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0. 11. 30. 10:57

구원된 일상을 간구하는 기도

(이사야 64:1-9)

 

주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시간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거듭남이란 우선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 아니겠는지요?

우리는 구원된 일상을 삽니다. 자기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려 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오는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 구원된 일상을 누리는 자의 삶, 복되고 아름답습니다.

험한 풍파가 몰아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구원된 일상을 누리는 자의 행위는

자기 구원을 이루고 남을 차별하는 성취가 아니라

주께서 선물로 주신 기쁨, 자유, 평화, 사랑을 나타내는 놀이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소풍 같은 삶을 살다

아버지이신 주님께서 부르시면 집으로 갑니다.

선물로 주어진 구원된 일상을 사는 우리들,

너무 힘주어 살지 말게 하시고

우리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빚어진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고 상대방도 존귀하게 여기며,

신비한 방식으로 날마다 우리 삶에 임하는

주님의 구원의 선물을 기쁨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자기 성취를 통해 구원을 확보하려 했던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기 위하여

사흘만에 죽음에서 일으켜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30. 10:56

구원된 일상

(이사야 64:1-9)

 

잊고 살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국문과 대학원 종합시험 문제가 근대의 시간이해를 서술하시오.”였다. 근대란 모더니티(modernity)를 말하는 것인데, 이 시험문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시대마다 시간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혁명을 거친 이후의 사람들을 근대인이라고 불렀고, 근대인은 그 이전의 사람들과 시간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근대의 영향 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근대의 시간 이해 안에서 시간을 향유한다.

 

그때 나는 무슨 답을 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정답을 적었을 것이다. 종합시험을 통과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답을 적는 게 아니라, 그 정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근대는 시간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근대(modernity)를 잘 알아야 하는데, 현재 우리의 삶의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발견이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개인의 주체, 권리, 인권이라는 개념은 모두 근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근대를 거쳤다는 뜻은 비로소 우리 인간이, 각 개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주체가 될 수 있게 되었고, 권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인권이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근대 이전까지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삶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향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사회를 봉건사회라고 한다. 독립된 (주체적인/권리와 인권을 가진) 개인이 없었던 사회를 말한다.

 

근대 이전의 사회인 봉건사회에서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당연히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을 당연히 각자 개인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봉건사회에서 사는 게 아니라, 근대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근대인이다. 근대인에게 시간은 개인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의 미래에 대한 이해이다. 근대인에게 시간의 과거가 중요할까, 현재가 중요할까, 아니면 미래가 중요할까? 과거와 현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래는 내 삶의 주체인 내가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 근대인은 시간을 가능성이 가득한 것으로 이해했고, 현재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따라서 그 가능성이 미래에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상황을 근대인들은 이러한 격언으로 표현한다. “시간은 금이다.” 시간 안에는 금이 감춰져 있다.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시간 안에 감춰진 금을 발견하느냐, 못발견하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그래서 근대인들은 당연히, 시간에 감춰진 금을 발견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 것이다. 그것을 성취라고 부른다.

 

이러한 근대인들의 생각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도 그러한 방식으로 발생할 거라 생각했다. 이성적인 인간이 도덕성을 갖추고,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면, 시간 안에 금처럼 감춰진 하나님 나라가 현실에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고, 사회봉사를 많이 했다.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게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역사에 임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서로 죽이고 죽는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도래하는 것이고, 구원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림절은 이 질문을 하기 참 좋은 절기이다. 그리스도인의 시간 이해는 근대인들의 시간 이해와 다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을 초월해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근대의 시간 이해의 영향 아래 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성취로 보지 않고, 선물로 본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 나라는 성취로 도래하는 게 아니라 선물(은총/은혜/grace)로 도래하고, 구원은 성취하는 게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본문은 구원을 갈망하는 이사야의 노래이다.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는 주님이 행하신 두려운 일들은 구원을 가리킨다. 그 구원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셨다”(3). 공동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좀 더 풀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은(구원)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근대인으로서 우리가 뭔가를 성취하기 위하여, 즉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하면,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 자기 구원적 행위이다.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조차도 자살하는 이유는 자기 멸망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한다.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행위로서 자살한다. 근대인들에게는 자살도 구원의 자기 성취이다. 이렇게 근대적 시간 이해는 인간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비극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우리는 자기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참 힘들게 산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결코 자기 성취가 아니다. 구원은 선물이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기 성취를 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곳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 공동번역 성서는 이것을 이렇게 좀 풀어서 말한다. “우리는 모두 부정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기껏 잘했다는 것도 개짐처럼 더럽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고 우리의 죄가 바람이 되어 우리를 휩쓸어 갔습니다.”

 

기껏 잘했다는 것도 개짐처럼 더럽습니다.” 아주 통렬하고 솔직한 고백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구원을 꿈꾸며,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나를 구원해 줄 거라 기대하며 최선을 다해보지만, 그 열심을 다한 최선이 나의 삶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삶을 망치거나 더 어려운 문제를 가져오는 것을 경험한다. 정말 그렇다. 기껏 잘했다는 것도, 나뿐 아니라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때 우리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냥 근대인들이 생각하는 시간 이해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살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삶의 구원을 이루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소망은 참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대림절을 맞아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리스도의 구원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성취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복음)’을 전해줄 사명을 가지고 있다. 구원은 자기 성취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임을 알려야 한다.

 

구원은 선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이사야의 고백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8). 공동번역 성서는 이것을 이렇게 옮겼다. “야훼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사야와 똑 같은 고백을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8-10). 공동번역 성서로 읽으면 이렇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이사야와 바울이 똑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자기 성취의 근대적 시간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못한다. 자기의 구원은 자기가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영광 받고,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시간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삶을 완전히 다르게 본다. 구원은 자기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자신은 자기 성취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작품으로 고백한다. ‘포이에마’(하나님의 작품)는 여기에서 온 말이다.

 

근대인들(세상 사람들/세속)은 자기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살지만,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주어진 구원의 일상을 산다. 구원을 자기 성취를 통해 이루려는 사람의 삶과 이미 선물로 주어진 구원을 일상으로 사는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자기 성취를 통해서 구원을 이룬 사람은 얼마간 여유를 가질 수 있겠으나, 그 성취가 구원을 지속해 주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의 삶은 늘 불안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려 하지 않기 때문에 여유를 가질 수 있고, 구원된 일상을 살기 때문에 늘 기쁘다.

 

성취가 아닌,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즉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행위(선물)를 통하여 비천한 자에서 존귀한 자로 인생이 뒤바뀐 마리아의 찬가는 자기 성취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려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우리가 이 기쁜 소식(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삶 속에서 자기 성취를 통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허망한 신화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 구원된 일상을 기쁨으로 누리는 하나님의 작품(포이에마)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2:46-55).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날마다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구원된 일상을 살게 하신 주님,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선한 삶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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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신자유주의적 현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아래의 현실은 다음과 같다.

1. 환경오염과 자원고갈 (기후변화)

2. 가족(공동체)파괴와 가치의 물신화

3. 인간의 존엄성 하락 (자기 상품화)

4. 모든 영역(정치, 경제, 사회, 문화)이 시장에 종속

5. 불평등의 심화

6. 민주주의 후퇴

 

루소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현실화된 요즘, 우리는 인간의 사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짐승의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 원자화된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서로 못 믿는 불신사회가 되었으며, 불안과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사람들은 살아남으려고, 신자유주의 체제에 적응하여, 자기 자신을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상품'으로 가다듬는데 여념이 없다. 모든 생활의 영역은 시장이 되었고, 그 무한 경쟁의 시장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있다. 최고의 상품, 또는 소비자들이 찾는 상품이 되기 위하여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품의 조건에 맞추어 자기를 조각한다.

 

남들보다 우위에 올라선 상품이 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외모와 스펙이므로, 성형수술과 각종 자격증 시험이 만연한다. 소셜(social)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축소되었고,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대학교에서는 동아리 모임도 그렇게 재편되었다. 실용성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종교생활은 심신안정을 위한 취미생활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고,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위로와 복에 대한 간구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 이외의 다른 메시지를 전하면 뭇매를 맞기 일쑤다. 가뜩이나 삶 속에서 살기 퍽퍽한데, 교회에 와서까지 힘든 일 하기 싫고, '정의로운 메시지'를 듣는 것이 불편하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시장의 노예가 되었다. 아주 자발적인 노예가 되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워도 어디다가 하소연할 곳도 없다. 자기 자신의 못남을 탓할 뿐이다. 믿을 건 내 몸뚱어리 하나뿐이다. 그래서 건강이 최고다. 집 한 켠의 선반에 넘쳐나는 건강보조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밥 이외에 먹어야 할 게 너무도 많다.

 

우리는 이렇게 괴로운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왜 삶의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거부하지 못하고, 거기에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것일까. 누구를 위한 '자유'의고,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보다 더 좋은 체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선언이 있은 지 불과 30년만에 우리는 바로 그 체제 내에서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이처럼 현실의 어느 한 체제를 '이상화'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에서 지상의 도성과 하늘의 도성을 구분하여, 그 두 도성이 변증법적으로 공존하는 이 세계에 대하여 말한 것은 굉장한 통찰이다.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신학이 중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죽음 같은 고통을 가져다 주는 현실을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은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학은 모든 것이 블랙홀 같은 시장에 잠식 당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이 현실을 전복시킬 수 있는, 이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실제적인 힘(power)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개인의 발견]

 

서구 사회에서의 '자유의 과잉' 문제로 촉발된 자유주의자들(Liberalism)과 공동체주의자들(Communitarianism)의 논쟁은 '개인이 중요하냐 공동체가 중요하냐, 개인이 먼저냐 공동체가 먼저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행복을 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하면 더 정의롭게 성취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적 인간/사회적 인간'의 명제를 논한 이후 인간은 공동체성을 떠난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연고적 자아(unencumbered self)'가 아니라 공동체와 어떠한 형태로든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연고적 자아(encumbered self)'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어 왔다.

 

하지만 서구사회는 국가와 종교의 권력에 의해 '개인'이 실종된 역사의 경험 속에서 어떻게 하면 개인을 그것들로부터 구원할 것인가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그 시작점을 종교개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서구사회는 데카르트의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로크, 홉스, 그리고 루소를 통해 국가와 종교를 넘어서는 '개인'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계몽주의 이후, 인간의 자율적 이성이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자기(self)'를 구성하는데 최고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고, 서구사회는 '개인의 발견'을 통해 권리와 인권의 개념을 정립해 나간다.

 

모더니티와 포스트 모더니티는 개인의 발견과 그것의 심화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개인의 발견은 개인에게 '자유'를 넘치도록 가져다 주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가 과잉되어서 사회적 문제를 낳기 시작했다. 그 시점을 1980년대로 본다. 바로 그때 등장한 철학이 공동체주의자들의 철학이다. 이들은 자유의 과잉이 생산해내는 사회적 문제를 간과할 수 없었고, 그 과잉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자유주의에 맞서 공동체주의 철학을 전개시킨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의 논쟁에는 종교개혁 이후에 계속하여 발전한 서구의 '합리적 이성', 또는 '자율적 이성'의 사상이 깊이 배어 있다. 자유주의 진영의 수장 격인 존 롤스의 '정의론'도 서구사회의 시민들이 오랜 시간 동안 싸워서 성취한 '합리적 이성, 자율적 이성'의 바탕 위에서 전개된 사상이다. , 개인의 권리와 인권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사회에서의 정의란 어떠한 모습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논의인 것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차별금지법', '낙태법' 등 개인의 권리와 인권에 대한 법 제정에 대하여 서로의 의견을 다르게 하는 진영 간에 갈등과 대립이 극에 달하고 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차별금지법'을 극렬히 반대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한국교회는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극심한 반대를 할까.

 

혹자는 이것을 '신앙의 문제' 또는 '성경 해석의 문제'라고 말할 지 모르나, 그러한 생각은 매우 귀여운 생각이다. 차별금지법 문제를 신앙의 옳고 그름 문제로 풀어가는 사람들은 교권주의자들이거나 공부를 덜 한 사람들이다. 역사적으로 '개인의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권리와 인권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서구사회는 '자유의 과잉'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반해, 한국사회는 '자유의 결핍'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 한국사회는 '개인의 발견'이 아직 충분히 진행되지 않은 사회이다. 그러므로, 자유의 과잉 문제로 촉발된 서구사회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의 논쟁은 한국사회에서는 부적절한 논쟁이라는 지적이 계속되어 왔다. (한국에서 나온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 대한 논문을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한국은 유교문화권에 있기 때문에 생득적으로 '공동체'를 강조하는 측면이 매우 크다. 그러나 한국에서 강조하는 공동체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가 말하는 공동체의 의미와 확연히 다르다. 한국의 공동체는 집합주의(collectivism)의 의미를 띤다. 공동체주의자들이 말하는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합리적 이성과 자율적 이성의 바탕 위에서 전개되는 공동체를 말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의 공동체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충분히 보장된 상태에서의 공동체가 아니다. 개인이 상실된, 공동체 또는 가부장제나 국가주의에 매몰된 공동체를 말할 뿐이다.

 

당분간 한국사회는 자유의 결핍으로 인한 저항과 고통이 지속될 것이다. 그 저항과 고통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분열과 대립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개인의 발견' 즉 개인에게 주어져야만 하는 충분한 자유를 선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개인에게 충분히 주어져야만 하는 자유를 개인에게 주어지지 못하도록 막아설 것인가, 이 둘 중 하나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물론, 현재 한국교회가 보이는 형태는 개인이 가져야 할 충분한 자유를 가로막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자유를 갈망하는 합리적 이성과 자율적 이성을 지닌 개인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차별금지법을 막는 광화문 집회를 통해서 오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을 막아서는 것이 참신앙인이라고 하는 선동을 한다고 한국교회는 부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바로 그러한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한국교회는 망해간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개인의 발견을 가로막는 집단은 사회로부터 외면당했다. 자유의 결핍을 돌보지 않고 자유를 억압한 집단은 몰락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 앞에서 현재의 한국교회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할지는 너무도 자명한데, 그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교회는 마치, 하나님께서 출애굽하여 자유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 그들의 자발적 노예가 되려는, 가데스 바네아의 이스라엘 같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결기는 안 보이고, "나에겐 자유 따위는 필요 없다. 가마솥의 고깃국을 달라."고 외치는 것 같다. 안타깝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1. 23. 17:47

마리아와 마르다 기도

(누가복음 10:38-42)

 

주님,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마리아 신앙이 더 좋은 것인가, 마르다 신앙이 더 좋은 것인가를 논하려 하지만, 그 부질없는 행동을 내려놓고 주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마르다의 섬김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다와 같은 섬김(사역)을 하면서

마르다가 저지르는 실수를 동일하게 저지르며 삽니까.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어 근심과 염려에 쌓이기 일쑤이고,

주님이 우리를 섬기러 오신 것이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까먹고

엉뚱한 믿음에 싸여 불평과 걱정 속에 삽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섬겨주시니 우리에게 무슨 걱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믿음 안에 머물게 하옵소서. 이 좋은 것을 날마다 선택하게 하옵소서.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신실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세워 나가게 하시며,

사역을 하느라, 사느라, 너무 힘주어 살지 말게 하시며,

오직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섬겨주셔서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생명 다해 우리를 섬겨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23. 17:44

마리아마르다?

(누가복음 10:38-42)


현대 개신교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하지 않으면 두 가지의 오류에 빠진다(물로 이것은 개신교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근대 사상(modernity)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들에게서 모두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하나는 이원론적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복음서 중 유일하게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위에서 말한 두 가지의 오류를 가지고 읽는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둘 중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개혁자(특히 루터)의 신학/신앙에 의존해서 읽는 것인데, 우리는 마리아를 마르다보다 바람직한 신앙의 모범으로 삼는다. 그 이유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진술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 신학적 명제에 집착하다 보니,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행위에 집착한 마르다보다 훌륭한 신앙인으로 추앙을 받는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는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고, 성경주석의 학문이 종교개혁 당시보다 훨씬 발달한 지금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말로, 왜 누가는 이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지, 그 의도와 의미를 잘 추적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는 워낙 흥미로운 이야기다 보니 기독교 역사에서 이름 꽤나 있는 신학자들은 대부분 이 본문을 해석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초대교부 중 한 명인 오리게네스이다. 오리게네스는 성서주석에 아주 큰 기여를 한 교부인데, 그는 이 본문을 관상(contemplation)과 행위(action)의 용어로 해석한다. 그런데 오리게네스는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았고, 헬라철학을 바탕으로 신학을 전개하고 성경을 해석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교부였기 때문에, 마리아의 관상을 마르다의 행위보다 높은 신앙의 경지로 해석한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영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였고, 마르다는 육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마르다처럼 육적인 방법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지 않을 수 없으나, 우리의 신앙의 지향점은 육적인 방법을 넘어 영적인 방법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리게네스의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다.

 

(당연히)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도 이 이야기를 해석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리게네스처럼 어떤 신앙이 더 좋은 신앙인지 차등을 두어 해석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 안에 두 가지의 삶(죄를 넘어선 삶이다)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하나는 현재 시대(이 땅)에서 살아가는 교회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오는 시대(종말/창조의 완성)에 살아가는 천상의 삶이다. 마르다의 신앙은 현재 이 땅에서 살아가는 교회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고, 마리아는 오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해석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르다의 행위를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취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신앙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도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서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는 해석되는데,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14세기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의 해석이다. 엑카르트는 마르다를 마리아보다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긴다. 엑카르트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가장 사랑 받는 마리아(the Beloved Mary, 가장 사랑 받는 마르다(the Beloved Martha)’라고 불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가르침만 받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께 가르침과 더불어 섬김을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엑카르트에게 가르침을 받고 섬김을 수행한 마르다는 가르침만 받고 아직 섬김의 수행에 이르지 못한 마리아보다 더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였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대한 해석들을 논하면서 내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을 읽을 때 너무 이원론적으로 보거나 너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만 머물러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특별히 종교개혁신학/신앙의 전통 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때로는 거기에만 너무 머물러 있으려다 성경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시(말씀)를 협소하게 왜곡한다. 이것은 전혀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다. 우리 인간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우리 인간이 거해야 한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두어 둘 수 없다.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몇 가지 당황스러운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왜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을까? 왜 예수님은 불평을 늘어놓는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으로 족하다고 말씀하셨을까? 그리고 왜 마리아는 침묵하고 있을까? 아주 짧은 이야기이지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많고, 쉽게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다 보니, 많은 신학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분명한 것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르다이지 마리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다에게서 보이는 문제가 누가복음 공동체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듯하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월등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이 많은 복음서이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이 많이 소개되어 있으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때도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 다음에 어김없이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또한 예수님은 모든 사역에 앞서 기도를 하신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그 어느 복음서보다도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마르다의 불평은 우리가 교회의 일 또는 사역을 하다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갈등이다. 또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다보면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마르다의 현재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는 근심/염려/worry’이다. 근심(염려)이 사람을 압도하면, 사람은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무기력해지거나, 지나친 활동을 한다. 이는 현대인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반응이다. 요즘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살거나, 지나친 활동을 하면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르다는 지나친 활동으로 자신의 염려를 이겨보려고 했다.

 

그러면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무엇이 마르다는 이렇게 염려 속으로 몰아넣었을까이다. 마르다는 염려 속에서 분주하게 활동하면서 동생 마리아가 자신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 상황을 예수님에게 말한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 하시나이까”(40). 마르다는 갑자가 자신이 혼자 내버려 진것처럼 느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매우 위험한 요소이다. 인간은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 매우 공포스러워 할 뿐 아니라, 걱정과 근심과 염려에 쌓이게 되고,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지나친 활동을 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가 정말로 위기인 것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밖에 없어 자기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는 자기계발서가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고, 가장 많이 팔리는 물건이 자기를 지키는(gun)’이고, 자기를 살게 해주는 것은 이라는 생각에 돈을 벌기 위해 영혼을 파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유명한 명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The war of all against all”의 상황이 충만하게 연출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너무도 자명하다. 누구도 염려에 놓이게 하지 않는 신실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 마르다처럼 왜 나를 혼자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에게서 근심과 염려를 찾아볼 수 없듯이, 따뜻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은 근심과 염려(worry)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 먼 듯하여 안타깝다. (에휴, 하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르다야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2).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만, 또는 혹 한 가지만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마리아의 신앙(예수님 발치에서 말씀 듣는 신앙/믿음신앙)이 마르다의 신앙(행위의 신앙)보다 더 좋은 것이라는 오해를 낳는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택하였으니(choose)’라는 말이다.

 

선택의 신학은 구약성경에 면면히 흐르는 신학이다. 신명기 30장이 대표적이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30:15). 모세는 생명과 복의 삶과 사망과 화의 삶을 열거한 뒤에, 이 두 삶 중에 어떠한 삶을 택할 것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묻고 있다.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서 이러한 결단이 또 요구되고 있는데, 마리아는 좋은 것(good)’을 택했다. 이것은 믿음과 행위 둘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마리아가 택한 것은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 주님의 말씀 듣는 것, 그 좋은 것을 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떠한 믿음인가? 우리는 분주하게 일을 하고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마르다처럼 아주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 마르다는 섬기는 일로 바빴다. 섬기는 일로 바쁜 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섬기는 일로 좀 바쁜 그리스도인, 교회 공동체가 되면 좋겠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섬기기 전, 우리는 먼저 주님(그리스도)에 의해 섬김을 받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의 섬김을 알기전에, 신적 섬김(디아코니아)을 하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마르다에게서 보는 것처럼 근심/염려에 노출되기 쉽다. 자신의 섬김이 세상을 바꾸는 줄, 전능감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교회 일을 하면서, 세상에 나가 사역을 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착각이다. 믿음이 없는 생각이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러 왔지, 우리에게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마르다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너무 많은 일을 하다보니, 자신이 주님의 섬김을 받았다는 것을 까먹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헤세드) 안에 먼저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이 우리를 섬겨 주신 것이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이 역설적인 신앙에 머무는 것을 택하는 것이 좋은 것을 택하는 것이다.

 

마리아? 마르다? 우리는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며, 마리아의 신앙에 머물 것인가, 마르다의 신앙에 머물 것인가를 고민하면 안된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묻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공동체를 세우고 있으며, ‘좋은 것을 택하고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라도 염려/근심에 사로잡히게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 공동체를 점점 파괴하여 사람들을 염려/근심속으로 몰아넣는 세상에 맞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고 힘을 내야 한다.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여사역을 하면서, 자신이 먼저 주님의 섬김을 받았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주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여 불평을 쏟아 놓고 염려와 근심을 더하는 부족한 믿음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나를 먼저 섬겨주셨고, 주님께서는 나를 섬기러 오신 분이지 나의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는 믿음’, ‘이 좋은 것을 항상 선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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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급진적 정통주의 (Radical Orthodoxy)

 

현재 서구 신학은 '급진적 정통주의'가 이끌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새로운 신학운동은 영미신학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신학운동을 이끈 세 명의 신학자는 다음과 같다. 존 밀뱅크(John Milbank), 그레이엄 워드(Graham Ward), 그리고 캐서린 픽스톡(Catherine Pickstock)이다. 이들의 신학적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신학이 아닌 것이 없다.

2.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조명(divine illumination)이다.

3.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것이며, 은총의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모두 신학이다.

4.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 사고를 넘어, 초이성적이고 계시적이며 신비적인 은총의 신학을 말한다.

 

이들의 신학은 보수신학이 아니라 정통신학이다. 이들은 보수신학이 행하는 것처럼 근본주의적 문자주의나 세대주의를 따르지 않는다. 이들은 성서의 정경성과 계시성을 인정하면서, 성서에 입각해서 세상을 본다. 그리고 이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그들 사상에 깔린 '세속주의'를 넘어 고전적 신학을 포스트모던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독교의 유산은 교부들의 신학 전통과 중세의 아퀴나스 신학 전통, 그리고 현대 신학자들 중 헨리 데 루박과 한스 폰 발타자르의 신학유산이다. 또한 바르트, 비트겐슈타인, 들뢰즈, 데리다, 리요타르, 푸코 등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신학적 작업을 한다.

 

특별히 이들이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어거스틴의 신학이다. 모든 지식을 하나님의 조명(divine illumination)으로 바라본 어거스틴의 시각이 맞다고 동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사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 대하여 어거스틴의 명제를 바탕으로 해석과 비판을 시도한다. 이들이 어거스틴의 명제를 받아들여 신학작업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반자율성(anti-autonomous) 사상 때문이다. 모더니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간에게 자율적 이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급진적 정통주의자들은 그러한 모더니티의 자율성을 거부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독립된 자율성을 갖지 않으며,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존재론적으로 창조자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 아래 가장 광범위하게 신학적 작업을 진행한 존 밀뱅크의 <Theology and social Theory(신학과 사회이론)>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조명으로 된 것이며, 신학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보여주는 저서이다.

 

데카르트의 합리적 이성주의 이래 세속주의에 밀려 주변으로 밀려난 신학과 교회, 또는 기독교 신앙을 인간세계(창조세계)의 중심부로 다시 돌려놓으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신학과 신앙이 보수화되는 것도 사실 그러한 시도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신학과 신앙이 보수화될수록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의미에서 '급진적 정통주의'가 시도하고 있는 신학, 신앙, 교회 운동은 굉장히 주목할 만하다. 단순히 기독교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시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 없이 생존해 보려는' 세속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학을 하는 이유,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이유,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남들보다 우위에 올라선 지위'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의 신학, 신앙,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 놓여 있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곳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끝에는 죽음과 허무 밖에 없겠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생명과 기쁨이 넘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성'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요즘 시대에 '은총'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돕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사역이고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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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1. 17. 05:18

브니엘의 경험을 간구하는 기도

(창세기 32:1-32)

 

주여,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여, 우리는 무엇을 바꾸기 원하며 삽니까?

주여, 우리의 그 수많은 기도는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온 우주에 편만하신 주님,

우리에게도 브니엘의 경험을 주옵소서.

브니엘에서 주님을 만나 그 존재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뀐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만나 존재가 바뀌게 하옵소서.

브니엘의 경험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으로 인해 움직이지 않을 것이요,

세상을 바꾸기 위해 허탄한 것들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기도 가운데 세상을 바꾸기 위한 지혜를 달라고 간구합니까?

그보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게 하셔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게 하시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이 험한 세상을 이기게 하시며

주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이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을 전파하며 사는

영화로운 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위에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17. 05:16

브니엘

(창세기 32:1-32)

 

모든 감정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감정 에너지는 힘(power)으로 전환되어 그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을 실제적으로 움직인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이 있듯이,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하여움직인이유는 장자권에 대한 질투의 감정 때문이다. 질투의 힘이 실제로 야곱에게 장자권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장자권을 손에 얻고 난 야곱은 이제 다른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데, 그것은두려움이었다. 야곱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을 떠나서 먼 땅, 밧단 아람(하란 땅)으로 도망치게 한 이유는 두려움이라는 감정 때문이었다.

 

외삼촌의 집에서 야곱을 움직인 감정 에너지는 무엇일까? 두 가지였다. 외로움과 사랑. 외로움도 에너지다. 외로움도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사람은 외로울 때 더 활동적이고 창조적이게 된다(물론 반대의 사람도 있지만). 외로움도 사람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데, 사랑은 말할 것도 없다. 외로움과 사랑의 힘은 야곱을 20년을 하루같이 보내게 했다. 이처럼 우리는 내 안에서 매일같이 창조되고 있는 감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엄청난 에너지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에너지를 통해 죽음()이 아니라 생명(/righteousness)이 창조되도록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과 미스바에서 언약을 맺은 야곱 일행은 이제 고향인 가나안 땅 입성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얍복강(요단강 지류)을 건너기만 하면 이제 고향 땅을 밟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에게 얍복강을 건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어려웠다.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두려움이었다. 얍복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에서라는 두려움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일이었다.

 

야곱은 먼저 종을 보내어 형 에서의 형편을 살핀다.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자신이 고향으로 되돌아왔으며, 혼자 온 것이 아니라 가족을 대동하고 왔고, 자신에게 많은 소유도 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야곱은 형 에서에게 화친을 청한다.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5). 20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이제 자신에 대한 노여움을 풀고 자신의 고향 입성을 환영해 달라는 간청이다. 종을 보낸 후 가슴 졸이며 형 에서의 답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 종이 돌아와 전한 소식은 이렇다.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6). 이렇다 저렇다 답신도 없이, 형 에서가 군대 4백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은 야곱을 극심한 두려움에 몰아넣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7).

 

야곱은 극심한 두려움에 싸여 두 가지의 행동을 한다. 하나는 형 에서의 공격에 대비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가족들과 재산이 형 에서가 거느리고 오는 군대에 의하여 손실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그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두 떼로 나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다가서는 수단이다. 그리고 기도는 깜깜한 동굴을 통과하게 해주는 빛과 같은 것이다. 야곱의 기도는 기도의 정석을 보여주는데, 기도는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수단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수단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실재화(realization)되게 끔 하는 수단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좋은 기도는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또는 녹여서)해서 드리는 기도다.

 

야곱은 자신의 소망을 먼저 아뢰지 않는다. 야곱은 기도하면서 다짜고짜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야곱은 자신이 고향을 떠나 하란 땅으로 가던 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뵙고 그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한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10). 야곱은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주신 약속을 기억했고, 그 약속 때문에 지팡이 하나밖에 없던 자신이 이렇게 큰 무리를 이루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약속에 기대어 기도를 했고, 기도를 마친 야곱은 형 에서를 위하여 자신의 소유 중에서 예물을 마련한다. ‘예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민하는 레위기에 자주 등장하는 희생제물’, ‘소제의 의미를 지닌 말이지만, 여기서는 선물’, 또는 조공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야곱은 선물을 통해서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던 것이다.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민하)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20).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자신이 형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민하)’이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믿은 듯하다. 사실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였다. 우리가 알다시피, 잠언을 보면 선물의 효력에 대한 말씀이 몇 군데 나와 있다. “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잠언 18:16).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잠언 19:6).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언 21:14). 야곱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해결해 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는 야곱의 기도가 야곱을 데리고 가고 있는 지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야곱이 기도하고 난 후, 이처럼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야곱의 지혜가 발휘되는 상황(선물준비)이지만, 기도는 야곱을 더 이끌고 나간다. 야곱은 예물을 앞서 보내고, 식구들을 강 건너 먼저 보낸다. 그런 후에 발생하는 사건이 중요하다. 24절은 이렇게 그 상황을 묘사한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24). 여기서 쓰이고 있는 문법은 수동 재귀형 동사이다. 풀어서 쓰면 이런 뜻이다. “야곱이 스스로 홀로 남겨지게 했다.” 야곱은 자신의 소유와 가족들을 모두 먼저 강 건너로 보내고, 의도적으로, 자신이 이 강을 건너기 20년 전과 같이 지팡이만 가지고 홀로 남겨지도록 했다.

 

기도가 우리를 마지막으로 데리고 가는 지점은 하나님 앞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지혜를 얻으면 만족하지만, 그것은 기도를 통해 가야할 끝을 가지 못하고 도중에 멈추는 것에 불과하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려서 다시 표현해 보자면,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홀로 남은 사람)”로 만든다. 야곱은 홀로 남았다. 야곱의 손에 있는 것은 지팡이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두려움보다 이제 외로움의 감정이 그를 더 짓눌렀다. 그때 야곱이 대면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스스로를 홀로 남겨지게 한 뒤 발생한 일은 신비 그 자체이다.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사람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자신을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야.” 언뜻 듣기에 이 진술은 신앙을 매우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신앙은 절대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그럴 수 없다. 신앙은 공동체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도 사회적이지 개인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하나님 앞에 실존적 개인(단독자)’으로 서야 하는가?

 

기도가 우리를 데려가는 종착점은 하나님 앞이다. 그곳에는 누구와 함께 갈 수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은 공동체적인 문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홀로 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서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가감없이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는다는 뜻이다. 창세기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되어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자신을 보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리개(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로 자신을 가리면서 사는가? 그 가리개 뒤에 꽁꽁 숨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뀌기 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가? 야곱이 기도하면서 소망했던 것도 이런 것이었다. 그는 선물을 형 에서에게 보내며 형 에서의 마음이 바뀌길원했다. 그러면서 야곱은 여전히 두려움이라는 가리개로 자신을 두르고 있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한다. 우리는 기도를 지혜를 얻는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만다. 그리고 기도해서 얻은 지혜로 얼마나 부단히 자신을 둘러싼 환경/조건을 바꾸려 하는가.

 

야곱의 기도는 야곱을 거기에만 머무르게 놓아두지 않고, 더 밀고 나가, 결국 하나님과 대면하게 만든다. 야곱이 홀로 남았을 때,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한다. 그 씨름으로 인하여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상하여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야곱이 씨름한 그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천사 또는 하나님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신비에 싸여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현현을 어렴풋이 경험할 뿐이다.

 

야곱은 그 사람과의 씨름에서 겨루어 이겨 축복을 받게 되는데,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는 축복을 받게 된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지만, 이스라엘은 문자적으로 그가 하나님으로서 다스리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권력을 가지다’, ‘우세하다’, ‘싸우다라는 뜻을 지닌 사라라는 동사와 하나님을 의미하는 이 결합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뜻은 야곱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왕이신 하나님의 권력을 가지고 다스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대면한 후,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바뀐 것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가리개를 쓰고 그 뒤에 숨어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에서 자기 자신을 바꾸어 더 이상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 사람으로 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대면하기까지 우리에게는 쉼이 없다. 주변, 환경, 여건에 영향을 받아 그 현재적 상황들이 자신을 통치하도록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 지혜를 간구하여 그러한 현재적 상황들을 통제하기 바쁘다. 그러니 우리 안에 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비로소 대면한 사람은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은 존재가 바뀌고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기에 더 이상 자기 존재의 바깥에서 오는 어떠한 위협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그 자리를 브니엘이라 이름을 짓는다. 브니엘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대면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영화(glorification/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입는 것)’한 야곱은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자신의 바깥에 있는 형 에서의 위협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본문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존재)이 바뀌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입게 된 상황(영화)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31).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더 이상 예전의 야곱이 아니었다. 밤새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하였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존재가 바뀐 야곱 앞에 뜬 해는 그에게 새롭게 펼쳐진 세상을 가져다 주었다. 이 얼마나 장엄한 신적 드라마(theo-drama)인가.

 

우리는 무엇이든지 나의 실존에 다가오지 않으면, 매우 무감각하게 산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어도 그것에 우리가 무감각한 이유는 그 고통이 나의 실존에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이라는 것이 실재하지만 그 암이 나의 몸을 파고들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 암이 실재하는 것을 안다. 그 전까지 아무리 암이 세상에 편만해도 암은 실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실재하지만, 그 죽음이 나에게 실제적으로 다가오기 전까지 우리에게 죽음은 실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편만하시지만, 그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가 되어야 한다.

 

야곱의 브니엘 사건에서 보듯이,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건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에는 마디가 있기 마련이다. 그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고 삶의 마디를 건너려는 시도는 (물리적이든 영적이든) 실패를 불러온다. 그리고 삶의 마디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기도하더라도, 기도를 통하여 지혜를 얻어 세상을 변화시켜보려는 데만 그치면 안 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그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리로 이끌어줄 것을 간구해야 한다. 그렇게 나의 실존에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으면, 우리가 이루는 성취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 겨루어 이겨낸 성취가 아니라면, 그 성취는 나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어느 순간 오히려 나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성취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브니엘.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브니엘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 또는 공간이 있는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실제적 에너지는 무엇인가. 두려움인가? 외로움인가? 대개 사람들은 두려움이라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움직인다. 그러나, 인생에 브니엘을 가진 사람은 결코 두려움이라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브니엘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인생 앞에 놓여 있는 어려움을 이겨낸다(겨루어 이긴다).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겨낸다. 우리는 이제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형 에서를 대면하게 되는 이스라엘인 야곱을 보게 된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이다. 우리는 무엇을 전파하는 사람인가. 두려움인가, 믿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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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1. 10. 06:40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돌보심으로의 귀향을 간구하는 기도

(창세기 31:1-55)

 

주여, 이민자였던 야곱은 귀향을 꿈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식솔들을 거느리고 귀향을 감행했지만,

중간에 장인 라반과의 갈등을 통해

그가 진정으로 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꿈꾸는 귀향은 어떤 귀향입니까?

물리적 귀향을 꿈꿀 것이 아니라,

우리도 야곱처럼 영적인 귀향을 꿈꾸게 하옵소서.

먹고 사느라 힘들고 지쳐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하나님의 돌보심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어린 시절의 추억보다 더 원초적인 기억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돌보심인 것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무엇을 할지, 어디를 갈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지,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는지가

훨씬 더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

미스바에서 일어났던 라반과 야곱의 언약,

그리고 미스바에서 일어났던 사무엘과 이스라엘의 회개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셔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미스바에서의 언약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하나님,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과 돌봄 안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여서 모든 인류와 피조물의 소망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10. 06:38

야곱의 귀향

(창세기 31:1-55)

 

타향살이가 힘든 이유는 타향에는 원초적 기억이 공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초적 기억은 어렸을 때 생성된다. 원초적 기억이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어, 그 이후의 경험은 모두 상대화 된다. 캘리포니아의 타호(Tahoe)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어렸을 때 동네에서 처음 경험한 우물이나 저수지만 못하다. 우리는 어렸을 때 그 우물, 또는 저수지를 통해서 그것에 비친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얼굴을 아름다움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의 타호에 비친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얼굴은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원초적 기억을 불러올 뿐이다.

 

야곱에게도 이러한 원초적 기억이 있다. 그래서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귀향을 꿈꾼다. 다만, 원초적 기억에만 이끌려 귀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기억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기억에만 이끌려 귀향을 결심하면 현실 속에서 고통 당하기 십상이다. 원초적 기억의 자리로의 복귀(귀향)는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고 은총이 필요한 일이다.

 

야곱은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 밧단 아람(하란) 땅으로 와서 20년을 살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그는 외삼촌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매우 고단한 인생을 살았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40). 20년 동안 죽도록 고생한 야곱에게 중간중간에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섣불리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성실하게 자신의 삶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 야곱은 귀향을 결심한다.

 

우리는 야곱이 귀향을 결심하게 된 두 가지의 이유를 본다. 첫째는 야곱에 대한 라반과 그 아들들의 시기이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1) 야곱이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야곱의 삶의 자리에 어느 순간 시기와 질투가 넘쳐들었다. 야곱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정당하지 못하다. 오해다. 야곱은 라반의 소유를 빼앗은 적이 없다. 오히려 라반이 야곱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바라보는 라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2)

 

자신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삶의 자리가 불편해졌다고 야곱이 섣부르게 귀향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을 접한다.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3) 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되었음을 알려 주는 말이다. 삼촌과 사촌 형제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마음 불편한데, 하나님께서 야곱을 돌아보신다. 귀향을 결심한 야곱은 두 아내, 라헬과 레아를 불러 자신의 귀향 계획을 전한다. 그러면서, 장인 어른의 안색이 변한 것에 대하여, 이곳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열심이 일했음에도 자신이 당한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하소연한다. 남편의 귀향 결심과 이유를 들은 두 아내는 남편의 결정을 따르기로 한다.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16).

 

귀향을 결심한 야곱은 신속하게 행동하지만, 그 결심을 장인이자 삼촌인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시행하는 것은 참 의외이다. 그 의외의 행동이 또다른 긴장을 만들어낸다. 야곱은 아내들과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이끌고 고향인 가나안 땅으로 출발한다. 라반은 양털을 깎으러 멀리 떠나 있는 상태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야곱 일행이 떠난 지, 삼 일 후에나 이 소식을 듣는다. 야곱 일행이 기별도 없이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라반은 야곱 일행을 추격한다.

 

복잡한 심경을 마음에 품고 7일간 추격하여 야곱 일행을 따라잡은 라반은 야곱에게 따져 묻는다. 장인과 사위 사이의 갈등이 폭발을 한다. 라반은 야곱을 향하여 분노와 서운함을 쏟아낸다. 이에 맞서 야곱은 라반을 향하여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불평을 쏟아 놓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쏟아내는 분노와 불평만 보면 당장이라도 서로가 전쟁을 벌일 태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을 넘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온갖 분노와 불평을 쏟아내며 서로를 비난하면서도 이성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다.


야곱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떳떳하지 못할 게 없다. 야곱이 라반에게 늘어놓은 불평은 라반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에 대한 저항이지, 신세한탄이거나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전혀 아니다. 또한 라반은 괴씸한 마음을 가지고 야곱을 해하려고 야곱 일행을 추격했지만, 추격 도중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29).

 

우리는 살면서 때로 갈등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야곱이 자신이 한 행동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면, 그리고 라반이 꿈 속에서 야곱을 해하지 말라는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이 둘 사이에 얼마나 끔찍한 일이 발생했겠는가. 그것도 장인과 사위 사이에. 한 집안의 몰락과 더불어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통해 펼치시려던 하나님의 꿈이 산산이 부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등이 발생했을 때, 그 갈등 자체에 압도당하여 인생을 그르칠 것이 아니라, 그 갈등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라반과 야곱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라반과 야곱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택하고, 다툼이 아니라 조약을 맺는다.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43). 이들은 언약을 맺기 위하여 돌무더기를 쌓는다. 그리고 라반은 그 돌무더기를 여갈사하두다’(아람어 방언)이라 부르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Galeed)’(히브리어 방언)라고 부른다. 그 뜻은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이다.

 

증거의 무더기를 앞에 놓아두고 라반과 야곱은 언약을 맺는다. 그 언약의 내용은 이것이다.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49). 여기서 살핀다돌본다는 뜻이 아니다. 영어로 ‘watch’이다. , 너와 나 사이를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 뜻이다. 좀 더 공격적인 뜻으로 말하자면, 너와 나 사이를 감시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라반과 야곱 사이의 무엇을 지켜보신다/감시하신다는 것인가?

 

라반은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야곱이 자신의 딸들을 학대하지 않고 잘 돌보는지 하나님께서 지켜보실 것이라 말한다. “만인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50). 둘째는 야곱과 자신 사이에 맺은 평화협정이 잘 지켜지는지, 하나님께서 지켜보실 것이라 말한다.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52).

 

여기서 재밌는 것은 라반이 야곱과 언약을 맺으면서 한 말들은 하나님을 이용한 협박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내 딸들 박대하지 말고 잘 돌보며 살아라, 그러는지 안 그러는지 하나님이 지켜보시니까 잘 해라는 뜻이고, 우리가 맺은 평화협정이 잘 지켜지는지 아닌지 하나님이 지켜보시니까 평화를 잘 지키자는 협박 아닌 협박인 것이다. 아주 앙증맞은 협박이다. 지금 라반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 야곱이 내 딸들 박대하는지 아니면 잘 돌보는지, 감시해 주세요!” 그리고 주님, 우리가 맺은 불가침조약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해 주세요!”

 

야곱은 이 언약을 미스바라고 칭한다. ‘미스바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라는 뜻이다. 미스바라는 명칭이 유명해진 것은 사무엘 때문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이자 사사가 된 뒤, 블레셋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삼상 7:5). 우리는 흔히 이것을 미스바 기도회라고 부른다. 그 미스바 기도회에서 사무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 것은 회개였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삼상 7:6).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장소가 아닌 미스바로 모이게 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사무엘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보시니(watch)’, 그들이 블레셋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지켜보고(watch)’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스바에 모여 이스라엘이 한 일은 하나님의 시선을 다시 감지하고, 그동안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섬겼던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야곱의 귀향은 고향인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물리적 귀향이기도 하지만, 야곱의 귀향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시선(watch)’으로 돌아가는 영적인 귀향이기도 하다. 우리는 쉽게 물리적 귀향을 꿈꾸고, 그것을 그리워 하지만, 그러한 귀향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야곱에게 귀향이 복된 이유는 나의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다. 야곱에게 귀향이 복된 이유는 그의 귀향은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시선안에 있는, 그리고 그것이 회복된 귀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귀향을 꿈꾸면서, 물리적인 것만 생각할 뿐, 우리가 잊고 사는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시선으로의 귀향을 꿈꾸지 않는다. 삶이 어렵고 힘들고 지치거든, 단순히 물리적 귀향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은 언제나 사는 데 지쳐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돌보심으로의 귀향을 꿈꿔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다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어떤 귀향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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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한국 기독교의 과제]

ㅡ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기독교에서 삼위일체 신학에 기반을 둔 기독교로 거듭나기

 

기독교는 예수라는 사건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그 예수가 누구인지를 묻는 신학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했다. 기독교의 토대는 신학이다. 특별히, 기독교는 삼위일체라고 하는 매우 독특한 하나님 이해에 기반을 둔 종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세워져야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울고 웃고 행동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나는 이 문제를 놓아두고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여러 현상적인 문제점이 아니라, 현재 경험하고 있는 불편한 현상들(보수화, 세습, 차별금지법반대, 반동성애, 성시화운동 등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여러 현상들)을 일으킨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이 많았다.

 

나는 삼대째 목회자로서 기독교에 매우 좋은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이유가 있지만, 기독교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가지게 된 사건은 '세월호 사건'이었다. 그당시 나는 미국 조지아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304명의 무고한 아이들이 물속 생매장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인 국가와 교회의 태도를 보면서, 국가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었고, 교회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전혀 위로와 안식을 전달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사지로 내몰고 핍박하는 국가의 모습, 특별히 교회의 행태를 보면서 아주 깊은 절망을 느꼈다.

 

나는 그때부터 정치신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관심,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등 교회가 이 절망적인 사회/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를 분열시키고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면 교회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가에 대한, 교회의 존재론적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정치신학에 대한 관심은 이제 어렴풋이 '왜 한국교회가 이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한 그 근본적인 이유를 조금은 안 것 같다.

 

위에서 말했듯이,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학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래야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비 안에서 이 세상에 있으면서 이 세상에 머물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공동체로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의한 일들, 그리고 우상에 대하여 저항하며 새로운 희망의 공간 열어주는 공공성을 담지한 교회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신학 위에 세워지지 못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진 시기는 구한말 극도의 정치적/사회적 혼란기였으며, 그 중에서 특별히 '민족주의'의 이념 아래 민족-국가(nation-state) 운동이 한국 사회를 뒤덮을 시기였다. 그렇다보니, 한국의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게 되었다.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한국 기독교는 그당시 한국 사회의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민족국가로서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그 이후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한국교회는 오히려 한국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기독교는 보수적인 색체를 띨 수밖에 없다. 국가와 신앙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설정하는 데 익숙해지고, 그렇다보니 국가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기보다는 협력하는 '밀월관계'로 들어서기 쉽다. 이승만 정권 이후 한국 기독교는 계속하여 집권세력에 협조하는 보수적 색채를 띤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기독교는 교회의 구조와 생태 자체도 민족적인 색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교회가 하나의 '민족국가, 또는 민족집단'이 되다보니, 배타성을 짙을 수밖에 없고, 차별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자신과 다른 '타자'는 모두 배제하는 논리가 들어설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 아래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국민들이 식민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를 통해서 식민지배 시대에 알게 모르게 몸에 밴 식민성을 의식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을 하여 '노예근성'을 버려야만 하듯이,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발전한 한국 기독교는 자기 자신이 현재 어떠한 상태인지를 거리두기를 통해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기독교에서 벗어나 '신학'에 기반을 둔 기독교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 주어진 이 시대의 사명이다. '회개'의 작업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한국 기독교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 사이에 암암리에 퍼져 있는 '신학 무용론'은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하는 허탄한 신화이다. 기독교가 신학이 아닌 다른 것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기독교는 그 사회에서 공공성을 담지하지 못한다. 공공성을 잃은 집단은, 그것도 그것이 교회라면, 한 사회에서 어느 순간 불필요한 존재로서 외면당하고 퇴출당할 것이다.

 

특별히,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의 독특한 하나님 경험인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위에 교회를 다시 세우는 작업을 반드시 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교회가 이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환기시켜 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사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시민'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하여, 불의한 이들로 인하여 고통 속에서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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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예술작품 같은 설교]

 

나는 언제나 나의 설교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고, 생각 안 하던 사람이 생각하게 되고, 질문이 없던 사람이 질문을 가지게 되는, 아름다운 한 편의 예술작품 같기를 소망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나의 설교가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리고,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설교가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보이고, 조각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설교가 아름다운 조각품처럼 느껴지길 원한다.

 

그러나 많은 순간 그 소망은 성취되지 않는다. 때로는 나의 부족함 때문이기도, 때로는 청중의 부족함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실패는 몇 가지에서 오는데, 한 가지는 내가 일주일동안 충분한 영성생활을 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어떤 '바쁜 일' 때문에 정해놓은 일상이 흐트러질 때, 나는 실패를 경험한다. 다른 한 가지는 나에게 맡겨주신 '양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돌보지 못했을 때 발행한다. 그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을 때 나는 실패를 경험한다. 그리고 또한, 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관리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운동을 못해서 몸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음식을 조심해서 먹지 못했다거나, 괜한 일에 분노를 표출해서 마음을 흐트러뜨려 놓았거나 했을 때 나는 실패를 경험한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경험하는 실패는 대개 내가 통제 가능한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나의 쪽에서 오는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 노력한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 노력하고, 기도하며 충분히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몸 컨디션을 언제나 최상으로 유지하려고 조심한다.

 

청중 쪽에서 오는 실패는 사실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려 있는 일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다만 두 가지를 말하고 싶은데, 하나는 청중이 설교자를 사랑하지 않을 때 실패를 경험한다. 사랑 안에서 교통하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돌처럼 여겨질 것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돌을 주어도 그것이 보석처럼 여겨질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조악한 작품도 귀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청중이 설교자를 향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일단 50퍼센트는 성공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청중의 설교를 듣는 능력이 부족할 때 실패를 경험한다. 대개 음악도 미술도 감상하는 이들의 소양에 따라 그 음악작품과 미술작품에서 느끼는 감동의 정도가 다르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아무말이나 지껄이는 개차반 설교자가 아니라, 교양있고 소양있는 설교자라면 그 설교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논증의 틀이 있게 마련이다. 청중이 설교자의 논증과 그 논증에 담긴 메시지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쫒아오지 못하면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설교는 하나의 예술작품이어야 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도록,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세상에 내어놓은 예술작품 같은 설교는 이제 청중의 입장에서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청중이 그 예술작품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 작품의 가치는 달라질 것이다. 물론 그 자체로 매우 가치 있는 예술작품이 있다. 그러나 그 가치는 청중이 정할 것이다.

 

작품은 기교만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작품에는 그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이 담기기 마련이다. 혼이 담긴 작품은 청중이 알아볼 것이고, 혼이 담기지 않은 작품은 청중에게 외면당할 것이다. 물론, 기교만을 중요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혼을 담은 작품을 알아보는 청중이 드물지만, 그렇다고, 작품활동하는 사람이 기교만 부려 청중을 홀리는 것은 직무유기일 뿐더러 사기행각이다.

 

한 편의 설교에서 '은혜'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정말 여러가지 행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야 한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설교자는 설교자의 자리에서, 청중은 청중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잘 수행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신비가 그 안에서 역사하기를 바라는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질 때, 예술작품 같은 설교는 그 작품을 내놓은 설교자나, 그 작품을 눈과 귀로 경험하는 청중이나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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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1. 5. 04:29

보배를 품은 질그릇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후 4:6-12)

 

만성절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기 원하시는 주님,

질그릇 같은 그들이었지만, 그들이 성인으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 질그릇 안에 보배를 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질그릇 같은 몸에 그 보배를 품으면 성인의 반열에 올라

칭송 받을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칭송 받는 삶이 되기 위하여 보배를 품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질그릇 같은 우리의 몸에 담겨 있기 때문에 칭송 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만성절을 자신의 기쁨과 복락을 위해 소비만 하는 세상 사람들과 우리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유를 알게 하옵소서.

우리의 질그릇 같은 몸에는 빛이 있고, 그 빛을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집니다.

이것은 고난과 고통이 아니라, 참 기쁨과 생명입니다.

이 삶의 신비를 깨닫게 하여 주셔서,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서

이 세상을 아름답고 의미 있게 살게 하시며

이 세상에서 칭송 받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두려움에 떨게 하여 생명을 축소시키는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빛을 비추는 보배로운 질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몸을 내어주시어

질그릇 같은 우리를 존귀케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5. 04:28

보배를 품은 질그릇

(고후 4:6-12)

 

만성절이다. 기독교의 거의 모든 문화가 자본주의에 잠식당해서 그 의미가 퇴색되어 절기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지만, 그러는 와중에서도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절기가 가진 의미를 마음 깊이 되새기는 일은 중요하다. 만성절은 영어로 All Saints Day라 한다. ‘우리 모두가 성인이다라는 뜻이라기보다, 기독교 역사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들, 성경의 인물이든, 기독교 역사의 인물이든, 그 사람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든, 아니면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 아니든, ‘성인(Saints)’이라고 불릴 만한 기독교 인물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성탄절 전야제가 가장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전야제의 풍습은 모든 절기마다 있다. 부활절에도 전야제가 있다. 그것을 Easter Vigil(이스터 비질)이라 부른다. 다만, 부활절 전에는 일주일 동안 고난주간이라는 것을 지키다 보니, 우리는 상대적으로 부활절 전야제를 소홀히 한다. 대신, 기독교 절기에서 성탄절 전야제 다음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이 만성절 전야제이다. 우리가 잘 아는 할로윈이다. ‘할로윈이라는 말 자체가 만성절 전야제라는 뜻이다. 요즘은 할로윈이 성탄절 전야제만큼이나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아졌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든 이들이 성탄절 전야제를 소비하는 것처럼, 할로윈도 즐겁게 소비한다. 이런 게 바로 문화의 힘이다.

 

만성절이 111일인 이유는 만성절을 제정할 때 근거로 삼은 성경구절이 히브리서 11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히브리서 11장은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 즉 성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이 성인이라 불리는 이유는 히브리서 저자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살았기 때문이다. 1031, 만성절 전야제가 있는 날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인들의 믿음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 당시 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별로 믿음과는 상관없는 신앙행태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성절 (전야제) 문화를 소비하며 웃고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만성절 문화를 소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만성절 전야제를 소비하느라 피곤하여 잠을 자고 있는 시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만성절 예배를 드리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성인들)을 기리며, 믿음을 갖는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보듬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그것을 수행하기에 참 좋은 말씀이다. “어두운데 빛이 비치라”(6). 빛과 어둠의 메타포가 사용되고 있다. 전기의 발명으로 인하여 찬란한 밤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메타포는 아니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명하여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바꾼 사건은 1882년에 발생했다. 그 이후 인류는 어둠을 정복했다. 더 이상 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고, 더 이상 낮에만 일하지 않아도 됐다. 그 이전까지, 인류는 어둠()’이라는 두려움에 짓눌려 살았다.

 

현대인들에게 어둠()은 일종의 낭만으로도 작동하지만, 성경시대의 어둠은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였다.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두운데 빛이 비치라는 말씀이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 쉽게 깨달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한 말씀이다. 빛이 어둠 가운데 들어왔다.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은 그 빛으로 인하여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구원이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바로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의 빛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두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빛이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들어왔다. 빛과 어둠의 메타포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는 복음이다.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를 두려워 떨게 만드는 어둠이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 떨지 않아도 된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아주 멋진 비유를 써서 표현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7). 보배와 질그릇은 어울리는 어휘가 아니지만, 이 둘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다. 보배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그러면, 질그릇은 무엇인가?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이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의 반영이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바로 흙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을 질그릇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빗댐이 아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깨지기 쉽다. 그리고 별로 큰 값어치가 없다. 이것은 바울의 인간이해(인간론/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말할 수 있는데, 바울에 의하면, 인간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주 귀중한 존재이기도 한데, 그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이 있다.

 

바울의 이러한 인간이해는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기도 하고, 겸손하게 만들기도 한다. 위대함과 겸손함,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사는 존재이다. 그러한 인간의 실존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절 후반부). 너무도 멋진 통찰이다. 우리가 어떠한 큰 일을 해냈을 때 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무기력하게 살 필요 없다. 우리는 큰 일을 할 수 있다. 우리 안에는 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바울의 통찰이 바울과 그 일행의 삶 속에 어떻게 작동했는지, 바울은 아주 생생한 언어로 전달하고 있다. 쉽게 깨지는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빛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8-9) 않는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것은 진퇴양난의 상황을 가리킨다. 그러나, 싸이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과 같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영어로 ‘perplexed, but not despairing’이다. ‘perplexed’는 고급 영단어이다. 당황스럽고 난처하고 답답한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상황을 자주 접한다. 그러나 그 몸에 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일들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다.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일찍이 절망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명명했다. 빛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절망에 이르지 않으므로 죽음에 처해지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핍박을 당할 수는 있으나 버림받지 않는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넘어질 수는 있으나, 멸망(destroy)당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언제나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다.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 쉽게 무너지고 절망하고 버림받고 망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고, 다시 우뚝 설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고백을 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10절 전반부). 바울은 자신들이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의 죽음에 사용된 헬라어는 네크로시스이다. 이 낱말이 지닌 뜻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데, ‘네크로시스완전히 죽은 상태를 나타내는 싸나토스라는 말과 달리, ‘죽어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다른 버전으로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졌다는 말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죽어 감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가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 우겨쌈도 당하고 답답한 일도 겪고 박해도 받고 거꾸러뜨림도 당하고 그러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안에 채우는 일이기도 하고, 아직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빛을 전해주면서 당하는 수고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이렇게 증거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얻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바울이 증언하기를, 그들이 그렇게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이유는, 그렇게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 나아감으로써 예수의 생명, 즉 예수의 부활이 그들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신비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보배를 품은 질그릇, 즉 빛을 품은 인간, 빛을 품은 그리스도인이 감히 성인(또는 성도)’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이 고백은 참 마음을 짠하게 하고, 가슴 뛰게 하며,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고백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12). 성인 중의 성인이라 불리는 바울의 사랑의 역사가 담겨 있는 고백이다. 바울은을 전달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살았다. 그가 그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을 전달한 덕분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경험했다.

 

만성절(또는 우리교회로서는 임직식이 있는 날)에 우리는 성도로 불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제자도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생명을 얻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얻는 생명을 이웃들에게 잘 전달해 주고 있는가? 우리가 만약 자신의 복락만을 간구한다면,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는 것을 꺼려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기 꺼려한다면, ‘성도도 아닐 뿐더러,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질그릇이 없다면, 빛이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섬기는 이유(섬김에는 고난이 따른다)는 그들에게 생명을 전달해 주기 위함이다. 생명, 빛을 전달해 주는 것만큼 고귀한 삶이 있을까?


이것은 만성절 전야제(할로윈)을 소비하기만 하며 그 안에서 재미와 복락만 누리기를 원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 안에서 성인들믿음의 선조들을 기리며 이렇게 거룩한 예배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할 믿음의 삶이다어둠 속에서 빛을 경험한 사람은 그 구원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그리고 그 빛을 질그릇 같은 몸에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예수의 죽음을 기꺼이 몸에 짊어진다왜냐하면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이며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기 때문이다이 신비를 깨닫는 자죽어도 살겠고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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