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7'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1.01.07 놀이의 신학
  2. 2021.01.07 나는 직선의 잔인성을 거부한다
  3. 2021.01.07 역사와 꽃
  4. 2021.01.07 안식일이란?

[놀이의 신학]

 

성취는 자기 구원이고, 자기 자신을 다른 존재와 차별성을 두려는 행위이다. 성취는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국 성취는 나의 생명은 풍성하게 할지 모르지만 나 외의 다른 생명은 착취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취를 부추기는 사회는 생명이 고통 당하고 생명의 크기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놀이는 생명들과의 어우러짐이다. 놀이는 자기 바깥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존재와 차별성을 두기보다 그들과 어울려 모든 생명을 보듬으려 한다. 그러므로 놀이의 사회는 생명이 만족을 느끼고 생명의 크기가 커질 수밖에 없다.

 

돈을 버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사귐을 갖는 것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우리 인간의 모든 활동은 성취가 되는 순간 생명의 크기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놀이가 되는 순간 생명의 크기는 커진다.

 

나는 성취하려 일하지 않는다. 나는 성취하려 공부하지 않는다. 나는 성취하려 목회하지 않는다. 나는 생명을 보듬기 위하여 일하고 공부하고 목회한다. 나는 이것을 '놀이의 신학'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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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나는 직선의 잔인성을 거부한다]

 

내가 너에게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택한다는 것은 폭력이다. 선과 선을 가장 명료하게 그리고 빠르게 잇는 방법인 직선은 구부러진 곡선을 거부하거나 파괴해야 가능한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난 경부고속도로가 얼마나 잔인한가. 그 직선 길을 내기 위하여 잘려나간 산이며 나무, 쫓겨난 주민이며 동물들을 생각해 보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직선으로 잇겠다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폭력인가. 너와 내가 직선으로 이어지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없으며 곧 식상한 사이가 될 것이다.

 

나는 너에게 가되, 최대한 돌아가려 한다. 존재를 보듬는 그 구불구불한 길을 통해 너에게 가려 한다. 그 험난한 길을 걸으며 너의 존재를 사모하며, 길마다 펼쳐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련다.

 

모든 권력은 통치를 용이하게 하게 위해 직선의 역사를 요구하고 미화시키겠지만, 직선으로 이어지는 순간 우리도 그 잔인성에 물들어 생명을 파괴하게 되리니, 직선으로 이어지길 거부하며, 너와 나 사이에 나 있는 그 원래의 구불구불한 길을 오롯이 걸어가려는 열망과 용기와 성실이 우리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원래의 아름다움을 지켜낼 것이다.

 

나는 직선의 잔인성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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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역사와 꽃]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의 참신성은 그것이 기독교인에 의해 세워졌고 기독교 예배를 위해 봉헌된 첫 번째 대도시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 도시는 세계를 향해 팔레스타인에서 유죄 판결 받은 한 랍비(예수)의 이름을 딴 종교가 이제 로마의 국가 교회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ㅡ 루벤슈타인,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에서

 

330년에 있었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의 일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새로마'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통치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이다. 그곳은 현재 이슬람 문화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원래 그 도시는 최초의 기독교 도시였다.

 

이스탄불에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그곳에 가고싶다. 이스탄불의 거리를 걸으며 1700년 전, 최초의 기독교 도시를 음미하는 것도 이스탄불을 향유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역사는 참 신비한 것 같다. 꽃처럼 폈다 진다. 역사는 생명을 가진 듯하다. 그러므로 역사를 산다는 것은 생명력을 가지고 산다는 뜻일 것이다. 꽃처럼 폈다 지는 역사이기에 폈다 진 역사를 아쉬워할 것은 없다. 핀 꽃은 지고, 진 꽃은 다시 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이 현재 이슬람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아쉬워할 것은 없다. 기독교인이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다보면, 그 꽃은 어딘가에서 다시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역사를 얼마나 생명력 있게 살아갈 것이냐에 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붙들고, 생명력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핀 꽃은 지고, 진 꽃은 다시 핀다.


Posted by 장준식

[안식일이란?]

 

안식일은 쉬는 날이다. 안식한다는 것은 쉰다는 뜻이다. 주일은 안식일을 기독교 버전이다.

 

우리는 대개 안식일을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근대적 개념이고, 자본주의적 개념이다. 노동의 노예로 일주일을 살다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을 안식일이라고 생각하고 만다면, 우리는 여전히 노예로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안식일은 옳은 것을 지킬 필요가 없고, 옳은 것을 할 필요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만물은 옳은 것을 향해서, 옳은 것을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게 창조성이고, 하나님 지향성이다. 그게 은총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옳은 것을 지켜내기란 정말 힘들다. 옳은 것을 지켜내려 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리기 일쑤다. 예수의 십자가도 결국 그것을 가르쳐 준다. 예수도 옳은 일을 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 주일을 지킨다는 것을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으로만 생각하고 말면 성경에 등장하는 '안식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누구나 노동을 한다. 그러나 그 노동은 무엇을 위한 노동인가? 옳은 것을 위한 노동인가? 정의와 사랑을 위한 노동인가? 우리의 노동은 정의와 사랑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자기집중과 착취를 위한 노동일 때가 많다.

 

일주일 동안 옳은 것을 위하여, 정의와 사랑을 위하여, 옳은 것을 지키려고 죽도록 고생한 사람만이 안식일이 귀한 줄 안다. 그 힘든 일을 더 이상 안 해도 되는 날, 정의와 사랑의 완성이신 주님의 품에 안겨, 옳지 못한 것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품에 안겨, 더 이상 옳은 일을 하느라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날,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기독교인이 안식일을 지키면서, 즉 주일을 지키면서 감동과 감격이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옳은 것을 지키려고 죽도록 고생해보지 않은 채, 그저 자기 욕심에 따라,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노동을 하다 교회 와서 주일을 지키려니, 안식일에 감동 감화가 없는 것이다.

 

고통에서 놓이는 순간, 우리는 안식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고통 속으로 우리의 삶을 밀어넣고 있는가? 옳은 것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가? 그렇지 못하다 보니, 안식일에 주님의 품에 안기는 일이 기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다. 그렇지 못하니, 안식일에 쉬면서도 쉼을 얻지 못한다.

 

안식일에 안식하지 못하는 가련한 우리들이여.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