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22. 4. 26. 12:23

세상의 모든 나무

 

아무것도 아닌 새가 된다는 것은

결국 더 이상 허공을 날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

 

허공에 서 있는 전봇대에 부딪히는 게 무서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일

 

허공 자체가 공허하므로

공허를 뒤집어쓰는 것이

번개에 맞아 기절하는 것보다

아프다는 일

 

아프면 어때

 

허공에는 어둠이 없다

햇살이 없는 것보다 어둠이 없는 것을

상상하기는 힘든 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서 사는 게

뉴스를 보지 않고 사는 것보다

지루한 일

 

허공을 가르는 바람만이

나무의 손끝을 건들 수 있다는 일

 

나에게 손짓하는 것은 오직

바람에 흔들리는 세상의 모든 나무들뿐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옥  (0) 2023.09.14
가지나무  (0) 2022.11.27
밤의 비  (0) 2021.12.31
틱틱틱  (0) 2021.12.30
마음  (0) 2021.10.23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4. 26. 12:22

시내산에 오르기를 간구하는 기도

(출 19:1-6)

 

주님,

시내산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시내산으로 부르시기에

우리는 시내산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그곳에서 주님과 언약을 맺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으로 가득한 삶, 시간인 줄 믿습니다.

시내산에 올라 주님과 언약을 맺고

주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약속의 성취가 되길 원합니다.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신비와 아름다움이 가득한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시내산으로 매일 불러주시고,

우리는 그 음성을 듣고 지켜, 매일 시내산을 오르게 하옵소서.

시내산의 완성이시고 성취이신 십자가에 올라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4. 26. 12:20

시내산에 오르라

(출애굽기 19:1-6)

 

1. 출애굽기 19장부터 24장까지를 ‘시내산 문단(Sinai Pericope)’라고 부른다. 출애굽기 자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단이지만,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통틀어서도 가장 중요한 문단이다. 시내산 문단의 이야기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언약(covenant)’이다.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2. 애굽을 떠난 지 3개월이 지나, 이스라엘은 드디어 시내산에 도착한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일차 목표는 시내산에 가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가야하는 목표를 설정한 것은 그들의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5:1).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뜻이다.

 

3. 이것은 우리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이 바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시간(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와도 상관 있는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요소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성 어거스틴이 아주 큰 공헌을 했는데,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매우 인격적이다. 이것을 시간의 인격성이라고 한다.

 

4. 함석헌은 이러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 글이 글 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는 역사철학은 성경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13쪽).

 

5. 좀 어려운 말 같지만, 성경을 매일 읽는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지난 3개월의 여정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에게 지난 3개월의 여정은 시간이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흘러간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 자체였다. 그들의 시간에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인격이 베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는 우리의 시간, 우리의 삶의 역사 가운데 현존하셔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신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감사한다는 뜻이다.

 

6.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는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극명하게 갈리는 법이다. 비신앙인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갈 목표를 세우지만,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갈구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갈 목표를 세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목표를 자의적으로 세우고 그 일을 감행했다면 그들은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애굽에서 어떻게 가까스로 나왔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지난 행보를 보면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비굴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7.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나의 개인적인 바람이라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의 성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삶인가?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말라. 시간(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간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뜻이고, 그것을 우리는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 언약은 성취된다. 언약의 성취를 향해서 나아가는 삶만큼 의미 있는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스라엘의 지난 3개월의 여정은 때론 눈살을 찌푸리게도 했지만(물이 없다고 먹을 게 없다고 모세와 하나님께 퍼 부은 그들의 분노를 보라), 그들의 여정은 결국 의미 있는 것이다. 그들이 시내산에 도착한 것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이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도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이나 자녀들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시간(삶/계획)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을 간구하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자녀들의 앞날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획할 때, 어떤 학교를 선택하고 어떤 직업을 선택할 때도, 우리가 계속 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세우는 일이다. 우리 이민자들은 이것을 더 치열하게 물을 수밖에 없다. 삶이 더 불안전하고 고달프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앞날을 물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민자들은 대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을 세울 때도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먼저 간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바탕으로 세워 나가는 것이 좋다. 그래야 우리의 남은 삶의 여정도 복되고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바탕이 된 삶은 단순히 내가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가 되기 때문이다.

 

9.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신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이 3-6절의 말씀이다.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그들의 시간 속에, 여정 속에 하나님의 인격이 드러났다는 뜻)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10. 여기서 중요한 구절은 1)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구절과 2)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라는 구절과 3)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구절이다. 언약 체결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듣고 지키는 것’이다. ‘듣고 지킨다’는 뜻은 무엇일까? 이것은 실행의 문제라기 보다는 태도의 문제이다. 태도의 문제라는 뜻은 마음의 문제라는 뜻이다. 기계적으로 무엇인가를 실행하는 것은 본인이나 상대방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 즉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기계적으로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떠한 태도로, 어떠한 관계 속에서 주일에 교회에 나왔느냐가 중요하다.

 

11. 결국 ‘듣고 지킨다’는 것은 사랑의 문제인 것이다. 율법의 가지 수는 613개로 알려져 있지만, 613개의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기계적으로 다 지킬 수도 없다. 다만, 그것을 ‘듣고 지키려는 태도’, 즉 그것을 말씀하신, 그것을 주시는 분에 대한 우리의 마음 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이렇게 표현하신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율법 613개를 아무리 잘 지켜도 그것이 그 사람의 의가 되어 그를 구원하지 않는다. 율법 613개를 지키지 못했어도, 그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것을 어여삐 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이 선포되고 있는 사람들은 613가지의 율법을 칼 같이 지킨 사람들이 아니라,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해 정죄 받고 손가락질 당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했던 소위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듣고 지키는 것’, 다른 말로, 사랑, 사랑, 사랑이다. “하나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하십시오!”

 

12. 우리가 듣고 지킬 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게 굉장히 특별한 용어이고 표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는 ‘거래를 통해 가지게 되는 무엇’ 정도로 이해될 뿐이다. ‘나 저거 내 소유로 만들고 싶어’라는 말처럼 개인 프라퍼티(private property),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엇인가 정도로 이해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소유는 이러한 개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13. 본문에 나오는 ‘소유’는 히브리어 ‘쎄굴라’를 번역한 용어이다. 쎄굴라는 ‘왕국의 제2인자, 총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소유(쎄굴라)에 대한 부연설명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다. 소유가 된다는 것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뜻이다. 쎄굴라, ‘왕국의 제2인자, 총리’라는 말을 들으니까, 떠오르는 어떤 인물이 있지 않은가?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이 떠오르고,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다니엘이 떠오른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의 소유(쎄굴라)가 된다는 뜻은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14. 물론 우리는 여기서도 오해하면 안 된다. 요즘처럼 출세지향에 대한 욕구가 충만한 시대에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성공’이라는 말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국의 총리로서의 요셉과 다니엘의 성공적인 삶만 볼 뿐, 그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할 수 있다. 하나님의 소유(쎄굴라),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거라는 말은 요셉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서 실행하는 주님의 동역자로 살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뜻은 군림하고 다스리고 통치하는 권력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 섬기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15. 요즘,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려고 시내산에 오르는 사람이 있을까?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주와 또는 샌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복을 받았기에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고,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거룩함에 닿아 있는 사람, 인간다움의 최고 형태를 맛본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16. 우리는 성경을 보편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믿는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부르셨듯이, 우리도 시내산으로 부르신다고 믿는다. 우리의 삶은 늘 시내산으로 이끌림을 받는 삶이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시내산, 그곳은 성소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그 경계를 넘으면 죽는 곳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배타적인 게 아니라 구별되는 것이다. 그곳에 이르면, ‘그것화’되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한 곳에 이르면, 거룩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경계를 넘으면 죽는다’는 것은 경계를 넘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와 같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 시내산에 이르고 그곳에 오른다는 것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17. 그 경계를 넘으면 죽는 곳, 그 경계를 넘으면 이전의 삶은 죽는 곳, 시내산, 성소,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곳, 이스라엘은 그곳에 도착하여 그 경계를 넘어서 그곳에 계신 거룩한 하나님을 만났다.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찌질한 백성이 아니다. 그들의 어제는 경계를 넘으므로 죽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유로, 제사장 나라로, 거룩한 백성으로 새로 태어났다. 시내산에 오른다는 것은 이렇게 엄청난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시내산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시내산에 오르라. 우리의 삶은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놀라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처럼 아름다워지게 될 것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  (0) 2022.05.11
우리들의 십계명  (0) 2022.05.06
평강이 필요해  (1) 2022.04.22
샬롬은 어떻게 오는가  (0) 2022.04.13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0) 2022.04.05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4. 22. 09:01

평강을 간구하는 기도

(학개 2:1-19_

 

주님, 우리에게 평강이 필요합니다.

평강 없이 우리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라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주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겠사오니,

우리 모두 힘을 내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 성전을 잘 지어나가게 하옵소서.

허물어진 성전을

사흘만에 다시 세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4. 22. 08:59

평강이 필요해

(학개 2:1-9) 

 

1. 질문: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인가 다른 하나님인가? 구약은 기독교의 성경인가, 아니면 신약만 기독교의 성경인가?

기독교 역사에서 마르키온이라는 괴짜 신학자가 출현한 적이 있다. 아직 기독교 신학이 정교하게 다듬어지기 전이라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시작된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주장을 했던 사람 중 하나이다.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구약의 하나님은 폭력과 보복의 신이지만, 신양의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르키온은 구약성경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약에 등장하는 구약적 요소도 다 빼 버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마르키온 성경을 만들었다.

 

2. 또한 마르키온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모습은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에만 집중했다. 마르키온의 이러한 생각은 가현설(도케티즘/docetism)으로 발전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신적 존재는 절대로 죽음을 맛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마르키온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영지주의 기독교는 그렇게 탄생했다.

 

3. 정통 기독교는 마르키온의 이러한 사상을 물리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뿐 아니라 인성을 동등하게 고백했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기독교인의 성경이다. 우리는 신약의 복음서와 바울 서신만 읽는 사람들이 아니라 구약성경도 열심히 읽는 사람들이다. 하늘의 것을 사모하지만, 이 땅의 일들을 남몰라라 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날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날아가는 존재이다.

 

4. 목회를 하면서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매우 편식한다는 것이다. 거의 20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마르키온 사상에 물든 것 같이, 기독교인들이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반 성도들뿐 아니라 목회자들도 복음서와 바울 서신 설교는 많이 하지만, 구약 설교, 구약에서도 특히 예언서 설교는 잘 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매우 기이한 일이다.

 

5. 그래서 나는 언제나 구약과 신약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목회했다. 신약을 통해서만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구약을 통해서도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특별히, 예언서 공부뿐만 아니라 예언서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편식하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게 어려운 것처럼 성경 말씀을 편식하면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난 사순절 동안 12소예언서를 묵상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어떤 분은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소예언서를 이렇게 자세하게 본 적이 처음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소예언서를 가까이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소예언서를 가까이하는 시간을 가져서 매우 신선했고, 좋았습니다.)

 

6. 소예언서는 호세아로 시작해서 말라기로 끝난다. 호세아 때만 해도 아직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았을 때라,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호소의 목소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역사가 변해, 이스라엘이 망하고 포로생활을 한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질곡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성전’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7. 우리가 함께 읽은 학개서의 말씀은 명백하게 ‘성전 건축’을 촉구하고 있다. 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든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8. 학개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언의 말씀이다. 이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을까? 같은 시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에스라서를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던 일이다. 그런데, 에스라서에 보면 그 일을 진행하다가 성건 건축을 방해하는 자들에게 막혀 주춧돌만 놓고 건축을 중단했다. 그리고 20년 정도 지난 후에,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성전 건축을 마무리 지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9. 주춧돌을 놓고 20년이 지났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성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다’라고 성전 건축하는 일을 손 놓고 있었다. 학개 선지자는 그것을 나무라면서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든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괜히 찔리는 말씀이다. 판벽한 집이란, 잘 지어진 집을 말한다. 학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그렇게 잘 지어진 집에서 두 다리 뻗고 잘 살고 있으면서, 폐허가 된 성전은 언제 건축할 것이냐?’

 

10. 왜 이렇게 학개 선지자는 강력하게 성전 건축을 촉구하는 것일까? 우리가 살면서 가장 힘든 때가 언제인가? 누군가로부터 버림 받았을 때, 더 정확히 말해서는 사랑하고 신뢰하던 사람으로부터 버림 받았을 때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아이들은 평생 큰 트라우마 가운데 산다. 또 버림받을까봐 누군가를 선뜻 사랑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받고 있다’는 감정, 또는 확신이 들도록 서로 보살펴 주는 것이다.

 

11.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충격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하는 트라우마였다. 포로기 때를 배경으로 하는 에스겔서 같은 예언서를 보면, 이 트라우마를 조심스럽게 다르고 있다. 나라가 망하고, 무엇보다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집단으로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데, 그 트라우마의 원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한 현실이었다. 힘센 이방민족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을 불사르고 성전을 때려부수고 주민들을 죽이고 잡아가고 그래서 가족끼리 생이별을 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다.

 

12.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70년 간의 포로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일군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지만, 그들 가운데는 여전히 냉소적인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와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도비야를 비롯한 훼방꾼들이 성전 건축하는 것을 방해하는 바람에 그나마 좀 잘해 보려는 마음에 찬 물을 끼얹었다. 거기다가 그들이 냉소적인 마음을 가진 또다른 이유는 포로에서 귀환하여 다시 세우려 했던 성전은 그 이전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 아주 보잘것없이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전을 건축하려 한 일을 비아냥거리며, ‘보잘것없고 작은 일의 날’이라고 삐쭉 댔다.

 

13. 이런 상황 속에서 학개 선지자가 ‘성전 건축’을 촉구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성전이라고 하는 건물을 지으라는 뜻이 아니다. 포로로 귀환한 이스라엘은 의구심을 가졌다. 자신들은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하나님도 자신들과 함께 이곳 예루살렘에 돌아오셨을까?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보며 그들은 도저히 그곳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지으려고 노력했던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 정말 보잘것없이 초라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렇게 초라한 성전에 하나님이 계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4.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큰 것을 보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에서 가치를 찾기 힘든 세상이다. 백향목으로 휘황찬란하게 지은 솔로몬 성전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거주하셨을 거라고 믿었지만, 그에 비해 보잘것없이 초라했던 스룹바벨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리라고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주저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렇게 보잘것없이 초라한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주하실 리가 없다 생각하며, 성전 건축하는 일을 차일 피일 미루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라면서 말이다.

 

15. 이스라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었다. 그런데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이 안되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무엇보다 하나님이 거주하실 성전을 봐도 너무도 초라해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학개의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그러한 냉소와 불신앙이 가득하고,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냉소와 불신앙이 얼마나 잘못됐고, 그들이 겪고 있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보잘것없고 작은 일의 날이라 보이지만 성전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돌아오셨고 그들과 함께하심을 보여 주는 명확한 증거이다.

 

16. 오늘 말씀은 낙심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에게 큰 위로를 준다.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굳세게 할지어다!’라고 말하며 격려한다.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이 땅의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라고 말하며 격려해 준다. 그러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또한 이전 성전에 비해 정말 보잘것없이 초라한 성전의 기초를 보면서 ‘보잘것없고 작은 일의 날’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에게는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바로잡아 주신다.

 

17. 오늘날 우리에게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구약시대와는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성전은 단순히 건물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해서 지어진 교회를 말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믿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해서 우리는 지금 성전(교회)를 세워나가고 있는 중이라는 믿음! 큰 것을 보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작은 것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믿음!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평강(peace)가 없으면 한발자국도 나가기 힘들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들 마음에 평강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20년째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평강이 임했을 때 그들은 20년동안 손 놓고 있었던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학개 선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이곳에 평강을 주시겠다고! 그러니 우리, 힘을 내서,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춧돌 삼아,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성전을 세워나가자.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4. 13. 05:55

샬롬을 간구하는 기도

(출애굽기 17:8-9, 18:1-4, 13-18)

 

주님,

샬롬이 어떻게 오는지 배웠습니다.

이 배움을 몸에 익히게 하옵소서.

삶에 새기게 하옵소서.

주님, 이 전투를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서 싸워주시옵소서.

주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신실한 신앙이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혼자 싸울 수 없으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사람들을 보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을 받은 자녀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서로가 서로의 샬롬을 지켜주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샬롬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4. 13. 05:53

샬롬은 어떻게 오는가

(출애굽기 17:8-9, 18:1-4, 13-18)

 

1. 르비딤이라는 지역에서 발생한 일련의 일들은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르비딤은 시내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지역이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게 될 ‘시내산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절체절명의 사건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covenant)’를 맺기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언약을 맺으시지만, 하나님은 시내산 사건에 이르러서야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으신다. 언약의 스케일이 족장에서 민족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러 이 언약의 확장은 온 우주로 확대된다. 그러니까, 성경은 언약의 시각에서 보면, 언약이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만큼 온 우주로 확대되어 가는 이야기이다. (이는 마치 우주가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많은 생각 거리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우리의 존재/생각을 한 곳에만 고정시킬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잠정적이다.)

 

2. 일단 팩트 체크부터 하면 좋을 것 같다. 르비딤이라는 지역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물이 없어서 이스라엘과 모세가 다툰 사건도 여기에서 발생했고, 반석에서 물이 난 사건도 르비딤에서 발생했다. 모세와의 다툼이 끝나자, 이제 아말렉과의 전투가 발생한다. 아말렉과의 전투 장면에서 여호수아의 존재가 처음 등장한다. 그는 아말렉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단번에 모세의 후계자로 물망에 오른다. 아말렉과의 전투가 끝난 후, 오랜 시간동안 헤어져 살던 모세의 가족들이 모세를 찾아온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 그리고 배우자 십보라, 또한 그들 사이에서 난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이 온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모세는 장인 이드로에게서 체계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시내산에 들어서기 전, 르비딤이라는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3. 우리는 살면서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이런 생각을 한다. “아 그래, 이 문제만 해결되면 우리의 삶은 형통할 거야!” 출애굽기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그 지긋지긋한 애굽 땅에서 탈출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홍해를 건넜을 때, 그리고 뒤따라오던 애굽 군대가 홍해 물에 모두 수장되어 죽었을 때, 그래서 더 이상의 위협이 없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흥겨워했다. “고생 끝! 행복 시작!”

 

4. 그런데 홍해 이야기 이후에 전개되는 불평 이야기에서 보듯이, 그들의 여정은 그들의 생각처럼 형통하거나 쉽지 않았다. 막상 출애굽 하면 모든 게 형통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출애굽 하여 광야에 들어서 보니 온통 불평거리였다. 물이 없어서 불평, 먹을 게 없어서 불평,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과 원망을 늘어 놓았다. 르비딤에 이르러서는 불평과 원망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도자 모세와 다투기까지 했다. 모세와의 다툼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 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출 17:2).

 

5. 다른 말로 해서, 희망차게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시내산 등정을 목전에 앞두고 서로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하고, 분열될 대로 분열하고, 평화가 사라져버렸다. 한 마디로, 르비딤의 이스라엘에게서는 ‘샬롬(문자적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샬롬,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출애굽 했는데, 샬롬은 온데간데없고 불평과 원망, 다툼과 불안만 가득했다. 상황이 이쯤되면 공동체는 완전히 와해된 것이고, 출애굽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그들의 입에서는 이런 탄식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What are we going to do? 어떡하지?”

 

6. 살면서 우리도 이러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런 탄식이 나올 때가 있다. “What are we going to do? What am I going to do? 우리 이제 어떡하지? 나 이제 어떡하지?” 샬롬(평화)이 깨지거나 없어지면 우리의 삶은 급격하게 불안해진다. 르비딤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샬롬이 없는 것을 드러나게 확인한 곳도 르비딤이고, 사라진 샬롬을 다시 찾게 되는 곳도 르비딤이기 때문이다. 샬롬 없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전진하기 쉽지 않다.

 

7. 르비딤에서 그들이 맞닥뜨린 위기는 물이 없어서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한데서만 온 게 아니다. 또다른 실제적인 위기가 그들에게 닥쳤는데, 느닷없이 아말렉 족속이 르비딤에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직 군대가 없었다. 출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들이었고, 또한 출애굽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광야로 들어서서 살아남기 급급했던 이들에게 적과 싸울 만한 군대가 조직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아말렉이 쳐들어왔을 때 모세는 여호수아를 지명해서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 싸우라고 명령한다.

 

8. 우리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에는 깨어진 샬롬을 되찾아줄 중요한 첫번째 원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싸우라고 명령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산 꼭대기에 서서 아말렉과의 전투에 동참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도 잘 알려진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붙들고 서서 아말렉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야기이다.

 

9. 모세가 산 꼭대기에서 손에 잡고 있던 ‘하나님의 지팡이’는 르비딤의 반석에서 물을 낸 바로 그 지팡이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 꼭대기에 서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전투에 개입하실 거라는 뜻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이런 저런 전투를 치르느라 고생을 많이 한다. 전투를 치르느라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샬롬을 잃어간다. 피곤하고 힘들어서 마음을 닫고 숨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일수록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가 한 일을 기억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하는 전투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도록 허락하고 순종해야 한다. 주님, 두 손을 높이 듭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두 손을 높이 듭니다. 이 전투를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서 싸워주시옵소서.”

 

10. 이 기도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아말렉과의 전투를 보라. 여호수아가 승리한 이유는 모세가 아론과 훌의 도움에 힘입어 하나님의 지팡이를 계속하여 높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말렉과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전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투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 싸워 이기신 전투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아말렉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나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라 부른다. 사실, 우리의 예배가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 주일이 되었으니까 습관에 좇아 나오는 주일예배가 아니라, 일주일 동안 삶의 전투 속에서 하나님이 싸워주신 덕분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신앙의 고백이 담긴, ‘여호와 닛시’의 예배, 그것이 우리의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11. 아말렉과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분열을 드라마틱 하게 치유해 준다. 르비딤에 도착하여 폭발한 갈등이 치유된다. 자신들이 나가서 싸운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든 덕분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싸워주시니,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삶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유효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어떠한 전투에 나가든,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나가야 한다. “주님, 이 전투를 주님께 맡깁니다.” 아말렉과의 전투가 승리로 끝난 뒤, 이스라엘에게 샬롬이 찾아왔다. 이게 단순한 샬롬이 아니었다. 아말렉 전투는 전화위복이 되어 이스라엘의 내부결속을 가져왔다. 이러한 드라마틱한 반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임한다. 하나님께 맡겨드릴 때 임한다.

 

12. 아말렉과의 전투가 끝난 뒤, 한 숨 돌리고 있을 때, 모세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오랜 시간 동안 헤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이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모세 가족의 재회 이야기를 통해서 샬롬의 두번째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모세의 두 아들의 이름에는 왕궁에서 쫓겨난 후의 모세의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첫째 아들 게르솜은 ‘이방에서 나그네 되었다’는 뜻이고, 둘째 아들 엘리에셀은 ‘나의 하나님은 도움이시라’는 뜻이다.

 

13. 사실, 우리 이민자들의 삶은 모두 이와 다르지 않다. 낯선 이방 땅에 와서 우리는 늘 나그네처럼 산다. 그런데 우리가 이민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찬송을 부르며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한 분 믿고 살아온 인생 아닌가. 나 같은 경우도 한 명도 아는 사람 없는 곳에 가서 교회를 개척했고, 또 이곳에 부르심을 받고 와서 여러분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가 전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는 이제 어떤 사람들보다도 한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이 사실 자체가 기적이다. 여러분은 기적 같은 분들이다.

 

14. 모세와 장인 이드로의 대화를 보면 마음이 짠하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 모세는 예를 다해 가족을 맞이하고 장인 이드로와 담소를 나눈다. 18장 8절에 그 담소의 내용이 한 줄로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매.” 여기에서 우리는 샬롬을 얻게 되는 두 번째 원리를 깨닫게 된다. 바로, ‘신실한 신앙의 고백’이 그것이다.

 

15. 샬롬이 없어진 사람에게는 ‘신실한 신앙의 고백’도 함께 사라진 것을 보게 된다.  누군가 오랜만에 여러분을 찾아왔다고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 여러분은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모세는 오랜만에 찾아온 장인 이드로에게 ‘불평과 불만’을 늘어 놓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모세는 이드로에게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신실한 신앙의 고백’을 했다.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 신실한 신앙의 고백을 했다는 것은 이어지는 장인 이드로의 반응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이제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출 18:9-11).

 

16. 장인 이드로는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다. 다른 말로, 이방인 제사장이다. 장인 이드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모세의 신실한 신앙 고백을 통해서 이방인 제사장 이드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제 알았도다!” 이제 장인 이드로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예배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전도가 된 것이다. 샬롬이 없는 사람에게는 ‘신실한 신앙의 고백’도 없다. 그러나, ‘신실한 신앙의 고백’은 우리에게 샬롬을 가져온다. 신실한 신앙의 고백이 있으려면 우선 위에서 살펴본 첫 번째 샬롬의 원리를 깨닫는 게 중요하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계속하여 맡겨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보듬어 안으시고, 우리의 입술에 신실한 신앙의 고백을 넣어주신다. 그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의 샬롬을 선물로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

 

17. 르비딤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이야기는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지혜 덕분에 이스라엘 진영을 재정비하고 부족한 법조직과 행정 체계를 새롭게 수립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세 번째 샬롬의 원리를 배우게 된다. 모세는 하루 종일 바빴다. 이스라엘의 모든 송사를 혼자서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준다.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서 할 수 없으리라”(출 18:18). 혼자서 처리할 수 없는 일을 혼자서 감당하려니 모세는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장인 이드로는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을 알려준다.

 

18.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효과적인 일처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역경과 어려움이 닥칠 때 스스로, 혼자서 그 일을 헤쳐 나는 것은 역부족이고, 샬롬을 잃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짐을 나누어 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조언을 해준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출 18:21).

 

19. 샬롬을 얻게 되는 세 번째 중요한 원리는 ‘능력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런데 장인 이드로가 제시하고 있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조건은 우리가 아는 능력과 사뭇 다르다.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을 학력이나 연봉 같은 것으로 평가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제시하고 있는 ‘능력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과 별로 상관이 없다. 샬롬은 학력이 좋고 연봉을 많이 받는 사람과의 사귐에서 오는 게 아니다. 샬롬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all the people able men who fear God, men of truth, those who hate dishonest gain)’와의 사귐에서 온다.

 

20.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이러한 ‘능력 있는 사람들’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러한 능력은 그 누구보다도 모세 자신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샬롬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온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은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함께 진실하고, 함께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로 세워져 나가는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인 줄 믿고, 그런 공동체로 더욱더 성장해 나가기를 소망한다. 좋은 사람들의 교회, 능력 있는 사람들의 교회, 세화교회.

 

21. 샬롬은 어떻게 오는가? 샬롬 없이 우리는 한 발자국도 나가기 힘들다. 샬롬이 없으면 삶은 힘겨울 뿐이다.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도 샬롬은 반드시 필요하다. 샬롬은, 1) 우리의 삶의 전투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도록 내어드릴 때, 2) 신실한 신앙의 고백이 있을 때, 3) 능력 있는 사람(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우리에게 온다. 무엇보다 첫 원리가 가장 중요하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이렇게 기도하라. 주님, 이 전투를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서 싸워주시옵소서!” 이것이 두 번째, 세 번째 샬롬의 원리를 견인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내산에 오르라  (0) 2022.04.26
평강이 필요해  (1) 2022.04.22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0) 2022.04.05
불평 이야기 (Murmuring Narrative)  (0) 2022.03.29
누군가의 노래  (0) 2022.03.16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4. 5. 09:29

하나님의 현실을 간구하는 기도

(출 16:1-3, 17:1-4)

 

주님,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것에만 몰입하고 집착하고 있다 보니

그것이 우리 현실의 전부인 줄 알고

고통을 호소하며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 보다

주님의 현실을 바라보며 좀 더 힘을 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은

‘이 광야’가 아니라

주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은혜의 광야이고

목마른 우리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시는

신비의 광야입니다.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우리 눈에는 망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랑의 눈으로 보면 구원의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을 다르게 보게 하는 힘인 사랑을 잃지 말도록 하시고

주님께 신뢰와 믿음을 두고

더 좋은 삶과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소망의 끈을 놓지 말게 하옵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강을 간구하는 기도  (0) 2022.04.22
샬롬을 간구하는 기도  (0) 2022.04.13
올바른 불평을 간구하는 기도  (0) 2022.03.29
우리를 통한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  (0) 2022.03.16
자유를 간구하는 기도  (0) 2022.03.13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4. 5. 09:25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출애굽기 16:1-3, 17:1-4)

 

1. 천국은 어떤 곳일까? 사람마다 다르게 묘사될 것이다. 가난하게 산 사람은 더 이상 가난이 없는 곳이 천국일 거고, 부자로 산 사람은 계속해서 부자로 살고 싶은 욕망을 담아 천국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하다고 믿을 것이다. 인생을 너무 고통스럽게 산 사람에게 천국은 더 이상 눈물이 없는 곳이라 믿을 것이고, 행복하게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은 그 행복이 천국에서도 이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가슴 사무치게 그리운 존재가 있는 사람이라면 천국에 가서 그 존재를 만나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질 것이고, 살면서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이 있는 곳이 천국이라면 그곳에 가고 싶지 않을 거라 말할 것이다.

 

2. 요한계시록은 천국을 이렇게 묘사한다. 요한계시록에는 ‘천국’이라는 말 대신에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표현한다. 새하늘과 새땅, 즉 천국(하늘나라/하나님나라)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곳,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는 곳이다. 그런 곳은 어떤 곳일까?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3. 우리는 천국이라는 것을 상상할 때, 우선 그곳에는 더 이상의 고통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 왜 그럴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고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는 게 고통이다. 삶 자체가 고통이다. 그렇다 보니, 인간은 계속해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인데, 여기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고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묻고 또 묻는다. 그렇게 인간에게 천국이란 더 이상의 고통이 없는 곳을 의미한다.

 

4. 그런데 나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우리는 고통이라는 문제에 너무 몰입해서 사는 것은 아닐까? 고통이라는 문제에 너무 몰입하다 보니, 천국이라는 것도 고통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설계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아이들에게 집이란 어떤 곳일까? 아이들에게 집은 고통이 없는 곳일까? 배불리 먹을 게 있는 곳일까? 게임기가 있는 곳일까? 친구들이 있는 곳일까? 침대가 있는 곳일까? 도대체 아이들에게 집이란 어떤 곳일까? 아이들에게 집이란 사랑하는 엄마/아빠가 있는 곳이다. 엄마 아빠가 있는 바로 그곳이 집이다.

 

5.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발생한 일을 다룬다. 그들은 시내산으로 가기 위해 엘림을 떠났는데, 엘림과 시내산 중간 쯤에 있던 신 광야에 도착한다.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16:1). 우리 달력으로 1월 15일쯤 애굽에서 나와 2월 15일쯤 신 광야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신 광야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을 쏟아낸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16:3).

 

6. 목마르고 배고프다 보니 현타(현자 타임)가 온 것이다. 현타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열성적으로 무언가에 몰입하며 행동하다가 급 현실을 깨닫고 조금 전까지 계속됐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거나 수치스러워하며 힘이 쭉 빠지는 순간.” 애굽에 있을 때 이스라엘은 애굽 왕과 애굽 사람들에게 억압과 폭력에 시달리면서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같이 고통받으며 살았다. 그들은 구원을 갈망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다. 그런데 출애굽 한 지 한 달 정도 지나서 신 광야에 이르러 자신들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쏟아내고 있다. 다 좋은데, 목마름과 배고픔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7. 목마름과 배고픔의 현실 앞에서 이스라엘은 갑자기 출애굽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 이들이 출애굽한 목적은 무엇인가? 단순히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출애굽의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삶”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굿 라이프’를 살아가는 것을 위해 이들은 출애굽을 했다. 그런데, 이들은 목마름과 배고픔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는 인도해 내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 광야’라는 말에는 모세와 아론을 향한 이스라엘의 심리적 비아냥거림이 가득 들어 있다.

 

8. 애굽에서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지,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 보니, 이스라엘은 지금 자신들의 삶이 놓여 있는 ‘광야’를 ‘이 광야’라고 지칭하며, 자신들이 맞닥뜨린 현실을 향하여 냉소와 비난을 늘어 놓고 있다. 이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 충만했다면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이 광야’로 지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사뭇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위해 미스바로 온 이스라엘 회중을 불러 모은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긴 뒤 돌 하나를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칭한다.

 

9. 출애굽기와 사무엘상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으므로, 출애굽기에서 보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사무엘상에서 보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그 시간 간격만큼 이스라엘은 성장한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사무엘상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신 광야에서 가지고 있었다면, 신 광야를 ‘이 광야’라고 부르며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신 광야에 이른 이스라엘에게서 보이는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현저하게 없는 모습이다.

 

10. 신 광야에서 발생한 이 일로 인해 전개되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다.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의 핵심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기적 같은 일을 벌이셔서 이스라엘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것이 아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의 핵심은 12절이 담고 있다.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더불어서 이 말씀이 핵심이다.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16:28). 한 마디로,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께 신뢰와 믿음을 두느냐, 두지 못하느냐를 시험한 사건이다.

 

11.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하여 충분한 신뢰와 믿음을 두었다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배고픈 것을 두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애굽에서 고기와 빵을 먹으면서 종살이하던 때를 회상하며 그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이 광야에서 배고픔과 목마름 가운데 있지만, 출애굽하여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먹이고 입히실 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들이 경험하는 현실은 그들의 현실일 뿐 하나님의 현실은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오히려 왜곡되어 있을 때가 많다. 진정한 현타는 내가 보는 현실을 보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이 베푸실 구원을 보는 것이다.

 

12. 신 광야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본 현실은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가득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본 현실이 얼마나 협소하고 왜곡된 현실이었는지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곳은 먹을 것이 없는 배고픔이 가득한 ‘이 광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아침에는 만나로 배불리 먹이시는 은혜가 넘치는 곳이었다. 무엇이 진실로 현실인가에 대한 깨달음은 이어지는 므리바 이야기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3. 이스라엘은 말 많고 탈 많았던 신 광야를 떠나 시내산으로 향하던 도중 르비딤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실 물이 없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어서 배는 불렀지만 마실 물이 없어서 목이 말랐다. 식량과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물이 없어 목말랐던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모세와 다툰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17:3). 르비딤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본 현실은 마실 물이 없는 현실이었다.

 

14. 이 다툼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다. “내가 이 백성을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일 강을 치고 홍해를 갈랐던 지팡이를 잡고 호렙산에 있는 반석을 내리치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본 현실은 물이 없는 현실이었지만, 하나님의 현실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현실이었다. 우리가 보는 현실은 이렇게 왜곡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반석으로 가려진 물을 보지 못한다. 그것을 보지 못하니, 우리는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실은 다르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눈이 보는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현실을 보려고 노력하는가?

 

15.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나 므리바 사건, 즉 이스라엘 자손과 모세가 다툰 사건,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한 사건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어서 발생한 사건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같이 경험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이야기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는가.

 

16.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의 내용은 믿음과 신뢰이다. 서두에서 한 천국 이야기를 다시 끌어와 오늘 말씀과 연관을 시켜 보자면, 이스라엘에게 천국은 배불리 먹을 고기와 떡, 그리고 마실 물이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바로 그곳이다. 이는 아이들에게 다른 그 어느 곳보다 엄마 아빠가 있는 곳이 그들의 집이라는 말과 같다. 엄마 아빠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는 아이들은 그곳에 고통이 있더라도 그 고통의 현실을 보는 게 아니라 엄마 아빠가 보여주는 믿음과 신뢰를 보기 때문에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굳건히 가진 신앙인은 고통의 현실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을 보기 때문에 고통의 현실 때문에 냉소와 비난을 늘어 놓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에서 임재하시고 역하사실 하나님의 현실을 기대하며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간다.

 

17. 시 한 편을 나누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한다. 정희성 시인의 <봄소식>이라는 시이다.

 

이제 내 시에 쓰인

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말로

시대 상황을 연상치 마라

내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저 산에도 봄이 오려는지

아아, 수런대는 소리

 

18. 사랑을 시작한 사람은 세상이 망해가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랑을 시작한 자에게 참된 현실은 세상이 망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망해가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고통이 가득한 세상, 망해가는 것 같은 세상을 향하여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지 않는다. 그는 사랑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에 배고픔과 목마름이 겉으로 드러난 현실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현실/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19. 우리 모두가 그러한 관계를 쌓아 나가면 좋겠다. 믿음과 신뢰, 즉 사랑은 겉으로 드러난 것 만을 현실로 인식하지 않게 하는 힘이다. 우리가 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한다면,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실만을 바라보며 냉소와 비난 가운데 살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서로 좀 더 보듬어 안으며 따뜻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망해가는 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이 사순절기,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더 깊어지길, 서로가 서로를 향한 사랑이 더 깊어지기를! 사랑의 눈으로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되기를! 우리 모두 좀 더 힘을 내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간구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강이 필요해  (1) 2022.04.22
샬롬은 어떻게 오는가  (0) 2022.04.13
불평 이야기 (Murmuring Narrative)  (0) 2022.03.29
누군가의 노래  (0) 2022.03.16
자유  (0) 2022.03.13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