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1. 11. 29. 14:47

대림절 첫 번째 주일에 드리는 기도

(데살로니가전서 3:9-13)

 

우리를 구원하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주님,

부활의 소망을 품고

생명의 완성을 갈망하며

이 상실의 시대를 뚫고 지나갈 수 있는

믿음에 대하여 다시 묵상해 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된 시간을 살고 있어야 하는데

구원된 시간 바깥에 살며 자기 구원을 이루느라 힘들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을 처음 들었던 신앙의 선배들이 품었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신앙을 우리도 간절히 품기 원합니다.

주님은 오시고, 우리는 기다립니다.

이 믿음 안에서 사는 것만이 우리의 생명이 풍성해지는 길이요,

그 생명의 풍성함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무엇보다,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옵소서.

구원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생명의 완성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일,

대림절기를 지키는 일이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을 주는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소망을 잃은 자에게 소망을 주고

외로운 자에게 사랑을 주는

생명의 풍성함을 이미 누리고 나누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 곧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29. 14:45

하나님의 구원은 멈추지 않는다

(데살로니가전서 3:9-13)

 

1. 한국 기독교를 보면 용어 문제 때문에 교회일치운동이 참 어렵다. 하나님과 하느님, 교회와 성당, 세례와 침례, 바울과 바울로 등, 같은 것을 지칭하고 있는데도 용어가 다르다 보니 마치 존재가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영어의 Advent, 즉 대림절도 마찬가지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대림절과 대강절 그리고 강림절, 이렇게 세 가지 용어로 불리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도 한국 사회와 문화 속에 기독교가 충분히 녹아 들어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더 발전하고 성숙해지고 영향력을 가지려면, 용어의 일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해 본다.

 

2. 나는 Advent를 ‘대림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오심을 기다림’이라는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시는 것은 그리스도고, 기다리는 것은 우리들이다. ‘오심을 기다림’이란 그리스도와 우리들이 하나가 될 때 의미 있는 것이다. 오신다고 해도 기다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기다린다 해도 오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기다림은 하나이어야 한다. 그래서 기다림 자체가 믿음인 것이다.

 

3.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기다림은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는 신앙 중 가장 핵심적인 신앙이다. 신약성경 중 가장 먼저 쓰였다고 하는 데살로니가전서는 온통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처음 성경인 데살로니가전서가 그렇다는 뜻은 초대교회 사람들, 특별히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이 아직 살아 있던 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은 ‘종말신앙’이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세상의 파괴(파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4.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에서 종말신앙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자취를 감추었다기보다 덜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하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오심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른 말로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 역사가 진행되면서 종말이 매우 폭력적으로 묘사되었다는 데 있다. (폴라 구더, <기다림의 의미>, 41-42쪽) 마치 넷플릭스의 최신 드라마 <지옥(Hellbound)>에서처럼 말이다.

 

5. 그리고 요즘 대림절은 기다리는 거를 싫어하는, 아니 견디지 못하는 시대에서 거부당하고 있고, 기독교 내에서는 대림절이 성탄절에 잡아 먹힌 듯하다. 적어도 핸드폰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기다리는 일은 그 자체가 낭만이었는데, 요즘은 기다리는 것 자체가 짜증인 시대가 된 듯하다. 습작할 때 쓴 조잡한 시이지만, 옛날 친구들과 약속 장소를 잡고 기다리던 때를 생각하며 쓴 시도 있다. “말죽거리 국민은행 앞에서 만나”, 이런 문장이 들어가는 시다. 그때는 약속 시간 정하고, 약속 장소에 나가 친구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기다림’이 생활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기다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시대다. 그렇지 않은가. 약속 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짜증내는 시대. 인터넷이 조금만 느려도 짜증내는 시대.

 

6. 기록시기가 복음서보다 빠른 바울서신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안 나오고 온통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정하여 지키고 있지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즉 세상의 종말이 있을 때, 예수님처럼 본인들도 부활하게 될 것을 믿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다.

 

7. 부활이 무엇인가? 부활이 곧 구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부활은 생명의 완성이다. 생명의 완성(Fullness of Life). 우리는 이것을 깊이 있게 묵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완성을 갈망한다. 우리는 흔히 구원을 말할 때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반쯤 만 이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죄’를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정죄하여 죄책감이 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생명을 해치고 생명의 완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히 죄로부터의 구원(소극적 구원)이 아니라 생명의 완성(적극적 구원)이다. 이것을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신앙이 곧 죄책감을 갖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거기엔 기쁨이 없고 두려움만 있을 뿐이다. 나쁜 사람들은 그러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착취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서처럼 말이다. (2019년 7월 13일, <두 편의 영화와 한 번의 강의>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죄론의 이해’라는 특강을 하면서 말했던, 죄의 메커니즘이 그대로 드러나는 드라마다.)

 

8. 생명의 완성. 너무 가슴 떨리고, 벅차고, 행복한 일이다. 우리는 살면서 늘 뭔가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느낀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지(생명이 풍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의 생명이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고, 그 절대생명(완성된 생명)이 지금 오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9. 바울은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10절). 이것은 2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말씀이다. 우리는 정말 믿음이 부족하다. (지난 주 설교에서도 강조했지만) 믿음의 실종은 사랑의 실종을 반드시 불러온다. 대림절 신앙은 종말신앙인데, 기독교의 종말신앙은 사람들에게 많이 오해되고 있듯이 피비린내 나는 파멸과 파괴, 죽음이 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이미 생명의 완성을 이룬 것이다. 생명의 완성을 이룬 자는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랑의 일을 한다.

 

10.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보라.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12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과 그의 일행은 자신들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을 이루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이것을 ‘자족’이라고 부른다.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과 그 일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완성을 이루었기에 생명의 풍성함을 느꼈고, 그 풍성함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사랑했다.

 

11.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 먼저가 아니다. 믿음이 먼저다. 그들의 부족한 믿음이 먼저 보충되기를 원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이 굳건하게 갖게 되기를 바라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믿음이었다. 살아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하나 둘씩 그리스도의 오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 중 어떤 이들은 믿음을 잃어갔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랬는데, 2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더 심하겠는가.

 

12. 믿음을 잃어가는 일은 사랑을 잃어가는 일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지 않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구원이 마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자기를 구원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생명의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우리의 심장을 딱딱하게 만들 뿐이다.

 

13. 어떤 분이 이러한 농담을 하는 것을 봤다. “개고기를 먹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개와 사는 것이다.” 이게 왜 더 큰 문제일까? 개와 사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개와 살아야 할 만큼 외롭다는 것이 문제라는 뜻이다 (오강남 교수의 페북에서). ‘외롭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을 보면, 인간들의 상실감,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우울함, 그것을 좀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는 처절한 노력들이 잘 그려져 있다) 이렇게 사랑이 없어 외로운 삶을 사는 현대인들의 삶이 회복되려면, 무엇보다 우리의 믿음이 좀 더 굳건해져야 한다. 믿음의 상실은 사랑의 상실을 불어오니 때문이다. 거꾸로, 믿음의 굳건함은 사랑의 풍성함을 불러온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14. 하나님은 구원을 멈추지 않으신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생명의 완성을 이루기까지 쉬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증거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소망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대림절을 지킨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시작된 생명의 완성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삶,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뜻이다. 사랑이 없어 외로움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이길 힘은 믿음 밖에 없다. 구원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생명의 완성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일(대림절기를 지키는 일)은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을 주는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이다. 구원하기를, 생명의 완성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 우리네의 이 메마른 삶에 활기를 주는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는다. 하나님을 구원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좀 더 힘을 내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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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평등과 악]

 

평등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프랑스 혁명의 3대 가치 중 하나인 평등(egality)은 '법 앞에서의 평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법 앞에서의 평등은 무엇일까? 법은 가치 중립적일까? 법 자체가 평등하지 못하면 법 앞 에서의 평등이라는 평등(egality)는 무슨 가치를 지니는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 <Venom>을 봤다. 형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외계 생명체 Venom과 한 몸을 쓰는 주인공은 악의 무리와 맞선다. 아이들은 이 영화가 재밌다는데, 솔직히 나는 무엇이 재밌는지 모르겠다. 정신 사납기만 했다. 나는 마동석 나오는 이터널스가 더 재밌다고 생각해서 물어봤는데, 아이들은 이터널스보다 Venom이 재밌다 한다.

 

Venom에서 악당은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악당은 주인공의 방문 중 그와 다투다 우연히 Venom의 성분을 맛보게 되고, 그 안에서 Venom은 악이 된다. 그리고 다른 곳에 갇혀 있던 자신의 연인을 구하여 둘은 큰 힘을 발휘하며 세상을 휘저어 놓는다.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으로 구성된 악의 세력. 둘은 사랑의 키스를 나누고,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평등과 악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평등이란 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할리우드 영화에는 특징이 있다.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는 언제나 백인이다.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는 백인이다. 그리고 흑인이나 동양인들은 모두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의 조력자에 불과하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을 망치는 악한 인물 또한 백인이다. 악을 저지르는 인간은 늘 백인이 주인공이다. 또는 백인을 닮은 외계인이다.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가 백인이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악을 저지르는 악당은 늘 백인이라는 것이다.

 

착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없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일은 힘 있는 자만 저지를 수 있다. 역사에서 백인은 늘 힘 있는 자였다. 역사에서 백인이 저지른 악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에서 여자 흑인 악당이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서, 평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은연 중에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가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마음 불편해한다. 우리는 은연 중에 마이너리티는 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평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 자체가 차별이고, 우리의 의식이 얼마나 '평등'하지 않은 지 알 수 있다.

 

백인이 저지르는 악한 일은 참아내면서, 왜 흑인이나 아시아인 또는 장애인, 아니면 성적 소수자가 저지르는 악한 일은 왜 참아내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미 백인들의 스토리텔링 안에서 왜곡된 평등의 개념을 내면화시킨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히어로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악당이 누구인가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백인이 히어로로 등장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재미없다는 심리적 불만족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악당은 늘 백인인데, 악한 일은 마치 백인만 저지를 수 있는 권리인 것처럼, 악에 대한 평등의식 자체가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된 평등은 누구나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백인 또는 힘 있는 자만 악한 일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한, 우리는 영원히 평등할 수 없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11. 22. 14:02

믿음을 간구하는 기도

(요일 5:1-12)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는 그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여 인류는 좀 더 풍요로운 세상을 맞이한 것 같으나,

여전히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악이 우리를 덮고 있으며, 악의 희생자가 되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뿐인데,

우리는 믿음 없는 세상에 살고 있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주여,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을 회복하기 원하나이다.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사오니,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악을 선으로 이기게 하시고, 불안한 미래를 열어젖히게 하옵소서.

주여, 이 시간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믿음을 다시 한 번 고백하오니,

우리의 존재를 일 개의 피조물에서 주님의 자녀로 바꾸어주시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22. 13:59

믿음과 미래

(요한일서 5:1-12)

 

1. <레 미제라블>을 좋아하세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장 발장(Jean Valjean)’은 정말 유명인사죠. 아마 ‘레 미제라블’보다 ‘장 발장’이 더 유명하지 않나 싶네요. 이 소설은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성경의 ‘요한’을 매우 좋아했나봐요. 프랑스어로 ‘Jean(장)’은 영어의 ‘John(존)’이고, 한국어의 ‘요한’입니다.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 외에도, 프랑스에는 ‘장(Jean/John/요한)’이라는 이름(first name)을 가진, 유명인들이 정말 많거든요. 그 이름들을 굳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2. 작품은 어느 한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레 미제라블>이 1862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서양의 역사 중,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왜 중요하냐면, 역사에서 비로소 시민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이에요. 그 이전까지 만해도 인류의 역사는 권력을 모두 소유한 한 인간, 즉 왕이 나머지 사람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들이 거기에 반기를 들면서 한 인간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을 시민 각자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기반을 만듭니다. 몇 년 후, 1793년에 루이 16세는 시민들에 의하여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이건 굉장히 혁명적인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왕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일반 시민은 넘쳐 났어도, 시민에 의해 왕이 단두대에서 죽는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3. 그 이후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두 차례 더 일어났었는데, 짐작하다시피, 그 싸움은 권력을 지키려는 왕과 귀족들, 그들에게 다시는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싸움이었죠. 누가 이겼을까요? 시민들이 이겼습니다. 그 덕분에 역사는 ‘민주주의’ 시대를 엽니다. 왕, 한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인 시대가 열린 것이죠. 그런 점에서 1848년 2월 혁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1848년 이후, 세상은 왕정체체/또는 귀족체제를 벗어버리고, 민주주의 체제로 들어섭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현재 우리의 지도자(대통령)를 우리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뽑아준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것이고요.

 

4.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레 미제라블>은 그 제목이 보여주듯이 ‘비참한 사람들’에게 주목합니다. 왕정체제/귀족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체제가 왔다고 해서 세상이 평화롭고 정의롭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와 함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인간의 온갖 욕망이 함께 튀어나왔기 때문에, 사회는 엄청 더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졌죠. 1789년 프랑스 혁명을 통해 주조된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에서 자유(Liberty)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사적인 소유물을 가질 수 있는 권리’의 자유를 말한다. 즉, 사유재산의 개념이 이때 생겨난 것이죠. ‘평등(Egality)’도 ‘너랑 나랑 똑 같은 인간이야’라는 뜻이 아니라 ‘법 앞에서의 평등’을 말합니다.

 

5. 19세기 혁명들 이후 발전된 민주주의는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자유를 강조하는 자본주의(자유주의) 진영과 다른 하나는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진영이죠. 두 진영 모두 인간의 번영을 도모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사회주의 진영(공산주의)은 획일적인 평등을 강조하다가 인간성을 훼손시키며 몰락했고, 자유주의(자본주의) 진영은 사적인 소유를 강조하다가 인간성을 훼손시키며, 더 나아가 자연 자체를 훼손시키며 몰락해 가고 있죠. 우리는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자유가 사적 소유의 자유,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에만 머물고 말면, 결국 그 자유가 칼이 되어 인간을 겨누어 인간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터전인 자연까지도 해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8.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들을 부여잡고 시작한 민주주의가 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더 불행하게 만들었을까요? 요즘 우리 시대에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을 보세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못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일 하는 게 너무 힘들고, 너무 외로워하고, 무엇보다, 불안한 미래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움에 떨고 있죠. 뭔가 잘못되고, 뭔가 잃어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9. 우리가 위에서 자유와 평등 중 어느 것 하나를 강조하며 발전한 진영을 살펴보았는데,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프랑스 혁명의 가치 중 ‘박애’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본주의) 진영이나 평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 그 어느 곳에서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박애(fraternity)’는 ‘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박애라는 사랑은 공동체성을 말하죠. 자유주의, 사적 소유에 젖어 있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매우 사적인 차원에서만 말해지고 있어요. 사랑은 마치 사적인 일로,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죠. 이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자유가 박애를 잡아먹는 꼴이에요. 박애는 사적인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공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10.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바로 이 박애의 정신을 보여주고 생각하게 하고 되살려 줍니다. 혁명을 통해 왕정체제를 무너뜨리고 시민사회, 민주주의(공화주의)체제로 이양되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었던 것이죠. 그게 바로 박애라고 하는 공적 사랑입니다. 장 발장은 굶주리고 있는 일곱 조카를 위해서 빵을 훔쳤는데, 그 죄로 인하여, 법에 의해서(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니까), 19년간 옥살이를 합니다. 장 발장이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사회에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출소 후 냉랭한 마음을 가진 장 발장은 자신에게 하루 숙소를 제공한 미리엘 신부에게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은식기를 훔쳐서 나옵니다. 그런데, ‘비참한 자’가 은식기를 들고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장 발장을 데리고 미리엘 신부에게 가 대질 심문을 합니다. 그때, 미리엘 신부는 경찰에게 그 은식기는 자신이 선물로 준 거라고, 왜 은촛대는 그냥 놓고 갔냐고 오히려 은촛대까지 챙겨주죠.

 

11. 박애란 바로 이런 사랑을 가리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 사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랑, 더 나아가서 미리엘 신부가 장 발장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악을 오히려 선으로 갚는 사랑, 이러한 사랑이 박애인 것이죠. 박애는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기독교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박애의 정신이 자유의 정신과 동일하게 강조되었다면, 자유주의(자본주의)의 과도한 사적 소유의 욕망은 컨트롤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만약, 박애의 정신이 평등의 정신과 동일하게 강조되었다면, 평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의 과도한 획일화가 컨트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그리고 평등주의 진영에서도 박애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인간의 욕망과 인간성의 훼손만 난무할 뿐입니다.

 

12.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유럽은 유서 깊은 기독교 국가들이죠. 기독교의 흥망성쇠와 그 역사를 함께 한 나라들입니다. 19세기는 유럽의 기독교에도 정말 중요한 시기였는데, 왕정체제/귀족체제가 무너지면서 기독교도 함께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세속화’, 즉 하나님 없는 세상이 이때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왕/귀족에 대한 거부는 곧 기독교 신에 대한 거부와 그 맥락을 같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되고, 믿음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들의 힘(이성)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하죠. 19세기에 시작된 이러한 흐름은 현재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세상은 이제 ‘믿음’ 없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기독교의 잘못도 굉장히 크죠. 예수의 정신은 온데 간데없고, 왕과 귀족들처럼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했으니까요.

 

13. 저는 이 ‘믿음 없는 세상이 되었다’에 집중해 보고 싶습니다. 자유를 사적 소유로 생각하는 것이 깊어진 우리 시대에 ‘믿음’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믿음을 자기 자신의 신념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맙니다. 즉, 믿음도 사적 소유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것이죠. 자유의 개념을 자기 중심성(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의 개념으로 파악하다보니, 믿음도 그렇게 생각할 뿐이죠.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믿음’을 엄청나게 오해하고 훼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죠. 믿음은 개인의 신념, 즉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내 안에 오신 성령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14. 본문은 ‘믿음’에 대해서 엄청난 진리를 알려줍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기독교의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고백할 때, 우리 안에 성령이 있는 것이고, 그 성령으로 인하여 그 진리를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데만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존재를 바꿉니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적인 복음입니다. 창세기만 보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make)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애제자 요한은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피조물에 머물게 하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낳은 자(begotten)로 존재를 바꾸어 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도 동일하게 나오는 복음이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믿음이 단순히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꾸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죠.

 

16. 믿음이 우리의 존재를 단순한 일 개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같은 속성(본질)을 지닌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속성(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너무도 잘 하는 것이죠. 맞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데, 바로 사랑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죠.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 계명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쉽고 가볍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이 바로 사랑인데, 사랑의 본질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자에게 그 사랑을 행하는 것은 돌고래가 물에서 수영하는 것처럼 너무 쉬운 것이기 때문이죠.

 

17. 우리는 왜 사적 소유를 갈망하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자유’를 외치며 살면서, 그리고 법 앞에서는 평등한 거라고 외치면서 법적 평등을 보장해 달라고 외치며 살면서, 왜, 이렇게 못살겠다고 아우성 칠까요? 가진 게 많은데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고 싶다고 아우성대고, 가진 게 없어서 못살겠다고 아우성, 저 사람과 내가 평등하지 못한 것 같다고 아우성대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악한 세상을 만들고 만 있을까요? 제 짧은 생각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선가 말씀하셨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18. 믿음의 실종은 사랑의 실종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공동체성이 사라진 것, 박애가 사라진 것은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자유, 즉 개인의 소유도 중요하고, 법 앞에서의 평등도 중요하지만, 사랑이 없는 자유와 평등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 못하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성을 파괴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도서의 솔로몬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이 없으면 웃는 것은 '미친 것'이고, 즐거움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장 발장처럼 냉소적인 사람만 만들어낼 뿐입니다. 냉소적이었던 장 발장을 따스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 것은 바로 미리엘 신부의 ‘박애(사랑)’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걱정, 가족에 대한 걱정, 사업에 대한 걱정, 무엇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에게서 뭔가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우리는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고 아주 잘못된 선택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기도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해하며, 머물지 못하고 떠납니다.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한없이 약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도 안 들릴 것이고, 자기의 선택이 진리라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릴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악에 잡아 먹힐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더욱더 악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20.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열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사랑의 존재로 바뀐 사람이 그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게 하기 위하여, 사랑의 존재인 우리를 그냥 연약한 한 개의 피조물로 바꾸어 버리기 위하여,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미래를 닫아버리고, 현재의 삶에만 집중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듭니다. 그 두려움이 지금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못살겠다고 아우성 칩니다.

 

21. 누가복음 8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딸을 살려보고자 야이로는 염치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와 엎드려 간구합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 딸 좀 살려주세요!” 예수님은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 사이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고쳐주시죠. 그리고 길 가던 중,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 딸이 죽을까봐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야이로는 이 소식을 듣고 아마도 심장이 내려앉았겠죠.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 8:50).

 

22. 믿음을 개인의 신념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능력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줍니다. 우리의 존재를 일 개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 자체를 바꾸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의 일을 하게 합니다. 이 믿음의 역사 없이,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으며,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자녀의 일로, 가정의 일로, 직장의 일로,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십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그 믿음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이미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일 개의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믿음이 불안한 미래를 열어줄 것이고, 그 믿음이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여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멋진 인생을 살게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십시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11. 16. 02:05

사도적 복음을 간구하는 기도

(요일 4:1-6, 7-8, 11-12)

 

주님, 우리는 사도적 복음에 근거한 사도적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영지주의 복음의 유령이 우리 주위를 배회하며

때로는 우리를 미혹하여 사도적 복음에서 떠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 공동체에 그러한 일이 발생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사도적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공동체에게 확신시키고자

절절한 심정으로 편지를 써내려 갔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우리 주변의 동료 그리스도인 중에, 또는 우리 자신이

사도적 복음 위에 굳건하게 서 있지 못하고

사도적 복음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영지주의 복음의 유령에 미혹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분별하고 살피게 도와 주옵소서.

주님, 사도적 복음을 굳건하게 붙들고 싶습니다.

미혹의 영에 이끌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헛되이 만들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볍게 만드는 일에서 마음을 돌이켜

사도적 복음에 굳건하게 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몸으로 죽으시고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육체를 지니고 사는 모든 생명을 보듬어 보살피게 하시고,

무엇보다 우리의 과욕으로 인하여 망가진

이 아름다운 지구별을 주님이 아름답게 만드신 것처럼

아름답게 지켜내게 하옵소서.

말과 혀(영지적으로)로 사랑하지 말게 하시고

행함과 진실함(사도적으로)으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사람들을 미혹했던 영지주의 복음처럼

가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사도적 복음이 증언하는 것처럼

몸으로 진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셔서 몸으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16. 02:02

사도적 복음

(요한일서 4:1-6, 7-8 11-12)

  

1. 본문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잘 이해가 안 가거나, 아니면 너무 뻔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는 말씀을 보면서, 무슨 영들을 말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고, 진리의 영은 뭐고, 미혹의 영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7절 이하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요한의 이야기가 너무 뻔한 이야기라, 왜 이렇게 ‘사랑하라’고 계속 반복해서, 잔소리하듯이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2. 현재 21세기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가장 위협이 되는 사회적 요소는 무엇인가? 아마도, 자본주의(신자유주의), 반지성주의, 그리고 기후위기 등일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신앙에 위협이 되는 이유는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할 뿐 아니라, 인간의 삶(또는 인간성)을 형편없이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지금 ‘살기 힘들다’고 한숨을 내쉬게 하는 원인들이다. 현재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손쉽게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본문에서도 ‘분별’이라는 말을 통해 ‘영들을 분별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신앙을 교묘하게 위협하는 것들을 분별해야 한다.

 

3. 초대교회, 특별히 본문과 관련하여 요한일서의 회중들을 집요하게 괴롭힌 문제는 ‘영지주의’였다. 기독교 신앙이 생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3세기까지 200여년 동안 기독교 신앙을 집요하게 괴롭힌 것이 영지주의였다.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는 ‘적그리스도’는 영지주의에 현혹되어 요한 공동체를 떠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사도의 가르침 위에 세워졌다. 사도의 가르침이란 성육신 하신 하나님(말씀/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을 말한다. 2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고백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사도의 가르침이고, 사도적 복음이다. 사도들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도의 육체성,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 영지주의자들이 들어와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즉, 사도적 복음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을 가리켜 요한 사도는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사도적 교회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적인 방식으로 가르쳤다. 이것은 사도적 복음이 아니라 영지주의적 복음이었다.

 

5.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우습게, 또는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그 당시 많은 이들이 사도적 복음 대신 영지주의 복음에 미혹 당하여 사도적 교회를 떠나 영지주의 교회에 입교했다. 아마도 우리가 그 당시에 신앙생활을 했다면, 우리 중 대다수도 깜빡하는 사이에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미혹 당하여 사도적 교회 대신 영지주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되었을 지 모른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면, 성경에서 영지주의 복음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는 이토록 강력한 언어를 사용하여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6. 성경 이외의 초대교부들의 문서, 특별히 2세기와 3세기에 활동했던 교부들의 문서는 거의 모두 영지주의와 대결하는 사도적 복음이다. 그 중 영지주의와 집요한 대결을 통해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영지주의자들(영지주의 사상을 통해서 기독교를 해석했던 사람들)을 사도적 교회에서 몰아내는 일에 헌신했던 교부로 이레나이우스와 오리게네스가 유명하다. 이러한 교부들의 노고를 통해 교회는 사도적 복음을 지켜내고 교회에서 영지주의자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을 한다. 우리는 영지주의와 싸웠던 교부들의 저술들을 통해서 영지주의의 사상이 무엇이었는지, 영지주의 복음이 무엇이었는지, 그 요점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왜 영지주의와 한 판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영지주의 기독교의 문헌을 담고 있는 ‘나그함마디 문서’가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7. (영지주의를 모르면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사랑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구체성을 알지 못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영지주의는 기독교보다 더 오래된 사상체계다. 영지(gnosis)’는 ‘신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상체계이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인들에게 매력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므로, 영지주의와 같은 목표를 지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지(gnosis)는 기독교 사상과 똑같이 ‘계시(revelation/신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심/인간이 획득하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지식)’에 근거를 둔 지식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식은 인간의 두뇌를 쓰는 지식이 아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이 계시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영지는 구원하는 지식이다.

 

8. 영지주의의 사상체계의 근간은 플라톤주의,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있는데, 이들은 철저하게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한다. 이는 육신(물질세계)은 기본적으로 악(bad/evil)하고, 영혼(비물질세계)은 기본적으로 선(good/holy)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지란 신적인 지식(신이 계시로 준 지식)을 통해서 영혼이 악한 물질 세계, 특별히 몸(물질)을 벗어나서 본래의 선한 세계인 비물질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영지는 곧 구원인 것이다.

 

9. 이러한 영지주의의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기독교 신앙과 같이 공유하는 것 같으나,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왜곡하기도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나님(말씀/성자)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은 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 선하신 하나님이 악한 육신을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한다. 성육신을 부정하는 그들의 교리를 일컬어 ‘가현설(Docetics/ ~인 듯하다, 혹은 ~인 것처럼 보이다라는 뜻의 헬라어 ‘도케스’로부터 유래)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육신을 입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10. 영지주의의 이러한 생각은 마치 이 세상에 하나님이 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구약의 창조의 하나님과 신약의 구원의 하나님, 이렇게 두 개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그래서 영지주의 교회에서는 구약의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 저급한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이 악한 물질 세계를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기독교 경전에서 제외시켰다. 이들에게 성경은 오직 신약성경 외에는 없다. 신약성경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만이 선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11. 영지주의 교회의 이러한 도전은 기독교 윤리 영역에서도 도전을 불러왔다. 영지주의 교회는 두 가지 윤리 영역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는 엄격한 금욕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육신, 또는 물질은 악한 것이므로, 육신의 일을 최대한 억압하거나(식욕, 성욕 등의 기본적인 인간의 육신이 가지는 욕구), 물질적인 것과 최대한 관계를 맺지 말하야 한다는 것이다. 육신을 살찌우거나 건강하게 하기 위하여 좋은 것을 먹고 살찌우는 것을 죄라고 생각을 해서 금식을 밥 먹듯이 하고 육신에 계속해서 고통을 가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집착은 죄악이라 생각하여 가난한 삶을 추구했다. 어떻게 보면 매우 경건한 것 같으나, 그들의 근본적인 생각, 육신(물질)은 부정한 것, 악한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발생한 윤리이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는 이들의 이러한 극단적인, 엄격한 금욕주의를 인정할 수 없었다.

 

12. 영지주의 교회가 빠지게 되는 다른 하나의 윤리 영역은 반율법주의였다. 이것은 엄격한 금욕주의와 반대되는 생각인데, 물질은 영혼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영지를 통하여 이미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물질(육체, 몸)과의 관계가 어떠하든 구원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윤리적 방종을 낳기 쉬웠고, 다른 사람의 육신(육체, 몸)을 무책임하게 취급하고, 아무렇게나 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사람의 신체적 아픔에 무관심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육신(몸)에 폭력을 가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본인은 이미 영지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13. 사도적 교회(요한 공동체/요한일서 교회)는 이러한 영지주의 교회의 가르침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육체로 오신)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2-3절). 즉,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영들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지의 영과 사도적 복음이 말하고 있는 진리의 영, 즉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영은 미혹의 영이고,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14. 그렇다면, 우리는 비로소 왜 사도 요한이 사도적 복음에 근거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철저한 육체성을 전제로 한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다. 육체성에 대한 긍정이 없으면(육체/육신/물질을 선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에 머물 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말과 혀로, 가현적으로 한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실제로 육체가 달리고 죽은, 육체성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육체성의 사랑이어야 한다.

 

15. 그러나 생각해 보라. 육체성을 부인하여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반율법주의에 빠지면,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가? 다른 형제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에게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육체가 굶어 죽어가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그들에게 밥을 주기는커녕 굶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게 사랑인가? 어떤 이가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데, 그렇게 육신이 추위에 벌벌 떠는 것은 너의 영혼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히려 악한 육체에 벌 주고 있는 좋은 일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따스한 옷을 제공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6. 또한 어떠한 형제가 자신은 영지에 의해서 이미 구원받아서, 자신의 육신은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고 자살을 하거나 자해를 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육신으로 방종한 삶을 산다면, 또한 다른 이들의 육신에 해를 가하고 있다면, 그를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 사랑인가? 부모를 돌보지 않고, 가정을 돌보지 않고, 형제자매를 돌보지 않고, 그냥 남몰라라 사는 것(육체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영지의 의해서 구원받은 증거라고 자부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고, 가정 내팽개치고, 사회적 관계 다 끊고, 주님만을 위해 산다고 교회가 좋사오니 교회에 초막을 짓고 살아가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7. 요한일서에서 요한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이렇게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 영지주의 교회에서 마치 그것이 복음인양 전한 것에 대한 철저한 반대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셨으니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할 때 이 마땅한 사랑은 육체성의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은 가짜로, 마치 죽은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게 아니라, 하나님은 실제로 육체성을 가지고 육체의 고통을 오롯이 겪으면서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바로 그 육체성의 사랑으로 우리를 십자가 위에서 구원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적 복음이다.

 

18. 사도적 교회에서 쫓겨난 영지주의적 복음은 지난 2천년 동안 유령처럼 기독교 신앙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요즘, 21세기에서 보자면 대표적으로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기초한 소비주의와 그 때문에 발생한 기후위기(지구에 대한 파괴)를 남몰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육체성(물질성)을 거룩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도적 복음에 따라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우리의 과욕과 불의의 때문에 망가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이 창조세계가 어떻게 되든,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이 땅에 있는 동안 그냥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 자체가 사도적 복음에서 떠나 영지주의 복음에 근거하여, 또는 영지주의의 유령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른 말로, 사도적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니라 영지주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21세기의 모든 교회들은 회개해야 할 것이다.

 

19.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영지주의 복음에서 떠나 사도적 복음을 생각해야 하는 시절을 살고 있다. 영지주의 복음으로부터 사도적 복음을 지켜내기 위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가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육체성을 지니고 죽으셔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주님처럼 육체성의 사랑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체와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사회와 우리의 지구를 ‘말과 혀’(영지적)로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사도적)으로 지켜나가는 것이 사도적 교회의 사랑이다. 우리는 사도적 복음을 붙들고 사도적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영지주의의 유령에 미혹되어 영지주의 교회에 다니는 적그리스도인가. 분별하라.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11. 12. 10:23

기억하고 사랑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일 3:11-24)

 

우리를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신 주님,

그래서 우리에게 단 한 가지의 계명(헌법)을 주신 주님,

그 계명에 따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사랑은 감정을 훨씬 넘어선

신앙의 문제인 것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사랑은 사적 감정이 아니라 공적 섬김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세상 나라의 헌법을 지키느라 온 힘을 다하는 우리들,

아들의 나라의 헌법을 지키느라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고백하오니,

주여,

그 사랑이 선포되고 주어지는 예배의 자리를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예배의 자리에서 받는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사랑의 화신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고

우리가 세상에서 다른 법으로 살아가지 않고

사랑의 법으로 살아가기 때문이게 하옵소서.

언제나,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리스도의 사랑을 먼저 기억하게 하시고,

그 기억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사랑으로

진실하게 행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우리에게 행함과 진실함으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12. 10:21

사랑이 뭐길래

(요한일서 3:11-24)
 

1. 사랑이 뭘까? 사랑이 뭔지 묻는 일은 어찌보면 낭만적인 것 같고 한가한 사람들의 사색 같지만, 사랑에 대해서 묻는 것만큼 인생과 신앙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물으면 우선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생각부터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감정적인 차원(사적인 차원)에 머문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할 때, 육체의 접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말할 때 ‘에로스’에 대하여 떠올린다.

 

2. 우리가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일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8).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 더불어서 우리는 아가서를 떠올리며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아름다운 사랑을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을 가장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성경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 부르기도 한다.

 

3.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세우실 때, 친형제 사이였던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 3:17).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은 좀 더 쉬운 말로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 다르지만, 우리가 만약 대면하여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만났다면, 그 중에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가장 친근감을 느꼈을 것이다. 둘은 성격이 화끈(시원시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화끈하게 살았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열 두 제자 중 가장 먼저 죽은 사람은 야고보(James)였다. 화끈하게 복음을 전하다 화끈하게 죽었다.

 

4. 요한은 보통 예수님의 ‘애제자’로 불린다. 예수님이 요한을 편애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야곱이 열 두 아들 중 요셉을 편애했듯이, 예수님도 요한을 편애했다. 이것을 나쁘게 볼 필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왠지 좋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다. 예수님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은 요한의 평생 자랑거리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줄곧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the beloved disciple)’라고 칭했다. 요한복음에 이 표현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요 13:23, 19:26, 20:2, 21:7, 21:20).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면서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신다.

 

5. 사람이 죽을 때 하는 세 마디의 말이 있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또한 사람은 치매가 걸리면 자기 인생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이나 가장 좋았던 기억에 자기 자신을 고정시키기도 한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노년의 요한은 아주 약해지고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교회 모임에 들것에 실려 왔다고 한다. 그때 모임에서 요한은 언제나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을 계속하여 속삭이곤 했다고 한다. 그의 인생 가운데 ‘사랑’이 얼마나 강력하게 그의 삶을 지배했으면 죽어가는 상황 가운데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계속했을까.

 

6.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사랑’의 성격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적인 사랑/또는 사적인 사랑’이 아닌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11절).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사랑은 ‘감정/감성적 용어’라기보다 ‘신학적 용어’라는 것이다. 성경의 사랑은 그냥 인간의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랑’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것을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감정놀이가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소식, 즉 복음과 관련된 것이다.

 

7.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사망(죽음/악)에서 생명(선)으로 옮겨졌다는 선포이다. 이것을 골로새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예수)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우리는 흑암의 세상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갔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죽음에 있지 않고 생명에 있다는 증거, 우리가 흑암의 나라(악한 세상)에 있지 않고 아들의 나라에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처럼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다.

 

8. 나는 ‘사랑’만이 모든 것의 자격(qualifications)이 되는 이 아들의 나라, 생명의 나라가 너무 좋다. 그 나라에서 살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쓴 정현종 시인처럼 나는 이렇게 쓰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아들의 나라가 있다. 그 나라에 가고 싶다.” 우리는 사랑 외에, 이런 저런 자격을 갖추느라 너무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 자기계발하느라 사랑할 시간도 없다. 무엇을 위해,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생명을 낭비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9.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의무라는 게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국민의 4대 의무가 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가 그것이다. 이것은 헌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에서 사는 한 누구든지 지켜야 하는 의무이다. 이 의무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이것이 감정의 문제였다면, 군대를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가기 싫은 사람은 안 가도 될 것이다. 세금을 내고 싶은 사람은 내고 내기 싫은 사람은 안 내도 될 것이다. 교육을 받고 싶은 사람은 받고 받기 싫은 사람은 안 받아도 될 것이다. 일하고 싶은 사람은 일 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해도 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했다고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10. 그러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4대 의무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우리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군대 가는 문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세금을 내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교육도 근로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더불어 사회적 왕따를 당한다. 병역문제, 납세문제, 교육문제, 근로문제 등은,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뜨거운 감자다. 이 네 가지의 의무는 그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의 표지이다. 그래서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 의무를 반드시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그는 공동체의 정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4대 의무는 사적 영역에 있는 게 아니라 공적 영역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1. 요한 공동체(교회)의 자기 이해는 무엇일까? 위에서 말했듯이,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들의 나라로, 생명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그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자매들을 돌봤다. 또한 처음부터 들은 소식(복음)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듯이, 그들도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 그들은 그것을 감정에 근거해서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소식, 즉, 복음에 근거해서 행했다. 그들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신앙생활을 사적으로 하지 않고 공적으로 했다는 뜻이다.

 

12.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까? 그렇게 사랑을 행하는 것이 아들의 나라의 ‘헌법’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23-24절). 아들의 나라에는 헌법이 한 가지 있는데, 그 헌법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이다. 전혀 복잡하지 않다. 많은 헌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 한 가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헌법이다.

 

13. 우리는 공부 많이 한 사람, 또는 공부 잘 하는 사람이 좋은 대학에 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스펙이 좋은 사람이 연봉 많이 주는 직장에 들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돈 많은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 많이 한 사람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얻고 돈 많이 벌고 오래 살고 가장 행복하면 그리고, 죽어서도 천국가는 게 보장되면, 아마도 서로 사랑하느라 혈안일 것이다.

 

14. 실제로 중세시대 때 이러한 비슷한 생각이 유행했었다. 중세인들은 사후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죽으면 천국 가는 것에 대한 큰 열망이 있었다. 즉, 구원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그러한 중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공덕(merit)’에 대한 신학이었다. 공덕을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죽은 뒤에 천국 가는 것, 즉 구원받는 일이 넉넉히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쌓은 공덕으로 공덕을 쌓지 못하고 죽어 연옥에 있는 일가족도 대신 구원할 수 있었다. 공덕을 쌓는 방법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성인의 유물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돈이 있었기에 성인의 유물을 많이 모았다. 또 한 가지, 가난한 자들(거지)에게 은혜를 베풀면 공덕을 쌓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가난한 자들(거지들)은 매우 큰 자부심이 있었다. 자신들의 가난 덕분에 사람들이 공덕을 쌓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감사성찬례(미사)에 참여하여 성찬례(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를 많이 받을수록 공덕이 많이 쌓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곳의 교회에서 미사가 끝난 뒤 다른 교회로 달려가 그곳에서 또 한 차례의 성찬례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면벌부를 사는 것이었다. 면벌부를 사면 공덕을 쌓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것은 연옥에 갇혀서 무서운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면벌부를 팔러 다니는 사제단(테첼)은 이런 문구를 가지고 다녔다. “금고에 넣은 동전이 짤랑거리면,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난다.”

 

15. 이 세상이 아들의 나라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그 외의 다른 기준에 의하여, 또는 나쁜 짓 많이 하는 사람이 오히려 잘 먹고 잘 살며 높은 자리에 오르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러한 악한 세상에 저항하며, 우리가 그러한 악한 나라, 어둠의 세상, 죽음의 나라를 떠나 의의 나라, 생명의 나라,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세상에 당당히 드러내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 스스로 생산해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부지런히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주셨다”는 복음은 그래서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중요(crucial)하다.

 

16.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또한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다른 말로, 기독교의 사랑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공적인 섬김이다. 마음 내키면 하고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아들의 나라의 헌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사랑은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내야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 사랑을 받아, 그저 나누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 기억(아남네시스)은 바로 예배에서 일어난다. 예배는 기억의 자리이다. 우리는 들리는 말씀(설교)을 통해, 그리고 보이는 말씀(성만찬)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 정신없이 살다가도 예배에 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을 선물로 받아, 세상에 나가서 정신차리고 ‘사랑’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반복한다.

 

17. 요한공동체에 참으로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는 진리를 거부하며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생겼고,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헌법)을 지키지 않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진리가 거절당하고 신앙의 공공성이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진리를 거부하고 신앙의 공공성을 무너뜨린 이들을 향하여 ‘적그리스도’ 그리고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 세상, 서로 사랑하지 않고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헤치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볼 때, 요한 공동체(교회)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였던 것이다.

 

18.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이 물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물음은 그치지 말아야할 물음이다. 우리는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가? 죽음의 나라/어둠의 나라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의 나라/아들의 나라에 살고 있는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훨씬 뛰어넘는 신앙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의 나라의 헌법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사적 감정이 아니라 공적 섬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이 헌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아들의 나라에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끄시는 삶의 신비이다.

 

19.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라.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들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아멘. 아멘.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11. 3. 09:03

하나님의 씨를 품고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일 3:1-12)

 

주님,

잃어버린 것을 되찾게 하시고

주어진 것을 잘 지키게 하옵소서.

막연한 신앙이 아니라 구체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신앙의 좋은 롤모델을 만나게 하옵소서.

또한 나이가 들어가고 신앙의 연수가 늘어가면서

내 자신이 후배 신앙이들에게 좋은 신앙의 롤모델로 성장해 나가게 하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씨를 품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는 사랑의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씨로 인하여 새롭게 태어난 우리들,

이제는 귀신의 모습, 마귀의 일, 악을 행하는,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의 옷을 입고

사랑의 일을 하는,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혹시 살다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고

낙심되고 절망에 처해지더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씨를 품고 있는 성인(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내 안에 이미 자라나고 있는 위대한 사랑의 역사를 보게 하셔서

그 사랑으로 인하여 다시 생명력 있는 삶으로 나아오도록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아 주옵소서.

죽음의 자리,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물리치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3. 09:00

마귀 심은 데 마귀 나고, 하나님 심은 데 하나님 난다

(요일 3:1-12)

 

1. 나는 개신교 목사이지만, 개신교가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과 분리되면서 본의 아니게 잃어버린 여러 가지 좋은 전통을 아쉬워하는 사람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현재 개신교에서 행하고 있는 두 개의 성례전(세례와 성만찬) 이외의 다른 다섯가지 전통(견진, 고해, 성직, 혼인, 병자) 그 중에서도 고해성사를 잃어버린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성인들(Saints)을 기리는 일이다. 성례전이 축소됨으로 인하여 거룩(구별됨)의 영역이 좁아진 것 같아 아쉽고, 성인들을 추모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신앙의 유산이 부정되는 것 같고 신앙의 모범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쉽다.

 

2. 종교개혁은 달력의 시간으로 1517년 10월 31일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종교개혁은 교회의 중요한 절기 중 하나였던 만성절 전야(Halloween/할로윈)에 시작된 일이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은 교회력 안에서 발생한 일이지, 그냥 달력 안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다. 교회력으로 11월 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이다. 중세 교회는 만성절 전 날, ‘Halloween’을 지켰다. 지금 우리가 크리스마스 전 날, 크리스마스 이브를 지키는 것과 같다. 크리스마스 당일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기쁨과 즐거움이 더 크듯이, 만성절 보다 만성절 전야(할로윈)에 기쁨과 즐거움이 더 컸다. 그 기쁨과 즐거움 안에서 종교개혁은 시작된 것이다.

 

3. 개신교 문화가 강한 미국에서 ‘할로윈’을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이제 할로윈은 기독교와 아무 상관없는 일반 문화가 된 듯하다. 한국에서도 할로윈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할로윈을 그저 무시무시한(spooky) 분장(costume)을 하고, 사탕 받으러 다니는 날 정로도 알고 소비할 뿐이다. 할로윈은 어느새 대목 장사의 날이 되어, 일 년 중 사람들의 소비가 가장 많은 날 중 하나로 자리 매김했다. 할로윈은 마치 자본주의의 자식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정말 안타까운 것이다. 할로윈은 무시무시한 분장을 하고 사탕 받는 날, 또는 엄청난 소비를 즐기는 날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에서 성인들(Saints)을 기리는 날이다. 그러면서 우리도 성인들처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4. 성경의 등장 인물들 외에 기독교 역사에는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정말 많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다 간 신앙의 선배들이 정말 많다. 그들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처럼 살과 피를 가지고 이 땅의 슬픔과 고통, 역사적 질곡 속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킨 생생한 신앙의 모델이다. 살면서 삶의 롤모델을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신앙생활 하면서 신앙의 롤모델을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구체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삶과 신앙의 롤모델을 만나는 일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5. 개신교인들은 신앙의 롤모델 같은 거 다 필요 없고, 예수만 닮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굉장히 은혜로운(복음적인) 말 같으나,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이처럼 모호한 말도 없다. 과정 없이 그냥 결론만 말하는 것 같다. 이는 마치 훌륭하게 되는 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훌륭한 사람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모, 또는 부모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 없이, 인간이 어떻게 혼자서 크며 인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좋은 선배들(성인들)을 잠시 멈추어서 생각해 보는 것, 그 선배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롤모델로 삼는 일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정말 유익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교회에서 직분(집사, 권사, 장로 등)을 받는 것도 교회의 일을 많이 하게 된다는 의미보다는 근본적으로 좋은 신앙의 모델로 성숙해져 간다는 의미가 깊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지만, 묵묵히 신앙의 자리를 지키며 후배 신앙인들에게 좋은 신앙의 롤모델로 성장해 가시라.)

 

6.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좋은 날인 ‘할로윈’을 세상에 빼앗겼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할로윈’을 할로윈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자체가 ‘만성절 전야제’라는 뜻인데, ‘할로윈’이 마치 세속화되고, 귀신에 물든 날인 것처럼 생각하여, ‘할로윈’이라 부르지 않고, ‘세인트 나잇(Saints Night)’이나 ‘할렐루야 데이’ 등으로 바꾸어서 부르며 할로윈을 개신교식으로 소비하려고 한다. 이것은 참 웃픈 일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의 좋은 전통을 우리가 소홀히 여기는 사이에 세상이 빼앗아 가서 돈 버는 일에 쓰고 있다. ‘할로윈’이라는 말이 너무 더럽혀져서 이제 그 용어를 쓰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7. 사실 그러한 기독교 용어가 또 있다. ‘신천지’. 요한계시록에는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장엄한 종말론적 비전이 선포되고 있다. ‘새하늘과 새땅’을 한자어로 하면 ‘신천지’이다. 그런데, 이 좋은 용어를 이단에게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신천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는 마치, 새하늘과 새땅을 빼앗긴 기분이 들게 한다. 우리가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소망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키지 않으니, 그것을 누군가가 빼앗아가 더럽혔다. 용어를 빼앗기는 일은 땅을 빼앗기는 일과 다르지 않다. 용어를 빼앗기면 우리는 그만큼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잃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동해와 독도 표기 문제/언어를 잃으면 삶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

 

8. 할로윈에 등장하는 온갖 무시무시한(spooky) 캐릭터들은 무엇일까? 만성절에 등장하는 온갖 더러운 귀신들(evil spirit)은 성인들(Saints)과 대조되는 모습을 지닌다. 귀신의 실체가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를 떠나, 귀신은 우리 인간의 보이지 않는 악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시무시(spooky)하고 어글리(ugly)한 외모를 가진 귀신(spirit)의 모습은 우리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죄로 가득한 지를 눈으로 보이게 보여주는 것이다. 만성절의 무시무시하고 어글리한 외모를 가진 귀신은 일종의 시청각 교육인 것이다.

 

9. 요한일서의 할아버지는 이 세상의 존재를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마귀에게 속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이고, 사랑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을 위해서 할아버지가 사용하는 용어는 ‘죄(하마르티아)’와 불법(아노미아)’이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선교사들이 했던 일 중 가장 힘든 일은 전도가 아니라 성경번역이었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귀가 따갑게 듣는 ‘죄’라는 용어는 기독교 용어가 아니라, 불교용어다. 선교사들이 불교 용어에 더 익숙했던 한국인(조선인)들에게 성경의 ‘하마르티아/영어의 sin’을 좀 더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서 택한 용어가 바로 ‘죄’이다.

 

10. 문제는 이 불교의 ‘죄’라는 용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을 다 담아내지 못할 뿐더러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죄’의 개념은 “도리(道理)에 반하는 행위, 계율을 어기는 행위, 또는 고의 과보(인과응보)를 불러올 악행”을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은 매우 관계적 개념이다. 한국의 전통 종교인 불교나 유교에서는 ‘신(하나님)’이라는 절대자의 개념을 상정하지 않고 죄에 대한 것을 논하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에서의 죄는 법정적 죄의 개념이 크다. 그러한 죄의 개념은 몇 해 전 한국에서 유행했던 <신과 함께>라는 영화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잘잘못을 따져 물어 천국과 지옥 행이 결정된다.

 

11. 기독교의 죄, 그리고 구원을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의 죄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빌려온 불교의 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무늬만 기독교인이고, 알맹이는 불교인인 것이다. 기독교의 죄 개념은 매우 관계적(relational)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자.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러 모리아 산으로 간다. 자식을 잡아죽이는 일을 법정적 개념으로 보면 그것은 명백한 죄이다.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아브라함은 지옥에 가야지 천국에 가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려 했던 행위를 통해서 오히려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는 온전히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12. 요한일서에서 등장하는 죄와 대조되는 용어는 ‘사랑’이다. 죄는 관계가 안 좋은 상태를 말하고, 사랑은 관계가 좋은 상태를 말한다. 죄는 관계 바깥에 있는 것을 말하고, 사랑은 관계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적그리스도는 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죄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의인이다. 요한일서는 두 가지 종류의 죄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마르티아’라고 불리는 죄로서 관계 안에서 짓는 잘못을 말하는데, 그것은 회개함으로 용서 받을 수 있는 죄를 말한다. 죄를 짓더라도 관계 안에서 짓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있다.

 

13. 그런데, 또 다른 죄의 표현인 ‘아노미아(불법)’는 좀 다르다. 이것은 아예 하나님과의 관계 바깥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아노미아를 저지르는 이들은 아예 하나님과의 관계 바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한다. 이런 자는 형제와의 관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즉 형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듯, 형제를 죽인다. 형제에게 악한 일을 행한다.

 

14. 요한일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요한 공동체를 괴롭혔던 두 가지 일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에서 떠난 이들이 생겨난 것(적그리스도)과 공동체의 일부 지체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마귀의 자녀)이었다. 이것은 2천 년 전 처음 교회인 요한 공동체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의 교회에서도 발생하는 일이다. 교회를 힘들게 하는 두 가지의 일,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신앙고백 위에 서 있지 못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기독교의 사랑은 감정을 포함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종말론적 신앙의 행위이다.). 즉, 신앙과 사랑은 두 개의 다른 일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일인데, 신앙과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는 늘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15. 요한 할아버지는 굉장히 재밌고 명쾌한 말씀을 하신다. 한 마디로, ‘마귀 심은 데 마귀 나고, 하나님 심은 데 하나님 난다’고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8-9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마귀 심은 데 마귀 나고, 하나님 심은 데 하나님이 나는 법이다.

 

16. 요한 할아버지는 ‘하나님의 씨’가 거하는 이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씨’는 ‘스페르마’라는 헬라어를 옮긴 것이다. 영어로는 보통 ‘seed(씨앗)’라고 번역을 하는데,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sperm(정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씨(스페르마)’이라는 표현 매우 강력하고 현실적인 표현이다. 부모의 생식기를 통해서 태어난 자녀들이 부모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부모를 닮은 것처럼, 하나님의 씨를 통해서 태어난 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씨를 품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랑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가 아니라, 즉 하나님의 씨를 품은 자가 아니라, 마귀의 씨를 품은 자가 되는 것이다.

 

17. 만성절에 등장하는 온갖 귀신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씨를 받아 다시 태어나기 전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무시무시하고 어글리한 귀신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으로 난 자들이기에 우리는 더 이상 귀신 같은 사람들(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즉 성인(Saints/거룩한 사람)이다. 성인들이 성인인 이유는 그들이 그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하기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인을 본받아, 귀신 옷을 입지 않는다. 우리는 거룩한 사랑의 옷을 입는다. 우리는 악을 행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을 행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씨를 우리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씨를 품고 사랑의 삶을 사는 것보다 생명력 넘치는 삶이 어디에 있는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