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소풍하면 으뜸으로 생각하는 시()가 바로 이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고 하는 시입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이 세상의 삶을 소풍으로 묘사합니다. 이 세상을 소풍처럼 살다간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풍요롭고 즐거웠을지 상상해 봅니다.

 

어린 시절, 소풍 가는 일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소풍 가는 날이면 전날 가슴이 설레서 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소풍 전 날, 소풍에 싸가지고 갈 음식과 간식거리를 장만하느라 나도 바쁘고 어머니도 바쁘셨습니다. 우선 소풍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종이에 쭉 적습니다. 그리고 슈퍼마켓에 가서 꼼꼼히 하나씩 하나씩 삽니다. 먹고 싶은 것에는 초콜릿이 꼭 들어갑니다. 소풍처럼 달콤한 초콜릿을 빼놓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칠성사이다도 챙깁니다. 소풍처럼 톡 쏘며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이다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소풍날 아침, 어머니는 일찍부터 김밥을 만드십니다. 밤새 잠을 설친 탓에 하품이 가시질 않고 눈곱도 평소보다 많이 꼈지만, 가슴이 설레 더 이상 잠을 청할 수 없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힘차게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어머니께서 김밥을 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김밥 만드시는 모습과 김밥이 자극하는 황홀한 냄새는 팔다리에 힘을 주고, 벌써 마음을 소풍 장소에 가 있게 만듭니다. 김밥에는 노란 단무지와 계란, , 그리고 시금치가 꼭 들어가야 합니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마음이 서운합니다. 어머니는 그런 자녀의 마음을 아시고 모든 것이 들어간 맛있는 김밥을 만들어 주십니다. 소풍날 아침은 김밥을 썰 때 나오는 꽁다리김밥으로 때웁니다. 얼마나 맛있는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렇게, 소풍처럼 살아간다면 미움다툼시기질투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힘들고 우리의 삶에 눈물이 고이지 않을 겁니다. 소풍 가서 기꺼운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싸온 음식들을 함께 나누는 넉넉한 마음으로 세상을 소풍처럼 살 수 있다면, 위의 시인처럼 우리의 삶은 풍요로운 삶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세상을 소풍처럼 사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 즐거운 마음, 넉넉한 마음, 소풍 같은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의 칠언  (0) 2012.03.20
음란한 세대  (1) 2012.03.10
노후 준비  (1) 2012.02.19
연금술사  (2) 2012.02.10
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 소명과 자질의 변증법  (0) 2012.02.03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3. 6. 10:27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 意自見):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스스로 보인다는 말 /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면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후한 헌제(獻帝) 때 동우(董遇)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유달리 학문하는 것을 즐거워하여 항상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녔습니다. 젊어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해 집안이 가난했지만, 불평없이 초야에 숨어 독서에 힘을 쏟았습니다. 나이 들어서 높은 경지에 이르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어, 학문을 좋아하는 헌제가 그를 불러 경서(經書)를 강론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강론을 들은 헌제는 그의 풍모에 반하여 곧 그를 발탁,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삼고 관리와 학생들에게 경서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동우의 명성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그의 문하에는 제자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나 제자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게 배우기보다는 스스로 책을 읽고 또 읽어 보게.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된다네." - 삼국지 위지 왕숙전 주 (三國志 魏志 王肅傳 ) –

 

박사(博士)는 여러 가지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한 가지를 깊게 아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깊게 알려면 여러 가지를 두루두루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박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박사는 스스로 공부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박사는 독립된 연구기관이나 마찬가지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죠.

 

스스로 뜻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무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면 스스로 뜻을 깨닫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법입니다. 책을 백 번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 뜻을 깨닫기 위해서 무단한 노력을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스스로 깨닫는다는 것은 진리에 드디어 손발을 담그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죠

 

뻔한 이야기 같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에 손과 발을 담그기 위해서, 그래서 그 진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 그 진리 안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 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이지만, 그것이 은혜인지 깨닫는 진리에 다가서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마나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질문도 없이 의문도 없이, 그냥 앵무새처럼, 시계추처럼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의미 없이 무의미한 말을 늘어놓으며 왔다 갔다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에겐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진리에 타는 목마름으로 은혜와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갑시다. 그것이 우리가 덧입고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 아는 길입니다.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관규천(以管窺天)  (2) 2012.03.22
창해일속(滄海一粟)  (1) 2012.03.15
새옹지마(塞翁之馬)  (1) 2012.02.17
백중지세(伯仲之勢)  (1) 2012.02.05
사불급설(駟不及舌)  (2) 2012.01.2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27. 06:11

2012 2 2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창세기 9:8-17

제목: 홍수는 하나님의 새창조 사건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노아와 홍수 사건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홍수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면서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홍수를 일으키셔서 모든 육체를 멸하셨을까요?

 

노아와 홍수 사건은 창세기 처음에 등장하는 창조사건과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동사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만드신 만물을 보시면서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불화가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조란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조화로운 상태를 일컫습니다. 그런데 그 조화가 깨지니 창조 세계에 어두운 그늘이 드러워졌습니다. 우리는 그 형편을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가인과 아벨 사건, 그리고 창세기 6장에서 이어지는 사람의 죄악과 하나님의 한탄스러운 마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6 5-6절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생명과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마음에 합했던 한 사람, 노아를 통하여 새창조의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 새창조의 계획이 바로 홍수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창조의 사역을 이루실 때 모든 것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시지 않습니다. 선한 것을 가지고 새창조를 하십니다. 우리는 노아를 남겨두시고 노아를 통하여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사건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움의 씨앗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노아와 홍수 사건을 더 들여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홍수 사건 후에 노아와 무지개 언약을 맺으십니다.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을 어떻게 새롭게 하셨는지 보여주는 인간의 희망입니다. 그 희망을 안고 새롭게 시작한 노아의 후손들은,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민망한 삶을 만들어 나갑니다. 결국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홍수 사건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죄의 삶을 이어갑니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들의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결국 이렇게 가다가는 노아와 홍수 사건 때처럼 모든 육체는 또다시 멸망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위기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매일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죄가 드리워진 곳에는 언제나 생명의 위기가 닥칩니다. 이 생명의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 실존은 늘 답답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7:18-19).

 

이 절망적인 인간의 실존과 위기가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이러한 절망과 위기의 실존에서부터 탄식 소리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 사건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왜 구원자가 되시는지 깨달아 집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맺으신 무지개 언약을 결코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무지개 언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아무리 당신과 불화 가운데 있더라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바로 무지개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무지개가 고운 빛깔을 내며 곱게 허리를 숙인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곱게 하고 하나님 앞에 허리를 숙여 감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실존은 온통 죄로 가득 찬 인생입니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과 계속해서 불화를 일으키는 삶을 살다가 스스로 멸명의 길로 가는 인간의 연약함을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단하시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노아와 홍수 때처럼 새창조의 역사를 단행하십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고통스러운 장면을 보면 감성이 자극되어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스럽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셔서,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보면서 눈물만 흘리고 만다면 우리는 여전히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카타르시스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새창조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씨앗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여기서 선한 씨앗은 다른 말로 의로움입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들이 거룩하고 의롭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창세기에서 보는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을 우리 인간의 형상 속에 다시 심어 놓는 구원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당신의 피조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절망과 위기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창조는 믿음을 통해서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로움의 씨앗)가 우리 안에 심겨져 그 의로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믿음이 실제로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세례를 통해서 봅니다. 세례는 노아와 홍수 사건을 기억나게 합니다. 물 속에 잠겼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 줍니다. 세례는 아무에게나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베풀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를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 베풀어 지는 것이 세례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얼마나 절망적이고 위태로운 상황이 많습니까? 선하지 못함, 거룩하지 못함, 의롭지 못함, 보기에 좋지 못함, 그야말로 절망적이고 위태로운 순간을 우리는 매일같이 경험하고 직면합니다. 그것이 건강의 문제로, 경제의 문제로, 가정의 문제로, 사회의 문제로, 환경의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다양한 형태로 경험되는 절망과 위기, 즉 악()을 우리는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럴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직면하고 있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붙들어야 합니다.

 

저 무지개가 보이십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물로 모든 악을 멸하신 후 하나님의 새창조의 세계에 우뚝 선 의인 노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노아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당신의 피조물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하시며 복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희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 십자가가 보이십니까?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답습니까? 이 십자가는 저 무지개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십자가에는 저 무지개가 내뿜고 있는 아름다운 색깔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확증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저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8).

 

홍수 같은 고난이 우리에게 닥쳐도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고난이 우리에게 닥쳐도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망 가운데 위기 가운데 내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새창조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과 위기 가운데서 당신께 부르짖는 우리의 탄식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노아는 홍수 사건 이후에 이러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니리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9:1-3).

 

이러한 복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만복을 누리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1) 2012.04.02
누가 왕인가?  (1) 2012.03.13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 2012.02.23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자가 되라  (1) 2012.02.22
예수님의 소외  (2) 2012.02.1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2. 25. 02:33

하나님은 안식이시다 레위기 25

 

하나님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일컬어 절대타자라고 부른다. 이렇게 절대 타자인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레위기 25장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안식이다.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규례를 담고 있다. 그리고 희년 정신에 근거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공정하고 은혜롭게 자비를 베풀 것을 명령하는 규례도 더불어 담고 있다. ‘규례이기 때문에 딱딱하게 다가올지 모르지만, 사실 이만큼 따뜻한 규례도 없다. ‘안식을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이 가장 눈 여겨 보아야 할 말씀 중 하나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규례는 단순하다. 안식일의 규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 규모만 다를 뿐이다. 안식년은 6년 동안 일하고, 일곱 번째 되는 해에는 일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초점이 인간에게 맞추어져 있지 않고, ‘에 맞추어져 있다. 6년 동안 경작하고, 일곱 번째 되는 해에는 경작하지 못하도록 한 규례가 안식년 규례이다. 그러니까 안식은 기본적으로 땅의 안식을 의미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천지창조의 이야기 이후에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로 여겨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6, 그리고 6년을 주시고, 7일과 제 7년은 당신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하신다.

 

이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일곱 번째 해에 땅을 경작하지 못하도록 하는 안식년 규례는 이것을 가르쳐 준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 말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요즘처럼 땅이 황폐화 되고, 육체가 황폐화 된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생명처럼 되새겨야 한다.

 

기본적으로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은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몸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땅이 상하도록 경작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인 동시에 몸이 상하도록 일하면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땅의 경작을 쉬면서 그 땅을 경작하던 인간도 덩달아 쉬게 되는 것이다. 이는 열심히 일하지 말라는 뜻과 무관하다. 이는 베짱이처럼 빈둥빈둥 노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도 안 되는 오해와 무관하다. 이는 인간의 내면적, 그리고 외면적 삶의 태도와 관련되는 매우 심오한 규례이다.

 

우리가 왜 땅을 상하도록 경작하고, 몸이 상하도록 일하게 되는가? 기본적으로 욕심때문이다. 밑도 끝도 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이든지 분에 넘치도록 가지려 한다. 이 세상의 삶의 법칙이 그렇다. 소유와 소비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통하여 땅과 몸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소유와 소비의 극대화 이면에는 땅과 몸의 황폐화가 따라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땅과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하게 하는 것은 검소하게 살고 욕심부리며 살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청빈의 삶이 곧 안식을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이다.

 

청빈의 삶은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만이 아니다. 청빈의 삶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안식을 체험하기 위한 영성의 길이다. 땅과 몸을 안식으로 들이기 위해서는 소유와 소비를 극소화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청빈인 것이다. 땅이 안식을 누리게 되면 땅의 생명력이 되살아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몸이 안식을 누리면 생명력이 되살아나 영안이 열린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으로 당신의 존재를 계시하신다. 우리가 안식한다는 것, 즉 쉼을 얻는다는 것은 몸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경험하는 최고의 순간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쉬면서 하나님을 만났다. 안식일에 쉬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안식년에 쉬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희년에 쉬면서 하나님을 만났다. 쉬는 동안 하나님을 만난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께서 삶의 기본적인 필요를 놀라운 방식으로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경험했다.

 

현대인들에게 쉬는 문제는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현대인들은 쉬는 동안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소비자가 될 뿐이다. 쉬면서 생명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그러했듯이 또 다른 소비에 물들 뿐이다. 현대인들은 안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저 이 세상이 이끄는 데로, 소비의 멍에를 짊어진 황소처럼 끌려 다니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레위기서 25장은 구원의 밧줄이 되어 준다. 소비의 멍에를 끊어주는 복음이 되어 준다.

 

하나님은 안식이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안식은 신앙의 문제이다. 쉬는 것도 신앙이다. 물론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무작정 쉴 수는 없다.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땅과 몸이 상하지 않도록 각자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을 꼭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자의 신앙의 분량만큼 깨달아지고 보일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신앙의 분량만큼 안식을 삶 속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각자의 삶 가운데 안식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만큼 넘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23. 09:21

2012 2 22일 참회의 수요일 예배 설교

본문: 요엘 2:1-2, 12-17

제목: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독교의 신앙이나 예식, 그리고 절기는 하루 아침에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있은 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두고 묵상하는 가운데, 긴 시간에 걸쳐 기독교라고 하는 신앙형태가 형성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진행형 동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기독교는 끊임없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재의 수요일(참회의 수요일, Ash Wednesday)은 주후 6세기 정도에 생긴 기독교 전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그것을 우리의 삶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만들어진 전통입니다. 이제 이 전통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지키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을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진지하게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는 어떠한 연유에서 이 자리에 나오셨던지 간에 기독교 영성의 중심에 들어오시게 된 겁니다.

 

사순절기는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우리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즉흥적으로, 임기응변 식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닥트릴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은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어떤 일보다 놀라운 일이요, 이 세상의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절기에 들어서는 오늘, 신앙의 선조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맞이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재의 수요일에 신앙의 선조들은 회개를 상징하는 베옷을 입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전년도 종려주일에 흔들었던 종려나무를 잘 보관해 두었다가 이날 꺼내서 그 나뭇잎을 태워 나온 를 이마에 바르며 참된 회개를 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물론 구약 성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꿇어 앉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면서 예배 드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만, 오늘 말씀이 전해 주고 있듯이, “마음을 찢고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 드릴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는 왜 마음을 찢어야 할까요? 그리고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요엘서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날이란 이 세상에 일어났던 그 어떤 재앙의 날보다 더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함이란 어떠한 잔인함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위협하는 두 가지 는 전쟁과 기근입니다. 모두 인간의 생명과 관련이 있는 문제입니다. 적어도 제 1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요즘 전쟁과 기근의 공포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로 국지적 전쟁은 끊이질 않고 있으나, 적어도 제 1세계의 나라에서는 전쟁이 억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옛날처럼 기근이 와서 굶주리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엘서에서는 전쟁과 기근을 메뚜기 떼가 공격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1 4절에 보면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메뚜기 떼가 공격하면 농산물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메뚜기 떼는 공격해 들어오는 적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합니다. 적군이 밀려 들어오면 도시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됩니다. 둘 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목숨이 위태로울 때 인간은 극도의 공포심을 느낍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은 이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인간을 압도한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것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인간을 압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기근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신 존재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 하라”( 12:4-5).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음모에 의해서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레위기서 24장에 보면, 신성모독죄는 사형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을 죽일 요량으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씌워서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죽기까지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본인이 말씀하신 대로,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시지 않고,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자, 즉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끝까지 운명을 맡겼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시키셨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이상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사순절기 동안에 부활을 온전히 준비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였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을 일컬어 부활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 살아났지만 나중에 다시 죽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배타적 구원행위에 우리의 온 존재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험하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는, 어떠한 완전히 다른 현실이 우리에게 오고 있는데, 그것이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부활의 현실을 먼저 맛보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부활의 첫 열매라고 증거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 아닙니다. 어떠한 잘못을 하고서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전혀 다른 현실, 즉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행위에 우리의 온 존재를 맡기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신앙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참여하기 위해서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외적인 행위를 통해서 자신들이 지금 내적으로 회개하고 있다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외적으로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금식하는 것도 우리 마음의 표현일 수 있으나,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행위에로 이끌어 준다고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행위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확실한 길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 길은 아직 온 세상에 드러난 길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감추어져 있는 길입니다. 믿을 때만 보이는 신비로운 길입니다. 그 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기를 시작하면서 이 진리와 맞닥트리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의 현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세상은 구원의 현실을 소유와 소비, 그리고 자기확대에서 찾으라고 합니다. 많이 소유하는 것, 마음대로 욕심나는 대로 갖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있는 소비력, 그리고 남보다 더 돋보이는 삶의 조건들이 곧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는 것처럼 살게 하고, 우리에게 생명력을 가져다 준다고 허위광고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현실이라고 증거합니다. 오늘날,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 시대가 추구하고 있는 풍요로운 삶과는 정반대인 십자가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꿩도 먹고 싶어하고, 알도 먹고 싶어합니다. 예수도 믿으면서 소유와 소비, 그리고 자기확대도 믿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맘몬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절기는 그 어느 때보다 도전이 되는 그리스도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구원의 현실을 찾고 있습니까? 무엇이 나에게 실질적으로 생명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습니까? 이는 쉽게 결론 낼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현실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기는 바로 성경에서 부활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구원의 현실을 우리의 온 존재를 다하여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구원의 현실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옵니다. 그러니 사순절기 동안 어떠한 경건행위를 하던, 그 경건행위에 초점을 맞추지 마시고, 그 경건행위를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 어느 때보다도 자주, 그리고 높이 부르십시오. 오늘 요엘서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기도하면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한 것처럼, 사순절기 동안 기도하시면서 여러 가지 말보다는 이 말 한마디에 집중해 보십시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활이라고 하는 구원의 현실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왕인가?  (1) 2012.03.13
홍수는 하나님의 새창조 사건이다  (1) 2012.02.27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자가 되라  (1) 2012.02.22
예수님의 소외  (2) 2012.02.15
복음은 능력이다  (1) 2012.02.06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22. 00:50

2012 2 1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열하 2 1- 22

제목: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자가 되라

 

모 재벌 총수가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중에 한 사람의 기술이 백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기술은 단지 백만 명 정도가 아니라 수천만 명, 수억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1769년에 제임스 와트는 방에 있는 난로 위의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동안 뚜껑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증기기관을 발명했습니다. 거대한 기계를 움직일 수 있는 원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산업 혁명과 기술의 발전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1813년에는 스티븐슨이 바로 그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증기기차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 일본의 신칸센이나 프랑스의 떼제베에 이르기까지 기차는 전 세계적으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어왔습니다. 이 기차와 관련해서 전 세계적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차를 타고 여행하다가 갑자기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밤을 꼬박 새워야만 했던 포드가, 말이 없이도 달릴 수 있는 마차를 만들기로 하고 자동차를 발명한 것이 1892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오늘날 전 세계에 여러 자동차 회사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자동차 회사들과 관련된 하청공장이나 업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부양 가족들을 따진다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동차로 먹고 사는 지 알 수 있습니다.

 

1903년에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를 발명했습니다. 그 이후 1919년 네덜란드의 KLM이 최초의 민간항공회사로 발족한 이래 항공망은 전 세계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습니다. 그러니 비행기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개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영감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감의 개발을 위해서 2800년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엘리사라는 인물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사에게는 엘리야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누가 참된 신인지 밝히기 위해 우상 숭배자 85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을 벌여 하나님으로부터 불로 응답을 받았던 영감의 사람이었고, 죽은 자도 살려 낸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당대에 그와 같은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엘리야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죽음을 보지 않고 육신을 가진 채 승천했다는 전설일 겁니다. 얼마나 그 삶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충만했으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으면, 육신이 산 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선지자 엘리야는 진실로 영감의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 하 2 1절에서 18절 말씀은 바로 이 영감에 찬 선지자 엘리야가 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는 날의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1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신다는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곧 죽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엘리야는 그의 제자, 엘리사와 길갈을 떠납니다. 길갈은 선지자 생도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일종의 수도원 같은 것을 이루어 살 던 곳입니다. 엘리사는 그들과 함께 살았는데, 엘리야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엘리야는 길갈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그리고 길갈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벧엘로 떠나려 했던 것이죠.  엘리야는 혼자 가려고 엘리사에게 길갈에 남아 있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죽어도 함께 가겠다고 고집합니다. 엘리사는 매우 고집이 센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 목숨 걸고 덤비는, 매우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3절에서 6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식으로 엘리사는 엘리야와 벧엘을 거쳐, 여리고, 그리고 요단까지 함께 여행을 합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그리고 여리고로, 그리고 요단으로엘리야의 마지막 인생 여정길에 함께 한 엘리사.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누군가와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다는 것,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죠. 마지막 나날들을 함께 걷고, 함께 자고, 함께 먹고그러는 동안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무엇을 얻었을까? 바로 인생의 지혜를 얻었을 것입니다. 인생의 지혜를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다음 구절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단강에 이르러, 엘리사는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준비를 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야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마지막 몇 날들을 함께 해 온 제자 엘리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엘리야는 굉장한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어떤 것을 구하더라도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런 엘리야에게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엘리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가 구한 것은 오직 엘리야가 가지고 있던 영감을, 그것도 갑절의 영감을 요구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9)

 

왜 엘리사는 다른 것을 다 제쳐 놓고, 엘리야가 가지고 있던 영감의 갑절을 원했을까? 이것이 바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서 받은 지혜로 선택한 최고의 선물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감이란 무엇입니까?? 영감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즉 영, 생명, 또는 호흡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저 사람은 영감이 충만하다는 말은 저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자,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자, 하나님과 더불어 호흡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한 엘리사의 말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혔던 것보다 갑절이나 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충만했던 하나님의 생명력이 갑절이나 자기에게 충만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호흡했던 것보다 두 배나 더 하나님을 호흡하면서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서 얻은 지혜의 결과였습니다. 무엇이 중요한 지 정확하게 깨달았던 것이죠. 우리는 살면서 이러한 지혜를 꼭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 1:7). 지혜 있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할 줄 아는 자입니다. 지혜 있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삶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되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알았던 엘리야, 그리고 이러한 지혜를 물려받았던 엘리사. 그래서 엘리사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이 갑절이나 있기를 바랐던 것이죠. 그런데 왜 갑절이나 바랐을까?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엘리사처럼 날마다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주님의 신실한 종이 되어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왜 갑절을 구해야 합니까? 그것은 세상이 점점 더 악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갑절을 구하지 않으면, 어제 보다 더 악해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엘리사가 활동하던 시대는 더 힘든 시대였습니다(엘리야아합왕조, 엘리사예후왕조). 엘리사는 그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내가 활동하는 시대는 스승인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더 악이 충만해서, 스승 엘리야가 가지고 있던 영감의 갑절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것이 실로 자신 없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했고, 갑절의 영감으로 위대한 일들을 많이 해 냅니다.


엘리사가 원했던 대로 엘리야에게 주어졌던 영감보다 갑절이나 많은 영감이 주어졌을 때 엘리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 번째로 일어났던 일을 13절과 14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갑절의 영감을 얻은 엘리사 앞에 제일 먼저 일어난 이른 그를 가로막고 있던 요단강이 갈리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영감을 가진 자에게는 그 어떤 것도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이야말로 미래를 내다보는 힘이요, 장애물을 뛰어넘는 능력이요, 절망의 골을 메우는 다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가진 자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그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가 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영감에 찼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성서에 많이 나옵니다. 누가 있습니까? 모세가 있죠. 영감으로 가득 찼던 모세에게는 홍해가 그의 장애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또 누가 있습니까? 여호수아가 있죠. 영감으로 가득 찼던 여호수아에게는 8000년의 역사를 가진 여리고성이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갑절의 영감이 임한 엘리사에게 일어났던 두 번째 일은 19절에서 22절이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엘리사에게 갑절의 영감이 주어졌을 때 일어난 두 번째 일은, 식물이든 사람이든 전혀 먹을 수 없는 죽은 물이 생명의 물로 되살아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성읍이 바로 여리고 성읍이었는데, 도시가 오래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땅이 황폐해지고 물이 나빠졌습니다. 환경이 오염된 것이죠. 이렇게 모든 것이 오염돼서 죽어가던 성읍을, 영감에 찬 한 사람, 엘리사가 살려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죽어가는 자, 죄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살려낼 것이고, 환경이 오염돼서 신음하고 있는 이 지구를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일 들려오는 뉴스를 들어보십시오. 모두 죽어가는 소식뿐입니다.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소식뿐입니다. 오래된 성읍, 여리고처럼 모든 것이 하나씩 하나씩 죽어가고 있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생명력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바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컬럼버스 지역에 영적인 새바람을 불러 일으켜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여리고성처럼 죽어만 가는 내가 사는 삶의 터전 컬럼버스를 그냥 놓아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리고성과 같이 생명력을 잃어가는 이 컬럼버스 지역을 살릴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갑절의 영감을 구하면 됩니다. 갑절의 영감을 구해서, 컬럼버스를 이런 지역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컬럼버스 지역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지역입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길이고, 그 일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감을 개발해야 합니다. 엘리사가 구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영을 구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엘리사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장애물들이 제거될 것이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수는 하나님의 새창조 사건이다  (1) 2012.02.27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 2012.02.23
예수님의 소외  (2) 2012.02.15
복음은 능력이다  (1) 2012.02.06
사랑은 덕을 세운다  (3) 2012.01.30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2. 21. 06:10

해님과 바람과 아들

 

소파에서 독서하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책 하나 집어 들고 아버지 옆에서 독서하던

세 살배기 작은 아들이

책장을 몇 장 넘기는가 싶더니 이내 잠들어 버렸다

 

아버지 눈에 아들은 지금 잠 든 것이 아니라

글을 몰라 책을 읽을 수 없으니 아예

책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인다

아들이 보고있던 책은 <이솝이야기>인데

그 중에서도 해님과 바람이야기였다

 

세 살배기 작은 아들은

자기도 사내 녀석이라고 날마다 힘 자랑을 한다

난유 팀 때지?(찬유 힘 세지?)’

나름대로 무겁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들어올리며

사내 아이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듯 하다

 

아들이 보고있던 해님과 바람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난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세.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어느 날, 바람이 해님에게 우쭐대며 말했어요.

과연 그럴까?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게 있단다.”

해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아들은 지금 유난히 좋아하는 해님과 바람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해님과 바람의 내기 속에 등장하는 바로 그 나그네로 변하여

바람 부는 길과 햇살 가득한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

 

햇살 가득한 늦은 오후

새록새록 잠 든 아들 머리 위를

해님이 방긋 웃으며 지나가는 것을 보면

아들은 지금

이 세상에는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게 있다는 것

배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국경일(Presidential Day)이라 한가하다. 나른한 오후, 소파에 앉아 독서하고 있는데 작은 아들이 옆에서 나를 따라 책을 읽다
잠든 모습을 보고 시상이 떠올라 쓴 시이다. 아들이 지혜롭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시이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대가 아프다  (1) 2012.09.01
나는 강간 당했다  (1) 2012.08.24
아내는 성자다  (1) 2012.02.08
우루사  (1) 2012.01.26
민주주의자 김근태  (1) 2012.01.05
Posted by 장준식

얼마 전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서 중국으로부터 배워야 할 가치 중 하나가 효() 사상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이 사상을 꼭 배워야 하는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쇼셜시큐러티(사회보장제도)를 통해서 노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왔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은 사회보장제도로 노인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은퇴 한 노인들을 먹여 살리는데 국가가 책임을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날로 늘어가서 머지않아 노인 인구가 젊은이 인구보다 많아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 아무리 미국이라고 할지라도 늘어난 노인 인구에 발맞추어 재원을 확보해 노인들을 사회보장제도로 돌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그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가정으로 돌아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이지요. 쉽게 이야기해서, 자식이 부모를 책임지는 사회형태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어릴 적에 부모가 자식을 책임졌으니, 이제 거꾸로 자식이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이미 아시아 문화권에 형성되어 있는 사고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사고가 점점 쇠퇴해져 가고 서구식 사회보장제도가 자리를 잡아 가고 있지만, 이는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람이 돌보는 것이지, 어떠한 제도가 돌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이 돌봐야지, 어떻게 사회보장제도가 사람을 돌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정을 주신 이유는, 가족끼리 서로를 잘 돌보라는 의미에서 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사회보장제도가 가정을 돌봅니다. 자녀들도 부모가 돌보는 부분보다 사회보장제도가 돌보는 부분이 많습니다. 실례로 의료부분이나 교육부분이 그렇습니다. 이 부분에서 부모의 역할은 미진합니다. 가장이 실직을 해도 가정이 돌보기 보다는 사회보장제도가 돌봅니다. 실직수당을 줌으로써 먹고 사는데 있어서의 불편함을 최대한 덜어주려고 합니다. 가장 두드러지게 사회보장제도가 담당하고 있는 부분이 노인문제 입니다. 노인을 돌보는 비율은 압도적으로 사회보장제도가 높습니다. 젊은 자녀들이 늙은 부모를 모시고 사는 비율은 극히 낮습니다. 늙은 부모는 사회보장제도에 의지해서 스스로 살아가거나, 기관 같은데(병원이나, 실버타운 등) 맡겨지고 맙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막대한 돈이 사회보장제도를 유지하는데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 이상 사회보장제도의 재원을 마련하는 데 한계가 오고 있다는 것이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가정을 살리는 것입니다. 늙으신 부모님, 그리고 자녀, 손자가 함께 보여 사는 단란한 가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미래 사회는 이렇게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늙은 부모님이 가정에서 환영 받는 방법은 어디 있을까요? 돈이 많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돈을 가지고 그 가정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나 같은 기도의 어머니,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부모님은 어디에서나 환영 받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부모님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어느 자식이든 서로 모셔 가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가정을 제가 봤습니다.

 

그렇다면 노후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자녀들에게 주님의 형통한 복을 가져다 주는 복 있는 사람이 되면, 그것으로 노후 준비는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망한 것으로 노후 준비를 하지 마시고, 기도로 노후를 준비하시는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란한 세대  (1) 2012.03.10
소풍처럼 살기  (1) 2012.03.09
연금술사  (2) 2012.02.10
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 소명과 자질의 변증법  (0) 2012.02.03
벌집을 건들지 말라  (1) 2012.02.01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2. 17. 02:40

새옹지마(塞翁之馬): 인생에 있어서 길흉화복은 항상 바뀌어 미리 헤아릴 수가 없다는 뜻


북방 국경 근방에 점을 잘 치는 늙은이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기르는 말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도망쳐 오랑캐들이 사는 국경 너머로 가버렸습니다
. 마을 사람들이 위로하고 동정하자 늙은이는 "이것이 또 무슨 복이 될는지 알겠소" 하고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 후 뜻밖에도 도망갔던 말이 오랑캐의 좋은 말을 한 필 끌고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축하해줬습니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그것이 또 무슨 화가 될는지 알겠소" 하고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좋은 말이 생기자 전부터 말 타기를 좋아하던 늙은이의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달리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들이 장애인이 된 데 대하여 위로하자 늙은이는 "그것이 혹시 복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하고 태연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런 지 1년이 지난 후 오랑캐들이 대거하여 쳐들어왔습니다. 장정들이 활을 들고 싸움터에 나가 모두 전사하였는데 늙은이의 아들만은 다리가 병신이어서 부자가 모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회남자(
淮南子) –

 

우리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은혜스럽지만 어떻게 보면 너무 인생을 무책임하게 사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새옹지마의 마음을 갖고 사는 건 우리 앞에는 언제나 희망이 놓여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 모두 새옹지마처럼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새옹지마라는 말도 있지만, ‘엎친 데 덮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좋은 일이 계속되는 날도 있고, 나쁜 일이 계속되는 날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를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지금 당장은 지긋지긋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그 때가 그리운 법입니다. 그런데 이건 시간이 만들어주는 착각일 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그리워지는 법입니다. 그것이 어렵고 힘들었던 일이었을지라도 말이죠.

 

새옹지마와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은 좋아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산제물로 바쳐야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모리아 산으로 삼일 길을 걸어가면서 수많은 갈등에 휩싸였을 겁니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았다고 좋아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니요! 차라리 아들을 영영 못 낳았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던 데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끝에는 결국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입니다. 마지막이신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는데 서투릅니다. ‘제물은 어디에 있냐?’고 묻는 아들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끝간데 모르는 갈등 속에서 대답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그야말로 저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영혼의 탄식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의 인생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새옹지마와 같지만,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인생은 새옹지마와 같은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우리의 인생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붙듭시다.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해일속(滄海一粟)  (1) 2012.03.15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 意自見)  (1) 2012.03.06
백중지세(伯仲之勢)  (1) 2012.02.05
사불급설(駟不及舌)  (2) 2012.01.28
의심암귀(疑心暗鬼)  (1) 2012.01.20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15. 06:59

2012 2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왕하 5:1-14, 1:40-45

제목: 예수님의 소외

 

마가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외에도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이야기가 복음서에 곳곳에 나옵니다. 레위기서에 보면 나병환자는 공동체에서 분리되어서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소외된다는 것은 늘 마음이 아픈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외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열심히 일하는 것도, 열심히 인간관계를 쌓은 것도 모두 소외되지 않으려는 인간의 노력입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부정의 개념은 일차적으로 의 개념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 부정은 제의적인 부정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나아갈 수 없는 부정한 상태를 부정이라고 표현합니다. 부정한 자는 진영 밖으로 나가서 그 부정한 상태가 온전히 나아질 때까지 거기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을 꺼렸습니다.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부정한 사람과 접촉을 하면 자신의 몸도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부정하다는 것이 제의적인 부정이긴 하지만, 이것이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제사) 드릴 수 없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굉장히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고,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는데, 부정한 상태에서는 그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니까 매우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병 낫기를 간구합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상적인 일이 아닙니다. 우선 나병환자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면 안 됩니다. 이가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면 안 된다는 율법의 규정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부정한나병환자와 접촉을 하면 안 됩니다. 당신도 부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는 그러한 율법의 규정이 허물어지는 사건을 전개합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와 대면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굉장히 획기적인 것입니다. 이 사건 자체를 통해서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율법보다 크신 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달인데,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 자체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만이 깨닫게 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에 분노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들은 율법에 근거해서 분노했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도 그 분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일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이 드러나게 행동하지 못하게 되신 것이 그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간절했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이 병에서 나음을 받아 삶을 회복하고 싶었을 겁니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고 파괴하고 있는 이 병을 고치지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릎 꿇었다는 것은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 겁니다. 이는 위에서 설명 드렸듯이 율법을 깨는 행동이었으니까요. 병이 나아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싶어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총을 담지하고 있는 율법을 깬다는 것은 거의 자포자기 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마음인 것이죠.

 

율법을 깨고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꿇어 엎드려 간구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여기서 원하시면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willing’입니다. 시행하는 자의 마음상태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마음 내키지 않은데 하는 행동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을 표현할 때 ‘willing’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곧 이어 나오는 예수님의 반응이 나병환자의 간절함과 맞아 떨어집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불쌍히 여겼다는 것 또한 마음 상태를 알려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겉으로만 고쳐주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된 상태이지요.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위에서 설명 드렸듯이, 이 또한 율법을 깨는 행위입니다. 일반인은 절대로 부정한 사람과 접촉을 하면 안 됩니다. 물론 부지불식 간에 그럴 수는 있습니다만, 대놓고 그렇게 접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무시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이는 곧 죄로 간주됩니다. 그러니까 나병환자의 행동이 율법을 깨는 행동이었듯이, 예수님의 행동도 율법을 깨는 행동이었다는 겁니다. 이는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옥이야 금이야 생각하는 율법보다 크시다는 뜻입니다.

 

나병환자와 예수님의 사이에 오고 간 사랑의 행위는 나병환자의 병을 낫게 합니다. 예수님은 깨끗함을 입은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무질서 하게 율법을 깨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말씀하시듯이,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시지 율법을 허무는 자가 아니십니다. 율법의 완성이 무엇인지, 율법의 온전한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고자 한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가서 그의 병이 나았음을 보이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이렇게 낫게 된 전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나병환자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병이 낫게 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이 온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다시 공동체로 들어가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나병환자의 삶과 예수님의 삶이 역전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소외된 삶에서 회복되었는데, 예수님은 이제 나병환자로 인해 소외된 삶을 사시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회복시키신 그 일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소외 당하십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그 일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행하는 일을통해서 자신이 소외 된다고 한다면, 그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이로운 일,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는 일,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소외 당하더라도 당신이 하는 일이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면 서슴지 않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willing) 소외 당하십니다. 그 소외 당하시는 장면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잘 나와 있지만, 복음서에서 전하는 결정적인 소외 사건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외침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에게까지 버림 받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소외를 통해서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소외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소외는 우리의 소외를 거머쥐신 구원의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4-5).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소외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없는 구석에 가서 슬피 우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병 때문에 고생하는 자, 마음이 아파 고생하는 자,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허덕이는 자, 죄악에 매여 삶을 허비하는 자가 없기를 바라십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소외의 문제입니다. 이는 모두 우리를 생명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느 누구도 생명으로부터 소외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소외를 담당하시고, 대신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당신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에게든지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니 두려워 하지 마시고, 망설이지 마시고,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 나아갔던 나병환자처럼 여러분의 삶에 있는 소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그 문제들, 여러분의 삶(생명)을 괴롭히고 있는 그 문제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기꺼이(willing)’ 짊어지십니다.

 

이방인이었던, 아니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도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삶을 괴롭혔던, 자신을 생명으로부터 소외시켰던 나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이방인도, 적국의 장수도 고쳐주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이야 얼마나 더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우리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예수님께 나아갔던 나병환자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의 생명을 헤치는 그것들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에게는 생명’, 즉 사는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날마다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 2012.02.23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자가 되라  (1) 2012.02.22
복음은 능력이다  (1) 2012.02.06
사랑은 덕을 세운다  (3) 2012.01.30
종말론적 신앙  (1) 2012.01.23
Posted by 장준식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게 이 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 파울로 코엘료가 쓴 연금술사라는 책의 한 대목입니다. 

 

옛날부터 연금술은 일종의 마술로 여겨져 왔습니다. 값싼 철이나 납 같은 금속을 잘 정련해서 값비싼 금으로 만드는 기술입니다. 고대인의 눈에 이러한 기술은 마술로 보였겠죠. 현대 기술로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특정 원소들에게 특정 에너지의 방사선을 투사시키면 원자의 핵이 변형되면서 금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성공률과 비용입니다.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률도 낮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금을 만드는 것 자체가 경제적 효용성이 없다는 것이죠. 성공률이 가장 높은 광물이 백금인데, 백금은 금보다 더 비싸기 때문에 비싼 백금으로 그보다 더 싼 금을 만드는 일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어서 시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실 연금술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매우 철학적입니다. 납과 같이 무지몽매한 인간을 금과 같이 쓸모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연금술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죠. 다른 금속을 금으로 변화시키려 한다든지, 사람을 금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데에는 금이라는 금속이 가지고 있는 속성 때문입니다. 금은 다른 금속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개 대부분의 광물은 시간이 지나면 다른 성분을 지닌 다른 광물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은 변화라는 것을 모르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모습 그대로 있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중에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10). 사실 최고의 연금술사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흙과 같은 나를 단련하셔서, 정금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십니다. 정금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변해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절대 바꾸지 않는, 변함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금보다도 더 귀한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는 정금같이, 정금보다 더 귀한 존재로 은총을 누리면서 살아갈 것이요,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먼지 티끌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정금보다 귀하게 만들어 주시는 연금술사,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인생을 맡겨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인생을 복되게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2. 8. 00:59

아내는 성자다

아내는 하루하루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밥짓기

설거지

빨래

방청소

현대인들이 시간낭비라며

끔찍이도 싫어해서

감정이 없는 기계들에게 맡겨버리는 그 일들을

아내는 몸소 감당하느라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책을 읽지 못해 바보가 되어 가고

예배를 드리지 못해 영성이 바닥나고 있다고

때로는 투덜거리지만

아내는 여전히 집안 일 하느라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누가 인생을 보람차게 사는 사람일까

누가 영적인 삶을 풍성히 누리는 사람일까

 

사람들은 인생을 보람차게 살기 위해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다가

실증 나면 금새 집어치우고 만다

사람들은 밀려오는 인생의 허무함을 달래보려

영적인 삶을 추구해 보지만

인내를 가지고 진짜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어찌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한다고

보람찬 인생이 될 수 있으랴

인생의 허무함이 어찌 한 두 번의 영성 수련으로

극복되고 가려질 수 있으랴

 

인생은 어차피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 아니던가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그것과 공명을 이루어내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나는

밥짓기

설거지

빨래 방청소

처럼

소소해 보이는 일들을 위해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성실히 감당하는 아내를 보며

인생의 참된 보람이 무엇인지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성실히 살아내는

아내야 말로 다름아닌 성자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강간 당했다  (1) 2012.08.24
해님과 바람과 아들  (2) 2012.02.21
우루사  (1) 2012.01.26
민주주의자 김근태  (1) 2012.01.05
종말론적 날파리  (1) 2012.01.04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6. 06:22

2012 2 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가복음 1:29-39

제목: 복음은 능력이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는 것에서부터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을 내쫓을 것을 행하십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과 관련이 있는 행동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향해 온 존재를 트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어울리지 않는 악의 세력이 물러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도여행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한 집안의 어머니가 누워 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계신 관계로 그 집은 당연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을 겁니다. 악은 늘 이러한 모습을 띱니다. 그 위치에서 본인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하나 비면 주변 사람들의 삶이 여간 버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축구 경기에서도 선수 하나가 반칙을 여러 번 해서 퇴장 당했을 경우, 그 선수가 맡았던 포지션이 비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에게 그만큼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악은 그런 식으로 공동체의 활기를 빼앗고, 공동체를 우울하게 하고, 공동체를 수렁에 빠뜨립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장모의 열병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열병을 우습게 볼 수 없습니다. 옛날은 요즘과 달리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병은 곧 죽음으로 치달을 수 있는 치명적인 병이었습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예수님께서 일으키십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이것 또한 장황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간단하게, 몇 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몇 마디 안 되는 짤막한 표현이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개의 단어에 지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으키다(egeiro)”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종들다(diakoneo)”는 것입니다. 우선 일으키다라는 단어는 마가복음에서 매우 강력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으키다는 행위는 어떤 사람의 힘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신 것처럼, “일으키다는 힘이 전가되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몬의 장모가 예수님에 의해 일으킴을 받았다는 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시몬의 장모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볼 때 조심해야 할 것 중 하나인데,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일으키다라는 말이 이렇게 의미 있는 말이 되는 이유는 마가복음 16 6절에서 예수님은 이 단어를 본인에게 직접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 6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기사가 담겨 있습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여기에서 시몬의 장모에게 쓰였던 일으키다라는 단어는 그가 살아나셨고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조금 잘못된 번역이고, 그 어감이 살아나지 않는 번역입니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풀어서 번역하자면,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졌다.”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장모가 일으켜진 사건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사흘만에 일으켜진 부활 사건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일으켜진 사건과 예수님이 부활한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위에 임한 하나님의 능력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몬의 장로가 일으킴은 받은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으킴의 사건은 곧바로 시몬의 장모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종 드는 일과 연관 됩니다. 우리가 눈여겨 살펴야 할 두 분째 단어가 여기서 등장합니다. 우리 나라 말로 수종들다로 번역된 이 단어는 영어로 “serve”입니다. 사실 수종들다는 어감이 좋지 못합니다. 시쳇말로 누구 밑에서 딱가리 또는 시다바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심부름 정도의 하찮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수종들다보다는 우리에게 조금 더 친숙하고 점잖은 단어로 번역하면 섬긴다정도가 나을 듯 합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서 일으킴을 받아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종들었다는 것은 심부름 정도의 하찮은 일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이로움을 끼칠 정도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이것 또한 예수님 당신의 사역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똑 같은 단어를 당신의 사역의 성격을 설명하시는 데 사용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45). 시몬의 장모가 수종들었을 때를 표현했던 그 단어와 예수님께서 섬기려오셨다고 말씀하실 때의 그 단어는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시몬의 장모의 섬김처럼 수종 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열병에서 일으킴을 받은 시몬의 장모가 본문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단순히 병석에 누웠다 고침을 받은 가엾은, 그러나 축복받은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그 몸에 지닌, 섬기는 참된 제자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진술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후에 당신에게로 오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복음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병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질병이 아닙니다. 병원 가서 치료 받고, 약 몇 알 먹으면 낫게 되는 그러한 단순한 병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은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병은 악의 보이는 실체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병든 사람은 우선 가정의 큰 짐이 됩니다. 가정의 각자 구성원은 곧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자녀를 많이 낳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병은 가정의 경제를 위태롭게 했습니다. 이것은 곧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빼앗아 가는 데까지 연결됩니다. 가정이나 공동체에서의 영예로운 지위를 박탈당함으로 소외된 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요즘 시대는 병이 이러한 식으로 가정이나 사회에서 작용하지 않습니다. 가정에 병든 사람이 한 명 있다고 그 가정의 생계가 치명적으로 어려워지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웬만한 병은 모두 치료가 가능합니다. 또한 병들었다고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요즘에 우리가 병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러한 느낌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병을 바라보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고대 사회)의 사람들에게 이란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악의 실체였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칠 때 귀신이 나갔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병을 일으키는 악의 실체를 귀신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이렇게 악의 실체가 무너진다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실제적인 세력이 맥을 못 추고 물러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며 하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기쁜 소식(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드는 원인이 귀신 때문이라는 것을 믿는 사회에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문제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아마도 사는 동안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 문제들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온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삶 속에 실제적으로 깃드는 능력입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 때문에 열병에 걸린 것처럼 누워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리고 우리가 속한 더 큰 공동체 내에서도 그저 주저 앉아 웅크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는 이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들여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우리에게 들려오는 이 복음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신 그 목적에 맞게 우리 각자를 있어야 할 자리로 복귀시키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듣고도 일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헤매고 있는 이유는 그 복음에 우리의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시몬의 장모의 손에 닿았다는 것은, 시몬의 장모가 복음에 온 존재를 던졌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시몬의 장모는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수종들 수 있었습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온 존재를 걸고 살 때 우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결정적인 사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이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 자체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집중하면서 살아갈 때 복음의 능력, 일으킴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집중하면서 살아갈 때 일으킴을 받아 우리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음의 능력에 우리의 삶을 맡겨 봅시다. 그 능력이 우리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병든 몸을 낫게 할 것이며, 우리의 병든 마음을 치유할 것이며, 우리의 무너진 삶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해야 하는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에 온 삶을 걸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 시간 결단하십시오.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뒤 덮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립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자가 되라  (1) 2012.02.22
예수님의 소외  (2) 2012.02.15
사랑은 덕을 세운다  (3) 2012.01.30
종말론적 신앙  (1) 2012.01.23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1) 2012.01.16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2. 5. 05:05

백중지세(伯仲之勢): 인물, 기량, 지식 등이 서로 비슷해 우열을 가릴 없다는


위나라 황제 조비는 '전론(
典論)'에서, ()나라의 대문장가인 부의와 반고 두 사람의 문장실력에 대해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뜻으로문인들이 서로를 경시하는 것은 예부터 그러하였다. 부의와 반고의 실력은 백중지간이었다. [文人相輕 自古而然 傅儀之於班固 伯仲之間耳]'라고 평했습니다. 백과 중은 본디 형제의 순서를 구별하여 부르던 말로 맏형을 백, 둘째를 중, 셋째를 숙(), 막내를 계()라 불렀습니다. 따라서 백중은 형과 아우 또는 맏이와 둘째라는 뜻인데, 형제는 보통 외모나 품성이 매우 비슷하여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을 백중지간이라고 하였고 후에는 백중지세라는 말이 더 많이 쓰였습니다. -전론(典論)-

 

자본주의의 새로운 삶의 원리인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신자유주의 기본 원리는 무한경쟁입니다. 경쟁은 기본적으로 우열을 바탕으로 진행됩니다. 상대를 이기지 못하면 내가 밑으로 내려갑니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원리입니다. 이게 사람이 사는 세상인지, TV에서만 보던 동물의 세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경쟁은 사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타락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같은 가치로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것은 더 귀하고, 어떤 것은 덜 귀한 것이 없습니다. 자연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 것도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인류 최초의 가정에서도 타락한 인간의 경쟁심이 살인을 불러왔습니다. 예배는 경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경쟁적으로 예배 드리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이 그것입니다.

 

경쟁이 들끓는 곳일수록 타락이 극심해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고린도 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경쟁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급기야 자신들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서로 줄을 세웠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2).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무엇인지 조금만이라도 맛본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경쟁이라는 단어를 그의 사전에서 지워버리게 될 것입니다. 경쟁은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 만들어낸 타락한 행동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백중지세입니다. 누가 누구보다 잘 난 사람이 없고, 모두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대로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야 할 형제자매입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이 세상에 저항하십시오. 경쟁해서 이기려 들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요 계명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의 방식입니다. 경쟁하는 자가 이기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이기는 세상이 천국입니다. 이 땅 위에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고사성어와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 意自見)  (1) 2012.03.06
새옹지마(塞翁之馬)  (1) 2012.02.17
사불급설(駟不及舌)  (2) 2012.01.28
의심암귀(疑心暗鬼)  (1) 2012.01.20
대공무사(大公無私)  (2) 2012.01.13
Posted by 장준식

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III

2.2. 소명과 자질의 변증법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소명이 먼저일까? 자질이 먼저일까? 우리는 흔히 소명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아니 소명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소명의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의 소명의식이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듯 하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이 꽂히는 순간, 더 이상 아무 것도 귀에 안 들리고 눈에 안 보인다. 그때부터 소명의식에 대해서 의심을 갖는 것은 불신앙이 되어 버리고, 자신의 목회적 소명의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면 모두 사탄의 농락으로 여긴다. 정말 소명이 전부일까?

 

한국교회는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부족하다. 그리고 소명에 대한 검증 절차 또한 부실하다. 여기에는 문화적인 이유와 신학적인 부재의 이유가 도사리고 있다. 일단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소명에 대한 성찰을 신학적으로 하지 못하게 만든다. 소명을 무당 신내리듯한 그 무엇쯤으로 생각한다. 신학교를 다닐 때 수업 시간에 한국 샤머니즘의 대표적인 의식인 굿에 대한 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영적 존재에게 점지를 받은 예비 무당은 그때부터 무당수업을 받는데, 자신이 평생 모시고 살 영적 존재에게서 신 내림을 받을 때까지 정성스럽게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신 내림을 받고 무당으로 안수받는 마지막 의식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작두타기이다. 신내림을 받은 처녀 무당(무당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무당이라는 뜻)은 맨발로 작두 위를 걷고, 날 선 칼을 깔아놓은 그네를 타는데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참으로 신기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무당의 본업을 수행한다. 신기한 것은 예비 무당이 영적 존재로부터 점지받는 과정이 예비 목회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받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비 무당이 점지받고 나서 고민하는 모습이 소명받고 고민하는 예비 목회자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점지 받은 예배 무당은 결국 영적 존재의 점지(부르심)순종한다. 예비 목회자가 그러하듯.

 

이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은 분명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무당의 신내림과 목회자가 소명 받는 것이 같을 수 있어?” 물론 본직적인 차원에서는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구별하고 구분해낼 수 있는 신학적이고 방법적인 잣대를 구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잠재의식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정신에 오랫동안 깃들어온 샤머니즘적인 정서를 어떻게 걸러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목회자가 무당 신내리듯이받은 소명은 아예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검증을 무색하게 만든다. ‘내가 하나님께 소명 받았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소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문헌을 보면 한 사람이 목회자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기나긴 성찰과 검증을 한 기록들이 즐비하다. 교회는 처음부터 소명에 대하여 성찰하고 검증했다는 뜻이다. 소명에 대하여 성찰하고 검증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라, 신앙적인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소명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검증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 경향이 강한 한국 교회에서 소명에 대하여 성찰하고 검증하지 않는 것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꼼꼼하게 한 신학자이다. 그는 소명을 성직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성직세속직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명을 성직에만 국한시키는 한국교회의 관행과는 완전 딴 판이다. 칼빈은 소명을 직업과 연관시킨다. 칼빈은 직업(calling)’소명(calling)’과 같은 단어를 써서 표현한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 직업이란 소명과 같은 것이다. 우리 말로는 칼빈의 직업 개념을 천직이라고 번역한다. 소명을 직업(천직)의식으로 확장시킨 칼빈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소명이 아니라, 자질이 된다. 이를 목회직에 적용해 보면, 목회직을 수행할 때 중요한 것은 소명이 아니라 자질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것이 있다. 소명 없이도 자질만 있으면 목회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칼빈의 소명 개념은 일차적으로 신앙을 전제한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성직과 세속직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성서의 한 구절을 들어 주석적으로 더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요한복음 1 43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다나엘이 예수께 소명 받는 장면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을 부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1:51). 이것을 꼼꼼히 주석하기 위해서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지만 지면이 허락되지 않으므로 핵심만 짚고 넘어가자면, 소명(부르심)이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명의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소명의 개념이다. 우리는 자꾸 소명의 개념을 무엇인가를 하는 것의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정작 복음서에서는 소명을 무엇인가를 아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들(, , 죽음)에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둘째, 인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이 진리에 나를 매는 것, 이것을 토대로 삶을 사는 것, 이것에 모든 인생을 거는 것이 소명(부르심)’ 받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된 주석작업을 바탕으로 좀 더 자세히 씌어진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여기 블로그에서 "부르심이란 무엇인가"라는 설교문을 읽어보시라.)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의 소명 설화를 토대로 소명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나면 칼빈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소명은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이지, 우리가 언뜻 이해하고 있듯이 어떤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부르심의 범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소명을 받았다면, 칼빈이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은 나의 천직(calling, 소명)’이 되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은 목회직을 수행하는 사람만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의사를 하든, 변호사를 하든, 택시기사를 하든, 식당 아줌마로 일하든, 환경미화원이든, 무엇을 하든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명과 자질의 변증법이 발생한다. 존재론적으로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소명이 아니라, 자질이 된다. 목회직은 목회의 소명 받은 사람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에 자질이 있는 사람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직이든, 판사직이든, 그에 대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그 일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어떠한 직이든 그 일을 수행하는 데는 갖추어야만 하는 자질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여기서 목회자의 교권이 왜 무너졌는지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소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없는 자가 목회직을 수행하고 있고, 목회직에 대한 자질이 없는 자가 소명이라는 자의적인 착각에 빠져 목회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바야흐로 21세기이다. 아직까지도 잘못된 소명의식에 사로잡혀 목회적 자질을 갖추고 있지도 않으면서 목회직을 수행하려 드는 어리석은 목회자의 영성은 분명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의 영성에도 훨씬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16세기를 거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21세기에서 목회할 수 있다는 말인가!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후 준비  (1) 2012.02.19
연금술사  (2) 2012.02.10
벌집을 건들지 말라  (1) 2012.02.01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법  (1) 2012.01.26
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 교권 회복의 길  (1) 2012.01.18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