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2. 8. 9. 18:48

하늘에 마음을 두고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

누가복음 12:22-34

 

주님,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치 부자 청년인양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근심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누구를 탓하고 비난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이미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힘을 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할 수 있는 한,

성경에서 말하는 구제를 행하게 하여 주셔서

이 세상이 좀 더 좋은 세상,

좀 더 하나님의 나라 다운 세상이 되는데,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탐심을 물리치게 하시고,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며

하늘에 마음을 두고 사는

거룩한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나

성령의 능력 안에서는 가능한 일이오니,

주여, 우리가 늘 성령 안에 충만히 거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보여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8. 9. 18:46

하늘에 마음을 둔 사람

(누가복음 12:22-34)

 

1. 탐심은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려고 하는 자기 구원의 욕망’이라고 했다. 몇 가지 살피고 넘어가야할 단어들이 있다. 첫번째로, 염려(메림나테)다. ‘염려’란 어떤 대상에 대해 괴로움을 느낄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염려에 대한 말씀은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도 이렇게 전한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염려가 안 좋은 것은 염려로 인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이 눈에 안 들어온다는 것이다.

 

2. 두번째로, 근심(메테오로스)이다. 근심은 높이 매달려 발을 디딜 데가 없기에 느끼는 걱정과 혼란을 뜻한다. 근심이라는 용어는 먹고 입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하려 드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염려와 근심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염려와 근심은 삶의 질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을 악한 것에 내어주도록 이끈다. 생명을 악한 것에 내어주는 사람은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있다가 서서히 악한 것에 마음과 생명을 내어주게 된다. 결국, 염려와 근심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못된 짓, 다른 이의 생명에 해를 가하는데 이르게 된다.

 

3.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이유는 염려와 근심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뿐더러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 악한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악은 하나님이 감당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날마다 이렇게 고백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그리스도인은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는 사람들이다. 염려와 근심은 필연적으로 악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4. 우리가 좀 더 자세히 풀고 넘어가야 할 용어가 있다. 누가복음 12장 25절과 26절의 말씀에 나오는 ‘자(페퀴스)’라고 하는 용어이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여기서 사용된 ‘자’라는 용어는 시편 39편 5절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된 용어이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시편 39:5).

 

5. ‘자’는 규빗을 가리킨다. 한 뼘 길이는 규빗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도량형으로 바꾸면,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길이다. 길이를 적용해서 해석하면, “너희 중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50센티미터라도 더 할 수 있으냐”이다. 키를 50센티미터 더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히브리어의 특징 중 하나는 공간적 단위로 시간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해야 옳다. “너희 중 누가 염려함으로 그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느냐”이다. 먹을 것, 입을 것에 관한 걱정으로 수명을 늘릴 수 없다. 그러므로 목숨과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근심하는 일은 무의미한 것이다.

 

6. 본문에서 가장 강력하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이것이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새의 경우를 통한 논증과 수명의 경우를 통한 논증, 그리고 들풀의 경우를 통한 논증을 들어서 ‘하물며 논리’를 통해 목숨과 몸이 먹는 것과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하니,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대해서 염려와 근심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7.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언뜻 보면 굉장히 은혜로운 말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간다. ‘먹고사니즘’은 쓸데없는 것이니까, 그런 거 다 내팽개치고 그냥 교회 일만 열심히 하면서 교회에서 살라는 뜻인가?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대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그냥 주구장창 교회일만 소중히 여기고 다른 일들은 대충대충 하라는 뜻인가? 그래도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이 없는 것일까? 그렇게 살면 엘리야처럼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뜻인가?

 

8. 누가복음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자, 소위 사회적 약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복음서이다. 그렇다고 누가복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그저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먹을 것 입을 것 다 공급해 주시니까 그냥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베어 있는 말이긴 하지만, 굉장히 현실에 대해서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인 속담이기도 한다.

 

9.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자포자기한 현실에 대하여 강력한 저항이요 희망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이 말 속에는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하여 아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통찰과 소망이 담겨 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모든 이들이 먹는 것과 입는 것 때문에 하는 염려와 근심에서 놓임(구원)을 받게 된다.

 

10. 구약성경에서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율법이 잘 지켜지면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받기 때문이고, 율법 정신이 지켜지면 그 누구도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염려와 근심을 하지 않고, 모든 이들이 더불어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는 문제는 단순히 종교적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문제고,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더불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 28:12).

 

11.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임재는 이렇게 나타난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33절). 팔아야 나눌 수 있는 것은 부동산이다. 집이나 땅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토지에 관한 율법의 정신이 담겨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분배를 통해서 소유하게 된 자신의 땅 외에 다른 이들의 땅을 더 소유할 수 없으며, 만약 다른 이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을 희년(Jubilee)라고 한다.

 

12. 누가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구제(charity)’는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차원의 일이 아니다. 성경의 구제는 단순히 자기의 소유 중 얼마를 떼어서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다. 성경의 구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이러한 구제는 하늘에 마음을 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령한 행위이고 믿음의 행위이다. 구제는 사회적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그 근원에서부터 해결하게 해 주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이다.

 

13. 사실, 복음서의 말씀은 너무도 전복적이라, 우리 시대에 이 말씀을 온전히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다. 기독교 인구가 줄어드는 원인이 여러가지 있으나, 사람들은 대개 교회 구성원(목회자나 성도들)의 부조리를 그 일차적인 원인으로 지적한다. 그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나 정확하지는 않다.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나? 다른 말로 해서, 일차적으로 “땅(집)은 하나님의 것이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나? 그래서 자기에게 분배된 땅이나 집 외에 다른 땅이나 집에 대한 탐욕을 버릴 수 있나? 게다가, 혹시 어떤 이유로 다른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땅이나 집을 자신이 가지고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그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원래 주인(또는 땅이나 집이 없는 이)에게 되돌려줄 수 있나?

 

14. 이러한 일은 교회의 구성원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전복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에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단순히 교회 구성원의 부조리 때문이라고, 모든 쇠퇴의 원인이 교회 자체에 있는 양 손가락질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누가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구제(charity)’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누가 자기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사람이 있는가? 다른 말로, 땅이나 집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필요 이상의 땅이나 집을 아낌없이 내어놓아 땅이나 집이 없어 염려와 근심 가운데 사는 이들을 구제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2절). 왜 제자들을 향해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할까? 당연하다. 일단 이렇게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려는 자 자체가 적고, 그렇게 산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더 많은 땅과 더 많은 집을 소유하기에 혈안인데, 자기 혼자서 땅과 집을 팔아서 구제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

 

16. 이 말씀을 나누고 있는 우리들조차도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에 대해서 아주 냉소적인 마음을 갖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게 가능해? 이러다 나만 오히려 가난해지는 것 아니야? 이러다 나만 바보 되는 거 아니야? 나는 이 말씀을 선포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강요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이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한 지를 말씀에 비추어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땅에 있는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하늘에 있지 못한 지를 보았으면 한다.

 

17.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죄책감을 주려는 게 아니다. 죄책감을 발생한 문제, 당면한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다. 죄책감만 갖는 이들은 그냥 죄책감 속에서 생명을 소진하고 말 것이고, 인생을 한 발자국도 전진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모습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탐심을 물리치는 것, 즉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 하는 욕심을 내려 놓는 것, 그리고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는 것, 즉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 다른 말로 해서, 모든 이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악한 것에 생명을 빼앗기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것 때문에 아직도 세상에는 가난이 끊이지 않아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우리의 믿음의 분량만큼 더 좋은 세상,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면 좋겠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하늘에 마음을 둔 사람이 되어가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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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8. 9. 18:42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호세아 11:1-11, 누가복음 12:13-21)

 

주님, 힘을 좀 내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불안한 이유, 우리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무엇도 영원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구원을 주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유혹하는데

우리는 그것에 이끌려 그것을 통해 구원을 갈망하고

구원을 확보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영원하시며 참된 구원을 베푸실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주님,

우리는 어떤 어리석은 자입니까?

어리석은 부자처럼, 또는 호세아서의 이스라엘처럼 자기 스스로 확보한 구원에 의지하면서 만족하며 살가는 자입니까?

아니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오직 구원은 하나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믿으며

주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겠다고 결단한, 어리석은 자입니까?

이것도 어리석은 자이고, 저것도 어리석은 자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자로 살아가기 보다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은 자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길이고

우리를 부르신 길이고 좁은 길이고, 결국 승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시나무처럼 우리의 마음을 떨게 만드는 세상에 굴복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탐심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십자가 위에서 몸소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8. 9. 18:40

어떤 어리석은 자 what kind of fool am I?

(호세아 11:1-11, 누가복음 12:13-21)

 

1. 솥뚜껑을 보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배고픈 사람은 먹는 게 생각날 것이다. 가마솥에 끊인 국이 생각나든지, 아니면 솥뚜껑에 구워 먹는 삼겹살이 생각날 것이다. 또한 한국 속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를 떠올리며 자라나 거북이 같은 것을 생각할 것이다. 이는 모두 솥뚜껑과 연관된 언어들이다. 이렇게 어떤 것을 매개로 다른 것을 연상하고 설명하는 것을 ‘비유’라고 한다.

 

2. 비유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서 우리가 모르는 다른 어떤 것을 설명해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자라나 거북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려면 서로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설명해야 할 텐데, 서로 솥뚜껑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있다면, ‘자라 또는 거북이는 솥뚜껑처럼 생겼어’라고 설명할 때, 자라나 거북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3. 비유는 대상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묘사해 주고 설명해 주고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지만, 한계를 지니고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솥뚜껑이 곧 자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호세아서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비유적이다. 인간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랑에 빗대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4. 호세아서는 크게 두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는 남녀 간의 사랑(부부 간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다. 남녀 간(부부 간)의 사랑과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남녀 간(부부 간)의 사랑과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비이다. 우리가 온전히 경험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 간(부부 간)의 사랑이나 부모 자식 간의 사랑에 빗대어 말해진다.

 

5.  호세아서 11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부모 같은 심정으로 자식 같은 이스라엘을 얼마나 절절하게 사랑하시는 지를 알 수 있다. 호세아서 앞부분에서 비유로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 간(부부 간)의 사랑이라 격렬하다. 거기엔 격정과 질투, 그리고 분노가 가득 차 있다. 그런데 호세아서 후반부에서 비유로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라 애달픔이 가득 배어 있다. 하나님은 자식 같은 이스라엘에게 걸음마도 가르치고, 품에 안아서 얼루기도 하고, ‘사랑의 줄’로 이끌기도 하고, 멍에를 벗겨 주기도 하고, 먹을 것을 주기도 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양육했다. 아주 정성스럽게.

 

6. 대개 보통 이렇게 양육을 받으면 자식은 부모를 알아보고 부모의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가가 보여주고 있는 자식 이스라엘의 모습은 전형적인 배은망덕의 모습이다. 이런 자식을 후레자식(bastard/막돼먹은 놈)이라고 한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 11:7). 한 마디로, 자식 같은 이스라엘은 부모 같은 하나님을 떠났다는 뜻인데,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까?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떠났을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로 간다.

 

7. 누가복음에 나오는 소위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는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을 때 발생한 이야기이다.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한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재산이 많았던 집안인데, 아마 아버지가 죽고 나고나서 재산 분쟁이 있었던 모양이다. 재산 분쟁을 하고 있는 형제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1). 그리고 나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를 좀 더 깊게 설명하기 위해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8. 비유 속에 등장하는 부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20절에 나온다. “어리석은 자여!(You fool)” 비유 속의 부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왜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렇다면, 현실 속의 형제들, 즉 재산을 가지고 서로 분쟁하고 있는 이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라가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부자’처럼 어리석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하다.

 

9.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삼가 모든 탐심(All kinds of Greed)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절)라는 말씀을 설명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용어는 ‘탐심(플레오넥시아)’이다. 탐심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해명하는 것이 핵심 포인트이다. 탐심하고 비슷한 용어는 탐욕, 욕심, 욕망 등이 있다. 탐심에는 ‘질이 더 좋은, 우수한, 더 탁월함, 더욱 위대한, 더욱 긴, 더 큰 부분’을 의미하는 단어 ‘플레이온’이 들어가 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소망하면서 산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질이 더 좋고 우수하고 더 탁월한 것을 사고 싶지, 질 나쁘고 형편없는 물건을 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10.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어리석은 부자’라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지향은 그 어리석은 부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와 똑 같은 삶의 방식 가운데 살면서 그를 욕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 또는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도 그렇게 ‘탐욕스럽게’ 살면서, 왜 아닌 척하는가? 곡식의 소출이 풍성하면 더 큰 곳간을 지어야 하고, 곳간이 가득 차면 평안한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소망하며 산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여!’라는 소리 들어도 좋으니까, 부자로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11. 성경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모두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탐심이 구원을 방해한다. 그래서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 탐심이 작동하는 방식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도 탐심이 작동한다. 탐심은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려고 하는 자기 구원의 욕망이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욕망이 꿈틀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는 말로 포장하고, 삶의 구원을 위한 개인의 노력을 최고의 가치로 부추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개인이 노력한 만큼 ‘소출을 쌓아 놓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지 그 분배가 노력에 비례할 때는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만, 반비례할 때는 불의하다고 생각하며 폭동을 일으킨다.

 

12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그러한 우리의 생각을 전복시키신다. 부자는 자신이 소출이 많아 곳간을 크게 짓고, 큰 곳간을 가득 채운 것에 만족하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절). 부자의 만족은 다른 만족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을 확보했다는 데서 오는 만족이다. 우리도 그렇게 산다.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직장, 집, 자동차, 각종 재산들, 등을 보면서 우리는 만족해 한다.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감사를 ‘하나님’에게 드린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여 얻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안심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삶의 토대가 여전히 ‘소유’에 있다는 것이다.

 

13. 그런데, 어리석은 부자 비유 말씀에서 아주 기막힌 반전이 일어난다. 부자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 원래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논리상 맞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소출을 도로 찾으리니 그래도 네가 평안하겠느냐?”

 

14 위의 두 가지 말씀 중, 우리는 어떠한 말씀에 더 분노할까?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일까, 아니면,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아마도 모든 사람들)은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더 분노할 것이다. 왜 그럴까? 탐심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확보한 구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일까, 아니면,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일까? 후자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후자처럼 산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느라, 힘들고 어렵게 산다.

 

15.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분노를 사고 있는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들이 부모와 같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고, 결국 앗수르에게 기대어 살았다. 그런데 어떤가? 그들이 기댔던 앗수르는 영원히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만족할만한 구원을 베풀었는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기댔던, 구원을 간구했던 바로 그 앗수르에게 망한다. 그리고 앗수르는 영원했는가? 아니다. 앗수르는 얼마 안 가서 바벨론에게 망한다. 이스라엘은 영원하신 하나님, 그들에게 참된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만을 갈망했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영원하지 못한 것에서 구원을 갈망하다가, 갈망하던 바로 그것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만다.

 

16.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부자가 ‘어리석은 자여’라는 호칭을 들은 이유는 그가 스스로 구원을 확보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단순히 구원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뻔한 설교인가? 그렇지 않다. 구원을 스스로 확보한, 부자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별로 없다. (요즘 불평등의 문제는 최고로 심각하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서 수많은 염려 가운데 살아간다. 삶에 걱정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근심 걱정 가운데 살아간다. 왜 그럴까?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여 확보한 ‘소출’을 구원의 토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17. ‘어리석은 부자’에 이어 나오는 말씀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눅 12:22-23). 그러면서 예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절)라는 말씀을 하신다.

 

18. 세상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라고 말한다. 자기의 구원은 자기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정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근심과 염려 가운데 치열한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성경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목숨과 몸을 위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평강 안에 머물라고 말한다.

 

19. 우리는 여기서 결단에 직면하게 된다. 어떤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인가?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려고 했던 부자를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며 한탄하신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여 사는 듯한 부자를 부러워하고 그 사람처럼 열심히 살라고 부추긴다. 그러면서, 구원을 하나님께 맡기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한다. 이렇게 세상은 ‘어리석은 자’와 ‘어리석은 자’가 공존하고 대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어리석은 자가 되고 싶은가? What kind of fool am I?

 

20.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었던 그 사람, 무리 중에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요청했던 그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여전히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느라 형과 재산 분할 소송을 진행하여 자신이 소송을 통해 확보한 재산에 만족해하며 그 재산에 기대어 살았을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는 것을 깨닫고 넉넉한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사는 세상이 이해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을까?

 

21. What kind of fool are you? 여러분은 어떤 어리석은 자인가?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열심을 다해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인가? 아니면, 열심히 살고 기쁘게 살지만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삶이 기쁘고 즐거워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인가?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려는 자에게는 불안이 엄습해 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원은 주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를 평안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결국 구원의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어떤 어리석은 자인가. What kind of fool am I?

 

* 이 글은 2017년 11월 23일 포스팅한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의 확장 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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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