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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23 기독교의 배타성

[기독교의 배타성]

 

기독교는 세심하게 해석하지 않으면 배타성을 생성해낼 수밖에 없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1. 유일신관(Monotheism)

2. 선민사상(Chosen People)

3. 기독론(Christology)

4. 종말론(Eschatology)

 

1. 유일신관은 유대교와 공유하고 있는 신관이다. 기독교 생성 초기부터 유일신관은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의 교리였다. 다신론의 세계였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태동한 기독교가 그 시대에 배척당하는 역할을 한 교리이기도 하다. 다신론의 세계에서 유일신론을 주장했던 기독교인들은 그당시 사람들에게 '무신론자'라고 불렸다. 이것은 굉장히 재밌는 현상이다. 지금은 '무신론자'라고 하면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불리고 있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또한 유일신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원리로 작용했다. 예수를 ''이라고 부르면, 유일신론이 아니라 다신론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일신론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일신관과 충돌하지 않는 기독론을 생각해낸 결과가 삼위일체론이다.

 

주지하다시피, 유일신관에 대한 세심한 해석을 하지 않으면, 유일신관은 매우 폭력적인 교리로 작용할 수 있다. 폭력적이지 않은, 평화로운 기독교가 되려면, 유일신관을 세심하게 해석해야 한다.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그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나, 유일신관을 핑계로 폭력적인 성향을 표출하고, 배타적인 종교를 형성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악한 무리들은 결코 유일신관을 세심하게 해석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겐 진리보다 이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악함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용당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폭력에 희생되었는가. 애가(Jeremiad)가 필요한 시대이다.

 

2. 유대교의 선민사상의 기독교 버전은 '부르심(calling)'이다. 이 또한 세심한 해석이 없으면 폭력적인 교리로 전환되기 쉬운 교리이다. 현대 기독교 이단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인데, 특별히 배타성과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교리이다. 이단들은 자신의 집단을 세력화하기 위하여, 그래서 자신의 권세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선민사상을 주입시킨다. 마침 요한계시록에 14 4천명이라는, 아주 '문자적인' 선민신앙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기에, 그들은 그것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선민사상은 배타적인 민족을 이루거나, 선택받은 사람에게 (심리적) 우월성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 고안된 교리가 아닐 텐데, 이단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연약한 자들의 욕망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현혹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정욕구'가 있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 누군가에게 특별한 선택을 받는다는 것에 목말라 있다. 사람들에게서,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게 만드는 이 사회는 사람들의 '인정욕구'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장사치들은 그러한 인정욕구를 이용하여 장사하고, 종교 이단은 그러한 인정욕구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탈탈 턴다. 이 또한 애통한 일이다.

 

3. 기독론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불리는 교리이지만, 기독론만큼 오용되고 있는 교리도 없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예수가 누구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그저 앵무새처럼 "예수는 주, 예수는 메시아, 예수는 뭐뭐뭐...'하면서 명제적으로 확정된 예수를 외칠 뿐이다.

 

예수는 인격적 사귐을 원하는데, 우리들은 예수와 인격적 사귐을 가지기 원하지 않는다. 예수는 이 땅을 걷기 원하는데, 우리의 삶에 들어와서 우리와 동행하기 원하는데,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기만 좋아하고, 예수를 하늘로 빨리 승천시키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원하는 예수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이 또는 우리의 신념이 또는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예수이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 현존하는 예수는 우리의 삶을 고치고 싸매고 온전케 하는 게 아니라, 갈등을 일으키고 평화를 깨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 예수는 우리의 욕망의 대체물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4. 한국교회의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이해는 정말 남루하다. 기독교 고유의 시간성에 접근하지 못하고, 자본주의가 고안하고 있는 공간성에만 매몰되어 있다. 시간성과 공간성은 우리가 이땅에 발 딛고 사는 한 공존해야 하는 것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시간성의 종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간성은 시간성이 필요로 하는 만큼만 사유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의 시간성에 대한 사유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공간성에 대한 사유만 확장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기독교의 종말은 '폭력'이 가해지는 시간이 아니라, 심판이 내려지는 시간이다. 우리는 심판을 폭력으로 잘못 생각한다. 심판은 폭력이 아니다. 심판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심판은 새창조를 위한 성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종말론을 오용하여 마치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세상 끝날에 폭력이 가해질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할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명백한 기독교 종말론의 오해이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조장하기에 딱 좋은 교리가 종말론이다. 소위 '공포정치'는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자기들의 통치를 쉽게 만들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는 술수이다. 지금도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공포가 조장되고 있는가. 미디어는 권세 잡은 자들과 협력하여 그 일을 너무도 잘 해내고 있다. TV 뉴스, 인터넷 뉴스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기사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온다. 공포는 스스로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그것들을 통치자들에게 자발적으로 가져다 바치게 만든다. 기독교 종말론도 딱 그렇게 씌고 있다. 종말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권력에 순종하게 만드는, 바로 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 얼마나 나쁜 짓이고, 슬픈 일인가. 

 

기독교는 세상 변혁의 힘을 지닌 강력한 종교이다. 그러나, 세심한 해석 없이 남용되고 있는 교리들 때문에 그 강력한 힘이 엉뚱한 데 쓰이고 있다.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인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었던 노벨이 다이너마이트가 오히려 인간을 죽이는 데 쓰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발명을 후회했던 것처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작금의 기독교를 보면 자신의 희생을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저리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기독교가 지닌 그 엄청난 힘을 선하게 사용하는,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깨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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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