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끊임없는 싸움]

 

체제 안에 들어가면 모두 '보수화'가 된다. 체제에 들어가면 인간은 안 보이고, 체제를 보장해주는 초월적 가치, 자본, 체제자체만을 보게 된다. 인간의 영혼도 몸이라 불리는 체제에 들어가면 보수화가 된다. 그런 현상을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은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라 부르는 것이다. 몸에 갇힌 영혼도 보수화되면 몸을 착취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죄, 자기집중이다.

 

철학과 종교는 이렇게 인간이 보수화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억압하고 소유하고 소비시키는 그 보수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묻는다. , 좋은 철학과 훌륭한 종교는 체제에 가두어진, 또는 체제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인간을 해방시키지만, 나쁜 철학과 형편없는 종교는 인간을 교묘하게 착취하면서 체제를 공고히 한다.

 

키아누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매트릭스>는 그 현상을 아주 잘 보여준다. 매트릭스 체제에 갇힌 인간은 자신들이 실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체제가 조작한 가상현실에 불과하다. 가끔 일어나는 버그 때문에 현실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내 스미스 요원에 의해 그러한 의심은 제거된다.

 

매트릭스에 갇힌 그들의 현실이 조작된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매트릭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철학과 종교의 기능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체제 바깥에서 조작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조작된 현실의 실상을 깨달으면 영화의 니오(Neo)처럼 체제(매트릭스)를 빠져나올 수 있다.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의 순간이다.

 

그리고 구원의 순간을 경험한 이들은 진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자신처럼 매트릭스에 갇힌 자들을 구하는 일, 그 미션에 자기를 헌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구원은 사명으로서의 깨어남, 다시 태어남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싸울 수밖에 없다. 매트릭스를 만들어 그 체제 안에 사람들을 밀어 넣으려는 자들과 그 사람들에게 자유를 찾아주려는 사람들의 싸움. 자기 자신의 몸에 갇힌 사람은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예수가 몸을 버려 세상을 구원한 것은 자기 구원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구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처럼 몸을 버려 자기를 구원하고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결단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체제에 묶여 자유를 잃은 노예로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무너진 공동체, ?]

 

"단순한 공식인데, 경쟁, 분리가 인간 사회에 일어나면 체제가 이기는 거고 반()경쟁, 사랑, 공존 쪽으로 가면 체제가 붕괴돼요. 이건 그냥 공식이에요. 서로 사랑하지 않게 하고, 서로 경쟁하게 하는 것이 체제고요. 우리가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서 오는 거죠."

(강신주,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중에서)

 

1997 IMF의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한국 사회는 극속도로 붕괴되었다. 여기서 붕괴는 '공동체성'을 말한다. 본격적 경쟁체제 속에 돌입한 한국사회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우위'에 올라섰을지는 몰라도, 공동체성이 처참하게 붕괴되어 자본()만 있고 사람이 없는, 동물사회보다 못한 사회가 되었다.

 

사회 안에서 사회와 공존하는 교회의 공동체성이 붕괴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교회 자체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거스르지 못하고 그 흐름에 휩쓸려 버렸기에 교회의 공동체성은 형편없이 무너져 버렸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교회의 메시지는 대부분 '위로'의 메시지다. 사람들도 그러한 메시지를 듣고 싶어한다.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메시지, 즉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경쟁에서 이길 것이다,라는 메시지와 경쟁에서 졌지만 괜찮다는 메시지, 이 둘 중 하나의 메시지가 대부분이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는 공동체성을 무너뜨리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주범인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메시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강요하는 경쟁과 자본의 논리가 인간의 영혼까지 잠식했다는 뜻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인문학자도 이러한 통찰 아래, 어떻게 하면 공동체성을 회복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성을 회복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여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설교자들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향해 어떤 저항을 하며 어떻게 공동체성과 인간성을 회복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근대의 자율적 이성은 자본주의를 내면화시킴으로 거대한 악으로 변이를 일으켰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처럼 한강을 자유롭게 거닐던 물고기(자율적 이성을 지닌 인간)가 화학물질(자본주의)을 먹음으로 한강에서 괴물이 탄생한 것과 같다. 그 괴물을 물리친 것은 경쟁이 아니라 결국 '가족애(사랑)'이었다.

 

목사들은 설교 강단에서 '공동체'를 강조하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공동체'는 누구를 위한 공동체인가. 말만 공동체이지, 청중들(교인들)을 자기의 목적에 따라 순종시킬 바보 같은 공동체를 강요하는 것 아닌가.  그게 사랑인가? 그것은 자기의 경쟁상대(다른 교회/교단/목사)를 물리칠 전략 중의 하나일 뿐 아닌가. 그렇게 교회를 키워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로서 영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려는 것 아닌가.


사랑은 목적이지 수단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특별히 목사들은) 사랑을 수단 삼아, 경쟁에서 이기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검은 속내를 내려놓고, 공동체성과 인간성을 해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도끼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고 모든 불신을 물리치는 사랑을 살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2. 7. 09:31

그 길을 통해 오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1:1-8)

 

사막에 길을 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그 길을 통해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

이사야와 세례 요한을 통하여

그 길을 어떻게 내야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신 주님,

주의 말씀 의지하여 사막에 길을 내겠나이다.

주님이 오시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내 삶의 골짜기, 산과 언덕, 절벽, 비탈진 산골길들을 봅니다.

주님이 오시는 길을 가로막아 놓고

주님이 오시기를 간구하는 이 못된 욕망을 벗어 던집니다.

주님이 오셔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면서도

촛불을 켜지 않는 이 게으른 모습을 회개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면서도

여전히 세상이 부추기는 욕망에 내 자신을 내어주고 있는

이 어리석은 모습을 바라봅니다.

주여, 우리의 헤세드는 꽃과 같아 금방 시들지만,

주님의 헤세드는 영원합니다.

영원하신 주님의 헤세드만 우리의 소망인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하오니,

주여, 이사야와 세례 요한을 통하여 일러주신 방법으로,

부족하지만 사막에 길을 내고 있는 우리를 도우시고,

부족하게 길을 냈지만 그 길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주님, 무엇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촛불을 켜기로 결단합니다.

촛불을 켜고 그 앞에 앉아 주님의 말씀 붙들고

기도하기로 결단합니다.

기도의 행위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사막에 길을 내는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말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기도하게 하옵소서.

기도하면서 한발한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2. 7. 09:30

사막에 길을 내어라

(마가복음 1:1-8)

 

대림절(Advent)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마가복음인데,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이제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이야기이다. 세례 요한이 자기의 사역을 시작하며 선포한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선포하고 있는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의 세례 요한과 이사야 선지자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말씀의 요지는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을 먼저 들어보자.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이사야 40:3-4)

 

사막에 길을 내어라.’ 성경의 언어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막상 깊이 묵상해보면 참 어렵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참으로 멋진 말이고 장엄한 말이지만, 이게 무슨 말인지, 막상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 사막에 길을 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오늘 이것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려 한다.

 

이사야서 40장은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로 시작한다. 북이스라엘은 BC 721년 쯤에, 남유다는 BC 586년 쯤에 망하고, 이들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70년 정도의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사야 40장은 제 2 이사야로 불리는 선지자의 예언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을 때, 그들을 향해 선포된 예언의 말씀이다. 이사야는 구원을 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속박당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구원의 소식은 정말 복음(기쁜 소식)’ 그 자체이다. 지금 온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속박당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이 때에 백신개발완료소식이 들려오는 것과 같다. 바이러스의 전파가 최고점을 찍어 모든 경제와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전세계인들이 손해가 막심함에도 불구하고 경제활동을 자제하면서 인내할 수 있는 이유는 곧 백신이 배포되면 모든 고통을 덜어내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속박에서 해방될 것을 믿는 소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막에 길을 내어라고 선포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 길을 내면, 그 길을 통하여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로 와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거라고 한다.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통하는 길은 사막이다. 그들은 굽이굽이 사막 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강제이동을 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사막에 길을 내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들었을 때, 아주 실제적인 언어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등장하는 세례 요한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한다. 배경이 사막(광야)인 것은 같고, ‘그의 길을 예비하라는 메시지는 같으나, 세례 요한의 선포는 이사야의 선포보다 한층 더 영적이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한층 더 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세례 요한의 다음과 같은 선포 때문이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1:4/공동번역 개정판).

 

다시 말해, ‘사막에 길을 내어라고 했을 때,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한가의 질문 앞에서 세례 요한은 그 방법으로 회개, 세례, 죄 용서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선포가 좀 더 영적인 표현이지만, 사실, 이사야의 선포도 세례 요한의 선포와 다르지 않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에게도 사막에 길을 내어라는 그들이 진짜 사막에 가서 작업을 해서 사막에 길을 내라는 뜻이 아니라(그렇게 할 수도 없다. 포로들이 어떻게 자유롭게 나가서 작업을 하겠는가), 뭔가 영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는 이사야와 세례 요한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방식은 영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영적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매우 실제적이다(육체적이다). 우리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는 방식과 우리에게 임하셔서 행하시는 구원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영적인 방식을 통해서 오시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은 매우 육적(실제적)이라는 뜻이다. 이 둘의 긴장관계를 잘 알아야 한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한 이스라엘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한 방식은 영적이다. 이사야의 말처럼 문자적으로하나님이 사막에 난 길을 통해서 그들에게 당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게 그들에게 온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즉 영적인 방식으로 그들에게 오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오심을 통해서 그들에게 임한 구원은 매우 육적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은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사막에 길을 내는 법이다. 물론, 세례 요한 당시의 이 선포는 영적이라기보다 매우 육적이었다. 실질적으로, 세례 요한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 땅에서의 구원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승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영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영적임재를 성육신처럼 실제적으로 느끼고 신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는가? 바로, 사막에 길을 내는 일, 주님이 오시는 길을 닦는 일, 이 불가능한 것 같은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방법은 바로 기도로부터 시작한다. 사막에 길을 내는 일은 이사야가 말하고 있듯이,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는 것, 절벽을 평지로 만드는 것, 비탈진 산골길을 넓히는 것과 같다. 골짜기, 산과 언덕, 절벽, 비탈진 곳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다.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는 것, 절벽을 평지로 만드는 것, 비탈진 산골길을 넓히는 행위를 일컬어 세례 요한은 회개라고 부르고 있다. 회개와 기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회개가 기도고, 기도가 회개다. 사막에 길을 내는 행동은 회개다. , 기도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기도하고 있는가. 기도를 얼마나 오래하느냐, 또는 얼마나 깊게, 진지하게 하느냐는 나중 문제이고, 우리의 삶에 기도 행위 자체가 존재하느냐를 물어보자.

 

우리는 매일 같이 아우성치며 산다. 사는 게 힘들다고. 나를 답답하게 하는 뭔가 모를 에서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힘듦과 답답한 삶을 놓아두고, 기도의 행위를 얼마나 진지하게 하고 있는가. 내 삶이 그야말로 사막 같아, ‘골짜기와 산과 언덕, 그리고 절벽과 비탈진 산골길로 가득 찼음에도, 그것을 평지로 만들어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러 오시게 만들어 주는, 사막에 길을 내는 기도를 얼마나 진지하게 행하고 있는가.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손쉽게 유튜브를 보지만, 기도하기 위해 촛불을 켜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사막에 길을 내는 일은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세례 요한이 말하는 회개이다. 그리고 나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를 받는 일은 일회적인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서 계속 영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세례는 존재의 거듭남이다. 존재가 거듭난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이사야는 우리 인간의 존재를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40:6-7).

 

기도의 행위로 들어가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하는 일은 세례를 받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잊어버리기 일쑤다. 바쁨 때문에, 그리고 세상의 부추김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바쁘게 사는 이유는 세상의 유혹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은 인간을 과도하게 긍정한다. ‘네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어!’ 마침 성경에 이런 구절도 있어서 우리는 그 세상 유혹에 금방 넘어가 나의 존재를 바쁨에 내어준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4:13). 이 말씀은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고 채워주는 말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용한다.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사막에 길을 내는 행위, 다시 말해, 나에게 실제적인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행위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이 겸손한 고백, 이 진실한 고백, 내 존재의 인식, 이것이 바로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는 것, 절벽을 평지로 만드는 것, 비탈진 산골길을 넓히는 일이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 용서함을 받으라고 말한다. 기도의 행위를 통해, 자기 존재를 인식한 인간은 이제 어떠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40:8/공동번역 개정판).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에는 그 뜻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 원어를 보면, ‘헤세드라는 용어를 통하여 인간과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 지를 비교하고 있다.

 

이사야 40 6절 말씀은 이렇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 여기서 아름다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바로 헤세드이다. 인간의 헤세드(아름다움, 사랑)는 꽃에 비유되고 있다. 하지만 그 인간의 헤세드는 꽃이 시듦과 같이 곧 시들고 만다. 이와 대조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헤세드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로다!”(이사야 40:8/개역개정). 꽃처럼 금방 시드는 인간의 헤세드와는 달리, 하나님의 헤세드(언약적 사랑)은 시들지 않는다. 영원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로다할 때영원히 선다(야쿰 레올람)’는 말의 뜻은 세상의 어떤 권세도 하나님께 대항할 수 없다는 매우 정치적인 용어이다. 우리가 어떠한 권세(그것이 돈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를 욕망하는 것은 그것이 나를 구원해 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세상의 어떠한 권세도 영원하지 못하고, 세상의 어떠한 권세도 하나님께 대항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구원자이시다.

 

대림절. 참 구원자이신 하나님, 어떠한 권세와도 견줄 수 없는 분이 오고 계신다. 그 분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방식(성육신)으로 오고 계신다. 그러니, 구원을 받고 자 하는 자는 그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방식은 매우 영적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구원은 매우 실제적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부활의 방식을 통하여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어떤 권세도 줄 수 없는 참된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 사막에 길을 내는 일이다. 이 진리를 깨닫고, 사막에 길을 내는 일에 나의 온 존재를 기울이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죄 용서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그렇다구원을 갈망하는 우리들은 사막에 길을 내어야 한다그래야 그 길을 통해 구원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주님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오신다그래서 그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방법은 영적이어야 한다회개(기도)와 세례와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이다그러나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은 매우 실제적이다그러므로 구원 받기를 갈망하거든촛불부터 켜야 한다기도 행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어느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소망해야 한다주님께서 우리가 예비한 그 길을 통해 오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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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0. 12. 6. 06:34

[시론] 박경리의 시 유배ㅡ 유배 같은 삶

 

황사 속을 맴돌고 헤집고

이 자리

나는 책상 하나 안고 살아왔다

ㅡ 박경리의 시 유대의 한 부분, 시집 <우리들의 시간>에 수록

 

시인은 이렇게 시를 시작한다. “내 조상은 역신(逆臣)이던가 / 끝이 없는 유배”. 시인은 자신이 유배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이유를 조상에게서 찾는 듯하다. 이것은 단순한 조상 탓이 아니다. 자기 실존에 대한 긴급한 질문이다. ‘나는 왜 이렇게 유배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조상의 탓으로 돌린다. 조상 탓으로 돌리는 것도 그나마 괜찮은 거다. 어떤 이는 조상에게서조차 그 이유를 찾지 못할 때, 결국 신에게 그 탓을 돌린다. “하나님이 지금 나한테 장난치고 있는 거다!”

 

시인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배어 있는 시이다. 시에서 화자는 작가와 일치하지 않는다. 시적 화자와 이 시를 쓴 작가와는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시는 왠지 화자와 작가가 일치된다. 그래서 더 코 끝이 찡해진다. 대작, <토지>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 그녀가 벌였던 사투는 그녀가 그 자신으로 하여금 나는 지금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책상 하나 안고 살아왔다.” 자신의 유배지에 놓인 하나의 물품은 책상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자유인인가, 아니면 유배지에 유배된 죄인인가를 분간하기 힘들 때가 있다. 뭐 하나 새로울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마주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유배된 삶이라 정의 내리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한숨을 내쉰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이 아담때문이라고, 그에게 탓을 돌리기도 한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원초적인 조상. 이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더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체념, 그 절망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를 조금 다르게 바라볼 필요도 있다. 시인이 자신의 유배 같은 삶의 이유를 역신이었을지 모르는 조상에게서 찾지만, 그렇다고 조상 탓만 하면서 유배지에서의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시인은 유배 같은 삶이지만, 그 유배 같은 삶에서 책상 하나 안고 살며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 책상에서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그려내고 유배 같은 삶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루어내지 못했을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 그래서 그의 유배 같은 삶은 유배를 벗어난 참 자유의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시인의 삶, 책상 하나 안고, 평생을 글쓰기와 씨름한 삶, 그 고단함이 '유배'로 표현되고 있는 이 시는, 한 자리에서 유배당한 것처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큰 위안을 준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각자 맡은 바 '소명'을 붙들고, 바로 그 자리에 '유배'당한 것처럼,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야 할 것이다. '유배' 같은 삶이 나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그것 만이 유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Posted by 장준식

[철학과 신학의 긴급한 과제]

ㅡ 근대성 넘어서기

 

근대성의 키워드는 '자유'이다. 그래서 근대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유주의(liberalism)'이다. 여기서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말한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는 '인간 중심성'이다. 이러한 근대성을 나쁘게만 보면 안된다. 근대성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봉건사회'에 살며, 자유를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자아'를 발견하고, 개인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이유는 근대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근대성은 데카르트의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이 별 말 아닌 것 같지만, 그당시 핵폭탄같은 선언이었다. '자아'가 생각하는(사유하는) 주체로서 모든 지식의 확고한 토대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자아'는 지식의 확고한 토대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서구사회에서는 '' 또는 '성경'이 그 토대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개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은 주체로서 살지 못하고, 언제나 어딘가에 종속되어 살았다. 그래서 그때를 봉건사회라 부르는 것이다.

 

지식의 확고한 토대를 찾으려는 시도를 '토대주의(foundationalism)'이라 한다. 데카르트 이후, 그 토대는 생각하는(사유하는) 인간의 자아(cogito)가 되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자아'는 몸, 역사, 전통 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자아'이다. 인간을 매우 긍정한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근대(modern)와 후기근대(post-modern)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자유'가 무한정 주어져 있다. 물론 아직까지 그 자유를 충분히 획득하지 못한 지구촌 곳곳의 장소와 사람들이 있지만, 경제가 발전되고, 적어도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를 향유하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자유의 과잉' 문제를 겪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개인의 자유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 개인은 개인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언제나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었다. 특별히, 서구사회는 기독교의 존재가 너무 큰 존재였기에,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한 개인은 교회(또는 신)라는 거대한 힘에 종속되어 살았다. 가톨릭의 7가지 성사는 인간이 '교회(또는 신)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룩한 성사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그러한 '종속성'에 도전장을 던진 사건이고, 그 이후 서구사회는 '자유'를 위한 기나긴 투쟁의 역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근대를 이루고, 그 근대의 심화라고 불리는 포스트모던 사회에 우리는 진입해 있다.

 

동성애 문제를 ''의 문제로 접근하는 (보수) 기독교의 시각은 매우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동성애 문제는 ''의 문제라기 보다, '근대성'의 문제이다. 지식의 확고한 토대가 'cogito'가 된 근대 이후의 인간은 '자아'가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규범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순수한 자아(또는 '누스'(마음)라고 부를 수 있겠다.)는 몸, 역사,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규정할 수 있다. , 내 몸은 '남성'을 가리키고 있다 할지라도, 내 자아(누스)가 나를 여성으로 규정하면, 몸은 비록 남성성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내 자아가 나를 '여성'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나는 여성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성의 문제를 간과하면서 동성애 문제를 ''의 문제로 논의하는 것은 맹목적인 '정죄'에 불과하다. 이는 근대성을 형성하면서 획득하게 된, '자유'를 부정하게 되는 '역린'을 저지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유의 과잉' 문제로 인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환경에서 전방위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요즘, 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새로운 세상으로의 발걸음을 내딛으려면, 인간이 근대성을 구축하면서 토대로 삼았던 'cogito'의 문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cogito를 지식의 확고한 토대로 삼은 것이 옳은 것인가?

 

현대 철학과 신학은 이것을 질문하고, 이것에 대하여 정당한 대답을 내놓으려고 노력 중이다. 한마디로, 요즘 철학과 신학은 '근대성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근대를 통하여 '자유'를 획득했지만, 그 자유라는 것이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인다면, 우리가 얻어서 누리고자 했던 '자유'란 무엇인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데카르트가 생각한 ', 역사, 전통 등에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자아', 즉 독립된 인간의 자율적 이성이 가능한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복잡하고 난해한, 그리고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고군분투를 하고 있다. 그래서 바디우나 지젝 같은 철학자도 '사도바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급진적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 운동을 벌이는 신학자들은 교부들의 전통에서 그 실마리를 찾으려는 것이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자아를 지식의 확고한 토대로 삼으며 '하나님의 은총'에서 떠나간 근대의 인류는 마치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와 같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총,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운운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정죄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근대성의 극복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성의 고착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자아'만 있고, 하나님의 은총 아래 놓여 있는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도전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그 도전 안에서 인류는 계속하여 분열을 경험할 것이고, 고통을 떠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벗어 던지고, '독립된 인간의 자율적 이성'을 토대로 삶을 꾸려 나가려는 인류의 삶은 탕자가 경험했던 '허랑방탕한 삶' 그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근대성'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에 대하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고 고백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 안에서 힘을 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아톰(a-tom)의 시대, 우리는 모두 우주소년 아톰이다

 

우주소년 아톰. 어린 시절 손에 땀을 쥐며 보던 만화영화다. 아직까지도 몇몇 장면은 눈에 선하다. 우주소년 아톰은 우리나라에서 방영될 때의 제목이고, 원래 제목은 ‘Astro Boy(우주소년)’이다. 미국에 온 후, 어린 시절 TV에서 재밌게 보던 미국드라마나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우주소년 아톰 외에도 서부영화 내 이름은 튜니티를 찾아보았다. 영어 원제목은 ‘my name is Trinity’였다. 트리니티를 튜니티로 번역한 것이다. 또한 ‘A 특공대도 찾아보았는데, 원제목은 ‘The A-Team’이다. ‘전격제트작전‘A Knight Rider’이다. 비디오 씨디를 구입하여, 모두 다시 보았다. 지금 봐도 재밌다.

 

아톰(atom)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주소년이 아톰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에너지원이 등뒤에 건전지처럼 끼워넣는 원자/핵연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아톰(atom)’은 라틴어로 ‘individuum’으로 번역한다. 여기에서 영어의 ‘individual’이 나왔고, 이것을 한국어로 개인이라 번역한다.

 

중세를 지배했던 철학은 실재론(realism)이다. 이는 ()플라톤주의의 핵심 개념으로서, 모든 만물은 실재하는 실체(substance)의 모상에 불과하다는 이론이다. 우리가 보편을 생각하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은 그 원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재론이 신학에 적용되면,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최고의 실체는 하나님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실체의 보이는 형상이므로, 모든 인간이 본받아야만 하는 이상적인 존재가 된다.

 

중세의 이러한 실재론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 유명론(nominalism)이다. 유명론은 플라톤주의를 극복하려는 철학사상으로서 실체보다는 개체에 집중한다. 실체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개체는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은 이렇게 개체에 집중하는 유명론의 철학 바탕 위에 발생한, 사고의 전환이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된 개체는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인간 세상의 주류 사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개체, 즉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인이 모든 규범의 중심에 올라서게 된 시대를 우리는 근대라고 부른다. 근대는 한마디로, ‘개인을 발견한 시대이다.

 

근대 이전까지 인간은 자기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자기 바깥에서 오는 전통이나 성서가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규범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시작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규범으로 자기 바깥의 것을 수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기 안에 있는 것, 즉 이성이 삶의 규범이 된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에게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그래서 전통이나 성서가 아니라 이성이 되었다. 이성이 왕이 되었다. 근대 이후의 서구 사상은 이성의 역사이다. 이성과 함께 웃고 울었다.

 

원자의 개념을 처음 생각한 그리스 철학자는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이다. 소크라테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고안한 원자(atom)’이라는 개념이 거의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근대에 들어와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의 뜻을 가진 원자는 이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인간 존재, 개인의 개념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개인이 발견된 근대 이후, 우리는 진짜로 아톰(atom)’이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톰이다.

 

아톰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개인에게는 주체, 권리, 인권 같은 것을 바탕으로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근대 이후 서구 사상은 아톰(개인)이 된 인간 개체가 다른 아톰과 어떻게 잘 어울려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성찰로 발전했다. 우주소년 아톰이 힘이 센 것처럼, 한 명 한 명의 인간 개체는 자신의 주체와 권리를 바탕으로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기 영역(property/재산)을 가지게 되었고, 힘과 힘은 잘 조절되지 않으면 충돌하여 큰 불상사를 발생시킬 수 있으므로, 아톰과 아톰이 어떻게 공멸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롤스의 자유주의사상이나 하버마스의 공론장개념은 모두 그러한 노력들이다.

 

요즘 소통이 강조되는 이유는 아톰의 시대에 아톰과 아톰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와 권리를 바탕으로 무한한 자유를 소유한(또는 소유해가는) 인간 개체는 이제 힘을 가지게 되었고, 그 힘을 정의롭게 쓰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마치, 집에 자동차가 하나 있고 그 자동차는 가장만 운전할 줄 알면 되는 시대에서 각 사람마다 자동차를 소유하게 되어 각 사람이 자동차 운전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과 같다.

 

자유를 손에 쥔다는 것, 권리를 손에 쥔다는 것은 사람에게 칼을 쥐어 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을 쥔 사람이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쓰일지 무척이나 걱정되는 상황이다. 손에 쥐어진 칼을 정의롭게쓸려면 성숙이 필요한데, 만화영화에서 우주소년 아톰이 자신이 지닌 힘을 정의롭게 쓰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아톰들도 자신의 손에 쥐어진 자유라는 칼, 권리라는 칼을 정의롭게 쓰도록 성숙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의 발견은 좋은 것이다. 개인은 충분히 발견되어야 한다. 모든 삶의 결정권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그 결정권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만약 누군가 자기 결정권(자유)을 빼앗으려 한다면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아톰들은 각자가 충분한아톰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톰들은 동시에 책임감을 철저하게 가져야 한다. 이것에 실패하면 그는 더 이상 아톰이 아니다. 그냥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프로그래밍된 로봇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어마어마한 일을 잘 해내려면 갖춰야 할 덕성(virtue)’이 참 많다. 그래서 아톰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우아하기도 하지만 피곤하기도 하다. 지치지 않기를. 아톰의 힘과 우아함을 잃지 않기를.

Posted by 장준식

개신교의 공의회 기능 상실과 게으른 신앙

ㅡ 보편 신앙을 위하여

 

캐슬린 얀센 화이자 백신 연구 개발 책임자는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제 우리는 이 백신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제대로 작용하는 지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앨버트 불라 화이자 최고경영자(CEO) 역시오늘은 과학과 인류에게 멋진 날이라며 성과를 자축했다.

(화이자 "임상 중인 백신, 90% 넘게 효과 있다"는 기사 중에서)

 

종교사상은 과학과 달라서 검증이 잘 안 된다. 컨트롤 타워가 없다. 그래서 누가 말하는 어떠한 종교사상이 세상으로 내보내도 되는지, 제대로 작용하는 지, 세상에 내보내지기 전에 검증할 방법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들이 당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할까? 최대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대개 어떠한 사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없다. 어떤 원류(source)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확인해 가다 보면, 그 사상이 역사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것이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이야기인지 알 수 있고, 그것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 시대에 유효한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하는 것이 공부다.

 

우리는 너무 쉽게 믿는다. 마침 성경에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의심을 하면 신앙인이 아닌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 종교권력은 그러한 종교문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한다.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우리는 우리의 주권, 주체,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악으로 추락하고 만다.

 

종교사상, 또는 신앙이 건전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신학은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한다. 기독교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 펼쳐왔다. 이러한 생각에 꽃을 피운 신학이 중세의 스콜라 신학이다. 특별히 아퀴나스 신학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가톨릭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 특별히 아퀴나스의 신학에 따라 이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가톨릭 신학은 굉장히 이성적이다.

 

여기서 이성적이라는 말은 보편성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학사상의 보편성은 공의회를 통해서 확보되어 왔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신학자들이 모여서 어떠한 신학적 이슈를 놓아두고 공방을 벌인 뒤, 공의회는 서로 합의된 신학사상을 발표했다. 공의회를 통해 탄생한 대표적 기독교 정통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다. ‘예수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서 출발한 기독론 논쟁은 결국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인 삼위일체론으로 귀결되었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의 논쟁을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삼위일체론의 핵심사항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을 확립한데 있다. 공의회를 통해서 유사본질(호모이우시오스)을 주장하던 아리우스는 정죄되고, 이에 맞서 동일본질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이 정통으로 인정된 것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기독교 신학은 동일본질을 정통신학으로 공표하며 그 신학을 유지해 왔지만, 그렇다고 역사에서 유사본질을 주장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여 바이러스를 퇴치했다고 해서 그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과 같다. 바이러스의 위협은 늘 존재한다. 문제는 그 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몸상태와 백신이 있는지 없는지 이다.

 

종교개혁은 보편을 앞세워, 또는 보편을 남용하여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횡을 휘둘렀던 가톨릭의 교권주의자들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킨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에 대한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탄생한 개신교신학(Protestant Theology)은 성경과 은총과 믿음을 강조하지만, 결국 이것은 이성과 보편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신학사상을 검증하여 무엇이 건전성을 확보하고 있는 신학인지 확인해 주는 장치인 공의회 기능을 상실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인들은 은총과 믿음을 통해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 받긴 했으나, 은총과 자유를 통해 내가해석한 성경의 내용이 건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게 되었다.

 

개신교인들은 해석이라는 말을 낯설어 한다. 성경 말씀을 그냥 믿으면 되지, 무슨 해석이 필요하냐고 반문한다. 이렇게 반문하는 것 자체가 해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 세상에 해석이 아닌 것은 없다. 인간은 물자체를 인식할 능력이 없다. 무엇이든지 개념화시켜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개념화시키는 작업이 이성이고, 어떠한 것을 이성이 올바르게 개념화시켰는지를 검증하는 것이 학문이다. 그렇기에, 신학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개념화시킨 하나님 존재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검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없으면, 악마를 하나님처럼 잘못 개념화시켜 놓고, 그것이 참 하나님인 것처럼 숭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이것은 결국 생명을 죽이고 만다.

 

요즘 개신교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신뢰할 수 있는 보편적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보편을 거부하고 개별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도 있지만, 적어도 개신교 안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과 더불어 공의회 기능 상실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과학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 즉 보편성을 확보한 것을 신뢰하면서, 왜 유독 신앙에 대해서는 보편성을 묻지 않는지, 참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우리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오해하고 있으며, 신학 또는 신앙의 보편성을 따질 만큼 지성이 없으며, 보편성을 따지는 것을 귀찮아 하는 게으른 신앙에 빠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결국 잠언서의 지혜가 맞는 것 같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할 개신교인들이 누구보다 게으르게 살고 있다. 그래서 망하고 있다.

그런데 너 게으른 자야, 언제까지 잠만 자겠느냐? 언제 잠에서 깨어 일어나겠느냐?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더 일손을 쉬어야지!” 하겠느냐? 그러면 가난이 부랑배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거지처럼 달려든다. (잠언 6:9-11/공동번역 개정판)

Posted by 장준식

[어거스틴 - 사랑이 구원이다]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기 시작하면 사랑 자체가 사랑받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분명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어거스틴, <삼위일체론>, 8.8.12)

 

사랑이 일어날 때, 사랑하는 자(actor of loving) '자기 자신'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사랑 그 자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이 발생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현존하신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사랑을 할 줄 안다. 악한 행동을 하면서도,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는 이유는 그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에게서 보이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은 대단하다. 그만큼 그의 영혼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고, 그 사랑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열렬히 갈망한다.

 

어거스틴은 인간과 인간의 내면을 응시한다. 이 세상의 다른 어느 피조물보다도 인간 안에 하나님이 숨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깊이깊이 응시하는 삶, 하이데거와 아렌트가 말했던 '사색적인 삶'은 결국 하나님을 발견하는 가장 확실한 통로가 된다.

 

하나님(또는 하나님 나라)는 무지개 너머 어딘가(somewhere over the rainbow)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깊이깊이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아담의 죄를 자기사랑/교만(self centered-ness/amor sui)라고 말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을 향하는 욕망은 결국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을 더 가로막을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밖(이웃/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그럴 때, 오히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구원론적인 정향(orientation)을 가진 사랑이다. 사랑이 구원이다. 사랑이 발생하면, 거기에는 동시에 구원이 발생한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사랑이 발생하는 곳에 구원이 발생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구원자시라는 뜻과 같다.

 

인간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래도 인간이 아직까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인간의 사랑이 완전하지 못하고 영원하지 못해서 구원이 영원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고, 그 구원의 경험은 계속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인간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

 

사랑이 구원이다.

사랑이 없으면 지옥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