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와 신앙2012. 8. 2. 01:51

풍수지탄(風樹之嘆): 바람과 나무의 탄식이란 말 /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자식의 슬픔이란 뜻

 

공자가 자기의 뜻을 펴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던 어느 날, 몹시 슬피 울고 있는 고어(皐魚)라는 사람이 있어 우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저에게는 세가지 한()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부를 한답시고 집을 떠났다가 고향에 돌아가 보니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둘째는 저의 경륜을 받아들이려는 군주를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셋째는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와 사이가 멀어진 것입니다.' 고어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아무리 나무가 조용히 있고 싶어도 불어온 바람이 멎지 않으니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樹欲靜而風不止). 마찬가지로 자식이 효도를 다하려고 해도 그때까지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子欲養而親不待).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는 뵙지 못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저는 이제 이대로 서서 말라 죽으려고 합니다.' - 논어(論語) –

 

한국은 오랜 세월 유교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에 대한 생각이 남다릅니다. 어느 한 체계가 종교의 기능을 하려면 이론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성리학이 유교를 뒷받침 해주는 주된 이론입니다. 그것 때문에 유교는 한국에서 오랜 세월 종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죠. 유교가 종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가 유교의 가르침대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종교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항하거나 거부 할 수 없죠. 그 가르침을 따르던지 아니면 죽던지 둘 중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한국이 오랜 세월 유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은 이유는 왕정제도 때문입니다. 유교만큼 왕정제도를 잘 떠받쳐 주는 사상도 드뭅니다. 왕정제도와 나란히 가는 가부장적인 문화를 지탱하기 위해서 유교는 금상첨화입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라는 가르침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과 깨우침을 준 스승과 낳아주신 아버지의 권위는 유교에 의해서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거기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자식의 슬픔은 단순히 후회와 한탄이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죄책입니다. 구원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아들은 효도를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 받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유교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철저하게 지키도록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구원이 조상의 돌보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옛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 또는 다른 종교나 샤머니즘에서 생각하는 구원은 기독교의 그것과 많이 다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존재론적이고 종말론적이지만, 대부분의 종교에서 또는 샤머니즘에서 생각하는 구원은 기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저 무병장수하면서 잘 먹고 잘 사는 정도이지요. 구원의 관심이 이 땅에서의 복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유교의 관점에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려면 조상의 도움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조상님들을 신처럼 잘 모실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기독교에서 말하는 의 개념은 이것과 매우 다릅니다. 십계명의 제 5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 그것은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그러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바로 아는 관점에서 부모의 공경이 필수적이라는 뜻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배우라는 겁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이긴 하나 신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자녀와 똑같이 하나님을 공경해야 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에게도 자녀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라고 가르칩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서라면 부모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가르침까지 주십니다. 물론 이는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살이, 윤리, 도덕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기독교인은 모두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고 마는 겁니다.

 

효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부모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에게 복 내려 주시는 존재여서가 아니라, 효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는 효도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고, 효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모님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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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2. 7. 11. 05:06

점입가경(漸入佳境): 경치나 문장, 사건이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됨

 

남경에 있던 승려들이 와관사(瓦棺寺)를 짓기로 했을 때, 돈이 모자라 헌금자를 모으기로 했으나 몇 달을 노력해도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초라해 보이는 20세의 청년이 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백만전을 내겠소. 그러니 절이 완공되거든 알려 주시오.' 절이 완공되자 그 청년은 불당의 벽에다 유마힐(維摩詰)의 불상을 그렸습니다. 뛰어난 필치로 얼마나 정교하게 그렸던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삽시간에 알려져 이를 보러 오는 이들의 보시가 금세 백만전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 청년이 바로고개지였습니다.

 

고개지(顧愷之)는 중국 동진시대 명화가로 서예의 왕희지와 함께 당시 예림의 쌍벽을 이뤘습니다. 그는 다재다능한 화가였으며 여기에다 독특한 인품으로 사안(謝安)은 그를 '천지개벽 이래 최고의 인물'이라고 했고,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삼절 (三絶:畵絶(화절). 才絶(재절). 痴絶(치절))이라고 불렀습니다. 痴絶(치절)은 그의 독특한 기행(奇行)과 유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사탕수수를 즐겨 먹었는데 늘 가느다란 가지부터 먼저 씹어 먹었습니다. 사실 사탕수수는 뿌리 부분으로 내려갈수록 단 맛이 더한 법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묻자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그야 점점 갈수록 단맛이 나기 때문이지(漸入佳境).'  - <진서(晉書) 고개지(顧愷之)> -

 

복음서의 저자들은 최고의 작가들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글에 담아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점입가경의 고수들입니다. 복음서를 한 번 보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1 1절부터 차근차근, 처음 본다는 생각을 가지고 읽어보십시오. 복음서 저자가 그려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숨죽여 따라가 보십시오. 그야말로 점입가경입니다.

 

복음서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했는가에 대한 일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증언하는,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눈물나는 클라이맥스가 있고, 기막힌 반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구나 생각하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눈물나는 클라이맥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고, 기막힌 반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것만큼 드라마틱한 드라마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드라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복음서의 아류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우리가 TV에서 보는 드라마는 이것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더 드라마틱하고 더 큰 반전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우리의 현실이라기 보다,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픽션에 불과합니다.

 

복음서는 그와 같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픽션이 아니고, 그렇다고 논픽션도 아니고, 그야말로 진리입니다. 픽션은 꾸며낸 이야기고, 논픽션은 우리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존재를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의 증언은 이 세상의 그 어느 드라마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러한 복음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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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신독(愼獨)”이라는 한자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거나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있는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 마음과 태도를 가리킵니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 즉 상제(上帝)와 귀신(鬼神)은 형상도 소리도 없는 존재이나 또한 강림하여 항상 인간들을 낱낱이 굽어보고 있으니,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아 암실(暗室)이나 혼자 있을 때에도 계신공구(恐懼)하는 것이 바로 ‘신독’인 것이다.”라고 신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신공구는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여 하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신독이라는 한자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표현해 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뿌리 내리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보거나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있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읽은 빌 하이벨스 목사님(시카고 윌로크릭 교회 담임 목사)의 책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에서도 신독의 정신이 드러나 있습니다. 나를 평가하는 타인의 시선이 가득하거나 내가 주목 받고 있는 자리에서는 최대한 고상하고 멋지고 훌륭한 모습을 애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보지 않는 가까운 관계, 누군가를 의식할 필요가 없는 일상에서는 우리 성품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인격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있을 때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때 나는 누구인가?”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나님 외에 나를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그 때에 드러나는 것이겠죠.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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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6. 23. 03:05

교룡득수(蛟龍得水): 교룡이 물을 얻는다는 말 / 좋은 기회를 얻는 것을 비유한다

 

북조 후위의 무제 때 양나라를 공격하려고 이충이 병사를 선발하는데, 낮은 계급의 양대안이란 사람이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충이 자신에게 별관심을 주지 않자 양대안은 자신의 재주를 보이겠다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말조차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빨리 달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충은 그의 재주를 보고는 감탄하며 그를 군주의 관병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양대안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으스대며 함께 지내던 동료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나는 교룡이 물을 얻은 것과 같이 됐다. 이제부터는 너희들과 같은 대열에 서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얼마 뒤 통군으로 승진했으며, 여러 싸움을 통해 공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 <북사(北史) 양대안전(楊大眼傳)> -

 

하루에 두 번 바닷길이 열린다는 신비의 섬 제부도. 기독교인이라면 거기에 가서 그 옛날 모세가 홍해를 가르던 성경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아직까지도 모세가 어떻게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켰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다가 갈라졌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여호수아서 3장에 기록된 요단 강물이 갈라진 일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법궤를 앞세워 요단강을 건넙니다. 법궤를 어깨에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강물을 밟자 강물이 멈춰 섰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그들이 앞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벌이게 될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징표로 삼았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요단 강물이 갈라진 사건은 절묘한 타이밍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봄철이 되면 요단강이 범람을 하는데 강한 물줄기 때문에 절벽이 규칙적으로 깎이고 일부는 떨어져 나가 일시적으로 강을 막는 둑이 형성되어 강물이 막히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라고 기록하고 있는 성경의 저자도 참으로 대단한 영성의 소유자입니다.

 

우리는 흔히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말합니다. 준비된 자가 되기까지 뼈를 깎는 노력이 없으면 그 모든 일이 허사가 됩니다. 어쩌면 기회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자신이 열심히 노력을 해서 기회를 얻어 위대한 일을 해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노력 때문이라고 자화자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력보다 더 중요한 건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당신의 선한 손으로 도와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좋은 기회를 얻을 때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나를 감추고 그분을 더 드러냅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일이 일어났을 때마다 그 일을 행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만이 높여지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주님의 뜻 가운데 있고, 그분의 섭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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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Thessalonians 5:18).” 이 말씀 속에 나타난 감사는 범상치 않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주문하고 있는데, 영어 성경을 보면 이는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단서가 따라 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결국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인 감사의 생활을 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어떻게 모든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게 될까요? 이것을 주문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관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예수님을 지칭할 때,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먼저고, 예수가 나중입니다. 이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인식할 때 부활의 관점에서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호칭이 따라 붙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부활은 이 세상의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종말론이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관한 일을 진술하는 것인데,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현재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감사의 이유보다 불평의 이유가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 끝 날의 관점(종말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에 힘입어,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지금의 모든 어려움과 고난, 심지어 죽음까지도 우리의 삶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그리스도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최후의 승리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때로는 넘어져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게 되고, 최후 승리는 우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뜻이기 때문에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보이기 때문에 저절로 되는 것이 감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므로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필연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6. 14. 00:35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 /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뜻

 

춘추시대 말엽, ()나라 헌공은 괵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통과국인 우나라 우공에게 통과허락을 요청했습니다. 우나라의 현인 궁지기(宮之寄)는 헌공의 속셈을 알고 우왕에게 이렇게 간언했습니다.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오라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수레의 짐받이 판자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괵나라와 우나라의 관계를 말한 것입니다. 결코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뇌물에 눈이 어두워진 우왕은 그럴리 없다고 듣지 않았습니다. 궁지기는 후환이 두려워 '우리나라는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가족과 함께 우나라를 떠났습니다. 진나라는 궁지기의 예견대로 그 해 말 괵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정복하고 우왕을 사로잡았습니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들이 즐비합니다. 긍극적으로는 음양의 조화로 그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순망치한한 관계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관계는 말씀과 기도의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 없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는 특별히 기독교에만 있는 의식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지니고 있는 의식입니다. 기도가 없는 종교는 종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샤머니즘조차도 기도 의식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인간이 절대적인 존재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의식인 셈이죠.

 

그렇다면 타종교의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말씀이라는 겁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드리지 않는 기도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건 종교의 보편적인 의식에 불과합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드리는 기도란 내 머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그리고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드리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한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기도는 비로소 나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 소원을 이루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거룩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있는 곳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주 만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존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마귀의 역사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기도해서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윤택해지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할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는 기도는 무엇을 이루어낼지 분명하게 압니다. 하나님은 참된 생명이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기도는 분명 생명을 일구어 낼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떼어놓지 마십시오. 서로 한 데 어울리게 하십시오. 생명이 피어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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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욕심은 평화를 깨뜨립니다. 내 마음의 평화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깃든 평화도 빼앗아 갑니다. 하박국서에 보면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표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2:5).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들의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욕심이 그들의 삶을 스올(지옥)로 만든다는 것이죠. 욕심은 나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습니다. 마음의 평안도 빼앗아 가고, 잠도 빼앗아 가고, 식욕도 빼앗아 갑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욕심 때문에 망한 인생이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아합 왕입니다. 자신의 궁전 가까이에 있던 나봇의 포도원이 탐났던 아합 왕은 그 포도원을 갖고 싶은 욕심에 안달이 나서 삶의 평안이 깨지고 맙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왕상 21:4). 이 모습을 본 왕비 이세벨은 남편 아합 왕의 욕심을 채워주고자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합니다. 이 사실을 안 엘리야 선지자는 욕심쟁이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 21:19). 이 예언대로 아합 왕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욕심이 낳은 비극입니다. 이처럼 욕심은 남을 망칠 뿐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의 삶도 망치고 맙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삶이 힘들어지고 삶의 평안이 사라지는 이유가 바로 이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욕심 때문에 망가진 인생, 빼앗긴 평안, 기도로 다시 회복시키고 찾아보십시오. 기도는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지니처럼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만능 해결사는 아닙니다만, 기도는 적어도 내 마음 속에 가득한 욕심을 버리게 해 줄 것입니다. 내 마음에 가득한 욕심만 비워내도, 웬만한 삶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꽃인 기도를 통해 무엇보다 욕심을 스올(지옥)로 보내십시오. 그러면 내 삶이 스올(지옥)로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평화롭게 살려면 욕심을 버리십시오.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6. 2. 00:19

사해형제(四海兄弟) : 사해 즉 천하의 모든 사람이 다 자기 형제이다

 

공자의 제자 사마우(司馬牛)의 형 환퇴는 잔인하고 무도하여 한때 공자를 죽이려고도 하였고 송나라에서 모반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도망갔습니다. 사마우는 슬퍼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있지만 나는 형제를 잃고 외톨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자 자하(子夏)가 이렇게 그를 위로했습니다. ‘죽고 사는 것, 그리고 부귀는 모두 하늘에 달려있다. 군자에게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다 형제다. 그러므로 군자는 형제가 없다고 해서 걱정하지는 않는다.' –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 –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한창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시며 완악한 유대인들의 마음을 향해 경고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그 사실을 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어리둥절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12:50). 

 

겉으로 보기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혈육을 부인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좋게 이해해 보려고 해도 별로 좋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정하시는 분이 어떻게 인류를 사랑한 구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절대로 당신의 가족을 홀대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슨 의미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가족의 범위를 우주적으로 넓히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 사랑을 외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의 가족 외에는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죠. 자기 가족만 챙기고 다른 사람들은 남몰라 하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포괄적입니다.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포괄적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익과 능력의 범위 내에서만 베풀 수 있는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 범위가 기껏해야 나를 벗어나 우리의 가족 정도밖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물론 그것도 굉장한 일이긴 합니다. 가족을 통해서 자기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교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족을 넘어 우주적으로 사랑을 베풀라고 요청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십자가 사랑은 가족 구원이 아니라 우주적인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구원하는 능력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러한 능력 가운데서 구원 받은 우리들은 우리의 사역의 범위를 우주적으로 넓힐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다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기준으로 형제자매의 범위를 설정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 모든 만물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형제자매의 범위를 정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의 형제자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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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서양 음악가 중 종교적인 색채를 가장 짙게 띤 선율을 빚어낸 사람이 바흐입니다. 바흐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천군 천사들에 둘러싸인 천국에 와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 중에서, “예수, 우리의 참된 소망(Jesus, Joy of Man’s Desiring)”이라는 곡은 기쁨의 절대적 경지를 표현하고 있는 명곡입니다. 지면에서 곡을 들려 드릴 수는 없고, 다만 여기에는 노랫말을 적어 봅니다.

 

참 기쁨과 지혜의 왕 사랑의 왕 구주 예수 / 빛의 근원이신 예수 우리 인도하소 / 육신 입은 주의 말씀 우리 삶에 참된 소망 / 주여 우릴 도우사 주 보좌로 이끄소서 / 들으라 평화의 찬미 우리 앞에 울린다 / 예수 안에 사는 사람 / 기쁨 충만하리라 / 순결함과 아름다움 거룩됨과 하늘 지혜 / 영원한 기쁨 예수 길이 우릴 이끄소서.”

 

선율이 아름다운 만큼 노랫말도 아름답습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시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면이라 선율을 들을 수 없는 것이 아쉽긴 합니다만, 선율과 노랫말이 이렇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곡은 흔치 않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바로크 음악의 진수를 볼 수 있고,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의 위대함을 볼 수 있고, 하늘과 맞닿아 있는 그의 영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위대한 음악가 바흐가 표현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기쁨입니다. 영어 표현을 우리 말로 풀어 다시 설명하면, 예수님은 인간이 몹시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루어 주시는 기쁨의 존재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바람은 물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쓸 그런 바람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그것을 깨닫고 있든지 못 깨닫고 있든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입니다. 인간의 내면 세계는 이것을 바라고 있지만, 인간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 소망을 이루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는 담을 허물고,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질 수 있도록 십자가의 보혈로 다리를 놓아주신 분입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우리 인간의 아버지로 내어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화해와 교제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기쁨입니다. 바흐의 아름다운 선율이 차마 다 표현하지 못하는 참된 기쁨입니다. 예수 안에 사는 사람, 기쁨 충만하리라!

 

 

Celtic Women이 부르는 예수, 우리의 참된 기쁨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iPeVIuRjUi4&feature=related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5. 26. 01:28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 /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다

 

공자는 자신의 도가 한 가지 원리로 꿰뚫어져 있다고 제자인 증자(曾子)에게 말했는데 증자는 그 한 가지 원리라는 것이 '()' 즉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과 '서()' 즉 자기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봐서 남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한편 다른 관점에서는 그 원리가 '()'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현대에 와서는 '초지일관(初志一貫)'이나 '일관(一貫)되다'에서 보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한 번에 끝까지'라는 뜻으로 변형되어 쓰이기도 합니다. -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 이인편(里仁篇)'

 

‘천자문(千字文)은 한자를 “하늘 천()에서부터 “어조사 야()까지 천 개의 한자를 익히기 쉽도록 잘 배열 해놓았습니다.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해서 '언재호야(焉哉乎也)'의 어조사로 끝나는데, 자연 현상부터 인륜 도덕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글귀를 수록하여 한문의 입문서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자문을 ‘일이관지’ 하는 원리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구약 39, 신약 27권 해서,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66권을 ‘일이관지’ 하고 있는 원리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인생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시작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 자라고 늙어 죽는 것에까지 걸쳐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을 ‘일이관지’ 하고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분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처럼 낮고 낮은 땅에 오셔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신 것일까요? 무슨 원리가 그분의 십자가 사역을 ‘일이관지’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한 가지로 묶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너무도 모르는 것이 바로 그 원리 입니다. 궁금하신가요?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틀림 없이 동의하실 겁니다.

 

천자문을 관통하는 원리도, 성경을 관통하는 원리도, 우리의 인생을 관통하는 원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관통하는 원리도,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리도 모두 이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천자문을 외면서 우리는 생명의 원리를 깨달아 가고,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거기에서 참된 생명을 발견하고, 우리의 인생도 생명을 향한 갈구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 그 자체이시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리 또한 생명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참된 생명을 찾아 떠나는 여행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생명이 손에 안 잡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생명이란 알다가도 모르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분께 나아와 참된 생명이신, 생명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귀면 사귈수록 생명이 손에 잡힐 겁니다. 정말입니다. 참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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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그대는 단 한 가지 / 짤막한 계명을 받았습니다. / 사랑하십시오. /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 침묵하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을 하십시오. /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십시오. / 용서 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 하십시오. /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 이 뿌리에서는 선한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습니다.”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이 한 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얼마나 마음을 울리는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마음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욕심이고 교만입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하기 전에, 사랑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늙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 말도 바로 이겁니다. “소자야, 서로 사랑하라!” 그래서 요한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성경(요한복음, 요한 1,2,3서 등)을 보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3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사도 요한이 소자야, 서로 사랑하라!”라고 외치고 다닌 것은 그의 스승이었던 예수님께 배운 것을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보다 후대의 인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따랐던 어거스틴도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장 중요한 일을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타락한 마음이겠지요. 타락한 우리 마음은 사랑하는 일을 잊고 자신의 욕심을 먼저 채우려고 하고, 사랑하기보다 남을 흠집 내고 헐뜯고 말 만들어 내기에 바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교회는 서로 사랑하기에 바쁜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모두 사랑에 근거한 선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해서 하는 말과 행동입니까? 그렇다면 소신을 갖고 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말과 행동을 조심하십시오. 그것이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힘써 지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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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5. 14. 03:48

2012 5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로마서 13:8-14

제목: 사랑, 불가능한 가능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 가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때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윤리가 사랑인데, 그것을 가장 잘 펼쳐 보일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게다가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성서정과의 주제 또한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계명을 받은 우리들, 그리고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질문해 봅시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 명령을 받아 든 우리들은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는 성경이 이상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초등학교 시절, 보이스카웃이나 아람단 같은 단체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람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초등학교 6학년 때, 3공수여단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공수여단의 구호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참 멋진 말 같지만, 이것만큼 모순되는 말이 없습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되게 합니까? “안 되는 것은 포기하라!”라든지, “되는 일을 찾아 되게 하라!”라는 말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는 한국이 군사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말도 안 되는 무식한 구호가 난무했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똑같아 보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내리고 그것을 실천하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군사독재 시절 공수여단에서 보았던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구호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이상한,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는 깡패집단 인가요? 하기야 말씀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보아,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능력이 기독교인에게는 부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지, 믿음만 가지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우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고 우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얼마 전 그러한 우매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금식을 열흘 동안 하다 쓰러졌는데, 사모님이 믿음으로 낫게 하겠다고, 그리고 목사님은 금식하다가 쓰러진 것이기에 삼일 만에 부활할 거라고(일어날 거라고), 믿음을 가지고 쓰러진 목사님을 방치하다가 죽게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목사님을 부검해 본 결과, 쓰러졌을 때 손을 썼다면 살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그냥 방치해서 죽게 만든 그 사모님은 경찰에 구속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에모든 것이 들어 있고, 사랑할 때 모든 율법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면서, 왜 사랑의 빚은 져도 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랑할 때 모든 율법이 이루어질 정도로 위대한 것일까요?

 

이것을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것을 보면, 사랑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그 무엇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사랑을 일차적으로 꽃피워야 할 가정을 들여다 보면, 우선 사랑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부부 간의 사랑도, 부모자식 간의 사랑도 어딘가 모르게 날마다 불안합니다. 부족합니다. 특별히 부모자식 간의 사랑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원하고 숭고할 것 같으나, 들려오는 뉴스를 보면 자식을 그냥 방치하는 비정한 부모도 많고, 부모에게 몹쓸 짓을 하는 후려 자식도 많습니다. 사랑이 저절로 되어야만 할 것 같은 부모 자식 간에도 그러니, 남남인 이웃에 대한 사랑은 묘연해 보이기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오늘 말씀은 갑자기 뚝 떨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13장에 나오는 말씀이니까, 그 이전에 사도 바울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논증한 상태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것을 율법과의 문제에서 풀어냅니다. 사도 바울은 더 이상 우리는 죄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의 법 아래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우리 인간에게서는 가능하지 않은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하나님 고유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들은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아닌 일그러진 사랑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사랑은 늘 부족하고 만족함이 없으며 선한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사랑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사랑이 화살이 되어 가슴에 꽂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인생을 살만큼 사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불가능한 사랑의 행위를 가능한 것이 되게 하는 능력은 무엇일까요? 그 능력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옵니다. 11절 이하의 말씀은 그 상황을 종말론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자다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빛의 갑옷을 입자등의 표현은 종말론적인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표현들입니다. 이는 우리의 현실이 지금 우리가 눈에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서 우리의 영적 현실이 바뀌었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영적 현실이 어둠에서 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각성할 때 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이 영적 각성은 14절의 말씀에서 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때 가능해 집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만이 우리의 영적 현실을 올바로 바라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사랑의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봐야 하는 이 시기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부모님을 사랑해야 되는 데 왜 나는 부모님과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을까? 남편, 또는 아내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남편 또는 아내가 낯설기만 할까?(연애 할 때는 상대방의 몸에서 애기 향기가 나더니, 이제는 독소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식들에게 더 잘 해 주었어야 하는데, 뭐가 그렇게 살기 바쁘고 힘들었는지 더 잘해 주지 못한 자식 생각만 하면 가슴이 메어오지 않으십니까? 충분히, 그리고 서로 만족할만하게 사랑을 받고 베풀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삶의 모습 가운데 혹시 가슴 아파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 죄책감에 싸이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그렇게 주저 앉을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게 되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명령하고 있듯이,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것도 빚지지 않은 자, 즉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능력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룰 때만 가능합니다.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영적 현실에 눈을 뜰 때만 가능해집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실존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온 존재를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면 이룰수록 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멀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고, 있는 듯 존재가 희미했던 어머니가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남편 또는 아내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를 서로의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식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식을 한 인격체로 대하며 자식을 위한 진정한 밑거름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이웃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을 때 너무 좌절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함으로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랑의 능력이 충만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동영상을 하나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부모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부모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뿐만이 아닙니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다 이웃(타자)인데, 이웃(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를 절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웃(타자)가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서 동영상을 감상해 보십시오.)

 

동영상 클릭 -->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6872966

 

우리의 모자란 마음 때문에 상대방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는 상대방을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모자란 마음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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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양이 길을 잃어버린 것은 양의 실수입니다. 우리가 고생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실수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교만해서, 버릇이 없어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쳐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해서 우리가 잘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 잘못 때문에 구원을 포기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유보하시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죄인 가운데는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 죄인이 있습니다. 탕자가 되었어도, 하나님을 등뒤로 하고 세상에 가서 인간적으로 살고 죄에 빠져 괴로워하다가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죄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문을 열고 밤이나 낮이나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죄인은, 스스로는 절대로 죄 가운데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죄인이 있습니다. 이런 죄인들을 위해서 목자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도, 길을 잃은 양도, 하나님의 인내가 없었다면 구원 받기 힘듭니다. 내가 주님 품으로 돌아온 것은 내가 영특하기 때문에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서 빠져 나올 수 없었던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인내 덕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랍 속담에 "태양만 비추면 사막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밝은 태양만을 원하지만 태양만 계속되면 우리 인생은 사막이 되고 맙니다. 우리 인생이 촉촉하고 푸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좋아합니다.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원한다면 소낙비를 각오해야 합니다. 소낙비가 없이는 결코 일곱 빛깔의 무지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지개와 같은 인생을 원한다면 때로는 아픔과 고통의 소낙비를 맞아야 하고 견디어야 합니다.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래 기다리고 기도하는 사람이 무지개를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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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5. 7. 02:16

아들에게 들려주는 히브리서 이야기 1

 

아들아, 이제부터 아버지가 네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눈과 귀를 아버지가 하는 말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너의 온 존재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10:17)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으시면 우리는 들을 수 없고, 결국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이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께 온 존재를 다하여 반응하는 것이란다. 아들아, 이제부터 아버지가 네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온 존재를 걸어 들어야 하는 믿음의 행위란다.

 

히브리서를 누가 썼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말을 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누구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란다. 왜냐하면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 서신을 누가 쓴 것인지 밝히지 않고 있단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말씀이 단순히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은연중 보여주고 있다. ‘이건 내 말이 아니라 성령님의 말씀이다. 그러니 온 존재를 걸어 들어라!’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란다.

 

이 히브리서의 수신자를 보통 히브리서 공동체라고 부른단다. 히브리서에서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꼭 필요한 상황에 처해 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한단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은 것이지. 이 서신을 받아본 히브리서 공동체는 로마에 살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몇 가지의 상황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첫째로,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 이들은 당황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초대교회의 모든 그리스도 공동체는 이 문제 때문에 매우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단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 중에 얼마나 빨리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으로 얘기하신 것도 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16:28). 이 말씀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실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 둘씩 죽어가는 상황에서 초대교회 공동체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이러한 심란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초대교회 지도자들, 특별히 사도들은 무단히 애를 썼단다. 이런 말씀으로 위로한 구절도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사실 이 상황, 즉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상황은 예수님의 승천 사건이 있은 후 2000년이 훨씬 지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00년이란 세월 동안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은 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아예 재림 불감증이 걸린 상태에서 살아가기 때문이지. 예수님께서는 안 오시는 것도 아니고 더디 오시는 것도 아니고, 지금 오고 계신단다. 예수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이란다. 엘리야 선지자가 손바닥 만한 구름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비구름이 몰려 오는 것을 알아채서 준비 했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고 계신 예수님을 보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란다.

둘째로, 히브리서 공동체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이유는 박해와 핍박이었다. 박해란 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으로부터 학대 받는 것을 가리키는데,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 공동체에 학대 받는 상황이 그것이었단다. 이를 잘못 오해하면, ‘유대교가 기독교를 박해했다는 단순 논리에 빠지기 쉽다. 그렇게 되면 히틀러가 저질렀던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는 것이지. 이 상황은 절대 그런 상황이 아니란다. 유대교가 기독교를 핍박했다는 뜻이 아니라, 유대교의 핵심 원리가 기독교의 핵심 원리를 잠식해 들어갔다는 뜻이다. 유대교의 핵심 원리는 율법이다. 기독교의 핵심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율법은 자기 의이고, 십자가는 은혜인데, 이 둘이 서로 충돌했다는 뜻이다. 율법과 십자가의 관계를 집요하게 분석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란다. 그의 서신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이 두 원리(율법과 십자가(복음))를 파헤친 깊은 신학적 논증이라고 할 수 있지. 율법과 십자가의 충돌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란다. 이것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역사와 그 길을 같이 걸어온 문제야. 아마도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끝나지 않을 논쟁이 될 것이다. 물론 성경을 통해서 이미 십자가의 은혜가 율법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 이 둘은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가려내기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란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끝난 문제이지만 실천적으로는 아직 헷갈리는 문제라는 뜻이다. 아직까지도 기독교인들 중에는 십자가의 은혜로 살지 못하고, 율법의 자기 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자기 의’,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의로운 존재가 되려는 마음이 바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기 때문이란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늘 조심해야 한다. ‘날마다 죽지않으면 은혜가 아닌 자기 의로 살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쨌든 히브리서 공동체는 지금 십자가의 은혜로 살기를 포기하고 율법의 자기 의로 살아가던 때로 되돌아 가려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에게 처음 믿은 바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는 서신이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다시 집중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정신이 흐트러지면 혼란을 겪게 마련이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듭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깨어라는 말은 정신 차리라는 뜻이란다. 한문으로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란 말을 할 때의 상태이고, 속담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란 말에서 느껴지는 정신 차림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정신을 엉뚱한 데 팔게 한다. 초점을 흐트러뜨리고 목표를 교란시킨다. 결국 중간에서 포기하게 만든다. 그게 이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해야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지금 히브리서 공동체에게 이런 세상에서 정신 차리고 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 차려서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는 것이다. 아들아, 히브리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도 이 점을 잊지 말기 바란다. 정신 못 차리면 성령으로 시작한 일 육체로 마칠 수 있음’( 3:3)을 유념하거라. 이것은 곧 재앙이요, 죽음이다. 이 사망의 위협에서 우리를 건져주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말씀이란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5. 2. 23:28

탄식: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성령을 연결시키는 고리

( 8:26-28)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진술을 들으면 기분 나빠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만사형통이라고 부르는 원리가 여기에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만사형통하게 된다는데, 이 말씀을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주어진 로마서의 말씀은 그렇게 단순한 논리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탄식이라는 단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 이전에 줄기차게 인간의 탄식과 피조물의 탄식에 대해서 설명했다. 죄와 율법의 문제를 논하면서 우리 인간의 처한 상황이나 피조물이 처한 상황이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절망할 것도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의 법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이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 없다.

 

탄식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소망이라는 두 요소를 동시에 내포한 행위를 가리킨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죄의 법과 성령의 법 사이에 놓여져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령의 법이 우리의 삶 가운데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적인 삶은 여전히 죄의 법 아래 놓여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긴장감 가운데 있다. 우리의 현실은 죄의 법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당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의 미래는 성령의 법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처지에서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기본적으로 탄식의 기도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기도할 때는 아프지만 기도가 끝나면 기쁨이 몰려오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탄식의 기도에는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소망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아주 힘이 되는 성령의 사역을 말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이 탄식할 때 성령께서도 탄식으로 모든 피조물과 연대(solidarity)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탄식은 피조물의 탄식과는 성격이 다르다. 성령의 탄식은 인간(그리스도인)이나 피조물의 경우와는 달리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피조물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중보기도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 피조물의 연약함은 무엇인가? 우리의 연약함은 당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없는 무지함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이 상황에서 성령은 말없는 탄식(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한다. ‘말없는 탄식이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신다는 뜻이다.

 

근본적으로 성령의 일을 우리가 감지할 수는 없다. 성령은 우리가 흔히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이 부릴 수 있는 영이 아니라, 무한히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뜻은 성령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성령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중보기도는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성령의 생각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신다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내주하시는 성령과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일치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입술에, 우리의 어깨에, 우리의 머리 위에, 우리의 발등에 앉아 계신 분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술을, 우리의 어깨를, 우리의 머리를, 우리의 발등을 살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입술로 또는 어깨와 머리와 몸을 흔들며 격하게 기도할 수 있다. 거기에 경건함과 간절함이 실려 있는 것처럼 꾸며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전혀 경건하지 않고 간절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기도를 외식하는 기도라고 한다. 이런 기도는 성령께서 전혀 말 없는 탄식으로 도와줄 수 있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오해한다. ‘말 없는 탄식으로 도와주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대충대충 기도해도 알아서 도와주실 거라고. 당신의 뜻대로 부름 받은 사람은 대충대충해도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거라고.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다. 기도할 때, 이 마음 속에 성령의 탄식과 통하는참된 탄식이 없다면 성령께서는 말 없는 탄식으로 우리와 연대하실 수 없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을 한 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참으로 현재 받는 고난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가! 또한 그 구원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고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이 마음 속에 참된 탄식이 있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현재의 고난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 이 고난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그 마음이 창자가 끊어질 듯 하다. 또한 고난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면서 이미 구원 받은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기뻐한다. 피조물은탄식한다. 고로, 존재한다(구원받는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