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7'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1.01.27 그노시스적 사유
  2. 2021.01.27 죽음의 구멍을 메우기를 간구하는 기도
  3. 2021.01.27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

[그노시스적 사유]

 

교부들의 신학을 보면, 삼위일체 교리는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기 보다는 마르키온의 그노시스적 사유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했다. 그노시스적 사유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꽤나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신정론의 문제를 아주 '논리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아직까지도 신정론 문제는 미궁이다. 이 문제를 납득할 만하게 대답한 신학자는 없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납득할 만하게 신정론 문제에 대답한 신학자는 마르키온 밖에 없다. 그는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구분하는 것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우리는 지금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신정론의 문제를 극복하려 했고, 그노시스적 사유를 통해 신론과 기독론을 발전시키고 성경의 정경화를 꾀했던 마르키온을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정죄하지만, 그 당시 마르키온은 '악의 문제'에 질문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신학을 제공했다. 그래서 그는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의 교부들은 마르키온의 신학을 정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했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다른 존재로 표현하는 것에 반대했다. 교부들에게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은 신약의 구원자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신학사상이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이 말하고 싶은 일차적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의 일치를 말함으로 마르키온 신학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삼위일체 신학이 신정론의 문제(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를 납득할 만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지는 확신이 안 선다. 그래서 우리는 '신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신정론의 문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것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노시스(영지주의) 사유의 특징은 이 세상은 낮은 단계의 하나님(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 악이 존재하는 세상은 파괴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결국은 '파국'이다. 그 파국에서 구원하는 것이 바로 구원자 하나님에 의해 기획된 '메시아 사상'이다. 메시아는 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고 이 악이 가득한 세상을 끝장낸다.

 

우리는 그노시스적 사유를 너무도 간단하게 '이단'이라고 치부해버리지만, 그러한 그노시스적 사유는 삼위일체 신학의 출현으로 인해서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역사에서 절대악을 경험할 때마다 그노시스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악이 판치는 세상은 메시아에 의해서 끝장나야 하고, 우리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 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노시스적 사유가 가장 강하게 등장한 시대는 근대(Modernity)의 끝자락에 발생한 세계 1차대전 이후였다. (사실 근대의 끝자락에 1차 대전이 발발한 게 아니라, 1차 대전이 발발함으로 인해서 근대는 끝난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끝없이 긍정하던 근대, 그래서 그 역사의 끝에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거라는 소망 가운데 살아가던 근대인들은 세계 1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그 모든 소망을 접어야만 했다. 바로 그때 다시 고개를 든 것이 그노시스적 사유였다.

 

그 당시 근대의 사상가들(철학자/신학자)은 그노시스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신학 개념'을 만든 칼 슈미트를 비롯하여, 하르낙과 블로흐, 마틴 부버와 심지어 칼 바르트도 그노시스적 사유를 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과, 시몬 베이유도 그노시스적 사유 속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노시스적 사유를 가장 강렬한 방법으로 한 이는 발터 벤야민이었다.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사유는 그노시스적 사유의 바탕 위에서 세워진 사유였다.

 

칼 슈미트의 삼위일체에 대한 사유는 매우 독특하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 안에 숨겨진 '내전'에 대하여 주목하는데, 그에 의하면, 삼위일체 안에는 창조주 아버지(성부)와 구원자 아들(성자) 간의 '내전상태(statiastion)'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마르키온이 일찍이 신정론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설파했던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 간의 싸움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 슈미트가 삼위일체론을 통해 위와 같은 사유를 하는 까닭은 '정치신학'의 가능성을 논하기 위해서이다. 악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그 악과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한다.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정부'라고 말하는 것이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이다.

 

이러한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논의를 계속 이어나가려면, 그의 '카테콘(Katechon)' 이론을 비판한 야콥 타우베스와 현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논의를 살펴보아야 하지만, 그것은 너무 지난한 과정임으로 생략한다. 대신, 우리는 그노시스적 사유 속에서 발생한 근대의 '메시아 신학'을 다시 한 번 들여야 볼 필요가 있다.

 

세계 1, 2차 대전 이후 우리는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의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진보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는 희망, 그런 희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 나라는 역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유 자체가 그노시스적 사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파국'을 경험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러한 그노시스적 사유 안에서 그들의 사상을 세워나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노시스적 사유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여담이자만, 지금 사회적으로 한창 논의되고 있는 '젠더문제'도 그 밑바탕에는 그노시스적 사유가 깔려 있다. 무엇이 우리의 ''을 정하는가?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 정한다고 말해왔다. 남자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면 남자이고, 여자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면 여자였다. 그러나 그노시스적 사유에서는 그렇지 않다. 나의 정체성을 정하는 것은 '누스(nous/정신)'이다. 나의 누스가 나를 남자로 규정하면 내가 여자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나는 남자인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그노시스적 사유는 우리의 삶 속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를 보듬으며 우리의 미래를 열어 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사유 방식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더 이상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면, 이 세상 바깥에서 오는 구원을 기다려야 할 텐데,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그러한 구원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어둡고, 구원은 묘연하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1. 27. 02:58

죽음의 구멍을 메우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나 3:1-10)

 

주님, 요즘 지구에 사는 우리 모두가 너무 춥습니다.

너무 큰 구멍이 뚫려 그곳으로 죽음의 칼바람이 마구 불어닥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뚫린 이 죽음의 구멍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다만, 요나처럼 죽음의 구멍을 회피하지 말게 하시고,

다시 요나처럼 죽음의 구멍을 응시하게 하셔서

우리의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 앞에서

죽음을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그 은총으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죽음의 구멍을 막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때로 실패하겠지만,

실패가 없으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오니,

주여,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으로 서로의 온기를 나누게 하시고

최후의 승리를 외치게 하옵소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죽음 자체를

십자가 위에서 막아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 27. 02:55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

(요나 3:1-5, 10)

 

서울에서 살았던 분들은 종로에 있던 단성사, 피카디리, 파고다극장 등을 기억할 것이다. 그곳은 청춘들의 낭만이 서려 있는 곳이다. 종로의 극장가와 연관된 청춘의 낭만이 없는 사람은 서울에서 살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198937일 새벽 330분에 파고다극장에서 한 사람이 죽은 채 발견된다. 세간의 주목을 받은 사건은 아니나 후에 이 사람의 유고시집으로 인하여 그 죽음이 기억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시인 기형도(1960~1989)이다.

 

그가 파고다극장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그의 죽음이 애처로운 것은 그가 요절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담긴 그의 절망과 희망이 그의 죽음을 더 애처롭게 한다. 그의 시에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오버랩되어있다. (강신주,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47) 얼마 못산 인생이지만, 그의 삶 속에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오버랩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죽음을 더 애처롭게 한다.

 

기형도는 삶 속에 구멍처럼 뚫린 죽음들을 응시하며 살았다. 그의 유고시집이 출간된 후 젊은이들은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공감했고 함께 울었다. 그의 시 제목을 차용하여 만들어진 영화도 두 편이나 된다. “봄날은 간다(2001)” “질투는 나의 힘(2003).” 그의 시 질투는 나의 힘에 나오는 마지막 문구는 매우 유명하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외로운 청춘이 읽어내려가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한 문구이다.

 

기형도의 시를 평론했던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기형도 시집 해설,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중에서) 인간의 실존인죽음을 응시하는 일’, 누군가는 기형도처럼 예민하게 그 일을 잘 해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죽음을 응시하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응시하는 일도 거부하는 일도 하지 않고,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요나서를 죽음이라는 렌즈로 읽어보면, 거기에는 엄청난 죽음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요나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1:1-2). 여기서 죽음은 악독으로 표현된다. 깊은 죽음의 그림자가 니느웨를 덮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요나에게 알려주신다. 그러나 요나는 그 죽음을 응시하지 않는다.

 

니느웨라는 삶에 커다랗게 뚫린 죽음의 구멍을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알려주셨지만, 요나는 그 죽음의 구멍을 외면한다. 이런 요나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도처에 숭숭 뚫린 죽음의 구멍을 외면하는 일, 우리는 지독히도 요나와 닮아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이 참 묘하다. 요나는 니느웨에 뚫린 커다란 죽음의 구멍을 외면하고 멀리 도망가나, 이제 그의 삶에 죽음의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한다.

 

요나는 니느웨로부터 멀어지기 위하여(죽음의 구멍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하여, 그것을 외면하기 위하여), 그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탄다. 그러나 그가 그 배에서 만난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의 구멍이었다. 큰 바람이 바다 위에 불어 배가 전복될 찰나, 요나는 그 죽음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선원들에게 자기를 바다 위에 던져버리라고 말한다. 이렇듯, 우리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들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그 뚫린 죽음의 구멍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온 생명을 다해 막는 것밖에는 없다.

 

요나가 자기의 생명을 바다에 던졌을 때, 발생한 엄청난 일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죽음을 향해 돌진했을 때 오히려 그 죽음이 멈춰 선다. 바다는 고요해졌고, 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 분명했던 요나는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생명을 부지한다. 그리고 비로소 요나는 그 죽음과도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을 응시한다. 요나는 그 죽음을 응시하고,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2:3, 4, 5)

 

요나의 고백을 한 마디로 다시 정리해 보면 이런 것이다. “나는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죽음을 응시하지 못하던 요나는 이제 죽음을 응시하게 됐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니느웨의 죽음도 눈에 들어오게 됐다. 그리하여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그들의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을 말해준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

 

나는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를 무너뜨리게 할그 죽음의 구멍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요나서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예전 같으면 이러한 생각을 못했을 것 같은데, 요즘에는 이런 생각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아마도,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를 무너뜨릴 그 죽음의 구멍은 역병이었던 것 같다. , 전염병이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어서 잘 알지만, 전염병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방역을 잘 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백신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은 방역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선포되고 있는 방역조치를 한 번 보자.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3:7-8).

 

우리는 이것을 회개라고 하는 매우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데 익숙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최고의 방역조치이다. 왕의 조서, 즉 법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이 방역조치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더 깊이 담겨 있다. 그리고 매우 실제적이고 과학적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전염병은 인수공통감염병이다. , 인간과 짐승이 접촉해서 생긴 병이고, 인간과 짐승이 동일하게 감염되는 병이다. 다른 말로 해서, 인간이 짐승과 접촉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았을 병이다. 하지만 인간이 짐승과 접촉이 잦아진 이유는 인간의 무분별한 살림파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전염병을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는 성경에서 그토록 심판이 선포되던 죄악의 도시 니느웨보다도 영적이지 못하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죽음에 대한 감수성도 부족하고, 그 죽음을 응시하려고 하는 마음도 부족하고, 삶 속에 숭숭 뚫린 죽음의 구멍을 메우려고 하는 의지와 관심도 부족하다. 만약 지금 정부에서 법을 제정하여 니느웨가 했던 방역을 시행한다면, 쉽게 말해, 각자 골방에 들어가서 14일 동안 금식하라고 한다면, 오히려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니느웨는 그것을 시행했다. 그래서 그들은 니느웨에 들이닥친 죽음의 구멍을 막아낼 수 있었다.

 

요나는 니느웨에 뚫린 죽음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선택된 선지자였다. 우리 삶에 필연적으로 뚫리는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미국의 동화작가 매리 매입스 닷지(Mary Mapes Dodge)의 동화, “Hans Brinker(한스 브링커)”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한 이 동화에서 한스 브링커라고 하는 소년이 뚝 제방에 뚫린 구멍을 온몸으로 막아낸다. 이렇게 누군가는 우리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을 해야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

 

군대에 있을 때 친구와 주고 받은 편지가 생각난다. 다른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던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그 친구의 편지는 참 애처로웠다. 자신은 부대에서 이발병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이발병이라는 보직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이발을 하려고 친구는 부대에서 지급한 하얀 가운을 입었는데, 그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마치 우스꽝스러운 삐에로 같다고 한탄했다. 그 이유는 그 친구의 키가 190cm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190 센티미터의 키를 가진 친구는 별로 없었다. 당연히 군대에서 그렇기 키 큰 친구들을 위한 이발병 복장을 제공해주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전개되는 친구의 편지내용이 감동적이었다. 처음에는 짧은 이발병 가운을 입고 병사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운 삐에로 같아서 힘들었는데, 누군가는 이발병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라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여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 그 현실을 잘 받아들이고 그 일을 열심히 감당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신태준, 보고싶다.)

 

우리는 김현이 기형도의 시에 대한 평론에서 말한 것처럼 죽음을 실존의 범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상, 기형도와 같은 운명, 요나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 죽음을 응시하는 일, 그리고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일. 그래서 우리는 기형도처럼, 요나처럼, 우리의 삶의 도처에 뚫린 죽음의 구멍들을 메우기 위하여, 기형도가 시를 썼던 것처럼, 요나가 물고기 뱃속(죽음의 한가운데서)에서 주님의 은총을 간구했던 것처럼, 간절한 은총이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 숭숭 뚫려 있는 죽음의 구멍에 압도되지 않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 막아낼 수 있는 이유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의 구멍을 메우려면, 죽음을 이기신 그분을 내 삶으로 초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시편의 시인처럼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을 삶으로 초대해야 한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편 5:3).

 

우리가 아침마다 죽음을 이기신 그분의 은총을 간구하고, 그분을 우리의 삶으로 초대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에 압도당하거나, 그 숭숭 뚫린 구멍으로 세차에 밀고 들어오면 죽음의 황소바람에 치어 죽을지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우리가 먼저 만나고, 그분의 은총을 간구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다.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죽음의 구멍이 너무 크게 뚫려 있어서 가뜩이나 추운 겨울, 황소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고통당하고 있는 시절이다. 춥다고 아우성이다. 구멍이 클수록 그 구멍을 막기 위해서는 '협동'이 필요한 법이다. 화이자나 모더나 같은 백신회사들만 그 구멍을 막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놓을 수 있는 구멍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 큰 구멍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협동'을 하고 있는가. 구멍이 크게 뚫려 칼바람이 세차게 밀려들어올수록 우리는 절망하지 말고 그 구멍을 막아내기 위하여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버텨왔다. 삶을 위협하는 수많은 죽음의 구멍들을 잘 막아내며 살아낸 우리들이니, 이번에도 잘 막아낼 것이다. 다만, 간구하는 것은 너무 춥지 않기를, 지치지 않기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