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1'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1.01.21 메타 내러티브
  2. 2021.01.21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

[메타 내러티브]

 

인간의 역사는 부단히 어딘가로부터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이었다. 예수의 이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것도 종교적 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현상이 있다. 그렇게 어디론가로부터 속박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해방'되고 싶어하면서도 '해방'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거나 들으면 어딘가 불편한 마음을 갖는 게 한국인의 심리인 것 같다. 왜 그럴까? 자유를 갈망하되, 그 자유는 나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누리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어서 그런가? 자신만 자유롭고 남들은 자신의 자유 아래 속박시키고 싶은 욕망 때문인가?

 

해방을 말한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이 겪은 어려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예수의 메시지는 해방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에 열광하면서도 결국 해방신학자들을 죽인 것은 남미인들이다. 해방을 말하면 죽는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독교의 메타 내러티브에 부합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신앙인이요 잘 사는 것이라 말한다. 기독교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은 창조-타락-구원-종말이라는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의 메타 내러티브를 설명하는 것이 '복음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메타 내러티브는 계속하여 공격을 받아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 메타 내러티브가 인간들을 자유하게 하지 못하고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에게 오히려 구속을 가져다 준다면 그 메타 내러티브는 무엇인가?

 

성경의 이야기를 '창조-타락-구원-종말'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한가지 방법'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방식은 매우 플라톤주의적이다. 오죽하면, 니체 같은 철학자는 "기독교는 플라톤주의의 대중화"라고 말하겠는가.

 

소위 복음주의적 메타 내러티브의 성경 해석을 보자. 우선 우리는 성경에 비추어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금을 받은 존재'이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플라톤주의에 따라 해석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형상'은 설계도 같은 것이다.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는데 '설계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설계도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설계도(이데아)에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설계도에 걸맞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데아'를 따라 창조된 인간은 세상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왜 그럴까?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형상(이데아)대로 사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라고 한다.

 

그러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인간에게는 '이데아'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죄가 그것을 가로 막고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그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이시므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인간은 그분을 믿음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인간은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묻게 된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에 의하면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그 형상의 완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되찾는 일은 현재의 이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저 천국에 가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제 완전한 구원, 완전한 형상의 회복이 있는 저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된다.

 

메타 내러티브는 이렇게 인간의 인생을 방향 지어주는 순기능을 한다. 그러나 메타 내러티브는 인간의 인생을 구속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속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복음주의 메타 내러티브는 인간을 미리 규정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데아)으로 지음 받았지만 죄로 인하여 형상을 잃어버렸고 그 형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구원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으며,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뒤,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며 천국을 갈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궤적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 궤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존재를 속박하는 그 무엇이든지 거부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메타 내러티브' 자체를 거부한다. 우리 인간은 그러한 내러티브에 의해서 결정되고 목적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메타 내러티브에 의해서 그 내러티브와 동일하게 삶의 이야기를 복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신만의 메타 내러티브를 창조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딜레마다. 메타 내러티브를 인정하면 인간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속박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메타 내러티브를 부정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허무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허무에 처해질지언정 자유를 빼앗길 수는 없다는 결기 속에서 진행되는 것 같다. 여기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 눈에는 분명해 보인다. 자유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허무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현대인들이 공감할 만한 '메타 내러티브'를 재창조하는 일이다. 그러한 메타 내러티브를 창조해내기 위해서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재해석하는 일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과 과학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그리고 그것들이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 못하도록 견제하며 그들과 함께 자유를 지켜내며 허무를 몰아내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독교가 계속하여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오래된 메타 내러티브를 고집하려 든다면, 기독교는 인간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폐기처분 될 것이다. 죽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노시스적 사유  (0) 2021.01.27
교회라는 신앙의 무대  (0) 2021.01.24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  (0) 2021.01.21
자본주의의 세기말 현상  (0) 2021.01.12
놀이의 신학  (0) 2021.01.07
Posted by 장준식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

 

추운 겨울을 생각해 보죠. 그리고 집 한 채를 생각해 보고요. 칼바람이 부는 겨울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집 한 채. 그곳에 ''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라는 게 사방으로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습니다. 옛날 허름한 초가집이라서 그럴까요. 문풍지를 대서 겨우겨우 막아 놓은 구멍들이 막아도 막아도 소용없는 듯, 구멍은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추위를 막아보고자, 온 힘을 다해서 그 구멍을 막아봅니다. 그런데, 구멍 하나를 막으면 다른 곳에 구멍이 또 뚫려서, 새로 생긴 구멍을 막느라 정신이 없죠. 추운 겨울 밤을 이겨내고자 열심히 구멍을 막아 댑니다. 열심히 막다 보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을 가지긴 합니다. 그런데, 정말 봄이 올까요?

 

구멍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우리 삶에는 수없이 많은 죽음의 그림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죽음의 그림자들을 하나씩 지워 나갑니다. 우리가 하는 활동은 모두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한 것이지요. 아무리 막아도 들어오는 칼바람처럼 죽음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위협합니다.

 

우리가 연애를 하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직장을 갖는 것도, 스포츠를 하는 것도, 낚시를 하는 것도, 축구를 차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종교를 갖는 것도, 그리고 미쳐버리는 것도 모두 죽음에 맞선 행위들입니다.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행위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행위를 열심히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늘 불안하고 불만족스럽죠. 우리가 마주한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죽음의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모두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항상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 사실,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끝은 '실패'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존이지요. 정말 허무하기 짝이 없죠.

 

그렇다면,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실패가 끝이니까 실패를 받아들이며 절망 가운데 살아가야 할까요?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에 대하여 물었던 수많은 철학자들과 시인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묻고 있는 철학자들과 시인들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오롯이 존재하는 '죽음'을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생산해 내고 있는 구멍들을 최선을 다해 메우는 것이 죽음의 허무를 이겨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구멍이 너무 크게 뚫려 있어서 가뜩이나 추운 겨울, 황소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고통당하고 있는 시절입니다. 춥다고 아우성입니다. 구멍이 클수록 그 구멍을 막기 위해서는 '협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화이자나 모더나 같은 백신회사들만 그 구멍을 막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전적으로 맡겨 놓을 수 있는 구멍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 큰 구멍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협동'을 하고 있습니까? 구멍이 크게 뚫려 칼바람이 세차게 밀려들어올수록 우리는 절망하지 말고 그 구멍을 막아 내기 위하여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버텨왔습니다. 삶을 위협하는 수많은 죽음의 구멍들을 잘 막아내며 살아낸 우리들이니, 이번에도 잘 막아낼 것입니다.

 

너무 춥지 않기를, 지치지 않기를...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라는 신앙의 무대  (0) 2021.01.24
메타 내러티브  (0) 2021.01.21
자본주의의 세기말 현상  (0) 2021.01.12
놀이의 신학  (0) 2021.01.07
나는 직선의 잔인성을 거부한다  (0) 2021.01.0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