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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2.05 시론
  2. 2015.11.14 봄날은 간다
  3. 2015.11.11 에스겔서의 하나님
  4. 2015.11.01 비 오는 날의 도너츠
  5. 2015.11.01 지우개와 놀이
  6. 2015.10.28 조경과 국정교과서
  7. 2015.10.21 방향제와 난
  8. 2015.10.09 아들의 가족 그림
  9. 2015.10.08 야곱의 축복 II
  10. 2015.10.07 후배의 죽음
  11. 2015.10.03 희락당과 사현 2
  12. 2015.10.01 버섯
  13. 2015.09.25 동심처럼 예쁜 꽃
  14. 2015.09.24 야곱의 축복 I
  15. 2015.09.20 J의 달밤
시(詩)2015. 12. 5. 04:30

시론



시를 왜 읽나요?

 .

다른 세상에 다녀오기 위해서지.

 .

다른 세상은 왜 다녀와야 하나요?

 .

그래야 너가 만든 세상에 갇혀 있지 않을 수 있지.

 .

내가 만든 세상에 갇혀 있는게 위험한가요?

 .

그럼, 미쳐버릴걸!

 .

그렇군요. 그래서 이렇게 세상에 미친놈이 많은 거군요.

 .

오늘부터 난 시를 읽겠어요. 그런데 어떤 시부터 읽어야 하죠?

 .

너의 존재를 소외시키는 시.

 .

왜죠?

 .

그래야 이 세상의 아픔이 비로소 보일테니까.

 .

시를 읽는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군요.

 .

고통 없이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이룰 수 있지?

 .

(2015 12 3, 바로 이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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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5. 11. 14. 04:05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 참 슬픈 문장이다. 이 문장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사람은 가수 백설희 씨이다. 그 이후, 이미자, 조용필, 나훈아, 장사익 씨 등이 리메이크해 불러 대중들에게 더욱더 알려진 노래이다.

 

봄날은 간다,는 역설적인 문장이다. 이 문장에는 한국전쟁 통에 봄날을 겪은 한() 맺힌 한국인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전쟁은 이렇게 비참한데, 여전히 봄날은 찬란한 역설적인 상황이 담겨 있다.

 

(비교적) 젊은 나는, 이영애와 유지태가 주연한 영화 <봄날은 간다, 2001년 작>를 통해 이 문장을 접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봄날은 간다의 문장보다는 이영애의 미모만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40대에 들어선 지금, 내게는 봄날은 간다의 문장만 눈에 들어온다. 문장의 발견이라고나 할까.

 

내 어린 시절, 이미자가 봄날은 간다를 부른 것을 TV에서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제목이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는 가사가 기억난다. 20대 후반, 젊음이 넘칠 때 본 <봄날은 간다>의 영화에서 기억나는 건, 영화 속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와 봄날은 간다의 그 시적인 표현만이 생각난다. 그런데, 지금은 봄날은 간다라는 문장이 슬프게 다가온다. 이 몹쓸 세상을 알아버린 탓일 거다. 세상의 이치에 나를 이입시킬 줄 알아버렸기 때문일 거다.

 

나는 어느 순간, ‘봄날이라는 보통명사에, ‘의 존재를 이입시킬 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봄날은 간다의 주어인 봄날가 된 것이다. 문장에서 주어는 어떤 서술어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봄날은 간다의 문장에서 주어인 봄날은 하필이면 간다라는 서술어를 만나서, 슬퍼졌다.

 

만약, 주어 봄날이 서술어 온다를 만났으면 그 분위기는 완전히 달려졌을 것이다. ‘봄날은 온다라는 문장은 더 이상 슬프지 않고, 희망적이다. 이처럼, 주어는 어떤 서술어를 만나냐에 따라서 운명이 좌우된다. ‘봄날이라는 주어 대신 겨울이라는 주어를 생각해 보자. ‘겨울은 간다.’ 이 문장에서 주어 겨울이 봄날은 간다의 문장에서와 같은 서술어를 만났지만, ‘겨울은 간다라는 문장은 봄날은 간다의 문장과는 다르게 슬프지 않고 오히려 희망적이다.

 

이 문장에서처럼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는 것 같다. ‘봄날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간다의 서술어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그 인생은 슬프다. ‘겨울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간다의 서술어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그 인생은 희망적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내가 어떠한 주어의 모습을 하고 살고 있느냐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어인 내가 어떠한 서술어를 만났느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만나면 따뜻해지는 서술어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인생은 짧으니까. 봄날은 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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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5. 11. 11. 08:11

에스겔서의 하나님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본 환상은 매우 기괴하다. 그는 그가 본 것을 그의 인식의 범위 안에서 최대한 표현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수행하는 네 생물의 형상이며, 그 옆에서 함께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바퀴는 의 활동에 발맞춰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무너진 예루살렘과 성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시다. 만약 하나님이 그곳에 갇혀 계신 분이었다면,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지고말았을 것이다. 제사장이었던 에스겔도 처음에는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성전에만 머무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졌을 때, 그 누구보다도 에스겔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절망이 깊을수록, 질문이 강렬해지고 응답이 간절해지는 법이다.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절망의 나날을 보내며 하루에도 수천 번 한숨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 보며 에스겔은 질문하고 또 질문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절망은 죽음의 자리이기 보다, 오히려 희망의 자리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삶의 판도를 바꾸어 놓는 기적 그 자체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조들은 바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에스겔도 예외가 아니었다.

 

에스겔은 사방으로 자유롭게 방향을 전환하며 날쌔고 힘차게 움직이는 바퀴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유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어디 한 곳에 머무시며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형상을 가져 공간에 갇히는 물체성이 아니시다. 요한복음의 예수께서 증거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영은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은 존재이시다.

 

에스겔서 1장에 등장하는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루아흐로서, ‘바람, 정신, 의 의미를 갖고 있다. ‘루아흐는 창세기 2장의 창조설화에서도 등장하는데, 이렇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루아흐)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은 인간의 외형(appearance)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루아흐가 인간 안에 임했다는 뜻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제한하거나 손댈 수 없는 하나님의 영(루아흐)을 품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어디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성을 그 육체적 삶 안에서 마음껏 누릴 때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이 가장 불행할 때는 형상을 가져 공간에 갇히는 물체성에 그 육체와 영을 내어줄 때이다.

 

인간의 죄성이란 이것을 뒤바꾸어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아닐까? 현실에서 보는 인간은 행복을 찾는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끊임 없이 형상을 가져 공간에 갇히는 물체성에 내어준다. , 외모, 학벌, 사회적 지위, 명예, 권력, 차별성 등등등. 인간은 끊임 없이 이러한 형상에 갇히려고 안달한다. 그러한 것에 자기 자신을 가두어 두지 않으면 좌절하고 절망하고 심지어 목숨을 내놓기도 한다. 이러한 것에 자기 자신을 가두어 달라고 끊임 없이 하나님께 매달린다(기도한다). 이러한 것에 자기를 가두어 주지 못하는 신은 하나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영(루아흐)를 몸 속 깊은 곳에 간직한 인간인가, 아니면 영혼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죄의 노예인가?

 

하나님의 자유성을 체험한 에스겔은 비록 포로 신세가 되어 다시는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이방인의 땅에서 죽어갔지만, 그는 그곳에서 그 어느 것에도 자기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성을 누리다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갔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인간이었기에 절망의 상황에서도 무지개와 같은 희망 찬란한 삶을 살았다. 이 얼마나 아프지만 희망적인 인생의 드라마인가.

 

나도 인간이고 싶다. ‘형상을 가져 공간에 갇히는 물체성에 내 자신을 내어주는 일에 저항하는, 하나님의 자유성을 향유하는 바람 같은인간이고 싶다. 희망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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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5. 11. 1. 14:29

비 오는 날의 도너츠

 

1989년, 그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때 만들어진 영화 <비 오는 날의 수채와>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정작 그 영화는 1990년 2월에 개봉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나는 그 영화를 고2가 되기 전 봄 방학에 봤거나, 고2가 되고 난 3월쯤에 봤던 것 같다. 날씨가 좀 쌀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그 영화를 함께 본 교회 누나(이문선)와 친구(오정환, 나의 죽마고우)의 두툼했던 옷차림도 기억난다. 교회 누나는 분명 바바리 코트를 입었었다. 그 영화를 본 장소는 종로에 있는, 그리고 단성사 앞에 있는 피카디리 영화관이었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생각하면 단연 주제곡이 생각나고, 그 다음엔 혜성처럼 등장한 여배우 옥소리가 생각난다. 주제곡을 불렀던 세 사람(김현식, 강인원, 권인하) 중 김현식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 예쁘던 옥소리는 인생의 풍파를 겪고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소식조차 모르겠다.

 

비 오는 날이면, 사실 나에겐 <비 오는 날의 수채화>보다 한 발짝 먼저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비 오는 날의 도너츠이다. 이건 어떤 영화나 노래 제목이 아니다. 이건 비 오는 날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도너츠이다. 엄마는 비 오는 날이면 (물론 비 올때마다 그러신 건 아니지만), 가족들을 위해 도너츠를 만드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비 오는 날의 도너츠는 그렇게 건강식품은 아니었다. 계란 반죽을 한 밀가루를 기름에 넣고 튀긴 도너츠였다. 그야말로 요즘 말로 불량식품이었다.

 

그러나 건강식품과 불량식품의 구분이 모호했던 그 시절, 그리고 먹거리가 풍성하지 않았던 그 시절, 엄마가 비 오는 날 해주신 도너츠, 일명 ‘비 오는 날의 도너츠’는 우리 형제에게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엄마가 해 주신 도너츠는 금방 동이 났다. 한창 자라고 있는 우리 형제가 게 눈 감추듯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내는 내가 어릴 때 그런 것을 먹어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거라고 우긴다. 사실, 나는 아내가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좀 서운하다. 물론 아내는 나의 건강이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이겠으나, 나에게 ‘비 오는 날의 도너츠’는 불량식품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이다. 엄마의 사랑이 배어 있는 음식을 ‘불량식품’이라 말하는 것은 어쩐지 인간미가 없어 보인다. 물론 나는 지금 ‘인간미’보다 실질적인 건강식품을 먹어야 할 나이가 되었지만, 이제 팔순을 넘기신 엄마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 우리를 위해 ‘요리’를 해주신다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 ‘비 오는 날의 도너츠’를 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비가 온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들으며 ‘비 오는 날의 도너츠’를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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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5. 11. 1. 06:05

지우개와 놀이

 

어느 날 교회 주차장에 지우개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요일만 되면 아이들은 수요 예배 때문에 교회에 오는데, 그때 교회에 오는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 밖에 없다. 예배 드리는 동안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공작활동도 하고 게임도 하고 공부도 한다. 그 시간을 위해 아이들은 집에서 쓰던 학용품들을 교회에 가져오는데, 다시 집으로 가지고 가는 과정에서 떨어뜨린 지우개인 것 같다.

 

지우개는 나의 중학교 1학년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그 당시 우리 학교(영동중학교)에서는 지우개 싸움이 유행이었다. 일명 지우개 레슬링인데, 지우개를 뾰족한 샤프 끝으로 조정하여 상대방 지우개에 세 번 먼저 걸치거나, 아니면 먼저 위로 올라타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나는 그 당시 우리 반에서 지우개 싸움을 제일 잘했다(사실, 진짜 싸움도 제일 잘했다.^^). 아무도 나의 적수가 없었다. 지우개 싸움을 꾀나 한다는 아이들이 매일 같이 나에게 도전했지만, 언제나 이겼다. 그때 지우개 싸움을 해서 따낸 지우개가 수 백 개에 이른다. 나는 지우개를 크기에 따라 별 하나에서 별 다섯 개까지 등급이 매겼었는데, 손바닥 만한 지우개도 있었다. 미국으로 유학 나온 이래로 그 많던 지우개의 행방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그 이전까지 그때 딴 지우개를 보관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지우개 싸움 같은 것을 하지 않지만 우리 어릴 적에는 그렇게 놀았다. 모든 것이 놀이 기구였다. 사실 지우개 싸움도 산업화 된 이후에 나온 신종 놀이였다. 그 이전에는 지우개가 귀해서 지우개 싸움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다. 지우개 구하기가 쉬워지고 값이 싸진 후에 지우개 싸움도 흥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주 어릴 적 가장 대중화되었던 놀이는 딱지치기와 구슬치기였다. 헌공책이나 잡지를 뜯어 만든 딱지로 서로의 딱지를 넘기며 놀았다. 구슬이 등장한 뒤, 딱지치기 보다 구슬치기가 더 유행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나 친구가 없으면 못 노는 그런 놀이였다.

 

놀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거였다. 지금은 아이들이 전자게임이나 온라인 게임을 주로 하기 때문에 친구가 없어도 혼자 놀이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놀이라기 보다 그냥 게임일 뿐이다. 놀이는 혼자서 하면 재미 없다. 친구가 있어야 재밌다.

 

호이징가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놀이하는 인간이었다. 인간은 놀이를 통해서 세상을 배우고 놀이를 통해서 사회적 관계를 배우면서 성장한다. 놀이는 그만큼 인간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인 것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놀이하는 게 쉽지 않다. 세상을 다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등져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놀이를 할 때만큼 기쁘고 즐겁고, 무엇보다 인간적인 시간이 언제 있었는가 싶기도 하다. 더 이상 놀이에 흥을 못 느끼는 인간은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늘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과 지우개 싸움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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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5. 10. 28. 05:56

조경과 국정교과서

 

교회 주차장 한 켠에 있는 꽃나무들을 손 봤다. 그게 원래 사람 키만큼 크고 뒤쪽으로 퍼졌던 거라 관리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평소 교회 조경을 담당하시는 미국 남편들이 관리하기 너무 힘들다며, 관리하기 쉽도록 손보자고 제안했고, 결국 조경업체를 불러 거대했던 꽃나무들을 관리하기 편하게 아담한 사이즈로 만들어 놓았다.

 

클 수 있는 만큼 뻗어나가던 꽃나무들을 아담한 사이즈로 손질한 이유는 미학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다. 관리하는 사람이 관리하기 편하도록 아담한 사이즈로 만들어 놓았다.

 

요즘 한국에서는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여론이 뜨겁다. 박근혜 정부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국민통합을 위해서 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이 언뜻 보면 온당한 것 같지만, 그것은 매우 독재적인 발상일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국민통합이 내 귀에는관리하기 편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정치적 수사로 밖에 안 들린다.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시키겠다는 것은 꽃나무들을 관리하기 편하도록 아담한 사이즈로 손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시각으로지나온 세상(역사)’를 볼 권리가 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 자신도 자신의 시각으로지나온 세상을 볼 권리가 있다. 그의 눈에 아버지의 독재와 유신은 여느 사람과 다르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나는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믿고 있다. 그동안 매도당하고 있었던 유신, 5.16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 해야 한다. 그게 뭐가 잘못됐느냐고 당장 비난을 받더라도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한다. 그게 정치이다. 그래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런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다. 부모님에 대해서 잘못된 것을 하나라도 바로 잡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1989 MBC 박경재 시사토론)

 

누구나지나온 세상을 자기의 시각으로 볼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도 이렇게 말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의 시각을 남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 자기의 생각, 자신의 견해, 자신의 시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 견해, 시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독재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이야 말로 불통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은 다스리기 쉽도록 관리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타고난존재대로 뻗어나가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생명체에 선천적으로 내재된 자유이다. 이것을 빼앗기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며, 이것을 빼앗는 인간은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인간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다못해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신다. 오히려, 인간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린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런 것을복음으로 생각하는 신앙인이라면, 자유를 빼앗는 일에 동참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투쟁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에게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려 하는가. 어떠한 모양으로든 인간의 자유를 훼손하려 드는 자,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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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5. 10. 21. 08:01

방향제와 난

 

사무실 스팀청소를 한 뒤, 쾌적한 환경에 방점을 찍기 위해 집사람이 방향제를 사다 주었다. 나는 방향제와 난을 보면 군대 생각이 난다. 나는 군생활을 대전 계룡대의 육군본부에서 했는데, 작전처장 장군운전병으로 근무했다. 내가 군대에 입대하기 한 달 전 육군본부 장군운전병의 선발 방법이 바뀌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동원예비군을 총괄하는 동원예비군참모부장(별 두개)이 운전병의 운전실수로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때 동승했던 동원부장 부인도 함께 죽었다. 사고를 낸 운전병은 남은 군생활을 남한산성 영창에서 보냈고, 그 당시 행보관(행정보급관, 원사)은 그 운전병 면회를 자주 다니던 기억이 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육군본부 수송대대는 장군운전병 선발 시스템을 육군훈련소(논산)에서 미리 선발해 훈련시키는 시스템으로 바꾸었는데, 그때 내가 처음으로 그 선발 시스템에 의해 선발 되어 제2수송교육단(대구경산)에서 3주 세단 운전병 훈련을 받은 뒤 육군본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자대 배치를 받은 후, 수송대대에서 두 달 정도 내무반 생활을 하며 장군운전병 실전 훈련을 받은 뒤 전역하는 선임 운전병을 뒤이어 장군운전병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됐는데, 그때 나를 운전병으로 선발한 장군은 육사 26기 김창호 장군으로, 육본의 보직인 작전처장이었다. 작전처장 자리는 군부시대에는 하나회회원이 아니면 절대로 갈 수 없었던 보직이었다. 내가 군생활 할 때는 문민정부(김영삼 대통령)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회 출신이 거의 군대 내에서 사라진 시점이었고, 이 자리는 작전 분야에 정통한 실력파가 오는 자리였다. 그래서 대령때까지 작전 분야에서 착실하게 실력을 쌓았던 김창호 장군이 윤용남 참모총장에 의해 발탁되어 그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김창호 장군과 내가 육군본부 전입동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199546일 같은 날 육군본부로 전입되어 왔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전출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했다. 물론 나는 1997417일에 전역했지만, 김창호 장군은 그 시기에 투스타로 진급하여 15사단장으로 전출되었다.

 

육군본부 장군 운전병은 여러 가지 역할을 감당한다. 보통 군대에서 장군에게는 운전병 외에 요리병과 당번병, 그리고 부관이 따라 붙는데, 육군본부에서는 운전병 혼자서 그 모든 역할을 감당한다. 그래서 운전병 선발 시스템을 미리 뽑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똘똘한 놈 뽑아서 여러 가지 일을 감당시키려 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 보니, 장군 운전병 선발 기준에는 몇 가지가 적용되었다. 첫째, 운전실력이 좋을 것. 둘째, 서울 강남에 살 것. 셋째, 학력이 좋을 것. 넷째, 집안이 건실할 것. (사실, 이렇게까지 잣대를 들이대며 운전병을 뽑아야 하나, 의문이다.)

 

둘째와 셋째 기준 때문에 내가 군생활 할 때의 운전병들은 그만그만한 곳에서 선발되어 왔다. 강남에 사는 친구들을 선발하다 보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기 후배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리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그리고 유학파 출신이 40명 정도되는 장군운전병들 중에 반수를 차지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우리들끼리 연고전 같은 것도 하고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끼리끼리 짝지어 놀고 그렇지는 않았다. 군대이다 보니, 사실 그러한 출신 배경들이 별로 무의미했다. 그리고 내 성격 상 끼리끼리 노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 모든 장군 운전병들과 사이 좋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장군 중에서도 요직에 있는 장군은 운전병과 관사에서 함께 생활을 하는데, 나는 요직인 작전처장 운전병이었기 때문에 장군 관사에서 장군과 함께 생활했다. 계룡대에는 육군본부 외에 공군과 해군 본부가 함께 있기 때문에 장군들이 많이 거주한다(그 당시 한 60명 정도). 그래서 따로 장군들을 위한 식당이 운영된다. 그 덕분에 관사에서 내가 직접 음식을 차리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 모든 살림은 내가 도맡아서 했다.

 

내가 매일 같이 한 것은 관사 청소와 근무복 다림질과 군화 닦는 것과 재떨이 비우는 것과 빨래였다. 그때 하도 매일 같이 다림질 하고 청소를 해대서, 나는 지금까지 다림질 하는 거랑 청소기 돌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별히 재떨이를 비울 때는 마음이 좀 심란했다.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을뿐더러, 재떨이 비우는 일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일이라 매우 생소했다. 우리 집은 술과 담배와 멀리 살았던 집이라 그랬던 것 같다.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관사의 생필품을 사기 위해 마트에 들렀었는데,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샀던 물건이 방향제였다. 그리고 관사에서 화초를 키웠는데 그게 난()이었다. 그 당시에 군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은 난이었다. 그래서 사무실을 통해 들어온 난을 관사에 가져다가 키웠는데, 20개 정도 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을 키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매주 2시간씩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푹 담가 놓아야 하고, 관리를 잘 해줘야 했다. 그렇게 열심히 관리한 난에서 꽃이 피는 날이면 장군이 그 향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사실 그때 속으로, 입을 삐쭉이기도 했다. 난을 키우는데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장군이 난 꽃의 향기만을 좋아하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쁨은 자신의 수고로움의 끝에서 와야 제 맛인데, 남의 수고로움에서 온 기쁨을 가로채는 것은 별로 눈에 선해 보이지 않았다.

 

내 군생활은 매우 특별한 체험이었다. 그 당시 육해공 장군수가 430명 정도였으니까, 전체 일반 사병 중 장군 운전병 숫자는 매우 제한적이었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병으로서 아무리 벽돌을 쌓아도 닿을 수 없는 저 하늘에 있는 ’, 그 별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자리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특별히, 윗사람(상관)을 어떻게 보필해야 하는지를 배웠고, 큰 조직이 돌아가는 법과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물론 군대의 자리와 내 목회의 자리가 달라 좀 안 맞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장군운전병을 통해서 배운 것은 나에게 큰 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군생활 하면서 장군을 모시느라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밤에 잠을 마음 놓고 자 본 적이 없다. 밤마다 자주 지휘통제실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서 보고해야 했고,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장군을 깨어드려야 했다. 나는 한 번도 알람 소리에 잠을 깬 적이 없었다.  그만큼 늘 긴장 속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비염과 근육통증병을 얻어 나왔다. 나는 그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고생하고 있다. 군대에서 얻은 병이라, 그리고 이미 20년이 지난 후라, 군대에서 얻는 병 때문에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에서 몸 건강히 있다 제대하는 것이 최고의 복인 것 같다.

 

나는 방향제와 난()만 보면 군대생각이 난다. 어떠한 물건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기능으로서의 가치만을 지니고 있지 않다. 물건은 때로 기능을 넘어 지난 세월에 대한 매개체 역할을 감당한다. 사람은 그냥 하염없이 옛생각에 잠기기 보다, 어떠한 물건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또는 그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 옛생각에 잠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물건은 단순히 기능을 지닌 상품이 아니라, 때로는 추억의 매개체가 되기 때문에 그 값어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내 삶에 있어 방향제와 난은 이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내 인생의 저 너머를 보게 해주는 타임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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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5. 10. 9. 23:20

나는 어려서부터 결혼하면 아들을 낳고 싶었다. 그런 간절한 소망이 그분께 '심하게' 상달되었는지, 아들을 둘씩이나 낳았다. 사실, 연애할 때 우리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아 키우기로 했었다. 그래서 연애할 때 애들 이름까지 다 지어놓았었다. 아들은 건유, 딸은 유은. 장건유, 장유은. 그런데, 막상 낳고 보니 우리의 소원대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지 못하고, 아들 하나, 또 아들 하나, 그래서 아들 둘을 낳았다.

 

내가 아들을 낳고 싶었던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인 나를 너무 사랑해 주셔서, 나도 아들을 낳아 아버지처럼 아들을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돈독한 가정은 드물다.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억압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애증의 사이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버지와 나 사이는 그렇지 않았다. 이건 내게 주어진 큰 축복인 것 같다.

 

사춘기를 심하게 앓는 아이들을 보면, 대개 아버지와 사이가 소원한 경우가 많다. 나 같은 경우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아서 그랬는지, 사춘기를 건전하게 넘겼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 차 몰래 몰고 나가 친구들하고 드라이브 하고 다니다 경찰(전경)의 불심검문에 걸려 경찰서(파출소)에 한 번 끌려 갔던 거 빼놓고는, 사고친 적이 없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와 사우나를 함께 가는 것이 내 삶의 낙이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70% 정도는 아버지와 사우나를 갔다. 아버지와 사우나를 마친 뒤, 탕수육밥이나 갈비탕 한 그릇 먹고 들어오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탕수육이나 갈비탕을 먹을 때면 그때의 추억에 잠기곤 한다.

 

얼마 전, 큰 아들이 학교에서 가족 그림을 그려왔다. 여덟 살 먹은 큰 아들의 동심이 그려낸 가족 그림은 나의 미소를 자아냈다. 아들의 마음 속에 아버지가 어떠한 존재인지 그대로 드러나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들과 매일 재미 있게 놀아주는 아버지, 자기들에게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언제나 인자하게 대해 주는 아버지,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함께 해주는 아버지, 자기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주는 아버지, 하루에도 몇 번씩 뽀뽀해주는 아버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랑하는 우리 아들, 이쁜 우리 아들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아버지, 매일 같이 품에 끌어 안고 기도해 주는 아버지, 잘못했을 때 호되게 혼 내지만 이내 가슴에 끌어 안고 위로해 주는 아버지,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수퍼맨처럼 해결해 주는 아버지, 무엇보다 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아버지 아들인게 너무 고마워라며 미소를 건네는 아버지.

 

아들은 바로 그 미소를 아버지의 가슴에 그려 넣었다.

 

나는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집사람에게 늘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이렇게 천년만년 살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어디 그런가.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뿔뿔이 헤어질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지금 이순간을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해 향유하는 것뿐이다.

 

누군가의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는다는 것은 복된 인생이다. 우리 아버지의 인생이 복된 이유는 아버지가 내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소망은 내가 아들의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는 것이다.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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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10. 8. 05:37

야곱의 축복 II

ㅡ주권자와 장자, 그리고 그리스도인ㅡ

창세기 64

(창 49:8-28)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무리 예언을 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 예언을 이루는 일은 절대로 아무런 노력이나 어떠한 시련 없이 그냥 성취되지 않는다. 야곱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열 두 아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뜬금 없이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어가는 삶의 여정은 험난하다. 아브라함의 삶의 여정과 이삭의 삶의 여정, 무엇보다 야곱의 삶의 여정이 그것을 말해 준다.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고, 인내와 고통의 연속이다. 그 험난한 삶의 여정 가운데서 그들을 지켜 준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그들은 일찌감치 걸어가야 할 그 길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주의 길을 가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주의 길을 가는 자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더욱 주의 길을 가는 일이 쉽지 않다. 사방이 막혀 있을 때, 오직 바라 볼 것이 하늘 밖에 없다는 것은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기도 하다.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하다.

 

야곱은 그의 아들들 앞에 놓쳐 있는 어려움을 알았다. 그 어려움을 막연히 안 것이 아니라 모든 오감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주의 구원이 없다면 결코 걸어갈 수 없는 길, 주의 구원이 있기 때문에 기어코 갈 수 있는 그 길. 야곱은 열 두 지파를 이루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해 갈 자녀들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빌고 또 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자녀들의 발등에 불빛이 되어주는 건 그 무엇보다 아버지의 당부와 삶이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부모님을 떠 올리며, 그분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생각해 본다.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은 앞으로 맞이 하게 될 어려움 앞에서 무엇보다 아버지의 구원의 간구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야곱의 열 두 아들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품어야 할 기도문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긴 말로 우리의 형편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 한 마디만 하면 된다. “여호와여, 나는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문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우리의 모든 형편을 우리보다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이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강한 손을 펴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겠는가.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 드릴 수도 없고, 기도의 응답도 바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으며, 희망 가운데 살 수 있는 것이다.

 

자녀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자녀를 양육한 부모는 그 누구보다 자녀에 대해서 잘 알 수 밖에 없다. 야곱은 어려움 가운데 열 두 자녀들 낳아 키우며 그들 각자의 성격과 성향을 꼼꼼히 살펴 보았다. 열 두 아들들을 향한 아버지 야곱의 축복은 뜬 구름 잡은 축복이 아니라, 바로 모태에서부터 살펴본 자녀들의 성격과 성향을 토대로 한 매우 구체적인 축복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28).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야곱의 축복 중에 유다와 요셉에게 한 축복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역대상 저자는 야곱이 유다와 요셉에게 한 축복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2). 성경은 유다를 주권자, 요셉을장자로 각각 부른다.

 

주권자장자는 기독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 복음서와 (바울과 일반) 서신서는 예수를 주권자(주님)’장자(맏아들)’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권자 유다에게 내려진 축복과 장자 요셉에게 내려진 축복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주권자이시며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 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야곱은 유다가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고 축복한다. 찬송의 대상이 되는 일은 매우 영예로운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구원사역)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나 찬송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나의 삶에 어떠한 이로운 영향을 실제적으로 베푼 대상에 대해 찬송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예배자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찬송의 대상이 되는 이유와 그리스도인이 찬송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으로서 찬송 받으시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찬송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구원사역)을 최선을 다해 이 땅 위의 사람들에게 베푼다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함과 더불어 그의 제자들(a follower of Christ)을 찬송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과연 이 땅에서 찬송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좀 더 편안한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과연 이 땅에서 칭찬 받고 있는가? 사람들의 호감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물론 복음의 속성상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심판 그 자체가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복음이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우리의 삶으로 온전하게 전한다면 세상이 우리를 칭찬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굳이 여러 가지 예를 들지 않더라도, 현재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이미지는 바닥을 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찬송의 대상이 되신 이유는 그의 신분이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자동적으로 찬송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은 그 찬송의 대상에게서 어떠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찬송 받으시는 이유는 그의 십자가 사역 때문이다. 그의 십자가 사역이 없었다면, 그에게 과연 부활이 있었을까? 부활이 먼저가 아니라, 십자가가 먼저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부활을 믿고, 자기 자신을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줄 아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희생은 자기 연민이나 의협심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부활의 은총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희생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남들 위에 군림하는 주권자(주님)이 아니라, 남을 위해 생명까지도 내어놓는 섬기는 주권자였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그리스도인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이다. 군림하는 자가 받는 찬송은 억압된 찬송이지만, 섬기는 자가 받는 찬송은 자유한 찬송이다. 그리스도인은 찬송 받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 주었기 때문에 찬송 받는 것이다.

 

야곱은 주권자로서의 유다에 대한 축복뿐만 아니라, 풍성한 소출에 대한 축복도 한다. 빈곤한 자는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제적 가난을 말하지 않는다. 오직 돈으로만 그 가치를 평가 받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이나, 야곱의 축복은 단순한 물질적 풍요를 말하지 않는다.

 

야곱은 유다에게 다름과 같은 축복을 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을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11-12). 포도나무가 얼마나 지천에 널려 있으면 나귀나 암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에 매겠는가. 포도주가 얼마나 풍성하면 빨래를 포도주로 하겠는가. 포도주가 얼마나 풍성하면 그것을 매일 마셔 눈이 포도주처럼 붉겠는가. 우유가 얼마나 넘쳐나면 그것을 매일 마셔 이빨이 다 하얘질 정도가 되겠는가.

 

포도나무와 포도주, 그리고 우유를 통한 비유의 축복은 모두 유다에게 임할 풍성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풍성함은 하나님이 유다에게 베푸신 은혜를 상징한다. , 이 풍성함은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 계신다는 징표가 된다. 풍성함을 단순히 물질적으로만 환산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 안 되는 징표일 수 있으나, 유다 지파에서 나온 다윗의 이야기나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 진짜 풍성함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유다에게 임한 풍성함을 가장 잘 표현한 신약의 말씀은 이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우었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4:11-13).

 

사무엘 상하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는 바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그 말씀과 일치한다. 왕이 되기까지, 그리고 왕이 된 후에도 엄청난 시련을 겪었으나 풍성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분만을 바라 보았다. 복음서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모든 인류를 배부르게 먹이시는 생명의 양식이셨지만, 머리 둘 곳 조차 없이 가난한 삶을 사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결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으셨다. 그는 늘 하나님 안에 머무셨다. 이것의 그의 풍성함이었다.

 

그리스도인의 풍성함은 세상이 말하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의 풍성함이다. 하나님 안에 머무는 자는 가난할지라도 풍성한 자요, 하나님 안에 머물지 못하는 자는 부자라 할 지라도 빈곤한 자이다. 유다가 받은 풍성함의 축복은 그가 언제나 하나님 안에 머물게 되어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거라는 축복이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자는 언제나 풍성한 은혜를 누린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사야서는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43:1-2).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세상을 향해 자기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미 유다에게 내린 야곱의 축복과 같은 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붙드시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이것은 유다에게서만 나타나는 축복이 아니라, 이제 살펴볼 요셉에게도 나타나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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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5. 10. 7. 02:34

후배의 죽음

 

아끼던 대학 후배가 세상을 떠났다. 뇌종양 때문에 고생하다 갔다. 뇌종양이 발병한 뒤, 그는 행동하는 것과 말하는 것에 큰 제약을 받았다. 마음 먹은 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마음 먹은 대로 말하지 못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재활훈련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듯 했지만, 결국 병이 악화되어 생사를 달리하고 말았다.

 

지난 봄에 있었던 연회(Annual Conference) 참석 차 LA에 갔다가 거기서 멀지 않은 Irvine에 살고 있던 후배를 병문안 갔었다. 나는 단순한 병문안이 아닌, 함께 예배 드리고 성만찬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말씀도 열심히 준비해 갔고, 간이 성만찬 기구도 챙겨갔었다. 그리고 함께 정말 이보다 더 간절한 예배가 없을 정도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 드리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었다.

 

이 친구를 알고 있는 대학 동기, 선후배 중 세상을 떠나기 전 이 친구와 함께 예배 드리며 성만찬을 나눈 사람은 나 밖에 없는 듯 하다. 생명에 큰 위협을 느끼거나, 생명이 저물어 가는 한 사람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은, 언제나 큰 축복이다. 나는 목사로서, 이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다. 예배를 집전하고, 함께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그리고 함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떼고. 그 후,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도 나누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나에게는 그 친구의 간절한 소망인 생명을 소생케 하는 능력이 없었다. 생명의 소생이 절실한 상황에서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부끄러움과 절망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소생이 절실한 사람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너무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 순간,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를 몸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넘어선 신적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참 인간인 예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넘어서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내려 놓는 케노시스의 영성을 보여주었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인간이 되고자 하는 신’. 결국 세상을 구원한 것은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되고자 한 신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병마 앞에 결국 생명을 빼앗긴 후배를 보며, 그가 경험한 지극히 인간적인케노시스를 보며, 조금이라도 신이 되고자 했던 욕망은 모두 부끄러운 일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우리는 모두 그가 간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가 가지 않게 될 길로 떠난 외로운 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게 될 길은 먼저 떠난 선구자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자. 우리 곧 다시 만나게 될 테니. 우리도 곧 그처럼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를 저 인생의 바닥에서 체험하게 될 테니. 그러나 흐르는 눈물을 애써 멈추지는 말자. 눈물은 그가 우리의 가슴에 남긴 사랑의 흔적이니.

 

사랑하는 세정아, 이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그곳에서 편히 쉬렴. 거기서 우리의 평안도 빌어주렴. 우리 곧 다시 만나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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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5. 10. 3. 03:23

희락당(喜樂堂)과 사현(四賢)

 

나는 두 개의 호()를 쓴다. 희락당(喜樂堂)과 사현(四賢)이 그것이다.

 

희락당은 원래 우리 아버지의 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가 그 호를 이어 쓰겠다고 집안 어른들에게 말씀 드리고 그 호를 내 것으로 삼았다.

 

희락당이라는 호는 외할아버지 오지섭 목사님께서 아버지에게 지어주신 호인데, 마태복음 59절의 말씀에서 왔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희락당의 뜻은 화평케 하는 자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이 호의 뜻대로 화평케 하는 분이셨다. 유머가 넘치셨고, 어딜 가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하셨다.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 아버지와 함께 신앙생활 하신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를 사랑의 목회자로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 사랑의 최대 수혜자는 나였다(물론 형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나는 늘 마음이 따뜻했다. 그 사랑 덕분에 인생의 어려운 시기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고, 그 사랑 덕분에 나도 아버지처럼 인자한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도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인생 길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린 나의 눈에도 선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목회에 대한 좋은 생각을 마음 속에 담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을 때 기꺼이 헌신할 수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호 희락당을 내 호로 삼은 이유는 나도 아버지처럼 사랑의 목회자가 되기 위함이다. 아버지가 가정을 화평케 하시고, 교회를 화평케 하시고, 아버지가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임을 화평케 하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이제 불혹과 지천명 사이의 인생 여정에 들어서니, 인간의 삶에 있어 화평(평화)’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더욱더 깨닫는다. 인간의 삶의 조건 중 화평(평화)’만큼 중요한 게 없는 듯 하다. 화평치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화평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관계(인간과 인간, 하나님과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는 일만큼 힘들지만 보람찬 일도 없는 것 같다.

 

이런 깨달음과 함께 관계를 화평케 하려면 넉넉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만든 호가 사현이다. ‘()’는 동서남북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모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서남북 모든 면에서 넉넉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 또는 소망이 담겨 있다.

 

()’은 원래 어질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한자어를 분석해 보면 거기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자는 신하를 뜻하는 ()’자와 구하다는 뜻을 가진 ()’, 그리고 재물을 뜻하는 ()’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이다. 이는 임금이 신하(인재)를 구하는 데 재물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자를 몇 가지로 풀이해서 적용하고 싶다. 우선, ‘어질다는 것은 모든 것에서 넉넉하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인격이나 지식, 지혜 등이 넉넉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고 싶다. 또한 무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유형적인 것에서도 넉넉해야겠다는 생각에, 재물도 좀 넉넉하게 많았으면 좋겠다는 뜻으로도 쓰려 한다. , 모든 것이 넉넉한 사람이란 인격, 지식, 지혜, 그리고 재물등 인간이 어질게 살아가고 화평케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넉넉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현라는 호를 지었다.

 

인생을 살아보니, ‘화평케 하는 일이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평케 하려면 인격도 성숙되어 있어야 하고, 상당한 지식도 갖추어야 하며, 사람의 마음과 상황을 꿰뚫는 지혜도 필요하고, 또한 재물도 어느 정도 필요함을 느낀다.

 

나는 인생을 복되게 살고 싶다. 덕을 쌓는 인생을 살고 싶다. 내가 가진 두 개의 호는 그러한 소망이 담겨 있다. 화평케 하는 자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넉넉하게 하셔서 그 소임을 이룰 수 있도록 지키시고 도와주시길, 간절히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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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5. 10. 1. 23:14

이것은 전쟁의 흔적일 수도 있고,

홍수를 대비한 토목 공사의 흔적일 수도 있다.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이것은 땅 속 나라에서 터뜨린 핵폭탄이 남긴

버섯구름일 수 있고,

비를 막기 위해 건설된

우산 모양의 가리개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우리가 볼 수 없는 저 땅 속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건은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진다.

저것을 먹어버릴 생각만 하는 자들에는

결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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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5. 9. 25. 22:35

어느날, 이웃집 고양이가 우리집 화단에 침입해 땅을 파댔다.

아이들은 땅 파고 있는 고양이를 창문으로 봤다.

며칠 뒤, 우리집 화단에 이렇게 예쁜 꽃이 피었다.

갑자기 핀 꽃을 보며 예쁘다며 어쩔줄 몰라 하는 아이들이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이 꽃 누가 심은거야?"

엄마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큰 아들 건유가 "나는 알아"라며

"이 꽃은 바로 지난번 땅 파던 고양이가 그때 심어놓은 거"라 한다.

그렇구나. 그래서 이 꽃은 이토록 동심처럼 예쁜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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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5. 9. 24. 04:35

야곱의 축복 I

ㅡ도덕성과 영성ㅡ

창세기 64

(창세기 49:1-7)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복음성가로 만들어져 교회의 예배 시간에 널리 불려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이다. 말씀도 유명세를 타는 말씀이 있다. 대개 예배(또는 예전)에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자주 사용되는 말씀은 유명세를 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찍이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예전)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그들은 종교개혁의 내용을 예배(예전)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했다. 루터는 자신의 종교개혁 사상에 바탕을 둔 찬송가를 많이 지었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는 종교개혁을 더 효과적으로 해나갈 수 있었다. 그 중 대표되는 찬송가가 바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이다.

 

야곱의 축복은 우리가 노래로 부르는 것만큼 달콤하지만은 않다. 이 말씀은 복 많이 받아라고 외치는 단순한 축복이 아니다. 이 말씀은 차라리 예언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다. 여기에는 축복뿐만 아니라, 저주, 심판 그리고 약속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야곱이 아들들을 모두 모아놓고 죽기 전에 풀어놓는 넋두리가 아니다. 이것은 그의 온 생의 영적 능력을 담은 예언적 유언이다. 아버지 야곱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의 말씀이다.

 

성경에서 예언이란 점치듯이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행위이다. 점치는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 자신의 미래, 즉 자기 자신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관심을 둔다. 자기의 미래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의 미래가 중요하다. 점치는 사람들은 숙명론에 빠지지만, 예언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린다.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인데,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지리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나아갔던 모세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차원에서 하나님께 접근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접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야곱의 축복이 야곱의 인생 말년에 일어나는 사건 중 하나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와 그 말씀을 듣는 자는 동일한 수준에 서 있어야 한다. 이들이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빚어지지 않았다면, 대언하는 자나 그 말씀을 듣는 자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없게 된다. 둘 중 하나만 모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히 전해지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을 통해 아들들에게 대언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분히 빚어졌다는 뜻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들들에게 대언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2). 여기에는 반복법과 대구법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어법이 사용되는 이유는 지금 야곱이 전하고자 하는 예언이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이야기는 들어야한다. 그런데 이 듣는다는 행위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각기관 중 귀만큼 허술한 것도 없다. 인간의 귀는 절대로 혼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귀는 마음과 함께 작동한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문제는 그래서 지리의 차원(거리의 차원)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인 것이다. 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거나,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을만한 도덕성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인간의 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야곱의 축복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험난한 세월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난 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도덕적이고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시점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도덕성과 영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결코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 전달되는 야곱의 자녀들이 장자 르우벤과 두 형제 시므온과 레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에게 전해지는 예언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야곱의 축복이라 할 수 있겠는가.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이다.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장자가 갖는 특권은 대단했다. 장자는 아버지의 권위를 그대로 불려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보다 물질적인 부분에서도 두 배를 더 받았다. 장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명예이고 특권이었다. 르우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야곱은 장남 르우벤을 이렇게 평가한다.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3).

 

여기까지만 보면 르우벤은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아버지 야곱의 말은 가슴 아프다. “…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니리…” 탁월해야 마땅한 사람이 탁월하지 못하게 될거라는 예언이다. 왜 이렇게 르우벤은 순식간에 명예와 특권을 잃어버리게 됐을까?

 

야곱은 르우벤이 이렇게 명예와 특권을 잃어버리게 된 까닭을 우선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르우벤이 물의 끓음 같았다고 말한다. 물이 끓는다는 것은 일정한 범위를 넘어선다는 뜻인데, 르우벤의 인생에 있어 그러한 일이 있었다. 야곱은 비유적으로 설명한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바로 르우벤과 빌하(야곱의 부인 중 한 명)의 간통 사건이다.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4).

 

르우벤에게 있어 지우고 싶은 흑역사였지만, 이 사건이 가지고 온 여파는 잔인했다. 우선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리고 빌하의 자녀들이자 자신의 동생들인 단과 납달리와도 관계가 소원해졌다. 무엇보다 장남으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동생들에게 권위 있는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판 사건 때의 일이다. 요셉을 죽이지 말자는 르우벤의 말을 귀담아 듣는 동생들이 없었다. 결국 그 사건에서 르우벤은 소외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실질적 장자의 축복이 동생 요셉에게로 돌아갔다. 장남에게 돌아가야 할 두 배의 축복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이후 역사에서도 르우벤 지파는 별 볼 일 없는 지파로 역사에서 주목 받지 못하고 스르르 사라진다. 르우벤 지파는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요단 강 동편에 자리를 잡아 정착한 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나 왕 또는 예언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지파로 그 지도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르우벤은 도덕적이지도 못했고 영적이지도 못했다.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한르우벤은 결국 물의 끓음 같지선을 지키지 못하고 넘어서는 바람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도덕은 인간의 삶을 얽어 매는 족쇄가 아니라 삶을 지켜주는 안전띠이다. 도덕은 삶을 질주하고 있는 인간들이 서로 부딪쳐 치명적인 사고를 내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안전거리이다. 도덕성과 영성은 동전의 앞 뒤 면과 같아서 서로를 분리해 낼 수 없다.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부모의 물건(소유)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잠언 28:24).

 

다음으로 이어지는 야곱의 축복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함께 내려진다. 이 둘이 따로 예언을 받지 않고 함께 받는 이유는 이들이 무엇보다 여동생 디나의 강간 사건에 대한 보복의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5). 여기서 이들이 형제라고 언급되는 이유는 엄마가 같은 형제’(실제로 이들은 엄마가 같은 형제이다)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어떠한 일을 위해 한 통속이 되어 동맹또는 연합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평가하는 단어는 매우 과격하다. ‘이라는 말과 폭력이라는 말이 쓰이는데, 이것은 이들의 행동을 매우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 용어이다. 이들은 자신의 여동생 디나가 강간 당한 것에 대하여 복수하기 위해 둘이 한 통속이 되어 무자비한 폭력을 저질렀다. 비도덕적인 일을 당한 것이 비도덕적인 일을 수행하게 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탐욕과 미움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의 수단을 쓰는 것은 그 어느 상황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이렇게 못박아 말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6절 전반부). 그들의 모의와 그들의 집회는 도덕성과 영성을 벗어나는 모의와 집회였다. 그들의 모의와 집회는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는폭력 그 자체였다. 폭력에 사로 잡힌 자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폭력을 저지르는 자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땅(나라)에 발 붙일 곳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의 도덕성과 영성을 잃고 폭력을 저지른 시므온과 레위에게 내려진 예언은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는것이다. 폭력성이 짙은 자들은 서로 한 통속이 되도록 놓아두면 안 된다. 이들이 서로 모여 모의하고 집회를 갖게 하면 안 된다. 폭력성이 짙은 자들은 서로서로 떼 놓아야 한다.

 

야곱의 예언은 성취된다. 레위 지파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48개 성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고(21), 다른 지파처럼 기업을 물려 받아 그곳에서 모여 살지 못한다. 신명기서에서 관찰할 수 있는 바, 모세가 각 지파를 축복할 때에 시므온 지파가 빠진다. 그리고 결국 시므온 지파는 자기에게 할당된 기업을 지켜내지 못하고 유다 지파에 흡수된다. 이렇게 레위 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야곱의 예언대로 다시는 서로 연합하지 못하게 된다.

 

야곱의 축복은 야곱의 사사로운 복 빌어 줌이 아니다.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며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예언자로 거듭났다. 야곱의 아들들도 험난한 세월을 그냥 허송 세월로 보내지 않았다.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아버지의 예언(축복)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났다.

 

만약 그들이 예언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도 그 말씀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죽을 날을 얼마 안 놓아두고, 아들들을 모아놓고 축복한답시고 저주와 심판을 퍼부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그렇게 저주와 심판을 퍼붓고 있는 아버지의 말씀을 곱게 듣고 있을 아들들은 더더군다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예언했고, 아들들은 들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 아버지의 사사로운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고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덕성과 영성에 대하여,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폭력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가 아니라,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묵상하게 하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축복안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향해 당당히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예언) 안에 거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저주와 심판 같아 보일지라도 멸망이 아니라 생명이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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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5. 9. 20. 00:32

J의 달밤

 

달 밝은 밤

나는 분명 발가벗고 바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 중 아무도

나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건 미스터리가 아니다

곁눈질조차 없던 그 거리에서

나는 뚝 뚝 녹아 내리는 달빛을

온 몸에 받으며

달빛 뒤로 숨을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건 슬픈 일이다

미안해서 슬픈 게 아니라

잊혀지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내가 사는 세상에 소풍 오는 천사들은 없었다

나에게 눈길을 주던 그 처녀는

장님이 되어버렸고

나에게 말을 걸어주던 그 청년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상대방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 때

인간은 비로소 늙는다

 

달 밝은 밤 발가벗은 채로

나는 얼마나 더 힘들어야 하나

얼마나 더 부끄러워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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