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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07.21 가정의 기쁨
  3. 2014.07.17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
  4. 2014.07.14 고통의 문제
  5. 2014.07.06 사사 시대의 타락과 거룩
  6. 2014.07.03 순종 - 사는 길
  7. 2014.06.29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8. 2014.06.26 장자권 쟁탈전
  9. 2014.06.25 이방인 1
  10. 2014.06.25 숙명
  11. 2014.06.15 성령의 교제
  12. 2014.06.14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하며 1
  13. 2014.06.12 주권과 기도
  14. 2014.06.08 존재의 변화
  15. 2014.06.05 위로와 화해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27. 22:49

오래된 기도

(마태복음 6:5-13)

 

본문에는 예수의 산상수훈 중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나와 있다. 예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 중 눈에 띄는 단어는 은밀함이다. 기도는 은밀해야 하는가? 기도를 은밀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께서는 은밀한 기도와 대조되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에 대해서 말한다.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의 특징은 사람에게 보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를 경계하시며, 은밀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6).

 

기도할 수 있는 골방을 만들어 기도할 때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면 은밀한 기도가 되는가? 도대체 은밀한 기도란 무엇인가?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더불어 예수께서 경계하시는 기도는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이다. 중언부언의 특징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다. 미사여구를 잔뜩 집어 넣어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나 이방인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알맹이는 없고 형식과 자기 자랑만 있는 기도를 경계하시며 은밀한 기도 할 것을 주문하신다.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견주어 볼 때 은밀한 기도란 핵심을 찌르는, 그리고 친밀한, 그리고 집중된 기도를 말한다. 형식에 치우친 기도가 아니고 외적인 모습에 치우친 기도가 아니고, 아빠되시는 하나님과 참된 사귐 안에서 하는 기도를 말한다. 그러니까 기도는 근본적으로 관계성이 근본이라는 뜻이다. 아빠되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없는 기도를 경계하시는 것이다. ‘은밀한이란 바로 그러한 것을 담고 있는 메타포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기도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의 기도가 된다. 당연하지 아니한가? 하나님에게 관심 없는 자들의 기도는 형식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 이기적인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다. 아버지와 전혀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은 자녀가 자기의 필요에 따라 아버지에게 용돈을 요구하는 것을 상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자녀는 아버지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아버지가 자기의 필요만 채워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기도를 경계하시며, 은밀한 기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는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본보기를 보여주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배 시간마다 외우는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은 어떠한 주문이 아니다. 주기도문을 주문처럼 외우는 사람도 있다. 물론 절박한 상황에서 어떠한 기도를 드려야 할지 모를 때, 그리고 전혀 말이 나오지 않을 때 주기도문을 통해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주기도문 자체에 무슨 특별한 효능이 있는 듯 주문 외우듯이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주기도문의 특징은 먼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해 놓고 계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진정한 관심을 둔 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맺어진 자는 하나님의 이 뜻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위해서 헌신한다.

 

기도를 가르치시는 예수의 삶 자체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삶이었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오게 하시는 일에 헌신하셨다. 그 일을 하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오게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이 하나님 나라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 왕국을 세우고 싶어한다. 이것은 세상뿐만이 아니라, 각자의 삶 속에서도 꿈틀대는 현상이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 왕국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자들은 자기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헌신할 줄 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소박함을 지닌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11-13).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와 용서에 대한 실천, 그리고 악에 대한 경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소박한 마음이다.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탐욕이다. 탐욕적인 인간은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축적하고자 한다. 탐욕은 필경 죄악을 낳는다. 죄악 중에서도 가장 추악한 살인을 낳는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생명을 앗아가는 일만큼 추악한 것은 없다. 살인, 강간, 강도, 유괴, 납치 등 강력 범죄로 분류되는 것들은 모두 남의 것을 탐하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이다. 불의를 눈감아주는 용서가 아니라, 불의를 용서하는 방식으로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불의에 대한 눈감아 줌이 아니다. 용서는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주는 행위이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발견하고 다시는 불의한 행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이끌어주는 사랑의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행위 중 가장 지혜로운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지혜를 십자가에서 본다.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결국 하나님의 참된 지혜이다. 십자가는 용서인데, 십자가를 온전히 바라보는 자들은 거기에서 무한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다시는 자기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탐욕스러운 마음을 드러내거나 생명을 헤치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지혜인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인간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겸손함이 베어 있다. 우리는 시험에 든다. 여기에서의 시험은 유혹을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받았던 유혹 같은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사탄에게 광야에서 받았던 유혹 같은 것을 말한다. 그 유혹은 하나님 나라를 버리고 자기 왕국을 세우라는 매우 매력적인 유혹이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유혹에 넘어간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하나님 나라를 등진다.

 

그리고 우리는 에 대해서 무력하다.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생명을 제한하고 결국 빼앗아가는 악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상에는 모레알처럼 널려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질병과 죽음이다.

 

최근 한국의 연예인 유채영 씨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가온 질병, 그리고 죽음을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유채영 씨는 결국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온 질병, 죽음 앞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해 줄 수 없어서 속만 태우던 가족과 친구들은 허망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냈다. 다음은 사랑하는 딸을 보내고 사랑하는 딸에게 쓴 유채영 씨의 엄마의 편지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 채영아 사랑해. 이 현실이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어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마지막 순간까지 병마에 시달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곁 떠나기 싫어하던 모습 생각하면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다. 너랑 같이 떠나고픈 마음이다. 아빠 없이 너와 함께했는데 나 혼자 남았구나. 정해진 운명의 날이 있는 줄 알았다면 더 많은 시간과 사랑과 행복을 나눴을 텐데 너무 안타깝다. 먼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면 그 때는 우리 행복하게 잘 살자. 엄마가.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유혹과 악으로부터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의 인생은 나의 계획과는 상관 없이, 어느 때든지 유혹과 악을 통해서 내가 꿈꾸던 삶과는 다른 곳으로 어리석고 비참하게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유혹과 악에 너무도 무력한 인간이지만,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자녀는 유혹과 악으로 인해 멸망 받지 않고, ‘유혹과 악으로부터 구원 받는다.

 

세상이 너무 시끄럽다. 혼란스럽다. 도무지 하나님 나라를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계속되는 비행기 사고로 인해 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군사적 신경전, 또한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건 등을 생각하면 가슴이 탁 막힐 지경이다. 이 땅에 참된 평화가 어디 있고, 정의가 도대체 있기는 한 것일까 의문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간구하고, 그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헌신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일상에 매몰되어서 현재 인간의 평화와 생명을 위협하는 일련의 일들을 남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기도는 일상에 묻히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구원하는 것이다. 기도는 나의 경건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주변 세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기도는 뭔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기도 자체가 일상이 되어야 한다. 다음 기도문은 기도가 어떻게 우리의 일상에 파고 들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_이문재, 「오래된 기도」 전문, 『지금 여기가 맨 앞』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에 매몰되어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 일상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기를 바라며 그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도록 부름 받았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하여 일상이 하나님 나라로 승화되도록 은밀한 기도, 친밀한 기도, 소박한 기도, 경건의 모양만 있는 기도가 아니라 삶을 실제로 바꾸는 능력의 기도, 오래된 기도를 쉬지 않고 해야 한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http://www.youtube.com/watch?v=mdZ6yMN109M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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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21. 12:58

가정의 기쁨

(삼상 1:19-28)

 

매년제를 올리러 실로의 성전에 갔을 때 한나는 엘리 제사장이 술 취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로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자식이 없는 것 때문에 마음이 몹시도 아팠던 한나의 사정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축복을 빌어 준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17).

 

간절한 기도 끝에 제사장으로부터 축복의 선언을 들은 한나는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그 일 때문에 더 이상 마음 쓰지 않기로 한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 1:18).

 

간절한 기도에는 응답이 꼭 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얻게 되는 것은 마음의 평안이다. 옛날에는 성전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교통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성전에 자주 갈 수 없었다. 엘가나와 한나 가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제를 빠짐 없이 드렸다. 교통 수단이 발달해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로 성전에 와서 예배 드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는 대목이다.

 

예배가 너무 많다 보니 예배가 습관적인 타성으로 전락해 버린 이유도 있겠지만, 그런 중에서도 나의 예배가 습관적인 타성에 젖은 예배인지 아니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 하나는 바로 마음의 간절함이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소원을 하나씩 마음에 품고 예배 드리러 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행위이지만, 예배의 행위는 매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어떠한 선물(은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매년제를 드린 다음 날, 성전을 떠나면서 엘가나와 한나 가정은 또 한 번의 예배를 드리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거룩한 합방을 갖는다. 무엇을 하든지 예배(Ritural)’ 의식을 먼저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떠한 행위든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내가 지금 행하려고 하는 일이 거룩함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일례로, 예배 드린 후에 바람 피울 수 있는가? 예배 드린 후에 도둑질을 할 수 있는가? 예배 드린 후에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가? 예배 드린 후에 늙은 부모를 학대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거룩하지 못한 일을 행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든다.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놓아두고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거룩하다는 증거가 된다. 반면에 어떠한 일을 놓아두고 예배 드리는 것을 피하게 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면 그 일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

 

요즘 시대는 특별히 성(sex)이 구원 받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가정을 허락하신 이유 중 하나가 성(sex) 때문인데, 이것이 타락하다 보니까 가정이 깨지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성 때문이다. 잠언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언 5:18). 엘가나와 한나는 아이를 생산하는데 있어서 을 거룩하게 승화시킨 좋은 예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 드린 후에 아이를 생산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태어난 아기와 가정의 거룩함이 드러난다.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 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19-20).

 

이렇게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행한 일은 기쁨을 낳는다. 사무엘의 탄생을 통해 엘가나와 한나의 가정은 기쁨이 넘쳤다. 그리고 단순히 그 기쁨은 그들의 가정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암울했던 사사시대에도 큰 기쁨이 되었다. 사무엘의 탄생은 길고 긴 터널을 지나던 사사시대에 빛을 던져주는 사건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정의 기쁨은 그냥 가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가정의 울타리를 타고 흘러 넘쳐 더 큰 기쁨을 생산해 낸다. 요즘 세상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가족의 기쁨을 위해서 구축되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을 희생시키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너무도 오랫동안 사회는 가족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렇다 보니, 가족은 더 이상 혼자만의 힘으로 기쁨과 행복을 만들어 내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족이 해체되는 일이 너무도 많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가슴 아픈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전쟁 때문에 엄마를 잃은 이라크의 한 여자 아이가 고아원에서 지내면서 엄마가 너무 그리워서 땅 바닥에 엄마 그림을 그려 놓고 그 그림 위에서 곤히 잠든 모습이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가정의 행복을 무참히 짓밟는 폭력은 이 땅에 하루 빨리 추방되어야 다.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큰 사회적 문제는 우리가 때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가정에서 가정의 기쁨을 위하여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놓고 한숨만 쉬고 있기 보다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

 

엘가나와 한나의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가정의 기쁨을 한 번 살펴 보자.

 

첫째, 예배이다. 엘가나와 한나 가정은 매년 모든 가정이 실로에 있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이 가정이 매년성전에서 예배 드렸다는 것은 성실하게 예배 드렸다는 뜻이다. 온 가정(household)이 함께 예배 드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가정 신앙의 트랜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아빠가 가는 교회가 따로 있고, 엄마가 가는 교회가 따로 있고, 특별히 자녀들이 가는 교회가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더 심한 경우는 아빠의 종교가 다르고, 엄마의 종교가 다르고, 자녀의 종교가 다른 경우도 있다. 가정 구성원 각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준다는 의미에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예배는 온 가정이 함께 한 교회에서 드리는 것이 좋다.

 

또한 공적인 예배에 온 가정이 함께 나와 예배 드리는 것 외에도 각 가정에서 자신들만의 특별한 예배(ritual)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요즘 영성신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각자의 의식(rituals)’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물론 일상이 ritual에 매몰될 정도로 그럴 필요는 없지만, 일상이 너무 아무런 의미 없는, 그야말로 일상으로 매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간단한 ritual들은 우리 일상에 필요하다. 우리는 일상에 너무 매몰되어 있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것인지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일상이 그냥 지루하고 권태로운 것이 아니라 온통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경이로운 것이라는 깨닫기 위해 ritual은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가족 구성원의 생일에 예배를 드린다든지, 가족 여행을 갈 때 짧게 나마 기도를 드린다든지, 자기 전에 부모가 아이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준다든지 하는 것이다. 잠깐의 의식 행위를 통해서 먹는 것에서부터 자는 것까지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 그냥 의미 없는 일상으로 매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가정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금요일 가정에서 성찬식을 행한다. 촛불을 켜놓고 모여 앉아 성찬식을 조촐하게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우리 가정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유에 대해서 간단하게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각자 돌아가면서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나 소원 또는 기도제목을 내놓고, 손을 붙잡고 기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 가운데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감사한다.

 

예배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 예배는 귀찮은 것이 아니라, 공식적(official)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요, 하나님의 이름의 높여지는 시간이요, 하나님께 무한한 은총을 받는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없이 피조물인 인간이 평안을 누릴 수는 없다. 가정의 기쁨의 초석은 예배 위에 놓여져야 한다. 가정에서 예배가 귀하게 여김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가정에 기쁨과 평안을 선물(은총)로 주실 것이다.

 

둘째, 사랑이다. 사랑은 존중이라는 형태를 띨 때 그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난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하여 사무엘을 얻었다. 매년 실로의 성전으로 예배를 드리러 간 엘가나의 가정은 사무엘의 탄생 이후에도 어김 없이 그렇게 했다. 그런데, 한나는 엘가나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22). 이러한 한나의 요청에 엘가나는 동의하고 한나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23).

 

그냥 보면 이것이 무슨 존중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수기에 보면 남편은 아내의 서원에 대해 무효를 선언할 수 있는 법이 있다. “부녀가 혹시 그의 남편의 집에서 서원을 하였다든지 결심하고 서약을 하였다 하자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고 금하지 않으면 그 서원은 다 이행할 것이요 그가 결심한 서약은 다 지킬 것이라 그러나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무효하게 되면 그 서원과 결심한 일에 대하여 입술로 말한 것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나니 그의 남편이 그것을 무효하게 하였은즉 여호와께서 그 부녀를 사하시느니라”(30:10-12).

 

엘가나는 이 율법에 근거하여,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한 서원에 대하여 충분히 무효를 선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년 모든 가족이 함께 가는 실로의 제사에 동참하지 않으려고 하는 한나를 꾸짖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엘가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나의 의견을 존중해서 한나의 뜻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기로 한 서원이 거룩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랬다. 그리고 엘가나는 한나와 함께 사무엘이 젖 떼기까지 정성으로 양육했다.

 

사실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 간의 존중이 으뜸 가치로 드러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정의 기쁨은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 즉 존중의 가치가 드러나는 사랑이 흘러 넘칠 때 온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에 너무도 쉽게 상대방을 존중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오히려 가족 아닌 사람은 존중하면서 가족 구성원은 무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서 가장 존중 받아야 할 사람은 가족이다. 자신의 가족 구성원을 존중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려 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가족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존중할 줄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가정에서도 가족을 존중할 줄 모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셋째, 감사이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약속을 이행한다. 하나님께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치겠다는 서원뿐만이 아니라, 남편 엘가나에게 아이가 젖 떼면 자신이 직접 실로의 성전에 가서 사무엘을 바치겠다는 약속까지도 이행한다. 이것이 참 쉽지 않다. 흔히 시쳇말로 사람은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화장실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잠깐 살펴본 대로 율법이 서원을 철회하는 데 악용해서 쓰일 수 있다. 엘가나와 한나가 짜고 서원을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나에게는 감사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다 보니, 서원한 대로 이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엘가나와 한나는 젖 뗀 사무엘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러 성전에 나아가면서 다음과 같이 서원제 예물을 준비해서 간다.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24). 이것만 보면 이것이 무슨 감사인가 할 것이다. 그러나 민수기에 보면 서원제를 드릴 때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이렇게 나와 있다. “번제로나 서원을 갚는 제사로나 화목제로 수송아지를 예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소제로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반 힌을 섞어 그 수송아지와 함께 드리고 전제로 포도주 반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화제를 삼을지니라”(15:8-10).

 

이것과 비교해 볼 때 한나는 율법에 나와 있는 것보다 세 배나 더 많은 예물을 준비해 가지고 가서 하나님께 바친다. 이렇게 가정의 기쁨은 감사로 표현된다. 감사가 넘칠 때 가정은 기쁨 충만한 행복한 가정이 된다.

 

예배와 사랑(존중), 감사는 기쁨이 넘치는 가정의 지표이다. 가정의 기쁨, 그 출발이 예배에서 시작하는 것에 마음을 두라. 예배하는 가정은 서로 존중하게 되고, 서로 존중 받을 때 감사가 넘치게 된다. 그리고 가정의 기쁨은 가정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담장을 타고 넘어 사회와 나라의 기쁨으로 번져나간다.

 

사철에 봄 바람 불어 잇고 (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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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17. 02:16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

창세기 29

(창세기 26:12-33)

 

우리는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을 잘 모른다. 오히려 싸워서 이기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손자병법에서도 가장 좋은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매우 이상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다투지 않고번성하는 법은 어울리지 않는 말 같다. 우리는 다투지 않고서 번성하는 법을 잘 모를뿐더러, 세상은 그런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성경을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법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것은 싸우는 길이 아니라, 평화롭게 사는 길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이야기에서 본다. 이삭은 어떻게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삶을 살았을까?

 

요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전능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이 가득하다. 돈을 많이 벌어 값비싼 자동차나 개인 비행기 또는 보트를 사는 것이 부의 상징이다.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것을 가지면 인생이 풍요로울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그렇다면 이삭의 시대에는 무엇이 가장 중요했을까?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과 물이었다. 사실 지금도 인간에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만 현대인들은 발달된 농업과 관계 시설 때문에 식량과 물의 중요성을 망각했을 뿐이다. 망각했다고 해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거의 망각 속에 있다.

 

이삭은 기근이라는 현실에 맞서 생존 투쟁을 했다. 그 결과 애굽으로 피난 가는 길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 그랄 땅에 거주하게 된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 땅에 거주했다는 것은 기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삭은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얻는다. 이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삭 사이에 맺어진 계약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약속하시기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라고 하셨다(26:3).

 

이삭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지 보자.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13, 14). 그런데 이것이 그만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를 산다. 예나 지금이나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일은 드물다. ‘시기는 참 무서운 감정의 상태이다. 시기란 다른 사람의 외모나 소유, 재능 등을 시샘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을 말한다. 시가란 단순히 부러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미움이 싹트는 마음이다. 미움이 싹트면 거기에는 어김 없이 폭력이 발생한다.

 

생명을 직접적으로 해치거나, 생명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어떤 것을 해치는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 생명과 직결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과 물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에 대하여 시기하는 마음이 들어 폭력을 휘두르는데, 이삭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앗아가지는 않지만, 생명과 직결된 물을 빼앗아 가는 것을 통해 이삭에게 폭력을 가한다.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14, 15).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우물을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고, 농사지을 땅까지 빼앗는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16). 이 정도까지 나왔으면, 이삭이 생존을 위해 블레셋과 전쟁을 벌일 만도 하다. 그런데 이삭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잘 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받은 감사를 기억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믿음의 조상으로서 이삭이 위대한 이유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 일이 잘 풀릴 때 이 약속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 약속은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믿음 있음과 믿음 없음, 참된 감사와 거짓 감사는 잘 됐을 때 상대방에게서 받는 시기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통해서 구별할 수 있다. 믿음과 감사에는 다툼이 없다. 믿음과 감사에는 그저 나눔과 양보만 있을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잘 된 것이 하나님께 받은 복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나누지 못하고 양보하지 못하고 다툼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믿음도 감사도 아니다.

 

이삭은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맺은 땅이나, 아버지 때부터 사용해 오던 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블레셋과 다투지 않는다. 이삭에게 중요한 것은 백 배의 결실을 맺은 땅이나 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삭은 진실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나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고 사는 믿음의 사람에게 다른 것은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 다투지 않는다.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이사 한 뒤, 거기에서 예전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또 팠다. 그러나 이번에도 블레셋 사람들의 횡포가 있었다. 그래서 이삭은 다른 곳에 우물을 팠다. 그런데 그랄 목자들과 이삭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을 일컬어 에섹(억압하다, 강탈하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툼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곳에 우물을 또 팠다. 그런데 또 다툼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을 일컬어 싯나(대적)라고 불렀다.

 

우물로 인해 계속되는 다툼을 피하기 위하여 이삭은 삶의 터전을 계속해서 옮겼다. 그가 마지막으로 판 우물은 르호봇(넓은 곳)인데, 이 우물을 팠을 때 드디어 다툼이 없었다. 더 이상의 다툼이 없는 우물을 판 후, 이삭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22).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맺은 브엘세바의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판 우물들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하며 블레셋 사람들과 다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투지 않고 나누고 양보함으로 다툼이 벌어지지 않을 때까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싸워서 이기는 것만 배운 현대인들이 보기에 답답할 수 있으니, 오히려 이것은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을 잘 모르는 현대인들이 배워야 하는 삶의 다른 길이다.

 

이삭이 걸어간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의 길이 옳았다는 것은 이삭 스스로 증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툼을 일으킨 상대인 블레셋 사람들이다. 이삭은 그랄 땅에서 브엘세바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거기에서도 우물을 판다. 고대 사회에서 우물을 판다는 것은 요즘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고, 우물을 팔 때마다 성공적이었다.

 

다투지 않고 계속해서 나누고 양보하면서도 번성한 이삭에게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찾아 왔다. “아비멜렉과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브터 이삭에게로 온지라”(26). 자신을 찾아온 블레셋 사람들을 보고 이삭은 또 시비를 걸러 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삭은 그들에게 거칠게 묻는다.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27).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의 반응이 의외였다. 시비를 걸러 온 것이 아니라, 이삭과 평화 협정을 맺으러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삭과 평화 협정을 맺기로 작정한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그러면서 이삭에게 자신들을 해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블레셋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이삭이 자신들보다 강성하게 된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삭에게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기 원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블레셋은 참 약은 족속이다. 이삭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계속 훼방을 놓더니, 자신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으니까 이제 와서 평화 조약을 맺어 위협적인 존재를 쫓아버리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블레셋의 약은 꼼수를 몰랐을 리 없었지만 이삭은 그들을 쫓아버리는 대신 오히려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준다. 그리고 그들의 제안대로 평화 조약을 맺고 그들을 평안 가운데 보내준다.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낯선 광경이다. 교회 다니면서 수도 없이 믿음과 감사, 나눔과 양보의 삶을 들었음에도 실제 삶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은 드물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다투지 않고 번성했던 이삭의 삶은 단순히 구약 시대의 가치로 생각하면 안 된다.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다른 삶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을 이 세상과 싸워 이기는 법으로 잘못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과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가르쳐주는 다퉈서 번성하는 법과는 다른 삶을 사시다가 이 세상에 의해 죽임 당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옳았다는 것을 부활을 통해 확인해 주셨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삭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삶을 살겠다는 태도의 전환이다. 물론 이렇게 살겠다는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손해 보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은 나누고 양보하는 것을 미덕이라 보지 않고, 바보스런 짓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나만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 십자가의 길을 좁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믿음과 감사에는 다툼이 없다. 무엇이든 거기에서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 하나님 나라의 삶이 들어서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삶의 방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자,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길을 걸으면서 받은 복 때문에 진실되게 감사하는 자, 그런 자는 결코 다툼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저 나누고 양보할 뿐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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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14. 11:23

고통의 문제

(삼상 1:1-18)

 

어두운 사사시대가 가고 있다. 사무엘이 탄생한 시기는 사사시대의 마지막 시기였다. 사사기를 통해 본 이스라엘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룻기를 통해 본 이스라엘은 희망이 싹텄다. 문제는 어둠을 볼 것인가, 희망을 볼 것인가이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어둠을 보고, 어떤 사람은 희망을 본다.

 

희망은 어떻게 오는가? 사사시대를 지나면서 누군가는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 빛의 세계가 나올 거라는 희망을 갖고 끊임 없이 기도했을 것이다. 희망은 기도와 함께 온다. 기도에 어떤 효력이 있다기 보다, 기도를 통해 희망의 하나님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어두움을 물리치고 희망의 빛을 주시는 분이다.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오늘 이야기는 그 희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준다. 사무엘의 아버지는 엘가나이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 가운데 살던 레위 지파 그핫 계열의 후손이었다(대상 6:22). 그에게는 부인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한나고 다른 하나는 브닌나였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했고, 브닌나는 자식 없는 한나를 조롱했다. 다시 말해, 불임의 문제와 그로 인한 삶의 고통이 자리잡고 있다. 희망은 그냥 오지 않는다. 이러한 고통-어둠을 뚫고 온다.

 

사무엘은 그냥 태어난 인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태어난 인물이다. 그가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빛을 가져다 줄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오늘 한나에게 닥친 시련을 통해서 고통의 문제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고통의 문제에 집중한다는 것은 곧 삶의 문제에 집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살아 숨쉬는 것은 모두 신음한다. 몸부림치지 않으면 살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는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의 삶이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다음의 세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마음이 슬프냐”(8),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10),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15). 이처럼 한나의 마음이 마치 전쟁터와 같이 되어서 혹독하고 잔인하게 시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나의 삶이 그렇게 고통 가운데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남편 엘가나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5, 6). 엘가나가 한나에게 얼마나 잘 했는지는 다음 구절이 보여준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8).

 

겉으로 보기에 한나는 오히려 기쁨에 겨운 것처럼 보인다. 남편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살만하다. 그런데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한나의 삶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나 고통은 다른 곳에서 온다. 삶의 문제는 깊은 곳,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다. 정작 나를 괴롭히는 고통의 문제는 누군가와 나누기도 쉽지 않다. 나누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삶의 깊은 고통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없고, 보여준다고 한들 그것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의 경우를 보자. 그의 고통은 자식 없음에서 왔다. 그런데 그러한 고통을 누군가와 나눈다고 한들, 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롱거리가 된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나는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왔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10).

 

굉장히 뻔한 말 같지만, 정작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지 않는다. 고통의 문제를 마음에 품고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학대하거나, 또는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것을 통해서 고통의 문제를 잊어보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고통의 문제로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결국 우울증을 거쳐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고통의 문제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사회적 고립 상태로 들어선다.

 

한나는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왔다.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구원)해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서원 기도까지 한다.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

 

성경은 한나의 기도 내용을 이렇게 짧게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한나의 기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12). 사실 기도 시간은 내면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간절한 마음을 지니고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의 기도는 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 그 간절함 때문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시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이다.

 

실로의 성전에서 드려진 한나의 기도는 그곳을 지키고 있던 엘리 제사장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엘리가 보기에 한나는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는 한나가 취해서 취기에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해했다. 엘리는 한나를 이렇게 꾸짖는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14). 엘리의 꾸짖음에 한나는 이렇게 항변한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15).

 

여기서 한나가 엘리를 내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내 심정을 통한 것이라고 말할 때, ‘통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샤파크인데, 이는 쏟다’, 엎지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내 심정을 통한 것이라는 말은 내 심정을 쏟아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해 준다.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께 나아와 쏟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고통의 문제에 짓눌려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이 일에 너무도 서투르다. 내 안에 해결되지 않는 고통의 문제를 안고 살다 보니,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인데도, 거기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렇다 보니, 인생에 평안이 없다. 내 안에 평안도 없고, 대인관계에서도 평안이 없다.

 

사람의 삶의 문제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에 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남의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를 지닌 자는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 쏟아내야 한다. 그래야 평안을 얻을 수 있다.

 

한나가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 진실되게 쏟아놓은 것을 안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평안을 빌어준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7). 이에 대해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도달한 것을 확신한 한나는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19). 그리고 한나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다.

 

삶의 희망은 이렇게 고통-어둠을 뚫고 지나갈 때 온다. 왜 인생은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도대체 왜 인생은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고통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 신비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고통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나침반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같은 문제를 놓고 상반되게 반응할 수 있다. 어떤 이는 고통을 통해 어둠을 보고, 어떤 이는 고통을 통해 희망을 본다.

 

십자가의 어둠에서 부활의 희망을 보는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십자가의 어둠 앞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고통의 어둠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와 고통을 쏟아 놓는것이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예수 믿고 죽은 후에 천당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나를 괴롭히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은 미래적이 아니라, 현재적이다. 언제까지 고통을 쏟아놓지 못해 자신을 괴롭히고, 남을 못살게 굴면서 살아갈 것인가? 언제까지 평안 없이 살 것인가? 바로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고통스러운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오라. 그리고 쏟아 놓으라. 그리고 이 음성을 들으라. “평안히 가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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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6. 22:19

사사 시대의 타락과 거룩

(19:22-26, 4:7-12)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은 이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이것은 마지막에만 나오는 구절이 아니라, 사사기 전반에 걸쳐 나오는 사사 시대에 대한 평가이다. 같은 구절이 176절에도 등장하고, 이야기의 말머리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라는 요약된 말로 자주 등장한다.

 

왕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고,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사기와 룻기는 같은 시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두 곳에서 읽은 이야기는 사뭇 너무도 다르다. 같은 시대에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 한쪽은 말 그대로 타락을 보여주고, 다른 한쪽은 말 그대로 거룩을 보여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은 일종의 메타포로 봐야 한다. 물론 이스라엘에 물리적인 왕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정말로 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왕정국가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왕이 존재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국가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라는 진술은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시내산 계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쉽게 말해, 시내산 계약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사사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왕이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제 1~3계명을 어긴 것이나 다름 없다. 십계명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하나님만이 그들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상황을 다른 말로 우상숭배라고 부를 수 있다. 우상숭배란 무슨 거창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

 

왕이신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한 눈 팔 때 생기는 현상이 바로 타락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처음 인간에게서도 나타난 현상이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처음 인간이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아 생긴 인간의 타락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니, 그들의 눈에는 다른 것이 들어왔다. 즉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있어 타락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은 그 행위에 있지 않다. 문제는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시야에서,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오직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었다.

 

타락의 내용은 3무 현상으로 나타난다. 무감각, 무절제, 무질서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무감각이다. 무감각이 무절제와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 타락의 내용인 무감각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사사기의 이야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사사기 본문은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레위인과 그의 일행이 집으로 돌아가던 중 하룻밤 유숙하게 된 베냐민 땅의 기브아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타락에 대한 기사이다. 레위인 일행은 하룻밤 유숙하기 위해 기브아 마을로 갔지만, 거기서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한 노인이 그들을 집으로 맞이했는데, 그는 그곳 기브아 출신이 아니라, 레위인과 마찬가지로 에브라임 출신이었다. 노인 집에서 유숙하며 한창 즐겁게 쉬고 있을 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나타나 이들을 괴롭힌다.

 

우선 불량배들의 무감각을 보자. 이들은 노인의 집에 나타나 노인의 집에 유숙하고 있는 사람을 내어 놓으라고 한다. 그들과 관계하겠다고 한다. 여기서 관계란 성관계를 의미한다. 그들의 무감각을 보라. 그들의 눈에는 노인의 집에 유숙한 사람들이 극진히 대접해야 할 손님으로 보이지 않았다. ‘손대접하기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윤리였다. 손님이 손님으로 보이지 않고, ‘관계의 대상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들의 감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준다. 전혀 상대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무감각의 현상이 불량배들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불량배들의 횡포에 노인과 레위인은 맞서지 않고, 그들의 횡포를 잠재울 방안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주는 것이었다. 레위인의 첩과 관련된 이야기는 19장 전반에 걸쳐서 나온다. 그런데 레위인의 첩은 이야기에서 이름도 없고, 말도 없고, 힘도 없는 약자로 그려진다. 상대적으로 강자인 노인과 레위인의 눈에 약자인 레위인의 첩이 인식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첩을 불량배들에게 내어준다.

 

불량배들이나 노인이나 레위인은 상대적으로 강자들이다. 그들이 약자인 레위인의 첩을 철저하게 유린한다. 약자인 레위인의 첩은 사로잡히고, 배반당하고, 능욕당하고, 고문당하고, 끝내 살해당하고, 몸이 찢기고, 몸이 흩어진다. 그야말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들에게 비극과 죽음의 시대인 것이다.

 

이처럼 타락이란 단순히 흔히 말하는 죄가 판을 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타락이란 결국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들에게 비극과 죽음이 임하는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악을 말한다. 구조적으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비극과 죽음을 안겨주는 사회, 개인적으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비극과 죽음을 안겨 주는 삶, 이것이 바로 타락이다.

 

이와는 매우 대조적인 이야기가 룻기에 나온다. 같은 시대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이야기가 날 올 수 있을까, 매우 놀랍다. 룻기의 본문은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보아스가 아내로 맞이하는 룻은 레위인의 첩처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였다. 룻은 모압여인이었고(이방인), 남편을 잃어 오갈 데 없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그를 보호해줄 가족이라는 울타리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남편뿐만 아니라 시아버지 그리고 시아주버니까지도 모두 세상을 떠나, 홀로된 시어머니와 생계를 꾸려갔다. 룻은 그야말로 약자 중의 약자였다.

 

그런데 룻기의 이야기는 사사기의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 룻이 보아스라는 경건한 이스라엘의 한 남자의 눈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름 없는 자, 약한 자가 이름 있는 자로 바뀌는 지를 말해 준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진술이 거짓 진술인 것처럼, 보아스는 늘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살았는지, 그가 처음 자기의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 하는 인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일꾼들에게 먼저 복을 빌어 준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기시를 원하노라”(2:4). 사사기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기브아의 노인이나 레위인, 그리고 불량배들은 처음 만남에서 여호와의 복을 비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의 필요, 관심사만 늘어 놓았다. 특별히 기브아의 불량배들은 복을 비는 말과는 전혀 반대인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인가! 이와 대조되는 보아스의 축복은 이 얼마나 경건한 모습인가!

 

하나님에 대한 보아스의 집중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고엘법)’의 율법에 따라 룻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데, 그 과정을 살펴 보면 절대로 질서를 어기거나 인내심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라고 함부로 룻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3:6-15).

 

기업 무를 자, 고엘법은 룻처럼 약자를 보호하는 법인데, 궁핍한 때에 밭을 되사는 것이나 가난할 때 자신을 판 이스라엘인 노예를 자유롭게 하는 법이다. 이런 매입과 무르는 일은 가까운 친척의 의무였다(25:25-54). 룻과 나오미는 궁핍하여 죽은 시아버지의 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땅을 누군가가 사줘야 하는데, 그 땅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땅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 땅으로 먹고 살던 룻과 나오미까지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척이긴 했지만, 고엘법을 준수해야 할 첫 번째 의무자는 아니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존재했다. 고엘법을 준수해야 할 입장에서 보아스가 마음대로 고엘법을 실행할 입장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아스는 동분서주한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무질서하게 행동하지 않고 고엘법을 시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가까운 친척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벌인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이 고엘법 시행 의무를 포기한 후, 자기에게 차례가 돌아왔을 때 합법적으로 고엘법을 시행한다. 엘리멜렉의 땅을 샀을 뿐더러, 그 땅을 통해 먹고 살던 룻과 나오미까지 거둔다.

 

거룩이란 이처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행복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타락이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비극과 죽음을 가져다 주는 것인 것과는 매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사는 것인데, 그것은 실제의 삶에서 거룩한 삶을 일구는 것을 말한다. 거룩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거룩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인데,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가 있다. 거룩이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처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다. 그들을 착취하고 유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빵을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행복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사사 시대에 걸쳐 있는 타락은 그들의 부도덕함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시선을 따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가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위와 쾌락만을 위해 오히려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희생시키는 일만 했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피조물로 인식하지 못하는 타락한 마음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착취하고 유린하게 되어 있다. 상대방을 자신의 화풀이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둔 경건한 자는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피조물을 아름답게 여겨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상대방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줄 안다. 그야말로 거룩한 삶을 가꾸어 간다.

 

누가 여러분의 왕인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왕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한 삶을 사시라. 거룩이란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있다. 그러니,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 오히려 그들을 복되게 하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괴롭히는 타락한 자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복되게 하는 거룩한 자로 살 것인가? 도대체 누가 여러분의 왕인가?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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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3. 04:32

순종 - 사는 길

창세기 28

(창세기 26:1-11)

 

아브라함의 시대는 가고, 이삭의 시대가 왔다. 아버지가 죽고 자기 자신만 남았다는 것은 이제 자기 자신이 삶의 어려운 결정들을 홀로 감당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우리 삶에는 어려운 일들이 참 많다. 감당해야 할 어려운 일들도 많지만, 선택해야 할 어려운 일들도 많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는 올바른 선택이다. 어떤 선택이 내 삶을 온전하게 이끌 것인가?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고 나서, 이삭에게 어려운 문제가 닥쳤다. 아버지 때처럼 기근이 닥친 것이다. 이 기근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삭에게는 굉장히 큰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처럼 하고 싶은 심리가 있다. 왜냐하면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보고 들은 것이 아들에게는 일종의 전설로 새겨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행동과 말은 아들에게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한다.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은 아버지의 삶의 여정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그 옛날 기근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겪은 일과 거기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은혜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겪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삶의 지혜를 하나씩 전수해 주었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그러한 가르침을 마음 속에 간직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삭은 아버지 때처럼 기근이라는 어려움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이삭이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당연히 아버지의 가르침을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기근이 왔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었다. 이삭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자신도 가족들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래서 여장을 꾸려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랄이라는 지역에 이르렀다. 거기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을 만났다.

 

그런데 성경은 그랄 땅에서 이삭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명령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2).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약속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이 땅에 거류하면”, 즉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거주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순종은 참 신비스러운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가 일러준 삶의 지혜에 순종했다. 그래서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삭은 참된 지혜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순종의 가치를 잘 모른다. 순종은 불편하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명령하시는 것이라면 모를까, 부모든 스승이든 지도자든 사람들이 하는 말에 순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많다.

 

물론 때로 순종이 부조리해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순종의 가치는 그 순종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그 마음 자체에 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신다.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했다. “기근이 나면 애굽으로 내려가라!” 하나님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한 이삭의 마음을 보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나아갈 바가 무엇인지 온전히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지시하신 사항은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랄 땅에 머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그 이유는 아내 리브가 때문이었다. 그랄 사람들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리브가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이삭은 고민됐다.

 

그런데 이삭의 고민은 아버지의 해결 방법과 똑 같은 것이었다. 그 옛날 아버지 아브라함도 기근 때문에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아내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인 일이 있었다. 물론 이삭은 아버지로부터 기근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사건도 들었을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처럼 자기의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아버지 아브라함의 처신이 생각났던 것이다.

 

이삭이 그렇게 한 이유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가벼운 두려움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낀 두려움이었다. 치안과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추어진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무엇인지 마음에 잘 와 닿지 않겠지만, 실제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인간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 경우에 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는 생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드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방어체계이다.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것은 이성적인 생각이나 행동은 아니다. 그런데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는 우선 살고 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무엇이든지 생명을 건질만한 변명을 에둘러대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일러준 삶의 지혜가 크게 작동한다. 그 결과, 이삭은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 속이고,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이라 속인 것 때문에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리브가를 누군가에게 실제로 빼앗길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한 위험 속에서 이삭은 리브가와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우연히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그것을 목격한다.

 

순종의 힘은 여기서 발휘된다. 일이 상식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흘러간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을 알게 된 아비멜렉의 상식적인 행동은 누이라고 속인 이삭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처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이 상식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일로 인해 이삭은 오히려 두려움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삭과 리브가의 사이가 부부 사이라는 것을 확신한 아비멜렉은 이삭을 왕궁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따져 묻는다. “그가 분명이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으냐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9, 10). 이에 대해 이삭은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9).

 

일의 정황을 모두 파악한 아비멜렉은 이렇게 선포한다.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11). 애굽 땅이 아닌 그랄 땅에 거주하게 된 이삭과 리브가가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순종의 가치를 발견한다. 순종이 바로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순종을 배웠다. 그리고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배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구원이다. 실제로 이삭은 삶 속에서 순종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신비롭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벌벌 떨던 이삭과 리브가는 순종을 통해서 마침내 안위를 보장 받는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어쩌면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전해준 인생의 지혜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고, 실제적인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그랄 땅에 거주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삭은 오히려 거기서 안위와 평안을 맛보는, 그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순종은 어렵지만, 어려운 길이 아니다. 오히려 순종은 죽을 것 같지만 사는 길이다. 무엇이 나를 살게 할 것인가 고민될 때 두 눈 딱 감고 순종하는 것이 오히려 사는 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를 그냥 놓아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게 사는 길이란 다른 것에 있지 않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곧 사는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만나주신다.

 

순종의 신비는 십자가에서도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런데 거기에서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순종에 살고 순종에 죽는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자는 순종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순종이 곧 사는 길이다. 순종의 신비가 우리의 인생을 신비롭게 이끌어 줄 것이다. 사는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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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29. 22:05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롬 6:12-23)

 

교회 다니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이다. 너무 많이 듣다 보니까 익숙하고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상 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죄라는 말뿐만이 아니라, ‘라는 말도 많이 듣는다. 그런데 도대체 란 무엇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이라는 말은 거부감까지 든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는 말씀까지 있는 것 같은데, 종이라는 말은 왠지 꼬리 중의 상꼬리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증거하는 복음은 말 그대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정체성이 바뀐 그리스도인에 대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죄의 종은 무엇이고, ‘의의 종은 무엇인가?

 

우선 죄에 대해서 알아보자. 죄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설명하시겠는가? 죄라는 것을 떠올리면 실정법적인 죄부터 생각할 것이다. 살인, 강간, 강도, 유괴, 납치 등을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은 죄가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그보다 근본적인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죄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상태를 가리키는 메타포이다. 죄라는 말만큼 자기 자신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는 말도 없다.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죄는 휴브리스라고 하는데, 이는 스스로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것, 신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 모든 관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것이다(마커스 보그,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202).

 

그러니까 죄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부여되는 메타포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과도하게 부풀려서 신 같은 존재로 여기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한 개인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집단이나 국가, 또는 인류 자체에서도 발생한다.

 

교회라는 집단도 스스로를 과도하게 부풀리면 그 자체가 신적인 존재가 되어 거기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적절한 희망을 주고 그에 상응한 과도한 요구를 할 수 있다. 사실 이단들이 이렇게 작동한다. 이단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집단을 과도하게 부풀려서 자신들이 무슨 진리를 담보하고 있는 듯 자기 자신을 꾸미는 것이다. 이단 교주에게서 특히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데,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 거의 신적인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이단 교주의 특징이다.

 

국가라는 집단도 그렇다. 이것은 사무엘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데,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권(국가)의 병폐를 지적하며 왕을 세워달라는 그들을 설득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생각은 왕이 세워지면 국가가 자신들의 당면한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헛된 바람이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국가는 왕을 내세워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렸고, 그러다가 결국 그 누구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고 만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국가가 하나님을 대신 하지 못했다.

 

죄의 종이 된다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 신과 같이 되려 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 모든 관계의 중심으로 놓으려고 하는 속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태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을까?

 

여기서 용서에 대한 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 보자. 죄의 종을 용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죄의 종이 용서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흔히 용서를 눈감아줌정도로 생각한다. 만약 용서가 그런 뜻이라면, 죄의 종에 대한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서 신과 같은 존재로 남고 싶어하는 존재를 용서해 준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부풀릴 테니까. 이런 경우, 오히려 용서가 그들의 존재의 부풀림을 정당하게 해주는 구실만 마련해 줄 뿐이다. 용서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자기 자신을 부풀려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이단 사이비가 작동하는 기재이다. 용서와 구원을 그런 식으로 수여해준다. 자기 자신을 마음껏 부풀릴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죄의 종의 상태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를 그냥 용서해 주고, 그 상태를 그냥 인정(구원)해 주고 만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마음껏 부풀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이단 사이비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용서와 구원은 차원이 다르다. 말 그대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존재의 변화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변한다는 것은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 18). 여기서 죄로부터 해방되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부풀려서 신처럼 되고자 하는 그 욕망, 상태에서 벗어난 상황을 말한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가? 바로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함으로 가능하다. 그러면 교훈의 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을 마음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을 표현한 말이다. 다시 말해 믿음이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 사도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이다. 그들은 법 아래 있기를 좋아한다. 그 단적인 예를 바리새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에게 법은 자기 자신을 부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남들이 지킬 수 없는 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풀렸다. 법을 지키지 못하는 남들과 같지 아니함을 자랑스러워 하며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시기를 바랬다.

 

사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 자기 자신을 부풀리기 위해서는 남들과 자신들을 경계 짓는 법이 더 필요하다. 대표적인 예가 대학입시이다. 대학입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을 만드는 이다. 좋은 점수를 받아 소위 명문대학에 가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 신처럼 부풀려진 명문대학생들은 그때부터 남들 위에 군림하게 되고 자신이 남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그러한 입시제도를 철폐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남들과 구별하고 차별하는 그 어떠한 을 완전히 허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허무신 분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공부 못하는 이들도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현실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공부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할지.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처사를 얼마나 불공평하다고 느낄지.

 

그러나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의 관심이나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놓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을 말한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구분하는 그 어떠한 (잣대)’을 모두 허무는 일을 말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와 너의 관계를 정립시켜주는 (잣대)’로 작동하게 끔 하는 것이다.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다음의 시가 그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기러기 떼가 북반구로 날아가는 동안

지구에도 밤은 찾아오고

공원의 벤치에서 홈리스들은 아침을 맞네

 

집이 없는 사람에게

벤치는 집일까 침대일까

잠자면서도 출렁이는 보트피플들은 구유에 담긴

예수처럼 어리고 슬프다

 

기러기를 길들이면 정말로 거위가 될까?

거위는 새로 얻는 집을 사랑할까

 

지구의 북반구에서 완결되지 못한 이야기를

남반구에서 시작하려 한 건 누군가의 잘못

흩날리는 페이지들이 꿈속에서 가벼운

집을 짓는다 나더러 부수라고

 

코와 입과 눈이 섞인 얼굴들이

꿈속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동안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하재연 시집,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중에서>

 

바울 사도는 말한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21). 여기서 그 때란, 죄의 종이 되었을 때를 가리킨다. 자기 자신을 마음껏 부풀려 자기 자신이 신이 된 양 하면서 살았을 때 결국 거기서 맺어지는 열매는 죄의 열매 밖에 없다. 살인, 강간, 강도, 유괴, 납치 등,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실정법에 저촉되는 끔찍한 범죄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부풀려 살다가 좌절하게 되면서 저지르게 되는 죄의 열매들이다. 결국 자기 자신을 부풀려서 사는 사람에게 닥치는 것은 사망(죽음)’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음이 있으니,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지는 복음이다.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22). 자기 자신을 부풀리는 일을 그만두고, 다시 말해, 다른 사람(존재)과 나 자신을 구분하려는 을 무너뜨리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되는데, 결국 그 열매의 끝은 영생이다.

 

의가 곧 하나님이시니, 하나님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의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된다. 영생이란 영어로 ‘eternal life’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열매를 맺고 사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삶이 곧 구원의 삶, 영생의 삶이 되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자기 자신을 부풀리면서 살아봤자,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 그렇게 살아가라고 부추긴다. 세상의 모든 시스템이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사실 우리는 의식 못하는 가운데 거기에 놀아나는 것뿐이다. 정신을 좀 차려서 세상을 바라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중요하다. 나 자신을 부풀리면서 살아봤자 결국 내가 두 손으로 얻어낼 수 있는 열매는 죽음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거룩한 삶을 만들어 가시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을 약속하신다. 그것을 그냥 선물로 주신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이 세상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면, 이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못 견디는 죄의 종으로부터,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의의 종으로 존재의 변화를 이룰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자유함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사(공짜로 주시는 선물)로 주시는 영생(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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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26. 13:08

장자권 쟁탈전

세기 27

(창세기 25:27-34)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것이 하나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자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속성상 하시는 모든 일이 사랑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물론 보통 사람들에게 이것은 별다른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에 주저 없이 아멘으로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맞닥뜨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이 혼란스러운 신앙을 불러 일으킨다. 특별히 삶을 깡그리 파괴할만한 위력을 지닌 사건이 삶 속에 발생했을 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한 없이 무력해 보이는 인간에게 그나마 주어진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기도일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해 안 된다고 고래를 절래절래 흔들다가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면 어느 순간 이해가 된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물론 그 기도 또한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특별히 기도복음서라 불리는 누가복음은 겟네마네 동산에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22:44).

 

하나님의 주권은 신비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길이 기도이다.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는 길을 가는 것은 쉽지 않다. 기도는 쉽지 않다. 한 번의 기도로 하나님의 신비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기도는 한 순간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 걸어가야 할 순례이다. 이처럼 기도는 인간에게 숙명이다. 기도는 자신의 얄팍한 욕망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에 도달하는 순례이다. 기도가 이렇게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깨달아도, 이미 기도의 순례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위해서 기도했고, 리브가는 태중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불임이라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이삭은 기도했고, 하나님은 불임의 신비에 응답해 주셨다. 그래서 리브가는 그 신비를 열어젖히고 잉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리브가의 뱃속에서는 신비로운 일이 또 일어났다. 두 아이가 발을 걷어차며 서로 싸우는 듯한 상황이 매일 연출됐다. 그래서 엄마 리브가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이런 응답을 받았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쟁탈전이 복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엄마 리브가는 하나님의 신비에 마음을 두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하나님의 신비였다. 보통 어린 자가 큰 자를 섬기는 것이 이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는 그 반대였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삭은 에서를 더 사랑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에 접한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 편애 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집중했다는 뜻이다.

 

복중에서의 장자권 쟁탈전은 에서의 승리였다. 에서가 먼저 나왔다. 그러나 쟁탈전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쟁탈전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세상에 나왔다. 장자권 쟁탈전의 최후 승리자는 누가 될 것인가?

 

에서가 먼저 세상에 나옴으로, 사실 에서는 장자권 쟁탈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서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만다. 장자권을 하찮게 여긴 것이다. 일의 사정은 이렇다. 에서는 사냥꾼이었다.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사냥을 하고 돌아온 에서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마침 쌍둥이 동생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다.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던 에서는 야곱에게 그 죽을 달라고 한다.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야곱은 에서에게 장자권을 팔라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서는 야곱의 제안을 넙죽 받아 든다. 그 이유가 이렇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배고파)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업도록 살피라”(12:16). 히브리서는 음행하는 자와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동급으로 말한다. 음행하는 자란 누구인가?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음행하는 자는 우상숭배자를 일컫는 말이다. 또는 자기 부인이나 남편을 버리고 다른 여자나 남자에게 관심을 두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우상숭배를 가리킬 때 음행하는 자라는 메타포를 쓰는 이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자나 음행으로 결혼을 파기하는 자나 똑같다. 우상숭배자는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고, 음행으로 결혼을 파기하는 자는 자기의 부인이나 남편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다. 결국 에서를 음행하는 자와 동급으로 설명하고 있는 히브리서는 에서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죄를 범했다고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자는 망령된 자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헛것 취급하는 것만큼 큰 우상숭배가 어디 있는가? 그야말로 에서는 헛된 짓을 하는 망령된 자인 것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다. 그렇다면 장자의 명분이 왜 중요한가? 첫째로, 장자는 두 배의 분깃()을 받는다.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 받을 때, 만약 아들이 세 있다면 아버지의 재산을 네 등분 해서 두 아들에게 한 분깃씩 나누어 주고, 두 분깃은 장자가 갖는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분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두 분깃을 물려 받을 만큼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역사가 장자에게 임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장자는 축복권을 가지고 있다. 뭔가를 나누어 주려면 그만큼 더 많은 풍요로운 속에 있어야 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축복은 장자에게서 나와 그 아래로 흐른다. 장자가 축복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축복을 귀하게 여겨 그대로 복을 내려 주신다.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장자만이 가지는 권리이다.

 

셋째로, 장자는 예배를 수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예배를 수행한다는 것은 레위 제사장들이 성전의 일을 맡아 보면서 누렸던 은총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대제사장은 공동체를 대표하여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였다. 예배를 수행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뜻이다.

 

장자의 명분이 지니고 있는 이 세 가지의 권리를 종합해 보면, 결국 장자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함으로 삶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식을 얻는 것,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만큼 인생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인간에게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공허함(emptiness)이다. 인생은 공허하다.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정말 처절하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별의 별 짓을 다한다. 그러나 채우지 못한다. 솔로몬의 고백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려봤지만, 그는 그 어느 것으로도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도서 12:1-2).

 

안식은 오직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텅 빈 마음에 당신의 생기(루아흐)를 불어 넣어주실 때만 비로소 우리는 안식에 거할 수 있다.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아무리 건강하게 살아도,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으로 살아도, 가장 안타까운 상황은 삶 가운데 안식이 없을 때이다. 안식이 없는 삶은 살아 있으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장자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 가까이 함으로 안식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그리스도의 장자권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서의 장자권을 누린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장자권을 포기할 수 없다. 장자권 쟁탈전에서 승리하지 않을 수 없다.

 

절대로 에서처럼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돈 몇 푼 때문에, 피곤하다고, 귀찮다고,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장자권을 빼앗아 가려는 마귀의 술수가 매일 같이 삶 속에서 일어난다. 베드로 전서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이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피 흘리기까지싸워야 한다. 장자권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다. 장자권 쟁탈전에서 승리한 자는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에서처럼 망련된 자가 되어 장자권을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에서의 후손이 아니라, 야곱의 후손이다. 장자권 쟁탈전의 승리를 거머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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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6. 25. 11:11

이방인

 

나는 발견되지 못한다

너를 발견하지도 못한다

나를 발견하기 위해 현미경이 필요한 것도

너를 발견하기 위해 망원경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눈 뜨기만 하면 발견할 수 있는

너와 나

그러나 세상은 장님의 눈동자처럼

어둡다

 

아기는 발견되기 위해 울며 태어나고

꽃은 발견되기 위해 예쁘게 피어난다

비는 발견되기 위해 옷을 적시고

바람은 발견되기 위해 창문을 흔들어댄다

 

그러나

아기는 금방 늙고

꽃은 어느새 시들고

비는 지나쳐 가고

바람은 도깨비처럼 자취를 감춘다

 

카프카의 이방인은

발견되기 위해 총을 쐈을까?

가룟 유다는

발견되기 위해 배신 했을까?

그럼 예수는 발견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을까?

 

울어도 웃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듯

눈이 내린다

내리자마자 땅 기운에

녹아버린다

 

너무 까매서 잠 들 수 없는 밤

너무 하얘서 뛰 놀 수 없는 낮

세상은 온통

부조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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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6. 25. 09:54

숙명

 

배가 고프다

고통이다

고픈 배를 달래면

고통이 사라질까

숟가락을 든다

식욕의 고통이 사라지고

배고픔의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손과 입은 수 없이 키스한다

뇌하수체가 만족 호르몬을

흘려 보내면

손과 입은 이별하고

또 다른 고통이 밀려 온다

배부르다

고통이다

부른 배를 달래면

고통이 사라질까

점점 빵빵해져

그런 나를

생명이라 부를 수 없다

매일같이

고통과 고통 사이를

오가는 나는

그래서 인간인 거다

천사는 배고프지 않겠지

물론 배부르지도 않겠지

고통은 인간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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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15. 23:19

성령의 교제

(고린도후서 13:11-13)

 

설교 제목이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성령교제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생명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생명의 영,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어떤 다른 존재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다.

 

본문의 마지막, 13절은 이렇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문구는 예배 말미에 축도로서 사용된다. 한글로는 교통하심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부분이, 바로 교제(코이노니아)’이다. 원문에 충실해서 번역하면, “성령의 교제가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상 교통이나 교제나 코이노니아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다. ‘교통은 서로 상호 간에 일어나는 그 무엇을 전제한다. 코이노니아라는 것은 상호 간에 일어나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코이노니아는 헬라어이다. 이것을 라틴어로 옮기면 콤뮤니오(communio)’라고 하는데, 여기서 영어의 ‘communion’이 나왔다. ‘COMMUNION’이 무엇인가? 성찬식을 일컬어서 ‘Holy Communion’이라고 한다. 이것을 우리나라 말로 옮기면, ‘거룩한 교제가 된다. 성찬식은 거룩한 교제이다. 왜 거룩한 교제인가?

 

성찬식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는 그것을 통해서 어떠한 마법적인 힘을 수여 받기 위함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어떤 사육제의 의식을 행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살을 못 뜯어 먹어서 안달 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식인종이 아니다.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에 살과 피를 입은 실체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렇게 내 눈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

 

실체, 교제, 일치라는 말을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 또는 오류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담보 받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수여의 개념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는 말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수여 받는다라는 개념이 아니다. 만약 구원을 수여의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면, 예수와의 교제는 필요 없어진다. 이는 마치 어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적선하는 것과 같아진다. 부자와 가난한 자와의 교제가 없어도,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적선을 통하여 무엇인가 받을 수 있다.

 

구원은 수여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다. 오늘의 핵심 단어로 다시 표현하면, 구원은 교제의 개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놓치고 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수여받는 데서만 그친다. 그렇다 보니, 구원이 무슨 물건 사듯 믿음이라는 재화()’을 통해서 살 수 있는 것처럼 전락하고 말았다.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물건 사듯이,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 속에는 구원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구원과 거룩한 교제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교제 없이 구원을 얻을 길은 없다.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교제 없이 구원만 받기를 바라는 것은 일 하지 않고 임금만 받기 원하는 게으른 종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너무 구원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구원은 우리의 일차 목표가 될 수 없다. 구원이 일차 목표가 되는 한, 모든 것은 상대화 되고 만다. 구원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은 수단이 되고 만다. 구원이 목표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조차도 구원을 이루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이러한 오류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구원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구원은 목표가 아니라 선물이다. 우리의 일차 목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는 남녀가 깊은 사랑 가운데 빠지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자녀와 같은 것이다. 자녀를 목표로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사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녀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교제는 성령에 참예한다는 뜻이다.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이다.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은혜는 값 없다라는 뜻이다. 값 없는 은혜는 오직 사랑에서만 올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은 은혜다. , 값 없다. ‘값이 없다는 것은 싸구려라는 뜻이 아니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는 뜻이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결단코 인간은 값 없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nature)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향(orientation)이다.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고 성향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신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의 역사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무슨 역사를 이루는가? 고린도 후서의 핵심 말씀은 517절에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는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역사를 이루신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교인들끼리 분열이 심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성령의 교제를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분열이 심한 교인들끼리 서로 잘 지내라는 권고의 측면이 아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11).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핵심 단어는 이것이다: 기쁨, 온전, 위로, 한마음, 평안.

 

이러한 것들은 그저 이들이 서로 잘 지낸다고 해서 오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표지들(signs)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불러오는 새로운 피조물은 기뻐하고, 온전하며, 위로 받으며, 한마음이 되며(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 평안(안식)하게 된다.

 

교제란 바로 이런 것이다. 교제란 만나서 희희락락거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제, 성령의 교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 가운데로 들어가는 신비이다. 구원이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목표다.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선물이다.

 

성령의 교제는 성령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령의 일은 그리스도의 일과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성도들 가운데 오신다. 성령의 교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에게 문안한다.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자들은 기뻐하고, 온전하며, 위로 받으며, 한마음이 되며, 평안 가운데 거한다. 그러니 어찌 거룩한 입맞춤으로 성도와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우리를 단순히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서로 잘 지내는 것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 구원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빛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그 새로운 창조의 빛 가운데 거하게 된다. 성령의 교제가 바로 그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얼마나 은혜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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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하며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저는 이 문구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늘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다.” 정말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교회라는 것을 빼면 그 무게가 2그램도 안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를 팔할이나 키워준 교회가 바로 벌떼교회입니다. 서른, 잔치를 시작하기 위해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 제 인생은 온통 벌떼교회와 뒹굴었으니까요. 그래서 벌떼교회는 제게 참 특별합니다.

 

제 인생과 연관된 벌떼교회뿐만이 아니라, 벌떼교회는 그 역사 자체가 참 특별합니다. 벌떼교회를 다니는 모든 분들이 그 특별함을 인식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깊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헌신된 일꾼들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그 특별함은 1930년 정초, 덕적도에서 있었던 한 부흥집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외갓집은 율곡 이이의 학맥을 잇는 정통 한학자 집안으로서 서인 계열의 정부 고위관리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외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 덕적도로 귀양살이를 오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외갓집은 덕적도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1930년도 정초에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한 겁니다. 감리교 목사로서 한국의 4대 부흥사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용도 목사가 1930년 정초에 덕적도로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온 겁니다. 외할아버지(오지섭목사님)께서 청소년 시기에 그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셨다가 이용도 목사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통 한학자 집안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는데,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외할아버지를 통해 내려진 신앙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결국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신앙의 씨앗은 담쟁이넝쿨이었나 봅니다. 담쟁이넝쿨이 온 담에 퍼지는 것처럼, 외할아버지를 통해 뿌려진 신앙의 씨앗은 금방 온 집안에 퍼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퍼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집안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영접을 넘어 외할아버지와 그 자손들이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중에 벌떼교회로서 눈 여겨 볼 수 있는 것은 1954년 여름, 연세대학교 기독학생회 회원으로서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벌떼교회(당시 과천하리교회)를 세웠던 학생들 중 송인호, 김광현 두 사람입니다. 송인호(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역임)는 저희 어머니(오세숙 사모)의 당숙이시고, 김광현(정신여고 역사교사 역임)은 저희 어머니의 4촌 오빠입니다. 결국 벌떼교회를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저희 집안 분들이셨던 것이죠.

 

저희 집안은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이어 받아 성장한 집안으로서, 외할아버지께서는 유명한 부흥사셨고, 그 자녀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는데, 감리교 역사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많은 목사를 배출한 집안입니다. 특별히 한국 선교사로서 목원대학교를 세운 도익서(찰스 스톡스) 박사 그리고 목원대학교의 초대학장을 지내신 목원이호운 학장(찬송가, ‘부름받아 나선 이몸작사가)과 깊은 인연이 있는 집안으로서 외할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저희 아버지 모두 도익서 장학금으로 신학공부를 하셔서 목회자가 된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용도 목사와 한국 4대 부흥사 중 한 명으로 추앙 받고 있는 박재봉 목사는 저희 집안의 사돈이십니다. 박재봉 목사의 집안도 그 형제와 자녀들이 모두 목회자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귀한 집안인데, 그 중에서 박재봉 목사의 동생인 박재훈 목사는 한국 찬송가 사()에 길이 남을 분입니다. 그분이 지으신 찬송가로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서 돌아오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등이 있고, 우리가 어려서부터 즐겨 불렀던 수많은 동요들 중 펄펄 눈이 옵니다”, “산골짜기 다람쥐”, 그리고 어머님 은혜등이 그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박재봉 목사의 야사 중 유명한 것은 한국 주먹계를 주름 잡던 시라소니를 전도한 사건입니다. 시라소니 아들도 목회자가 되었는데 현재 저희 집안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교류 중에 있습니다.

 

벌떼교회는 태생부터가 참 특별합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희망의 촛불을 밝히기 위한 청년들의 선교사업을 통해서 생겨난 교회로서, 그 태생이 선교적입니다. 20세기 신학의 교부로 추앙받고 있는 칼 바르트가 교회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들의 공동체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망권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떼교회는 그 증언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로서 태생된 벌떼교회에 그 증언의 역할을 특별하게 감당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담쟁이넝쿨과도 같은 목회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장윤식 목사가 이 교회의 담임을 맡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굉장히 역사적입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벌떼교회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저희 집안 어른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그 자손이 우연하게 목회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필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신앙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아우로서 곁에서 지켜본 형님 장윤식 목사는 우리 집안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가장 닮은 목회자입니다. 강직한 성품도 그렇고, 불 같은 메시지도 그렇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열정이 그렇습니다. 저는 고백하기를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라고 하지만, 형님 장윤식 목사를 들여다보면 나를 키운 건 십할이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인생에서 교회를 빼고 나면 어떤 인생의 무게가 남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교회와 목회자가 이토록 한 몸, 한 뜻, 한 역사를 지니기는 정말 힘듭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특별한역사하심이 없으면 이토록 절묘한 조합은 나오기 힘듭니다. 이는 마치 지구와 달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주변을 공전하며 영향을 주고 받는 오묘한 섭리와도 같습니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합니다. 인간의 삶 측면에서 60년은 이제 황혼으로 접어든 시기이지만, 하나님의 타임테이블 가운데 놓여진 벌떼교회는 이제 청춘의 시기로 들어섰다는 생각을 합니다. 새로운 성전 건축과 함께 벌떼교회는 이제 막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역사를 지닌 교회, 목회자와 함께 이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만들어 가는 벌떼교회에 몸담은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으신 분들입니다.

 

R. M. 크리소스톰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꿀벌이 다른 곤충보다 존경 받는 까닭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사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 희망으로 탄생한 벌떼교회,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교회가 가진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아 집니다. 특별한 역사와 사명을 가진 벌떼교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를 부지런히 지켜내는 꿀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벌떼교회 출신이며

장윤식 목사의 아우이며

컬럼버스감리교회 담임인

喜樂堂 장준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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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12. 07:56

주권과 기도

창세기 26

(창세기 25:19-34)

 

파란만장했던 아브라함의 시대가 끝나고 약속의 아들 이삭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신앙사를 형성해 간다. 성경은 이삭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이렇게 알린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19). 아브라함의 족보가 아니라, 이삭의 족보가 등장한다. 물론 그의 족보는 매우 짧다. 아버지는 아브라함이고, 그의 아들은 이제 막 태어난 야곱과 에서이다. 이것이 그의 족보 전부이지만, 이 짧은 족보는 우주보다 크다. 왜냐하면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이 삶 속에 들어오시는 순간, 그 누구든지 그의 삶은 우주보다 큰 삶이 된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을 받아 낳은 아들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단순히 아들 하나만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자손들이 번창할 것이고 그의 자손들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 그런데 그 약속을 믿기에는 참 어려운 일이 또 발생한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 불임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불임의 문제는 이삭만 겪은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겪었다. 그런데, 이삭은 그 불임 문제를 대함에 있어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며 여호와께 간구하매”(20). 이삭은 아내의 불임 문제를 놓아두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지극히 당연한 행동인 것 같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기도는 믿는 이에게 늘 과제인데, 두 가지가 성립돼야 온전한 기도가 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즉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개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능자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믿지 못하고, 그분의 존재를 믿더라도 그분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면 기도는 막연해 진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문제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 자신의 문제를 놓아 두고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가 필요한 누군가에 대한 사랑 없이 기도는 나오지 않는다.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인데, 사랑의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가장 귀한 일은 그 사랑의 대상을 위해 기도하는 행위이다.

 

이삭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다. 아마도 모리아 산에서 그것을 배웠을 것이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여호와 이레를 배웠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그는 모리아 산에서 몸소 체험했다. 또한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사랑했다. 아내 리브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어머니의 죽음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은 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24:67).

 

기도는 믿음과 사랑의 열매이다. 기도를 다른 말로 하면 소망(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 인간이 지녀야 하는 최고의 덕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한 온전한 사랑만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망(희망)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소망(희망)을 잃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요, 사랑의 대상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믿음과 사랑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나가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전영택 선생이 작사한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 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우리는 바쁘고 피곤한 삶에 젖어 이것을 잊고 산다. 예수 믿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이루어야 할 소망이 무엇인지 잊고 산다. 신앙은 나 자신만 잘 되면 그만인 이기주의를 생산하지 않는다. 신앙은 나를 너머 나의 울타리를 살피게 한다. 신앙은 그냥 즐기고 마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신앙은 변화를 수반한다. 신앙은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아편이 아니다. 신앙은 통증에서의 구원이다.

 

가정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삶의 토대인데,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믿음의 가정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나 혼자 믿는 것은 오히려 큰 고통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그래서 전도(예수님을 전하는 것)는 개인에게 일어나기 보다 가정 단위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풀려났을 때 감옥 간수를 전도하면서 선포한 내용은 이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 ‘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네 집이 구원 받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의 구원 선포가 있은 후, 간수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도록 한다.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16:32-33).

 

가정의 행복은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가족을 향한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소망이다. 이 소망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소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가족을 사랑하는가? 나이 많은 요한은 말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 중에 최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기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에 두고, 우리의 창조자시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의 대표 증거이다.

 

남편의 삶을 위하여, 아내의 삶을 위하여, 자녀의 삶을 위하여, 형제의 삶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할 것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 나오지 못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 것을 아닐까? 나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느라 몸이 피곤해서 기도의 자리에 못나오는 경우도 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사실 기도는 자칫 잘못하다간 말의 잔치로 끝날 수 있다. 기도의 자리에 나온다 하더라도 기도라는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삶이라고 하는 경건의 능력이 실현되지 않으면 기도만큼 헛된 것도 없다.

 

기도의 자리에 나와 기도하는 것과 더불어 행해져야 할 것은 삶의 기도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삶의 자리가 곧 기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을 위해 일터에 나가 일하면서 그 일을 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일 하는 것을 기쁨과 감사로 여기는 태도 말이다. 노동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고와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열매의 질이 달라진다.

 

마지못해 일하는 사람과 자신의 노동이 곧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사람은 그 열매가 다르다.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노동은 그것 자체가 거룩한 기도이다. 기도가 삶으로 구현된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것을 최고의 기도라고 여긴다. 기도가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이다. 노동과 기도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이삭은 아내를 위하여 기도 드렸다. 그의 기도가 말과 혀로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의 기도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 증명해 주신다.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하였더니”(21).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루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성이고 주권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사랑의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에 동참하길 바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기도는 인간의 숙명이다.

 

기도의 응답으로 임신하게 된 리브가는 또 한 번 인간의 숙명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22). 뱃속에 잉태된 두 자녀를 사랑한 리브가는 엄마로서 자녀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뱃속에서 벌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개될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싸움이 태 속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 어머니 리브가는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한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은 이것이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만날 때 어리둥절해 한다. 리브가의 배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어리둥절한 일이고, 하나님의 말씀도 어리둥절한 말씀이다. 특별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은 참으로 어리둥절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눈에 보기에 굉장히 불합리해 보일 때가 많다. 하나님의 주권은 오직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할 때 이해할 수 있는 신비이다.

 

이삭은 자손 번창에 대한 약속이 불임으로 막혔을 때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약속을 이어나갔다. 리브가는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기도함으로 태중에서부터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드린 이삭과 리브가의 기도 가운데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쌍둥이였고, 다툼이 아직 끝나지 않은 양 누가 먼저 나왔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발 뒤꿈치를 잡고 연달아 태어났다. 이들의 싸움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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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8. 22:56

존재의 변화

(사도행전 2:14-21)

 

승천주일에 살펴본 예수의 승천 이야기는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우주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예수님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갔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존재가 바뀌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였습니다. 로마 당국에 의해 처형 당한 예수는 승천(높이 올려짐)을 통하여 주님으로 선포됩니다. 예수 당시 주님은 로마의 황제였습니다. 주님인 로마의 황제가 예수를 처형시켰으므로 황제가 예수보다 힘 세고 높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부활과 승천으로 인하여서 그 결과가 뒤집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과 승천은 누가 이 세상의 주님이냐에 대한 선포입니다. 이 세상의 주님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라는 것이죠.

 

예수가 이 세상의 주님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앎의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실천의 차원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냥 말로는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외칠 수 있지만, 정말로 인생을 살면서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뜻은 그 분께 집중하면서 그분의 말씀과 삶을 좇아 소위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인데, 그것이 좀처럼 우리 삶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과 승천에 이어 벌어지는 사건인 성령강림은 바로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자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인식된 예수는 곧 우리의 존재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성령이 부어지는 성령강림 사건은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믿음은 단순한 인정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인해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강림은 신비한 사건이 아니라 당연한 사건이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변화되는 매우 실존적인 사건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알려면, 우선 성령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어떤 마성적인 힘이나 우리가 흔히 귀신이라 부르는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성령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예수와 연관됩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일컬어 하나님의, 예수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3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고후 3:17-18).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입니다. 반지의 제왕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령강림은 곧 왕의 귀환인 것이죠. 성경강림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각 사람 마음에 부어지는 사건입니다. 그야말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의 실현이 바로 성령강림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여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던 예수의 제자들은 성령강림을 통하여 예수와의 일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신비롭고 결정적인 경험인데, 이것을 통하여 그들은 온전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즉 크리스천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의 혀로서 내려온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의 언어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언어의 변화는 엄청난 일을 몰고 옵니다. 이것이 단순히 고운 말 공손한 말을 쓰게 되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불의 혀로서 내려온 성령이 임한 제자들이 말할 때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제자들의 말 속에서 그들의 언어를 듣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영어와 한국어를 쓰는 두 사람이 서로 각자의 말을 하는데도 그들이 서로 알아듣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바벨이라는 말의 뜻은 혼란입니다. 영어의 ‘babble’이 거기서 왔는데, 이는 횡설수설을 가리킵니다. 바벨탑 사건 이전에 온 인류는 한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 이후로 인류의 언어는 뒤섞여 버려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각자의 언어와 민족으로 갈라졌고, 거기에는 오해와 대립 그리고 갈등만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바벨탑의 사건과 정반대의 상황을 그리는 것이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인류는 다시 통합되기 시작한 것이죠. 오해와 대립, 갈등 대신에 이해와 화해, 그리고 협력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강림을 통해 시작된 이해와 화해 그리고 협력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가2 44절 이하에 나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람은 기본적으로 손을 움켜쥐고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무엇인가를 움켜지는 것에 집착을 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 참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움켜진 손을 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자랑하고, 보이는 것을 손에 움켜쥐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은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움켜쥐려 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보여줄 수는 없으나, 그 어느 부자보다 더 풍요롭습니다. 우리가 움켜쥐려고 하는 것들은 모두 어느 시점이 되면 나에게서 떠나가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한 번 움켜잡으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이 우리를 붙잡아 줍니다.

 

한 번 손을 움켜쥐어 보십시오. 주먹이 됩니다. 움켜쥐려는 사람은 인생을 주먹질 하다 끝냅니다. 움켜쥐려다 보니, 남을 해치지 않고는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움켜쥐려는 것을 다 내려놓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이렇게 기도하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움켜쥐려는 것을 내려놓고, 이렇게 기도하는 손을 가진 사람은, 주먹을 쥐고 남을 해치려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남의 삶을 복되게 하는 기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성령강림을 통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요엘서의 말씀이 실현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대중들 앞에 서서 요엘서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합니다. 요엘서의 핵심 문장은 이것입니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성령강림)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여기서 예언, 환상, 등의 그림언어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관련된 말입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로 주님으로 일컬어지는 로마 황제가 하는 일은 당장 눈에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위협적입니다. 특별히 소위 평화를 위해서 가해지는 폭력은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 넣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자녀들이나 젊은이들이나 늙은이들이나 남종이나 여종들이 보는 환상이나 꿈그리고 그들이 하는 예언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들은 로마 황제의 극악무도한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그리고 그 우편에서 주님으로 고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게 되는 가장 큰 것은 이 세상의 구원자, 주인, 주님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성령강림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성령강림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읽습니다만, 그것을 보면서 그저 신기한 일 구경한 것처럼 하고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성령강림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사건입니다.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게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건을 겪어야 존재가 변화됩니다. 성령강림이 사건으로 다가와야 우리의 존재가 변화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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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5. 05:41

위로와 화해

창세기 25

(창세기 25:1-18)

 

인간이 겪는 아픔 중 가장 큰 아픔은 상실의 아픔입니다. 무엇인가를 상실한다는 것은 복구가 불가능한 것을 말합니다. 그 중에서 사람에 대한 상실이 가장 큰 슬픔이죠. 부모님이 죽었다든지, 배우자가 죽었다든지, 자식이 죽었다든지 하는 상실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위로란 바로 상실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아내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은 상실감이 컸습니다. 자식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은 그 스트레스 지수가 가장 높다고 합니다. 이삭도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힘들어 했지만, 사실 어머니를 잃은 이삭보다 아내를 잃은 아브라함이 더 힘들었을 겁니다. 이삭은 부인을 얻음으로 해서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대한 위로를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치유할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후처(그두라)를 얻습니다.

 

사라는 12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 사라가 세상을 떠날 때 아브라함은 137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175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아브라함은 38년 정도를 더 산 것이지요. 38년 동안 더 살며 아브라함은 후처를 얻어 많은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중에는 미디안 족속의 조상이 되는 미디안이 있는데, 나중에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족속으로 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38년간 더 살면서 후처를 얻어 자식만 낳은 것이 아니라, 이삭을 보호하기 위한 대비책도 잘 마련해 둡니다. 후처를 얻어 자식을 많이 낳았지만, 그것은 그저 위로였지 어떠한 언약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겠죠. 그 옛날 약속의 자식이 아닌 이스라엘을 낳았다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어,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식 이삭과 위로의 자식들 간에 분명한 선긋기를 합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에게 모든 소유를 물려 줍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25:5). 여기서 소유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모든 소유란 영원한 복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영원한이란 하나님의’, ‘신적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영원한 복까지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셨던 것이 그대로 이삭에게도 물려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약속의 아들과 위로의 아들들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잣대이기도 합니다. ‘복이 된다는 것은 이삭이 복을 비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대로 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축복권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이 갖게 되는 축복권의 원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축복권은 이렇게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물려받음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문화 가운데서는 장자가 그 축복권을 물려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보면, ‘장자가 축복권을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축복권을 물려 받은 이가 장자의 권리를 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뒤 이어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첫째 아들인 르우벤이 아니라 11번째 아들인 요셉이 축복권을 물려 받아 장자의 지위를 누리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건넸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 자식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이삭에게서 멀리 떠나가게 만듭니다. 같이 살아감으로 인해서 발생될 수 있는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남은 날 동안 후처를 통하여 위로 받으면서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수행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영적 기강과 질서를 잡아 주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재산만 물려준다고 자식들이 서로 잘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기강과 질서를 바로 잡아 줘야 부모가 죽은 후에도 자식들 간에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 꼭 눈 여겨 봐야 할 아브라함의 죽기 전 행보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습니다. 그의 죽음 또한 하나님의 복이 넘칩니다.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25:8). 이 문장을 영어로 보니까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Abraham breathed his last and died in a ripe old age, and old man and satisfied with life; and he was gathered to his people”(NASB). 영어성경에는 이렇게 아브라함의 죽음을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고, 열매가 잘 익은 것처럼 그렇게 늙어 죽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끝이 좋아야 합니다. 아무리 한 때 잘 나갔어도 끝이 비참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한 때 비참했어도 끝에 가서 복스러우면 모든 이들의 칭송과 부러움을 삽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복스러운 것이겠지요.

 

아브라함의 죽음은 그냥 복된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 가장 서원한 관계가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였습니다. 이삭 때문에 광야로 내쫓김을 당했던 이스마엘이 이삭에 대하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아브라함의 죽음 때문에 이스마엘과 이삭 간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장사하였으니”(25:9).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이삭과 이스마엘이 힘을 모은 것입니다.

 

사라의 죽음으로 인해 땅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인해 화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듯 죽음은 참 신비로운 겁니다. 인간이 겪는 가장 큰 아픔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평소에 일어나기 힘든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화해와 평화는 죽음의 자리에서만 일어나는 신비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자아의 죽음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죽는다는 것은 오히려 두려운 것이라기 보다 위대한 것이라고 말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 약속의 성취를 상징하는 헤브론 땅의 막벨라 굴에 사라와 함께 묻힙니다. 그 이후 이삭과 리브가도 야곱과 레아도 모두 이곳에 묻힙니다. 약속의 땅에 약속의 자존들이 함께 묻히게 되는 일은 참 보기에도 흐뭇합니다. 헤브론은 훗날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이 왕이 되어 76개월 동안 유다 지파의 왕으로서 다스리던 곳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유서 깊은 곳이지요.

 

아브라함이 죽은 뒤, 아브라함이 누렸던 복이 약속대로 이삭에게 임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25:11). 이삭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마엘에게도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그의 족보가 나오는데, 이스마엘의 후손이 열 두 족속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아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 두 지도자들이었더라”(25:16). 이스마엘이 열 두 족속을 이루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입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숫자 12는 완전수를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야곱도 12명의 아들을 낳아 12지파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말년과 죽음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했기 때문이고, 그의 죽음으로 화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위로와 화해”, 이것만큼 가슴을 짠하게 하는 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 받게 된 우리들의 소망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의 말년과 기필코 맞이하게 될 죽음이 위로와 화해의 장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이러한 꿈을 꾸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위로와 화해가 넘치는 삶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끝이 아름다운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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