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은 하나님 아버지께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이후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강림절을 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완성을 이룹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강림절 후 첫 번째 주일을 삼위일체주일로 지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찬양하기 위해서이지요.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매우 독특한 교리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정통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잣대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 삼위일체 교리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우선적으로 담겨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인가 아닌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정통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생겨난 이단 중 가장 끈질긴 이단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는 이단입니다. 현재 유니테리언이라는 교단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잘라 말합니다. 육신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에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고 모세나 마호메트 같은 위대한 선지자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통 기독교와 이단 또는 타종교와 구분되는 지점이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느냐 아니냐, 바로 이 지점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교파는 일단 정통 기독교의 범주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크게 가톨릭,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이 세 교파는 정통 기독교라고 말하는 겁니다. 삼위일체 교리 이외의 것들은 소소한 논쟁에 불과할 뿐, 삼위일체 교리를 건들지 않는 이상,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을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모두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많은 공부와 묵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탈도 많고 말도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삼위일체 교리는 벌집과도 같다는 겁니다. 어설프게 손댔다가 이단으로 몰려 출교(excommunication)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그 신비로운 하나님을 이해해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신비란 모르는 것이 아니라 감춰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려고 노력하고 간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신비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30. 06:18

2012 1 2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8:1-13

제목: 사랑은 덕을 세운다

 

고린도는 우상이 판을 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복음 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지역뿐만이 아니라, 평생 우상의 그늘 아래서 살던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한 지역과 개인의 삶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가 자연스러운 곳, 그리고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에 익숙한 사람이 신앙을 갖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를 전파하는 일, 그리고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을 잘못 이해하면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주고자 했던 교훈을 놓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오늘 말씀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피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말씀의 핵심이 절대로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이 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심각한 요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어떠한 교인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인이 그것을 봤습니다. 그 교인이 노발대발 합니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어떻게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냐고요. 그러나 우상의 제물을 먹은 그 교인은 이렇게 맞받아칩니다. 고기는 고기일 뿐이지 이게 우상에게 바쳐졌다고 해서 무슨 효력이 있냐고요. 그러면서 이 사람은 그러한 것에 얽매여서 무슨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냐고 오히려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그 사람을 나무랐습니다. 이 문제로 고린도교회는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파와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 이렇게 나뉘어서 죽어라 싸웠습니다.

 

사실 이러한 비슷한 문제가 현재도 교회 안에 편만합니다. 한국교회는 처음에 이와 비슷하게 제사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제사 드린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제사 드리면서 절을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 등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장례식장에 가서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국문화는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에게 두 배 반의 절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상주에게는 맞절을 한 배 반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장례식장에 가면 기독교인들은 고인에게 절을 하거나, 상주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앞에서 묵념(기도)하고, 상주와도 목례 정도 나누고 맙니다. 지금은 오히려 이러한 기독교 장례문화가 편만해져서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다시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돌아가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은 이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먹어도 상관 없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된다파가 승리의 함성을 질렀을까요? “그것 봐!”하면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파를 나무랐을까요? 사도 바울은 문제의 핵심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피력합니다. 그것을 피력하는 핵심 구절이 바로 8 1절의 말씀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 구절을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지식은 나쁜 것이구나, 무식하게 사는 것이 좋구나!’ 사도 바울은 지식은 나쁘고 사랑은 좋은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지식이 없으면 인생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당신들은 못 배웠어도 자식들은 교육 많이 시키려고 뼈빠지게 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지식이라는 것을 잘못 소유하게 되면 오늘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진, 그러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지식은 중요한 것이지만 지식만 쌓는 것은 남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지식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지식이 남을 살리고 이롭게 하는데 쓰여질 수 있습니다. 지식에 사랑을 더해 덕을 쌓은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지성인이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결정적으로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파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지식의 핵심 내용이 6절입니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여기서 핵심은 한 하나님, 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라는 뜻은 이 세상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사람들이 행하는 우상숭배는 코미디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있지도 않은 신에게 바친 제물에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도 이러한 지식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음식을 먹어도 상관 없고, 장례식장 가서 예를 갖추어 절을 해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제사음식은 그냥 음식일 뿐이고, 고인에게 절 하는 것은 그 고인이 무슨 이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절을 하는 것이 우리 문화에서 예의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지식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은 교만하다는 뜻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공동체에 고집스럽게 적용하면 그 지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최고의 잘못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는 지식이 더 있는 사람도 있고, 지식이 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지식 수준이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 한 편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제가 쓴 시입니다. 제목은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입니다. 부제는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입니다.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

 

어린 시절 비 올 적마다 엄마가 만들어 주신 도너츠.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다. 기름에 튀긴 거라 끔찍하고 그런 걸 정신 없이 먹었다는 것이 끔찍하다. 그런데 그 시절엔 그것이 상식이었다. 기름에 튀긴다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했을 뿐이고 그런 사실에 풍요롭다고 느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나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독을 주신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트랜스 지방이 엄청 들어간 기름에 튀긴 도너츠를 간식으로 주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엄마의 사랑에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엄마의 상식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그것이 엄마가 자식들에게 베푼 최고의 사랑이었다. 사랑의 행위는 늘 바르고 정직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사랑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고 상식을 비껴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는 만큼, 자신의 상식 선에서만 사랑을 베풀 수 있다.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은 이미 인간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 상식만큼만 사랑을 이해하고 받으면 된다. 그래서 난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엄마의 그 끔찍한도너츠가 그립고 또 그립다.

 

저희 어머니가 올해로 76(36년생)이십니다. 우리 어머니 세대에는 트랜스지방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 그 당시 트랜스지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치고, 트랜스지방에 대해서 지식이 없었던 어머니가 사랑으로 만들어 준 도너츠 간식을 보고 어머니 앞에서 어머니는 참 무식하다며 내팽개쳐 버렸다면, 트랜스지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저는 지식이 많은 아주 똑똑하고 훌륭한 자식입니까? 아니면 후려 아들놈입니까?

 

세상적인 지식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충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목사입니다. 제가 아는 것만큼 여러분들을 지도하고 가르친다면, 아마도 여기에 앉아 계실 분 한 분도 없을 겁니다. 제가 아는 것과 여러 분이 아는 것이 달라 수많은 충돌을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의학적 지식 만을 가지고 우리를 진찰한다면 우리는 의사 앞에서 얼마나 큰 면박을 받고 상처 받겠습니까? 다시는 그 의사를 만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여기서 자유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온 자유를 말합니다.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안 그리스도인은 우상제물을 먹는 것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없는 사람, 아직까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믿음이 약한 자들은 우상제물을 먹는 것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우상제물을 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압니다.

 

이 문제가 단순히 유식과 무식의 문제 아님을 유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유식과 무식의 문제로 보았으면 이렇게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 문제가 거론된 고린도전서가 성경에 포함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 문제가 왜 중요하냐면, 이것이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제물을 먹어도 된다파의 경솔한 행동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구나!” 이 마음에 담력을 얻어 우상 숭배를 다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우상을 믿는 일을 어느 정도 병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다시 먹게 되는 일은 그들이 믿음 좋은 사람들처럼 그 우상제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믿으면서 동시에 우상도 섬기고 있었는데, 우상제물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우상숭배를 지속해서 해도 되는구나라는 타락한 믿음을 담대하게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이것은 곧 라고 사도 바울을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 문제를 끝맺음 합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것이 믿음인데, 이것만 가지고 신앙생활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믿음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핀잔 주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신앙생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된 자유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면 안 됩니다.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영어로 “Love builds up”입니다. “build”세운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up”이 들어가면 세우되 끝까지 온전하게 세운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 말로 이것을 덕을 세운다로 번역했습니다. 참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믿음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교회를 온전히 세웁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가정을 온전히 세웁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온전히 이웃을 세웁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나 자신을 온전히 세웁니까? 온전한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인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우리가 아는 이상, 우리의 믿음생활은 사랑그 자체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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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1. 28. 00:28

사불급설(駟不及舌):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도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 / 소문은 빨리 퍼지니 말을 삼가라는 뜻


자공을 보고 극자성(
棘子成)이 어느날 물었습니다. "군자(君子)는 그 바탕만 있으면 되지 어찌해서 문()이 필요합니까?" 이 말을 듣고 자공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안타깝다. 그대의 말은 군자답지만, ()도 혀에 미치지 못한다. 문이 질과 같고 질이 문과 같다면 호랑이 또는 표범의 가죽이 개나 양의 가죽과 같다는 것인가." 자공은 말 조심하라는 말로 극자성을 꾸짖었습니다.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

 

위의 자공의 가르침에서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질과 형식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 조심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불급설(駟不及舌)이라는 고사성어는 번째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에서는 본질과 형식의 문제는 내버려두고, 말조심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합니다.

 

어느 앞에는 “Beware of Dog”라는 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개조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집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개가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금방 달려들듯이 위협적으로 짖어댑니다. 개조심이라는 팻말이 없었으면 아마도 까무러칠 겁니다.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입만 열면 까무러칠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정도라면 사람은 애초부터 주변에 “Beware of Mouth 말조심이라는 팻말을 달고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욕설과 험담이 나오는 사람에게는 다가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에 물려 죽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조심 대한 교훈은 어디에나 등장합니다. 성경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이 다른 가르침과는 달리 도덕적 가르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복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 성경에 말조심에 대한 교훈이 나온다는 사실은 말조심과 구원이 연관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야고보서 3장은 온통 말조심에 관한 교훈으로 가득 있습니다.

 

어느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보이지 않는 사람의 내면을 있습니다. 망원경으로는 우주를 내다볼 있고, 현미경으로는 입자를 들여다볼 있는 것처럼, 말은 사람의 마음을 보게 주는 도구입니다. ‘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 속담이 있지만,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에는 분명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제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다면, 야고보서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입에서 어떻게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올 있겠습니까? 심은 나고 심은 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할 있게 해주는 가늠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 말이 어느 누구, 지극히 작은 하나를 실족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Beware of Mouth”, 서로 간에 말조심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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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 26. 04:57

어릴 적 TV 광고에 나온 우루사

파김치가 되어서 집에 들어서는 아저씨를 보며

저 아저씨는 왜 저러나싶었다

백일섭 씨가 우루사를 외치며

파김치가 된 아저씨를 일으켜 세울 때

우루사에 전염된 듯 그 아저씨는 힘 차게 일어섰다

 

내 나이 이제 마흔

TV 광고에 나오던 그 아저씨의 나이가 되었다

이제 나는 그 아저씨가 왜 그런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저씨처럼

매일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서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우루사였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우루사를 샀다

백일섭 아저씨처럼 우루사 먹고 힘차게 일어서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우루사를 먹어도 피로가 회복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일까?

우루사의 약효가 잘못일까?

아니면 내 몸이 잘못일까?

 

아내는 매일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서는 나를 보며

이제는 짜증나서 못 참겠다고 하며

언젠가는 파김치 같은 나를

저녁 반찬 삼아 잡아먹을 기세다

 

겁난다

아내의 기세도 겁나지만

이렇게 피곤에 못 이겨 그냥 쓰러져 버릴까 봐 겁난다

이렇게 마흔에 들어선다는 것은 겁나는 일인가 보다

 

나는 오늘도

어릴 적 보았던 우루사 광고의 약효를 순진하게 믿어 보려 한다

물 한 컵과 우루사 한 톨

피로야 제발 좀 물러가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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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인생은 스트레스의 연속입니다. 감기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지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적당히 다루어주지 않으면 어떠한 병을 유발해서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 말에 한()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 나라의 독특한 정신의학적 용어입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Han)’이라는 말을 그대로 표기해서 쓰고 있습니다. 대개 한은 한국의 여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마음의 병입니다. 삶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적당히 풀어주지 못해서 그냥 마음에 쌓이고 쌓여서 결국에는 곪아 터진 형태의 병입니다. 한이 잘 삭으면 예술적으로 승화하지만, 잘못 삭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법입니다.

 

성경에 보면 스트레스를 잘 극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두 사람이 나옵니다. 사울 왕과 다윗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한 적의와 살의에 사로잡혀 평생 다윗을 죽이려 쫓아다니다가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음의 위협을 받는 가운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잘 다스려서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은 태평성대 때 지은 것들이 아닙니다. 고난과 환란 가운데, 스트레스가 최고조로 달해 있을 때 지은 것들입니다.

 

실례로 시편 34편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블레셋 가드 왕 아비멜렉에게로 도망갔다가 그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스트레스가 올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울며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스트레스를 잘 다스려서 거기에서 오는 기운을 돌려 예술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스트레스가 올 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다윗에게 창을 던지고 무당을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었느냐에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인생이 갈렸다는 것에서 우리는 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십니까?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법을 다윗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받는다고 주변 사람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주변 사람은 내 스트레스를 받아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스트레스 풀려고 죄 짓는 길에 들어서지 마십시오. 그 죄의 대가를 꼭 치르게 될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시고, 하나님 앞에서 소리지르시고,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스트레스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쌓아둘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스트레스를 쌓아 둘만한 공간과 여유가 없습니다. 스트레스는 꼭 풀어야 합니다. 다윗처럼, 건전하게 푸십시오. 스트레스를 잘 풀어야 하늘의 복을 받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23. 06:59

2012 1 2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14-20; 3:1-5, 10; 고전 7:29-31

제목: 종말론적 신앙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기독교 사상의 핵심을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기독교 용어로 그것을 표현하면, 종말론입니다. 종말론이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실제적으로 종말론적 신앙을 견지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종말론이 기독교에서 말썽꾸러기가 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정통 기독교 때문은 아니고, 이단들 때문입니다. 기독교 이단 교파들은 종말론을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종말론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심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사람들에게서 착취합니다. 실례로 1992년에 있었던 다미선교회사건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어느 특정한 시간에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가 있을 거라고 선동해 놓고,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치게 만든 다음, 재림이나 휴거와 상관 없이 성도들이 바친 재산을 가지고 도망치는 겁니다. 재림과 휴거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이미 넋이 나가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속은 지도 모르고 다시 정신 차리기도 힘듭니다. 이렇게 자꾸 종말론이 말썽꾸러기 역할을 하니까, 기독교인들이 아예 종말론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겁니다.

 

둘째로, 시대가 종말론을 필요 없게, 그리고 생각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누가 더 많이 가졌느냐를 경쟁하는 시대입니다. 삶의 토대가 철저하게 소유에 있게 하는 시대입니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말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그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파스칼은 인간을 일컬어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옛말이고 철학적인 골동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시대는 이렇게 인간을 정의합니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파스칼 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쇼핑하는 갈대입니다. 소유는 철저하게 이 세상을 생각하게 하고, 이 세상에 토대를 두게 합니다. 그러니 종말론을 생각할 겨를 없게 됩니다.

 

셋째로, 종말론이라는 개념 자체의 어려움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머리 아픈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을 만질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더 갖는 법입니다. 그런데 종말론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 개념을 이해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살기도 바쁘고 힘든데, 종말론 같은 것에 신경 쓸 겨를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에서도 종말론 같이 힘든 이야기는 잘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축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맙니다. 그렇게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눈 가리고 아옹하다.” 영어 표현은 “hide one’s head in the sand” 정도가 되겠네요. 이는 현실을 도피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이 종말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눈 가리고 아옹하는격입니다. 삶의 현실을 도피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죠. 종말론을 모른 채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삶의 자세입니다.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을 못 본채 하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만 마음에 그린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고 싶겠지만, 인생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게 현명한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 현실을 직시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선포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선포한 이 세상의 현실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15). 이것이 이 세상을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절박하고 유일한 메시지였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온통 이 메시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들여다 보는 우리들은 이 메시지를 애써 외면 합니다. 바로 위에서 열거한 이유들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비겁한 사람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비겁함이 어느 정도에 이르는지,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생생하게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이곳 저곳을 다니시면서 줄기차게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에 대해서 전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그 메시지에 반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제자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에서도 그 상황이 그려집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그리고 가족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러한 의구심은 우리가 그만큼 종말론에 대해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깊이 있게 묵상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다름이 아닌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보여줍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본문이 오늘 우리가 읽은 요나서의 본문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한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앗수르였습니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아주 명확하고 간결하게 선포합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3:4). 굉장한 임박성과 긴박성을 보여줍니다. 심판의 날이 사십일 밖에 안 남았다는 겁니다. 그날 이후에 모든 생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선포입니다. 이 선포에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신속하게 즉시 그리고 철저하게 반응합니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가축들까지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회개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자들이나 니느웨 사람들처럼 반응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애써 외면합니다. 외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한 자들에 의해서 고난 당하시고 미움 받으셔서 죽으신 겁니다. 비겁한 사람들은 단순히 숨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이렇게 죽여버리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입니다.

 

사실 종말론이 무엇인지를 오늘 이 시간에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평생 연구해도 다 알지 못할 주제입니다. 다만 종말론이 담고 있는 핵심적인 의미는 꼭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그 핵심적인 의미는 고린도전서의 본문이 보여줍니다.

 

이것이 종말론의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는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왜 이렇게 해야 하느냐?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영어로는 “The present form of this world is passing away.” 입니다. 이 세상의 현재 모습(형태)은 영원하지 못하고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라는 뜻입니다. 잠깐 그 형태를 갖고 있을 뿐 곧 사라지고 말 거라는 것이죠.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토대로 다시 설명하자면, 결혼생활도 영원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이 오면 내가 언제 결혼생활을 했는가 싶은 정도로 훌쩍 지나가 버린다는 겁니다. 또한 우리가 울고 기뻐하는 것도 잠깐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울고 기뻐하는 일의 근거도 결국 이 세상의 일 때문인데, 우리를 울게 했고 기쁘게 했던 그것들도 결국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매매하는 자들이나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 타고 있는 차, 그리고 내가 아끼는 물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비싼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입니까? 모든 것 다 버려두고 산 속에 들어가서 살라는 것입니까? 인생은 허무한 것이니 허무주의에 빠져 살라는 뜻입니까? 성경에서 전하고 있는 종말론이 이렇게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복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 그리고 사도 바울의 종말에 대한 교훈은 우리의 삶의 근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요즘처럼 소비와 소유에 물들어 사는 현대인들에게 더욱더 경종을 치는 말씀입니다. 미국과 같은 주류문화 사회는 인생의 기준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둡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명(, 살아 숨쉰다)의 기운이 소유에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 더 큰 집에서 사느냐, 누가 더 좋은 차를 타느냐, 누가 더 친구가 많느냐, 누가 더 예쁘고 잘 생겼느냐, 누가 더 자존심이 세느냐, 누가 더 성공했느냐, 등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생명의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능력은 오직 소비력입니다. 누가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느냐, 누가 더 원하는 물건, 원하는 것을 차지할 수 있느냐를 따집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돈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돈 때문에 미쳐 날 뛰는 것이지요. 그것이 곧 나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생명을 아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일깨워 줍니다. 현대인이 꿈꾸는 생명, 즉 많이 소유하는 것, 소유하기 위해서 소비를 극대화시키는 것, 그래서 우리가 많이 갖게 되는 그것들은 모두 지나갈뿐이라고 말합니다. , 그러한 것들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토대와 근본이 만약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근거해 있다면, 그것만큼 허무하고 헛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착각 속에서 그것들이 우리를 영원하게 만들어주는 양,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양, 우리를 구원해 주는 양,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린 손을 한 번 떼어내 보십시오. 그리고 현실을 똑바로 보십시오.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고 맙니다. 우리가 그토록 소유하기 원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 생명의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을 살면서 사랑했던 사람들이나 물건들이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도 다 떠나갑니다. 사랑하는 자식도 부모보다 먼저 떠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도 다 떠나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죽고 지나가고 없어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매일같이 경험하면서도 왜 그렇게 죽고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에 기대어 삶을 꾸려가려는지, 거기에 생명의 토대를 삼아 살아가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진리를 말해 줍니다. 기쁜 소식을 줍니다. 죽고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 있다고! 죽고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생명의 토대를 삼아 살아가라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갈릴리 해변에서 부름 받은 제자들처럼 즉시 그리고 철저하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죽고 지나가고 없어지는 것에 기대어 살아가느라 정신 없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외형은 다 지나갑니다.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온 존재를 걸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시니 내가 흔들리지 않으리로다”(시편 62:5-6).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이 신앙 안에서 사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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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1. 21. 00:54

The present form of this world is passing away

1 Corinthians 7:29-31

 

This (plus this week's gospel reading) could prompt one to focus on things eschatological. If one's congregation has not recently (or ever) pondered the varieties of biblical eschatology, it might be an exercise worth undertaking. One thing to keep in mind, however, is that we do not have to settle on one variety of eschatology at the exclusion of all others. Several varieties coexist in the Bible, and the creation of the canon did not require any one to prevail over all others.

 

Briefly, one's eschatology could, with sound scriptural basis, consist of any or all of the following (each item is condensed and over-simplified):

 

Imminent Eschatology: Christ is returning soon. Watch, be faithful, be ready. (This passage, this week's gospel, Mark 13 and parallels, I Thessalonians 4, 1 Corinthians 15, etc.)

 

Realized Eschatology: The kingdom of God is already present among us. May the eternal life God makes possible in Christ be visible in our lives now. (Primarily the Gospel of John, though John also has elements of proleptic eschatology.)

 

Proleptic Eschatology: The kingdom of God is already present in some ways but not yet in its fullness. May that kingdom be visible in our love for God and our neighbor as we patiently wait for its future glory. (Particularly the Gospel of Luke, but throughout the gospels and the epistles.)

 

Prophetic Eschatology: The world is under the power of evil. Let God lead you to establish justice and righteousness in the earth. (Isaiah, Jeremiah, Ezekiel, Amos, Hosea, Micah, Sermon on the Mount (Matthew), Sermon on the Plain (Luke), parables of Jesus, etc.)

 

Apocalyptic Eschatology: The world is so much under the power of evil that only God's action will establish justice and righteousness in the earth. This calls for the patience and endurance of the saints. (Primarily the book of Revelation, although Romans 8, Ephesians 6:10-24, etc., fit as well.) (The distinction between prophetic and apocalyptic eschatology finds thorough exposition in Paul Hanson's, The Dawn of Apocalyptic.)

 

Each of these views has two parts -- a description of present and/or future realities and a call for us to respond in particular ways. In each case, whether or not one agrees with the description of reality, the various responses deserve reflection and, in fact, constitute common emphases in preaching throughout the year. Many congregations experience those emphases regularly without the eschatological underpinnings that accompany them in scripture.

 

If one chooses not to explore eschatology, one could focus on the last sentence, "For the present form of this world is passing away." This idea connects with another strand of thought woven throughout scripture, the transience and non-permanence of life and this world. It finds, perhaps, its most vivid expression in Ecclesiastes, which soberly and relentlessly describes human desires, plans, and schemes as "vanity" and "chasing after wind" (Ecclesiastes 1:14, then some variation appears over 25 times). And, the idea finds brief expression here.

 

This theme is not a popular one in contemporary, dominant American culture. News, popular, and social media continually focus on what we have or want. The advertising industry daily drives home the message that our purpose in life is to want, to desire, to seek, and to have -- most succinctly summarized in the bumper sticker "Born to Shop."

 

Life, according to our dominant culture, does consist in the abundance of one's possessions. If not that, it consists in abundance of relationships (How many Facebook friends do you have?) or the quest to find that one true soul mate who will make our lives complete. If not that, it consists in the quest to be ever happier, more beautiful, more handsome, more confident, and more successful -- as measured by one's money, job, clothes, appearance, house, happiness, and so on.

 

In stark and shocking contrast, Paul advises the married to be as if they have no spouse, mourners not to mourn, rejoicers not to rejoice, buyers to act as if they had no possessions, those who deal with the world as if they had no dealings with it. In this view, our relationships, current emotional state, and status in terms of the world's standards have little or nothing to do with the essence or quality of our lives. People -- even those we most deeply love -- will die, feelings will pass, and so will this world.

 

That being said, this is not a call to depression, despair, and retreat from the world. After all, Paul says these things in the context of our life in Christ. It is, however, an ultimate gut-check, an ultimate reality check. Our world -- at every level we can think of it -- is not as substantial, dependable, and unchanging as we would like it to be. We know this in our vulnerable moments; we live along its edges when we lie awake at night. Paul hammers it home, not for the sake of despair but for the sake of focusing us on the one, true, and ultimate reality upon which we can depend.

 

This passage cannot be faithfully interpreted without its larger context in 1 Corinthians and in the whole of scripture. But we too often let a "faithful" response gloss over life's most painful realities as if they are not real or they won't happen to us. As the saying goes, we prefer resurrection to crucifixion.

 

Yet, we can't really get to the statements in today's reading from the Psalms without this understanding from Paul. Until we've found ourselves in a time with no discernable place to stand, no shelter, no harbor, no friend, nothing that will really last, we can't truly say with the psalmist, "For God alone my soul waits in silence, for my hope is from [God]. [God] alone is my rock and my salvation, my fortress; I shall not be shaken" (Psalm 62:5-6).

 

Commentary on Second Reading by Frank L. Crouch


* 너무 좋은 주석이라 실어 봤다. 교회는 어서 빨리 '종말론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1. 20. 05:11

의심암귀(疑心暗鬼): 의심이 생기면 귀신이 생긴다는 뜻 / 의심이나 선입견으로 인한 판단착오를 비유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습니다. 도둑 맞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 중에서 이웃집 아이가 수상쩍었습니다. 그의 걸음걸이를 보아도 그렇고, 안색을 보아도 그렇고, 말투 또한 영락없는 도끼 도둑이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밭두렁에서 도끼를 찾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웃집 아이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그의 거동이 조금도 수상쩍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말은 의심생암귀(
疑心生暗鬼)” 입니다. -열자(列子) 설부편(說符篇)-

 

인간은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봅니다. 얼굴에 눈이 달린 게 아니라, 마음에 눈이 달린 것이지요. 우리는 살면서 있지도 않은 귀신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 내는지 모릅니다. 모두 마음 때문입니다. 의심이 생기거나, 두려움이 생기거나, 마음이 약해졌거나, 심지어는 상대를 너무 좋아해도 귀신이 생깁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처럼 간사하기도 하고 미련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정신착란이 오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사람은 신앙을 정신의 투사라고 깎아 내리기도 합니다. 마음이 있지도 않은 신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과 진실을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면 의심암귀에 불과합니다. 이미 그 마음은 신을 인정하지 않는 귀신이 들러 붙어있는 것뿐이니까요.

 

성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3). 지금 우리 눈 앞에 예수님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분을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을 겁니다. 겉으로는 예수를 믿는 것 같아도, 속은 이미 여러 귀신으로 더럽혀져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내 마음이 만들어낸 예수를 믿고 있을 뿐이지,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죽었다 3일만에 부활하신 그 예수를 믿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이 중요한 겁니다. 신앙은 예수를 예수로 알아보는 훈련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성령의 역사로 알아보는 훈련입니다. 신앙은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신앙은 의심암귀의 신앙이 됩니다. 의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우리 마음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신앙에 투영시키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귀신을 떨쳐 버리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마음이 만들어 내는 신앙에 사로잡히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신 신앙으로 마음을 무장하십시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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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2.
교권 회복의 길

 

대한민국 교육계에서 한창 이러한 논쟁이 있었다. “교사는 개혁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이 질문을 교회로 가져와 보자. “목회자는 개혁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선뜻 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질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그만큼 교권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지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만약 목회자가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썩을 때로 썩었다는 뜻이다. 목회자는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한국교회에는 이상한 현상 한 가지가 있다. 개혁의 주체는 많은데 개혁의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썩었다고, 목회자가 타락했다고 외치는 아우성은 많은데, 정작 썩은 교회, 타락한 목회자는 없다. 개혁적인 교회나 보수적인 교회나, 심지어 사이비 이단 교회까지 한국교회는 이대로 안 된다는 외침을 높이고 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기이한 현상이다. 이제 남 탓 그만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목회자는 개혁의 주체다. 그러나 목회자는 다른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개혁해야 할 주체다. 즉 목회자는 개혁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라는 뜻이다. 신학적으로도 너무나 자명한 논리가 아니던가! 우리 믿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 아니던가!

 

이제부터 논하게 될 교권 회복의 길은 다른 사람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비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자꾸 다른 사람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민감한 사항이므로 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보다 어느 한 석학의 연구를 토대로 글을 개진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은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가 쓴 <종교개혁사상>의 한 부분이다.

 

15세기 독일의 신앙에서 중요한 한 측면은 반교황주의와 반성직자주의 현상이다. 반성직자주의를 일으킨 한 요인은 하위직 성직자들의 자질 부족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교구사제들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던 것은 보통으로 있었던 일이었다. 그들은 옛 동료들을 (반드시 더 지혜로울 필요는 없었다) 보고 돕고 모방하면서 수집했던 것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교의 교구 방문기록은 사제들이 무식하거나 일과기도서를 명백히 지속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던 것을 매번 드러내고 있었다. 교구 성직자의 낮은 자질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낮은 것을 반영했다. 16세기 초에 밀란의 지도신부들은 비숙련 노동자들보다도 낮은 임금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빚을 지지 않기 위해 말과 가축 무역에 종사했다. 프랑스의 시골에서는 같은 기간에 하급 성직자들이, 거칠게 표현해서, 부랑자들과 동일한 사회적 신분을 누리고 있었다. 과세와 민사법원 소추 그리고 별도의 징병을 면제받는다고 하여도 그들은 사실상 다른 걸식 순회사제와 구별되지 않았다.(61)

 

이는 유럽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여기서 우리는 교권 회복의 길을 논하면서 첫 번째로 목회자의 자질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의 자질을 논할 때 기도를 제 일 순위로 꼽는다. 다른 것(설교, 리더십, 배움)이 좀 모자라도 매일 새벽에 무릎 꿇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목사라면 목사직을 감당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기도 열심히 하는 것이 목회자의 자질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어느 집단에서 조사한 통계를 보면 미국 교회 목사들은 하루 평균 20분 정도 기도한다고 나온 반면에 한국 교회 목사들은 하루 평균 40분 이상 기도한다고 나와 있다. 한국 목사들은 미국 목사들보다 2배 이상 기도를 많이 한다. 기도 많이 안 해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힘들어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기도가 목회자의 자질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도 아니다. 종교인(기독교인이든 아니든)이라면 누구든지 다 하는 기도를 목회자 만의 고유 자질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기도는 양보다 질이 훨씬 중요하다. 우리가 믿는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그 어떤 기도도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자질은 무엇으로 판가름 나는가?

 

사실 그것이 무엇인지 콕 집어서 말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마다 다양한 대답이 나올만한 질문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목회자의 자질은 인문학적 상상력(‘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불러도 좋다)”으로 판가름 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슨 뚱딴지 같은 대답인가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설교를 잘해야 한다거나, 도덕적으로 무흠해야 한다거나, 인격이 고매해야 한다거나, 등 나올 법한 대답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순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목회자의 최대 과업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설교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풀이해서 성도들에게 전하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대한 과업이다. 그렇다면 설교와 인문학적 상상력과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여러분은 성경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 너무 진부한 대답이다. 그리고 너무 당연한 대답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하늘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살다간 믿음의 선조들이 이 땅에서 경험한 하나님을 해석해 놓은 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석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 경험을 직접적으로 진술한 책이 아니라, 해석해 놓은 책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두고 해석이 무엇인지 잠깐 설명해 보자. 복음서는 신문기자의 기록이 아니다(복음서 뿐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렇다). 해석된 기록이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을 구원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냥 한 젊은 유대 청년의 죽음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복음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복음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구원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예수의 부활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해석이다. 또한 만약 예수의 부활이 신문기자가 기록할 수 있는 것처럼 일어났다면 그 당시 성경 외에 다른 문헌에도 예수의 부활이 기록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성경 외에는 그 어디에도 예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은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지금 해석에 대한 이러한 설명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그분은 아마도 기독교 진리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해석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을 것이다.

 

사실 해석이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어떠한 성도가 중병에 걸렸다고 치자. 그런데 그 사람이 병원에 입원해서 병치료를 받아서 그 병이 나았다. 그 사람은 그냥 병에서 나았을 뿐인데,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병을 낫게 해주셨어요!” 이것이 바로 해석이다. 유대 땅에서 한 젊은 유대인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그것을 일컬어 구원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해석이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해석이라고 하는 것에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냥 믿으면 되지, 왜 그것을 해석이라고 부르는지, 불경스러운 마음까지 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명해 보자. “지구는 둥글다는 해석인가 사실인가? 이것은 사실이다. 사실이기 때문에 누구나 믿는다. 그러면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는 해석인가 사실인가? 이것은 사실이라고 대답하고 싶겠지만 아쉽게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진술이 지구는 둥글다와 같이 사실적 진술이었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가? 왜 세상 사람들은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진술을 고백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목회자의 중대한 과제가 생겨난다. 목회자의 과제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이해서 성도들에게 전하는 것에 있지 않고,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진리인가를 논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이 자질이 갖추어져 있지 않는 목회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성경을 고정된진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해서설교하기 보다 문자적으로설교한다는 것이다. 해석되어야 할 진리가 아니라 고정된 진리의 형태로 말씀이 전해지면 설교는 선동적인 구호로만 가득 차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믿습니까? 아멘!”이다.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고, 우격다짐 격인 구호만 난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교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선동적인 설교가 더 카리스마 있어 보이지 않는가? 일시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장기적으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기독교의 토대는 주관성에 있지 않고 보편성에 있다. 말씀이 보편성에 근거해 있지 않고, 주관적인 선동에만 머문다면 모래 위에 짓는 집과 같다. 한국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발전한 한국교회는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선동적으로, 주관적으로 전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된 것을 무슨 성령의 능력으로 성장한 것 인양 오도해 왔다. 성령에 의해 성장한 교회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 이것은 흡사 요즘 건설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있는 현상과 같다. 경제가 무한 성장하고 있었을 당시에는 건설사가 아무리 생겨나도 문닫는 경우는 없었다. 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경쟁력 없는 건설사들은 모조리 문을 닫고 있는 형국이 됐다. 진검 승부를 해야 할 시점이 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성장에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풀려져서 말해지는 부분에 대한 지적일 뿐이다.)

 

해석된 진리인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자질이다. 이것은 성경을 수 백 번 읽는다고 저절로 갖게 되는 자질이 아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몸에 배지 않으면 갖추기 힘든 자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울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좋은 글이 한 편이 있어 아래에 옮겨 본다.

 

그러면, 인문학적 상상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흔히 인문학의 대표 분야가 문학, 역사, 철학이라 말하는데, 문학/역사/철학 공부를 많이 하면 인문학적 상상력이 함양될까? 나는 문학/역사/철학 공부가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우는 수많은 공부 중에 일부일 뿐이라 믿는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분석과 비판, 그리고 감동을 통해 저절로 생긴다. 중고교 시절, 클래식 음악에 빠져 베토벤 교향곡을 분석하고, 관련된 뒷얘기를 추적하며, 음악을 통해 소름이 돋는 감동을 경험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또래 친구들보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커지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TV 드라마를 보면서, 인간의 본성과 선악의 문제, 사회 조직의 아이러니 등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기 시작했다면, 이 역시 인문학적 상상력에 도움이 된다. 멀리 여행을 떠나,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진한 감흥을 받았어도, 이 또한 인문학적 상상력에 도움이 된다. 유난히 맛 좋은 만두를 먹으면서, 그 만두 재료에 대한 분석을 넘어, 그 만두를 빚어낸 장인의 땀방울에 감동을 받고, 이 만두 하나가 사회 경제 구조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깊이 사색하기 시작했다면, 이 또한 인문학적 상상력에 도움이 된다. 인문학적 상상력의 근원은 분석과 비판, 그리고 감동이다. 독서를 통해 분석/비판/감동의 기회가 많아질 수 있으니, 당연히 독서는 인문학적 상상력의 근간이지만, 아무리 독서를 해도 분석/비판/감동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은 독서를 통해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울 수 없을 것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와 관련이 있다. 속된 말로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있을 수 없다. (제이 에스의 영어, 언어학 이야기 사이트에서 퍼옴)

 

해석은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해석한다는 것은 앵무새처럼 그대로 외워대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목회자는 이러한 인문학적 상상력의 자질을 꼭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자질 없이는 해석된 하나님 경험인 성경을 온전히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고정된진리로 착각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을 성경에만 가두어 놓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성경과 이 세계는 계속해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목회자의 첫 번째 사명이고 자질이다.

 

반성직자주의는 요즘에 개독교또는 먹사로 대변된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들이다. 비판이 아니라 인신공격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부르는 대중들만 탓하고 있을 수 있을까? 기독교와 목사를 그렇게 인신공격조로 욕하는 대중들을 세상 것들또는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몰아 부치며 신경 안 쓴다는 듯이 태연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중세의 반성직자주의가 성직자들의 자질 부족에서 왔듯이, 현재 한국교회가 외면 당하고 있는 이유가 성직자들의 자질 부족에서 오는 것은 아닌지 분명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자질 부족 때문에 먹는 욕을 복음을 전하면서 겪게 되는 핍박으로 착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한자성어도 있고, “남의 눈의 티끌을 보기 보다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보라는 예수의 말씀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목회자는 남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먼저 개혁하는 개혁의 주체이자 개혁의 대상이 스스로 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16. 06:36

2012 2 1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삼상 3:1-10, 1:43-51

제목: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부르심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상의 말씀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고, 요한복음의 말씀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사무엘은 이미 나실인으로서 실로에 있는 제사장 엘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제사장 수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의 부르심은 제사장으로서의 부르심은 아니었습니다. 나다나엘의 부르심 또한 무슨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부르심이 아니었습니다. 빌립과의 관계 속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생각할 때, 무슨 직분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목사, 선교사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포함되기는 하나,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전부는 아닙니다. 부르심이란 그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목사직은 그것을 감당할만한 자격과 자질이 갖추어진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의사직이 그것을 감당할만한 자격과 자질이 갖추어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오히려 자격과 자질이 되지 않는데, 소명(부르심)을 받았다고 달려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꾸 성직과 세속직을 구분하는데, 하나님 안에서 성직과 세속직의 구분은 없습니다. 이점을 종교개혁자 칼빈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르심(calling)이라는 단어를 직업에 쓰고 있습니다. 어느 직업이든지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는 천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계시던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충분히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천직
(calling)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나누어 놓은 직업의 높고 낮음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천한 직업도 없고 귀한 직업도 없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찾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자신의 일에서 소명을 찾는 자는 그 일을 하면서 즐겁고 기쁘겠죠. 그렇지 못한 자는 그 일이 아무리 세상적으로 칭송을 받는 직업일지라 하더라도 자신의 일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해는 없어져야 합니다. 목사나 선교사 등 소위 주의 일을 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이 천직(calling)이 아니라, 각자 하는 일 안에서 소명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바로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작업이 이미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 정리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성이 아직도 16세기에도 못 미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의 부르심을 보십시오. 사무엘은 처음에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저 자신의 스승인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도 엘리 제사장이 그렇게 훌륭한 제사장으로 역사에 남지는 못했지만, 이것 하나만은 괜찮았습니다. 아무나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무엘은 몰랐지만, 엘리 제사장은 그 부르심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성령 받으면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그렇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령 받는 것도 무슨 무당이 신 내리듯이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으면 못 치던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시는데, 그것이 성령의 역사의 보편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통계에 의하면, 하나님의 음성은 저절로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앙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신앙훈련을 위해서 목사 같은 교회의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고요. 그래서 성경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하는 겁니다. 훈련 없이 신앙의 성장은 오지 않습니다. 혼자서 독불장군식으로 열심히 믿는 기독교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통한 신앙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사무엘이 처음부터 훌륭한 제사장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 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애송이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부르심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받은 결과, 그것을 잘 소화하고 연습하고 습득한 결과,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남을 제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 훈련이 교회에서 잘 이루어져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 현대교회의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만 해도 기독교인이 되려면 3년 동안의 훈련을 꼭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만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교회의 멤버가 되려면, 기독교인이 되려면 3년 동안 훈련 받아야 한다고 하면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또한 우리는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꺼려 합니다. 세상 살기도 힘들고 바쁘고 죽겠는데,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여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삶 속에서 자신을 귀찮게 한다 싶으면 아예 신앙에 대해서 마음을 닫아 버리는 것이 요즘 세태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받은 부르심은 참 곤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셔서 사무엘의 스승인 엘리 제사장의 가문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전합니다. 애송이 제사장 사무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사무엘은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이 그를 안정시키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주셨는지 말해 보라고 합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물론 그것이 자신의 가문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은 그 말씀을 듣고 사무엘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이런 말로 응답합니다.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그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망하고 맙니다. 그 일의 사정이 사무엘상 4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예언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예언은 미래를 보는 능력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을 뜻합니다. 인디언에게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것과 성격이 좀 다릅니다. 우리가 보통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갖기 원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능력을 통해서 나의 미래를 좀 평탄케 하려는 욕심인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의 예언은 내가 들어설 자리가 사실상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예언은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실 지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린 것이죠. 엘리 제사장 가문에 내려진 예언을 보십시오. 여기에 나의 욕심이 또는 내가 들어설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 가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냥 그렇게 망하고 맙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인 겁니다. 함부로, 섣부르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겠다고 선뜻 나설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메시아를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진리에 목말랐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그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다나엘이 찾고 있던, 기다렸던 그 메시아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빌립의 전도에 나다나엘은 냉소적으로 반응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메시아를 기대하긴 했으나 뭔가 특별한 방법으로 메시아가 오실 거라고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죠.

 

빌립은 이렇게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나다나엘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와서 보라고 끝까지 권면합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권면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예수께 나아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분이 바로 자기가 그토록 갈망하던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과 나다나엘 사이에 오갔던 몇 마디 말로 어떻게 나다나엘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말씀은 50절과 51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신 부르심의 핵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나다나엘에게만 일어난 부르심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리시는 부르심이라는 데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면 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첫째, “하늘이 열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둘째,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현재의 세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지금 이 세상이 돌아가는 상태로만 세상을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이 세상은 죄와 악과 죽음이 편만한 것 같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 즉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으신다는 것, 새롭게 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게 숨쉬고 사는 것 같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은 사실상 태어나자마자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이 우리의 전부를 말해 줍니다. 우리 인간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덧없고 허무합니다. 결국 죽게 될 인생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옹다옹 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누구는 조금 더 살고 누구는 조금 덜 살고, 누구는 조금 더 건강하고 누구는 조금 더 건강치 못하고, 누구는 더 많이 가졌고 누구는 덜 가졌고 하는 것 때문에 희비가 갈릴 것 같지만, 사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로애락은 그러한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은 인간의 아주 본질적인 문제에서 오는데, 그것이 바로 죄, , 그리고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배타적인 문제들입니다. 우리가 개입해서 어떻게 해볼 여지가 없는 문제들입니다. 조금 더 산 사람이라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건강하다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가졌다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현실에 놓여진 굴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 , 죽음)이 이 세상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것 같고, 이것 때문에 인간의 삶이 좌우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개입하셔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들(, , 죽음)을 해결하시고 바로 잡으시고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야곱의 벧엘 체험과 같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 땅으로 도망가던 중 한 곳에 이르러 유숙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거기서 야곱은 꿈에서 사닥다리를 통해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봅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곳이라고 깨닫고 돌단을 쌓은 뒤 예배 드리고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칭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께로 통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에 대한 신앙고백이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나다나엘에 대한 부르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 부르심이란 근본적으로 어떠한 사역으로의 부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르심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비 목사도 나오는 것이고 사이비 교회도 나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그 부르심이 없다면, 우리의 사역(부르심)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부르심이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부르심이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진리에 나를 매는 것, 바로 그것이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을 알고 믿을 때, 우리의 인생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값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으면서, 여기에 모든 인생을 걸지도 않으면서 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아무리 성직이라고 불릴지라도 바람의 나는 겨와 같은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하늘이 열리는 것이 보이십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새창조의 능력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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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1. 14. 01:03

레위기 13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

 

레위기 13장에 나타난 레위기서 저자의 관심은 무엇일까? 이는 분명 의학지식을 전달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현대 의학의 지식과 상당부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레위기는 의학 매뉴얼이 아니다. 오히려 성결(거룩) 매뉴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레위기의 관심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 우리는 레위기를 읽으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레위기에서 구분하고 있는 정함과 부정함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레위기에서 구분하고 있는 정함과 부정함은 철저하게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구분이다. 영어로 “ceremonially”의 정함과 부정함의 구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레위기에서의 정함과 부정함은 정죄의 대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의 질문에 대한 답은 거룩하고 성결한 사람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거룩하고 성결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다음의 답이 따라온다.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러한 질문이 올 수밖에 없다. “어떠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인가?” 레위기는 바로 이것에 대한 대답이다. 그래서 레위기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부정한 사람인지를 세세하게 구분해 놓고 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상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은 이렇게 율법으로 정해졌다.

 

특별히 레위기 13장은 나병에 대한 구별법과 정함과 부정함을 구분하고 있지만, 이는 나병에 대한 의학상식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숙지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레위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나병의 단어 차라아트는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그 나병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레위기에서 쓰이고 있는 차라아트는 전염성 피부병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일 뿐이며, 우리 성경이 그것을 나병이라고 번역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그 나병은 주후 6세기부터 나타난 병이라고 한다.

 

나병이라고 번역된 전염성 피부병이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이스라엘은 이렇게 거룩함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하나님께서 온전하시니 자신들도 온전해야 한다는 신앙에서 비롯된 관심이다. 또한 이런 식으로 공동체를 보호했다. 전염성이 있는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진영 안에 머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전염성이 있는 병을 가진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곤란에 처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변변한 의학상식과 치료기술이 없었던 고대사회에서는 공동체의 공중위생을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조처였다. 대단히 지혜로운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시대에도 심심치 않게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무슨 옷을 입고 교회에 와야 하는가, 또는 머리에 물감 들인 사람이 교회에 와서 예배 드려도 되는가, 등의 문제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이 정장 바지를 입고 교회 출입을 하는 것을 나무라는 교회가 있었다. 여성은 꼭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또한 모자를 쓰거나 머리에 염색을 했거나, 행색이 불순한 사람은 교회에 드나드는 것에 눈총을 받았다. 이러한 것이 바로 레위기에서 말하는 정함과 부정함이다. 여성이 치마를 입지 않았거나, 누군가 머리에 모자를 썼거나 머리에 염색을 했을 때,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됐다. 그러고 보면 레위기의 정함과 부정함이 꽤 거창해 보이는 것 같아도, 실상은 별거 아닌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레위기의 정함과 부정함은 도덕적인 정함과 부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제의적인 것(ceremonially)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을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제의적으로(ceremonially)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하나님께 받게 되는 죄사함이나 축복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죄사함을 받는 길, 그리고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길은 성막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 드릴 때였다. 그러므로 제의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하는 부정함을 지닌 사람은 매우 큰 곤란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함과 부정함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가벼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율법으로 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여전히 교회 안에서 정함과 부정함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무슨 옷을 입고 와야 하느냐, 행색이 어떠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티격태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 논쟁인지 알게 된다.

 

이것부터 확실하게 말해 두는 것이 좋겠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정함과 부정함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라는 질문이 필요 없어진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막힌 담을 허무셨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여기서 오해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구원 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더라도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겠지만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과 그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은 분명 다른 차원의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이것을 선행은총으로 표현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인데, 레위기의 언어를 빌려 다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이제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정함과 부정함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교리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요즘처럼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때에는 더욱 그렇다.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게이나 레즈비언이 교회에 나오는 것조차 정죄하면서 그들을 막아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선행은총의 측면에서 보면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무신 담을 왜 교회는 다시 쌓으려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 열린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 길이 열렸다고, 그 길로 나아가라고 외치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는 충분히 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배타적인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할 입장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 열린 길을 막아서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참으로 부질 없는 질문이다. 모든 이들이,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주인이나 종이나, 부자나 거지나, 피부색깔에 상관 없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상관 없이, 머리에 염색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상관 없이, 성적 소수자들일지라도,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기에 합당하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1. 13. 05:48

대공무사(大公無私): 매우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


춘추시대 진평공이 기황양이라는 자에게 물었습니다. "남양현에 장 자리가 비어 있는데 누구를 보내는 것이 적당하겠는가?" 기황양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대답했습니다. "해호를 보내면 반드시 훌륭하게 임무를 해낼 것입니다." 평공은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대는 해호와 원수지간이 아닌가? 어찌하여 해호를 추천하는 것인가?" 기황양이 대답했습니다. "공께서 물으신 것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에 관한 것이지, 해호가 제 원수인지 아닌지를 물은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여 임명된 해호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얼마 후, 평공이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 조정에 자리가 하나 비어있는데, 누가 적임자인가?" 기황양은 대답했습니다. "기오가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공이 이상하다는 듯 여기며 반문했습니다. "기오는 그대의 아들이 아니오. 어찌 아들을 추천할 수 있겠소." "공께서는 누가 적임자인지를 물으신 것이지, 기오가 제 아들인지 아닌지를 물은 것은 아닙니다." 결국 기오는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십팔사략(
十八史略)-

 

우리는 공평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공평한 대접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거나, 공평하게 일을 처리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공평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누구는 부모 잘 만나서 호강하고, 누구는 부모 잘못 만나서 불행한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공평을 내 마음에 흡족한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마음이 흡족하면 그것을 공평하다고 느낍니다. 도대체 공평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공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죄 없는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그게 어떻게 공평합니까?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공평하지 않습니다. 힘 없는 사람이, 죄 없는 사람이 무고하게 꺾이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 몫을 조금이라도 더 찾아보려고, 마음에 만족할 만큼 자기 몫을 지키지 위하여 세상을 향해 투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불평공하게, 그렇게 끝나버리지 않았습니다. 공평하지 못하게 죽은 예수님이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공평하지 못하게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공평하지 못한 세상을 비웃으셨습니다. 공평치 못한 세상을 바로 잡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공평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외에는 그런 자리가 없습니다.

 

공평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인지 깨달은 만큼 공평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인지 깨달은 만큼, 공평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담지 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공평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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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돈세탁이라는 말이 있다. 더러운 옷을 세탁해서 깨끗한 옷으로 만들듯이 더러운 돈을 깨끗한 돈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더러운 옷을 세탁하면 깨끗한 옷이 되지만 돈은 세탁한들 깨끗해질 수 없다는데 있다. 돈을 더럽게 번 사람들은 이렇게 비열한 방법으로 그 돈을 세탁시켜 쓰려한다. 한 마디로 도덕 불감증에 걸린 것이요 머리에 숯불을 곱빼기로 얹는 격이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속담의 오용이다. ‘돈세탁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써 먹는 방법이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것이다. 본인의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도용하여 돈을 세탁하는 방법이다. 자신을 떳떳하게 밝힐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뒤가 구리다는 뜻이다.

 

요즘 김태근 씨의 죽음과 함께 떠오른 인물이 이근안이라는 사람이다. 김근태 씨는 군사독재시절 민주화 운동을 한 혐의로 당국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당국의 지시를 받아 김근태 씨를 모질게 고문한 사람이 바로 이근안 이다. 이 사람은 아직도 군사독재시절 가장 악랄했던 고문기술자로 역사에 남아 있다. 이 사람은 군사독재가 끝나고 대한민국에 민주화 바람이 불었을 때 지난 날의 죄 때문에 7년 동안 철창 신세를 졌다. 그 때 김근태 씨가 장관의 신분으로 감옥에 찾아가 이 사람을 역사적으로 용서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그 때 이근안은 장관 김근태에게 싹싹 빌면서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했단다.

 

7년 동안 철창 신세를 지면서 이근안은 자신의 과거를 씻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고문 기술자라는 신분을 씻어낼 방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통신으로 신학을 공부하여 출옥과 함께 모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참으로 기가 막힌 신분세탁이다. ‘고문 기술자이근안에서 목사이근안으로 신분이 바뀌었으니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신분세탁이 어디에 있으랴! 이후 이근안은 목사의 신분으로 세상에 나와 간증을 하고 돌아다녔다. 분명 지난 날을 회개한다는 명분하에 눈물 콧물을 다 짜내며 간증했을 것이다.

 

우리는 감옥에 갔던 사람이 출소 후에 목사가 된 일화를 종종 들어왔다. 그러나 감옥에 갔던 사람이 출소 후에 법관이 되었다거나 의사가 되었다는 일화는 들어본 적이 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우선 법관과 의사는 마음 먹는다고 될 수 있는 직종이 아니다. 범죄 경력이 있는 자에게 자격이 주어지지도 않지만 법대나 의대를 들어가는 것에서부터 사실상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는 어떠한가? ‘마음만 먹으면다 될 수 있다. 범죄 경력이 있어도 상관 없을뿐더러, 신학대에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신과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중등교육 이하의 노력을 기울여도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목사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감옥까지 갔다 온 역사적 죄인이 목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이렇게 극악무도한 자에게 목사가 되는 길을 열어준 신학교와 교단도 이해할 수 없다. 이들은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당신이나 이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다!” 나름대로 은혜로운 말을 얼마든지 가져다 붙일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목사는 어느 한 실증적 죄인의 신분세탁을 위해 존재하는 신분이 아니다. 성서에서 우리 인간을 일컬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실증적 차원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기본적인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목사가 될 수 있으며, 신학교와 교단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근안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으로목사의 직분을 더럽히지 말라. 목사직을 통해서 신분세탁한 이근안은 방법만 달랐을 뿐 이 땅에서 성실하게 목사직을 감당하고 있는 목사들을 고문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교회들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1. 성직자 권력, 평신도 권력에 무릎 꿇다

 

연말이 되면 방송사들은 고민에 빠진다. ‘어떠한 스타에게 상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데 연말 시상식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방송사들은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을 먹어왔다. 시청자들에게 먹는 이 부담스러웠는지 언제부턴가 방송사들은 가수들에게 주던 상을 없앴다. 그리고 이름도 가요제전등으로 바꾸어 몇몇 가수에게 시상을 하기보다 가수들이 만드는 축제 형식으로 연말 시상식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연예계 전체에 확산되고 있다. 시상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지만 상을 퍼주는방식으로 연말 시상식의 분위기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분석한 어느 기자는 이러한 현상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는 사실상 방송 권력의 몰락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방송권력이 몰락한 것은 아니다. 이전에 비해서 방송사가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위치로 내려 앉은 것뿐이다. 이는 스타권력이 방송권력을 앞질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옛날에는 스타들이 방송사의 눈치를 봐야 했다.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타지 못해도 방송사의 요청이 있으면 시상식에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권력의 위치가 바뀌다 보니, 방송사가 스타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타지 않으면 방송사가 주최하는 연말 시상식에 스타들은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스타의 권력이 방송사의 권력을 앞질렀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방송사는 스타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상을 퍼주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시청률과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방송사로서는 이러한 궁여지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송계의 권력 이동 현상은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의 이동 현상을 떠올리게 한다. 연말이 되면 교회들은 고민에 빠진다. ‘어떠한 성도에게 직분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데 연말에 열리는 당회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시험에 드는 성도가 생기고 한동안 교회가 시끄러워 진다. 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겪는 목회자의 고통은 참으로 가혹하다. 연말이 다가오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위장병에 걸릴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직분을 퍼주기시작했다. 직분을 주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의 입장에서 두 가지 현상을 말해 준다. 첫째, 평신도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섰다는 것이다. 둘째, 더 이상 직분은 충성된 주님의 일꾼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자신의 목회에 대해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자. “왜 목회가 이렇게 힘 드는가?” 목회의 업무가 너무 고되어서? 일하는 것에 비해 보수가 너무 적어서? 설교 준비가 너무 힘들어서?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답을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결국 이것 아니겠는가? 목회가 힘든 근본적인 이유는 성직자의 권력이 평신도의 권력에 무릎 꿇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교회의 권력 구조에서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이다.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서고 있는 구조에서의 목회는 몇 가지 근본적인 병폐를 낳는다. 첫째, 복음이 정직하게 선포되지 못한다. 기독교의 성경은 근본적으로 부활신앙을 증거한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부활신앙보다는 눈에 잘 보이고 손에 확실하게 잡히는 바알신앙을 원한다. 이것은 평신도를 폄하 하는 말이 아니다. 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바알신앙의 위험성을 알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주문하셨으나 결국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 좇다가 패망하고 말았다. 백성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고관들이나 제사장 그룹은 백성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주지 못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알신앙을 주고 말았다. 이것이 예언서에서 그토록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고관들과 제사장 그룹을 비판하는 이유다.

목회자가 일반 평신도들의 눈치를 보게 되면 이와 똑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부활신앙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힘들고 어려운, 그래서 현실의 문제에만 집착하게 되는 백성들에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바알신앙을 전파하게 된다. 이것은 이미 교회성장번영신학이라는 현대 교회의 패러다임을 통해서 증명된 사실이다. ‘교회성장은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는 집단이라는 증거이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삶도 번영하게 될 것이라는 부푼 기대감을 갖게 하는 요소이다. 그래서 목회자나 평신도나 모두 교회성장에 매달린다. 교회성장을 위해서 첫 번째로 갖추어야 할 요소가 멋진 예배당을 짓는 일이 된다. 성전 건축은 그 옛날 다윗 왕조에게 내리셨던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자신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교회는 수십억, 또는 수백억, 수천억 원의 은행 빚을 떠안고서라도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목숨을 건다. 성건 건축이 교회성장의 기초요 번영하는 삶의 보이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둘째,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서게 되면 목회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 운동이 되지 못하고 사교 모임이 되고 만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세례 요한이 그랬듯이, 예수께서 그랬듯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사람들에게 그에 합당한 회개를 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세례 요한이 그리고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이유가 이것 아닌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서 불의와 맞서 회개를 외치다 그것을 듣기 싫어하는 권력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서게 되면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기 보다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 권력을 쥐고 있는 평신도에게 잘 보이고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눈과 귀를 거스르는 행동과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그들이 잘못해도 잘못했다는 말을 못하게 되고, 그들의 눈과 귀를 시원하게 해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당연한 결과다. 권력을 쥐고 있는 평신도가 교회를 나가게 되면 목회자는 당장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 하니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그래서 목회자는 권력자인 평신도를 교회에 묶어두기 위해서 연말에 있는 당회에서 자격도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직분을 남발할 수밖에 없다. 목회자가 평신도 권력에 협상할 수 있는 카드가 직분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직분은 더 이상 섬김의 자리, 충성의 자리,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평신도 권력에 부응해 주는 당근밖에는 되질 않는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겠지만 한편으로는 평신도 그룹을 너무 폄하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밝히 건데, 그런 생각이 든다면 이 글을 쓰는 목적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평신도의 자질을 거론하고 있는 글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에 대해서 분석하는 글이다.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설 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설지라도 평신도가 성령 안에서 깨어 있다면 오히려 성직자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게 되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교회의 현실을 들여다 볼 때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지금 성직자의 권력이 평신도의 권력을 앞서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중세 교회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또 다른 병폐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쩌란 말인가?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성직자의 권력과 평신도의 권력이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어 대등하게 평화적으로 연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직자의 권력과 평신도의 권력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도 아니다. 권력의 평등은 나중 문제이다. 현 시점에서 시급한 것은 이것에 대한 반성이다: “왜 성직자의 권력이 평신도의 권력에 무릎 꿇게 되었는가? 어떻게 교권(성직자의 권력)을 회복할 것인가?”

 

이것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목회자들의 목회는 영영 힘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쓸데 없는 데다 에너지를 소비하다 결국 목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먹고 사는 데 급급한 삯꾼 목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리고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교권의 회복 없이 목회는 자부심과 영광의 일이 아니라 영영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10. 09:01

2012 18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여호수아 14:6-16, 고전 4:1-2

제목: 갈렙에게서 배우라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을 받는 기분입니다.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옛날,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지파별로 나누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4 2절에 보면, 땅을 나누는 방법이 나오는데, 다름 아닌 제비뽑기입니다. 죽어라 싸워서 쟁취한 땅을, 우리 같으면 어떻게 분배받고 싶겠습니까? 우선 누가 더 혁혁한 공을 세웠는가 따져서, 가장 공이 큰 사람에게 가장 좋은 땅부터 분배하는 원칙을 세우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세우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것은 그나마 좀 민주적인 방법입니다. 더 고생한 사람이 더 좋은 것을 차지하는 것. 그러나 그것도 사실 실제 생활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무조건 힘센 사람이 좋은 것을 차지하니까요.

 

세상은 이렇게 돌아갑니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강자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죠. 돈 많은 사람이,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더 잘생긴 사람이, 더 건강한 사람이, 등등 저 사람을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세상이 인간의 보편적인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땅 분배를 할 때, 그들은 세상의 이치를 따르지 않았고, 하나님의 법칙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제비를 뽑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제비뽑기가 곧 하나님의 법칙은 아님에 유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신앙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선,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더 나아가, 소유권 자체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셔서 내가 지금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또 한가지는 토지공개념입니다. 토지의 공동 소유개념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생각입니다.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니, 어느 땅을 분배받던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주어진 땅에서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죠. 아무튼, 재산의 사유화와 개인주의가 만연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해하기 힘든 개념들이긴 하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땅을 분배받을 때는 이러한 기본 정신 아래서, 제비뽑기를 통해서 그 일이 행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예외의 인물이 한 명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감사함으로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갈렙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땅을 소유할 권한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권한이 생겼는지는, 민수기 14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광야의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서 머물면서, 12명의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 땅으로 보냈을 때, 그것을 정탐하고 돌아온 이들 중 10명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혼란하게 만들었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보내야 했고, 출애굽 1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같은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도, 누구는 멸망을 받고, 누구는 축복을 받습니다.

 

축복받은 사람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갈렙입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하나님 편에서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신앙 가지고 헌신을 서슴지 않았던 갈렙은, 이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가장 좋은 땅을 분배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갈렙은 의외의 요구를 합니다. 이 사람, 갈렙의 믿음이 또 한 번 빛나는 순간입니다.

 

갈렙은 리더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자신의 요구를 말하는데, 우선 지난 날을 회상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자신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부터 의외입니다. 우리 같으면, 정당성을 내세워 가장 좋은 땅을 분배해 달라고 서둘러 말할 텐데, 갈렙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은총을 받은 사람인지, 거기에 대한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장수하고 있다는 겁니다. 40세 때에 정탐꾼으로 활동했는데, 45년이 지난 지금 85세가 되었는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기력이 같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건강 주셔서, 하나님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결론적으로 12절에 나옵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이 산지가 어디입니까? 이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복음성가도 있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찬양을 부를 때, 우리의 욕심을 담아서 내가 원하는 이것을 주십시오’, 라며 하나님께 떼쓰는 마음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갈렙이 요구하고 있는 이 산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명시적으로, 이 산지는 기럇 아르바라는 곳으로, 헤브론이라는 도시입니다. 헤브론이라는 도시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누구나 탐내는 곳이었기 때문에 갈렙이 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헤브론은 땅 분배를 하고 있었을 당시, 아직 정복하지 못했던 곳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던 사람들이 아낙 사람들이었는데, 그 아낙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성한 자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골리앗 같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던 곳이 헤브론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마음으로는 선뜻 그곳을 달라고 하지 못할, 그런 꺼려지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땅 분배에서 우선권이 있었던 갈렙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사람인가를 이야기 한 뒤, 자신의 우선권을 자신의 잇속을 채우는데 쓰지 않고,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감당하겠다면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이건,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강력한 믿음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금까지 부어주신 은총으로 미루어볼 때, 12절의 말씀대로, “그 성읍들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낼 것이다.”라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갈렙의 믿음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15절에 보면, 그 땅에 전쟁이 그쳤다고 나옵니다. 갈렙이 헤브론을 차지하는 일화는 이어지는 15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갈렙에 대한 평가가 14절에 나오는데, 이렇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읽은 또 다른 본문인 고린도전서 4장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였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아는 깊은 영성의 소유자였다는 겁니다. 85세의 나이로, 거인족들과 싸워 그 땅을 차지하겠다는 신앙고백은 흔히 어떤 객기에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교만함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 번 테스트 해보겠다는 우월감에서, 하나님이 진짜 계신가 아닌가 시험해 보고 싶은 불경스러운 마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였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확신의 신실한 믿음의 고백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맡은 사람들입니까?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사도 바울께서 힘주어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향해 충성하고 있고, 하려고 합니까?

 

갈렙이 정복한 헤브론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깊은 연관이 있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막벨라 굴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 굴에 장사된 사람이 사라,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 요셉이 장사되어 있는 곳입니다. 나중에 이곳은 6개의 도피성 중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헤브론은 다윗이 자신의 왕조를 세울 때 처음 왕으로 등극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매우 중요한 곳이긴 한데, 꼭 차지해야 할 땅이긴 한데,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너무 강성해서 아무도 감히 차지하겠다고 요구하지 않았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갈렙은 바로 그 땅을 달라, ‘내가 그 험한 일을 감당하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걱정 없다고 하면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는 말씀처럼,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집사, 권사로 임직하시고, 각부서장으로 임명되시는 여러분들,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나는 누구의 일꾼인가를 늘 묵상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지, 세상의 일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뭡니까? 그게 복음입니다. 그게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임직하시는 분들은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충성을 다하겠다는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행동하기 전에, 이것에 대한 묵상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확실한 묵상이 없으면, 분주하기만 하지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힘들어집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지, 기도 먼저 하시고, 말씀 먼저 보시고 하십시오. 그게 맡은 자들이 먼저 해야 할 충성입니다.

 

이것만 확실하게 삶에 자리 잡으면, 갈렙처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남들이 꺼려하는 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갈렙처럼 땅에 떨어져 겸손하게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교회를 확장하고 부흥시키는 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권사 집사로 임직하시고 각 부서장으로 임명받으시는 분들 뿐만이 아니라, 오늘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가 새롭게 시작된 2012년도, 믿음의 선배인 갈렙에게서 한 수 배워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갈렙의 온전한 헌신이 이스라엘을 풍요롭게 했던 것처럼, 나의 온전한 헌신이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세우신 우리 교회를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찬양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는 당당하게, 힘차게 부를 수 있습니다. 주를 믿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충성된 주의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갈렙처럼,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는 주님의 일꾼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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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