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1. 9. 27. 13:14

관대한 마음을 간구하는 기도

(고후 8:1-5, 16-19, 9:7, 11)

 

주님,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지만,

그럴 때마다 힘주셔서 잘 감당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 우리는 우리 발로 걸어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불러 주셔서 온 주님의 백성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시고

맡겨 주신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미니스트리이오니,

주여, 우리가 맡은 사명을 겸손히 감당할 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관대한 마음으로 하게 하시고

언제나 신앙을 선택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기를 배우게 하시고

몸과 마음이 어려울 때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대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신앙의 역설을 보이는 신실한 주의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관대한 마음으로 선한 일 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옵소서.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나이다.

아름다운 그 이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27. 13:12

신앙의 역설

(고린도후서 8:1-5, 16-19, 9:7, 11)

 

1. 고린도후서 9장에는 ‘연보(捐補)’라는 말이 나온다. 한자어이다 보니 마음에 착 와 닿지 않는다. ‘연’은 ‘버릴 연’이고, ‘보’는 ‘도울 보’이다. ‘연보’의 뜻은 “자기 것을 버려서 해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헌금(Offering/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다르다. 그래서 영어로 ‘연보’를 옮길 때 ‘offering’이라 하지 않고, ‘liberality/generosity’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니까, 연보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고린도후서의 컨텍스트 안에서는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관대한 마음으로 내는 물질(재산)을 말한다.

 

2. 바울이 ‘연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고린도 교회와 바울 일행 간에 오해가 생겨서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바울은 ‘눈물의 편지(frank speech)’를 써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좋은 마음으로 돌려 놓았다. ‘솔까말 편지’를 보내 놓고 마음 조렸던 바울은 디도 편에 온 고린도 교회의 회개 소식을 듣고 너무나도 기뻐했다. 바울은 뜬금없이 ‘연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다. 9장 5절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였노니.”

 

3.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미루어 보면, 고린도 교회는 바울 일행에게 ‘연보’를 약속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 일행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오해(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뭔가 잘못한 일 / 복음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안에서 벗어난 일)가 발생하여 둘 사이가 별로 좋지 않게 되었다. 화평(peace)이 없으면 무슨 일이든 진행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일이고, 주님의 일이라 할지라도 공동체(부부 간/친구 간/동료 간)에 화평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라 서로 간에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다.

 

4. 고린도 교회와 다시 화평을 이룬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고 있다. “예전에 약속했던 연보를 관대한 마음으로 실행하라!”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는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에 그렇게 마음 먹었다가 오랜 동안 잊고 있었던 일을 다시 실행하는 일은 처음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들게 마련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연보를 독려하면서 다시 한 번 ‘칼 와호메르 논리(하물려 논리)’를 쓴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이야기를 꺼낸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고,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연보를 했습니다”(우리말 성경).

 

5. 마게도냐 지역은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는 곳이다.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고린도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핍박도 많았고, 극한 가난 속에서 어려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아주 관대한 마음으로 연보를 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열악한 상황 속에 있었던 마게도냐 교회도 자발적 관대함을 보여주었는데, 하물며(칼 와호메르 논리), 풍성함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는 얼마나 더 큰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6. 마게도냐 교회들(빌립보 교회/데살로니가 교회)은 어려운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관대한 연보’를 할 수 있었을까?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힘들면, 마음이 좁아지는 법이다. 자기가 힘들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십상이고, 자기 살 궁리만 하는 법이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바울은 지금 마게도냐 교회의 그러한 모습을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마게도냐가 교회들이 관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자족하기 自足, self-sufficiency’를 배웠기 때문이다. 자족이란 스스로 넉넉함을 느끼고,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서 뭔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중요한 기독교 영성이다.

 

7.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음에도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왜 가진 게 이렇게 없지? 나는 왜 이렇게 예쁘지 않지?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하지 않지? 나는 왜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지? 나는 왜 친구가 없지? 나는 왜 이렇게 외롭지?’ 등등, 전혀 그렇지 않은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군다.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인 빌립보 교회에 이런 말씀을 전한 적이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라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립보서 4:11-14).

 

8. 너무도 아름다운 말씀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고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칭찬하는 장면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처럼 ‘자족하기’를 배우고 실천했다는 뜻이다. ‘나 왜 이렇게 힘들지’, 하면서 신세 한탄하고 외로워 하고 주저 앉은 것이 아니라, 자족하기를 배우고 실천한 빌립보 교회는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연보를 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바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9.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이 관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착한 일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미 나는 주 안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풍성하기 때문에 그 풍성함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의 공급자이시고 우리들은 그 은혜를 받는 수급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은혜를 공급받았기 때문에,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가난한 자/육신이 가난한 자 또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공급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 신앙의 역설이다. 한 마디로 이거 아니겠는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렇게 외치는 것!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

 

10. 성경에는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를 외치며, 신앙의 역설을 보여준 신앙의 선조들이 즐비하다. 사무엘하 15, 16장에 보면, 다윗이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예루살렘 궁을 빠져나와 피난 길에 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가. 식솔들,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바후림이라는 곳을 지날 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나타나서 피난 길에 오른 다윗을 저주한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삼하 16:7-8).

 

11. 그때 시므이의 저주를 들은 다윗의 장수 아비새가 다윗 왕에게 “시므이의 목을 칠까요?”라고 물어본다. 다윗 왕은 화난 장수들을 말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0-12). 하나님께 마음을 둔 사람의 관대함은 이렇게 어려울 때 드러나는 법이다.

 

12.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를 외치면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관대한 마음을 보이는 이야기를 우리는 열왕기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로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이다. 그때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도 그 가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극심한 가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를 하나님께서는 많고도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사는 한 과부의 집으로 보내신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곳에 간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이렇게 청한다. “물 한 모금 주시오. 그리고 떡 한 조각 좀 주시오.” 극심한 가뭄에 물과 떡이 어디 있겠는가.

 

13. 엘리야의 청을 들은 사르밧 과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이 보다 비참하고 슬픈 장면이 어디 있는가. 극심한 가뭄 때문에 먹을 게 없어서, 이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자식과 함께 죽으려고 작정한 엄마의 최후.

 

14. 신앙의 역설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그렇게 최후의 죽음을 작정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4). 극심한 배고픔, 극심한 비참함 가운데서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그 순간 신앙을 택한다. 하나님께 마음을 둔 사르밧 과부의 관대함이 엘리야 선지자를 살렸을 뿐만 아니라 본인과 자식도 살렸다. 육신의 선택이 아닌 신앙의 선택은 늘 이렇게 우리가 예상치 못한 구원을 가져오는 법이다. 할렐루야!

 

15.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고린도 교회는 부요한 교회였다. 열악한 상황 속에 있었던 마게도냐 교회들도 자족하기를 배우고 자발적 관대함을 보여주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듯이, 하물며, 풍성함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는 얼마나 더 큰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풍요로운 고린도 교회도 마게도냐 교회들처럼 자족하기를 배워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16. 바울은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에 다시 한 번 디도를 보낸다. 바울에게 있어 디도는 어렵고 힘들 때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었다. 디도는 눈물의 편지를 들고 가서 오해와 음해 가운데 빠져서 삐딱하게 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잘못을 돌이킨 장본인이었다. 이제 바울은 디도에게 극심한 어려운 가운데 빠져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연보를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아서 오는 중요한 일을 맡긴다. 이렇게 신실한 주의 일꾼이 있다는 것은 교회의 희망이다. 우리 모두 디도처럼 신실한 주님의 일꾼이 되면 좋겠다.

 

17. 어려울 때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요, 우리가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상황이 더 좋은 사람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은혜요 믿음이다. 신앙/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신실함은 어려울 때 움츠러들지 않고 역설적인 관대함을 나타낸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우리 모두,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관대한 마음으로 선한 일 하기를 멈추지 말자. 마게도냐의 교회들처럼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더욱더 관대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의 역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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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대속이 아니라 참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한다. 이것은 구원이 대속적 구원이 아니라, 참여의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통상적으로 '대속적 구원'이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 또는 예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가르침인 것 같다. 크로산과 마커스 보그는 그들의 책에서 이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니다. 특별히 최초의 복음서라고 알려진 마가복음은 그 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마가복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는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책을 보면, 예수의 복음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교회의 정황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의 구원'에서 '대속의 구원'으로 신학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 후대에 씌어진 성경으로 갈수록 그 정황이 드러난다. 마가복음과 히브리서를 대조해보면 그 정황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상황이 박해에서 제국의 지지로 바뀌면서, 교회의 가르침은 '참여'보다는 '대속'쪽으로 구원론이 기울어진다. 그럴수밖에 없다. 권력을 거머쥔 교회가 대중들을 콘트롤 하기에는 '참여'보다는 '대속'이 훨씬훨씬 수월하고 '은혜스럽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부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대속의 교리는 대중들을 위협하기에 좋은 문구이다.

 

성만찬은 원래 그리스도와의 일치, 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를 뜻하는 것이었는데, 요즘 교회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대속교리가 낳은 병폐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는 이미 오해를 낳아,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믿음이란 원래 '참여'의 의미를 갖고 있지, 어떠한 특정한 교리를 믿거나, 특정한 인물(예수)을 그저 의지하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 도반으로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즉, 구원이란 그 길에 들어섬이지, 믿음으로 인해 어떤 상태나 공간으로의 이동(천국으로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철저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이 생각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 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대속이 아니라, 참여이다. 예수는 오늘도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당신의 일에 우리가 참여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인생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부활'에로의 여정이다. 그래서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죽음이 뻔히 보이는데, 두렵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위로를 얻으리.

 

나는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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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9. 21. 05:19

위로와 기쁨을 간구하는 기도

(고후 7:2-16)

 

주님,

한없이 낮은 자리에 처해있던 바울의 마음을

‘디도의 옴’이라는 일을 통해서 위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낙심(downhearted)’라는 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을까요.

애처롭습니다.

그러나 주님, 바울이 경험한 ‘낙심’은 그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님을 겸손히 섬길 때,

또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도 동일하게 하는 경험입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우리는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되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한없이 작아지고, 한없이 무력해지고, 한없이 슬퍼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감정을 견디기 힘들 때가 참 많습니다.

주님,

우리의 ‘낮은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께서 낙심하여 한없이 낮은 자리에 처해있던 바울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낮은 마음을 드릴 때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기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직 구원이 주님께 있사오니, 주여,

우리의 낮은 마음을 돌보아 주옵소서.

높고 높은 보좌를 떠나

낮고 낮은 곳에 임하셔서

낮은 자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21. 05:17

위로와 기쁨

(고린도후서 7:2-16)

 

1. “ㅡ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가 다섯 번 반복되는 시가 있다. 정지용의 시 ‘향수’이다. 1989년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가 듀엣으로 불러 유명해진 노래 ‘향수’의 원작이다. 한국 근대시인들(일제시대 때 활동했던 시인들) 중에는 윤동주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당시 한국 문학계에서 정지용은 아이돌이었다. 윤동주는 정지용을 너무 좋아해서 정지용의 첫 시집(1935년)을 구입하여(1936년) 필사하며 시작 연습을 했다. 정지용은 일본 유학파인데, 일본 교토에 있는 동지사(도시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하여 정지용은 모교인 휘문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았고, 해방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쳤다.

 

2. 연희전문을 다닐 당시 윤동주는 정지용의 집을 방문하곤 했다. 그리고 윤동주도 일본 유학의 꿈을 꾸고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 입교대학에 입학했다가 정지용이 다닌 동지사대학으로 옮겨서 거기에서 정지용처럼 영문학을 공부한다. 이처럼 윤동주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 중 하나는 정지용이다. 윤동주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정지용의 시는 그 당시 매우 모던했다(새로웠다). 그의 시 ‘향수’가 발표된 시기는 1927년 3월이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 정지용의 시는 그야말로 한국 근대문학의 기적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ㅡ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3. 인간에게 경험이란 존재를 꽃피우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인간은 그 인격을 형성한다. 정지용에게 ‘고향’에 대한 경험은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된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같은 고향이지만 누군가에겐 ‘꿈에서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곳’일 수 있다. 고향에 대하여 무슨 경험을 가지고 있는 지에 따라서 그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좋은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이 곧 생각의 틀과 그 사람의 인격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4.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은 ‘위로의 하나님’이다. 1장에서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장 3-4절). 그 이후 계속해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기억하고 찬양하면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삶(부요케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다.

 

5. 수련회를 연다면 공동체 활동 시간에 가장 묻고 싶은 질문 중 하나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한 단어로 표현해 보시고 왜 그런지, 무슨 경험 때문에 그런지 나누어 주세요.” 대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바울도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며 찬송하는 이유는 그가 사역을 하면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위로가 없었으면 바울도 그 사역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찬송이 그 당시에 있었다면, 바울이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 중 하나였을 것이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

 

6. 고린도후서에는 정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고린도후서를 읽으며 그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는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성경이 그렇다. 그 이면에는 어떤 긴장감이 배어 있다. 그 긴장감을 찾아내야만 성경을 읽을 때 재미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그 영화의 스토리가 지닌 긴장감을 찾아내고 유지해야만 그 영화가 재밌는 것과 마찬가지다.

 

7. 바울은 어느 순간 오해와 음해 때문에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관계가 소원해졌다. 고린도후서에 흐르는 긴장감은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 간의 소원해진 관계 때문은 아니다. 그 관계가 긴장감을 촉발시키기는 했지만, 그들의 긴장감은 그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 관계를 회복하고자 써서 보낸 바울의 ‘눈물의 편지’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뭔가 오해하고 복음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하여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다. 지금처럼 운송체계가 활발하지 못했던 그 당시 편지를 보내 놓으면 그에 대한 답장을 받는 것은 꽤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일었다. 편지를 보내 놓고 사도 바울은 마음을 조린다.

 

8.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는 그렇게 정다운 편지가 아니었다. 바울은 그 편지를 ‘담대하게’ 썼다고 했는데, 여기서 담대하게 썼다는 것은 ‘frank speech’라는 말로, 아주 솔직하게 상대방을 향한 마음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솔까말 편지 / 솔직히 까놓고 말한 편지).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서, 그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조목조목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편지를 써서 보낸 측에서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가감없이 다 써서 속이 시원할지는 몰라도, 그 편지를 받는 측에서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9. 바울은 ‘따끔하게 한 마디 한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내 놓고 후회했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8절).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편지 한 통 보내 놓고 노심초사하는 바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도 종종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는가? 어떠한 일을 해놓고 그 일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몰라서 밤잠을 설치며 전전긍긍하는 것 말이다.

 

10. 바울은 자신이 써서 디도 편에 고린도교회로 보낸 편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 아마도 바울은 그 편지로 인하여 자신과 고린도교회와의 관계가 완전히 뒤틀릴지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보내 놓고 “괜히 보낸 것 같다.”라며, 근심 속에서 하루하루 살았던 것 같다. 지금처럼 수일 내에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으니, 바울은 그 편지 사건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날들을 마음 졸였을까. 생각만 해도 애처롭다. 바울은 당연히 고린도교회에 보내 편지를 놓아두고 하나님께 매일같이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11.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은 ‘디도(Titus)’였다. 디도는 바울의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전했고, 디도는 그 편지를 받아 든 고린도교회의 반응을 바울에게 전해주었다. 고린도후서는 마치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인 바울과 고린도교회 간에 알콩달콩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디도를 만나기 위해서 드로아의 사역을 포기하고 마케도냐로 건너가서 빌립보에 이르러 디도를 만나게 되는데, 디도가 가져온 소식은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12. 바울은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바울이 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들어보자.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바울은 말한다. 사역을 하면서 여러가지 어려운 일이 있어서 바깥으로는 사람들과 여러 다툼이 있었고, 심정적으로는 마음이 많이 두려웠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바울은 ‘낙심(downhearted)’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6절). 바울이 자신의 ‘낙심’을 표현하기 위해 쓴 헬라어는 ‘타페이노스’이다. 이는 낮은, 가난한, 겸손한’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사역하면서 어려움을 겪었고, 자신의 질병과 디도에 대한 염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 보내 놓은 편지에 대한 걱정 등으로 인하여 한없이 ‘낮은 자리’에 있었다. 바울은 그러한 상황을 ‘낙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3. 낮은 자리에 처한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위로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병에 걸렸을 때, 가족 중 누가 아플 때(특별히 자식이 아프면),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가족의 불화를 경험할 때, 직장 문제, 인간 관계의 문제, 하고자 하는 일이 제대로 잘 안 될 때, 등등 우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된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낮은 자리’에 있었다고 고백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낙심(낮은 자리에 처하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까. 정말 애처로운 모습이다.

 

14. 그런데, 본문에 흐르는 기류는 단순히 ‘낙심’이 아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낙심’이 아니라, 위로와 기쁨이다. 그러나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6-7절). ‘낮은 자리에 처해 있던’ 바울의 상황에 반전을 일으킨 사건은 ‘디도의 옴’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낮은 자리에 처해 있던’ 바울을 위로하셨는데, 그 방법은 ‘디오의 옴(by coming of Titus)였다. 바울에게 ‘디오의 옴’은 그냥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의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15. 디도는 참으로 기쁜 소식을 들고 왔다.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 놓고 노심초사하고 있던 바울에게 디도는 참으로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고서, (그 편지는 결코 friendly한 편지가 아니었다),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켰다는 소식이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써서 보낸 편지를 받아들고 근심했을(마음 찔렸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칭찬하며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10절).

 

15. 이것은 참으로 따스한 고백이다.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내 놓고,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하여 후회하면서 마음을 쓸어내리고 숱한 날을 가슴 조리며 기도했을 바울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지금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편지에 함께 하시고, 그 편지를 읽은 고린도교회 성들과도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다는 고백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한 근심이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한 근심은 세상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 하나님 안에서 한 근심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좋은 결과, 좋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고백인 것이다. (할렐루야!)

 

16. 지금, 우리를 낙심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를 ‘낮은 자리에 처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낮은 자리에 처하는 일은 참 어렵다.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내 자신이 한없이 무력해지고, 내 자신이 한없이 슬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눈물 흘리는 것 외에는 마땅히 할 게 없다. 그러한 감정을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니까, 조금 힘을 냈으면 좋겠다. 나를 한없이 ‘낮은 자리에 처하게 만드는 바로 그 일’을 주님께 내어드리면 좋겠다. 그러면, 낮은 자의 하나님, 스스로가 낮은 자리에 처하신(케노시스)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에게도 ‘디오의 옴’과 같은 위로와 기쁨을 안겨주실 것이라 믿는다.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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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9. 17. 11:48

넓은 마음을 간구하는 기도

(고후 6:1-13)

 

주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신앙이, 특별히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좁아져 있는지를 보며

깜짝 놀라게 됩니다.

넓은 집, 큰 차를 타기는 좋아하면서

우리는 왜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좁은 데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일까요?

마음이 너무 좁기 때문에 오히려 외적으로 넓은 것만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육체로 세상을 바라본 우리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우리의 좁은 마음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 상처받은 공동체를 생각해 봅니다.

주님,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니,

회개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넓히라”는 통렬한 말씀을 받아들여,

좁은 마음으로 남을 쉽게 정죄하고, 남 탓 하고,

상대방의 진실한 마음과 수고를 알아보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벗어나

‘넓은 마음’ 안에서 용납하고 용서하고 화합을 이루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도 부요케 하고,

무엇보다 주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를 굳건하게 세워 나가기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 주소서.

온 우주가 담아낼 수 없는 넓은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17. 11:46

마음을 넓히라

(고린도후서 6:1-13)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1. 어떤 물건을 매뉴얼 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 보니, 그 물건이 가진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거나, 사용하다 잘못해서 고장나게 하고, 또는 매뉴얼대로 사용하지 않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좋은 음식도 적당히 먹어야지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원장님한테 배운 사실 한 가지가 있는데, 아이오다인(요오드)를 먹으면 갑상선 저하증을 치료할 수 있는데,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약을 먹을 때도 용량에 맞게, 의사의 지시를 따라서 먹는 게 중요하다. 안 그러면 병을 고치려다 더 큰 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2. 디모데후서에서 가르쳐 주고 있듯이, 성경은 신앙의 매뉴얼이다. 신앙도 매뉴얼을 따라 하지 않으면 탈이 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물건의 매뉴얼을 대충 보거나 아예 보지 않고 물건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듯,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매뉴얼에는 별로 관심 없고 그냥 자신의 감정을 기준 삼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신앙이 주는 유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참 안타까운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1절).

 

3. 신앙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 자체를 가져다 준다. 이 진리를 모르는 것도 결국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매순간 ‘구원’을 원한다. ‘힘들다. 어렵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낙심된다. 고통스럽다.’ 등등, 우리는 부정적인 환경과 기운 속에서 살아내려고 애쓰고 또 애쓰며 산다. 우리의 삶은 온통 구원의 갈망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누가 나 좀 구원해 줬으면 좋겠다!”

 

4.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절). 신앙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구원을 지금 당장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통로이다. 우리가 마음이 답답한 이유, 우리가 사는 게 힘든 이유, 우리가 마음이 강퍅해지는 이유, 우리가 마음을 나쁜 기운에 내어주는 이유는 지금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서 자꾸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물건만 잃어버리고, 정신만 깜빡깜빡 한 게 아니라, 신앙에도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5. 오늘 본문도 차근차근 읽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신앙의 매뉴얼에서 벗어나, 아주 한참 벗어나 변변치 못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거울로 보듯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고린도후서를 읽다 보면, 고린도교회와 사도 바울 일행 간의 감정선(tension)을 볼 수 있다. (바울 서신은 뭔가 일이 happen했고 그에 대하여 address 하는 내용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매우 엉뚱한 해석을 낳는다.) 그 둘 사이(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는 아주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 일단, 고린도교회가 바울과 그 일행을 보는 눈이 조금 삐딱하다. 다른 말로 해서,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마음을 열고 있지 못하다. 마음을 열고 있지 못하니까, 바울이 무슨 말을 해도 그의 말이 귀청만을 울릴 뿐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그러한 고린도교회의 강퍅한 마음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6.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대적하게 만드는 바울의 대적자들과는 달리 얼마나 복음을 위해서 수고했는지, 그들과는 달리 얼마나 순수하고 의로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자기 자랑(self-commendation/자기 자신을 뽐 내는 게 아니라, 수사법(레토릭)이다.)을 하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들로 추천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많은 인내와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감옥에 갇히는 것과 난동과 수고와 자지 못함과 배고픔 가운데 하나님의 일꾼들로 지냅니다. 또한 우리는 순결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과 모욕, 비난과 칭찬을 동시에 겪으며 일합니다”(4-8절/우리말 성경).

 

7.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이 신앙생활의 매뉴얼이라면, 이 매뉴얼에 비친 우리의 신앙은 말도 못하게 부족하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굉장히 독특하고 특별하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기복’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매뉴얼을 잘 따라서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을 ‘기복’의 수준으로 하락시킬 수 있다. (기복: 복만 받기 원하고 십자가가 없는 신앙)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매뉴얼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정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선물로 주시는 완전 다른 차원의 구원을 받는다.

 

8. 완전 다른 차원의 구원은 완전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하는데, 바울은 그 다른 차원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무명한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8-10절/우리말 성경).

 

9. 기독교 신앙, 그리스도인의 삶은 굉장히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절대자/신)으로부터 단순히 무엇인가를 제공받는 사람이 아니라(기복), 하나님과 모든 것을 나누기 때문이다(십자가).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신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친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친구란 그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 다르다. 세상에서는 반대의 일이 발생한다. 진실한 것 같으나 알고 보면 속이는 사람이었고, 유명한 사람 같았는데 보면 별 존재 아니고,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사람이고, 기뻐하는 것 같으나 실은 근심이 가득한 사람이고, 부유한 사람 같았으나 알고 보니 속이 텅 빈 사람이었고,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으나 빈털터리인 사람.

 

10. 바울은 자신의 겉모습과 실제 모습이 어떻게 다른 지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부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요즘 시대에 바울의 모습은 여러 모로 생각할 것이 많다. 특별히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에 의하면, 진정한 부자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정말 부자다. 그의 겉모습을 보면 매우 불쌍한 사람 같지만, 실제로 바울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재물을 축척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가긴 유.무형의 자산을 내어 놓은 삶 말이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다른 이를 부요케 하는 자가 진짜 부자라는 뜻이다.

 

11. 바울은 자신이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지를 밝히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고린도 사람들이여, 우리의 입이 여러분을 향해 열려 있으며 우리의 마음이 넓게 열려 있습니다”(11절/우리말 성경).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게 열렸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개 사랑하지 않으면 입을 닫는 법이다. 상대방하고 말을 섞기 싫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마음이 닫힌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따끔한 말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여러분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스스로 좁아진 것입니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이 말합니다. 여러분도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십시오”(12-13/우리말 성경).

 

12.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나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마음이 좁아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남 탓 하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을 돌아보고 그 마음을 넓게 가지십시오!”

여기서 ‘마음을 넓게 가지라’고 할 때, 마음은 영어로 ‘affections’라고 번역한다. 이건 굉장히 감정적인 용어이다. 우리가 대개 ‘애정, 속이 좁다 깊다’라는 표현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하는 말은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그 좁은 마음을, 그 좁은 이해력을 넓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13. 이런 속담이 있다.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 속이 좁으면 같이 못 산다.” 아무리 잘 생겼어도, 아무리 예뻐도, 아무리 몸/몸매가 좋아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마음 좁은 사람 하고는 못사는 법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말하면, 그냥 일반 심리학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복음은 심리학 이상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왜 그렇게 마음이 좁아졌을까? 바울은 5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무도 육체를 따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를 따라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않습니다”(고후 5:16/우리말 성경).

 

14.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마음이 좁아진 이유는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였다. 그들은 사람을 육체에 따라 판단했고, 그리스도도 육체에 따라 믿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할 때 아주 쉽게 육체에 따라, 겉모습에 따라, 세상적 기준에 따라 판단한다. 그러나 바울은 더 이상 그렇게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그는 사람을 판단할 때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게 아니라 복음을 따라 판단한다. 그의 판단 기준이 되는 복음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Christ has died for all)”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몇몇 사람들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판단할 때 그들의 외적인 모습(flesh)으로 판단하면 안 되고,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15. 우리가 이 복음을 잊어버리면, 우리도 얼마든지, 고린도교회 성도들처럼 마음이 좁아질 수 있다. 그리고 본인들의 마음이 스스로 그렇게 좁아진 것이면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 탓을 하기 쉬워진다. 그렇게 좁은 마음으로는, 자기 스스로의 삶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도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하는 바울의 질책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16.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좁은 마음으로 남을 쉽게 정죄하고, 남 탓 하기 십상이고, 상대방의 진실한 마음과 수고를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복음을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넓은 마음’ 안에서 용납하고 용서하고 화합을 이루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도 부요케 하고, 무엇보다 주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를 굳건하게 세워 나갈 것이다. 모든 것은 복음과 그 복음을 붙드는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을 좁게 가지지 말고, 마음을 넓히라. 너무도 따스하고 멋진 메시지다. “복음으로 마음을 넓히라”, 이것이 복음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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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9. 8. 01:28

갈망의 기도

 

주님,

주님을 기뻐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 성령을 따라 살기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처럼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사랑에 내어드리오니,

주여,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주님 품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와 함께 동행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위에 자기의 생명을 바쳐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8. 01:27

그리스도인의 갈망

(고린도후서 5:1-21)

 

시편 37편 4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참 따스한 말씀이다.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일수록 이 말씀이 마음에 깊이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산다. 마음의 소원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힘든 삶이지만, 우리가 그래도 이렇게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대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면 자신의 노력으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경쟁 또는 공정이라고 부른다. 우리 시대에 차별과 인간에 대한 무시(갑질)가 난무하는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성취된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반대로, 실의와 절망이 가득한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성취되지 못했을 때, 자신이 못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자책감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 통용되는 상식과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당연히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나,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결정적 요인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기뻐하라!’ 이 명령문을 앞에 놓아두고 잠시 묵상해 본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을까?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에서 이런 고백을 하면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풀어간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의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고백록, 선한용 역, 45쪽) 시편 기자가 말하는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당신을 향하여”와 같은 말이다. 기뻐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대상을 향한 ‘방향성’과 ‘욕망’을 동시에 표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올바른 것을 욕망하고 있는가?”

 

바울은 2절에서 이런 말을 한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간절히 사모하다’를 두 자로 줄이면 ‘갈망’이다. 바울의 갈망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 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준다. 바울이 아주 멋진 말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가 그토록 갈망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란 ‘부활’을 말한다. 사실 우리는 ‘부활’이라는 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가진 의미는 잘 알지 못한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즉 ‘부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은 종말의 때이다. 기독교인의 믿음과 소망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온전히 드러나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 종말은 파국이 아니라 안식이다.

 

바울은 육신의 생명을 벗어버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8절). 이것을 ‘죽고 싶다’라는 말로 잘못 오해하면 안 된다. 육신 안에 있는 인간 생명은 ‘탄식(신음하고 애통하는 것) 뿐이다. 그러한 탄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식’에 이르는 길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 즉,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죽음 같은 일이 주변에 널려 있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그 죽음을 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순례자(길 떠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가 그 갈망을 잃지 않도록 보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보증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히 하고,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례의 길을 걸으며 고난과 고통에 노출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능히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 여기서 ‘강권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쉬네코’인데, 이는 ‘통제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쉬네코’를 ‘control’로 번역한다.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대개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돈’이나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더 이상 돈이나 두려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의 삶을 내어드린다.

 

우리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와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구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의 의지와 상반되는 일을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자유로 무슨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귀찮아도, 하고싶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헌신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기 때문에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니스트리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윤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이 목적이다. 하나님의 생명(사랑)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고린도후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17절에 나온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새로운 삶의 체계를 따라 산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 새로운 피조물은 사람을 죽이는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성령으로 산다.

 

물을 길어 나르는 항아리가 있었다. 주인은 언제나 두 개의 물항아리를 물지게 양쪽에 걸어 먼 길을 오갔다. 그런데 어느 날 항아리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허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더니 왼쪽에 금이 가고 말았다. 주인이 열심히 물을 길어 항아리에 넘치게 담아도 집에 돌아와 보면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항아리를 계속 사용했다. 어느 늦은 봄 주인과 함께 물을 길으려고 가는 길에 그 깨진 항아리가 주인에게 부탁했다.

“주인님, 이제 저를 버리세요. 전 깨진 항아리라서 물이 다 새어 나가 버리니, 아무 쓸모가 없잖아요.” 그때 주인은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을 가리켰다.

“이 꽃들이 보이니? 이 꽃길이 너의 작품이란다.”

“저의 작품이라뇨? 무슨 뜻인가요?”
“너의 깨진 허리춤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새어 나간 것이 아니라, 꽃길에 물을 준 거란다. 너의 몸에 상처가 나던 그날 내가 길에 꽃씨를 심어 두었단다. 돌아오는 길에 네가 날마다 물을 주지 않았다면,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꽃길을 걷지 못했을 거야.”

(최병락, <부족함>에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어떠한 일을 행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사람’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행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함부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헛된 것에 욕망을 두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도록 내어드리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향한 평안을 잃어버린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얼마나 괴로운가. 나와 ‘저사람’에게서 부족함을 느끼거든, 기도하라.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인생은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다른 이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서 ‘꽃길’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의 갈망.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중세의 아가씨는 ‘면벌부’를 욕망했고, 현대의 아가씨는 ‘명품백’을 욕망한다. 하나는 과도한 종교적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과도한 세속적 욕망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지 배운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부활,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한다. 아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망이 바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한 주님의 약속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 두기 바란다. 여러분의 마음의 소원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아름답게 이루어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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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9. 1. 04:13

낙심하지 않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후 4:1-18)

 

주님,

우리는 낙심하기 참 쉬운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낙심하기 쉬운 시절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는 사도 바울을 통한 복음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봅니다.

자유와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에

세상은 우리더러 자기 자신과 돈에 집중하라고 다그치지만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 굴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부름을 받았고 우리는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고

돈에 이끌리는 인생이 아닙니다.

자유와 자본의 가치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길을 잃었으며

낙심하는 날이 많고 우울한 날이 많아졌습니다.

주님,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소서.

복음에 집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할 때 우리는 종말론적인 시간, 하나님의 시간을 살면서

우리는 낡아지는 것이 아니라 날로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며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복음을 굳게 붙들고 낙심할 겨를 없이

좋은 마음을 가지고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소명과 사명을 받은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1. 04:10

낙심하지 않으려면

(고린도후서 4:1-18)

 

1. 요즘엔 개인주의적 문화가 하도 강해서, ‘보냄을 받았다’라든지,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말이 굉장히 구시대적인 말로 들린다.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주체적으로 결정해서 사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보냄을 받거나, 부름을 받는 것에 대해서 요즘 사람들은 굉장한 거부감을 가진다. 그렇다 보니, 현대인들은 ‘낙심’하는 일도 많다. 본인이 생각했던 대로 일이 잘 안 풀리면, 이내 풀이 죽고 낙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못난 존재라는 자책감에 빠져 우울해 한다.

 

2. 요즘 한국 군대 문화를 보면 비인간적이었던 문화가 많이 바뀌고 군인들의 인권이 매우 존중 받는 군대문화가 정착되어 가는 것 같다. 참 좋은 일이다. 요즘 군인들에게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입대 했다’는 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 같다. 그래서 한국도 미국처럼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모든 것이 개인의 자유, 개인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심화되다 보니, 이제 한국도 전통적인 공동체성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

 

3. “우리 시대의 소명은 자유주의를 증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에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자유는 모든 인류에게 권리와 능력이 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이것은 2003년 9월 6일,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의 연설이다. 미국의 정치이념은 이른바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의 추구다. 이는 “미국의 자유주의가 표적으로 삼은 나라들의 민족주의, 종교를 이길 수 있다”는 이상에 근거한다. 자유주의는 민족주의나 종교를 넘어서 그러한 것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4. 우리가 사는 시대는 두 개의 ‘주의/ism’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자유주의(liberalism)와 자본주의(capitalism). 삶의 선택(조건)이 모두 자유와 자본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자기가 선택하되, 자본이 선택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미국은 군대를 가는 것도 모병제로서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것이고, 군대를 가면 물질적 보상이 크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다. 한국도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재 한국은 징병제이지만, 그래서 자신이 선택해서 군대를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 보니, 군인들의 정신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기의 선택이 아닌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서 군인이 된 것이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군대를 강제로 간다는 것은 굉장히 모순된 삶의 모습인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결혼하고 싶지 않은 배우자와 강제 결혼해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5.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모든 삶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보냄을 받은 삶’, ‘부르심을 받은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이는 기독교가 점점 우리 사회에서 매력을 잃어가는 이유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와 별로 썩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기독교는 개인의 선택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가, 자본(돈)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자유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쉽지 않다. 부대낌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6.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내가 선택해서, 내 마음대로,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안 나오는, 그런 모임이 아니다. 교회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자유주의적인 생각인 것이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교회(에클레시아)는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교회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이다. 부르신 이가 있고, 부름에 응답한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름을 받은 이들 간의 교제(fellowship)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은 서로를 보면서 이렇게 인사해야 한다. “당신도 부름을 받았습니까? 저도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우리 부름을 받고 여기에 왔으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끼리 잘 해봅시다!”

 

7. 교회는 기본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면서 동시에 보냄을 받은 이들의 모임이다. 부르신 이께서는 동시에 우리를 보내신다. 부르심은 소명(calling)이라고 하고, 보내심은 사명(sending out/mission)이라고 한다. 우리는 소명과 사명의 사람들이다. 교회의 역동성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교회에 모인 이들이 소명 받은 이들과 사명 받은 이들로 가득 찬다면 교회의 역동성은 아무도 못 말린다. 마치, 나라의 부름을 받고 왔다고 굳게 믿는 군인들이 가득한 군대와 마지 못해 군대에 끌려온 군인들이 가득한 군대의 사기가 다른 것과 같다.

 

8.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중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세속적인 ‘자유주의’ 이념과 다르다. 자유주의 이념을 따라사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 마치 ‘자유’에 예속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목격하고,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경험한다. 그 누구도 ‘나’를 건들 수 없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이 최고의 이념이고, 이것을 벗어나면 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 시대의 자유는 자신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 천명할 뿐이지,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공동체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9. 우리가 사는 시대에 사람들은 아주 쉽게 ‘낙심’할 수밖에 없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한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짊어지게 되는 것은 ‘낙심’ 뿐이다. 또한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사나워진다. ‘자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을 짓밟고 죽이는 일은 너무 쉽게 발생한다. 삶이 전쟁터 그 자체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보고 싶은 ‘섬’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경쟁’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요즘 사회는 우울한 사회다.

 

10. 고린도후서 4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구는 “낙심하지 아니하고”이다. 우리는 수도 없이 낙심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데, 바울은 어떻게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가? 사실 바울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고린도교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를 낙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죽을 고생을 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는데,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고린도교회는 복음을 위한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았다. 얼마나 낙심되었겠나.

 

11.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엥카케오’라고 하고, 영어로는 ‘lose heart’라고 한다. ‘엥카케오’는 ‘엔(~안에)’이라는 전치사와 ‘카코스(나쁜)’라는 낱말이 합해진 말인데, 이는,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만큼 살면서 두렵고 힘든 것도 없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마음만 늘 좋은 상태를 유지해도 어떠한 상황이 오든지 모든 것을 잘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잠언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그런데,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면,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우리의 인생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12. AP News의 보도에 의하면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이들이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런 기사였다.

 

UNICEF says aid concerns are growing in Afghanistan.

UN agency for children expects the humanitarian situation in the country to worsen due to a severe drought, the onset of winter, and the Coronavirus pandemic.

The agency says 10 million children in Afghanistan already survive off humanitarian assistance and around a million are expected to suffer from life-threatening malnutrition this year.

It says some 4.2 million children, including 2.2 million girls, are out of school.

 

정치적 소용돌이 외에, 극심한 가뭄과 겨울철 진입,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등의 삼중고로 인하여 1000만명의 아이들이 인도주의적 지원에 의해 연명하고 있고, 약 100만명의 아이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영양실조로 고통받을 것이고, 약 440만 명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13. 풍요로운 미국의 주민들과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주민들 중 누가 더 낙심할까? 우리도 낙심하고 그들도 낙심하겠지만, 낙심의 이유가 정말 다를 것이다. 우리는 마음대로 하고 살다가(자유주의) 삶에 제약이 오니 그렇지 못하는 것 때문에 낙심하고, 그들은 생명 자체가 너무 위협을 받아서 낙심할 것이다. 낙심의 차원이 좀 다르다. 아마도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우리들이 낙심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들으면 기가 막힐지 모르겠다. 낙심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미국에서는 약물(drug) 소비만 늘어가고,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은 그러한 것조차 없어 그냥 굳건하게 맨정신으로 참고 있을 것이다.

 

14. 우리가 복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낙심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를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선포는 단순히 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라고 선포할 수 있는 이유는 말 그대로 ‘복음’ 때문이다. 우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절).

 

15. 문맥에 따르면,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다. 바울은 그 보배가 질그릇 같은 자신들의 마음에 있다고 고백한다. 사실 여기에는 우리 시대가 최고의 가치로 삶고 있는 ‘개인(자유)’과 ‘자본’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우리 마음에 ‘나’나 ‘자본’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빛’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빛을 품고 있는 자들이 행하게 되는 것은 다음처럼 바울이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11절).

 

16.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용된 ‘죽음’이라는 헬라어는 완전히 죽은 상태인 ‘싸나토스’가 아니라 ‘죽어 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네크로시스’이다. 이 표현은 굉장히 중요한 표현인데, 이 표현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유대 당국에게 ‘넘겨주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에 넘겨졌다. 예수님의 죽음으로의 넘겨짐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구원 사건이 되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죽음에 넘겨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처럼, 자신들도 죽음에 넘겨져 생명을 주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7. 이것은 ‘자기(개인/자유)’와 ‘자본’으로 꽉 차 있는 요즘 우리들의 삶과 너무도 다른 삶이다. 자기 뜻대로 안 되고, 돈을 벌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게 되는 요즘 사람들의 삶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삶을 살기에, 사실 낙심할 겨를이 없다. 우리가 낙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삶’, 즉 복음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18. 여기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겉사람’과 ‘속사람’에 대한 이분법은 플라톤을 중심으로 한 헬라 철학/신앙이 말하고 있는 ‘영육 이원론’과는 다르다. 영육 이원론은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기 때문에 악한 육체를 벗어나 영의 세계로 가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겉사람’과 ‘속사람’의 구분은 시간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는냐의 문제이다.

 

19. 겉사람의 관점은 현세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현세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의 겉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게 끝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현세적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차원에서 바라볼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종말론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종말’은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을 이루는 시간이다. 그때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모든 것이 아름다움의 끝에 도달한다. 겉으로 보면(보이는 것에 의하면) 우리가 늙어가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 같지만, 속으로 보면(보이지 않는 것에 의하면) 우리는 그와 반대로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20. 우리는 왜 낙심하는가? 우리는 왜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가? 개인과자본에 집중하게 만드는 체제는 끊임없이 낙심을 만들어 내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래야 그러한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낙심하고 있으니,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고 있으니, 요즘 사람들의 삶이 기쁠 리 없다. 현대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을 때 기쁨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한동안 마음대로 소비를 못하다가 마음대로 소비하게 되는 현상을 ‘보복소비(revenge consumption)’라고 한다. 별말이 다 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용어이다.

21. 낙심하기 쉽고,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기 쉬운 이 시대에 낙심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복음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과 주님께 보냄을 받았다는 사명의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부르신 이와 보내신 이가 있기 때문에 일이 좀 우리의 마음처럼 잘 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낙심할 필요가 없다. 일이 잘 안 되면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이께서 속상해 하실 일이지, 우리가 속상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부르시고 보내신 이의 뜻대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죽음에 넘겨주는 삶을 성실하게 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을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이께서 돌봐주실 것이다. 이 얼마나 진정으로 자유한 삶인가.

 

22. 또한 답답한 현실만 바라보게 하는 이 땅의 시간에서 벗어나,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 즉 종말론적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중이 아니라 더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낙심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살아갈 것이다. 한 마디로, 낙심하지 않으려면, 부르심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 답게, 복음에 붙들려 살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낙심’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다시 복음을 믿음으로 굳게 붙들고, 나쁜 상태에 빠져 있는 마음을 좋은 상태로 구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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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