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7'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12.17 설교자의 정신성 – 정신성의 심포니
  2. 2020.12.17 강신주 아이러니
  3. 2020.12.17 강신주의 기독교 비판

[설교자의 정신성 정신성의 심포니]

 

우리는 대개 'spirituality' '영성'이라고 번역한다. 그렇다 보니, 영성은 뭔가 고차원적이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번역의 잘못이다.

 

'Spirituality'를 영성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차라리 '정신성'이라고 번역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 않나. ', 저 친구 정신(spirit)이 살아 있네!' 그런 것처럼, spirituality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게 좋다.

 

기독교의 'spirituality', 그래서, 기독교 고유의 정신성을 말하는 것이고, 그 정신성을 내면화시키는 훈련이 '기독교 영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정신성은 그 사람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 사람은 어떠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어떤 삶을 의미 있는 삶이라 여기는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보는지, 그 사람의 생명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의 행동이나 말, 또는 그 사람의 작품 등은 모두 그 사람의 '정신성'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물론, 아무 생각없이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고, 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기교만 살아 있는 작품을 내놓는 사람들도 태반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정신성이 깃들지 않는 말이나 행동, 그리고 작품은 가치가 떨어지거나 아예 없다.

 

설교는 설교자의 정신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정신성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거기에 실패하면 설교는 설교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정신성이 결여되면 그 설교는 그냥 '아무말 대잔치'가 될 뿐이다. 또는 듣는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에 머물 뿐이다. 대개 정신성이 없는 설교자는 입담으로 청중들을 웃기려고 할 뿐이다. 정신성의 빈약함을 입담으로 가리는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 속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설교를 하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정신성'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세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야 한다. 그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설교를 하면 설교는 정신성의 표현이 아니라, 그냥 말잔치일 뿐이다. 그야말로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다.

 

신학교육은 목회기술을 가르치면 안 된다. 기술은 목회현장에서 배워도 된다. 신학교육의 목표는 기독교의 정신성을 전수하는 것이어야 한다. 좋은 신학교와 나쁜 신학교의 차이는 여기서 드러난다. 그 신학교가 정신성을 뚜렷하게 갖도록 교육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신학교를 졸업한 이들의 강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펼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실패는 결국 신학교의 실패일 수 있다. 신학교가 목회 기술을 가르치는 데만 급급했는지, 아니면 정신성을 키워 설교자가 강단에서 그 정신성을 설교를 통해 잘 표현하도록, 그리고 목회를 통해 잘 표현하도록 가르쳤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신학교육은 더욱더 정신성을 훈련하고, 그리고 목사 후보생들이 스스로 그러한 정신성을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성도의 입장에서 설교를 잘 듣는 방법은 설교 안에 담긴 정신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좋은 설교자의 설교는 정신성이 담겨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아무 의미 없이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설교자의 설교는 아무말 대잔치이거나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그 안에는 반드시 정신성이 담기게 마련이다. 그 정신성이란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신성과 분리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앵무새처럼 답습하지도 않는다. 설교자는 성경의 정신성을 전달하되 우리가 사는 시대에 통용되도록 정신성을 새롭게 구성하여 전달한다. 이런 점에서, 좋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방법은 그 설교자의 정신성을 이해하면서 듣는 것이다.

 

설교 시간은 사실 굉장한 시간이다.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성경의 정신성과 설교자의 정신성, 그리고 청중의 정신성이 한 데 어우러져 정신성의 심포니를 연주하기 때문이다. 실로, 설교 시간은 웅장한 한편의 교향악이다. 정신성의 교향악.

 

가장 실망스러운 설교자는 전혀 정신성을 찾아볼 수 없는 설교를 하는 설교자이고, 가장 실망스러운 청중은 설교자의 정신성을 전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청중이다. 이 두 부류의 설교자와 청중이 만나는 예배는 정신성이 사라진, 죽은 예배일 뿐이다. 그야말로 종교모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정신성의 심포니가 울려 퍼지는 예배를, 설교시간을, 늘 사모한다.


Posted by 장준식

[강신주 아이러니]

 

강신주의 책을 읽으면 곳곳에 기독교 혐오가 배어있다. 그의 주장이 철학책 좀 읽는 한국의 교양인(또는 지식인)들의 기독교 혐오에 일조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의 책을 읽다보면 정말로 아이러니한 것이 그가 주장하는 자유니 사랑,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은 모두 기독교의 가치들이라는 것이다. 그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소유의 형식에 대하여 고민할 때 했던 말을 보면 그의 주장이 곧 기독교의 주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유 형식의 극복을 고민해야 해요. 과연 소유 형식이라는 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해요. 예컨대 우리는 토지를 소유하잖아요. 그런데 과연 인간이 땅을 가질 수 있는 걸까요? 땅이 인간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요? 수명이 짧은 인간이 수명이 긴 것을 가질 수는 없잖아요." (강신주,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447)

 

그의 통찰은 매우 좋다. 전복적이고 변혁적이다. 그런데, 그가 위에서 말한 땅의 소유에 대한 성찰은 이미 기독교 신학에서 오래전부터, 아니, 태초부터 했던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땅에 대한 신학은 한마디로,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이다. '땅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원래 정신이다. 많은 이들이 '토지공개념' 19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가 주창한 개념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토지 공개념은 성경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왜 강신주는 자기의 주장이 기독교의 주장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기독교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고 있을까? 그는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다 나가라고 밝힌 바 있다. 출판사 편집자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면 좋은 책을 낼 수 있을 지 불신한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의 주변에 기독교에 대하여 정확히 알려줄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닐까,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는 연세대학교 출신인데, 학교를 다니면서 철학공부, 문학공부, 역사공부는 많이 한 것 같은데, 신학공부는 전혀 안 한 것 같다. 연세대학교는 신학을 포함해 모든 분야의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을 몇 안 되는 학교인데도 말이다.

 

그는 인문학 강의를 할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고 수업을 한다는 데, 연번에 걸친 어느 인문학 강의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강의를 들은 어느 한 신사가 마지막에 명함을 주며 이런 말을 했단다. '선생님의 모든 얘기가 모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을 전한 신사는 '목사'였단다. 그 말을 들은 강신주는 '내가 강의를 잘못했구나, 어쩌다가 기독교의 틀 속으로 내 강의가 들어가게 된거지?'라고 생각하며, 종교비판 책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강신주의 인문학적 성찰은 정말 좋다. 많은 이들이 이 정도로만 사유를 해도 대한민국은 정말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의에는 철학적 사유는 풍성하지만 신학적 사유가 없다는 것이 한계이다. 그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허무주의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결국 신학적 사유를 하지 않는 것 자체가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한계로 남을 수밖에 없다. 왜 그런지, 강신주가 신학을 공부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의 곁에 기독교 신학을 잘 전해줄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내가 한국에 살았다면, 그 일을 해보고도 싶으나, 나는 이역만리 타지에 살고 있으므로, 그 일을 할 수 없어 안타깝다. 그의 삶 가운데, 신실한 기독교인들과의 교제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그의 인문학적 사유의 아이러니가 잘 극복되기를 바란다.


Posted by 장준식

[강신주의 기독교 비판]

 

강신주는 사랑의 원리를 이야기하면서 기독교를 비판한다. 그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지금 같이 있으면 돼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원칙이 좋은 게 오늘만 있잖아요. 내일 되면 또 오늘이라니까요.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에요. 반면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고 하면 내일 돼고 또 내일이 있는 거에요. 계속 그렇게 가는 거에요. 그 극단이 기독교라고요. 마지막에 보자는 거에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우리에게 천국은 있다, 똑같은 거에요. 현재를 긍정하지 못하게 하고 현재를 전전긍긍하게 하고..... 니체는 진정한 허무주의자는 기독교인이라고 봐요. 자신의 현재 삶을 부정하기 때문에 허무주의라는 거죠. 기독교와 자본과 국가권력, 이들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각 개인에게서 오늘을 빼앗은 건데, 그건 사랑을 빼앗는 거거든요. 어떤 형식이든 구조는 똑같아요. 우리의 억압 체제를 비판하려면 자본, 기독교, 권력을 삼위일체로 비판해야 해요. 자본 비판해놓고는 교회 나가면 말짱 도루묵인 거에요..... 기독교는 붕괴돼야 해요. 인간에게는 악의 축이에요. 인문학자는 반드시 기독교를 비판해야 해요. 인문학자라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남루한 거에요." (강신주,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409-410)


강신주가 말하는 '기독교'는 아마도 '복음주의'를 말하는 것 같다. 복음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자본과 국가권력이기 때문이다. 강신주의 기독교 비판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아쉬운 점은 강신주가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으며, 기독교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강신주는 기독교 종말론을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강신주가 아는 기독교는 교조화된 기독교, 서구사회에서 권력에 의해 이용당한 기독교만 아는 것 같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다. 기독교에 깊이 들어가 기독교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기독교가 드러내고 있는 '현상'들을 통해 기독교를 경험하고 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붕괴돼야 해요. 인간에게는 악의 축이에요."라는 강신주의 언급은 경솔한 것이다. 그가 기독교를 부정해서 경솔한 게 아니라, 기독교가 인류문화에 이바지한 엄청난 역사를 너무도 쉽게 한 마디로 부정해서 그런 것이고, 기독교 신학이 가진 엄청난 우주변혁적인 힘을 그가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는 현재를 긍정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미래만을 바라보게 하지도 않는다. 기독교의 힘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응집시킨다는 데 있다. 그리고 현재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상승시킨다는 데 있다. 인문학자는 현재만을 살지 모르지만, 기독교인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동시에 산다. 현재만을 사는 사람의 삶과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동시에 사는 사람의 삶 중, 누구의 삶이 더 풍요로울까.

 

강신주가 기독교를 비판하려면 기독교의 존재 자체를 비판하면 안 된다.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는 기독교를 비판해야 한다. 이미, 기독교 내에서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담론은 계속 생산되어 왔다. 그 역사를 모르면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강신주는 기독교를 제대로 비판하는 책을 내서, 사람들이 더이상은 교회에 다니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책이 어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의 오래된 명제 중 하나는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인데, 그가 이해를 추구하고, 비판을 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이 깊은 진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자유와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기독교를 사랑하지 않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가 기독교를 얼마나 멋지게 비판해낼지는 미지수다.

 

"인문학자라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남루한 거에요"라고 강신주는 말하지만, 국문학(현대문학) 공부하고 인문학도로서 목사까지 된 나는 남루한 사람인가? 목사까지 된, 남루한 사람 중에 괴수인 나는 강신주의 기독교 비판 서적이 출간되기를 무척이나 기다린다. 마치, 칸트가 루소의 "에밀"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것처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