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12. 1. 5. 02:38

민주주의자 김근태

 

주님,

민주주의자 김근태를 당신 곁으로 불러 가셨더군요.

그보다 더 유명한(?) 인물인 김정일이 죽었을 때는

그냥 조금 놀라기만 했는데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죽음 앞에서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 앞에 붙은 민주주의자라는 수식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어두웠던 시절,

희망의 빛을 비추기 위해 어둠과 싸웠던 이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늘 그렇습니다.

빛이 어둠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두웠던 지하실로 끌려가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살을 찢어놓고 피를 거꾸로 돌게 하는 고문을 당하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과 마음이 어눌해져서

평생을 아픔 가운데 살아야만 했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던지

치과에서 치아 치료를 위해 밝히는 등불조차

고문대를 생각나게 했답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너무 일찍 당신 곁으로 갔습니다.

이제 64세인데, 요즘처럼 살기 좋은 시대에는 한창 때 아닙니까?

너무 일찍 희망의 빛이 꺼진 것이 아닙니까?

어둠이 가한 공격 때문에 이렇게 빛이 사그라든 것 아닙니까?

그에 반해 어둠의 하수인이었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이 좋은 시대를 너무 만끽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더 당황스러운 것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현재 목사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어찌된 노릇입니까?

 

우리는 당신의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빛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어둠은 빛 가운데로 나온 것 같은 이 형국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 사태를 보고 당신의 정의(Justice)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합니까?

 

우리는 당신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도 어립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당신의 정의를 통해서

당신이 하시는 일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러나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한 어둠.

그도 결국 어둠에 무참히 짓밟혀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오늘의 이 사태는 정의가 아니라 절망으로밖에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어둠에 무참히 짓밟혀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빛으로 오신 예수, 당신의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정의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 배웁니다.

 

당신이 하시는 일은 늘 우리의 상식과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습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이렇게 당신 곁으로 갔지만

그가 뿌린 민주주의 씨앗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대한민국, 아니 온 우주만물에 부활의 꽃처럼 피어나게 될 것을.

그리고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역사적으로 용서한 이근안은

당신의 섭리 가운데 심판 받게 될 거라는 것을.

 

민주주의자 김근태여!

편히 잠드소서.

이 세상에서 빛은 어둠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 곁에 있는 한,

언젠가는

빛은 어둠을 능히 이긴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거기 그렇게 누워 있는 당신이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 우리나

언젠가는

그 진리를 꼭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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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2. 1. 4. 05:54

종말론 책에서 종말을 맞이한 날파리 한 마리를 보았다

너무도 쬐끔해서 한 글자조차 가리지 못하는 몸뚱어리가 글자인양 누워있었다

사실 거기에 써 있는 글자들은 읽어내기가 너무 어렵다

아직 우리에게 닥치지 않은 알 수 없는 미래를 논하는 글이기에

약간만 딴생각을 해도 따라가기 힘든 논리들이다

바로 그러한 종말론 책에서 종말을 맞이한 날파리는

종말론 책을 읽으며 종말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나보다 더 종말을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그 얼마나 위대한 종말인가?

살다가 종말을 맞이하는 것도 위대한 일인데

종말을 논하는 종말론 책에서 종말을 맞이했으니

이 날파리는 참으로 행운아다

나는

한 글자조차도 가리지 못하는 몸뚱어리를 종말론 책에 파묻으며 종말을 맞이한 이 날파리에게서 종말을 이해해보려고 즐비하게 늘어지는 논리를 펴는 이 책에서보다

많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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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2. 1. 4. 01:58

화룡점정(畵龍點睛):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냄을 이르는


()나라의 장승요(張僧繇) 금릉에 있는 안락사(安樂寺) 마리를 그렸는데 거기에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히 생각하여 까닭을 묻자 장승요는 눈동자를 그리면 용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리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며 용이 벽을 차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용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수형기(水衡記)-

 

신앙생활에서 화룡점정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신앙을 완성시키는 요소일까요? 사람들은 흔히, 말씀대로 사는 , 믿음의 행위가 화룡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신앙생활을 완성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여깁니다. 특별히 성경 책인 야고보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생각이 굉장한 설득력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건 야고보서를 잘못 읽고 있는 겁니다. 야고보서가 말하고 있는 믿음보다 행위가 중요하다 것도 아니고, ‘행위가 절대적이다 것도 아니고, ‘믿음과 행위는 같은 값을 가진다 것도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사는 자의 모습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길라잡이라고 있는 것이죠. 그것을 통해서 믿음의 속성을 파악할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형상을 보이게끔 해주는 일종의 성례전(Sacraments)라고 있는 것이죠. 야고서는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이게끔 해주는 굉장히 중요한 성경입니다. 눈과 귀를 지니고 사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믿음을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보이지 않는 믿음을 우리의 눈과 귀로 있도록 만들어 것이죠.

 

신앙생활의 화룡점정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음이 화룡점정이라는 뜻은 구원과 연결이 되는데, 용의 눈에 하나를 찍어 용이 살아 움직여 하늘로 올라가게 것처럼,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화룡점정은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마음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원은 믿음으로 오는 것인데,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니까 결국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앙생활의 화룡점정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있는 것이죠.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존재를 기울여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 않는 신앙생활은 화룡점정이 아니므로 살아 움직여 지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들의 나라이지 죽은 자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화룡점정 해야 살아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화룡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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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2. 06:14

2012 1 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43:1-8

제목: 하나님의 능력

 

2012년도를 맞이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어릴 적에 이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저 같은 경우도 그런 상상을 가끔 합니다. ‘나는 2050년도에 살아 있을까?’ 여러분들도 그런 상상을 해 보셨을 겁니다. 어릴 적에 2012년도에 살고 있을 상상을 해보셨겠죠. 새로운 해를 맞는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새해는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새로운 해를 맞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새롭게 맞이한 2012년도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이 소중한 2012년도에 여러분은 어떠한 소망과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인간 사는 것은 모두 비슷비슷 하기에, 건강, 자녀, 사업 등 우리가 삶을 살면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들이 모두 형통하기를 소망하실 겁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12년도 여러분이 소망하시고 계획하시는 모든 일이 형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형통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첫째, 서로가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마시고 디딤돌이 되어야겠습니다. 내 소망과 내 계획만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내 소망과 내 계획이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소망과 계획도 소중합니다. 내 소망과 내 계획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헤치는 일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소망, 계획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는 붙들고 있지 말아야겠습니다. 다 아시는 통계이지만 우리가 근심걱정 하는 문제의 95%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이라고 합니다. 그런 문제들을 붙들고 있어봐야 정신과 몸만 상하고 맙니다. 수명을 스스로 단축시키고 맙니다. 그런 문제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아뢰어야 합니다. 올 해에는 더욱더 하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와 아뢰어서 건강하고 형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의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당연히, 나라의 회복이었을 겁니다. 고향 땅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이들의 가장 큰 소망이었을 겁니다. 남의 나라에 잡혀 와서 산다는 것이, 아무리 그 나라에서 잘 먹고 잘 살아도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표면상 그랬다는 겁니다. 표면상으로 이들의 소망은 고향 땅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곳을 들여다 보면 도사리고 있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포로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나라가 망하는 수치를 당하고 있는가?” 이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해서였습니다. 이 깨달음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겪는 어려움을 보면서 우리도 그런 생각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그럴 때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불신앙의 한 형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해서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온 건지 아닌지 분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는 우리에게 닥친 그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하나님이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건강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더 찾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 질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가 잘 안 되면 그 일에 신경 쓰느라 하나님을 찾는 일이 드물어 질 수 있습니다.

 

포로생활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된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마음의 간절한 소망은 나라가 회복되어 고향 땅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이룹니까? 나라가 없어진 마당에 자신을 구원해 주러 올 왕도 군사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까?

 

이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었을 때 이들은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바알 신이나 아세라 신 같은 우상들이 자신들의 삶과 더 관련이 있고 그들에게 실질적인 능력을 베풀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농사의 신이요 풍요의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곳에 정착해서 농사 짓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와 풍년을 바알과 아세라가 가져다 준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우상의 능력에 더 기대었던 것뿐입니다. 우상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형상도 없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들은 믿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렇게 따랐던 우상, 바알과 아세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들은 그야말로 허상이고 우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에 기대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회복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은 바알이나 아세라가 아니라, 그들이 능력이 없다 생각하여 무시했던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겪으면서 이스라엘은 믿음이 회복되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귀로, 손으로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동안 이들에게는 눈이 없었습니까? 귀가 없었습니까? 손과 발이 없었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눈과 귀로 우상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손과 발로 우상에게 예배 드렸던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눈과 귀, 그리고 손과 발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듣고 깨닫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생활 하고 있는 이들에게만 들려졌던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서 왕조를 이루어 살고 있었을 때에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기 전 광야에서 살 때도, 광야에서 헤매기 전 애굽에서도, 애굽으로 들어가기 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 때에도 이들에게 들려졌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 말씀이 이 귀에 들리십니까?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하나님께서는 늘 이렇게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닫고 있지 못했을 뿐입니다. 5-7절 말씀은 이렇게 사랑하시는 당신의 백성의 소망을 바로 그들이 무시했던, 능력이 없다고 등한히 했던,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고,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소망인 나라의 회복, 포로귀환을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겪는 삶의 어려움들이 이 눈과 귀를 막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겪는 삶의 어려움들이 이 손과 발을 묶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그 어려움들 때문에 이 눈과 귀가 막혀버리면 오늘 우리가 읽은 1절의 귀한 하나님 말씀이 안 들립니다. 이 손과 발이 교회에 나오는 것조차 힘들어 집니다.

 

우리의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해 주는 능력이 어디에 있다고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나라가 망해가는 위기에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들(그것도 정말 위대한 선지자들인 예레미야와 이사야 같은)을 통해 망해가는 나라를 실질적으로 구해주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셨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외치다가 왕과 고관들에게 붙잡혀 죽을 뻔한 위기를 많이 넘깁니다. 그러나 왕과 고관들, 그리고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줄타기 하다가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십시오. 몸이 아프신 분에게 약 먹지 말고 병원도 가지 말고, 교회에 나와서 기도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12시에 야참을 먹으면서 이것 먹고 건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건강해집니까? 건강 하려면 야참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몸에 해로운 것 먹으면서 건강하길 바라는 것은 공부 안 하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길 바라는 것과 똑같고 운전대 놓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운전해 주실 줄 믿는 어리는 석은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약을 먹어도 그 약이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약의 효과가 내 몸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에 따르는 좋은 결과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운전은 내가 하지만 내가 운전해서 목적지까지 잘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셨기 때문에 목적지까지 잘 도착한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 삶의 어려운 문제들, 건강, 자녀, 가정, 사업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회복시켜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것이 보이는 눈, 그것이 들리는 귀, 그것으로 인해 손과 발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귀한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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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12. 30. 04:49

사인선사마(射人先射馬): 상대편을 쓰러뜨릴 때는 먼저 상대편의 힘이 되는 것을 무너뜨리라는 말 / 사람을 쏘려면 그의 말부터 쏜다


이는 두보(
杜甫)의 시 '전출새(前出塞)' 에서 나온 말입니다.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을 쏘려면 먼저 타고 있는 말을 쏘고[射人先射馬], 적을 사로잡으려면 먼저 적의 왕을 사로잡으라[擒敵先擒王]. 사람을 죽이는 것도 또한 한계가 있고[殺人亦有限], 나라를 세우면 스스로 국경이 있다[立國自有疆]." 두보가 사인선사마에서 주장하는 것은 전쟁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죄 없는 백성들을 잘 보호하자는, 즉 인간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자는 뜻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의미가 변해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대편이 의지하거나 버티고 있는 대상을 먼저 쓰러뜨리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 두보(杜甫)의 시 '전출새(前出塞)' –

 

이 고사성어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가 참 좋습니다. 전쟁을 하더라도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특별히 인간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자 했던 시인 두보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물론 전쟁은 이 땅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악 중의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생명입니다. 생명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아마도 생명이란 하나님을 닮아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이 신비한 것처럼, 생명도 신비한 것이죠. 그래서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만큼 존중 받아 마땅합니다.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제 1의 사상도 결국 생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일컬어 생명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하나님께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생명에서 멀어진 상태를 일컬어 라고 부릅니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속성 중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숨을 쉬고 살고 있다 해서 생명을 지닌 존재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쉼 쉬는 일일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것 같지 않기도 합니다. 생명이 쉼 쉬기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숨 쉬는 일에만 몰두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숨을 쉬고 있다고 해서 살아 있다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한 참 부족해 보입니다. 숨 쉬며 살고 있는 우리는 생명을 아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모르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생명이란 늘 우리에게 낯익은 것 같지만 매일 낯설게 다가옵니다. 바로 하나님처럼 말이죠. 생명의 신비는 종말에나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드러난 참생명의 세계에서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생명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생명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온 맘 다해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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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화의 선언
(
23:13-36)

 

마태는 숫자 7일 좋아한다. 귀신이 등장을 해도 일곱이 등장하고( 12:45), 비유을 해도 일곱 개의 비유를 들고( 13), 용서를 해도 일곱의 숫자를 들어 설명하며( 18:21-22), 형제를 등장시켜도 일곱 명을 등장시킨다( 22:25). 그러니 당연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를 선언할 때도 일곱 개를 내세운다. 일곱은 완전함을 뜻한다. 이러한 일곱의 숫자를 들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꼬집는 것은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위선과 잘못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위선과 잘못이 조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온전히, 꽉 찼었다는 뜻이다. 굳이 얼마나 위선이 흘러 넘쳐났는지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일곱이라는 숫자를 통해 위트 있게 표현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시작되는 화의 선언을 보면 이것이 도대체 누구에게 화를 선언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이는 분명히 마태가 유대교의 위선과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이것은 유대교의 위선과 잘못을 지적하는 가 아니라, 마태복음을 경전으로 읽고 있는 기독교의 위선과 잘못을 지적하는 처럼 보인다. 그 중 두 번째 화 선언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두 번째 화 선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힘써 얻은 교인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천국으로 인도하겠다고 불러놓고 결국 위선된 모습으로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이 형국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박하와 회향과 근초에 대한 십일조까지 드렸다. 사실 이는 율법에서 정하고 있는 십일조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까지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정확한 십일조를 드리려고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그당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종교적 경건 행위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고 그것을 토대로 유대 공동체 내에서 윗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말씀을 지키려는 그 마음이야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행위를 꼬집는 마태의 진술은 무엇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무엇이 신앙의 근본인가를 보여준다.

 

마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위선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지적했다고 진술한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23:23). 여기에서 우리는 십일조의 정신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 레위인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이는 십일조는 원래 관계의 개념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회복하는 것에 있었다. 십일조는 관계를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어떻게 정확하게 드릴까, 즉 십일조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십일조를 통해 회복해야 할 관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자. 결혼할 때 반지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확인해 주는 징표에 불과하다. 관계가 핵심이다. 신랑과 신부 사이에 관계가 좋으면, 그것을 확인해 주는 반지는 꽃반지가 되어도 무방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관계는 충분히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랑과 신부 사이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이들 사이는 10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고 받는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인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위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맺어지지 않은 데서 온 것이란 뜻이다. 올바른 관계는 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표현할 수 있다. 올바른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한 거다. 자기 자신을 극대화시키는데 하나님을 이용한 것뿐이다. 그러니 그들의 종교적 행위는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찰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표현해야 할 종교적 행위가 자기 자신을 극대화시키는 데 쓰이고 있으니 이것이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결국 율법의 요약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이들은 온통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했던 것이다. ‘자기 집중’, 이것이 성경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는 원죄의 원형이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다. 자기 집중’, ‘교만을 종교 행위의 탈을 쓰고 감추었으니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일 리 만무하다.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종교 행위의 탈을 쓴 그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 행위의 탈을 쓰고 뻔뻔하게 위선적인 행동을 일삼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경전으로 읽고 설교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똑 같은 일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일이 그 위선과 잘못을 열거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다 알리라. 아직도 그 위선과 잘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 마태가 전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한 일곱 개의 화 선언을 꼼꼼히 들여다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들여다 보라.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지 보이리라. 그리고 예수님처럼 기독교인들이 또는 교회 지도자들이 종교 행위의 탈을 쓰고 저지르고 있는 위선과 잘못을 향해 이렇게 외치리라. “화 있을진저!”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2. 26. 04:22

2011 12 25일 성탄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누가복음 2:22-39

제목: 위로를 기다리는 자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태어난 지 한 사십일쯤 지나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론 예수님이지만, 그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쓰인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한 명의 이름은 시므온이고, 다른 한 명의 이름은 안나입니다. 시므온은 남자고, 안나는 여자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을 읽을 때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인데, 누가복음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를 전개시킬 때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나옵니다. 일종의 남녀평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의 세계는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남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시대였는데, 누가복음의 저자는 여자를 남자와 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 입니다. 누가복음을 한 번 잘 읽어보십시오. 모든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누가복음의 구조는 아니고요, 시므온과 안나가 노인이었다는 겁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노인들은 거의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노인들은 전문적인 직원들이 돌보는 양로원에 보내지지 일쑤입니다. 우리는 자주 노인들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이 자꾸 거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모든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그런 노인들에게, 그 누구에게서보다도 더 큰 소망이 있었음을 우리는 오늘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누가의 기사에서 시므온과 안나는 노인이지만, 그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지혜로운 사람들도 그려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일이 벌어진 곳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 중에서도 가장 북적대는 성전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에는 사람들로 북적댑니다. 그리고 자칭 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력자들, 부자들, 젊은이들, 성직자들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오직 노인에 불과했던 시므온과 안나만이 부모의 팔에 안겨 성전 뜰로 들어오고 있는 아기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이들 노인이 부모보다도 아기 예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33절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부모님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는 노인의 말에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이 노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것은 요엘서에도 분명하게 나와 있는 사실입니다 요엘서 2 28절의 말씀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임하시면, 꿈을 잃었다고 하는 늙은이가 꿈을 꾸게 된답니다.

 

이런 말씀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설교는 양로원에 가서나 하시지우리는 아직 젊은데…” 우리는 모두 늙어갑니다. 젊음을 자랑할 때가 있었고, 그 젊음이 영원할 것 같았던 때가 있었지만, 결국 우리의 인생은 늙어갑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은 늙어감을 한탄하고, 어떤 사람은 늙어감을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은 늙어감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늙어가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 이 두 노인들의 삶을 한 번 들여다 보면, 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소망하고 살았는지를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젊은이에게나, 노인에게나,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25절 말씀에 보면, 누가복음 저자는 시므온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리고 37절에는 안나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위의 요엘서에서 묘사된, 장래일을 말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보는 일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장래일을 말하고 싶어하고, 꿈을 꾸고 싶어하고, 이상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뿐,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끔 힘을 쓰지는 않습니다. 마음뿐이고, 힘쓰지 않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은 실망과 절망뿐입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안나의 삶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는 말이고, 경건하게 살았다는 말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쓸데 없는 일에 낭비하지 않고, 이웃과 나누면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면서 살았습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성전에서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성전이 그들 삶의 중심이었다는 말입니다. 예배가 삶의 중심이었다는 말입니다. 금식과 기도는 예배의 형태입니다. 이들은 그만큼 성전 드나들기는 자기 집처럼 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살았던 시므온과 안나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그토록 기다리던 위로였습니다. 시므온의 기도는 눈물이 나게 하는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배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죽기 전에 이러한 신앙고백을 여러분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까? 진정으로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을 받기 전에, 이러한 신앙고백이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머무는 입술에서 흘러나올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신앙인입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위로를 기다리는 자입니다. 사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기다리는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다림입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이유는 그들의 기다림 때문이었습니다. 안나는 나이가 84세였다고 합니다. 결혼한 후 7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이 여인의 삶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참으로 쉽지 않았을 겁니다. 스므온도 미루어 짐작해 보건 데, 참으로 힘든 세월을 보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있습니까? 조바심을 내기 일쑤입니다. 조금 열심히 하다가도 금방 주저 앉습니다. 일생을 두고 끈질기게 하나님의 위로를 간구했던 스므온과 안나와는 달리, 우리의 기다림은 너무도 짧고 견고하지 못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가 우리의 장래일을 말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보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불평하고 불안해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성탄주일이기도 하지만 2011년도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결단이 있어야겠습니다.

 

시므온과 안나처럼 의롭고 경건한 자,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기도하며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이것을 목사가 잔소리처럼 하는, 교회 열심히 나오라는 상투적인 말로 듣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본 이 두 노인네들의 삶이 얼마나 복됩니까? 이러한 복된 삶이 아무렇게나 살다가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의롭고 경건한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께 이러한 은총을 받았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나만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 뭐해?’하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과 섞이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 그리고 구원이 있는 사람으로 늙어간다는 것,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인생이 짜증으로 가득 차 있고, 위로와 평강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의롭고 경건하게 산다는 것을 너무 거창한 것으로,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지키고 가꾸면 됩니다.

 

우선, 기본적인 십계명부터 좀 지켜보십시오. 1. 다른 신을 섬기지 마십시오. 특히 현대사회의 가장 강력한 신인 돈신 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지 마십시오. 2. 우상을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쏟지 말라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마십시오. 하나님 욕먹이는 일, 부끄러운 일을 하지 마십시오. 4.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십시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 없이, 다른 일을 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하고 싶어도, 예배 후에 하십시오. 5. 부모님을 공경하십시오. 여기서 부모님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기도 없이 자기 혼자 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고아도 부모님의 해산의 고통 없이는 이 땅에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님을 극진하게 모시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장수를 약속하셨습니다. 6. 살인하지 마십시오. 칼로 사람을 찌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닙니다. 말로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것도 살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그리스도인이지 죽이는 살인자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7. 간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생활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8. 도둑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훔치지 마십시오. 9. 거짓 증거하지 마십시오. 없는 말 만들어 내지 마십시오. 아니면 아니오, 그러면 그렇다고만 말하십시오. 10. 남의 것을 탐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만족하시고 감사하십시오.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십계명부터 지키는 일, 우리가 평소에 하찮게 여기는 이런 일부터 시작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경건하게 사십시오.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얌전을 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했듯이, 우리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물질, 건강과 배움 등, 모든 것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전을 떠나지 마십시오. 주변 사람들에게 너는 교회가 집이니? 교회에서 사니?”, 이런 비아냥거림을 들을 정도로 교회를 가깝게 하십시오. 교회를 가깝게 하면서 감내라 콩내라참견하라는 말씀도 아니고, 교회에 모여 수다 떨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교회를 내 집 드나들듯이 드나들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목사보다 기도 많이 하는 성도님이 나왔으면 좋겠다.).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공예배에 참석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기 위한 것들입니다. 자녀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교회에서 제공하는 모든 것은 떡이고 생선입니다. 때로는 여러분이 그것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돌과 뱀을 받아 드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우리는
2011년 성탄절 예배 그리고 2011년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중대한 말씀을 받아 들었습니다. 우리의 결단만이 남아 있습니다. 더 이상 꿀 꿈이 없다고 생각하는 노인이었던 시므온 할아버지와 안나 할머니에게서 우리는 그 누구도 꾸지 않고 있던 꿈이 그들의 삶 속에 꿈틀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꿈을 꾸면서, 인내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끝내 받아 들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도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우리의 소망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 있으셔도, 끝까지 인내하시면서 기도하십시오. 경건함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십시오. 그런 사람은 분명 시므온과 안나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의롭고 경건한 가운데 사셔서, 날마다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눈으로 보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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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12. 24. 00:10

삼고초려(三顧草廬):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 / 사람을 맞이함에 있어 진심으로 예를 다함


후한 말엽
, 유비는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할 군사(
軍師, 전략가)가 없어 늘 조조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어느 날 유비는 은사(隱士)인 사마휘에게 군사로 복룡(伏龍)과 봉추(鳳雛)를 천거 받게 되어 제갈량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선물을 가득 싣고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습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습니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 길에 나섰습니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유비는 그 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나라의 조조, 오나라의 손권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고 한실(漢室)의 맥을 잇는 촉한을 세워 황제가 되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었습니다. -삼국지(三國志) 촉지 제갈량전(蜀志 諸葛亮專)-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뭔가 아쉬운 사람이 먼저 행동에 나서게 된다는 뜻입니다. 뭔가 절실하게 원하면 그것 자체가 에너지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구원이 그것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왜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지 모릅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왜 우물 밖으로 나가야 하는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철학적으로 설명하면,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들어 인간의 실존을 설명한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인간의 이러한 상태가 표현됩니다. 기계가 인간을 인질로 잡아 매트릭스에 가두어놓고 에너지를 인간에게서 빼앗아 쓸 때도 인간은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에 갇힌 것도 모르고 자신이 거기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사실 또한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누군가 와서 알려주던지 구원해 주지 않으면, 우물 안 개구리나 동굴 속의 인간이나 매트릭스 속의 인간이나 모두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아쉬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입니다. 그래서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일컬어 은혜라고 부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삼고초려 없이, 우리는 모두 멸망 받을 죄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삼고초려의 최고봉이고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삼고초려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날마다 성전의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시고 당신의 비밀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삼고초려로 구원 받은 우리들, 이제 하나님께 삼고초려로 보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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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21. 01:14

골로새서

5.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라 (1:21-23)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 있은 뒤, 골로새 교회에 적용되는 구체적인 말씀이다. 위에서 설명한 그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이 바로 이 편지를 읽고 있는 골로새 교회에 이루졌다는 선포인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이 내 삶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본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내 삶에서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관건이다. 이게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화해의 사역을 믿고 안 믿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믿는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난 일이 되는 것이 아니요,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이 안 일어난 일이 되지 않는다. 나의 믿음과 상관 없이 그리스도의 사역은 진리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그 진리가 내 삶에 효력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나의 응답 없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일컬어 존 웨슬리는 응답하는 은총(Responsible Grace)’라고 말한다. 이는 잘못 생각하면 구원의 완성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응답하는 은총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응답할 수 있는 능력 또한 하나님께부터 오는 것이다. 은총에는 응답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은총이란 책임 있는 것이고 무게가 있는 것이다.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가벼운 사항이 아니다. 은총을 받은 사람, 만물은 그 은총에 필히 응답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사람마다 그 응답의 속도가 다를 뿐이다. 그런데 그것도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응답의 속도에 차이가 날 뿐,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응답의 속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에 더디게 응답한다고 한들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정죄하거나 안절부절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나의 응답이 다른 사람보다 빨랐다면 그것에 합당한 감사와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면 그뿐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나의 응답이 빨랐다고 해서 내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잘 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는 것도 아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을 그렇게 대하지 않으신다. 모두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중요하지 내가 보고 판단하는 나의 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남보다 먼저 은총에 응답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특권인 양 은총에 아직도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얼마나 손가락질을 해대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 하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먼저 된 자나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 위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는일뿐이다. 여기서 거한다는 것은 일회적인 삶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을 의미한다. 복음을 들었으니, 그 복음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창조의 사역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복음을 붙들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하루는 복음 안에서 살고 하루는 복음 밖에서 살고 그러면 안 된다. 늘 항상 끝까지 복음 안에서 살아야 한다. ‘굳게 선다는 말은 어떤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우리는 외부의 유혹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복음 안에서 잘 살아가다가도 주변 환경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흔들린다. 그러나 복음의 터 위에 굳게 선 믿음의 사람은 주변의 어떠한 영향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좌절하거나 절망하면 그건 이미 죽음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이 절망의 반대가 소망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절망하면 믿음에 머무를 수 없다. 절망하면 흔들린다. 흔들리면 흔들림을 따라 인생이 표류하게 되어 있다.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셨다. 우주의 중심이요, 우주의 창조자시요, 우주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화해했는데 무엇이 두려우리요? 죽음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다. 마지막 원수인 죽음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멸망시키셨기 때문이다. 죽음을 죽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붙잡고 살면 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2. 19. 04:54

2011 12 18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1:28-30, 5:17-20; 12:2, 3:1

제목: 복음은 마음(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어떻게 다른가?)

 

시 한편을 읽겠습니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유명한 시입니다.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이 피기까지 / 김영랑)

 

이 시를 분석하기 위해서 읽은 것은 아니고요, 마지막 이 구절 때문에 읽어드린 겁니다. “찬란한 슬픔이 봄”. 우리 말로 이러한 표현을 모순형용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역설적인 표현이라고 하죠. 여기서 모순되는 단어는 찬란한슬픔입니다. 슬픔이 찬란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모순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된 표현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참 좋은 시적 표현이고 기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모순형용
, 역설적 표현을 알지 못하면 성경의 내용이 이상하게 해석됩니다. 작게는 이렇게 몇 문장이 모순형용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크게는 성경의 전체 내용이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성경의 가장 크고 대표적인 역설적 표현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모순형용입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그 당시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이 보기에 전혀 지혜로운 것,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그야말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만이 당하는 처절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그러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모순형용이고 역설적인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이러한 모순형용, 역설적인 표현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두 구절은 서로 모순됩니다. 우선 마태복음 11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리고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중에서 5 20절 말씀만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두 개의 말씀이 서로 모순형용, 역설적이라는 것을 알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 가르침은 우리가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6장에 보면 유대인들의 종교적 3대 의무(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이 나옵니다. 1) 구제 할 때 은밀히 하라는 것, 2)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서 하라는 것, 그리고 3) 금식 할 때 금식하는 것을 티 내지 말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이 어떻게 종교적 의무를 감당했는지 드러내 줍니다. 이들은 구제할 때 자신들의 구제행위를 통해 영광 받으려고 나팔 불고 다녔습니다. 이들은 기도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큰 거리, 즉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서 큰 소리로 열심히 기도하는 척 했습니다. 이들은 금식할 때 자신들이 지금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엄청나게 티 내고 다녔습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들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얼마나 열심으로 그러한 일을 감당했는지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그들의 그런 행위를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그들과 감히 말을 섞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에 비하면 자신들은 너무도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기에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의 업적을 쌓은 데만 치중했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기준으로 삼았고, 그것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고 하늘 나라에 들어간 의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즉 자신들의 의로운 행동을 구원의 근거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을 뒤쫓아 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죄해서 죄인을 만들어 버렸다는 겁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에 대한 예수님의 종합적인 평가는 마태복음 23장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서기관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란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위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23:3-7).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위선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에게서 종교적 짐을 떠안고 눌려 살고 있던 일반 서민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30).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일차적으로 인생의 짐이 아니라 종교적 짐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생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종교적 짐을 얹어서 가난한 자들을 못살게 구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철퇴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이렇게 쉽고 가벼운 것이라고 깨달아지는 듯 하면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두 번째 본문을 보면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율법사(서기관)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분명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지워 놓았던 종교적 짐을 벗겨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우리의 신앙생활로 따지자면, 예배에 열심히 참석해야 한다는 부담감, 교회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부담감, 직분에 대한 부담감, 십일조 등 각종 헌금에 대한 부담감, 윤리 도덕적인 삶에 대한 부담감 등을 덜어주시겠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왠 걸요?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것을 죽도록 지켰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서기관들)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언제는 종교적 짐을 벗겨주시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보다도 더 무거운 종교적 짐을 우리에게 지우고 계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헷갈려 하는 율법과 복음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이 문제는 여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 싸움의 흔적과 결과 그리고 결론이 바울 서신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로마서는 율법과 복음의 문제 대한 최대 격전장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싸움 끝에 사도 바울은 복음의 승리를 외쳤습니다. 그것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서신서가 성경이 된 겁니다. 그것이 정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대교회에서 이미 끝나서 정통으로 인정되고 성경으로 받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율법과 복음의 문제는 끝나지 않은 미해결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집니까
?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성경(특별히 바울 서신)을 면밀히 읽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율법이 더 눈에 들어오고 몸에 익히기 쉽기 때문입니다. 율법에는 마법과 같은 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만족, 자기 성취, 자기 확대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의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와도 같습니다. 그야말로 율법에서 오는 자기 의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합니다. 그래서 이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복음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이것을 무 자르듯이 개념적으로 구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마르다에게 율법을 대입해 보고, 마리아에게 복음을 대입해서 들여다보십시오. 그 이야기를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니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1:38-42).


마르다율법으로 마리아복음으로 대입해서 이 이야기를 보았을 때, 율법과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이 좀 가십니까? 다만 여기서 조심할 것은 열심히 일하는 것을 율법, 아무 일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복음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을 열심히 하고 안 하고는 율법이나 복음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를 염두에 두고 율법과 복음을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입해서 보셔야 합니다.

 

이것으로 조금 부족하고, 더 헷갈리고, 어려워하실지 몰라 한 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두 가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A 가정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건유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건유의 아빠, 엄마는 매우 저명한 분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저명함에 걸맞게 이들은 자녀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건유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건유가 원하는 것이나, 또는 건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낌 없이 제공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건유는 성인이 되어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된 건유는 아빠 엄마를 생각할 때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저명한 아빠 엄마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신 아빠 엄마였지만 건유는 늘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자신에게 잘 해주는 것 같고, 무엇이든지 부족함 없이 채워주는 아빠 엄마였지만, 건유가 느끼기에 아빠 엄마는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그러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아빠 엄마 본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 거라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 큰 건유는 아빠 엄마한테 이렇게 불평할 때가 많았습니다. “아빠 엄마가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어요?” 건유의 아빠 엄마는 이러한 건유의 불평을 들을 때마다 당황스럽고 불쾌했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어떻게 키웠는데……’

 

B 가정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찬유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찬유의 아빠 엄마는 그냥 평범한 분들이셨습니다. 찬유의 아빠 엄마는 일 하느라 시간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해 찬유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지 못하면서 아들을 키웠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찬유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찬유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찬유는 자신을 키워주신 아빠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물론 아빠 엄마는 시간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시지는 못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럴 때마다 아빠 엄마를 원망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커서 생각해 보니, 아빠 엄마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모두 사주지 못하셨고,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언제나 아빠 엄마의 마음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찬유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찬유는 아빠 엄마에게 한 없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찬유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빠 엄마에게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빠 엄마는 남들만큼 더 잘해주지 못해 마음이 더 미안했습니다.

 

율법과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 이제 좀 감이 오시는지요? A 가정은 율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고, B 가정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결정적으로 다릅니까? 그렇습니다.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 입니다. A 가정의 부모는 겉모양만 보면 마음이 자식을 향하고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그 마음이 자기 자신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B 가정은 겉모양만 보면 마음이 자식을 향하고 있지 않은 것 같으나 실상은 그 마음이 자식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적인 신앙에 충실했던 그래서 일반 서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서기관들)의 신앙을 질타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A 가정의 부모처럼 열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으나, 실상 그 마음에는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자기 의를 쌓는 일에만 치중한 것입니다.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드렸으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예수님 만나서 회개한 삭케오처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위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절대로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죽어라 지켰지만,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안식일의 뜻은 알지 못한 채 안식일에 사람이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죽어가는 사람을 향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어라 구제도 하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했지만 절대로 자신의 전 재산이나 목숨을 내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높아지는 일을 위해서는 영혼도 팔아 먹었으나, 그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서기관들)을 질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3:12).

 

열심히 안 해서 문제 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안 해서 예수님께 질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열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가지고 있는 자기 의에 대한 마법 같은 매력입니다. 율법에 매료된 사람은 자기 의를 쌓기에 여념이 없어집니다. 자기 만족과 자기 성취, 자기 확대에 휩싸이게 됩니다. 스스로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너희 의가 율법사(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도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좀 더디더라도 방향만 잘 잡는다면 문제 없다는 뜻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사와 바리새인처럼 열심으로 하되 올바른 방향을 향해 가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율법사와 바리새인처럼 열심을 내되 자기 의를 위해서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도록 주일을 지키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를 위해서 지키지 마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십시오. 여러분, 헌금 많이 하십시오. 주님이 쓰시겠다 하면 전 재산이라도 바치십시오. 전 재산이 뭡니까? 목숨이라도 내 놓으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를 위해서 하지 마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십시오. 이렇게 주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놓는 믿음의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16:25). 구제도, 기도도, 금식도 할 수 있는 한 많이, 열심을 다해 하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를 위해서 하지 마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십시오.


삭케오를 보십시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났더니, 이전에는 자기 의를 위하여,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되어서 동족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아가면서까지 악착같이 세금을 걷었는데, 이후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재산 절반을 내어놓고, 강제로 빼앗은 재산은 네 배를 더해서 돌려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바로 삭케오의 마음에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안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없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서기관들) 같으면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껏해야 남들에게 강제로 빼앗았던 부분만 겨우 내 놓았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복음의 차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의 말씀은 우리를 삭케오처럼 결단케 합니다. 물론 이 결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온전히 깨달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겠죠. 예수님이 누구인지 히브리서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2:2). 히브리서는 이러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권면하는지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 우리 말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번역됐지만, 영어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Fix your thoughts on Jesus.” 이는 생각을 예수님에게 고정시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란 이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지 못하면, 우리의 하는 모든 일을 율법적인 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일, 나의 의를 쌓는 일 밖에는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열심이 그렇게 자기 의를 위한 허무한 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은 귀한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로 성화되려면 우리의 마음이 단단하게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십자가와 못을 나누어 주고, 마음을 십자가(예수님)에 고정시키는 퍼포먼스를 한다.)

 

너희 의가 율법사(서기관)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듣지 마십시오. 율법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시니,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부터 우리는 실천해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십시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강제로 십자가를 졌던 것처럼, 나오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나와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 거룩하게 예물을 드리십시오.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 주시는 직분을 사모하십시오(‘그까짓 것’, 이거 좋은 생각 아닙니다). 하나님 섬기는데, 이왕이면 하나님께 귀한 직분을 받는 것, 얼마나 영예롭습니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무흠하게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하나님 믿는다 하면서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오히려 조롱당합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사십시오.

 

그러나 이러한 율법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율법사(서기관)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복음으로 무장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보다 더 나은 의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할 때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덧입을 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덧입지 않으면(칭의), 아무리 바리새인이나 율법사처럼, 아니 그들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으나, 그의 행실의 열매를 보면 압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다라는 야고보서의 가르침도 그래서 우리는 새겨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신앙과 복음신앙이 이렇게 헷갈리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아무쪼록 이렇게 마음을 예수님께 고정시키셔서 예수님의 의를 덧입는 참된 복음 가운데 사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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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대림절에 대한 오해부터 짚어야겠다. 우선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기억하고 기다리는 절기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억하는 절기이니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닌가하고 의문이 들 수 있다. 이것 또한 성탄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의문일 뿐이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억하는 절기가 아니다. ‘초림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으로 오신 것을 뜻한다. 그러면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해보자. 예수께서는 언제 이 땅에 오셨는가? 물론 단순하게 대답하면 성탄절이 그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예수께서는 정말 성탄절에 오셨는가? 이는 단순히 날짜를 따지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다. ‘오신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예수께서는 2천 년 전 유대땅에 오셨다. 그러나 이 오셨다는 깨달음은 예수의 부활로 인해 생겨난 것이지 예수께서 여느 사람들처럼 이 땅에 태어난 그 사실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도대체 무엇인가? 성탄절은 단순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전하기 위한 절기가 아니라, 이 땅에 오신, 다시 말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을 증거하기 위한 절기이다. 그러므로 성탄절과 짝을 이루는 절기는 대림절이 아니라 주현절이다. 성탄절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주현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 인간이시고 완전 신이시다 vere homo vere deus”라는 신학적 교리를 표명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예수께서 이 땅에 언제오셨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성탄절은 예수께서 이 땅에 언제 오셨는지를 보여주는 날이 아니다. 12 25일이 예수의 생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회의 교리를 모르는 데서 오는 무지에 불과하다. 부활의 빛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생일은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복음서보다 훨씬 먼저 씌어진 바울 서신에서는 예수의 부활만 증거될 뿐 예수의 육신적 출생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다시 대림절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계속 해 보자. 대림절이 성탄절과 관계가 없다면, 그렇다면 대림절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대림절은 오히려 창조절과 관련이 깊다. 창조절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는 절기인데 이는 아직 한국교회에 생소한 절기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생명 사건이다. 그러므로 창조절은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돌아보는 절기이다. 이 절기에는 지구의 생태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절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조금 들여다 보아야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구원을 선포하셨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정의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구원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구원을 죄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려는 방식은 우리 한국 교회가 지니고 있는 한계이면서 아픔이고 뚫고 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구원을 죄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한국 교회가 미국의 근본주의 사상을 지닌 선교사들로부터 기독교를 전수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면 미국의 종교사,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 이후의 미국 대부흥 운동을 살펴보면 된다. 이는 몰트만의 저서 <오시는 하나님>역사적 종말론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언급되는 문제이니, 그 책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될 거라 생각한다.

 

구원은 죄의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생명의 완성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즉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생명의 완성의 관점에서 구원을 설명하면 구원이란 생명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구원은 바로 생명의 완성인 셈이다. 그것을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 그래서 부활은 생명의 완성 사건이라고 일컬어진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초림에서 일어난 구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생명 사건이, 이 생명을 완성시킨 구원 사건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구원이 은폐의 방식으로 이 땅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생명의 완성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생명의 완성이 비밀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 자들에게만 보이는 하나님의 신비라는 뜻이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길들여 진 세상은 아직 눈에 보이도록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구원(생명의 완성)이 손에 잡히질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자에게는 구원이 묘연한 것이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는 구원이 확실해 진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설명하며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말한다. 은폐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구원은 우리에게 희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1:1). 믿음이 은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구원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초림이 은폐의 방식으로 구원을 이 땅 위에 선포한 것이라면, 예수의 재림은 은폐되어 있는 생명의 완성이 온전히 드러나는 때를 말한다. 우리가 지금은 알 수도 없고 예상할 수도 없는 궁극적 생명의 완성이 예수의 재림 때에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완성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때이다. 대림절은 바로 이 절대생명이 오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절기이다.

 

절대생명이 오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정말 궁금하지 않는가? 부활의 실체가 드러나는 때, 생명의 완성이 일어나는 때,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때, 그 날이 오고 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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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15. 00:30

골로새서

4. ‘
이제의 시대에 속한 성도들 (1:21-23)

          
21
절은 짧은 구절이지만 여기에는 우리의 과거가 다 들어 있다. 하지만 이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새사람이 된 현재 상태에서 바라본 과거의 모습이다. 이게 아니고서는 우리의 과거에서 감사를 건져낼 수 없다.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는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던존재였다. 이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와 같은 상황이다. 우리는 탕자처럼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난 탕자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것처럼 우리의 행실도 바르지 못했다. 악한 행실로 인해 멀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악한 행실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으로 나의 존재를 표현한다. 우리의 존재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존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고 이 원수된 마음 속에서는 악한 행실이 표출된다
. 인류의 역사를 보라. 얼마나 비열하고 처참한 일들이 많이 자행되었는가를! 지난 2차 세계 대전 중에 자행되었던 유태인 대학살 사건을 보더라도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아우슈비츠사건 이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나님은 멀리 있는, 우리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존재로까지 여겨졌다. 하나님이 안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우리 인간의 마음은 악한 행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성도들의 이전 모습, 과거이다.

          
그러나 22절에서 그러나 이제라는 말로 완전히 변화된 새로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시대를 일컫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신 화해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다 준 사건을 우리는 혁명이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천동설을 믿었던 고대인들에게 코페르니쿠스가 천명한 지동설은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혁명 정도가 아니다. 혁명은 원래 존재하고 있었던 진리를 새롭게 발견한 것에 불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새로운 진리, 즉 새로운 창조이다. 패러다임은 또 다른 패러다임에 의해 파기될 수 있고 혁명은 다른 혁명에 의해 뒤집어 질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어떤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진리, 절대적인 진리, 새로운 창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룬 하나님과의 화해는 은혜의 사건이다
. 우리 인간의 어떠한 전제나 조건과는 상관 없이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사건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사건이라고 해서 이 은혜를 받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 은혜는 은혜 받는 사람을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주체로 만든다. 은혜 받은 사람이 책임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은 거룩함, ‘흠 없음’, 그리고 책망할 것이 없는삶으로 나타난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제물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인데, 하나님과 화해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시대인 이제에 속한 성도들은 은혜 받고 뒤돌아 입씻는 파렴치한이 아니라, 은혜에 책임적으로 행동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2. 12. 22:26

2011 12 1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요한복음 1:6-8, 19-28

제목: 내가 증거자 요한이다

 

우리는 세례 요한 John the Baptist’라는 명칭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에 대해서 매우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요한을 세례 주는 자로만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왜 세례를 주었습니까? 요한이 세례를 준 이유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무슨 정치적 상황이나 장소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것은 한 인물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인물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례 요한이라는 명칭보다는 증거자 요한 John the Witness’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져야 마땅합니다. 물로 세례를 주었던 증거자 요한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물 세례와 성령 세례는 다릅니다. 그러나 물 세례 없이 성령 세례가 임하지 않습니다. 물 세례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물 세례 없이 성령 세례가 없다는 뜻은 회개 없이 성령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머리에 물을 붓는(또는 몸을 물 속에 담갔다 올리는) 세례의식은 종교적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존재의 전향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머리에 백 번 물을 부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의식이라는 종교적 퍼포먼스는 얼마든지 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그리스도를 향한 존재의 전향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교회에서 행해지는 세례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세례의식이 절기(부활절, 성탄절)마다 베풀어지긴 하지만, 존재의 전향은 세례의식을 베푸는 만큼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세례를 통해서 존재의 전향’, 즉 회개가 일어나면 그 때 성령세례가 베풀어집니다. 이것은 시간 상으로 또는 절차 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와 성화가 시간 상으로, 절차 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편의상의 구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는 또 무엇입니까? 한국 교회는 성령세례에 대한 오해가 편만합니다. 이것도 부흥회 신앙에서 비롯된 것인데,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 콧물 다 빼면서 토해낸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성령세례라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거기다 한국인은 워낙 감정이 풍부한 민족이라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없으면 무엇인가 신적 체험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감정의 카타르시스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눈물 콧물 빼내며 겪는 감정의 카타르시스는 나훈아, 남진 오빠의 디너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세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능력이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능력은 증거자 요한처럼 나는 아니다라는 자기부정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증언하러 온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대한 증언이냐 하면, ‘에 대한 증언을 위해서 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통하여 그 을 믿게 하게 하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요한은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이지, 그 빛이 아니라고 복음서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증거자 요한이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내서 예루살렘에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에게 와서 묻습니다. “네가 누구냐?”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정체를 밝히라는 질문입니다. 이들은 요한이 그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 또는 엘리야가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이들의 질문에 요한은 당당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

 

이 대답이 쉬워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닙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을 일컬어 우리는 이라고 부릅니다. 연예인들을 다루는 기사에서 우리는 이러한 문구를 자주 접합니다. “자체 발광, 아무개 스타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빛나고 싶어합니다. ‘스타가 되고 싶어 합니다. “나는아니다가 아니라 나는이다가 되고 싶어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내서 예루살렘에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에게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빛이오? 당신이 별(스타)이오? 당신이 그리스도요?”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질문에 우쭐해서 그렇다고 대답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빛으로, 스타로 살아가려 했을 겁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을 부추깁니다. 이렇게 하라고 꼬드깁니다. 우리보고 “‘이 되라 하고, 우리 보고 스타가 되라.”고 합니다. 이것은 태초부터 있어왔던 인간에 대한 유혹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것도 바로 아담과 하와에게 빛이 되라 하고 스타가 되라.”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게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3:5). 스스로 지혜 있는 자가 되어(스스로 빛이 되어), 하나님 없이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꼬드김이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삽니다. 그래서 그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그러한 유혹을 부추기는 시스템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타락했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연예인이 되는 것은 나쁜 것이다. 그것은 타락한 일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이 세상을 고발하는 중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내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꼬드기던 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꼬드김과 시험에 굴하지 않고 증거자 요한은 당당하고 솔직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아니오!” 그리고 그는 자기 뒤에 올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일컬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존재의 전향이란
, 성령세례를 받는 일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나는아니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빛날 수 있는 분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일이 회개(존재의 전향)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에게로 향한 그리스도인은 분명 그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천체에서 그것을 확인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합니다. 지구의 행성인 달도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까만 밤에 태양빛을 반사하는 달을 볼 수 있는 겁니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눈이 시력을 갖는 이유는 빛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눈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불빛이라도 있으면 눈은 금방 그 빛에 적응해서 물체를 보게 만듭니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형광들을 껐을 때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경험을 해 보셨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나, 방 안에 있는 작은 불빛에 적응해서 다시 보이게 되는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밤낮으로 바라보며 그분의 빛을 이 세상에 반사시켜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태양처럼 밝게 빛나지는 않지만, 망망대해의 등대처럼 자그마한 불빛이 될 수는 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일수록 희미한 불빛은 더 빛나는 법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패배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뭘…’, ‘나처럼 신앙생활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어.’ 자기 자신의 초라한 신앙의 불빛을 보며 의기소침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작은 불빛이 이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 이 어두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눈을 보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빛나는 별이신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큰 빛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추시는 빛이십니다. 그분이 오시는 날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해서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힘을 내서 우리의 이 작은 빛을 비추는 일에 힘을 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된다는 것은 이 작은 빛을 세상에 비추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증거자 요한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증거자 요한만이 증거자 요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는 모두 증거자 요한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10. 02:23

골로새서

3.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권자이시다 (1:15-20)

           15절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와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우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여기서 로고스 기독론이 나온다. 필로에 의하면 로고스를 처음 태어난 자로 불렀고, 이 로고스가 세상을 창조하는 데 중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세상은 로고스의 형상이다. 유대교의 지혜 문헌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플라톤적 사고와 구약성서적 사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와 지혜로 불려질 수 있게 되었다. , 그리스도가 로고스요, 지혜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창조하는 데 중재역할을 했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로 표현된다. 그리스도가 장자권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장자권을 갖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월성이 강조된다. 그런데 이 표현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장자권, 즉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는 말은 곧 그리스도도 피조물이라는 의미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교회 사에서 그 유명한 아리우스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다.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갖고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약간 못한 존재로 표현한다. 이 논쟁으로 인해 탄생한 그리스도에 관한 단어가 호모 우시우스(동일본질론)’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고, 그리스도의 장자권은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이해하기 위한 단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문제가 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냐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이 처음부터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에게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고백이 탄생할 수 있었던 절대적인 이유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체험한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 사건을 체험하고 나서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 부활의 체험에서부터 거슬러 예수가 누구인지를 인식했다는 말이다. 부활체험이 없었다면, 예수에 대한 이러한 신앙고백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기독교의 존재 근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예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거나 그의 삶 속에서 체험되어지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의 기반은 약할 수밖에 없다. 부활이란 종말의 사건을 이야기 하는 건데, 종말의 시간이 현재로 들어온 혁명적인 사건, 새창조의 사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종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이라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활이라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서 만물의 주관자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1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피조물의 관계를 더욱 상세하게 설명한다. 왜 그리스도는 창조 세계에 대해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는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여기서 안에서라는 말은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첫째 장소적인 의미, 둘째 도구적인 의미, 셋째, 관계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문맥상 가장 어울리는 의미는 세 번째, 관계적인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교제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근거가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내적으로 이러한 교제를 이루시고, 그러한 교제가 일구어낸 것이 바로 창조이다. 이 창조는 경륜적 삼위일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구절에서 창조되었다단어는 두 번 등장하는데, 각각 단순과거형과 완료형으로 쓰였다. 여기서 좀 더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이 완료형으로 쓰인 창조되었다라는 단어이다. 언어에서 완료형이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 과거에 한 번 있었던 창조의 사역이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의 완료형이 여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는 태초에 창조된 만물이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종말론적으로도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17절에서 이것에 대한 내용이 반복되고 요약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창조 세계는 질서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모든 만물이, 이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골로새 교회가 이단 사상에 공격 당하고 있었던 부분이 이러한 것이었다. 창조 세계의 질서와 생명이 그리스도 외에 다른 영적인 존재들에 의해서도 유지된다는 이단 사상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퀴리오스(주님)이시라는 고백을 무색케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이었다.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영적존재들은 모두 피조물에 불과하다. 이는 그들 또한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숭배의 대상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숭배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인 세력을 무서워해야 할, 그리고 경배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세상의 질서와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 같은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나를 숭배하지 않으면 멸망 당할 거라고! 그 중 대표적인 존재가 맘몬, 돈이다. 돈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신자유주의 사상이 주님 노릇을 하고 있다. 사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 힘에 질식하고 그 힘에 무서워하며 그가 만들어 내는 질서와 생명 안으로 들어가려고 안달들이다. 그 질서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낙오자여, 인생의 패배자요,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는 바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맘몬이 요구하는 풍요로움에 도취되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쯤은 파리 목숨처럼 여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분명하게 외쳐야 한다. 이 세상의 질서와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은 맘몬이 아니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러한 확신 속에 거하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충만해야 할 것이다. 어렴풋한 지식, 확신 없는 믿음 가운데 휘몰아치는 세상 세력과 어떻게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왜 오직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이해, 그리고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에 저항하지 못하고, 세상에 파묻혀 세상과 함께 멸망 당하고 말 것이다.

           18절 말씀에 의하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원래부터 진리는 그리스도가 온 우주의 머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주는 몸이고, 그리스도는 머리다. 몸은 머리의 통제를 받는다. 우주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여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땅에서 체험되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또는 다른 존재에 기대어 존재를 꾸려 나가려 한다. 이 상태가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이다. 죄란 근본적으로 어떠한 못된 행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향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킨다.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벗어나 있으니, 그런 존재가 하는 모든 일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추악한 일들 밖에 더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어디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 바로 교회이다. 교회에서만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체험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겠다고 고백한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래서 이리 떼 속으로 보내진 양들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주권을 외쳐야 할 사명을 가진 선교 공동체이다.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주권만이 살아 숨쉬어야 한다.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 앞에서 머리를 들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과연 어떠한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깊은 묵상과 충실한 신앙고백만 있어도 교회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의 주권이 살아 쉼 쉬는데, 그 숨결로 행해지는 모든 일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는가!

           19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고 한다. 여기서 모든 충만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으로 보는 것이 가장 옳은 해석일 것이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은 창조의 능력이요, 구원의 능력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것을 구원하시는 은혜의 능력이 모든 충만이다. 그러한 능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하나님이요, 구원의 하나님이요, 새창조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때, 예수의 인성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역사에서 살다간,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의 제약과 고통을 받으신 예수님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신성에 맞닿아 있는 분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역사의 이단 논쟁은 모두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고백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단으로 분류되었다. 그리스도의 인성만 강조해서도 안 되고, 그리스도의 신성만 강조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는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이 긴장관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엉뚱한 데로 흘러가지 않을 수 없다.

           20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은 화평과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곧 화평과 화목의 피라는 말이다. 이는 구약의 제사법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해서 죄 사함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온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존재하게 된 것인데, 존재의 근거인 그리스도를 떠나 어떻게 존재를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신앙의 편협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외칠 때 거기에는 폭력성이 담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갑자기 심판의 망치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폭력을, 이러한 정죄를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지, 배타적이고 특수한 개념이 아니다. 신앙에 있어서,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주 만물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이지, 개인의 믿음이 아니다. 내가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베풀어지고,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태양빛이 싫다고 한들 태양빛이 가려지는가? 내가 숨쉬기 싫다고 한들 공기가 사라지는가? 이렇듯 하나님의 은총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내가 거부할 수도 없고, 내가 폐기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상태를 기뻐하시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우주 만물과 이루신 화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화평을 기뻐하시는 거다. 우리 안에 화해가 있는가? 우리 안에 화평이 있는가? 그것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다. 그러니 그건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선물을 누리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화평 가운데 살아갈 것이요, 그 선물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불안 가운데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명확해지지 않는가? 화평 가운데 거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화해의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다.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12. 6. 06:52

호시탐탐(虎視眈眈):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다는 말 / 어떤 일에 대비하여 방심하지 않고 기회를 노린다는 뜻


주역
64괘중에 ''라는 괘가 있는데 아래턱을 가리키는 말로 기른다는 뜻이 있습니다. 괘형은 두 양이 위아래로 있고 마음이 가운데 끼어 있는 형상으로 마치 사람이 입을 벌린 모습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괘덕으로 보더라도 이것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사람의 몸이 길러진다는 뜻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괘의 효사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꾸로 길러지는 것도 길하다. 호시탐탐하여 그 욕심을 좇아가면 허물이 없다.” 이괘는 인간 세상의 계급에 비유한다면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르는 위치인 대신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혼자의 힘으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백성들을 기르는 일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몸조차도 추스르기 어렵습니다. 천자와 백성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사람이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것처럼 하여 위엄을 갖추고 행동한다면 아랫사람들 또한 그를 받들게 될 것입니다. -주역(
周易) 경문(經文)-

 

긴장을 늦출 때 사고가 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사람이 긴장을 늦추는 일 없이 평생 살 수 있습니까? 스트레스 받아서 일찍 죽게 될 겁니다. ‘호시탐탐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긴장을 늦추지 말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이는 것, 즉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행동 거지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서 위엄과 존귀 가운데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사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안에 살고 계신 주님의 음성에 눈을 부릅뜨고 귀기울이고, 세상을 향해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거나 실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않기 위해서 눈을 부릅떠야 합니다. 세상이 준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귀한 이름입니다. 귀한 이름은 귀한 줄 알고 귀하게 보존해야 귀해지는 겁니다. 눈을 부릅뜨고 삽시다. 눈을 부릅뜨는 건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뜻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긴장을 늦추지 말고, 세상에 대하여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세상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될 것입니다. ‘호시탐탐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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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