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1. 06:41

기쁨의 향연

창세기 56

(창세기 45:16-28)

 

정체를 밝힌 요셉과 형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이제 기쁨의 향연이 벌어진다. 이런 장면을 보는 일은 기쁘다. 살맛 난다. 우리 삶 가운데 이러한 기쁨의 향연이 날마다 벌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고, 우리가 살면서 이루기를 바라는 삶의 모습 아니겠는가. 인생은 환대 받을 때 기쁘다. 예수께서는 모든 자들을 환대하셨다. 환대 받지 못해 외로움에 치를 떨던 자들을 환대 해주셨다. 그 자체가 바로 구원이었다.

 

예수께서는 병에 걸려 사회로부터 버림 받았던 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공동체가 그들을 환대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죄를 지어 사회적으로 소외 당하던 자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복귀시켜 공동체가 그들을 환대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누가복음 19장의 사케오 이야기이다. 사케오는 세리로서 유대인 공동체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소외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케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해주시고, 그를 아브라함 공동체에 복귀시켜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는 이 진술이 가진 정치사회적 함의는 매우 레디컬하다. 여기서 잃어버린 자란 환영 받지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환영 받지 못하는 자는 잃어버린 자이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은 잃어버린 자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요셉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다.

 

양식을 구하러 온 형제들은 처음에 애굽의 총리(요셉)에게 환대 받지 못하는 것 같아 두려워했다. 그러나,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의 형제 요셉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고 환대하는 것을 알고 형들은 기뻐했다. 환영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일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제 그들은 환영 받는 상황에서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다.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왕과 신하들도 기뻐하며 그들을 환대해 준다. 왕과 신하들이 요셉의 형제들을 환대할 수 있는 이유는 요셉 때문이었다. 요셉의 덕과 인품, 그리고 그의 사회적 공헌이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해 결국 버림 받은 요셉이 이렇게 애굽에서 존경 받는 인물로 자라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요셉이 애굽에서 환영 받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품에 있었을 때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색동옷을 입었으나, 바로 그것 때문에 요셉은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다. 환영 받지 못하는 곳에서의 요셉의 삶은 괴로움 그 자체였다. 결국 환영 받지 못한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환영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결말이 슬프다.

 

환영 받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은 기쁘지 않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환영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동물도 마음이 움츠러든다. 하물며 사람이랴. 사람은 환영 받지 못하면 마음이 움츠러들고 삐뚤어진다. 대인관계에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대부분은 환영 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좋지 않는 것이 외로움이다. 환영 받지 못하면, 외로워지는데, 외로움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상처(정신적 상처)를 준다. 몸이 아픈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범죄를 저지른다. 범죄를 저지르는 가장 큰 이유는 환영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의 개념도 있지만, 오히려 환영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 자기의 존재감을 그렇게라도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는 아무도 자기를 환영해 주거나 알아주지 않으니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어두운 욕망이다.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2:18).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 옛날 성경은 이 부분은 독처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독처한다는 것은 혼자서 외롭게 산다는 뜻이다. ,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이어서 아담의 돕는 배필인 여자 하와를 창조하신 이유가 사람(아담)은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하는 이유는 생물학적 생산을 위한 것도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외로움을 면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외로움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녀가 만나 결혼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오히려 결혼이 외로움을 더 극대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때가 있다. 이런 것이 인간의 연약함(죄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외로움을 극복하도록 하시기 위해 결혼이라는 것을 제정하셨는데 막상 결혼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더 큰 외로움을 생산해 내는 것은 인간이 가진 비극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르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2-25).

 

소외감, 외로움은 인간에게 치명적이다. 인정 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한다는 현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을 왜곡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성격(기질)에 따라 그 현실을 체념하거나 그 현실에 공격을 가한다. 체념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이 세상과 작별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공격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자신처럼 아프게 만든다. 둘 다 비극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요셉이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고, 소외 당하고 외로움에 처해지고, 결국 버림 받았지만,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체념하거나 공격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애굽에서 환영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한 곳에서만이라도 환영 받는다면, 다른 곳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유지하며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아버지 야곱 또한 외로움 가운데 살았다. 사랑하는 부인 라헬을 잃고, 사랑하는 부인이 낳은 아들 요셉을 잃고, 그는 외롭게 살았다. 열 한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과 소통이 잘 된 것 같지 않다. 더군다나 야곱은 아들들을 신뢰하지 못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는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결국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과 애굽의 왕에게 환대를 받아 기쁜 마음으로 애굽의 왕과 요셉이 제안한 애굽으로의 이주 소식을 아버지 야곱에게 알리고자 길을 떠난다. 요셉은 형들에게 옷 한 벌씩을 주고, 동생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챙겨 준다. 요셉과 형들 사이의 불화의 원인 중 하나가 이었는데, 바로 그 옷이 화해의 선물이 된다. 참 의미심장하다. 또한 요셉은 형들에게 여러 가지 아름다운 선물과 곡식을 가득 실어 아버지에게 돌려 보낸다. 그러면서 이렇게 당부한다.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겉으로 보면 요셉이 철없는 형들을 걱정해서 말한 것 같으나, 이것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다투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가즈떨다, 흔들리다, 동요하다는 뜻으로, 흔히 두려움을 묘사하는데 쓰이는 단어다. 그래서 유대인 랍비들은 이러한 의미를 살려 요셉의 형들이 많은 물품을 싣고 가나안으로 가는 동안 강도들을 만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도록 격려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르우벤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잘못에 대해 서로 탓하지 말라는 당부로 해석한다. 아무튼, 요셉은 끝까지 형들과의 화해가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요셉의 걱정대로, 또는 당부대로, 형들 일행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린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26).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해한다. 여기서 어리둥절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푸그는 문자적으로 무감각해지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에 근거해서 상황을 다시 표현해 보자면, 야곱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전혀 믿지 못할 신빙성이 없는 말로 들었다. "니네들이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안 믿는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과 얼마나 서원한 관계 속에서 외롭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그 옛날 요셉이 들판에서 죽었다고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보고할 때, 그들은 피에 젖은 옷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그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말해 놓고, 이제 와서 요셉이 살아 있고,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다는 것이 어떻게 야곱의 귀에 곧이곧대로 들리겠는가.

 

이 외에도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신뢰를 잃은 일이 많다. 장남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통간을 하질 않았나,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 강간 사건 때 아버지 모르게 세겜 사람들을 모두 도륙내어 아버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게다가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보내 놨더니, 시므온을 볼모로 잡히게 해 놓고 돌아 왔으며, 양식 값을 치르기 위해 준 돈도 자루에 도로 가지고 와 놓고 왜 그것이 여기에 들었는지 모르겠다며 이상한 말을 해댔다. 또한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베냐민을 내놓으라고 협박 아닌 협박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 야곱이 어떻게 아들들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요셉과 애굽의 왕이 보여준 환대가 닫혀 있던 야곱의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아들들의 말을 못 믿었지만, 요셉과 애굽의 왕이 보내온 환대(암나귀 열 필에 가득 실린 선물과 양식들)를 보고 야곱은 아들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그 상황은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27).

 

그렇다.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 기운이 소생했다. ‘기운이 소생했다는 말은 영이 살았다는 말이다. , 무감각해졌던 마음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들들을 믿지 못해 외로움 가운데 살았던 야곱의 마음이 다시 환해졌다는 뜻이다. 요셉을 잃고 아픈 가슴을 부여 안고 살았는데, 게다가 이제 베냐민 마저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살았는데, 비로소 야곱의 마음에 기쁨이 돌아온 것이다.

 

인간의 기쁨은 외로움이 극복될 때 온다. 환영 받지 못할 때 인간은 외로움에 던져지지만, 환대 받을 때 인간은 외로움을 극복하게 된다. 환대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구원의 빛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을 때 죽음에 처해졌지만, 팔려간 애굽에서 환대 받았을 때 자존감을 회복하여 과거의 어두운 상처를 씻어내고 형들과 화해할 수 있었다. 형들은 양식을 구하러 가서 애굽에서 환영 받지 못했을 때 마음이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요셉과 애굽의 왕에게 환대 받았을 때 기쁘고 즐거운 마음 가운데 그 동안의 죄책감을 씻어 버리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야곱은 외로움 가운데 살았지만,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외로움을 극복하고 자식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풀고 새로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기쁨의 향연을 보는 일은 가슴 벅차다. 그 기쁨이 바이러스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옮겨지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누구든지 소외되는 자가 없도록 누구든지 환영하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자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우선 배제부터 하는 사회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엔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외로움에 던져지지 않으려고, 상대방에게 인정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현대인들의 몸 짓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현대인들의 우울증은 바로 이렇게 소외되어 외로움 가운데 처해지는 데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 진다.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외로움에 처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외로움에 처해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환영해 주었듯이, 우리도 서로 환영하면서 살자. 그것이 그리스도의 기쁨이요 우리의 기쁨이요, 결국 구원의 기쁨이다.

 

Posted by 장준식

가인의 후예에서 아담의 후예로

 

미국은 졸업의 계절이다. 졸업한 이들의 웃음이 담긴 사진이 도처에서 올라온다. 그러나 졸업한 이들의 희망찬 웃음은 사진에서만 볼 수 있다. 현실은 정말 냉혹하기만 하다.

올해인가 작년인가, 연세대학교 졸업식에 이런 현수막이 걸린 적이 있다. "연대 나오면 뭐햐나, 백순데.."

 

요즘엔 아무리 높은 학위를 받아도 갈 데가 없다. 학위가 다 자기만족에 머무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자기 만족이라도 받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인 시대이다. 자기 만족도 없는 사람들은 사회의 낙오자인양 죄책감마저 드는 시대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그래도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처럼 그나마 낫다( 3:17). 수고하면 그나마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인은 이런 형벌을 받는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12).

요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라 가인의 후예인 것 같다.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수고한 만큼 먹고 살 수 없으니 말이다.

 

땅을 아무리 갈아도 효력이 나지 않는데, 땅 가는 것 자체로 만족을 얻으며 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정신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래도을 먹을 때 오는 만족만큼 근본적이고 더 큰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자기만족만 누리다가 그렇게 그냥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 즉 일명백수로 살다가 삶을 마감할 수는 없지 않는가.

 

1994년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라는 곡을 발표하여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이젠 생각해봐 대학 본 얼굴은 가린 채 근엄한 척 할 시대가 지나버린 건 좀 더 솔직해봐 넌 할 수 있어.”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에서 가방 끈 길게 만들어 주는 데만 관심 있는 한국 교육 현실을 비판했다. 서태지는 가방 끈이 길어야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는 신화를 깨고자 했다. 그런데 과연 깨졌는가?

 

한국 사회의 학력 인플레이션 현상은 단순히 가방 끈을 늘려 보겠다는 관심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가방 끈이라도 늘려야 빡빡한 현실이 좀 달라질까 시도해 보는 젊은이들의 절박함이 담겨 있는 슬픈 이야기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바라지도 않는다. 아무리 땅을 갈아도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 가인의 후예에서 벗어나, 그래도 평생 수고하면 먹고 살 수는 있었던 아담의 후예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학위를 받아도 갈 데가 없고, 목사 안수를 받아도 갈 데가 없는 답답한 현실에 신음하고있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 솔직히 가장 큰 문제는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현실인식능력을 찾아보기 힘들고, 현실에 처절하게 저항해 보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 박약하다는 것인 것같다.

- 사회체제의 불의에 대해 사자후를 토하는 젊은 마르크스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 비극적인 삶의 현실을 뚫고 지나가는초인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 사회체제가 불의한데 개개인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불의한 사회체제를 바꾸기 위해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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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7. 22:54

멈춤과 나눔

(왕상 10:23-25, 전도서 1:2-3)

 

현대인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멈추는 일과 나누는 일이다. 더 힘든 건 멈춰야 하는 것을 알고 나누어야 하는 것을 하는 데 그것이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경제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개념에 의해서 돌아간다. ‘신자유주의경제 개념의 핵심은 무한경쟁이다. 발전을 위해 경쟁은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무한으로 치달을 때 거기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인간성 말살이라는 요소이다. 무한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람의 가치는 상실되고,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자기 자신 또한 넘어야 할 으로 간주되는 상황에 이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두 무한경쟁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커다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소소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멈추는 것을 싫어한다. 멈추면 짜증난다.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다 빨간 신호등에 걸렸을 때 계속 달리지 못하고 서야 하는 것 때문에 짜증난다. 바쁜 시간에 스쿨버스를 만나면 짜증난다. 물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멈춰 서야 하는 것이지만, 전진하지 못하고 서야 하는 상황에 짜증난다. 병원 가서도 몇 분 보지 않는 의사를 만나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짜증난다.

 

우리들은 어느새 나누는 일 또한 힘들어 하게 됐다. 서로가 다 어려운 시절에는 나누며 사는 게 오히려 미덕이었다. 내가 좀 가진 게 없어도 모두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남들보다 조금 못 가진 것을 못 견뎌 하는 시대가 됐다. 남들보다 좀 못 가지면 인생의 낙오자인 양 매우 불쾌한 생각과 더불어 모멸감을 느끼는 세상이 됐다. 게다가 풍요로운 세상에 살다 보니 나눔에 대한 감각이 거의 죽은 상태가 됐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 어려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리고 나눔이라는 가치 또한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자기 포장 수단으로 전락한 것도 문제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풂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의 주가를 높이려고 한다. 나눔 또한 철저하게 산업화된 것이 현실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성경의 인물 중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솔로몬이 수위를 차지한다. 성경의 인물에 빗대어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솔로몬과 같이 부귀 영화를 누리는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성경의 저자가 솔로몬의 부귀 영화를 기록한 이유는 솔로몬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솔로몬의 부와 명성을 부러워한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왕상 10:23).

 

실제로 솔로몬의 부와 명성은 에 달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값비싼 예물을 가지고 솔로몬을 찾아왔다. 솔로몬은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와 명성은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만약 솔로몬에 대한 기록이 열왕기상 10장으로만 끝났다면, 성경의 가르침은 부귀와 영화(부와 명성)’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솔로몬에 대한 기록을 한 장 더 할애한다. 열왕기상 11장에 기록된 솔로몬은 이전 열 장에 걸쳐 묘사되고 있는 솔로몬과 사뭇 다른 솔로몬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던 솔로몬이 여색과 우상숭배에 빠져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나라를 두 동강이 낸 주범으로 지목된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주극생란 낙극생비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술이 극에 달하면 난리가 나고 쾌락이 극에 달하면 슬퍼진다는 뜻이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 126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이다.

 

이 성어는 전국시대 제() 나라의 종횡가 순우곤(淳于髡)의 일화에서 유래한다.

 

순우곤(淳于髡)은 제()나라 사람의 데릴사위(지위가 낮아 죄수와 거의 같은 대우를 받았다)였다. 그는 키가 일곱 자도 안 되지만 익살스럽고 변설에 뛰어나 제후들에게 자주 사신으로 갔으나 굴욕을 당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제위왕(齊威王)8년에 초()나라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제나라를 쳐들어왔다.

 

제나라 위왕은 순우곤을 사자로 삼아 조()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게 하였고, 조나라 왕은 정예 병사 10만 명과 전차 천 승()을 주었다. 초나라는 이 말을 듣고 밤중에 군대를 이끌고 가 버렸다.

 

위왕은 몹시 기뻐하여 후궁에 주연을 준비하여 순우곤을 불러 술을 내려주며 이렇게 물었다.

 

“선생은 어느 정도 마셔야 취하시오?”

 

순우곤이 대답했다.

 

“신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

 

위왕이 말했다.

 

“선생이 한 말을 마시고 취한다면 어찌 한 섬을 마실 수 있소? 그 이유를 들려줄 수 있소?”

 

순우곤이 대답했다.

 

“대왕이 계신 앞에서 술을 내려 주신다면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곁에 서 있고 어사(御史; 문서와 기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뒤에 있어, 신은 몹시 두려워하며 엎드려 마시기 때문에 한 말을 못 넘기고 바로 취합니다.

 

만일 어버이에게 귀한 손님이 있어 신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꿇어앉아 앞에서 모시며 술을 대접하면서, 때때로 끝잔을 받기도 하고 여러 차례 일어나 술잔을 들어 손님의 장수를 빌기라도 하면 두 말을 못 마시기 전에 즉시 취합니다. 만약 사귀던 친구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뜻밖에 만나면 너무 기뻐 지난날 일을 이야기하고 사사로운 생각이나 감정까지 서로 터놓게 되어 대여섯 말을 마시면 취합니다.

 

만약 같은 고향마을에 모여 남녀가 한데 섞여 앉아 서로 상대방에게 술을 돌리며 장기와 투호 놀이를 벌여 짝을 짓고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아도 벌을 받지 않고,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금하는 일이 없으며, 앞에 귀걸이가 떨어지고 뒤에 비녀가 어지럽게 흩어지는 경우라면 신은 이런 것을 좋아하여 여덟 말쯤 마셔도 약간 취기가 돌 뿐입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 술자리가 끝나면 술 단지를 한군데로 모아 놓고 자리를 좁혀 남녀가 한자리에 앉고 신발이 뒤섞이고 술잔과 그릇이 어지럽게 흩어지고(杯盤狼藉) 마루 위의 촛불이 꺼집니다. 주인은 저만을 머물게 하고 다른 손님들을 돌려보냅니다. 이윽고 엷은 비단 속옷의 옷깃이 열리는가 싶더니 은은한 향내가 퍼집니다. 이때 신의 마음이 몹시 즐거워 한 섬은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故曰酒極則亂,樂極則悲).’라고 하는데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사물이란 지나치면 안 되며, 지나치면 반드시 쇠합니다.”

 

이러한 말로(위왕에게) 풍간하였다. 위왕이 말했다. “좋은 말이오.”

 

위왕 그 뒤로 밤새워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고, 순우곤에게 제후들 사이의 외교 업무를 맡겼다. 왕실에서 주연이 있을 때마다 순우곤이 항상 왕을 모셨다.

<출처: 김영수의 [나를 세우는 옛 문장들]>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진다.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도 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과유불급"의 출전은 《논어(論語)》〈선진편(先進篇)〉에 공자(孔子)와 제자 자공(子貢) 간의 문답에서 찾을 수 있다.

 

자공이 공자에게 다른 제자인 자장(子張)과 자하(子夏)에 대해 물었다. "(:자장의 이름)와 상(:자하의 이름)은 누가 어집니까?"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하니, 다시 자공이 반문하기를 "그럼 사가 낫다는 말씀입니까?"하니, 공자는 다시 답하기를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子貢 問師與商也 孰賢,  子曰 師也 過 商也 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지고,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모자라고 도달하지 못한 것이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는 않지만, 극에 달하고 지나친 것은 그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솔로몬의 부와 명성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기억하면서, 솔로몬이 썼다고 알려진 성경의 다른 이야기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전도서에 등장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2-3).

 

무엇이든지 극에 달아 슬퍼지는 것, 무엇이든지 지나쳐 인생을 망쳐버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멈춤과 나눔에 있다. 인간은 자신이 관리할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는 분량 외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은 모두 욕심이다. 신약성경의 야고보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

 

우리가 사는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체제는 인간을 무한경쟁으로 내몰아 모두가 욕심가운데 살게 만든다. 멈추고 나누는 것보다 끝까지 질주하고 남들이 따라 올 수 없는 부를 축적하는 것을 미덕인 양 선전한다. 나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일단 쌓아놓고 보는 게 먼저라는 식이다. 기부금도 일단 쌓아 놓고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정도의 기부금을 내야 경쟁에서 온전히 이긴 사람처럼 대우 받는다. 그러니 현대인의 인생이 얼마나 피곤한가. 서로가 서로를 못살게 구는 것을 넘어 자신이 자기를 못살게 군다. 요즘 서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주제의 책은 단연 자기계발서이다. 자신이 잘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결국 자기 자신이 아직 덜 계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계발만 더 잘 되면, 무한경쟁에서 승자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나 자신 또한 나에게 극복해야 할 적이 되어 생명을 향유하지 못하고 생명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진하고 마는 불행한 인생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성경과 교회는 어떠한 메시지를 던져주어야 할까? 바로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통해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이 사회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 성경의 멈춤과 나눔의 메시지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네준 빨간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하는 메시지, 그 메시지를 통해 가상현실(무한경쟁)에서 나와 자신의 삶을 영유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바로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특별히 모세 오경 전반에 걸쳐 강조되는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과 희년 사상인데, 그것이 담고 있는 뜻은 멈춤과 나눔의 가치에 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멈추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면 그 가치가 상실된다. 아무리 나쁜 일도 일단 멈추는 데서부터 다시 회복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통해서 안식일의 가치를 실현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것이 멈추는 순간이다. 부활은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모여 작은 부활절로서의 주일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세상의 변혁(변화)에 대한 이야기이지 그저 신기하고 놀라운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멈추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하고 잠 못 이루는 일이 어디에 있는가. 나누지 못하는 것만큼 가난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멈춘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실존을 깨닫는 일과 같다. 영어단어 ‘handful’손으로 움켜쥘 만큼의 뜻을 가지고 있다. ‘손으로 움켜쥘 만큼많다는 뜻이 아니라 적다는 뜻이다.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인간의 위()는 자신의 주먹만하다. 주먹만한 위에 채워 넣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은 그야말로 ‘handful’하다. 그러므로 많이 먹으면 탈이 나지만 적게 먹으면 오히려 편안하다.

 

좋은 것뿐만 아니라 해로운 것도 손으로 움켜쥘 만큼만 하다가 멈춰야 한다. 그래야 몸이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생을 망치지 않을 수 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이러한 것도 극에 달하면 결국 자기 몸만 상하고 자기의 인생과 상대방의 인생을 망치고 만다. 우리는 복음서의 이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절대로 나누지 못한다. 나눔은 마음이 풍요로운 자가 누리는 생명의 향연이요,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내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자기 삶 속에 구현하는 놀라운 신앙 행위이다.

 

어느 누군가가 혼자만 돈을 많이 벌어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헌금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어느 누군가가 혼자만 돈을 많이 벌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금을 많이 내어 놓을 들 무슨 소용이 있나. 물론 그렇게라도 공공선을 이루는 것은 그렇게 나무랄만한 것은 못되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렇게 차선책을 택하도록 이끌지 않고, 삶 자체가 나눔의 삶이 되도록 도전한다. 가령, 회사의 사장이 사장이니까 자기 자신이 돈을 많이 벌어 교회에 헌금 많이 하고 사회에 기부금을 많이 해서 자기 혼자만 영광 받는 자리에 서지 말고, 자기 자신이 좀 덜 가져가더라도 직원들에게 수익을 더 분배하여 직원들과 그 기쁨을 나누는 것이 궁극적인 나눔의 삶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보다 많이 벌어 혼자만 기쁘고 즐거워 하나님께 많이 드리고 사회에 기부 많이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수익분배의 구조를 철저한 나눔의 구조로 혁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풍요로운 듯하면서도 인생이 슬픈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극에 달하도록 우리 모두를 무한경쟁에 치닫게 하는 이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왜 주일을 지키는 지, 왜 우리는 예배하는 자들로 하나님께 나오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지는 법이다. 극에 달하면 생명의 가치를 상실하고 결국 상대방을 소모하고 자기 자신을 소모하여 소멸될 뿐이다. 상대방과 자기 자신을 소멸하는 일에서 해방되는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 그 능력이 우리 삶 속에 실제적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자, 그런 자는 주일(안식일)과 예배의 가치가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고 거기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줄 안다. 주일과 예배의 가치는 멈춤과 나눔에 있다. 멈추라, 그리고 나누라.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우리가 생명을 누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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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4. 05:37

나는 요셉이라 (구원의 신비)

창세기 55

(창세기 45:1-15)

 

하나님은 역전의 용사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이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요셉은 곤경에 처한 동생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으려 하는 형들의 모습을 보고 이제 자기 자신의 정체를 그들에게 밝혀도 되는 시점에 왔다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물이 서서히 뜨거워지다 임계점에 도달해 수증기를 내뿜으며 끓어 오를 때와 같다. 임계점에 도달한 물이 보글보글 끓어 오르며 공중에 수증기를 풀풀 내뿜듯이, 요셉은 감정의 임계점에 도달해 그 동안 꾹꾹 참았던 눈물을 펑 터뜨린다. 요셉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바로의 궁중 사방에 퍼져나갔다.

 

꺼이꺼이 울면서 요셉은 자기 자신의 정체를 형들에게 드러낸다. “나는 요셉이라 (I am Joseph!).” 요셉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형들에게 가장 먼저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다.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존재가 요셉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형들은 요셉이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둥절해서 아무런 반응도 못한다.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인간의 속성 중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에게만 오감을 열어 놓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면 인간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떤 이에게는 인지되고 어떤 이에게는 인지되지 못한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뒤 허탈한 심정으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과 함께 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런데 두 제자는 자신들과 함께 걷고 있는 존재가 부활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들의 오감은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게 된 것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성만찬을 행하며 그들의 오감을 열어주셨을 때이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24:30-31).

 

신앙이란 닫힌 오감(감각들)을 여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영안을 연다라고 말한다. 처음 인간은 오감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타락이란 오감이 닫혀 버린 것을 말한다. 오감이 닫혀 버린 타락한 인간(죄인)은 더 이상 진리(하나님)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매우 편협한 존재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해방자인 것은 우리의 오감을 열어 하나님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오감을 회복한 신앙인 요셉의 고백을 들어보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5). 이것은 평범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신앙 고백이 아니다. 형들에게 두 배로 복수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키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신앙 고백한다.

 

신앙은 삶의 해석학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이는 신앙(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것은 신앙을 왜곡한 말이다. 물론, 신앙을 아편으로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나 있는 법이다. 일례로 부엌 칼은 요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쓰는 사람도 있다. 부엌 칼은 원래 음식을 만들어 생명을 살리는 데 써야 온전한 것인데, 반대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데 쓰는 사람은 부엌 칼의 용도를 심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을 심하게 훼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이 바로 신앙을 아편처럼 사용하는 이들이다. 참 불쌍한 사람들이다.

 

신앙은 오감을 열어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 요셉의 스토리를 알거니와, 요셉과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 속에 무슨 기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요셉과 같은 삶을 산 사람이 있다면, 요셉처럼 권력을 쥐게 되었을 때 십중팔구 그 권력을 이용하여 원수 갚는 데 썼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신앙을 통하여 오감을 열어 젖힌 참된 신앙인이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불행으로 보지 않고,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다. 요셉은 타락한 오감을 제대로 회복한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모름지기 신앙이란 바로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로의 새창조 역사를 보이는 법이다.

 

요셉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렇게 밝힌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7). 여기서 후손(쉐에리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쉐에리트남은자, 남은 것, 살아남은 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 ‘후손은 극심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자를 뜻한다. <생명 보존과 후손> 모티브는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흐르는 가장 중요한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도 이 모티브이고, 요셉도 결국 이 모티브를 가진 이야기이다. 이후 출애굽 이야기도 같은 모티브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참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구원 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타락한 구원을 갈망하는 자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의 극대화를 위한 욕심을 채울 뿐이다. 하나님이 생명이시고,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로의 거듭남이 바로 구원이다. 이러한 거듭남 없이 구원을 논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요셉이 형들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 형들을 괴롭혔던 이유는 형들에 대한 복수를 실행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던 형들이 얼마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존재로 바뀌었는가를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요셉은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형들에 의해서 버림 받았다. 그런, 요셉은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 받았다. 또한 베냐민은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비로소 깨달은 형들에 의해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형들 자신 또한 그렇게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난 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생명 또한 구원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요셉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설명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끔 형들의 오감을 열어젖히는 작업을 한다. 요셉은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12).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비로소 깨달은 형들은 이제 그 동안 막혀 있었던 오감을 열어 현재 자신들 앞에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받아 들인다. “자기 아우 베냐민을 목에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고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14-15).

 

구원 받지 못한 자,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 생명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가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자, 진리(하나님)를 향해 오감이 열리지 못한 자, 여전히 타락한 자, 죄인은 생명을 헤치는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다. 형들이 그랬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어떻게 하면 요셉의 생명을 빼앗을까에만 골몰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은 생명을 무참히 짓밟았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동생의 울부짖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 울부짖음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둘러 앉아 점심 도시락을 까먹었다. 양심에 아무런 가책이 없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쳤던 군중들도 그랬다. 그들은 예수가 누군지 몰랐다. 그들은 예수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며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자들에게 편승하여 사납게 외쳤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들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마땅히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아무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로마 총독 빌라도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는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알고 물은 것이 아니라, 모르고 물은 것이었다. 아니, 비웃음의 물음이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 일리가 없다는 물음이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요셉이 자기의 정체를 밝히며 나는 요셉이라!”고 했을 때 형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를 밝히셨을 때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16:8).

 

신앙은 오감을 여는 작업이다. 오감을 여는 작업은 쉽지 않다. 신앙은 한 순간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동의 장치가 아니고, 산을 오르는 지난한 과정과도 같다. 그래서 신앙을 일컬어 순례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의 작업을 통해 오감이 열린 신앙인은 요셉이 보는 것처럼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보게 된다. 형들은 요셉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살리시고 그 흉측한 죽음을 생명의 도구로 삼으셨다.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시고 그 흉측한 십자가를 생명과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구원의 신비이다.

 

그 구원의 신비는 온통 생명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신앙인은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방식이다. 그것을 보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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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5. 5. 12. 10:42

이방인

 

나는 누군가에게 이방인이다

아니 나는 모두에게 이방인이다

저녁거리,

그 쓸쓸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노을로

고개를 돌리는 건

여기에서는 불경한 짓이다

그 너머 있는

무지개 마을을 상상하는 건

여기에서는 교수형감이다

이들에게 어제는 먼 미래와 같고

먼 미래는 태초와 같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마음조차

괴로운 상상인 것은

이들에게 내일은

아직 경험되지 못한

감각의 바깥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석양에 기울어지는 그림자만

나를 바싹 뒤쫓았을 뿐,

내가 거리를 돌며 본 건

옛날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에게서 발견한 오싹한 느낌,

그들은 모두 예전에

죽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도대체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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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0. 12:59

하나님 같은 어머니, 어머니 같은 하나님

(이사야 66:13-14, 요한복음 15:4-5)

 

한국에서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55일은 어린이날이고, 58일은 어버이날이고, 5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미국은 1365일을 어린이날로 간주하기 때문에 어린이날이 따로 없다. 미국에서는 510일을 어머니의 날로 지키고 있다. 한국에서는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함께 묶어 어버이날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미국은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따로 지키고 있다. 이것은 문화의 차이가 반영된 것이다. 한국은 유교문화가 강하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집안의 최고 위치에 오랫동안 군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함께 지키는 데 큰 어려움이 많다. 이혼한 가정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가정의 가치를 가장 중시하는 미국 사회에서 이혼이 가장 많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함께 며칠 상간으로 있는 것은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부모 자식의 관계는 곧잘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로 비유되기도 한다. 우리는 평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데 익숙하지만, 실상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어머니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교리적인 고백이지, 하나님이 인간처럼 을 지닌 분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어,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익숙한 것을 통해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종말에나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출애굽기 34장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주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리고 이사야서 42장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속성을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투영시킨다면, 하나님은 아버지를 닮았는가 아니면 어머니를 닮았는가? 아마도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씀하실 분이 많을 것이다. 보통 아버지들은 자비롭지 못하고 은혜롭지 못하고 노하기를 불같이 하고 죄를 용서치 않는다. 그래서 흔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무서움이 많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애틋한 경우가 많다. 다음은 박목월 시인의 아들이요,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지내신 박동규 씨의 어머니에 대한 간증이다.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로 씌어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 같은 존재이다. 부모는 자녀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를 잘 성장하도록 도울 수도 있고, 방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플레르 펠르렝 씨의 이야기를 보자. 플레르 펠르렝은 한국계 프랑스 사람이다. 플레르는 이란 뜻인데, 참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여인이다. 그는 프랑스 문화부장관으로 자랑스런 한국인 2세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한국계 인물로 프랑스 정계에 진출한 첫 번째 인물이다. 한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이 여성은 그러나 사실 한국으로부터 버려진 존재였다. 서울 빈민촌에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거리에 버려졌고, 생후 3~4일쯤 됐을 때 거리에서 발견돼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6개월 여 기간 동안 보살핌을 받던 그녀는 운명적으로 프랑스의 한 평범한 가정으로 입양된다.

 

그를 입양한 프랑스 아버지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평소 교육에 대한 아쉬움과 열정이 있던 이 양어머니는 딸에게 자신이 못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남다른 교육열을 보였다. 그런 어머니의 바람대로, 펠르랭은 정말 이를 악물고 공부했고 결국 그녀는 남들보다 2년이나 빠른 16세 때 이미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하여 프랑스의 최고 명문 학교들을 연이어 졸업한다. 경제, 정치, 행정에 관련된 최고 학교들을 다 마친 후 결국 정치에 입문했고, 이제 프랑스 정부의 요직인 프랑스 통상장관에 이어 문화부장관에 오른 기적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신문 시사에서 가져옴)

 

이처럼 부모는 아이를 버릴 수도 있고, 이렇게 잘 키울 수도 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운명은 이처럼 갈린다. 그러니, 부모가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요즘 사회 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아동 학대문제이다. 다음은 작년에 났던 기사다.

 

신우(가명)는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친가외가 모두 스무살짜리 아빠와 한살 어린 엄마의 임신과 출산을 질책했다. 환대받지 못한 어린 부부는 우는 아기를 달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다툼이 일상이 됐다. 신우가 태어난 지 한달이 되던 2014 2월 어느 날, 부부는 심하게 다퉜다. "신우를 없애자"는 말을 꺼낸 건 아빠였다. "나가 있으라"는 그의 말에 엄마는 현관으로 향했다. 아빠는 우는 아이를 냉동실에 넣었다.

 

이렇게 아동 학대가 일어나 아이들이 죽는 경우의 시작은 90% 이상이 가정불화라고 한다. 부부 간의 싸움이 시발점이 되어, 결국 부모가 아이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정 불화가 일어나는 원인 중 67%경제 곤란이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어느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부 간에 화목이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루게 되기 전에는 서로 간의 사랑이 바탕이 된다. 그러다 아이를 낳으면 관심사가 아이들에게 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생기면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일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놓치고 사는 것이 있다. 아이들도 중요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을 지탱하는 요소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일에 대한 열정도 아니고, 결국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한다. 시간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한다. 그러나 실상 시간과 돈을 가장 많이 투자해야 하는 곳은 자녀들이 아니라, 부부 간의 사랑이다. 부부 간에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결혼한 부부들, 아이를 둔 부부들은 자녀를 위한 희생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인생 최대의 보람으로 삼는다. 물론 자녀를 책임져야 할 부모 입장에서는 굉장히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아이들은 따라쟁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운다’. 부모님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겠는가? 부모님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니, 너무 자식들을 위해 희생만 하지 말고, 부부 간의 행복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시라.

 

우리는 성경에서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 중 대표적인 성경 구절 몇 군데만 함께 보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편 121:3-4)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이사야 66:13-1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1930년에 양주동 박사가 지은 어머니 마음라는 노래의 가사를 보자.

1: 나실제 괴로움 다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3: 사람의 마음 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하나님의 모습은 이렇게 어머니를 닮았다. 우리가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성실하게, 온 마음을 다해 할 수 있는 길은 다른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 하나님을 알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고,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녀를 돌보고 세상을 돌보는 데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예수 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는 것에 있지 않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데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이미 우리는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처럼사랑이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면, 우리의 삶 구석구석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하겠는가?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내 자식만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남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 사랑하는 마음이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선한 사랑에게만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베풀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햇볕을 비춰주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기가 제일 중요한 사회이다.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회이다. 자기의 감정이 제일 중요한 사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닮아 간다는 것은 더불어 어울려 사는 사회를 만드는 데 헌신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어울려 살려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기를 제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을 위해 너무 자기 자신을 희생만 시키는 것도 건강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도 건강하지 못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히 배려할 수 있는 자기조절능력을 갖출 때, 사회는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4-5).

 

하나님 같은 어머니가 되어, 또는 하나님 같은 아버지가 되어 자녀를 돌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보려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들이 포도나무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그때 비로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혹시, 삶에서 하나님 같은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아름다운 열매, 사랑의 열매,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 잘 안 되고 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붙어 있는가를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 같은 어머니, 아버지로서 이 세상에서 많은 열매를 맺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가 얼마나 포도나무 되신 하나님께 붙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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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7. 06:50

이것이냐 저것이냐

창세기 54

(창세기 44:1-34)

 

그리스 신화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있다.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신탁이 내려졌는데, 장차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신탁이었다. 이 신탁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가족들에게 버림 받고, 또한 성장하여 방황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의 고향 테베로 가는 중 그 신탁이 실현된다. 오이디푸스는 길에서 만난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와 논쟁 끝에 그가 자신의 아버지인줄도 모르고 그를 죽이고, 테베 왕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어머니인줄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고 산다.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테베로 오는 중 테베의 오랜 골칫거리인 스핑크스를 만난 오이디푸스는 그 요상한 괴물과 씨름하게 된다. 스핑크스는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다 수수께끼를 냈는데, 그의 수수께끼는 이것이었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저녁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 이 질문을 맞히는 사람은 살아서 스핑크스의 앞을 통과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스핑크스에게 잡아 먹혔다. 오이디푸스 또한 이 무시무시한 수수께끼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내놓고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던 스핑크스에게 정답을 내 놓는다. “그것은 인간이다!” 오이디푸스가 정답을 맞히자 스핑크스는 수치심에 괴로워하며 자결한다.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이디푸스 자신에게 내려진 또 다른 신탁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오이디푸스는 신탁대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것을 알자 어머니이자 부인인 이오카스테가 자결해 죽고 난 뒤 그녀가 하던 브로치로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된다.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는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며 살게 된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저녁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는 스핑크스의 질문 또한 심오한 것이다.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에 인간의 얼굴, 독수리의 날개와 늑대의 발톱을 갖고 있었다. 즉 스핑크스는 둘이면서 셋, 셋이면서 넷, 넷이면서도 하나의 존재였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을 형상화하고 있는 모습으로 인간의 본질 자체가 수수께끼라는 뜻이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맞혔을 때 스핑크스는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던 인간의 비밀을 오이디푸스도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껴 자살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스핑크스의 착각이었다. 정답을 맞히긴 했지만,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가 인간의 본질을 알았다면,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서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고, 그렇게 자기 자신의 눈을 상하게 하여 세상을 보지 못하는 지경으로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눈에 비수를 꽂으며 의식을 잃었던 오이디푸스가 정신을 차리고 한 첫마디는 놀랍게도, “, 빛이여!”였다. 눈이 없는 사람이 빛이라니, 신하들이 무슨 의미인지 묻자 오이디푸스가 대답했다. “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들은 이 빛을 보지 못하리. 세상의 눈을 지닌 그대들은 이 빛을 알지 못하리.” 그는 비로소 눈이 먼 뒤에 인간의 본질을 깨닫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시기심에 불타 노예상에게 팔아버렸던, 그래서 어딘가에서 굶주림과 학대에 못 이겨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동생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자신들 앞에서 이렇게 호령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야곱의 아들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앞에 이렇게 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형들에게 자기의 신분을 곧바로 밝히지 않고, 계속해서 시험 거리를 던져주며 형들과의 화해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간다. 화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해는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화해를 청해도 상대방이 화해할 수 있는 성숙한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을 오히려 관계를 더 망칠 수 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을 확인하고, 동생 베냐민도 잘 성장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한 요셉은 이제 마지막 확인 작업을 한다. 그것을 위해 요셉은 형제들에게 함정을 놓는다. 요셉은 청지기에게 시켜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자신이 즐겨 쓰는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도 함께 넣으라고 한다. 그리고, 형제들이 길을 떠나 얼마큼 갔을 때 그들을 따라 가서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냐며 은잔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 추궁하라고 시킨다.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싶었던 형제들은 자신들 중 어느 누구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면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고 맹세한다. 그런데, 자루를 하나씩 풀어나가자 은잔이 발견된 자루는 베냐민의 자루였다. 그러자 형제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13).

 

요셉은 왜 이런 계략을 꾸몄을까? 이 계략을 통해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형들의 반응 (특히 레아의 아들들)을 보기 위함이었다. 베냐민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뒤, 형들이 베냐민을 향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예전에 형들(레아의 아들들)은 시기 질투에 사로잡혀 곤경에 처한 자신들의 배다른 동생 요셉을 헌신짝 취급하며 노예상에게 팔아 버렸다. 만약 아직까지 형들이 그때와 꼭 같은 마음을 가지고, 동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요셉 쪽에서 화해를 청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런 형들과 화해한 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요셉은 확인하고 싶었다. 과연 곤경에 처한 베냐민을 버리고 갈 것인가? 아니면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한 것인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게 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던 것처럼 요셉의 계략 또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요셉이 던진 이 인생의 수수께끼에 형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화해가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요셉도 형들처럼 그들의 인생을 죽음에 처하게 할 것인가 판가름 나게 된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냐 저것이냐, 형제들의 반응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자 형제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요셉의 거처로 되돌아 온다. 자신들의 맹세에 따라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해서이다. 형제들을 대표해서 유다는 요셉에게 나아가 베냐민 구명을 위한 탄원을 한다. 유다의 탄원은 구구절절하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아들 한 명(요셉)을 잃고 얼마나 슬픈 세월을 보냈는지, 그리고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만약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의 총리대신의 요청대로 어쩔 수 없이 함께 데리고 온 베냐민을 아버지에게로 다시 못 데려가는 일이 생기면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며 간절히 탄원한다.

 

요셉은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하여 저토록 구구절절하게 탄원하는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솟구쳐 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낸 계략을 통해 형들이 그 동안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유다는 자기를 희생하더라도 끝까지 동생 베냐민과 아버지를 지켜내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원래 형제가 가져야 할 따뜻한 마음 아니었던가?

 

화해는 마음과 마음의 재결합이다. 화해는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다시 불타오르는 것이다. 요셉은 형들에게서 그 옛날 시기와 질투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 속에서 무르익은 성숙한 마음, 즉 아버지와 형제를 돌보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더 큰 가치를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할 줄 아는 책임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스핑크스의 질문에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대답을 통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오이디푸스처럼, 형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인간다움을 견지하게 되었을 때라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외쳤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다움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 앞에서 우리의 나아갈 길은 인간다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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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규율(통제)의 가치

 

“창조적인 유망주에게는 어른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강한 규율이 필요하다. - 거스 히딩크

 

최근 한국 축구 유망주 이승우 선수의 부적절한 행동을 두고 말이 많은가 보다. 그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 국가대표 이영표 선수와 히팅크 감독이 한 마디씩 했다. 한 매체에서 이영표 선수는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축구선수 아르연 로번을 어떻게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거듭나도록 훈련시켰는지를 소개하며 이승우 선수에게 뼈 있는 충고를 했다.

 

내가 얼마 전 읽은 어떤 심리학자의 글에서도 확인한 바, 어린이가 성장하여 사회에서 훌륭한 인재로 커 나갈 때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과 규율' 두 가지이다. 가장 뒤쳐지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부류는 부모에게 사랑만 받고 '통제' 받지 못한 아이들이고, 오히려 사랑을 못 받고 통제만 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앞의 아이들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사랑과 규율(통제)'이 적절하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가치는 잘 알아도 통제(규율)의 가치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미국에 살면서 미국 사회에서 감동 받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이들의 검소함이고(허례허식이 없음) 다른 하나는 이들의 질서이다. 우리는 흔히 미국은 자유분방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미국 학교를 다니는데, 실제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보면 강력한 규율 아래 아이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본다. 한 마디로, 학교가 무슨 수도원 같다. 복도를 걸어 다닐 때 뛰어다니거나 시끄럽게 잡답하는 친구가 없으며, 어딘가로 이동수업을 할 때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의 철저한 통제 아래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한국의 초중등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아이들에게 적용되는 강한 규율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규율을 잊은 채 자기 자식에게 무조건 사랑만을 베풀기에 여념 없고, 학교에서는 부모와 학생의 눈치를 보며 아이들에게 강력한 규율을 적용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창조성은 자유분방함에서 오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창조적인 인재를 키워 창조경영의 국가로 도약하고 싶다면,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규율(통제)'에 대한 부분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규율에 자기 자신을 최적화시키는 훈련부터 필요하다. 그 다음에 오는 자유로움이 가치 있는 창조, 방종하지 않는 창조를 만들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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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16. 04:35

배수진

창세기 52

(창세기 42:29-43:14)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갔던 야곱의 아들들이 돌아온다. 일단 양식을 구해 오는 것에는 성공을 한다. 그러나 큰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둘째 아들 시므온이 함께 돌아오지 못한 채 볼모로 애굽의 감옥에 갇혀 있다. 그리고 양식 자루 속에는 돈뭉치가 고스란히 들어 있어서 영락 없이 사기꾼으로 몰린 위기에 처해 있다. 마지막으로 애굽의 총리는 시므온을 구하고 양식을 또 얻기 위해서는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올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야말로 어려움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 온 것이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양식을 구해 돌아온 아들들은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아버지 야곱에게 자세하게 말해준다. 애굽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들은 야곱은 비탄에 잠겨 통곡한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42:36). 부모에게 자신의 죽음보다 더한 아픔은 자식을 잃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는 죽지 못해 산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이미 죽은 것처럼 산다. 자기 목숨보다 귀한 자식을 잃었는데 무슨 낙이 있겠는가.

 

야곱은 그렇게 살았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 야곱은 죽은 것처럼 살았다. 그런데 거기에 또 다른 괴로움을 얹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둘째 아들 시므온도 잃게 생겼고, 막내 아들 베냐민도 잃게 생겼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고통을 감지한 장남 르우벤이 나선다. 그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시므온도 찾아오고 양식도 구해오고 베냐민도 도로 데리고 오겠다고 말한다. 만약 그 일에 실패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쩐지 야곱은 장남 르우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추측 건데, 르우벤은 빌하와의 간통 사건 때문에 아버지 야곱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 같다(53:22, 49:4). 사람은 기본적으로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신뢰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 법이다.

 

해결책에 대한 뾰족한 수가 없는 상태에서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기근은 계속 심해지고, 애굽에서 얻어온 양식마저 떨어진다.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살 궁리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 온 것이다. “그들이 애굽에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43:2).

 

아버지 야곱의 이 말에 이번에는 넷째 아들 유다가 나선다.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이다. 유다는 베냐민과 함께 가지 못하면 절대로 양식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애굽의 주인이 말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야곱은 괴로워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43:6).

 

유다는 필사적으로 아버지 야곱을 설득한다. 아버지 야곱의 생명뿐만 아니라, 아들들의 생명, 그리고 아들들의 가족들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베냐민과 함께 양식을 구하러 가는 것뿐이라고 유다는 말하며 아버지 야곱을 설득한다. 그러면서 아버지 야곱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담보가 될 것과 만약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지 못하면 아버지 앞에서 영원히 죄인으로 살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결단을 재촉한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43:10).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야곱은 유다의 설득에 동의한다. 그러면서 그냥 가지 말고, 그 옛날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랬던 것처럼, 예물을 가져 갈 것과 돈을 두 배 더 가져갈 것을 지시한다.

 

여기에는 배수진을 치는 삶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배수진이란 물을 등진 진지(陣地)라는 말로, 어떤 일에 죽음을 각오하고 대처하는 것을 뜻한다. 배수진을 치고 싸울 때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배수진을 친다. 르우벤은 자신의 두 아들의 목숨을 배수진으로 치고 아버지를 설득하고, 유다는 자신의 목숨과 평생 죄인의 낙인을 배수진으로 치고 아버지를 설득한다. 결국 야곱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 베냐민을 배수진으로 치고 양식을 구하는 일에 협조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보이지 않는 배수진이 한 개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가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베냐민을 보내는 것인데, 사실 베냐민을 보낸다는 것이 곧 베냐민의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야곱은 그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야곱은 베냐민을 배수진으로 삼고 있는 것 같지만, 그가 베냐민을 보낼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믿음을 지니게 되는 과정은 그렇게 빨리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생득적으로 이런 저런 인간적인 방법을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경지가 신앙이다.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이런 기도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43:14).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엘샤다이)’이라는 칭호는 아브라함에게 처음 계시된 것이고(17:1),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도 사용했고(28:3), 야곱에게도 계시된 이름이다(35:11).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있다.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 에서를 만나기 전에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했다.

 

야곱에게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와 늘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호칭이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집을 떠날 때 아버지 이삭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들 야곱에게 복 주실 것을 빈 적이 있다(28:3).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 사람들을 도륙한 일로 야곱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한다(35:11). 나중에 죽음을 앞둔 야곱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때도 자신의 인생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관하셨다고 고백한다(48:3).

 

이렇게 야곱에게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좋은 것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찾아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었고, 어려울 때마다 찾을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 지금, 야곱이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늘 그랬듯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라는 희망이 담긴 기도인 것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한 치 앞의 일도 모른다. 잘 되고 있을 때 곧 닥치게 될 어려움을 모르고, 어려움을 겪을 때 곧 잘 되게 될 것을 모른다. 잘 될 때는 잘 되는 것에 파묻혀 지내고, 어려움을 겪을 때는 그냥 어려움에 괴로워할 뿐이다. 그런 우리의 인생은 참 가련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즐거움이나 괴로움 가운데 조금만 눈을 돌려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인생을 겸손하게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 기도하며,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야곱.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과연 자식을 잃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을 배수진으로 치고,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한 야곱에게 꿈에도 생각 못했던 좋은 일이 일어난다. 자식을 잃게 되기는커녕 잃은 줄로 알았던 자식(요셉)까지도 도로 찾는 일이 일어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배수진, 한 번 쳐 볼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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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13. 05:15

오직 한 가지의 즐거움

(시편 33:1)

 

백지가 하나 있다. 여기에 무엇을 채우겠는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여기에 백지가 하나 있다. 어떤 색깔로 이 백지에 칠하고 싶은가? 미술심리치료라는 분야가 있는데, 미술을 통해서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보고 그것을 치료하는 심리치료의 일종이다. 주로 어린 아이들의 심리치료를 위해서 쓰이는데, 마음이 어두운 아이는 어두운 색깔을 써서 백지에 무엇인가를 그리고, 마음이 밝은 아이는 밝은 색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그것은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의 마음의 눈은 그것을 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못 보더라도 자기 자신은 본다. 물론 자기 자신도 못 볼 때가 있다. 자기 자신이 못 보는 경우는 으로 발전된 경우이다. 그래서 전문가를 만나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 자기 자신은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인간은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에 따라 인생을 산다. 겉으로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행복은 외적인 것에서 오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은 내면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서 온다. 일례로,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선물 받았다고 하자. 그 부인이 행복하겠는가? 행복이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가져다 주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부부의 관계에서 온다. , 보이지 않는 이 마음이 서로를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면 아무리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선물을 주고 받더라도 그들은 행복할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은 이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여러분은 무엇으로 인해 즐거움을 삼고 사시는가?

고사성어에,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전국 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 -

 

맹자가 말하는 세 가지의 즐거움도 보면, 외적인 것이다. 부모형제의 무고,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삶, 그리고 제자를 키우는 것인데, 이것은 모두 외적인 것이다. 부모형제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가?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면 불행한가? 자신을 따르는 자가 없으면 불행한가? 사실, 이런 것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항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인간의 행복을 절대적으로 가르지는 않는다.

 

인간에게는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즐거움이 존재한다. 식량공급과 안보, 그리고 자녀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생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식량은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식량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즐거움을 모른 채 죽고 말 것이다. 먹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먹는 것이 얼마나 좋으면,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인생의 반 이상은 먹는 즐거움에 산다. 그래서 반대로 가장 큰 불행은 굶는 것이다. 배고파서 죽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량공급도 안보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구약의 많은 이야기들이 이와 연관이 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 왕을 구한 것도 결국안보때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가장 기본적인 식량공급을 위해 힘쓰고 애쓴다. 그러나, 애쓰고 힘써서 얻은 식량을 누군가에 의해 약탈 당할 때의 허탈감이란 곧죽음과 같다.

 

가나안에 정착해서 살던 이스라엘은 열심히 식량공급을 위해 일했다. 그런데 추수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주변 나라의 폭군들이 쳐들어와 생명과도 같은 식량을 약탈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안보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그들은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좀 더 근본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왕을 의지하다, 결국 주변 나라 정세를 잘못 읽는 실수를 범해 나라가 망하고 만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적인 수사법을 동원해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한다. 강하고 오래된 민족이 와서 그들의 삶을 피해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5:17).

 

이것을 통해서 예레미야가 파멸해가는 이스라엘에게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이들이 이렇게 무력하게 무너지는 이유는 엉성한 군사대책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했던 이스라엘이 당해야 했던 대가는 엄청났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즐거움인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 모든 것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신앙이란 인간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보이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다. 우리는 단순히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을 통해서 즐거움을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을 보이지 않게 보장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 이것으로 끝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편 33: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편 64:10).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서양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의 일화이다. 어느 날 헨델이 길을 가다가 가발을 잃어버렸다. 당시에 가발은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다. 요즘에도 영국에서도 법관들이 재판을 할 때 가발을 쓴다. 가발은 어떤 권위를 가지게 해주는 물건과도 같다. 한참 동안 난처해 하고 있을 때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의 가발을 찾아주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근처 이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였다. 그 후 헨델은 고마운 마음에 그녀를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자주 보면 정드는 법이다. 그러나 보니 어느덧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헨델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오라토리오 메시야의 친필 악보를 선물로 주었다. 헨델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헨델은 다시 그 이발관을 들렀다. 그 아가씨는 헨델이 온 줄 모르고 있었다. 이발을 하러 온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다른 이발사에게 머리를 말게 악보 몇 장만 갖다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헨델은 조용히 이발관을 나왔고, 그 후로 다시는 그 이발관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헨델의 명작 메시아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무엇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사실, 사람은 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편 33: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편 64:10).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란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인생인가를 가르쳐 준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이것이 우리가 인생의 백지에 그려야 하는 삶이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우리 내면에 채워야 하는 색깔이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자, 다른 무엇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이 마음에 가득 채우고 사는 자의 삶을 보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살았던 한 분을 소개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8:20, 9:58). 그러나, 이 분은 행복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행복했다. 왜냐하면, 이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것을 나누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즐거움의 원천이 오직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그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줄 아는 자들이다.

 

마음이 허전하거나, 혼란스럽다면,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면, 인생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바로 지금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때이다. 그런 분은 그리스도께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는 인생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그러면, 윤동주의 다음 시처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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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9. 03:39

화해는 은혜다

(Art of Reconciliation)

창세기 51

(창세기 42:21-28)

 

인간에게 일어난 일 중 가장 불행한 일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일이다.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부분 서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불행한가!

 

한국 사회는 또다시 토막살인사건의 충격에 휩싸여 있다. 시화호에서 발견된 시신의 몸통 부분과 그 인근에서 발견된 손과 발의 신원을 확인해 본 결과 중국여성동포의 것으로 밝혀졌다. 신원확인을 토대로 범인이 검거되었는데, 범인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남편이 밝힌 범행의 이유는 중국에 있는 계좌로 돈을 부치라는 잔소리 때문에 부부싸움을 했고 홧김에 집에 있던 둔기로 아내를 내리쳐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범행을 숨기기 위해서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아내의 시신을 훼손해서 유기했다고 한다. 머리와 팔, 다리를 몸통에서 분리시켰고, 팔과 다리에서 다시 손과 발을 분리시켰다. 손과 발에서 지문을 채취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 같다. 그렇게 훼손한 아내의 시신을 자전거로 여러 번에 걸쳐 이곳 저곳에 유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 다리를 유기하려다 잠복 중인 경찰에게 긴급 체포되었다. 아내를 죽이고 시신을 훼손 한 뒤, 태연하게 직장에 출근까지 했다고 한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괴물로 만들었을까?

 

거의 20년 가까이 부부로 살아온 이들의 삶이 이렇게 처참한 비극으로 끝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사랑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능력 상실은 이렇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중국 동포 사회에서 이런 문제가 일어난 것 때문에 중국 동포 사회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문제가 계속 발생되고 있는 중국 동포 사회를 끌어 안아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한국 정부도, 한국 교회도 발벗고 나서야 한다.

 

이런 문제가 연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중국 동포)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모습이다. 먹고 살기에 바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고,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자신의 신세를 존재는 한 없이 한탄하며 울고 있다는 뜻이고, 메말라 버린 정서를 어쩌지 못해 신음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어디 중국 동포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돈을 많이 벌었을 때도 아니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을 때도 아니고, 명문대에 합격했을 때도 아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사랑할 때, 그리고 사랑 받을 때이다. ,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면 다툼이 일어나고 불화가 일어나지만, 사랑의 능력이 회복되고 발휘되면 화해가 일어나고 평화가 일어난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사랑의 능력이 상실되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시기, 질투, 미움이 일어났다. 그래서 형들은 동생 요셉을 죽이려 했다. 르우벤의 반대와 유다의 만류로 요셉을 죽이지는 않지만, 그들은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동, 즉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린다.

 

본문에는 사랑의 능력이 상실된 가운데 죽음과 같은 일이 벌어질 때, 그 일을 당한 당사자 요셉의 감정이 나타나 있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여기서 괴로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차라인데, 이것은 극단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데 주로 쓰이는 단어이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성을 전멸한 후, 야곱이 그 지역 사람들이 보복할까 봐 두려워 떨면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낼 때(34:30) 쓰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긴 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얼굴을 숨기심으로 그들이 당할 고통을 나타낼 때도 쓰였다(31:17).

 

상상해 보라. 형들에 의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해졌을 때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거룩한 심정으로 걸러서 보면 안 된다.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재구성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현실성 있게 다가 온다. 요셉은 그때 형들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그리고 요셉의 마음은 극심한 괴로움에 떨었다. 사실, 그와 똑 같은 상황에 처해보지 않는 이상 그 마음을 헤아리기는 힘들 것이다.

 

화해는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여 발휘하는 것인데, 화해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동일한 경험에서 오는 연민(compassion)’이 필요하다. 현재 형들의 위치는 과거 요셉의 위치로 전락한 상황이다. 형들은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와서 정탐꾼으로 몰려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옛날 요셉이 겪었을 괴로움을 생각하며 거기에 빗대어 자신들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형들이 요셉의 괴로움을 이해하게 된 것은 바로 자신들이 그러한 괴로움을 동일하게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지만, 그것은 제 삼자들이 그렇게 보는 것일 뿐, 당사자들 간에는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기 십상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대부분 거기에는 피해자만 있지 가해자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서 시인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고 감추려 한다. 그래서 가해자는 자신을 가해자라고 드러내질 않고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며 자신을 감추려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온전히 구분되는 시점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동일한 고통을 겪게 될 때이다. 가해자는 자신이 행한 극악무도한 일을 자신이 동일하게 당해보기 전까지 인식하지 못한다. 가해자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하게 되는 시점은 피해자와 동일한 피해자의 입장에 처할 때이다. 형들이 동생 요셉에게 가한 일이 얼마나 잘못한 일인가를 깨닫는 순간은 바로 그들이 동생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자 당하는 괴로움(차라) 때문이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통역을 통해서 형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사실 요셉은 형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그들의 괴로움도 들었고, 그가 알지 못하던 사실도 알게 되었다. , 큰 형 르우벤은 자신을 죽이는 음모를 반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큰 형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어떤 해결책을 내놓기 보다는 동생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니라”(22).

 

자신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들은 요셉은 그 자리를 벗어나 외딴 곳에 가서 운다. 여기에서 화해를 위한 두 번째 과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눈물이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24). 여기서 울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바카인데, 이것은 단순한 울음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을 모두 포함하는 울음을 뜻한다.

 

큰 어려움을 겪은 사람의 마음은 폭풍이 치는 바다와 같다가도 평온함이 깃든 잔잔한 바다로 바뀐다. 이것이 반복된다. 이것을 정신의학적 용어로 조울증이라고 한다. 조울증이 깊어지면서 눈물이 마르게 되는데, 눈물이 마른 사람만큼 인생이 어려운 사람이 없다. 눈물은 영혼의 윤활유와도 같은 것인데,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영혼의 작용이 멈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요셉이 울었다는 것은 영혼의 작용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뜻인데, 영혼이 되살아 나야 사랑의 능력이 회복되고 화해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화해의 과정에 서로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눈물은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해주고, 영혼의 얼룩을 씻어주는 세정제 역할을 해준다.

 

요셉은 둘째 형 시므온을 붙잡아 두고 나머지 형들을 아버지 야곱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열 명의 형들 중 왜 시므온을 붙잡아 두었을까? 일단 큰 형 르우벤을 잡아 두려고 했다가 르우벤 형은 자신 해하려는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열외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둘째 형인 시므온을 붙잡아 두었을 것이다. 어떤 학자(Nahum M. Sarna)는 여동생 디나의 사건을 고려해 볼 때 시므온의 성격 상 그 범죄의 주동자일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 요셉을 죽이려 한 범죄를 주동한 것이 시므온이었기 때문에 그를 붙잡아 두었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시므온을 뺀 나머지 아홉 형제들은 풀려난다.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한 요셉은 형들을 그냥 돌려 보내지 않고 부하들을 명해서 형들의 자루에 곡식도 채워주고, 그들의 돈을 다시 자루에 넣고, 길에서 먹을 양식까지 챙겨준다.

 

형들은 요셉이 챙겨둔 보따리를 메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여관에 유숙하게 되는데, 거기서 혼이 나서 떨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름이 아닌 자신들의 돈이 도로 자루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자루 속에 돈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28).

 

여기에서 화해의 세 번째 과정이 발견되는 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이것을 에덴동산 이야기를 통해서 묘사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이것을 탕자 이야기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과 기독교 신학이 제시하는 인간론의 기본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상황, 즉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상황을 일컬어 원죄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단순히 인간의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성경의 진술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이 사랑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하고 사랑 받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고,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할 때 가장 불행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존재이다. ,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할 가능성은 없다. 요셉과 형들 사이에 화해가 발생하는 시점은 이렇게 형들이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셉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안에 있었다. 하나님 안에 있었던 요셉과 이제 하나님 안으로 들어온 형들 사이에 화해가 일어나는 일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화해는 은혜다. 어떻게 보면 요셉의 인생은 진노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형들이 요셉의 일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거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노가 은혜로 바뀌는 순간은 바로 그들 모두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그 순간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는 은혜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 같으나,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죽임 당한 것 같으나, 그의 죽음은 진노의 죽음이 아니라 은혜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과 화해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화해는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이다. 화해는 우선 동일한 경험에서 오는 연민(compassion)’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찌꺼기가 껴서 움직이지 못하는 영혼을 맑게 해주는 카타르시스의 눈물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깨닫는 일(하나님과의 합일)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능력을 회복시켜 주시고 화해를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되시고(one of us), 눈물로 발을 씻도록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은 우리 인간에겐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가장 큰 표지는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하는 일이다.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화해가 일어나고 있는가? 행복한가? 화해는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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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6. 06:49

'예수 부활하셨다'의 의미

(눅 15:11-24)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우리가 찬양했듯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우리는 이 날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치며, 기뻐하며 즐거워한다. 일단, 외친다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사실을 담고 있다는 뜻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그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좋은 일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다.

 

유레카!”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찾았다라는 뜻이다. 기원전 25년경, 지금으로부터 2 2 20년 전 살았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다가 물질의 밀도가 물질마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일화로 알려진 말이다. 아르키메데스는 그 원리로 왕관에 금이 아닌 다른 물질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금세공사가 속임수를 썼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뭔가 어려운 일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유레카!”를 외친다. 아르키메데스가유레카!”를 외쳤을 때, “유레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찾은 그 원리가 중요한 것이다. 그 원리는물질의 밀도가 물질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예수 부활하셨다!”라고 외칠 때, “예수 부활하셨다!”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He is Risen!)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단순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어떤 현상에 대한 진술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라는 현상은 그냥 신기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세상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만큼 신기한 일이 많다. 죽은 자가 살아날 확률이 많은 가? 아니면,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나 배가 뒤집혔는데 거기서 살아날 확률이 많은가? 실제로 옛날에 바다에 빠져서 죽게 됐는데 거북이가 등에 태워 뭍으로 실어다 준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우리가예수 부활하셨다!”라고 외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신기한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건은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무엇인가 아주 큰 의미와 변화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외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예수의 부활은 지금도 계속해서 해석되고 있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예수의 부활이 진리인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진리는 확정된 원리가 아니라, 끊임 없이 해석을 요구하는 신비를 말한다. 더 이상 해석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놓아두고, 그 부활 사건을 경험한 예수의 제자들이 해석한 것은 예수의 부활이 구원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가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우리(인류)를 구원한 구원 사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개념도 아주 광범위한 개념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쓰는언어의 범주에서 구원은 아주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고 예수의 부활과 관련된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주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 아주 보편적인 기독교의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구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죄에 대한 개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은 우리가 흔히 아는 죄의 개념과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의 개념은범죄를 주로 의미한다. 나쁜 짓, 즉 윤리 도적적인 범주를 벗어난 일을 죄라고 한다. 그래서 죄를 지은 자는 사회적 지탄(손가락질)을 받고, 그 값을 어떤 형태로든 치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의 개념은 윤리 도덕적 차원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의 죄는 신학적 죄의 개념인데, 여기서신학적이라는 말은하나님과 관련된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학적 죄는 하나님과 관련된 죄의 개념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5장의 말씀은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아주 유명한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예수님 버전(또는 누가복음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탕자의 비유 이야기에는 세 명의 주연급 인물이 등장한다. 아버지, 큰아들, 둘째 아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흔히 말하는 탕자는 작은 아들을 가리킨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 그리고 며칠 후,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나누어준 모든 분깃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난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후려 아들 놈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통념으로,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불구하고 재산을 요구하거나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재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없는 자 취급했다는 뜻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신학적 죄의 개념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은 것이 당연한 것처럼, 창세기 말씀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 말은 우리가 단순히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은인간은 하나님의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둘째 아들을 보자, 어떻게 행동하는가? 아버지를 떠나서, 아버지와 분리되어서 마치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한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는가?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 아들은 그때부터 엄청난 시련을 겪는다. 단순히 시련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완전히 무너진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둘째 아들은 인간의 존엄성이 돼지만도 못한 존재로 추락하고 만다. 돼지는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혐오하던 동물이다. 율법에 돼지고기는 먹지 못하게 되어 있다. 율법에서 금하는 동물은 부정한 동물이요 혐오 동물이다. 그런데, 그 돼지를 치는 것으로 모자라,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는데, 그것조차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얼마나 비참한가!

 

죄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 수 없도록 창조된 존재인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하나님처럼 귀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살아가는 그 존재 자체를 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원죄라고 한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서 분리되어 살던 존재가, 다시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원죄는 우리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원죄는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죽은 자가 자기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누가 해주어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셔야 한다.

 

둘째 아들의 상황을 잠시 더 보자. 둘째 아들은 궁핍한 지경 (죄의 상태)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삶을 살아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상태에 이른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지금 이 스토리의 전체 상황을 신학적인 용어로회개(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회개는 단순히, ‘아이고 내가 잘못했소!’라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돌이켜서 완전히 방향을 틀어, 하나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초대교회의 제자들이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친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바로, ‘구원을 보았던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살던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과 다시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야말로구원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 사건은 둘째 아들이 17절에서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했을 때처럼, “!!”라고 하는 깨달음의 사건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던, 즉 죄 가운데 살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은 열어준 구원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 아버지께로 돌아온 아들의 삶을 보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것은 비유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비유란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게끔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분리되어 살고 있다는 것도 눈에 안 보이고, 깨닫는 순간도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님과의 합일된 삶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뇌과학에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순전히 뇌의 작용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뇌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정도만 보고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인지할 수 없다.

 

일례로, 개는 세상을 우리처럼 컬러플(colorful)하게 보지 못한다. 흑백으로만 세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개는 우리 인간이 듣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듣는 소리의 범위와 개가 듣는 소리의 범위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박쥐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생활한지 오래 되었으므로 눈이 퇴화되었다. , 박쥐는 장님이다. 그들은 세상을 초음파로 인식한다. 우리처럼 눈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과 초음파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쉽게 생각해 보자. 눈 먼 자가 눈 외의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과 눈이 보이는 자가 빛을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 여러분들이 경험하는 세계가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착각 중의 가장 큰 착각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인식하는 능력을영성이라고 한다. 빛이 없으면 우리 눈을 절대로 아무것도 못 본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절대적인 이유는 빛 때문이다. 그것처럼, 성령의 빛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은 어느 무식한 종교업자가 말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 구원 사건, 즉 진리의 사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진리의 빛인 것이다.

 

오늘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친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빛이 비추어, 영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가 보이게 되길 바란다.

 

* 실제 설교에서는 "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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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5. 4. 2. 04:52

불혹2

 

만인에 대한 나만의 투쟁

시끄러운 아우성

질풍노도의 늦은 시기

술고래가 되는 것으로도 부족한

이 허무의 바다에서

나는 다시 스무 살이 되는 꿈을 꾼다

가을 하늘만 공활한 것이 아니라

공활한 것으로 치자면

삼십역을 지나 오십역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 탄,

그것도 세월의 차장에게 떠밀려

삼등열차 칸에 겨우 발을 디딘

불 같은 혹을 주렁주렁 단 혹부리 아저씨

가랑이 사이만큼이랴

이것이 차라리 입영열차였으면 좋겠다는

부질 없는 생각보다 더 부질 없는 것은

이제 깎아낼 머리카락 조차 없다는 것

이다

이제 아저씨의 철로는

아저씨의 배가 나온 만큼 가팔라질 거에요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 가파름 또한 젊은 시절만큼

일장춘몽일 테니까요

혹부리 아저씨가 탄 기차가 달려간다

악소리 나는 경적을 울려대며

담배를 뻑뻑 피워 대는 듯

희뿌연 연기를 머리에 껴 얹으며

종착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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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5. 4. 1. 17:54

그것의 바깥

 

그것의 바깥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가

시간과 공간이 비틀어진 곳에 가면

상대적으로

아니 훨씬 신비롭게

시간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흐르는

그것의 바깥 공간이 있다

새벽 세 시쯤 잠에서 깨어나면

마주하게 되는 우주의 중력이 있는데

그것에 존재를 터놓는 순간

나는 꿈을 꾸듯 공간 이동을 한다

거기에 가면 언어를 잃어버리는데

온갖 의미를 언어적으로 만질 수 있고

거기에 가면 감각이 멈추는데

표현이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의 바깥,

거기에 가면 가장 좋은 것은

동심의 시계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인데

거기에 한 번 다녀오는 날이면

나는 어린 왕자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 날이면

분명

모자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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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5. 1. 30. 03:56

달팽이 똥

ㅡ 달팽이 똥을 본 적이 없는 少年에게

 

한 십 년쯤 후에나 이야기를 나누자

강산이 한 번쯤은 변해야 너의 뒤통수가 간지러울 것이다

네 내장이 한 번쯤은 뒤집어져야

파란 하늘이 사실은 노오란 색이었다는 것이 보일 것이다

한 십 년쯤 후에나

너는 바람이 훔쳐간 너의 영혼을 도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십 년쯤 후에나

시간은 123456789101112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네 내장이 뒤틀린 만큼이나

굴절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만 신신당부 하자

네 몸뚱이를

살살 꾀어내는 아지랑이에게 내어주지 말아라

한 십 년쯤 후에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식곤증처럼 나른한 것이 아니라

네 내장이 쥐어짜낸

노오란꽃을 먹은

달팽이 똥 같은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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