원의 세계의 그림자로만 볼 뿐이다. 그래서 이원론의 세계에서 구원이란 악한 물질세계를 탈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몸을 비하하게 만든다. 몸을 벗어버리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몸을 정당하게 학대하기 위해서 종교적 금욕주의는 매우 요긴한 도구가 된다. 복음도 이렇게 변한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말을 서슴치 안고 한다.

 

자신의 몸을 비하하는 것은 그릇된 겸손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몸에 대한 폭력이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자기의 육신은 저급한 것이니 금욕을 통해 절제하고 통제하고, 괴롭히고 학대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한 것을 효과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이요, 그러한 것을 철저하게 실행하고 실천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거짓된 가르침에 머물게 된다.

 

골로새서는 이러한 헛된 사상과 가르침에 일침을 가하며, 이러한 사상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것을 이미 성경에서 이렇게 2천년 전부터 경고했는데, 아직도 못알아듣고, 자기 비하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잘못된 금욕은 생득적인 기쁨을 제어하고 빼앗는다. 이러한 헛된 사상과 가르침에 물들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몸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고백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

 

우리는 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날마다 은총과 자비를 간구하며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인 것을 실감하고 절감하고 간절히 고백하기 위해서, 한 가지 해볼 수 있는 것은 율법을 과감하게 어겨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아주 잘 하고 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현대 그리스도인 중에 이것을 잘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는가? 현대인들은 안식이 무엇인지 모르고, 거룩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늘 불안한 인생을 산다. 그러니, 현대 그리스도인은 "몸의 주인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지중에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웃긴 이야기 같지만, 사실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를 선포하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자비가 함께 하길 빈다.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초기 기독교문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The Epistle to Diognetus>를 보면 정말 멋진 말이 나온다.

 

"In a word, what the soul is in a body, this the Christians are in the world"(ED, 6:1).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혼이 몸에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정체성을 지니고 이 세상을 산다면, 이 세상은 어떠한 세상이 될지, 상상만 해도 멋지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영혼이다. 그리스도인이 그 역할을 잘 감당하면, 이 세상은 영혼이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지만,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당연히 이 세상은 영혼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영혼이 아름다우면, 그 사람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고 칭찬을 하게 된다. 그런데, 영혼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시간 낭비와 괴로운 일도 없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의 증언대로라면, 이 세상이 살 만한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달린 것 아닌가. 이러한 중차대한 사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인생을 허투루 살 수 없는 게 분명하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질 뿐 아니라,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된 것 같아, 우쭐하기까지 하다. 저자가 누구인지, 물론 편지에서 밝히는 저자는 "사도의 제자(a disciple of the Apostles)'이지만, 이렇게 멋진 말을 하는 그가 매우 궁금하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