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0. 12. 28. 09:37

노인의 탄생을 간구하는 기도

( 2:22-39)

 

주님, 성탄절기를 보내면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 우리가 꿈꾸는 인생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부자가 되라고,

권력을 가지라고, 젊어지라고 말하지만,

그런 꿈을 가지고 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부자들, 권력자들, 젊은이들, 성직자들 등,

예루살렘을 드나들었을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기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던

시므온과 안나의 이야기에 시선을 집중하여,

그들처럼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인생,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하나님의 일을 알아채려고 노력하는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위로는 없고 욕망만 늘어가는 이 세상에서

참된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위로를 전해주시는 주님!

그 위로가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지, 누구를 통해서 오는지

그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하늘의 지혜를 가진 노인으로 탄생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모두 늙어가지만,

노인으로 탄생하려는 마음을 잘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아기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노인의 탄생을 두 눈으로 보았사오니,

주여,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며

노인으로 탄생하도록, 인생을 복되고 아름답게 하옵소서.

이땅에 탄생하시어,

우리의 구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2. 28. 09:35

노인의 탄생

(누가복음 2:22-39)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하는 시므온과 안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 우리가 꿈꾸는 인생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진 누가Luke’는 자신이 데오빌로에게 말한 것처럼 예수에 대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펴전하는 데 힘쓴다. 여러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들로부터 자료를 수집하고, 그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예수의 이야기를 전한다. 복음서 중(또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누가는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누가의 시선은 독특한 데가 있다. 그는 남들이 주목하지 못했을 법한 사건에 귀를 기울인다. 예수의 탄생과 세례 요한의 탄생을 병행구조로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목자들을 등장시키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의 이야기에 노인들을 등장시키는 것도 그렇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노인이 등장하는 것은 참 따스하면서도 애절하다. 특히 이것(노인이 등장하는 것)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현대사회는 노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나마 성탄절이 되면 산타 할아버지덕분에 노인들의 존재감이 다시 살아나 곤 한다. 모든 일자리에 청년들로 채워 넣는 이 시대에, 산타 은 여전히 할아버지가 아니면 안 되는 성역으로 남아 있다. 아직까지, ‘산타 청년이나 산타 아가씨’, 또는 산타 아저씨나 산타 아줌마가 등장하지 않았다. ‘산타라는 고유명사에는 할아버지가 붙어야, 사람들은 안심한다.

 

우리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노인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노인들의 이름은 시므온과 안나이다. 이 두 노인이 등장하는 배경은 유대인의 율법과 관련 있다. 짧은 구절에 두 개의 율법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할례법이고 다른 하나는 정결예식이다. 할례법은 아기 예수와 관련된 법이고, 정결예식은 어머니 마리아와 관련된 법이다. 이 두 가지의 율법이 동시에 지켜지고 시행되고 있다.

 

율법에 의하면, 첫 자식이나 첫 동물, 또는 첫수확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 첫 열매들은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사람을 하나님께 바치려면 대속이 필요한데, 그렇게 대속을 해야만 첫 열매로서의 자식(사람)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출애굽 경험 때문이다. 무엇이든 첫번째 것(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을 거둘 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길 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삶이 그냥 아무렇게나 주어진 삶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고백했다.

 

그리스도인은 유대인들이 했던 방식으로 구원된 삶을 고백하지는 않으나, 우리도 주일에 주님께 나아와 예배드림으로 우리의 삶이 그냥 아무렇게나 주어진 삶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진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삶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깊이 묵상하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주일 예배를 헛드리는 것이다. 구원된 삶을 산다는 것은 복되다. 자신이 구원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의 삶과 그것을 모르는 이들의 삶은 같을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아직 이 거룩한 뜻을 잘 알지 못하여 헤매는 것을 보면 참 마음 아프다. 주일에 나와 주님께 예배드리면서도 아직 구원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는 이 없다. 많은 이들이 자기 구원을 이루려고 얼마나 동분서주하면서 사는가. 예배는 구원된 삶에 대한 감사이어야 하는데, 그들에겐 예배가 자기 성취를 위한 기복일 뿐이다. 그러니 예배가 축복이 아니라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또 하나 등장하는 의식은정결예식이다. 정결예식은 레위기 12장에 나오는데, 모든 산모는 아이를 낳은 후 산혈로부터 깨끗해지지 않으면 성전에 접근하거나 성물에 접촉할 수 없다. 산모는 일정 기간이 지나 성막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1년된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 혹은 형편이 어려우면 비둘기 두 마리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 정결케 되었다. 정결케 되어야 제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고, 제의에 참여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아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정결예식의 시각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정결예식이 말하고 싶은 것은,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생명을 풍성히 누리려면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생명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풍성하여 지고, 생명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생명의 부여자인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려면 정결해야 한다. 정결치 못한 자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래서 생명의 풍성함을 갈망하는 자는 정결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이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없다. 현대인들은 생명의 풍성함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찾는다. 사람들이 이번 성탄절을 유독 힘들어한 이유가 무엇인가? 마음껏 소비하지 못해서 그렇다. 현대인들은 마음껏 소비해야 생명의 풍성함을 느끼는데, 소비를 못하니, 생명이 쪼그라든 것처럼 느낀다. 현대인들에게는 정결한 사람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정결과 상관없이 돈 많은 사람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이번 성탄절은 오히려 더 생명이 풍성한 성탄절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마음껏 쇼핑할 수도 없고, 어디 갈 데도 마땅치 않으니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또는 혼자서 고요한 가운데,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성탄절에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요란을 떨었지만, 많은 부분 자기만족을 위한 것은 아니었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기 예수와 산모 마리아를 위한 제사를 위하여 그 가족이 모세의 율법대로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그곳에는 두 노인이 있었다. 모세의 율법대로 각종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그 많은 이들이 다녀가는 곳에서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며 일생을 보내던 두 노인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부자들, 권력자들, 젊은이들, 성직자들 등, 예루살렘을 드나들었을 수많은 사람들 중에 노인이었던 시므온과 안나만메시아를 알아보았다.

 

누가는 시므온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한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25-26).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이 소개 글에서 시므온의 간절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위로가 없던 시절,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해 주실 거라는 강력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 우리에게 이렇게 간절한 마음이 있는가? 그 간절함이 성령의 감동을 가져왔고, 그 간절함과 성령의 감동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성전에서 메시아 예수를 알아보게 했다.

 

누가는 안나를 이렇게 소개한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여 기도함으로 섬기더니”(36-37). 안나가 아셀 지파였다는 것, 그가 과부였다는 것은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것들이다. 아셀은 북이스라엘의 지파였다. 7년간 남편과 살다 남편이 죽은 뒤, 재가하지 못하고 평생 과부로 살았다는 진술에서 그의 아픔이 엿보인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을, 메시아 예수를 알아본 시므온과 안나, 이 노인들의 행보는 매우 고무적이다. 노인의 가치, 노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이들의 등장을 통해서 노인의 탄생을 본다. 노인은 나이를 먹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다. 노인의 가치는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노인으로 탄생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노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을 생산력의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것도 그런 연유다. 흔히 정상인, 그리고 젊은이에 비해 노인과 장애인은 생산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저급한 것이다. 유교의 효사상이나 어른공경 사상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교의 효사상이나 어른공경 사상이 공격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의 관계에서 상하관계를 만들어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다른 측면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 노인들이나 장애인들이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차별한다. 나쁜 사회다. 옛날에 우리 동네에 발달장애 형이 있었다. ‘용마형이라고, 온동네 돌아다니면서, 모든 일을 참견했다. 그런데, 그 형을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동네 형으로서 서로 존중하며 어울려 놀았다. 그런데, 요즘 그런 발달장애인은 시설에서 가둔다. 이상한 세상이다. 노인들도 실버타운으로 가둔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장애인이나 노인들에게 막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은 장애인이 되지 않을 것처럼, 자신들은 노인이 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우리가 잃고 사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그냥 노인이 되는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노인은 나이를 먹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다. 노인은 탄생하는 것이다. 노인이었던 시므온과 안나 이야기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권력을 가지려 노력하고, 젊어지려고 노력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는가?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하나님의 일을 알아채려고 노력하는가?

 

우리는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산다. 얼마전 작업을 하다 우연히 지난해(2019) 마지막 날 페북에 올린 사진과 글을 보았다. 맑은 하늘 사진과 이런 문구가 써 있었다. “오늘 아침 출근길 하늘~ 2019년 마지막 날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의 하늘~ 너무도 행복했던 2019년이 다 지나갔다. 내년에는 어떤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까.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열심히 십자가를 지고 가야지!^^” 나는 나에게 2020년 어떠한 십자가가 기다리는 줄 전혀 몰랐다. 팬데믹이 기다리고 있을 줄 전혀 몰랐다. 올해, 우리는 모두 팬데믹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왔다.

 

우리는 사실 젊은 요셉과 마리아의 모습으로 산다.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법대로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갔지만, 그들의 인생에, 그리고 그들이 지금 모세의 법대로 하나님께 바치는 첫 아이 예수에게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그 부모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알려준 것은 두 노인이었다. 그들은 이 아이가 누구인지 알려주었고, 이 아이가 어떠한 일을 하게 될 것인지 알려주었다. 두 노인은 이 아이의 젊은 부모에게 영적 지혜를 알려준 것이다.

 

노인의 탄생. 우리가 늙어간다는 것, 우리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 우리가 노인이 되어간다는 것은 이런 것 아니겠는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던 시므온과 안나처럼, 우리 민족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민족을 넘어 인류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는 세대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전달해 주기 위해 성령의 감동을 놓치지 않기 위해 경건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오는 세대에게 참된 위로를 주는 노인으로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들의 지혜를 통해 위로 받는 세상, 그래서 노인들이 존경받는 세상을 꿈꾸고, 세상에 위로를 전할 수 있는 노인으로 탄생하기 위하여,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권력을 가지려 노력하고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인생,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하나님의 일을 알아채려고 노력하는 인생이 되기를 꿈꾼다. 나이 먹어가는 우리들, 그냥 불가항력적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노인으로 탄생하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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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독교의 배타성]

 

기독교는 세심하게 해석하지 않으면 배타성을 생성해낼 수밖에 없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1. 유일신관(Monotheism)

2. 선민사상(Chosen People)

3. 기독론(Christology)

4. 종말론(Eschatology)

 

1. 유일신관은 유대교와 공유하고 있는 신관이다. 기독교 생성 초기부터 유일신관은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의 교리였다. 다신론의 세계였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태동한 기독교가 그 시대에 배척당하는 역할을 한 교리이기도 하다. 다신론의 세계에서 유일신론을 주장했던 기독교인들은 그당시 사람들에게 '무신론자'라고 불렸다. 이것은 굉장히 재밌는 현상이다. 지금은 '무신론자'라고 하면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불리고 있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또한 유일신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원리로 작용했다. 예수를 ''이라고 부르면, 유일신론이 아니라 다신론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일신론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일신관과 충돌하지 않는 기독론을 생각해낸 결과가 삼위일체론이다.

 

주지하다시피, 유일신관에 대한 세심한 해석을 하지 않으면, 유일신관은 매우 폭력적인 교리로 작용할 수 있다. 폭력적이지 않은, 평화로운 기독교가 되려면, 유일신관을 세심하게 해석해야 한다.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그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나, 유일신관을 핑계로 폭력적인 성향을 표출하고, 배타적인 종교를 형성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악한 무리들은 결코 유일신관을 세심하게 해석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겐 진리보다 이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악함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용당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폭력에 희생되었는가. 애가(Jeremiad)가 필요한 시대이다.

 

2. 유대교의 선민사상의 기독교 버전은 '부르심(calling)'이다. 이 또한 세심한 해석이 없으면 폭력적인 교리로 전환되기 쉬운 교리이다. 현대 기독교 이단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인데, 특별히 배타성과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교리이다. 이단들은 자신의 집단을 세력화하기 위하여, 그래서 자신의 권세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선민사상을 주입시킨다. 마침 요한계시록에 14 4천명이라는, 아주 '문자적인' 선민신앙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기에, 그들은 그것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선민사상은 배타적인 민족을 이루거나, 선택받은 사람에게 (심리적) 우월성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 고안된 교리가 아닐 텐데, 이단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연약한 자들의 욕망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현혹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정욕구'가 있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 누군가에게 특별한 선택을 받는다는 것에 목말라 있다. 사람들에게서,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게 만드는 이 사회는 사람들의 '인정욕구'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장사치들은 그러한 인정욕구를 이용하여 장사하고, 종교 이단은 그러한 인정욕구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탈탈 턴다. 이 또한 애통한 일이다.

 

3. 기독론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불리는 교리이지만, 기독론만큼 오용되고 있는 교리도 없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예수가 누구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그저 앵무새처럼 "예수는 주, 예수는 메시아, 예수는 뭐뭐뭐...'하면서 명제적으로 확정된 예수를 외칠 뿐이다.

 

예수는 인격적 사귐을 원하는데, 우리들은 예수와 인격적 사귐을 가지기 원하지 않는다. 예수는 이 땅을 걷기 원하는데, 우리의 삶에 들어와서 우리와 동행하기 원하는데,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기만 좋아하고, 예수를 하늘로 빨리 승천시키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원하는 예수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이 또는 우리의 신념이 또는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예수이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 현존하는 예수는 우리의 삶을 고치고 싸매고 온전케 하는 게 아니라, 갈등을 일으키고 평화를 깨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 예수는 우리의 욕망의 대체물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4. 한국교회의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이해는 정말 남루하다. 기독교 고유의 시간성에 접근하지 못하고, 자본주의가 고안하고 있는 공간성에만 매몰되어 있다. 시간성과 공간성은 우리가 이땅에 발 딛고 사는 한 공존해야 하는 것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시간성의 종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간성은 시간성이 필요로 하는 만큼만 사유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의 시간성에 대한 사유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공간성에 대한 사유만 확장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기독교의 종말은 '폭력'이 가해지는 시간이 아니라, 심판이 내려지는 시간이다. 우리는 심판을 폭력으로 잘못 생각한다. 심판은 폭력이 아니다. 심판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심판은 새창조를 위한 성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종말론을 오용하여 마치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세상 끝날에 폭력이 가해질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할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명백한 기독교 종말론의 오해이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조장하기에 딱 좋은 교리가 종말론이다. 소위 '공포정치'는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자기들의 통치를 쉽게 만들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는 술수이다. 지금도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공포가 조장되고 있는가. 미디어는 권세 잡은 자들과 협력하여 그 일을 너무도 잘 해내고 있다. TV 뉴스, 인터넷 뉴스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기사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온다. 공포는 스스로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그것들을 통치자들에게 자발적으로 가져다 바치게 만든다. 기독교 종말론도 딱 그렇게 씌고 있다. 종말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권력에 순종하게 만드는, 바로 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 얼마나 나쁜 짓이고, 슬픈 일인가. 

 

기독교는 세상 변혁의 힘을 지닌 강력한 종교이다. 그러나, 세심한 해석 없이 남용되고 있는 교리들 때문에 그 강력한 힘이 엉뚱한 데 쓰이고 있다.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인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었던 노벨이 다이너마이트가 오히려 인간을 죽이는 데 쓰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발명을 후회했던 것처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작금의 기독교를 보면 자신의 희생을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저리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기독교가 지닌 그 엄청난 힘을 선하게 사용하는,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깨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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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인생 목회 철학]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들이 '차가운 세상'을 만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세상'을 만나더라도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따스한 마음'을 지니고 '차가운 세상'을 뚫고 지나가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의 정신이라고 나는 믿는다.예수는 '차가운 세상'을 만나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으나, 끝까지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그 '따스한 마음'으로 '차가운 세상'을 뚫고 지나가 '부활'했다.

 

우리와 동일한 인간(vere homo)이었던 그가 그랬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섭취한 에너지를 체온 유지, 즉 몸을 따스하게 유지하는 데 90%를 쓴다. 결국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은 삶의 '따스함'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온힘을 다해 '따스함'을 잃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차가운 세상'을 뚫고 지나갈 수 있다.

 

나는 그 '따스함'을 위해 부름 받았고, 사람들이 '따스함'을 잃지 않도록 돕는 일을 위해 내 몸의 체온을 다 쓸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사유와 구원]

 

아렌트는 자신의 책 <인간의 조건>을 다음의 글로 끝맺는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활동적이며,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 이것은 고대 로마 시대의 철학자 카토(Marcus Porcius Cato)의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은 '사유의 시간'이다. 사유할 때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앟는 게 아니다. 그는 계속하여 자기 자신과 또는 다른 이와 대화를 시도한다. 대화의 시도만큼 활동적인 활동이 없다. 그리고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 같으나 혼자 있는 게 아니므로 외롭지 않은 것이다.

 

아렌트는 '사유'의 개념을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하는데, 그녀에게 사유란 '말 없는 대화'이다. 사유하기 위해서는 세계와 인간들로부터 물러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유하면서 인간은 다른 사람과 교제하듯이 자기 자신과 고제를 나눈다. 이 교제의 시간, 즉 사유가 없으면 인간은 '독선'에 빠질 수 있다.

 

다른 말로 해서, 사유란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주장하는 '구원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내가 생각하는 구원은 '잘 지내는 것'이다. 사유를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사유는 구원의 또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아렌트는 그의 저서 <정신의 삶>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할지 검토하는) 침묵의 교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반대하는 법도 발견하지 못한다... 사유하지 않는 삶은 분명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삶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펼치지 못한다. 그런 삶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은 몽유병자와 같다." (알로이스 프린츠의 <한나 아렌트>에서 인용)

 

구원은 절대 맹목으로 인간을 이끌지 않는다. 구원은 '사유'로 인간을 이끈다. 사유는 자기 자신을 돌보게 하며, 자기 자신을 반대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과 잘 지내게 한다. 그래서 사유하는 인간은 구원에 들어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맹목적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사유에로의 초대'이다. 그 초대에 응한 자는 '사유'를 통해 구원으로 들어온다. 구원으로 들어온 '사유하는 인간'을 세상이 어찌 감당하랴.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

 

"한나 아렌트에게 모든 현실적 행위의 근원은 죽음에의 조망이 아니라 탄생에의 회고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동등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녀에게 탄생은 모든 인간의 일회성을 규명하는 사건이다. 유일무이한 사람만이 다시 어떤 전혀 새로운 것을 세상에 줄 수 있다."

(알로이스 프린츠, <한나 아렌트>, 209-210)

 

행위의 근원을 '죽음에의 조망'에 두지 않고 '탄생에의 회고'에 두는 아렌트의 생각은 하이데거의 생각과 정반대에 서 있다. 실존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하이데거의 생각은 '죽음'이 실존의 가장 큰 변수이지만, 그것을 벗어나 생각을 발전시킨 아렌트에게 죽음은 '탄생'에 비하면 그 의미가 탄생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아렌트의 생각이 너무도 좋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너무 '죽음에의 조망'에 파묻혀 있어 전혀 '탄생성'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게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굉장히 기이한 현상인데, 원래 기독교는 아렌트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행위의 근거가 '탄생에의 회고'에 있다. 기독교의 근간은 '부활'이다. 부활은 탄생성의 극치이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탄생성에의 회고'에 근거한 행위를 저버리고, 자꾸 '죽음에의 조망'에만 몰두하는 지 모르겠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될 수 없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부활'이다. , 다시 말해, 아렌트의 용어로 '탄생성'이다. 뭔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 또는 희망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핵심 메시지이다.

 

이것을 안다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진짜 래디컬하게 변할 것이다. 특별히 위에서 아렌트의 생각이 말해주는 것처럼, 탄생을 통해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는 일은 세상에 전혀 새로운 것을 전해주는 '메시아'의 차원으로 인생을 끌어 올린다. 예수의 부활은 탄생을 통한 인간의 일회성을 규명한 사건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탄생을 통해 예수는 세상에 전혀 새로운 세상을 전해주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복음인가.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2. 21. 09:25

사랑하다 죽기를 간구하는 기도

(1: 1:46-55)

 

주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는 우리들,

매일, 숨쉬는 순간마다, 사랑을 묻게 하옵소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어, 구원을 발생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시대에

사랑이 없어, 구원이 없어 고통 당하는 이들, 탄식하는 이들이

차고 넘치는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물어야 할 것은 그 무엇보다 사랑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 일이 구원이 되도록 은총을 내려 주시는 줄 믿습니다.

냉장고를 없애는 마음으로 나눔을 늘려가고

매일의 삶이 화목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게 하옵소서.

‘나와 그것의 관계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며

상대방에게서 이익만 취하고 말게 하는 이 시대의 악를 물리치게 하시고,

‘나와 너의 관계로 우리의 관계를 밀고 나가 그 안에서 사랑이 발생하고,

사랑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도록

사랑의 길을 내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저항하게 하시고,

사랑하다 죽더라도 그 사랑 안에 거하시는 주님께서

부활시켜 주실 것은 믿는 믿음 안에서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날마다 이루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시기 위하여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죽음에서 일으켜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2. 21. 09:21

사랑은 가능한가?

(누가복음 1:46-55)


정말 훌륭한 사상가들은 자신이 그러한 말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훌륭한 사상가들의 공통점이 있다. 가령 예를 들어, 근대사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빨간서적의 대표적 인물, 카를 마르크스(칼 맑스)자본론같은 책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하도 마르크스 때문에 격동의 세월을 보내서 그런지, 마르크스를 공산주의자(빨갱이)’라고 치부하지만, 그가 자본론이라는 책을 쓴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때문이다. 그 이유가 엄청 쇼킹하지 않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그렇게 비판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인간들의 사랑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그러한 상황을 나와 너라는 책에서 잘 설명해 놓았다. 사랑을 하려면 나와 너(Ich-Du/I-Thou)’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인들의 인간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나와 그것(I-It)’의 관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나와 너의 관계에 있으면 폭력이나 착취를 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폭력과 착취를 하나.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러나,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는 폭력과 착취가 발생한다.

 

현대사회를 공동체라 부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동체란 나와 너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이다.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응답하라 1988”을 보면, 서울 쌍문동 한 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그들은 나와 너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기쁨과 함께 나누면서, 서로 보듬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TV 드라마에서 그러한 시절을 추억하는 이유가 뭔가? 그러한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가 눈물을 훔치는 이유가 뭔가?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찾아보기 힘들고, ‘나와 그것의 관계만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나와 그것의 관계. 그냥 상대방에게서 내가 원하는 이익만 취하면 되는 관계. 얼마나 삭막한가.

 

서로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해진 이 시대, 그래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할 텐데, 그래야 인간이라는 의미,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텐데,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사실, 그 어떤 문제보다 절실한 문제이다.

 

대림절 네 번째 주일, 우리는 네 번째 촛불을 켜는데, 사랑의 촛불을 켠다. 사랑의 촛불을 켜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일명마리아 찬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마리아 찬가는 사랑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한다. 자기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했음에도,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게 단순히 그녀가 메시아를 잉태했기 때문이 아니다. 메시아 잉태 사건을 통해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처음 고백은 이렇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48).

 

우리는 사랑 받을 때 자신을 귀하게 느끼고, 사랑 받지 못할 때 비천함을 느낀다. 몸에 값비싼 것을 두르고 있을 때 자신을 귀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몸에 값비싼 것을 두르고 있는 자기 자신이 그것을 더 잘 안다. 대개 인간이 허영을 부리는 이유, 그래서 외적인 것으로 자기 자신을 치장하려는 이유는 누군가로부터(또는 마땅히 사랑 받아야 할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귀함과 비천함은 결코 외적인 것에서 오지 않고 사랑에서 온다. 사랑 받으면 들꽃도 다이아몬드보다 귀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래도 다이아반지가 좋다는 사람은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했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리아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메시아 잉태 사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선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섰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마리아의 찬양은 마음(영혼)에서 울려 터지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쁨의 노래인 것이다.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현대인들은 하나님과 나와 너의 관계를 만들지 못하고, ‘나와 그것의 관계에만 머물기 때문에 신앙의 깊이가 없는 것이고, 마음이 늘 공허한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 그것의 관계에 머물러, 하나님에게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이익만 얻고 말려 한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 매순간, 삶의 자리에서 사랑을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성경의 말씀을 대면한다는 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고, 사랑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자꾸 사랑을 묻지 못하게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나와 너의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게 하고, ‘나와 그것의 관계에만 머물게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세상에 굴복하면 안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는 날까지, 사랑을 물어야 한다.

 

훌륭한 사상가, 훌륭한 신학자는 모두 사랑을 물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이런 데 있지 않았다. 정말 모든 사상가들, 그리고 우리가 성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사랑에 대하여 물었다.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하면 더 깊이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떻게 우리가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이론도, 모두 사랑에 대한 질문이고,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이다. 이것을 묻지 않는 사상가는 좋은 사상가가 아니다. 사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비판, 이것이 모든 사상가들의 책이다. (어떠한 책을 읽을 때 이 원리를 참고하면 좋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 불리는 어거스틴도 당연히사랑에 대하여 물었다. 그가 인생의 말년에 쓴 대작, “삼위일체론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기 시작하면 사랑 자체가 사랑받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분명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어거스틴, <삼위일체론>, 8.8.12)

 

사랑이 일어날 때, 사랑하는 자(actor of loving) '자기 자신'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사랑 그 자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이 발생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현존하신다. 어거스틴에게서 보이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은 대단하다. 그만큼 그의 영혼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고, 그 사랑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열렬히 갈망한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왜 중요하냐면, 그 이전까지 신학자들은 모두 인간 바깥에서 발생하는 일들에만 집중을 했는데, 어거스틴은 인간과 인간의 내면을 응시한다. 이 세상의 다른 어느 피조물보다도 인간 안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또는 하나님 나라)은 무지개 너머 어딘가(somewhere over the rainbow)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깊이깊이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어거스틴은 아담의 죄를 자기사랑/교만(self centered-ness/amor sui)라고 말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을 향하는 욕망은 결국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을 더 가로막을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밖(이웃/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그럴 때, 오히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구원론적인 정향(orientation)을 가진 사랑이다. 사랑이 구원이다. 사랑이 발생하면, 거기에는 동시에 구원이 발생한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사랑이 발생하는 곳에 구원이 발생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구원자시라는 뜻과 같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떠한 일에서든 사랑이 발생하지 못하게 한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이 발생하면, 거기에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발생하면, 모든 게 완전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거기에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인데, 우리가 사는 시대가 발생되기 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이익이다. 구원이 발생하지 못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이익이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구조이다.

 

마리아 찬가는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은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51-53).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 ‘권세 있는 자’, 이런 자들이 누구냐면, 구원이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구원이 발생하면, 자신들의 이익이 없어지기 때문에, 구원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계속 이익만 발생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팔의 힘으로 구원이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구원이 필요한 자,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먹이시는 분이다. 그리고, 부자, 즉 구원이 발생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신들의 이익만 취하려는 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시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그곳에서 구원이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미워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하지 못하게 하여 구원을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근에 아주 재밌는 주장을 하나 보았다. 인류가 발명한 것 중,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 중의 하나가 냉장고라고 주장하는 글이었다. 냉장고의 발명으로 인하여 서로 나눠 먹는 사랑이 사라지고, 자기 배만 불리려고 음식을 쟁겨놓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냉장고가 없다면, 보관할 곳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많이 먹으려고 하지 않은 것이고, 음식이 금방 상할 것이기 때문에 이웃과 나누어 먹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맞는 말이다. 레위기 공부할 때 우리가 살펴보았던 제사의 종류 중에 화목제라는 것이 있다. 화목제라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어겼을 때,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화목제의 특징이 뭐냐면, 그날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잡은 고기는 그날 다 먹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소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혼자서 다 먹는가? 그날 잡은 고기를 그날 다 먹는 방법은 딱 하나다.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 것이다. 화목제는 바로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정말 중요한 질문이고, 절실한 질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그분과 같이사랑하면 된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면 된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을 못하게 만드는 이 시대에 우리가 사랑을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대가 사랑하는 일을 가로막고 있어서 일까? 아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구원을 발생시키는 사랑을 하지 못하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이익을 발생시키는 가짜 사랑에 머물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자체에 구원을 지니고 있다. 사랑이 발생하면,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 안에 존재하시기 때문에, 사랑이 발생되는 곳에는 동시에 구원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사랑하다 죽어도 괜찮은 것이다. 사랑 안에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 없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몸/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사랑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냉장고를 없애는 마음으로, 나눔을 늘려가야 한다. 매일의 삶이 화목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누고 또 나눠야 한다. 팬데믹 후에, 홈리스 사역을 하고 싶다. 홈리스들이 와서 조금이라도 쉬어 갈 수 있게, 의자들도 다시 설치하고, 식수기도 정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에게 따스한 밥 한끼라도 나누고 싶다. (홈리스들에게도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다. 기관에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는 홈리스, 그냥 떠돌아다니는 홈리스, 전혀 소통이 안 되는 홈리스, 떠돌아다니는 홈리스들과 소통이 안 되는 홈리스들이 잠시 와서 밥 먹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렸던 예수의 급진적 사랑이 더 절실한 시대이다. 우리에겐 예수가 필요하고, 예수를 사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래도 인간이 아직까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인간의 사랑이 완전하지 못하고 영원하지 못해서 구원이 영원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고, 그 구원의 경험은 계속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인간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 우리 삶 가운데, 날마다 사랑을 발생시켜, 구원을 이루어, 마리아처럼 마음(영혼)에서부터 흘러 터져나오는 찬송이 넘쳐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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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의심해야 하는 이유]

ㅡ 아리우스 논쟁에서 배워야 하는 것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격동의 세기는 4세기였다. 303년 대박해(Great Persecution)에서 시작된 격동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등장과 함께 갑작스럽게 변한 기독교의 운명 속에서 깊어졌다.

 

로마 제국을 손에 거머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통일과 일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옛 종교를 물리치고 새 종교(기독교)를 선택한다. 그러나, 기독교 진영 내에서는 이미 기독론 논쟁으로 인하여 분열을 겪고 있었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통일과 일치를 위하여 선택한 기독교 진영이 '교리적 통일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 필수라고 느꼈다. 그래서 마련한 자리가 그 유명한 '니케아 공의회(325)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기독교인들에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공의회였다. 박해를 심하게 받던 시절을 끝내고, 제국의 종교로서 위상을 새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진영에서 갈등의 불씨가 된 기독론논쟁을 본격적으로 드러내 놓고 시작한 공의회이기 때문이다. 대박해로 인하여 실제적인 상처를 입었던 주교들(눈이 하나 없다든지, 다리를 전다든지)은 황제의 초청으로 진행된 니케아 공의회를 참석하여 황제가 베푼 만찬에 참여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기독교의 평화, 또는 제국의 평화는 기독론 논쟁으로 인하여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가 된 이후 기독교는 아리우스 논쟁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격동의 시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리우스는 주교 아래의 직급인 장로사제였다. 그만큼 정치적 기반이 강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기독론 이론은 그 당시 동방의 많은 주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그 주교들과 함께 세력을 형성하여 자신의 주장을 기독교의 정통신학으로 관철시켜려 했다. 거기에 반기를 든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라는 주교인데, 그는 아리우스의 기독론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위험을 넘어 이단적 주장이라고 느꼈다. 알렉산더 주교 밑에서 성장한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 주교의 리더십 아래 아리우스 진영과 대립각을 심하게 세운다.

 

우리가 아리우스또는 아타나시우스라는 이름만을 접해서 그 사람의 외모나 됨됨이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묘사하고 있는 그 당시의 문서들을 보면, 아리우스는 키가 크고 훤칠한 외모를 갖고 있었고 게다가 달변가였다. 또한 그는 음악애호가였고, 자신의 신학을 시로 읊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것을 볼 때, 아리우스가 어떤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어린아이처럼 키가 작았다. 하지만, 아주 똑똑했고, 대담했으며, 사람들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한마디로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둘 사이의 나이 차이는 대략 40년 정도 난다. 이는 나중에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이 아리우스의 신학을 누르고 정통으로 자리 잡는 데 얼마간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알렉산더 주교와 아타나시우스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아리우스 진영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그 이후 다른 공의회를 통해서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뒤집어지지만, 그래도 니케아 공의회가 맺은 결실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의의를 지니는 사건 중 하나였다. 아리우스의 주장과 알렉산더 주교의 주장(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라고 해도 되는)이 첨예하게 대립된 가운데, 그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채택된 용어가 하나 있다. 이는 성경에서 온 용어가 아니라 그리스 철학에서 빌려온 용어인데, 그것은 우시아(ousia)’라는 용어였다.

 

한글을 쓰는 한국인이 고대 그리스의 아주 논쟁적인 용어였던 우시아의 개념과 뉘앙스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을 공부해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인데, 플라톤 철학에서도 우시아(ousia)’라는 용어가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동시에 그 개념의 모호함 때문에 엄청나게 논쟁을 불러온 용어이기도 하다. ‘우시아는 대체로 5가지의 개념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용어이다. 본질(essence), 본성(substance), 실체(reality), 존재(being), 양태(type)이 그것이다 즉, 우시아는 어떠한 개념을 우선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게 하는 용어이다.

 

우시아라는 용어가 가진 복잡성 때문에, ‘우시아의 개념으로 기독론을 설명하려던, 그리고 기독론을 확정하려던 니케아 공의회는 결국 기독교인들 사이에 더 큰 논쟁을 불러왔다. 이미 논쟁적인 용어를 끌어들여 논쟁을 종식시켜보려 했던 주교들의 패착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그리스어권(Greek)이었던 동방 기독교와 라틴어권(Latin)이었던 서방 기독교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갈라서게 한 원인 중,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우시아라는 논쟁적인 그리스어의 용어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던 기독론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가 무슨 관계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예수, 이 둘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아마도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너무 쉽게 기독교 신앙을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과 예수가 어떤 관계인지를 아는가?

 

유대교와 기독교가 공통적으로 갖는 신관은 유일신관(monotheism)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신관이 기독론을 어렵게 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데, 어떻게 우리는 예수를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면, 하나님이 두 분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 유일신론이 아니라 다신론이 되는 것 아닌가? 기독론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독교 신학이고, 기독론에서 출발한 신론은 결국 삼위일체론(the Doctrine of Trinity)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아리우스의 기독론을 이단으로 쉽게 정죄하지만, 4세기 기독교는 아리우스의 기독론이 훨씬 더 우세했다. 아리우스를 쉽게 정죄하면, 4세기까지의 기독교는 모두 이단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이전의 기독교 신앙을 너무 쉽게 부정해 버리지 안기 위해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아리우스는 현대의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옳다고 여긴 주교들 중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도 포함되어 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우시아라는 개념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과 예수의 동일본질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homoousios(호모우시오스)’라고 부른다. 호모는 같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우시아는 본질(essenc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과 예수가 동일본질이라는 것, , 예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현대 신앙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당연한 거라고 받아들이지만, 그 문제에 깊게 들어가보면, 어떤 면에서 예수를 하나님과 같다고 말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턱대고 하나님과 예수는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이다라고 선포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를 낳게 되는데, 이를 사벨리우스주의라고 부르며, 즉 하나님과 예수가 완전히 동일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구분이 없어지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인격이라든지, 예수의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이는 곧바로 영지주의적인 생각으로 발전될 수 있고, 예수의 존재는 하나님이라는 하는 본질에 완전히 묻혀버리고 만다. , 기독론은 양태론(modalism)으로 빠질 수 있다. 하나님이 예수라는 모드(mode)로 변환되어 이 세상에 나타난 것뿐이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다를 바 없는 신관이다. 제우스가 인간 세계에 나타날 때, 모드를 변화하여 나타나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우선성과 유일신관(monotheism)을 지키기 위하여 아리우스가 합리적으로생각한 기독론은 종속론(subordination)’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의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차등을 두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그리스 철학적인 생각인데, 그리스 철학은 모든 만물이 일자(God)’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적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God)에게 종속된다. 하지만, 아리우스는 여기에서 신학적 진술을 멈춘 게 아니다. 그리스도는 비록 하나님에게 종속된 존재이지만, 이 피조세계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지니는데,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adoption)’된 존재이고,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 고양(promotion)’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우스도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아리우스는 예수의 신성이 예수 자체의 존재, 또는 예수의 본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신성이 부여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우스의 기독론을 종속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존재는 확실한 차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은 그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더 널리 합리적으로받아들여졌다. 아리우스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 것도 아니고, 예수가 예배 받으실 합당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의 이러한 신학적 논증을 지지하는 아리우스파와 아리우스의 생각을 이단적 신학이라고 정죄했던 반아리우스 진영(아타나시우스 진영)의 싸움은 4세기 내내 피 튀기는 전쟁으로 치닫았다. 이 전쟁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계속하여 개입을 했고, 아리우스 진영의 우세와 열세가 번복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아리우스 신학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공의회가 네 번이나 있었고, 그로 인해 아타나시우스는 5번의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공의회가 열릴 때마다 두 진영 간에 음모와 협박과 폭력과 죽음이 발생했다. 두 진영 간에 발생한 기독론 논쟁은 결코 평화롭게 진행되거나 정착된 것이 아니다. 엄청난 정치적 술수와 폭력이 개입되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하면 안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가지게 된다. 왜 이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죽기살기로 싸웠을까?

 

예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면, 기독교인들은 대개 예수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다음과 같은 용어들을 늘어놓을 것이다. “하나님, , 주님, 말씀, 지혜, , , 진리, 부활, 목자, ,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Mediator), 우리 신앙의 사도, 인생의 대가, 친구 등등.” 모두 예수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아주 은혜로운용어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용어들을 깊이 묵상해보면, 예수가 누구인지를 규명하고 있는 이 용어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인데, 어떻게 중보자(Mediator)가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이면 그냥 하나님이지, 어떻게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중보자가 될 수 있는가? 이렇듯, 해결하기 쉽지 않은 질문들을 우리는 안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아리우스 논쟁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본 유대인 학자 루벤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통찰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예수가 이 모든 것들을 다 갖추기를 바랐지만, 실제에 있어 니케아 신조를 신봉하는 기독교인과 아리우스파 기독교인들 사이의 분열은, 힘 있고 의로운 통치자를 보다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사랑을 고취시키는 친구가 보다 필요했던 사람들 사이의 대략적인 구분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루벤슈타인,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194).

 

루벤슈타인의 진술은 이런 뜻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어떠한 신적인 이미지가 필요하느냐에 따라서 신학을 전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종교의 이름으로 하는 싸움은 진리에 대한 싸움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종교의 이름으로 싸움터에 나서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욕망을 진리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한다. 물론 진리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진리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진리를 전유하는 인간들의 방식은 진실하지않다. 인간은 자신의 뜻, 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주 쉽게,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또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가리는 방향으로, 또는 자기 자신의 죄를 가리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신학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현대 한국 개신교에서 일고 있는 동성애반대도 같은 논리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신앙관은 복음주의로 불리는데, 정작 그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면서 현대 복음주의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발흥되었는지에는 무지하다. 현대 복음주의의 뿌리는 복음서에 있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주의를 헷갈려 하는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의 뿌리는 근대의 자본주의에 있다. 근대 자본주의의 기독교화가 바로 현대 복음주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현대사회에 낳고 있는 문제점(병폐)을 한국 개신교가 동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복음주의 개신교는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못된 짓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공간의 점유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요소는 한국 복음주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본주의는 유물론을 근간으로 하는데, 자본주의의 요소를 받아들여 발전한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유물론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교회성장, 무리한 건축, 선교지 확장 등은 공간의 확장을 목표로 삼는, 즉 시장(공간)의 확장을 목표로 삼는 자본주의의 특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들이다. 교회 세습 또한 마찬가지다. 자본의 세습이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즘, 한국 복음주의 교회들도 교회 세습을 통해 자본주의의 병폐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온갖 부정한 일을 저지르면서, 자신들의 부정함을 가리려면,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고 자신들의 의로움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복음주의 교회권에서 결사 반대하는 동성애 문제는 진리 논쟁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추악한 죄를 가려보려는 술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은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한다고 말하며 성서의 진리를 수호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위장한다. 그러면서 성경에 죄라고 말하고 있는 다른 모든 죄의 항목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면서 산다. 그들은 동성애 문제를 들고 표면적으로 격렬하게 싸우면서 자신들의 기독교의 진리를 지키는 투사인 것처럼 자기를 포장한다.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 진리를 지키는 의인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 자신의 추악함을 가린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에 갇히게 되면, 자신이 진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자신의 싸움은 진리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자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또는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진리를 남용(abuse)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리우스 논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한 가지만이라도 반드시 배웠으면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자기의 죄를 가리는 수단이 될 뿐, 자기에게만 이익이 될 뿐,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져오고 죽음을 가져온다면,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생명을 가져다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불쌍한 한 인간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렇게 불쌍한 한 인간이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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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설교자의 정신성 정신성의 심포니]

 

우리는 대개 'spirituality' '영성'이라고 번역한다. 그렇다 보니, 영성은 뭔가 고차원적이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번역의 잘못이다.

 

'Spirituality'를 영성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차라리 '정신성'이라고 번역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 않나. ', 저 친구 정신(spirit)이 살아 있네!' 그런 것처럼, spirituality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게 좋다.

 

기독교의 'spirituality', 그래서, 기독교 고유의 정신성을 말하는 것이고, 그 정신성을 내면화시키는 훈련이 '기독교 영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정신성은 그 사람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 사람은 어떠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어떤 삶을 의미 있는 삶이라 여기는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보는지, 그 사람의 생명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의 행동이나 말, 또는 그 사람의 작품 등은 모두 그 사람의 '정신성'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물론, 아무 생각없이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고, 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기교만 살아 있는 작품을 내놓는 사람들도 태반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정신성이 깃들지 않는 말이나 행동, 그리고 작품은 가치가 떨어지거나 아예 없다.

 

설교는 설교자의 정신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정신성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거기에 실패하면 설교는 설교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정신성이 결여되면 그 설교는 그냥 '아무말 대잔치'가 될 뿐이다. 또는 듣는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에 머물 뿐이다. 대개 정신성이 없는 설교자는 입담으로 청중들을 웃기려고 할 뿐이다. 정신성의 빈약함을 입담으로 가리는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 속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설교를 하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정신성'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세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야 한다. 그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설교를 하면 설교는 정신성의 표현이 아니라, 그냥 말잔치일 뿐이다. 그야말로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다.

 

신학교육은 목회기술을 가르치면 안 된다. 기술은 목회현장에서 배워도 된다. 신학교육의 목표는 기독교의 정신성을 전수하는 것이어야 한다. 좋은 신학교와 나쁜 신학교의 차이는 여기서 드러난다. 그 신학교가 정신성을 뚜렷하게 갖도록 교육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신학교를 졸업한 이들의 강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펼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실패는 결국 신학교의 실패일 수 있다. 신학교가 목회 기술을 가르치는 데만 급급했는지, 아니면 정신성을 키워 설교자가 강단에서 그 정신성을 설교를 통해 잘 표현하도록, 그리고 목회를 통해 잘 표현하도록 가르쳤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신학교육은 더욱더 정신성을 훈련하고, 그리고 목사 후보생들이 스스로 그러한 정신성을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성도의 입장에서 설교를 잘 듣는 방법은 설교 안에 담긴 정신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좋은 설교자의 설교는 정신성이 담겨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아무 의미 없이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설교자의 설교는 아무말 대잔치이거나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그 안에는 반드시 정신성이 담기게 마련이다. 그 정신성이란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신성과 분리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앵무새처럼 답습하지도 않는다. 설교자는 성경의 정신성을 전달하되 우리가 사는 시대에 통용되도록 정신성을 새롭게 구성하여 전달한다. 이런 점에서, 좋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방법은 그 설교자의 정신성을 이해하면서 듣는 것이다.

 

설교 시간은 사실 굉장한 시간이다.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성경의 정신성과 설교자의 정신성, 그리고 청중의 정신성이 한 데 어우러져 정신성의 심포니를 연주하기 때문이다. 실로, 설교 시간은 웅장한 한편의 교향악이다. 정신성의 교향악.

 

가장 실망스러운 설교자는 전혀 정신성을 찾아볼 수 없는 설교를 하는 설교자이고, 가장 실망스러운 청중은 설교자의 정신성을 전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청중이다. 이 두 부류의 설교자와 청중이 만나는 예배는 정신성이 사라진, 죽은 예배일 뿐이다. 그야말로 종교모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정신성의 심포니가 울려 퍼지는 예배를, 설교시간을, 늘 사모한다.


Posted by 장준식

[강신주 아이러니]

 

강신주의 책을 읽으면 곳곳에 기독교 혐오가 배어있다. 그의 주장이 철학책 좀 읽는 한국의 교양인(또는 지식인)들의 기독교 혐오에 일조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의 책을 읽다보면 정말로 아이러니한 것이 그가 주장하는 자유니 사랑,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은 모두 기독교의 가치들이라는 것이다. 그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소유의 형식에 대하여 고민할 때 했던 말을 보면 그의 주장이 곧 기독교의 주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유 형식의 극복을 고민해야 해요. 과연 소유 형식이라는 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해요. 예컨대 우리는 토지를 소유하잖아요. 그런데 과연 인간이 땅을 가질 수 있는 걸까요? 땅이 인간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요? 수명이 짧은 인간이 수명이 긴 것을 가질 수는 없잖아요." (강신주,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447)

 

그의 통찰은 매우 좋다. 전복적이고 변혁적이다. 그런데, 그가 위에서 말한 땅의 소유에 대한 성찰은 이미 기독교 신학에서 오래전부터, 아니, 태초부터 했던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땅에 대한 신학은 한마디로,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이다. '땅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원래 정신이다. 많은 이들이 '토지공개념' 19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가 주창한 개념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토지 공개념은 성경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왜 강신주는 자기의 주장이 기독교의 주장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기독교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고 있을까? 그는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다 나가라고 밝힌 바 있다. 출판사 편집자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면 좋은 책을 낼 수 있을 지 불신한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의 주변에 기독교에 대하여 정확히 알려줄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닐까,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는 연세대학교 출신인데, 학교를 다니면서 철학공부, 문학공부, 역사공부는 많이 한 것 같은데, 신학공부는 전혀 안 한 것 같다. 연세대학교는 신학을 포함해 모든 분야의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을 몇 안 되는 학교인데도 말이다.

 

그는 인문학 강의를 할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고 수업을 한다는 데, 연번에 걸친 어느 인문학 강의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강의를 들은 어느 한 신사가 마지막에 명함을 주며 이런 말을 했단다. '선생님의 모든 얘기가 모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을 전한 신사는 '목사'였단다. 그 말을 들은 강신주는 '내가 강의를 잘못했구나, 어쩌다가 기독교의 틀 속으로 내 강의가 들어가게 된거지?'라고 생각하며, 종교비판 책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강신주의 인문학적 성찰은 정말 좋다. 많은 이들이 이 정도로만 사유를 해도 대한민국은 정말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의에는 철학적 사유는 풍성하지만 신학적 사유가 없다는 것이 한계이다. 그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허무주의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결국 신학적 사유를 하지 않는 것 자체가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한계로 남을 수밖에 없다. 왜 그런지, 강신주가 신학을 공부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의 곁에 기독교 신학을 잘 전해줄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내가 한국에 살았다면, 그 일을 해보고도 싶으나, 나는 이역만리 타지에 살고 있으므로, 그 일을 할 수 없어 안타깝다. 그의 삶 가운데, 신실한 기독교인들과의 교제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그의 인문학적 사유의 아이러니가 잘 극복되기를 바란다.


Posted by 장준식

[강신주의 기독교 비판]

 

강신주는 사랑의 원리를 이야기하면서 기독교를 비판한다. 그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지금 같이 있으면 돼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원칙이 좋은 게 오늘만 있잖아요. 내일 되면 또 오늘이라니까요.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에요. 반면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고 하면 내일 돼고 또 내일이 있는 거에요. 계속 그렇게 가는 거에요. 그 극단이 기독교라고요. 마지막에 보자는 거에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우리에게 천국은 있다, 똑같은 거에요. 현재를 긍정하지 못하게 하고 현재를 전전긍긍하게 하고..... 니체는 진정한 허무주의자는 기독교인이라고 봐요. 자신의 현재 삶을 부정하기 때문에 허무주의라는 거죠. 기독교와 자본과 국가권력, 이들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각 개인에게서 오늘을 빼앗은 건데, 그건 사랑을 빼앗는 거거든요. 어떤 형식이든 구조는 똑같아요. 우리의 억압 체제를 비판하려면 자본, 기독교, 권력을 삼위일체로 비판해야 해요. 자본 비판해놓고는 교회 나가면 말짱 도루묵인 거에요..... 기독교는 붕괴돼야 해요. 인간에게는 악의 축이에요. 인문학자는 반드시 기독교를 비판해야 해요. 인문학자라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남루한 거에요." (강신주,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409-410)


강신주가 말하는 '기독교'는 아마도 '복음주의'를 말하는 것 같다. 복음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자본과 국가권력이기 때문이다. 강신주의 기독교 비판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아쉬운 점은 강신주가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으며, 기독교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강신주는 기독교 종말론을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강신주가 아는 기독교는 교조화된 기독교, 서구사회에서 권력에 의해 이용당한 기독교만 아는 것 같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다. 기독교에 깊이 들어가 기독교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기독교가 드러내고 있는 '현상'들을 통해 기독교를 경험하고 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붕괴돼야 해요. 인간에게는 악의 축이에요."라는 강신주의 언급은 경솔한 것이다. 그가 기독교를 부정해서 경솔한 게 아니라, 기독교가 인류문화에 이바지한 엄청난 역사를 너무도 쉽게 한 마디로 부정해서 그런 것이고, 기독교 신학이 가진 엄청난 우주변혁적인 힘을 그가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는 현재를 긍정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미래만을 바라보게 하지도 않는다. 기독교의 힘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응집시킨다는 데 있다. 그리고 현재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상승시킨다는 데 있다. 인문학자는 현재만을 살지 모르지만, 기독교인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동시에 산다. 현재만을 사는 사람의 삶과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동시에 사는 사람의 삶 중, 누구의 삶이 더 풍요로울까.

 

강신주가 기독교를 비판하려면 기독교의 존재 자체를 비판하면 안 된다.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는 기독교를 비판해야 한다. 이미, 기독교 내에서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담론은 계속 생산되어 왔다. 그 역사를 모르면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강신주는 기독교를 제대로 비판하는 책을 내서, 사람들이 더이상은 교회에 다니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책이 어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의 오래된 명제 중 하나는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인데, 그가 이해를 추구하고, 비판을 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이 깊은 진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자유와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기독교를 사랑하지 않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가 기독교를 얼마나 멋지게 비판해낼지는 미지수다.

 

"인문학자라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남루한 거에요"라고 강신주는 말하지만, 국문학(현대문학) 공부하고 인문학도로서 목사까지 된 나는 남루한 사람인가? 목사까지 된, 남루한 사람 중에 괴수인 나는 강신주의 기독교 비판 서적이 출간되기를 무척이나 기다린다. 마치, 칸트가 루소의 "에밀"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것처럼.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2. 14. 10:04

Doing에서 Being의 삶을 살기 간구하는 기도

(데살로니가전서 5:16-24)

 

주님, 우리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구원된 시간을 살지 못해 아직도 어떠한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성취해보려는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여, 어려운 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했고

쉬지 않고 기도했고 범사에 감사했던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살았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행위가, 기도하는 행위가, 감사는 행위가

하나님 나라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기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어떠한 행위를 위하여 동원되는 시간을 사는 피곤한 인생에서 벗어나

구원된 시간을 살고 있기에

행하는 모든 일은 어떠한 것을 이루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구원된 시간을 살고 있는 존재로서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이 세상에 살며 누군가에게 선물을 사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선물인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약속과 믿음을 통하여 이미 와 계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힘이오니,

주여,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2. 14. 10:04

Doing에서 Being

(데살로니가전서 5:16-24)

 

팬데믹은 현대인들에게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있다. 대림절 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만 적용해서 말해보자면, 우리는 함께 모여 촛불을 켜지 못하고 있다. 일상이었으면, 우리는 모여 세 번째 촛불을 켜며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촛불을 켤 수 있는 곳을 가지고 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가 마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깥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더라도 마음은 그 어느 것도 침범할 수 없는 나의 고유영역이기 때문이다.

 

올랜도 블룸이 주연한 영화 <킹덤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보면,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살라딘 군대에게 빼앗긴 후, 주인공은 예루살렘을 지키고자 했던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Your kingdom is here(머리), and here(심장). That kingdom can never be surrendered.” 팬데믹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비록 지금 함께 모여 촛불을 켜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우리 마음에 촛불을 켜고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대림절 세 번째 촛불은 기쁨(Joy)이다.

 

기쁨의 촛불을 켜고, 우리는 기쁨을 이야기한다. “항상 기뻐하라!” 성서정과(Lectionary)에서 우리가 본문으로 택한 바울서신과 함께 보게 끔 되어 있는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보아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61:10).

 

데살로니가전서와 이사야서에서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서신 중 가장 빠른 시기에 기록된 서신서이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내용은 굉장히 래디컬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말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고 살았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의 기반은 매우 연약했다. 핍박이 심했지만, 자신들을 보호해 줄 어떠한 법적 장치나 체계적인 조직도 없었다. 이들에게야말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보이게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그들의 마음에 있었을 뿐이다.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지금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다고 말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이사야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기쁨을 입에 담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은 힘들고 어려웠다. 그러나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이 세 가지도 중요하지만,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라는 이 수식어가 사실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기뻐하고, 가끔 기도하고, 가끔 감사한다. 웃을 일이 없어 시체가 되어 간다. 기도는 가장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감사보다 짜증나는 일이 더 많다. 우리의 현실이 이렇다 보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을 들으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어, 우리 마음에 죄책감만 늘어간다.

 

19-21절은 번역상 오류가 있어 언급이 필요한 구절이다. 그 네 구절을 보면, 네 가지의 행위를 말하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는 한 가지의 아이디어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예언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예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으로의 회귀이다. 헤세드, 즉 언약적 사랑으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이 예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맥락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된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서 나오는 말씀의 번역이 문제인데, 그리스어 원문에는 ‘but’의 접속사가 붙어 있다. 그것을 집어넣어 다시 번역하면 이런 뜻이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그러나(but), 범사에 헤아려(그 예언을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지 말라. 그러나 주의 말씀이라고 선언되는 것이 모두 옳다고 단정할 수 없으니, 그 예언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 지 분별하여서 좋은 것은 취하고 악한 것은 버리라.’

 

쉽게 말해서, 교회 간판 걸어놓고 거기서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말씀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니, 잘 분별하라는 뜻이다. 이게 참 쉬지 않은 것이다. 얼마 전 이런 광고까지 본 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 받는다. 부부갈등. 의처증. 의부증. 동성애. 뇌질환. 중풍병, 간질병. 정신분열. 우울증. 자폐. 치매. 고혈압. 당뇨병. 각종통증. 마음의 병. 남성 발기부전. 여성 오르가즘. 신종 코로나.” 이런 광고가 교회의 이름으로 버젓이 광고되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가 어두울수록, 사는 게 힘든 때일수록 이러한 거짓 예언악한 예언들이 판을 치는 법이다. 사람은 일단 어떠한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접한 최초의 정보를 옳은 것이라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특별히 미디어를 통해서 자주 접한 내용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크다. 잘못된 정보가 머리 속에 일단 들어가면, 그것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는 일은 쉽지 않다. 요즘 참 어려운 시대인 게, 옛날에는 정보를 접하기 어려워서 어떤 이슈에 대하여 잘못된 정보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잘못된 정보에 너무도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이것 때문에 아주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공부를 통해서 배웠지만, 바울이 사역을 하면서 가장 심하게 다투었던 교리적 논쟁이 무엇인가? 행위(율법)냐 복음이냐의 문제였다. 이 논쟁은 본문에 적용해서 풀어보면 이런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을 율법(행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래 주님이 항상 기뻐하라고 했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어.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어라고 생각하며, 기쁘지도 않는데, 기뻐하는 척하고, 기도하지도 않는데, 기도하는 척하고, 감사하지도 않는데, 감사하는 척할 것이다.

 

실제로, 한얼산 기도원에 가면(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예배드리는 내내, 찬양하는 내내, 탬버린을 들고 빙빙돌면서 춤추시는 분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보면서 와 저분은 뭐가 그리 기쁘셔서 저렇게 쉬지 않고 춤을 추시냐, 참 휼륭하시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개 우리는 그 분을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 때문에 그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서 순례를 떠난 사람도 있었다. 오래전 오강남 박사가 편역해서 옮긴 <예수의 기도>라는 책이 있다. 19세기 러시아의 한 청년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지?’의 의문을 품고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순례를 떠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예수의 기도>라는 책이다.

 

그 책에서 가르쳐 주는 기도는 매우 간단하다. “주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Jesus, Have mercy on me)”를 계속하여 외우는 것이다. 나도 참 좋아하는 기도라, 자주 이 기도를 드린다. 그런데, 그것을 해보면, 우리가 쉬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떤 목사는 ‘24시간 예수 바라보기운동을 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을 하다 보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핍박 가운데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있었을까?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포로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다르게 보았다.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보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시간을 다르게 보지 못한다. 근대의 자본주의는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땅따먹기 게임이다. 누가 시장을 넓게 확보하느냐가 성패의 기준이 된다. 여기서 시간은 땅따먹기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시간도 자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시간은 온갖 행위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시간을 다르게 보기 힘들어 한다.

 

교회도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 교회가 땅따먹기 게임을 한다. 교회건물을 크게 짓고, 교인들을 많이 모으고, 선교지를 넓혀간다. 교회 건물이 크고, 교인들이 많이 모이고, 선교하는 지역이 많은 교회를 성공한 교회, 그러한 곳에서 목회하는 사람을 성공한 목회자라고 말한다. 땅따먹기를 잘하기 위하여, 그들은 더 많이 예배드리고, 더 많이 모임을 갖고, 더 많이 선교를 한다. 사회 곳곳에, 지구 곳곳에 자기 교회의 깃발을 많이 꽂는 교회가 성공한 교회라는 인식을 한다.

 

사실, 데살로니가의 본문은 그러한 생각에 강력하게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예언(주의 말씀)’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며, 그것을 잘 분별하여 선한 것은 취하고 악한 것은 버리라는 이 말씀, 이것은 매우 강력한 브레이크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예배도 드리지 말고, 모이지도 말고, 선교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럴리가. 다만,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졌던, 포로기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시간을 다르게 보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춘향전 이야기를 통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춘향이는 이도령이 떠나자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변사또의 횡포에 춘향이는 결국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춘향이가 이도령도 떠나고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가장 연약할 때에 그녀가 붙잡은 것이 무엇인가? 이도령과의 약속이다. 그런데, 그 약속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했을 때, 춘향이가 이렇게 생각했을까? ‘그래 내가 온힘을 다해서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면 이도령이 이 마음을 알아주고, 나를 구하러 와 줄거야.’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의 행위가 이도령의 구원을 가져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춘향이의 삶에는 이미 약속을 통하여 이도령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포로생활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그들이 가장 연약한 때이다. 연약하니까, 한 가지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했을까? ‘그래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지만,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이야!’ 아니다. 그들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서, 범사에 감사하니까, 그러한 행위(doing)를 하니까 주님이 오시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주님이 와 계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선포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뭔가의 행위가 필요한 시간이 아닌, 이미 구원된 시간으로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being)’가 되는 그리스도인은 행위로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지 않고, 존재로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한다. 기뻐하는 행위, 기도하는 행위, 감사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의 존재, 기도의 존재, 감사의 존재가 된다. 이러한 존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크리스마스 시즌,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사줄까(행위) 고민하지만, 우리가 정말 구원된 시간을 산다면, 어떤 선물을 사줄까를 고민하기 보다, 자기 자신이 선물이 될 것이다 (Buy a present à be a present). 성탄절, 곳곳에서 빛나는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light)를 바라보는(행위) 사람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빛나는 불빛이 될 것이다(Seeing the Christmas lights à Being the Christmas lights).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성탄절이 되었으니, 동방박사들처럼 주님 앞에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가지고 나오길 바라실까? 아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이미 구원된 시간 안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이 되기를 원하신다. 예배를 드리는 행위(doing)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 (being)예배 자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번 성탄절에 한 가지만 실천해 보자. 소중한 사람에게 뭔가를 사주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그 사람에게 선물이 되어보자. Doing을 통해서 소중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니라, Being을 통해서 소중한 사람을 기쁘게 해보자. 이것이 가능한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요, 그렇지 못한 자는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기까지 한참 모자른 자이니, 주님의 은혜를 더욱더 간구하자. 소중한 사람에게 소중한 선물이 되어, 기쁨이 넘치는 성탄절 절기를 보내기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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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우리는 죽은 신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신이 살아있던 중세 질서가 무너지고, 신이 죽은 사회를 근대(modern)라 부른다. 의사처럼 신에게 공식사망선고를 내린 것이 니체였다. "신은 죽었다!"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니체의 발칙한 이 신의 사망선고가 거슬리겠지만, 한국교회가 그토록 자신의 신앙을 동일화시키는 '복음주의'는 사실 근대의 산물이다. , 한국의 복음주의는 겉으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선포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이 살아있지 않은 것을 선포한 시대를 바탕으로 발달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복음주의가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괴물이 된 것이다. 


로크, 홉스, 루소를 거쳐 다듬어진 '사회계약(social contract)'은 신이 죽은 사회에서 인간들이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어떻게서든 잘 살아보려고 한 처절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신이 죽어버린 상황에서, 다시 말해 왕이 죽어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혼란을 극복하고 인간들끼리 평화를 이루면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 '사회계약'이다. 전쟁터에 내몰린 인간들끼리 서로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서로 죽이지 않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 사회계약이다. 


죽지 않기 위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인간은 기꺼이 자신이 가진 '권리' '계약'이라는 것에 내어놓고, 그 계약 안에서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며 살아가려는 것이 근대인의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 , 신이 죽은 상황에서 인간들끼리 어떻게든 생명을 보듬으려는 생각은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인데, 그렇게 인간은 신이 죽은 세상에서 500년 정도를 산 것이다. 


신이 죽은 상황에서 인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 아니라 '이성'이 될 수밖에 없다. 신앙은 신이 살아있을 때 가장 중요한 요소였지만, 신이 죽었으니 이제 더 이상 신앙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은 유용한 수단은 '이성'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지난 500년간 이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생명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500년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보니,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이 없는 것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를 인간이 모두 컨트롤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감당이 안 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인간성은 말도 못하게 파괴되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나 있던 길은 모두 지워졌고, 삶의 의미는 소멸되었고, 말할 수 없는 허무함에 인간들은 쓸쓸한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 '물질()'에만 집착할 뿐, 그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대철학의 과제, 신학의 과제는 신이 죽은 세상에서 어떻게 인생들에게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할 것인가이다. 다시말해, 어떻게 질서를 다시 재편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사실 그 질서가 어떻게 재편될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정치철학과 신학에서는 어거스틴을 다시 소환하여, 어거스틴이 생각했던 세계관, 즉 신이 살아있는 세계를 다시 재구성하려는 노력들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는 죽은 신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인간에게 신을 죽일 수 있는 권세가 있었다면, 그래서 신을 죽였다면, 이제 인간에게 죽은 신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을까? 근대를 지나, 후기근대(포스트모더니즘)를 살고 있는 인간들은 살기위해 다시 신을 살려야만 하는 위기에 놓여있다. 


유발 하라리는 신을 되살리는 것보다 차라리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지 모르겠다. 둘 다 어려운 문제이다. 죽은 신을 되살리는 것도 인간이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고, 인간이 그냥 신이 되어버리는 것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 정말 위기인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여 놓고, 수습을 못하고 있는 이 시절, 인간에게 구원은 어디에서 올 것인지, 정말 궁금하기도 하고, 절실하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이 시대의 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완전 다른 차원의 시간이 인류의 역사 안으로 들어온 사건이 기독교의 종말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근대를 지나오며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신을 죽이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하여 대부분의 인류가 기독교를 등진 이 상황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이 어떻게 보편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인가는 불투명하다. 그래서 인류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은 철저하게 배타적 사건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와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마지막 소망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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