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톰(a-tom)의 시대, 우리는 모두 우주소년 아톰이다

 

우주소년 아톰. 어린 시절 손에 땀을 쥐며 보던 만화영화다. 아직까지도 몇몇 장면은 눈에 선하다. 우주소년 아톰은 우리나라에서 방영될 때의 제목이고, 원래 제목은 ‘Astro Boy(우주소년)’이다. 미국에 온 후, 어린 시절 TV에서 재밌게 보던 미국드라마나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우주소년 아톰 외에도 서부영화 내 이름은 튜니티를 찾아보았다. 영어 원제목은 ‘my name is Trinity’였다. 트리니티를 튜니티로 번역한 것이다. 또한 ‘A 특공대도 찾아보았는데, 원제목은 ‘The A-Team’이다. ‘전격제트작전‘A Knight Rider’이다. 비디오 씨디를 구입하여, 모두 다시 보았다. 지금 봐도 재밌다.

 

아톰(atom)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주소년이 아톰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에너지원이 등뒤에 건전지처럼 끼워넣는 원자/핵연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아톰(atom)’은 라틴어로 ‘individuum’으로 번역한다. 여기에서 영어의 ‘individual’이 나왔고, 이것을 한국어로 개인이라 번역한다.

 

중세를 지배했던 철학은 실재론(realism)이다. 이는 ()플라톤주의의 핵심 개념으로서, 모든 만물은 실재하는 실체(substance)의 모상에 불과하다는 이론이다. 우리가 보편을 생각하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은 그 원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재론이 신학에 적용되면,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최고의 실체는 하나님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실체의 보이는 형상이므로, 모든 인간이 본받아야만 하는 이상적인 존재가 된다.

 

중세의 이러한 실재론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 유명론(nominalism)이다. 유명론은 플라톤주의를 극복하려는 철학사상으로서 실체보다는 개체에 집중한다. 실체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개체는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은 이렇게 개체에 집중하는 유명론의 철학 바탕 위에 발생한, 사고의 전환이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된 개체는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인간 세상의 주류 사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개체, 즉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인이 모든 규범의 중심에 올라서게 된 시대를 우리는 근대라고 부른다. 근대는 한마디로, ‘개인을 발견한 시대이다.

 

근대 이전까지 인간은 자기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자기 바깥에서 오는 전통이나 성서가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규범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시작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규범으로 자기 바깥의 것을 수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기 안에 있는 것, 즉 이성이 삶의 규범이 된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에게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그래서 전통이나 성서가 아니라 이성이 되었다. 이성이 왕이 되었다. 근대 이후의 서구 사상은 이성의 역사이다. 이성과 함께 웃고 울었다.

 

원자의 개념을 처음 생각한 그리스 철학자는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이다. 소크라테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고안한 원자(atom)’이라는 개념이 거의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근대에 들어와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의 뜻을 가진 원자는 이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인간 존재, 개인의 개념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개인이 발견된 근대 이후, 우리는 진짜로 아톰(atom)’이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톰이다.

 

아톰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개인에게는 주체, 권리, 인권 같은 것을 바탕으로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근대 이후 서구 사상은 아톰(개인)이 된 인간 개체가 다른 아톰과 어떻게 잘 어울려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성찰로 발전했다. 우주소년 아톰이 힘이 센 것처럼, 한 명 한 명의 인간 개체는 자신의 주체와 권리를 바탕으로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기 영역(property/재산)을 가지게 되었고, 힘과 힘은 잘 조절되지 않으면 충돌하여 큰 불상사를 발생시킬 수 있으므로, 아톰과 아톰이 어떻게 공멸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롤스의 자유주의사상이나 하버마스의 공론장개념은 모두 그러한 노력들이다.

 

요즘 소통이 강조되는 이유는 아톰의 시대에 아톰과 아톰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와 권리를 바탕으로 무한한 자유를 소유한(또는 소유해가는) 인간 개체는 이제 힘을 가지게 되었고, 그 힘을 정의롭게 쓰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마치, 집에 자동차가 하나 있고 그 자동차는 가장만 운전할 줄 알면 되는 시대에서 각 사람마다 자동차를 소유하게 되어 각 사람이 자동차 운전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과 같다.

 

자유를 손에 쥔다는 것, 권리를 손에 쥔다는 것은 사람에게 칼을 쥐어 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을 쥔 사람이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쓰일지 무척이나 걱정되는 상황이다. 손에 쥐어진 칼을 정의롭게쓸려면 성숙이 필요한데, 만화영화에서 우주소년 아톰이 자신이 지닌 힘을 정의롭게 쓰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아톰들도 자신의 손에 쥐어진 자유라는 칼, 권리라는 칼을 정의롭게 쓰도록 성숙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의 발견은 좋은 것이다. 개인은 충분히 발견되어야 한다. 모든 삶의 결정권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그 결정권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만약 누군가 자기 결정권(자유)을 빼앗으려 한다면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아톰들은 각자가 충분한아톰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톰들은 동시에 책임감을 철저하게 가져야 한다. 이것에 실패하면 그는 더 이상 아톰이 아니다. 그냥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프로그래밍된 로봇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어마어마한 일을 잘 해내려면 갖춰야 할 덕성(virtue)’이 참 많다. 그래서 아톰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우아하기도 하지만 피곤하기도 하다. 지치지 않기를. 아톰의 힘과 우아함을 잃지 않기를.

Posted by 장준식

개신교의 공의회 기능 상실과 게으른 신앙

ㅡ 보편 신앙을 위하여

 

캐슬린 얀센 화이자 백신 연구 개발 책임자는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제 우리는 이 백신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제대로 작용하는 지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앨버트 불라 화이자 최고경영자(CEO) 역시오늘은 과학과 인류에게 멋진 날이라며 성과를 자축했다.

(화이자 "임상 중인 백신, 90% 넘게 효과 있다"는 기사 중에서)

 

종교사상은 과학과 달라서 검증이 잘 안 된다. 컨트롤 타워가 없다. 그래서 누가 말하는 어떠한 종교사상이 세상으로 내보내도 되는지, 제대로 작용하는 지, 세상에 내보내지기 전에 검증할 방법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들이 당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할까? 최대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대개 어떠한 사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없다. 어떤 원류(source)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확인해 가다 보면, 그 사상이 역사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것이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이야기인지 알 수 있고, 그것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 시대에 유효한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하는 것이 공부다.

 

우리는 너무 쉽게 믿는다. 마침 성경에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의심을 하면 신앙인이 아닌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 종교권력은 그러한 종교문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한다.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우리는 우리의 주권, 주체,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악으로 추락하고 만다.

 

종교사상, 또는 신앙이 건전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신학은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한다. 기독교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 펼쳐왔다. 이러한 생각에 꽃을 피운 신학이 중세의 스콜라 신학이다. 특별히 아퀴나스 신학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가톨릭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 특별히 아퀴나스의 신학에 따라 이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가톨릭 신학은 굉장히 이성적이다.

 

여기서 이성적이라는 말은 보편성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학사상의 보편성은 공의회를 통해서 확보되어 왔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신학자들이 모여서 어떠한 신학적 이슈를 놓아두고 공방을 벌인 뒤, 공의회는 서로 합의된 신학사상을 발표했다. 공의회를 통해 탄생한 대표적 기독교 정통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다. ‘예수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서 출발한 기독론 논쟁은 결국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인 삼위일체론으로 귀결되었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의 논쟁을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삼위일체론의 핵심사항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을 확립한데 있다. 공의회를 통해서 유사본질(호모이우시오스)을 주장하던 아리우스는 정죄되고, 이에 맞서 동일본질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이 정통으로 인정된 것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기독교 신학은 동일본질을 정통신학으로 공표하며 그 신학을 유지해 왔지만, 그렇다고 역사에서 유사본질을 주장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여 바이러스를 퇴치했다고 해서 그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과 같다. 바이러스의 위협은 늘 존재한다. 문제는 그 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몸상태와 백신이 있는지 없는지 이다.

 

종교개혁은 보편을 앞세워, 또는 보편을 남용하여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횡을 휘둘렀던 가톨릭의 교권주의자들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킨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에 대한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탄생한 개신교신학(Protestant Theology)은 성경과 은총과 믿음을 강조하지만, 결국 이것은 이성과 보편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신학사상을 검증하여 무엇이 건전성을 확보하고 있는 신학인지 확인해 주는 장치인 공의회 기능을 상실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인들은 은총과 믿음을 통해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 받긴 했으나, 은총과 자유를 통해 내가해석한 성경의 내용이 건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게 되었다.

 

개신교인들은 해석이라는 말을 낯설어 한다. 성경 말씀을 그냥 믿으면 되지, 무슨 해석이 필요하냐고 반문한다. 이렇게 반문하는 것 자체가 해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 세상에 해석이 아닌 것은 없다. 인간은 물자체를 인식할 능력이 없다. 무엇이든지 개념화시켜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개념화시키는 작업이 이성이고, 어떠한 것을 이성이 올바르게 개념화시켰는지를 검증하는 것이 학문이다. 그렇기에, 신학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개념화시킨 하나님 존재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검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없으면, 악마를 하나님처럼 잘못 개념화시켜 놓고, 그것이 참 하나님인 것처럼 숭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이것은 결국 생명을 죽이고 만다.

 

요즘 개신교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신뢰할 수 있는 보편적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보편을 거부하고 개별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도 있지만, 적어도 개신교 안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과 더불어 공의회 기능 상실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과학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 즉 보편성을 확보한 것을 신뢰하면서, 왜 유독 신앙에 대해서는 보편성을 묻지 않는지, 참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우리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오해하고 있으며, 신학 또는 신앙의 보편성을 따질 만큼 지성이 없으며, 보편성을 따지는 것을 귀찮아 하는 게으른 신앙에 빠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결국 잠언서의 지혜가 맞는 것 같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할 개신교인들이 누구보다 게으르게 살고 있다. 그래서 망하고 있다.

그런데 너 게으른 자야, 언제까지 잠만 자겠느냐? 언제 잠에서 깨어 일어나겠느냐?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더 일손을 쉬어야지!” 하겠느냐? 그러면 가난이 부랑배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거지처럼 달려든다. (잠언 6:9-11/공동번역 개정판)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