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2'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12.12 우리는 죽은 신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2. 2020.12.12 인류의 끊임없는 싸움

[우리는 죽은 신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신이 살아있던 중세 질서가 무너지고, 신이 죽은 사회를 근대(modern)라 부른다. 의사처럼 신에게 공식사망선고를 내린 것이 니체였다. "신은 죽었다!"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니체의 발칙한 이 신의 사망선고가 거슬리겠지만, 한국교회가 그토록 자신의 신앙을 동일화시키는 '복음주의'는 사실 근대의 산물이다. , 한국의 복음주의는 겉으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선포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이 살아있지 않은 것을 선포한 시대를 바탕으로 발달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복음주의가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괴물이 된 것이다. 


로크, 홉스, 루소를 거쳐 다듬어진 '사회계약(social contract)'은 신이 죽은 사회에서 인간들이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어떻게서든 잘 살아보려고 한 처절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신이 죽어버린 상황에서, 다시 말해 왕이 죽어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혼란을 극복하고 인간들끼리 평화를 이루면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 '사회계약'이다. 전쟁터에 내몰린 인간들끼리 서로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서로 죽이지 않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 사회계약이다. 


죽지 않기 위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인간은 기꺼이 자신이 가진 '권리' '계약'이라는 것에 내어놓고, 그 계약 안에서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며 살아가려는 것이 근대인의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 , 신이 죽은 상황에서 인간들끼리 어떻게든 생명을 보듬으려는 생각은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인데, 그렇게 인간은 신이 죽은 세상에서 500년 정도를 산 것이다. 


신이 죽은 상황에서 인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 아니라 '이성'이 될 수밖에 없다. 신앙은 신이 살아있을 때 가장 중요한 요소였지만, 신이 죽었으니 이제 더 이상 신앙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은 유용한 수단은 '이성'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지난 500년간 이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생명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500년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보니,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이 없는 것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를 인간이 모두 컨트롤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감당이 안 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인간성은 말도 못하게 파괴되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나 있던 길은 모두 지워졌고, 삶의 의미는 소멸되었고, 말할 수 없는 허무함에 인간들은 쓸쓸한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 '물질()'에만 집착할 뿐, 그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대철학의 과제, 신학의 과제는 신이 죽은 세상에서 어떻게 인생들에게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할 것인가이다. 다시말해, 어떻게 질서를 다시 재편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사실 그 질서가 어떻게 재편될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정치철학과 신학에서는 어거스틴을 다시 소환하여, 어거스틴이 생각했던 세계관, 즉 신이 살아있는 세계를 다시 재구성하려는 노력들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는 죽은 신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인간에게 신을 죽일 수 있는 권세가 있었다면, 그래서 신을 죽였다면, 이제 인간에게 죽은 신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을까? 근대를 지나, 후기근대(포스트모더니즘)를 살고 있는 인간들은 살기위해 다시 신을 살려야만 하는 위기에 놓여있다. 


유발 하라리는 신을 되살리는 것보다 차라리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지 모르겠다. 둘 다 어려운 문제이다. 죽은 신을 되살리는 것도 인간이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고, 인간이 그냥 신이 되어버리는 것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 정말 위기인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여 놓고, 수습을 못하고 있는 이 시절, 인간에게 구원은 어디에서 올 것인지, 정말 궁금하기도 하고, 절실하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이 시대의 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완전 다른 차원의 시간이 인류의 역사 안으로 들어온 사건이 기독교의 종말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근대를 지나오며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신을 죽이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하여 대부분의 인류가 기독교를 등진 이 상황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이 어떻게 보편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인가는 불투명하다. 그래서 인류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은 철저하게 배타적 사건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와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마지막 소망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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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인류의 끊임없는 싸움]

 

체제 안에 들어가면 모두 '보수화'가 된다. 체제에 들어가면 인간은 안 보이고, 체제를 보장해주는 초월적 가치, 자본, 체제자체만을 보게 된다. 인간의 영혼도 몸이라 불리는 체제에 들어가면 보수화가 된다. 그런 현상을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은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라 부르는 것이다. 몸에 갇힌 영혼도 보수화되면 몸을 착취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죄, 자기집중이다.

 

철학과 종교는 이렇게 인간이 보수화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억압하고 소유하고 소비시키는 그 보수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묻는다. , 좋은 철학과 훌륭한 종교는 체제에 가두어진, 또는 체제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인간을 해방시키지만, 나쁜 철학과 형편없는 종교는 인간을 교묘하게 착취하면서 체제를 공고히 한다.

 

키아누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매트릭스>는 그 현상을 아주 잘 보여준다. 매트릭스 체제에 갇힌 인간은 자신들이 실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체제가 조작한 가상현실에 불과하다. 가끔 일어나는 버그 때문에 현실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내 스미스 요원에 의해 그러한 의심은 제거된다.

 

매트릭스에 갇힌 그들의 현실이 조작된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매트릭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철학과 종교의 기능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체제 바깥에서 조작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조작된 현실의 실상을 깨달으면 영화의 니오(Neo)처럼 체제(매트릭스)를 빠져나올 수 있다.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의 순간이다.

 

그리고 구원의 순간을 경험한 이들은 진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자신처럼 매트릭스에 갇힌 자들을 구하는 일, 그 미션에 자기를 헌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구원은 사명으로서의 깨어남, 다시 태어남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싸울 수밖에 없다. 매트릭스를 만들어 그 체제 안에 사람들을 밀어 넣으려는 자들과 그 사람들에게 자유를 찾아주려는 사람들의 싸움. 자기 자신의 몸에 갇힌 사람은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예수가 몸을 버려 세상을 구원한 것은 자기 구원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구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처럼 몸을 버려 자기를 구원하고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결단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체제에 묶여 자유를 잃은 노예로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