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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2. 4. 26. 02:41

망양지탄(望洋之歎):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감탄한다는 말 / 남의 위대함을 보고 자신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한다

 

먼 옛날 황하에 하백(河伯)이라는 강의 신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금빛 찬란히 빛나는 강물을 보고 감탄하여 '이런 큰 강은 달리 또 없을 거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늙은 자라가 해 뜨는 쪽에 있는 북해(北海)가 훨씬 크다고 말했습니다. 하백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가을이 오자 황하는 연일 쏟아지는 비로 몇 배 더 넓어졌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하백은 문득 늙은 자라의 말이 생각나서 북해를 한번 보기로 하고 강을 따라 갔습니다. 하백이 북해에 이르자 그곳의 해신인 약()이 반가이 맞아 주었습니다. 북해의 해신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자 파도는 가라앉고 눈앞에 거울 같은, 넓은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세상에는 황하 말고도 이처럼 큰 강이 있었단 말인가...' 하백은 이제까지 세상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북해의 신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였구려. 대해(大海)를 모르면 그대는 식견이 낮은 신으로 끝나 버려 사물의 도리도 모를 뻔했소. 그러나 이제 그대는 거기서 벗어난 것이오' -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 -

 

식견이 좁은 사람을 일컬어 우물 안 개구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은 식견이 좁은 것과 관련이 매우 많습니다. 알지 못하면 가만히라도 있어야 하는데, 식견이 좁은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줄로 착각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리인 양 우겨댄다는 겁니다. 이는 단순히 교육수준의 높고 낮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마음이 열려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식견이 좁은 사람의 예로 바리새인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공부를 적지 않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율법의 전문가들입니다. 이들의 율법해석과 율법지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모든 관리들도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을 따라 일을 처리해야만 그 권위를 인정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식견이 생각보다 높고 크지 못하다는 것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율법의 끝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메시아의 오심과 동시에 끝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올바로 해석하고자 노력하고,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자 노력한 이유도 오실 메시아를 흠없고 티없는 가운데 맞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오실 메시아를 맞이한다는 것은 오실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율법이 대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하나님 나라인 예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는커녕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결국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이 목숨을 걸고 율법대로 살아낸 이유가 바로 메시아 때문인데, 그 메시아를 손수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으니 이는 손수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들은 결국 율법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살지 못하고, 그저 율법의 닫힌 세계에만 살았던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살았다면,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했을 때, 즉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오셨을 때 그를 메시아로 알아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식견이 좁았기 때문입니다. 식견이 좁았던 바리새인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보였고, 이는 교만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진리에 대하여 몸과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 날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정적입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확정된 진리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깨어 기도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만이 우리의 식견을 넓히는 일이요, 교만해지지 않은 길이요, 구원을 놓치지 않을 유일한 방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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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버나드 쇼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호랑이를 죽일 때는 그것을 스포츠라고 한다. 호랑이가 인간을 죽일 때는 사람들은 그것을 재난이라고 한다. 범죄와 정의와의 차이도 이것과 비슷한 것이다."

 

요즘 국제사회의 화두는 인권이다. 국제사회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는 미국이 내세우는 최대의 명분은 인권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명분 또한 인권이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지역의 대학교(Columbus State University) 교수 한 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김일성 탄생 100주년(2012 4 15)을 맞아 탈북자들의 증언이 담긴 북한 관련 비디오 상영이 학교에서 있으니 와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모임은 김일성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는 아니고, 반대로 북한 정권을 규탄하는 내용의 비디오를 상영하는 행사였다. 비디오 상영은 1시간 20분 정도 지속되었는데, 15명 남짓한 학생들이 심각하게 탈북자들의 증언이 담긴 비디오를 시청했다.

 

물론 비디오의 내용은 심각했다. 거기에 등장하는 탈북자들은 모두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인물들이고 북한 정권에 대해서 억하심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 그리고 자료 화면을 통해서 증언되는 북한의 인권은 참으로 참담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아 탈북했으니 그들의 마음이야 얼마나 분노가 가득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선이다. 이들은 그것을 보면서 분명 정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북한의 인권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쳐갔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미국 영화를 보면 대부분 정의의 사도가 악당들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것들이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선과 악의 구조가 편만한 영화를 보면서 자신들 미국인을 선의 축에, 나머지를 악의 축에 감정 이입시킨다. 얼마 전에 본 미국 영화 <Act of Valor>도 그런 류의 영화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세계 각국에서 테러와 싸우는 미군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인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 한 군인의 삶을 다루고 있었다. 그 영화 속에서 미군은 인권과 평화의 수호라는 기치 아래 수 없는 악당들을 최신식 무기로 괴멸한다. 어려움 속에 처해 있는 자기 편을 살려내기 위해서 악당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로 그려진다. 악당들이 저지르는 살인은 범죄이고, 인권을 위해, 평화를 위해 자신들이 저지르는 살인은 정의이다.

 

나는 이러한 형태의 인권보호평화유지를 보면서, 무엇이 인권보호이고 무엇이 평화유지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미국인들은 위의 영화를 보면서 미군이 아슬아슬하게,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이마에 땀이 흐르게 할 정도로 스릴 있게 자기 편을 구해내는 장면을 보면서 환호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자기 편을 구해내면서 어쩔 수 없이 죽여야만 했던 악당들의 인권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국제사회의 힘겨루기에서 단연 화두는 인권이지만, 나는 그것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인권은 그저 그들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명분일 뿐이다. 힘 센 나라가 힘이 약한 나라를 억누르기 위한 조작된 핑계일 뿐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관심 갖는 것은 인권, 즉 사람답게 살기가 아니라 기득권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더라도 그 메커니즘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이 만일 민중들의 눈에 보기에 부당했다면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많은 민중들은 봉기했을 것이다. 민중들의 눈이 아무리 어두워도 정당과 부당의 최소한의 차이쯤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민중들을 로마 당국이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긍정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을 뿐 아니라, 그의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면서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이것은 그들 민중이 예수의 죽음을 정당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로마는 평화를 원했고,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기득권을 원했다. 표면적으로만 그 표방하는 것이 달랐을 뿐이지, 그 심층적인 욕망은 모두 한결 같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유지하고 싶었던 것에 불과하다.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원수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 눈에는 피눈물 나게 될 것이다!”라는 무서운 속담이 무색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예수는 자신의 눈에 눈물 나게 한 자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안아 주셨다. 그리고 더 이상 눈물이 없는 세상으로 모두를 이끌어 주었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 능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권이 화두인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 알게 모르게 나 자신을 정의의 축에 놓고 타자는 악의 축에 넣은 뒤, 자신이 하는 일은 정당하고 남이 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타락한 마음에 젖어 사는 우리들. 내가 남을 죽이는 일은 정당한 일이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헤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으면 좋겠다. 무엇이 진정한 인권인지. 무엇이 진정한 평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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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불음도천수(渴不飮盜泉水): 목이 말라도 '도천'(도둑의 ) 물은 마시지 않는다 / 아무리 가난해도 나쁜 짓으로 돈을 벌지는 않는다

 

도천(盜泉)은 산동성 동북쪽에 있는 샘입니다. ()나라 육사형(陸士衡)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천의 물은 마시지 않겠네. 아무리 더워도 악목(惡木) 그늘에서 쉬지 않겠네'라고 고결한 선비의 정신을 읊었습니다. 한편 공자는 해가 질 무렵에 승모(勝母)라는 마을에 이르렀지만 어머니를 이긴다는 그 마을 명칭이 마음에 걸려 거기 묵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도천이란 샘을 지날 때도 목이 말랐지만 눈길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 '설원(說苑) 설총(說叢)' –

 

요즘은 이런 꼬장꼬장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도둑의 물이면 어떻고 어머니를 이기는 마을이면 어떠하냐, 내 마른 목을 채우는 게 먼저고, 내 피곤한 몸을 쉬게 하는 게 중요하지, 이런 마음이 판을 칩니다. ‘모도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우세인 세상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이 승리의 깃발을 들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형편의 세상에서 나 혼자만 잘난 척할 수 없습니다. 나 혼자만 의로운 척할 수 없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대충 넘어가야 맘 편하고 몸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 혼자만 잘해서는 소용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이 어떠하든 나 혼자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은 참으로 어린 생각이요 더 나아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중 스탠리 하우어워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If we want to change our way of life, acquiring the right image is far more important than diligently exercising willpower.”

 

썩은 세상에서 나 혼자만 잘 하면 된다고 의지력을 기르는 것은 얼마 오래가지 못합니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 즉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혼탁한 세상에서 나 혼자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에 젖은 독야청청한 인물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흐름을 바꾸는 일은 절대로 혼자서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겁니다. 한 몸을 이루어 함께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가라고 말이죠.

 

그런데 요즘 교회는 한 몸을 이루어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일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 몸을 이루어 세상 속에 뛰어들어 광란의 파티를 즐기고 있는 듯 합니다. 앞다투어 수천억 원이 드는 건물을 짓는다든지, 안면몰수하고 담임목사직을 세습한다든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치권과 결탁하여 여론몰이를 한다든지, 도둑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 어머니를 이기는 마을에서 잠을 청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허무하면서도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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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4. 10. 02:38

군자불기(君子不器) :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 참된 인물은 편협하지 않다

 

공자가 한 말로 군자란 그 크기가 물건을 담는 데 불과한 그런 그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누구나 군자는 아닙니다. 지식과 아울러서 인격도 동시에 갖추고 덕을 실천하는 참된 인물이 군자입니다. 오기와 아집, 편견과 독선을 부리는 그런 편협한 사람은 결코 군자가 아닙니다. 융통성이 풍부하고 포용력이 많은 인물이 참된 인물인 것입니다. 성인군자라고 할 때 성인이나 군자나 모두 참된 인물을 말합니다. -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성인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인군자라는 말은 인간에게 쓰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성인군자로 표현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본 사람이면,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은 이 세상의 여느 성인군자중 한 사람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은 인류를 위한 구원 사건이 되는 겁니다. 구원은 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만 가능한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에게서 참된 종말론적 구원을 보았다는 것이죠. 그러한 거룩한 무리인 그리스도인은 그야말로 성인군자같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그릇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걸쳐 산상수훈을 설교하십니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의, 그들보다 나은 의를 강조하시면서 그리스도인의 그릇이 어떻게 그들과 달라야 하는지 율법을 재해석하시면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드러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위의 고사성어에 비추어 들여다보면, 결국 그리스도인은 지식과 아울러 인격도 동시에 갖추고 덕을 실천하면서 사는군자 같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정리해주고 있은 성경구절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1)입니다.

 

오기와 아집, 편견과 독선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능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뜻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이용하려 들 뿐입니다. 그러나 융통성이 풍부하고 포용력이 많은군자 같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종말론적 구원을 맛본 사람들이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참된 복된 인생임을 알고 그렇게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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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김길태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귀가하던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물탱크에 유기한, 차마 떠올리기 싫은 사건입니다. 범인의 이름이 흥미롭습니다. 김길태인가 했더니, ‘길에서 태어났다해서 길태라고 합니다. 이름처럼 갓난 아기 때 교회 앞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32년 전 그 어느 누군가에 의해 시작된 비극입니다. 버려진 그를 교회의 지인을 통하여 현재 양부모가 입양하여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학교 시절 입양 사실을 안 그는 그때부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친구도 거의 없고, 양부모의 말도 잘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접하면서 범인 김길태를 나무랄 수 있고, 그를 길에 버린 친부모를 나무랄 수 있고, 맡았으면서도 잘 키워내지 못한 양부모를 나무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일입니다.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도 같아서 어느 한쪽이 잘못되면 어느 한쪽에서는 그 대가를 꼭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32년 전 한 아기가 길에 버려진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인 것입니다. 그냥 안타까워하고 말 일이 아니라, 기도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픔이 어느 누구에게 실제적으로 영향을 끼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혀를 쯧쯧 차면서 안타까워하지만 그 일은 나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무심하게 넘기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사회는, 우리 인간관계는 서로가 모두 얽혀 있습니다. 마치 한 몸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비극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비극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아픔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것이 우리 인간 사회이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선한 일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기쁨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있는 자리에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 되고 선한 일을 하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이 땅 위에 천국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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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4. 2. 04:05

2012 4 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1-11

제목: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은혜만 받는 사람은 영성이 뛰어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빌립보 교회에게 하나가 되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을 뜻합니다. 언뜻 보면 참으로 은혜롭고 당연한 말씀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참으로 낯선 세상입니다. 현실적으로 한 마음을 품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뿐더러, 도대체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이 잘 잡히질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첫째, 같은 사랑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둘째,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령이 하나가 되어 일치된 생각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넷째, 각자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곧 이기심을 채우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도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위의 네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참으로 아득해 보이기만 합니다. 이 세상은 절대로 한 마음을 품도록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법칙은 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잠시 같은 생각을 품을 때도 있긴 합니다. 그 때는 분명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될 때만 그렇습니다. 손해 본다 싶으면 절대로 같은 마음을 품거나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합니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다른 꿈을 꿉니다. 게다가 이 세상은 절대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높이 올라가려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어떻게 해서든 주변 사람들을 밟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많이 가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자기 일이나 잘 하면 됐지 남의 일을 도와 주는 것은 손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도와줄 때는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때뿐입니다. 자기를 포장하기 위해서 남을 도와 줄 뿐이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몸에 베어 있는,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한 마음은 우리의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완전히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그토록 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나가 되라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신앙 실천의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의 삶을 맡긴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나의 운명을 건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어떠한 삶인가에 대한 선이해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비하-영화의 도식을 발견합니다. 그는 이 도식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발견되는 비하-영화의 도식이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이 곧 자기 비하인데, 이는 자기 비움, 종의 형체를 가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남을 뜻합니다. 여기서 비우는 것을 뜻하는 헬라어 케노오는 신적 신분 또는 신적인 존재방식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단지 신적 권위를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 비하의 마지막까지 가십니다. 바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심,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이해가 안 가는 부분입니다. 이 세상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비하시키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상승시키라고 가르칩니다. 올라갈 수 있는 끝까지 올라가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 영혼까지도 팔아 먹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법칙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자기 비하를 삶의 방식으로 취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비하의 끝인 십자가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세상은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고 허무에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비우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하는 구원을 위한 필수 요소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종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의 죽음을 보고 비웃은 세상에 대한 비웃음이었고, 그렇게 죽음으로 끝나버렸다는 허무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고 자기 자신을 비운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비하를 통해,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는 순종(복종)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명 냄새 나는 일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원리입니다.

 

이 세상은 높아지는 것을 통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한 높아져야만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축복의 근거요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온통 부흥, 성장’, 그리고 의 구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는 생명의 원리는 높아지는 것에 있지 않고, 자기를 비우는 것, 죽기까지 순종(복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하나가 되어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교회에 충만하게 될 거라고 가르칩니다.

 

하나가 되는 일은 자의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호를 외치고, 의지력을 기른다고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마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성경의 권면에 선뜻 아멘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마음은 세상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낮추어 십자가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든지 말든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품는 것이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이 세상의 원리와 다르고,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추는 것 같아 별로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을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겠다고 나선 믿음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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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3. 29. 23:35

도남(圖南): 붕새가 날개를 펴고 남명(南冥)으로 날아가려고 한다는 뜻으로, 웅대한 일을 계획하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북해(北海)에 곤()이라는 고기가 있다. 그 크기는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고기가 화해서 붕()이라는 새가 된다. 붕새의 등은 그 길이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새가 한번 날아 오르게 되면 그 날개는 하늘을 덮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새는 바다에 물결이 일기 시작하면 남쪽 바다로 옮겨가려 한다. 남쪽 바다는 천연의 못이다.” - 장자(莊子) –

 

기독교에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에 대한 교리가 있습니다. 이는 의화(義化, Justification)와 영화(榮化, Glorification)의 중간 단계인데, 사실 편의상 단계를 구분해 놓은 것일 뿐, 실제 믿음의 세계에서는 이 단계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이신칭의의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이 바로 믿음의 순간인데, 그 순간 우리는 의로운 사람으로 일컬음을 받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정말 의로워져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신칭의란 풀어서 설명하면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굉장히 수동적인 상태입니다. 자연적으로, 저절로 또는 내 힘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의로움이 덧입혀 진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칭의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 유명한 명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 (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위의 고사성어에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이므로 북해의 곤이라는 물고기에 비할 수 있습니다.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만큼, 인간의 존재는 그 귀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 자체가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너무도 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창작물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 물건 자체가 귀하기 보다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명성 때문에 그 사람이 만든 물건도 귀하게 취급 받지 않습니까?

 

곤이라는 물고기가 화해서(변해서) 붕이라는 새가 되는 것처럼,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화해서(변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곤이 변하여 붕이 되어 웅대한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게 되는 것처럼,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인으로 변하여 웅대한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과정 없이 곤이 붕으로 변하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원대하고 웅대한 일을 이루어드리는 하늘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이루는 웅대한 일들은 모두 이 땅 위에서 썩어질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웅대한 일을 이루고 싶다면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화되지 않으면, 즉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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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지난 주에 정상선 집사님께서 운영하시는 비즈니스(골든 뷰티)에 강도가 들어서 정 집사님께서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다행히 다치신 곳은 없지만, 강도가 칼로 위협해 돈을 강탈한 뒤 정 집사님을 밀치고 도망가서 마음이 많이 놀라셨다 합니다. 주변 분들이 앰뷸런스 타고 병원에라도 다녀오라고 권하셨지만, 괜찮다고 하시며 가게에서 그냥 마음을 추스르셨답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어서 괜찮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강도를 당하실 때마다 많이 힘들고 놀라셨을 텐데 그 연세에 담대한 마음으로 비즈니스를 운영하시는 것을 보면 배짱이 대단하십니다. 여장부가 따로 없습니다.

 

게다가 강도 당하신 다음 날, 아침 기도회도 거르지 않고 참석하시는 것을 보고 마음이 짠했습니다. 정 집사님 가게로 심방 갔을 때 대화를 나누면서 보이신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위로를 보았습니다. 정 집사님의 눈물과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위로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거룩한 부담감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 우리의 삶 속에 이렇게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질문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키기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큽니다. 우리는 그저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탓 내 책임은 분명 아니지만, 나와 함께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형제자매가 어려움을 겪는다면, 혹시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하기를 게을리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거룩한 부담감 정도는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척도는 내가 얼마나 잘 되고 얼마나 평안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척도는 주 안에서 나와 교류하고 있는 형제자매가 얼마나 잘 되고 얼마나 평안한 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지,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부담감을 마음에 갖고, 내 이웃의 복된 삶과 평안을 위해 열심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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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3. 22. 10:19

이관규천(以管窺天):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다 / 좁은 소견으로 사물을 살펴 보았자 전체의 모습을 파악할 없다


춘추시대 말기에 훗날 의성(
醫聖)으로 일컬어지는 편작(扁鵲)이 괵이라는 나라에 갔을 때였습니다. 마침 병을 앓다가 죽은 태자의 병과 상태를 보고는 편작은 태자를 소생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궁정의사가 어이없어 하며 무책임하다고 하자 편작은 탄식을 하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의술은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며(以管窺天)' 좁은 틈새로 무늬를 보는 것과 같소." 잠시 뜸을 들였다가 편작은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이 내 말을 정 믿지 못하겠다면 다시 한번 태자를 살펴보시오. 그의 귀가 울고 코가 벌름거리는 소리가 들려올게요. 그리고 양쪽 사타구니를 쓰다듬다가 음부에 손이 닿으면 그곳은 아직 따뜻할 것이오." 다시 진찰해본 결과 편작의 말이 맞았고 괵나라 임금은 편작에게 매달렸습니다. 편작이 침을 놓자 태자는 소생했고 치료를 더하자 20일 후에는 일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편작이 죽은 사람도 소생시킬 수 있다고 말하자 편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 게 아니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고친 것뿐이오" -사기(史記)-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식을 넓혀가도 우리는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천체 물리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이 힘들 듯,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우리 인간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우리 인간이 살면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인간은 조금 아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부풀려 말하려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 간의 싸움도 결국 누가 좀 더 많이 알고 있느냐의 싸움이고 그것 때문에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전까지 인간은 이관규천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듭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일도 결국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능력은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는 수준이기 때문에 열린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고, 내가 아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자세로 상대방의 의견과 생각을 존중하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진리가 밝히 드러나는 종말의 때까지 우리는 그러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때까지, 즉 종말의 때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정적입니다. 특별히 우리 인간의 손과 입과 생각을 거치는 것은 언제든지 왜곡되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참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스스로 진리를 드러내셨지만, 그것이 인간의 손을 거치고 제도화되면서 왜곡되고 타락하는 현상을 겪었습니다. 진리를 그대로 인식하고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최대한 진리를 깨달으려고 노력하고 보존하고 전하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무기 삼아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진리 자체로 드러나고 전해지는 날까지, 즉 종말의 때까지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마음을 활짝 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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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19:26-27)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 "내가 목마르다!"(19:28)  / "다 이루었다!"(19:30)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십자가의 칠언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해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끝납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 하나님 뜻 안에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부르며 간구한 것은 용서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이 무지한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용서해달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자녀 삼아주신 것을 말합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 용서의 은총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강도에게 임합니다. 아버지께 간구한 용서의 은총은 이렇게 즉시 내리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당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걱정하셨습니다. 육신의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슬피 울며 자리를 지키던 어머니를 당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부탁하십니다. 그런 연고로 사도 요한은 제자들 중 가장 장수를 누립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를 보살피려면 어머니 마리아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하니까요.

 

십자가 칠언의 중간에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절규가 들어 있습니다. 이 절규는 원망의 절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의 절규입니다. 우리는 이 절규를 들으면서 무한한 위로를 받습니다. ‘목마르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여섯 번째 말씀이 요한복음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목마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 받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하신 것은 목마른 자는 누구든지 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고 돌아가십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했으니, 아버지를 의지하고 끝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아버지 손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는 아버지에 의해 부활의 영광을 맛볼 것입니다. 십자가의 칠언은 참으로 놀라운 신앙고백인 동시에 신앙지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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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3. 15. 23:49

창해일속(滄海一粟): 푸른 바닷속에 있는 좁쌀 한 톨이라는 뜻 /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의미함


북송
(
北宋)의 명문장가 소식(蘇軾:소동파)은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으로 산문과 시에 뛰어났습니다. 그가 지은 적벽부(赤壁賦)는 천하에 다시 없는 명문입니다. 두 편으로 된 이 부()는 그가 황주(黃州)로 귀양갔을 때 지은 것으로 모든 세상사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신선에 기탁하여 그리고 있습니다. “‥‥그대와 나는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면서 물고기와 새우들과 짝하고, 고라니, 사슴들과 벗하고 있다. 작은 배를 타고 술바가지와 술동이를 들어 술을 서로 권하니, 우리의 인생이 하루살이처럼 짧고 우리 몸은 푸른 바닷속에 있는 한 톨 좁쌀(滄海一粟)같구나. , 우리의 삶이란 너무도 짧구나. 어찌하여 장강(長江)처럼 다함이 없는가?” 여기서 바로 '滄海一粟'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이 말에는 무한한 우주 속에 미미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무상함도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적벽부(赤壁賦)-


이 고사성어는 성경에 등장하는
겨자씨를 생각나게 합니다. 좁쌀보다 더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우리 인생의 무게가 좁쌀보다 작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생살이에서 우리는 교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무게가 겨자씨보다 작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앙생활에서 우쭐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생살이가 좁쌀보다 크다 생각하고,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보다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려는 인간의 타락한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송우혜 씨가 쓴
<윤동주 평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크리스천 중에서도 돈도, 별 명망도 없기에 어떠한 세상 아래서도 별 위험이 없는 계층의 사람들이 남아서 교회를 지켰다. 그러고 보면 때론 없다는 것역시 하나의 힘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없는 것’, ‘작은 것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있는 것’, ‘큰 것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큰 자로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영혼까지도 팔아 먹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없는 것’, ‘작은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약 세상이 주는 유혹인 있는 것’, ‘큰 자에 관심을 가지셨다면 골고다 언덕길은 걸어가지도 않으셨을 뿐더러 십자가는 한 낱 흉악한 처형 도구에 머물러 있었을 겁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없는 것’,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기에 본인 스스로 없는 자’, ‘작은 자가 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는 모습이 이럴진대
,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있는 것’, ‘큰 자에서만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할 뿐, ‘없는 것’, ‘작은 자에게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저주스러운 것으로 부끄러워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겉으로는 십자가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그것을 경멸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푸른 바다 속에 있는 좁쌀 한 톨만하다고 해서 억울하거나 서글플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온 우주보다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의 존귀함은 교만하게 높아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낮아지는 데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새로운 창조의 때에는 모든 만물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되리니,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에 우리의 존재를 맡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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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3. 13. 07:32

2012 3 1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13-22

제목: 누가 왕인가?

 

작년에 연말 드라마 시상식을 휩쓸었던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과 그것의 반포를 막으려는 세력 간의 갈등을 그린 명품 드라마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었습니다. 우리는 세종대왕을 성군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세종대왕이 그렇게 성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아버지 태종(이방원) 때문이라는 것이 한국 역사 학계의 정설입니다.

 

이방원(태종)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왕조로서의 명백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이 존립하는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고려 말기에 고려가 휘청거리는 이유 중 하나가 왕권이 무너지고 주변의 귀족 세력들이 득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 위해 지독한 정치를 펼칩니다. 왕권에 위협된다고 생각했던 세력들을 모두 처단했고, 그 중에서도 조선 개국 공신 중 최고의 공신인 정도전을 제거합니다. 그야말로 정도전을 토사구팽시킨 것이지요.

 

정도전은 이방원의 생각과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입니다.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 원했던 반면에, 정도전은 왕권은 최소화하고 유림들(선비들)이 실질적인 권한을 지닌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의 서슬 퍼런 칼날이 정도전을 향했고, 정도전은 일등개국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작년에 안방 극장을 휩쓸었던 또 다른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 “공주의 남자라는 사극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보다 조금 일찍 다른 방송국에서 방영됐던 드라마입니다. “공주의 남자는 세종대왕 이후 문종과 단종, 그리고 세조에 걸친 역사를 바탕으로 구성된 드라마였습니다. 세종대왕 이후에 이방원이 세워놓은 강력한 왕권은 문종과 단종을 거치면서 무너집니다. 문종은 너무 건강이 안 좋았고, 단종은 너무 어렸습니다. 그 틈새를 타고 중신들이 득세를 했지요.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서입니다.

 

왕권이 중신들에게 밀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이 바로 수양대군(세조)입니다. 수양대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정이 할아버지 이방원과 닮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력한 왕권을 다시 정립하고자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이전에 할아버지 이방원이 그랬듯이 피 비린내 나는 숙적제거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이 그 유명한 한명회입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던 사극 드라마가 그 유명한 여인천하입니다.

 

우리는 지금 왕이 다스리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왕권이 무엇인지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는 왕권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합니다. 왕은 단순히 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왕은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왕권이란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왕권’, 즉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지닌 자는 로마의 황제, 시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 왕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것도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들어가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3 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았던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순례자들로 북적댔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경제법칙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먼 나라에서부터 온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소나 양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그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외국에서 생활하다 온 사람들이라 이들은 소나 양, 또는 비둘기를 그 먼 곳에서부터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소나 양,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나 환전상들은 유대인 순례자들에게는 편의를 제공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종의 공생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지요.

 

예수님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었던 로마는 유대인들의 종교활동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대신 이처럼 종교활동에서 비롯된 수입은 고스란히 자신들이 차지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종교활동을 승인해 주는 대신에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챙겼던 것이지요.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종교활동을 보장해 주니까 유대인들의 원망을 들을 일도 없었고, 종교활동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짭짤한 수익을 챙길 수 있었으니까 금상첨화였습니다.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 유대인의 절기 때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몰릴수록 좋았고, 성전에서 소나 양, 비둘기 그리고 환전이 많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좋았습니다. 다만 로마 당국은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민란을 대비해서 유대인의 절기 때 감시할 수 있는 군사병력을 조금 더 배치하면 됐습니다.

 

이러한 일로 배를 채울 수 있었던 부류가 또 한 부류 있었습니다. 바로 제사장 그룹입니다. 원래 제사장은 아론 계열의 레위인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유대 땅을 다스리던 예수님 시대에는 그 법칙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중에 영향력 있고 친로마 정책을 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로마 당국에 의해서 법적인 보호를 받으며 제사장으로 임명되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사가 온전히 드려졌을 수 없었고, 제사를 집례하는 일을 통해, 즉 종교활동을 통해 적지 않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제사장 그룹의 관심은 하나님의 규례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 드리는 것에 있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의 배속만 채우는데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때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 정화 사건을 벌이입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예수님 당시 종교는 타락할 때로 타락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습관처럼 모여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는 위로를 받았지만, 사실 그것은 자신들만의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성전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 있었고, 돈벌이 수단이 되어 있었고, 정권을 유지시켜 주는 권력의 안전장치로 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그 당시 정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에 대한 정면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를 보고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다른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와 요한복음이 다른 점이 이런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표적보다는 기적이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표적에 대한 이야기가 일곱 번 나옵니다. 첫 번째 표적이 그 유명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입니다. 이렇게 표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는 말씀으로 대응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그야말로 동문서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육체를 일컬어 말씀하신 것인데, 영안이 열리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성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AD 70년경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성전이 무너집니다.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에 씌어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로마 당국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전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로마 당국은 누가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눈으로 보기에,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이 거주하고 계셨던 성전을 로마 당국이 허물었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의 황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성전정화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의 미움을 삽니다. 이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암암리에 인정하고, 로마 당국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 황제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이방원이나 수양대군이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는가를 잠깐 살펴 보았습니다. ‘왕권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숙적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꼭 죽여야 하는 적으로 간주됩니다. 자신들의 왕권에 도전한 예수님은 이로써 꼭 죽여야 하는 숙적이 된 것이지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대로 신성모독죄와 국가반란죄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형에 처해져 죽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성전이 헐리는 것을 보아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은 로마 황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생각에 제동을 겁니다. ‘왕권을 지니고 있는 자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헐었던 성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는 표적인 성전이 헐렸지만, 하나님께서 참으로 거주하고 계신 참된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 당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은 누가 왕인가를 보여줍니다. 생사여탈권을 로마의 황제가 쥐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서 신성모독죄와 국가반란죄의 명목을 씌워 십자가에 매달아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누가 왕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왕권은 로마 황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로마의 황제가 다스리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왕권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 시대도 여전히 자신이 왕권을 쥐고 있다고 주장하는 존재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누가 여러분의 생명을 위협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주장합니까? 무엇 때문에 여러분은 삶이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그러한 것에서 자유함을 얻으십시오. 그 길이 여기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한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누가 왕인가를 매일 같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나의 삶을 다스리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존재에게 나의 생사여탈권을 내어주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삶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십시오. 주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에 저항하십시오. 예수님처럼 믿음의 채찍을 들고 뒤엎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지켜드리기 위해서 영적 전쟁을 치열하게 수행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왕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아멘.


* 참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이런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은혜를 못 받는다는 것이다. 참 딜레마이다. 훗훗.


Posted by 장준식

예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다( 12:38-39). 도대체 음란한 세대는 어떤 세대일까? 일단 음란이라는 단어는 포르노 등 섹스와 관련된 행위를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포르노에 중독된 사람들이었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경건하게 살았다. 그들의 속마음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겉으로 그들은 음란을 멀리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 핀잔을 듣는 대상으로 이들이 자주 거론되긴 하지만, 그 당시 이들은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대상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예수께로부터 핀잔을 들었으며,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을 받았을까?

 

음란한 세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세대, 누구든 음란한 세대가 될 수 있다. 이 음란한 세대는 사랑과 관련이 있는데, 사랑이 참된 가치를 상실할 때 형성된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 <부활을 살라>에서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음행은 섹스로 환원된 사랑, 관계가 없는 사랑, 사랑이 없는 사랑이다”(321). 결국 음란한 세대란 사랑의 행위를 소비적으로 만드는 세대를 말한다. 사랑이 소비에 머무른 사회, 이런 사회는 사랑의 참된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오직 자기의 욕정이나 자신의 욕심, 또는 자기 자신의 극대화를 위해서만 사랑의 행위를 한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책망을 받은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율법에 근거해서 사랑의 행위를 최대한 이행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렸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제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그러한 행위 때문에 음란한 세대로 책망 받았다. 왜 그런가? 그들이 행했던 사랑의 행위에는 참된 사랑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 그들의 행위는 사랑 없는 사랑이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사랑 없는 사랑의 행위가 가능한 일인가? 여기에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 기원이며 예수님이 그 내용이고 성령이 그 동력이다”(부활을 살라, 319). 우리는 대개 사랑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는 세대에 살고 있다. 사랑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 사랑의 기원을 하나님에게 두지 않고, 오직 나 자신에게만 둔다.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는 사랑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는 사랑은 오직 에게만 관심을 집중시킨다. 나에게 집중된 사랑의 행위는 그 어떠한 것이든 결국 나 자신을 극대화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이 아무리 숭고하고 합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컬럼니스트 정석희는 KBS2에서 새로 시작한 드라마 <넝쿨 째 굴러온 당신>을 분석하면서 어느 한 장면의 이러한 대사에 주목한다. “원래 이 기집애 꿈이 능력 있는 고아랑 결혼하는 거였잖니!” 이 대사는 명절 때 시집에서 죽어라 일만해야 하는 어떤 주부들과 가족이 없어서 명절 때 여행 다녀온 그들의 친구 사이에 오고 간 대화의 일부이다. 여성의 가사 노동, 시부모와의 갈등, 이러한 것은 제쳐두고 능력 있는 고아랑 결혼하고 싶은세대가 바로 음란한 세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여성의 가사 노동이나 시부모와의 갈등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소모적이면 이렇게까지 생각할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능력 있는 고아랑 결혼하고 싶은마음은 사랑의 숭고함을 퇴색시키는 것 같다. 적어도 이러한 사랑, 이러한 결혼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들어있지 않다. 오직 결혼을 통해서, 사랑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극대화시키고 자기 자신의 욕망만 채우면 그뿐이라는 자기 집중 밖에는 보이질 않는다.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부활을 살라, 319). 하나님의 사랑은 인격적이다. 이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격적인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인격적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낮추신 것처럼 자기 비하의 사랑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사랑은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사랑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집중시키도록 강요하고 세뇌시킨다. 삼위일체의 사랑을 닮은 인격적인 사랑 대신, 성으로 환원된 사랑, 그저 소비를 위해 상대를 비인격화하는 사랑을 부추긴다. 이처럼 사랑 없는 사랑이 전염병처럼 퍼진 세대가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음란한 세대이다. 그런 면에서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이 들리는 것 같다. 사랑다운 사랑을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더 잠겨 들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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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소풍하면 으뜸으로 생각하는 시()가 바로 이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고 하는 시입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이 세상의 삶을 소풍으로 묘사합니다. 이 세상을 소풍처럼 살다간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풍요롭고 즐거웠을지 상상해 봅니다.

 

어린 시절, 소풍 가는 일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소풍 가는 날이면 전날 가슴이 설레서 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소풍 전 날, 소풍에 싸가지고 갈 음식과 간식거리를 장만하느라 나도 바쁘고 어머니도 바쁘셨습니다. 우선 소풍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종이에 쭉 적습니다. 그리고 슈퍼마켓에 가서 꼼꼼히 하나씩 하나씩 삽니다. 먹고 싶은 것에는 초콜릿이 꼭 들어갑니다. 소풍처럼 달콤한 초콜릿을 빼놓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칠성사이다도 챙깁니다. 소풍처럼 톡 쏘며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이다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소풍날 아침, 어머니는 일찍부터 김밥을 만드십니다. 밤새 잠을 설친 탓에 하품이 가시질 않고 눈곱도 평소보다 많이 꼈지만, 가슴이 설레 더 이상 잠을 청할 수 없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힘차게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어머니께서 김밥을 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김밥 만드시는 모습과 김밥이 자극하는 황홀한 냄새는 팔다리에 힘을 주고, 벌써 마음을 소풍 장소에 가 있게 만듭니다. 김밥에는 노란 단무지와 계란, , 그리고 시금치가 꼭 들어가야 합니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마음이 서운합니다. 어머니는 그런 자녀의 마음을 아시고 모든 것이 들어간 맛있는 김밥을 만들어 주십니다. 소풍날 아침은 김밥을 썰 때 나오는 꽁다리김밥으로 때웁니다. 얼마나 맛있는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렇게, 소풍처럼 살아간다면 미움다툼시기질투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힘들고 우리의 삶에 눈물이 고이지 않을 겁니다. 소풍 가서 기꺼운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싸온 음식들을 함께 나누는 넉넉한 마음으로 세상을 소풍처럼 살 수 있다면, 위의 시인처럼 우리의 삶은 풍요로운 삶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세상을 소풍처럼 사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 즐거운 마음, 넉넉한 마음, 소풍 같은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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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2. 3. 6. 10:27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 意自見):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스스로 보인다는 말 /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면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후한 헌제(獻帝) 때 동우(董遇)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유달리 학문하는 것을 즐거워하여 항상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녔습니다. 젊어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해 집안이 가난했지만, 불평없이 초야에 숨어 독서에 힘을 쏟았습니다. 나이 들어서 높은 경지에 이르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어, 학문을 좋아하는 헌제가 그를 불러 경서(經書)를 강론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강론을 들은 헌제는 그의 풍모에 반하여 곧 그를 발탁,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삼고 관리와 학생들에게 경서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동우의 명성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그의 문하에는 제자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나 제자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게 배우기보다는 스스로 책을 읽고 또 읽어 보게.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된다네." - 삼국지 위지 왕숙전 주 (三國志 魏志 王肅傳 ) –

 

박사(博士)는 여러 가지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한 가지를 깊게 아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깊게 알려면 여러 가지를 두루두루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박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박사는 스스로 공부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박사는 독립된 연구기관이나 마찬가지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죠.

 

스스로 뜻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무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면 스스로 뜻을 깨닫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법입니다. 책을 백 번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 뜻을 깨닫기 위해서 무단한 노력을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스스로 깨닫는다는 것은 진리에 드디어 손발을 담그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죠

 

뻔한 이야기 같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에 손과 발을 담그기 위해서, 그래서 그 진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 그 진리 안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 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이지만, 그것이 은혜인지 깨닫는 진리에 다가서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마나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질문도 없이 의문도 없이, 그냥 앵무새처럼, 시계추처럼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의미 없이 무의미한 말을 늘어놓으며 왔다 갔다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에겐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진리에 타는 목마름으로 은혜와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갑시다. 그것이 우리가 덧입고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 아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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