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6'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2.04.26 세상의 모든 나무
  2. 2022.04.26 시내산에 오르기를 간구하는 기도
  3. 2022.04.26 시내산에 오르라
시(詩)2022. 4. 26. 12:23

세상의 모든 나무

 

아무것도 아닌 새가 된다는 것은

결국 더 이상 허공을 날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

 

허공에 서 있는 전봇대에 부딪히는 게 무서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일

 

허공 자체가 공허하므로

공허를 뒤집어쓰는 것이

번개에 맞아 기절하는 것보다

아프다는 일

 

아프면 어때

 

허공에는 어둠이 없다

햇살이 없는 것보다 어둠이 없는 것을

상상하기는 힘든 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서 사는 게

뉴스를 보지 않고 사는 것보다

지루한 일

 

허공을 가르는 바람만이

나무의 손끝을 건들 수 있다는 일

 

나에게 손짓하는 것은 오직

바람에 흔들리는 세상의 모든 나무들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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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4. 26. 12:22

시내산에 오르기를 간구하는 기도

(출 19:1-6)

 

주님,

시내산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시내산으로 부르시기에

우리는 시내산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그곳에서 주님과 언약을 맺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으로 가득한 삶, 시간인 줄 믿습니다.

시내산에 올라 주님과 언약을 맺고

주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약속의 성취가 되길 원합니다.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신비와 아름다움이 가득한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시내산으로 매일 불러주시고,

우리는 그 음성을 듣고 지켜, 매일 시내산을 오르게 하옵소서.

시내산의 완성이시고 성취이신 십자가에 올라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4. 26. 12:20

시내산에 오르라

(출애굽기 19:1-6)

 

1. 출애굽기 19장부터 24장까지를 ‘시내산 문단(Sinai Pericope)’라고 부른다. 출애굽기 자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단이지만,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통틀어서도 가장 중요한 문단이다. 시내산 문단의 이야기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언약(covenant)’이다.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2. 애굽을 떠난 지 3개월이 지나, 이스라엘은 드디어 시내산에 도착한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일차 목표는 시내산에 가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가야하는 목표를 설정한 것은 그들의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5:1).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뜻이다.

 

3. 이것은 우리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이 바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시간(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와도 상관 있는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요소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성 어거스틴이 아주 큰 공헌을 했는데,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매우 인격적이다. 이것을 시간의 인격성이라고 한다.

 

4. 함석헌은 이러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 글이 글 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는 역사철학은 성경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13쪽).

 

5. 좀 어려운 말 같지만, 성경을 매일 읽는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지난 3개월의 여정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에게 지난 3개월의 여정은 시간이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흘러간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 자체였다. 그들의 시간에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인격이 베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는 우리의 시간, 우리의 삶의 역사 가운데 현존하셔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신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감사한다는 뜻이다.

 

6.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는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극명하게 갈리는 법이다. 비신앙인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갈 목표를 세우지만,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갈구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갈 목표를 세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목표를 자의적으로 세우고 그 일을 감행했다면 그들은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애굽에서 어떻게 가까스로 나왔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지난 행보를 보면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비굴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7.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나의 개인적인 바람이라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의 성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삶인가?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말라. 시간(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간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뜻이고, 그것을 우리는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 언약은 성취된다. 언약의 성취를 향해서 나아가는 삶만큼 의미 있는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스라엘의 지난 3개월의 여정은 때론 눈살을 찌푸리게도 했지만(물이 없다고 먹을 게 없다고 모세와 하나님께 퍼 부은 그들의 분노를 보라), 그들의 여정은 결국 의미 있는 것이다. 그들이 시내산에 도착한 것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이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도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이나 자녀들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시간(삶/계획)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을 간구하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자녀들의 앞날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획할 때, 어떤 학교를 선택하고 어떤 직업을 선택할 때도, 우리가 계속 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세우는 일이다. 우리 이민자들은 이것을 더 치열하게 물을 수밖에 없다. 삶이 더 불안전하고 고달프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앞날을 물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민자들은 대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을 세울 때도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먼저 간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바탕으로 세워 나가는 것이 좋다. 그래야 우리의 남은 삶의 여정도 복되고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바탕이 된 삶은 단순히 내가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가 되기 때문이다.

 

9.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신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이 3-6절의 말씀이다.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그들의 시간 속에, 여정 속에 하나님의 인격이 드러났다는 뜻)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10. 여기서 중요한 구절은 1)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구절과 2)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라는 구절과 3)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구절이다. 언약 체결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듣고 지키는 것’이다. ‘듣고 지킨다’는 뜻은 무엇일까? 이것은 실행의 문제라기 보다는 태도의 문제이다. 태도의 문제라는 뜻은 마음의 문제라는 뜻이다. 기계적으로 무엇인가를 실행하는 것은 본인이나 상대방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 즉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기계적으로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떠한 태도로, 어떠한 관계 속에서 주일에 교회에 나왔느냐가 중요하다.

 

11. 결국 ‘듣고 지킨다’는 것은 사랑의 문제인 것이다. 율법의 가지 수는 613개로 알려져 있지만, 613개의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기계적으로 다 지킬 수도 없다. 다만, 그것을 ‘듣고 지키려는 태도’, 즉 그것을 말씀하신, 그것을 주시는 분에 대한 우리의 마음 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이렇게 표현하신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율법 613개를 아무리 잘 지켜도 그것이 그 사람의 의가 되어 그를 구원하지 않는다. 율법 613개를 지키지 못했어도, 그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것을 어여삐 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이 선포되고 있는 사람들은 613가지의 율법을 칼 같이 지킨 사람들이 아니라,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해 정죄 받고 손가락질 당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했던 소위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듣고 지키는 것’, 다른 말로, 사랑, 사랑, 사랑이다. “하나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하십시오!”

 

12. 우리가 듣고 지킬 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게 굉장히 특별한 용어이고 표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는 ‘거래를 통해 가지게 되는 무엇’ 정도로 이해될 뿐이다. ‘나 저거 내 소유로 만들고 싶어’라는 말처럼 개인 프라퍼티(private property),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엇인가 정도로 이해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소유는 이러한 개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13. 본문에 나오는 ‘소유’는 히브리어 ‘쎄굴라’를 번역한 용어이다. 쎄굴라는 ‘왕국의 제2인자, 총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소유(쎄굴라)에 대한 부연설명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다. 소유가 된다는 것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뜻이다. 쎄굴라, ‘왕국의 제2인자, 총리’라는 말을 들으니까, 떠오르는 어떤 인물이 있지 않은가?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이 떠오르고,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다니엘이 떠오른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의 소유(쎄굴라)가 된다는 뜻은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14. 물론 우리는 여기서도 오해하면 안 된다. 요즘처럼 출세지향에 대한 욕구가 충만한 시대에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성공’이라는 말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국의 총리로서의 요셉과 다니엘의 성공적인 삶만 볼 뿐, 그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할 수 있다. 하나님의 소유(쎄굴라),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거라는 말은 요셉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서 실행하는 주님의 동역자로 살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뜻은 군림하고 다스리고 통치하는 권력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 섬기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15. 요즘,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려고 시내산에 오르는 사람이 있을까?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주와 또는 샌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복을 받았기에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고,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거룩함에 닿아 있는 사람, 인간다움의 최고 형태를 맛본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16. 우리는 성경을 보편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믿는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부르셨듯이, 우리도 시내산으로 부르신다고 믿는다. 우리의 삶은 늘 시내산으로 이끌림을 받는 삶이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시내산, 그곳은 성소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그 경계를 넘으면 죽는 곳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배타적인 게 아니라 구별되는 것이다. 그곳에 이르면, ‘그것화’되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한 곳에 이르면, 거룩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경계를 넘으면 죽는다’는 것은 경계를 넘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와 같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 시내산에 이르고 그곳에 오른다는 것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17. 그 경계를 넘으면 죽는 곳, 그 경계를 넘으면 이전의 삶은 죽는 곳, 시내산, 성소,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곳, 이스라엘은 그곳에 도착하여 그 경계를 넘어서 그곳에 계신 거룩한 하나님을 만났다.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찌질한 백성이 아니다. 그들의 어제는 경계를 넘으므로 죽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유로, 제사장 나라로, 거룩한 백성으로 새로 태어났다. 시내산에 오른다는 것은 이렇게 엄청난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시내산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시내산에 오르라. 우리의 삶은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놀라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처럼 아름다워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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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