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7'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2.08.17 [로마서에 가면]을 읽고
  2. 2022.08.17 로마서에 가면
  3. 2022.08.17 신앙은 자기 혐오가 아니다

['로마서에 가면'을 읽고]

 

저자(비벌리 가벤타)는 '로마서에 가면' 다음 네 가지를 하라고 알려준다. 1) 지평을 살펴보세요, 2) 아브라함을 떠올려 보세요,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요, 4) 서로를 받아들이세요.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자신의 수업 때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로마서 과제를 못하겠다고 포기해 버린 한 학생처럼 로마서를 읽으며 로마서가 가진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저자의 바람은 충분히 성공적인 것 같다. 로마서에 가면 위의 네 가지 요점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하라는 저자의 말과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로마서에 가서 길을 잃지 않게 끔 충분히 이끌어 주는 네비게이션과 같다.

 

무엇보다, 내용이 논쟁적이지 않아서 좋다. 물론 저자의 입장과 해석이 깊이 들어간 책이지만 로마서에 대한 논쟁을 이끌지 않고 자신의 입장과 해석을 담담한 필체로 설명해 나가는 것이 꽤 설득력 있다. 저자는 겸손하게 로마서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해석을 내놓는다. 우리가 저자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더라도 저자의 겸손한 주장에 대하여 귀 기울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

 

이 책은 내가 평소에 기독교 복음에 대하여(또는 로마서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의문들을 잘 해소해 주었다. 미국의 복음주의 영향 때문에 한국 기독교가 가진 구원의 개인주의화에 대한 비판이라든지, 기독교의 '죄' 개념을 너무 협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라든지, 반대유대주의라든지, 행위의 문제, 그리고 공동체의 문제 등, 현재 교회 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어색하고 잘못된 신학적 논의들에 대해서 좀 더 정교한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백미는 3장과 4장이다. 3장에서는 윤리와 예배를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예배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환기시킬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예배를 그만 두는 것은 왜곡된 수많은 행동들의 원인"(163쪽)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신학적 분석은 이 땅의 교회들이 예배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도전을 안겨준다.

 

4장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은 그대로 옮겨적는 게 좋을 듯싶다.

 

[바울은 12장의 문맥에서도 이러한 이미지를 토대로 몇 가지 작업을 수행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로부터, 우리가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개념을 추론해냅니다. 서로 지체가 된다는 것은 곧 빠져나갈 수 없는 관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데 모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서로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개념은 주요 서구 세계가 가진 개인에 대한 숭배 ㅡ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요구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상상하게 만듭니다 ㅡ 와 공공연히 출동합니다.

긍정의 측면에서 보면, 바울은 자신의 논지를 발전시키는 도중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영적 선물들(은사들)을 통해 전체에 기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195-196쪽)

 

개인주의 사회, 세속사회, 자본주의 사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로마서가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위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사회는 '개인에 대한 숭배', 즉 개인의 우상화가 이루어진 사회이다. 개인에 대한 숭배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모든 가치의 최종 결정자이고, 자유는 개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개념이고, 세속사회는 신조차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건들 수 없다는, 즉 사적인 영역에서 신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자본(돈)이 가능하게 만든다.

 

흔히 교회를 공동체(community)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교회를 담임해 보면 교회는 공동체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교회는 '믿기로 결단한 개인들의 집합체'로 이해되고 운영될 때가 많다. 위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교회의 구성원은 서로 책임지지 않는다. 지체라는 개념이 없다. 자신의 취향에 안 맞거나 기분이 상하면 교회(공동체/지체)를 빠져나간다. 그러한 행위를 막을 수 없다. 교회는 이미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주의 사회, 세속사회, 자본주의 사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자발적 모임(은혜로 부름을 받은 모임이 아니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그것을 래디컬하게 적용하는 일은 언제나 큰 도전이다.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그토록 많이 하지만, 정작 성경을 정직하게, 합리적으로, 그리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읽는 일에는 늘 실패하는 한다. 성경을 정직하게 읽지 않으니, 교회가 바르게 세워질 수 없을 뿐더러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고 게토화되어 간다.

 

저자는 로마서에 가서 충분히 머물라고 조언한다.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로마서에 가서 충분히 머물 수 있을까? 충분히 머문다는 것은 구석구석 들여다 보며 그것이 구성하고 있는 전체의 의미를 충분히 묵상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로마서의 실제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모습에 비춰본 우리의 교회, 그리고 나 자신, 그리스도인들의 왜곡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충격이 없다면, 우리는 성경을 읽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로마서에 가면, 우주적 지평을 생각해 보고, 바울이 아브라함을 복음에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보고, 윤리와 예배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서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될 때, 우리는 충격을 넘어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로 전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전문가, 저자의 조언대로, 로마서에 가면,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싶다.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기 원하시는 것처럼, "나의 몸을 헌금함에 던지는" 신앙의 전회가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로마서에 가면

 

올해 상반기, 1월부터 5월 마지막 주일까지 우리는 구약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출애굽기>를 살펴봤습니다. 출애굽기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부르는 이유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출애굽 사건의 우주적 확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이야기들과 거기에서 전개되는 신학적 진술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우주적 구원 사건으로 해석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즉, 출애굽기 없이 신약의 복음서를 해석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은 신약에서 아주 정교하게 재현(representation)되고 있습니다. 구약을 어느 정도 깊이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약의 이해 정도가 갈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 경전인 구약성경(히브리 바이블)을 내버리지 않고 기독교 경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깊지 않았던 옛날 초기 기독교 때는 구약성경을 기독교의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마르키온이라는 영지주의자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는 구약성경을 배제한 신약성경만을 근거로 기독교 성경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 일을 열정적으로 진행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마르키온의 복음 이해가 얼마나 일천했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행히 정통 기독교 신학자들은 마르키온 같은 무지한 사람들의 과격한 행동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고, 지금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어우러진 66권을 기독교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모세입니다. 모세오경이라 불리는 토라(Torah)는 율법의 근간이 됩니다. 토라에 대한 이해 없이 유대교 신앙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좀 다르게 모세오경을 해석하고 이해하지만, 모세오경을 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모세오경은 신앙에 절대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울입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는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에 해당합니다. 신약성경의 절반 정도가 바울서신입니다. (물론 13개의 바울서신 중 7개만이 실제로 바울이 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다른 6개의 바울서신이 바울의 이름을 빌려 썼다는 것은 그만큼 바울의 영향력이 컸다는 뜻입니다.) 바울서신, 다르게 말하면, 바울을 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바울(서신)만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는 바울서신뿐 아니라 복음서, 사도행전,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 다양한 복음의 기록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 또한 필수적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난 기독교 2천년의 역사에서 바울서신만큼 기독교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성경도 없습니다. 바울서신을 어떻게 해석했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달라져 왔습니다. 일례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마르틴 루터 같은 경우도 로마서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했을 정도입니다. 그 이후에 특별히 개신교 신학은 바울신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이 갈려 왔습니다. 그만큼 개신교는 바울서신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올해 하반기는 로마서와 함께 하려 합니다. 9월 첫째 주일부터 로마서 설교를 하려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한창 준비 중입니다. 제가 그동안 목회하면서 로마서 설교를 세 번 했는데, 이번이 네 번째 로마서 설교가 됩니다. 이번 로마서 설교는 저에게도 매우 도전이고 뜻 깊을 것 같습니다. 목회와 학문의 경륜이 어느 정도 쌓인 지금, 예전과는 분명 다르게 로마서가 제 마음에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번 로마서 설교에서는 기존의 로마서 해석이 지닌 한계점을 넘어서 최신 로마서 연구가 반영된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가지 어려운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는 요즘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열어가고 미래를 계획하고 미래를 소망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중점을 두면서 로마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작업은 저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화교회 공동체가 올 해 하반기에는 로마서에 집중해서 함께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같은 뜻,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로마서를 제대로 묵상하며 배워보겠다는 의지와 은총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지길 기도합니다. 신앙의 깊이는 성경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정비례합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숨어 계십니다. 우리에게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숨어 계신 게 아니라 우리에게 발견되시기 위하여 숨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꺼이 만나 주십니다. 우리 함께, 로마서 가서 하나님을 만납시다. 로마서에 가면 하나님이 계십니다.

Posted by 장준식

신앙은 자기 혐오가 아니다

 

최근 출간된 책 중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다. 8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를 담담한 필체로 기록한 책이다. 그 중에 ‘끝없이 죄책감을 주는 교회’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교회를 떠난 이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인터뷰어가 이런 질문을 했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신앙심이 크게 고양된 시기나 경험 같은 것이 있나요?” 이에 대하여 인터뷰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삶이 힘들 때 하나님을 찾게 되고 신앙도 강해졌던 것 같아요. 첫사랑이랑 헤어졌을 때, 국가고시 앞두고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아요. 시험에 붙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모든 게 안될 것 같은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거든요. 그때 교회에서 한 3시간을 울면서 기도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아이 낳기 전에도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라는 느낌보다는 내 죄로 인해서 모든 것이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죄책감이 나를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했던 것 같아요. 결혼생활 중 가정폭력을 겪으면서 다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고, 그 이후로는 더는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56쪽).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죄’라는 개념을 통해서만 접하고 이해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감정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자기 객관화 개념이지 자기 혐오를 조장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죄란 하나님과 연합하지 아니하고는 온전한 존재를 구성할 수 없다는 존재론적인 통찰이다. 우리는 죄라는 개념을 통해서 인간인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을 객관적으로 알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파묻혀 있으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을 메타인지라고 부른다. 죄는 바로 메타인지에 대한 신학적 용어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남의 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죄에 대한 인식은 혐오를 불러오면 안 되고 자기 객관화, 상대방에 대한 객관화를 불러와야 한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신학적 메타인지를 통해서만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고, 하나님을 욕망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하는 개념이 바로 ‘죄’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죄’의 개념이 오용되고 남용되어 자기 혐오를 이루고 타인에 대한 혐오를 이루는데 쓰여왔다. 건전한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를 구분하는 방법은 ‘죄’의 개념을 어떤 식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건전하지 못한 교회, 특별히 이단교회는 ‘죄’라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기 혐오를 심어준다. 이는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불안을 유발하게 되고,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메카니즘은 한 인간을 착취하기 쉬운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위의 인터뷰이의 경우에서 보듯이, 죄책감에 물든 사람은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해도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모든 게 안될 것 같은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기도할 뿐이다. 죄책감은 결국 나를 망가뜨리고 관계를 망가뜨리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든다. 이렇게 죄의 개념을 자기 혐오를 이루는 죄책감의 측면에서 유용하는 교회는 떠나는 게 좋다. 신앙은 자기 혐오를 불러오지 않는다. 신앙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온전한 존재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자기 혐오/타인 혐오를 불러오는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는 빨리 떠나는 게 좋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