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2. 8. 29. 13:24

은혜 받은 자로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예레미야 2:4-13, 누가복음 14:7-14)

 

주님,

구약성경을 보면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나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너무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님,

은혜 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시고

이왕이면 장자의 복 받기를 사모하게 하셔서

우리의 갈망이 늘 주님을 향하게 하여 주옵소서.

은혜 받은 자는 결코 죄책감에 휩싸이거나

차별적 시선으로 내가 다른 이들과 같이 곤경에 처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한 마음으로

이 땅의 모든 이들을 주님 안에서의 형제자매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그들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삽니다.

주님, 부질없는 것,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복된 존재가 된 것을 저버리고

헛된 존재로 전락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지키게 하옵소서.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고

주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언제나 어디에서나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하옵소서.

사는 동안, 은혜 받은 자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는 진리를 눈으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8. 29. 13:22

은혜 받은 자가 사는 법

(예레미야 2:4-13, 누가복음 14:7-14)

 

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특별한지, 그 특별함을 나타내는 용어가 등장한다.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이라는 말과 “그의 소산 중 첫 열매”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은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에 빗대어 말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사랑을 말할 때는 ‘헤세드’라는 말을 떠올려야 한다. 헤세드는 ‘언약적 사랑’을 말한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매우 사적인 감정 차원에서만 통용되는 우리 시대에 ‘헤세드’가 무엇인지 체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적 사랑과 대비되는 공적 사랑이라는 말로 헤세드를 다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공적 사랑이라는 말도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아무튼 헤세드란 감정에 기초한 사랑이 아니라 언약에 기초한 사랑이다.

 

2. 하나님과 언약적 사랑 안에 거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정말 큰 은혜이다. 헤세드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안에 거하게 된 것이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헤세드의 첫 열매였다. 첫 번째 것은 언제나 특별하고 귀한 법이다. 성경에 보면, 첫 번째 열매(그것이 자식이든 곡물이든)는 하나님의 것으로 따로 구별하였다. 그만큼 거룩함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장자는 다른 자식들에 비해 두 배의 유산을 물려 받기도 했다.

 

3. 장자의 축복을 사모하는 일은 참 복되고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기 때문이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생물학적 장자는 르우벤이었지만, 실질적 장자는 요셉이었다. 창세기 후반부를 장식하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장자의 축복을 받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했던 요셉은 결국 자신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열 두 지파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장자가 받는 두 배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얼마나 복되고 즐거운 일인가.

 

4. 열왕기하에 등장하는 엘리사도 스승 엘리야에게 ‘갑절의 능력’을 구했다.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에게 갑절의 능력을 구한 것은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갑절의 능력을 보유해서 더 큰 이적과 기적을 행사하고 싶다는 욕심이 아니다. 엘리야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선지자 생도 집단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 중 엘리야의 뒤를 이어 엘리야의 사역을 그대로 잇는 선지자는 한 명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엘리사는 바로 자신에게 그 자리를 물려 달라고 한 것이다. 즉, 엘리사는 엘리야로부터 장자의 복을 간구했던 것이다. 장자의 복을 간구했던 엘리사는 끈질기었다. 끝까지 엘리야 곁을 지켰다. 그래서 엘리사는 결국 갑절의 능력, 곧 장자의 복을 받는다. 아이들에게 성경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권면하는 일은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그리고 마땅한 신앙교육이다.

 

5. 모세 5경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은총)를 크게 입은 사람들인지 자세하게 보여준다. 이런 나라와 민족이 없다. 부럽다. 그런데, 열왕기상하를 지나 선지서에 이르면 그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나라와 민족이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는지, 이해도 안 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향해 성토는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토록 받은 이스라엘이 어쩌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버렸는가,이다. (이 주제는 로마서에서도 지속되어 언급될 정도로 불가해한 사건이다.)

 

6.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끌어가시는 대화의 요점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묻는다. “너희 조상들이 나에게서 무슨 불의를 발견했다는 것이냐?” 즉,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적 사랑에 소홀한 적이 있었느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이다.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주 세심하게 돌보셨다.

 

7.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두 가지 행동을 폭로하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이 헛된 것을 따라 가서 헛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둘은 긴밀히 엮여 있다. 헛된 것을 따라 가려다 보니,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묶여 복된 존재였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헛된 것을 좇아가니, 그들의 존재가 헛된 존재가 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헛된 것’이라는 용어는 전도서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헤벨’이라는 용어와 같다.

 

8. 마음 아프고 속상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복된 존재였다. 하나님과 헤세드의 사랑을 맺은 존재고, 더군다나 장자의 복을 받은 존재였다. 한 마디로 something special한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은 받은 복을 차버리고 나와 헛된 존재, nothing의 존재로 전락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들에게 벌어지는 일이다. 나 자신, 또는 내 배우자, 자녀들, 부모, 형제, 친구, 이웃 등, 하나님을 떠나 ‘헛된 것’을 좇아가 ‘헛된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즐비하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이들. 내가 그렇게 될까봐, 또는 누군가 그렇게 된 것을 보면서, 마음 아프고 속상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9. 예레미야 2장 13절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이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있는 상태는 ‘악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악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상태를 말한다. 악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을 방해한다. 시련과 고통이 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지 못하는 게 악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은 악인은 형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는 의인은 시련과 고통을 당할 수 있다.

 

10.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다는 것은 ‘생수(생명)의 근원’을 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이들이 행하는 일은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이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는 것은 자신이 이룬 성취에 기대어 스스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탐심을 말한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탐심에 갇힐 수밖에 없다.

 

11. 누가복음은 이러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자, 다른 말로, 은혜 받지 못한 자는 자기 힘을 자랑하며 산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누가복음을 들여다보자.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때로 참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특별히, 질병을 가지고 있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경 읽는 행위가 더 고통일 때가 있다. 누가복음 14장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배경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떡 잡수실 때”이다. 성경에서 안식일은 늘 갈등의 원인이 된다. (왜 그런지, 로마서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12.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 집에서 떡 잡수실 때 수종병 든 자가 있어 예수님은 그를 고치신다. (늘 그랬듯이) 당연히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고통스러운 것은 율법에 신실한 사람들이 병자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물론 그들도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율법에 신실한 사람들(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질병과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았다. 질병과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게 되면 그들이 질병과 장애로 고통 당하는 것은 죄에 대한 마땅한 벌이기 때문에 결코 긍휼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13. 이러한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질병과 장애를 가진 이들이 알게 모르게 죄책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병과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이들은 알게 모르게 스스로 안도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질병과 장애를 가진 이들을 차별하는 시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차별적 시선을 가득 품고 산다. 질병과 장애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질병과 장애가 있는 것을 괴로워 하거나, 또는 질병과 장애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질병과 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문제 있다고 여기는 차별적 시선을 가진 우리 자신이 문제다.

 

14. 우리가 성경을 매우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읽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죄책감이 쌓이고 차별적 시선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질병과 장애가 ‘죄’라는 주제와 엮여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질병과 장애를 가진 자들에게는 매우 불쾌한 것이다. 반대로, 질병과 장애가 없는 이들은 자신들이 ‘죄’라는 주제와 엮여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에 안도의 숨을 쉬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바래시인들이 했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주여, 제가 저들과 같지 않은 것에 감사하나이다!” 이 얼마나 불경한 기도인가.

 

15. 나는 은혜를 받지 못한 자와 은혜 받은 자와의 결정적인 차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데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2-14).

 

16. 성경에서는 안식일과 더불어 ‘밥 먹는 일’이 계속해서 트러블 메이커로 등장한다. (이것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로마서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잔치는 단순한 잔치가 아니다. 밥 먹는 일이다. 음식정결법에 대한 것이다. 정결법에 의하면, 부정한 것은 입에 대지 말아야 하고, 부정한 사람들과는 함께 밥을 먹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잔치를 베풀거든,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위에서 말한 것에 의하면,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은 죄의 결과로 그렇게 된 이들로서 이들은 부정한 자들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밥 먹는 일은 정결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칭 의인들은 이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았다.

 

17. 성경을 읽으면서 매우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기도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을 완전히 새롭게 바로 잡아 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죄책감과 차별적 시선을 말끔하게 거두어 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의인들아, 죄인들과 밥 같이 먹어라!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이냐. 네 생각에 너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네가 죄인이다. 너희들이 정죄하는 그 죄인들이 오히려 의인들이다. 그들은 너희들처럼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18. 역설적인 말이지만, 은혜 받지 못한 자는 자기 힘을 자랑하며 산다. 다른 말로, 자기 스스로 의인이라고,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내가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은혜 받은 사람이고, 내가 의인이 아니면 누가 의인이냐고 스스로 만족하며 자기를 자랑하며 산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죄책감에 휩싸이지 않고, 그리고 더불어 차별적인 시선을 전혀 갖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정죄할 수 있겠는가.

 

19.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만큼 복된 인생은 없다. 하나님은 생수(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서 절대로 스스로 웅덩이를 파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예배이다.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되, 장자의 복 받기를 사모하라. 다른 욕심은 부질없는 것이나 하나님께 장자의 복 받기를 바라는 욕심은 거룩한 것이다. 이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그들이 생수(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사는 법을 기억하라. 부질없는 죄책감을 갖지 말고, 알량한 차별적 시선을 버리라. 질병, 장애, 이런 것들을 죄와 결부시켜 생각하지 말라. 그런 개념 자체를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삶 속에서 지워버리라. 성경이 혹시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들거든 오히려 성경을 태워버리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인 것을 기억하라. 그러니, 은혜 받은 자로, 서로 사랑하며 살라.

Posted by 장준식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교회에 남긴 숙제

 

지난 100년 동안 세계사에서 있었던 일 중 모든 인류에게 동시에 고통을 안겨주었던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2차 세계대전 정도를 손에 꼽을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이번 바이러스 팬데믹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 겪는 일로 기록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 인구의 3분의 1을 거둔 흑사병 같은 경우도 유럽에서만 발생한 국지적인 바이러스 피해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은 명실공히 전세계를 휩쓴, 말 그대로 ‘팬데믹’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대 유행 감염병입니다.

 

근대에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신체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물학의 발전과 더불어 의학이 발전되고, 의학의 발전은 인간 신체에 대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미셸 푸코나 조르조 아감벤 같은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생명정치(biopolitics)’라 부릅니다. 인간의 신체가 지배의 영역에 놓이게 된 것이죠. 즉, 우리의 신체는 지배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팬데믹을 통해서 그 사실이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났죠. 팬데믹 동안 우리가 우리의 신체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정부의 통제에 따라 일정 기간 꼼짝없이 감금당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모두 공중보건이나 사회적 안전의 이름 하에 시행되는 일들입니다. 여기에 저항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탈리아인들은 전염을 피하려고 평범한 일상, 사회관계와 직장, 심지어 우정과 사랑, 혹은 종교적∙정치적 신념까지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했다는 것이다. 벌거벗은 삶, 그리고 삶을 잃는 두려움은 인류를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라 눈을 멀게 하고 분리하게 한다”(조르조 아감벤, <얼굴 없는 인간> 46쪽).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교회에 남긴 숙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아감벤이 팬데믹 사태를 고찰한 이 책을 세 번 정도 정독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는 성육신, 또는 성만찬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성만찬을 통해서 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육신은 현장성, 그리고 현재성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이 성육신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한 덩어리의 떡을 떼어서 서로 나누어 먹고, 한 주전자의 포도주를 서로 나누어 마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이 교회에 안겨준 가장 큰 시련은 성육신 신앙과 성만찬 공동체를 멈추어 세웠다는 것입니다. 팬데믹은 교회로부터 현장성을 빼앗아 갔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일을 제거했습니다. 예배는 결코 ‘설교를 듣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데, 가뜩이나 예배가 ‘설교 듣는 일’로 축소된 한국 개신교 상황에서 예배가 더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현장성을 확보할 수 없었던 교회의 예배는 인터넷을 통한 일방적인 소통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서로 접속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장성과 현재성의 부재가 길어지면 성육신 신앙과 성만찬 공동체는 와해되기 십상입니다.

 

현장성이 결여된 인터넷 예배는 편리성과 안도감을 제공해 주지만, 이는 초대교회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배격했던 영지주의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이원론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을 세워가려 했던 사람들로서, 그들은 육신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신학을 가현설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정말로 육신을 입은 게 아니라 육신을 입은 것처럼 보일 뿐이고 실제로는 육신을 입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도 육신의 죽임이 아니라 육신이 죽은 척했을 뿐 예수의 영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주장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의 토대 위에 기독교 신앙을 끼워 맞추려 했을 뿐, 기독교가 가진 성육신 신앙의 깊이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실천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영지주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은 물질세계에 대한 관심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물질에 갇힌 영을 원래 있던 하늘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기에, 악한 물질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고, 악한 물질세계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온갖 악한 일들은 사악한 물질세계에 대한 심판일 뿐, 그것을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던 것이죠. 그들에게 구원은 영지(어떤 깨달음)를 통해 영이 육신을 탈출하는 것이니까요.

 

조르조 아감벤은 그의 책 <얼굴 없는 인간>에서 정말 중요한 말을 합니다. “얼굴은 가장 인간적인 장소다. 인간은 단순히 짐승의 주둥이나 사물의 앞면이 아닌 얼굴을 갖는다. 얼굴은 가장 개방성이 있는 장소다. 얼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을 나눈다. 이것이 얼굴이 정치적 장소인 이유다. 지금의 비정치적 시대는 진짜 얼굴을 보고 싶어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더는 얼굴이 없어야 하고, 숫자와 수치만 있어야 한다. 독재자도 얼굴이 없다”(138쪽). 팬데믹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최고의 도전은 ‘얼굴 없는 인간’의 도래라는 것입니다. ‘얼굴이 없다’는 것은 현장성과 현재성이 결여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얼굴을 서로 맞대고 볼 때만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얼굴이 정치적 장소라는 뜻은 얼굴을 맞댄 인간들의 사귐만이 세상을 바꿀 힘을 잉태한다는 것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들의 만남은 정치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아감벤에게 정치는 사람을 통제하는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얼굴 없는 인간은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가해진 공포심, 그것은 자신의 신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지 모른다는 공포심입니다. 그 공포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는 듯합니다. 그 공포로 인해 우리는 성육신 신앙과 성만찬 공동체를 기꺼이 포기하는 듯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서로 볼 수 없는 틈을 타서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교회 떠나기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팬데믹이 가져다 준 풍경, 얼굴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니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교회를 지키는 사람도 서로를 간섭하지 못합니다(또는 사랑으로 보듬지 못합니다). 매우 슬픈 일입니다.

 

팬데믹이 교회에 남긴 숙제는 단순히 ‘어떻게 교회 성장을 다시 이룰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닙니다. 교회의 규모가 아무리 커도 그 교회가 ‘얼굴 없는 사람’의 모임일 뿐이라면, 결국 교회는 아무런 정치적 힘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교회의 규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그 구성원들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인간과 하나님을 그리워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더라도, 주님은 그곳에 계시고, 두 세 사람이라도 얼굴과 얼굴을 진실하게 맞대어 세상을 바꾸는 힘을 모을 때,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움을 내려놓고, 얼굴을 보여주세요. 얼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고, 얼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세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우리 함께 세상을 바꾸어 갑시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8. 28. 04:11

기뻐하는 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예레미야 1:4-10, 누가복음 13:10-17)

 

주님,

우리는 자꾸 우리 자신을 특별한 위치에 올려 놓으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 일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기쁨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주님,

우리는 그저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기뻐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예레미야처럼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푸는 일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주님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평범하지만, 단순히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온 무리처럼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일 하나에도 서로 축하해 주고 격려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 일이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고, 기적을 베푸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평범한 우리의 일상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깨알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큰 기쁨 하나보다

작은 기쁨 여럿이 우리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오니,

주여, 우리가 기뻐하나이다.

우리의 기쁨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8. 28. 04:10

부끄러워하는 자와 기뻐하는 자

(예레미야 1:4-10, 누가복음 13:10-17)

 

1. 예레미야의 말씀은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는 장면으로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이들이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보면 대개 매우 드라마틱하다. 사무엘 선지자의 이야기도 그렇고, 이사야 선지자의 이야기도 그렇다. 사무엘 선지자의 부르심에는 어린 사무엘의 순진함이 베어 있고, 이사야 선지자의 부르심에는 이사야 선지자의 결기가 묻어 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2. 예레미야 선지자의 부르심에는 신비와 저항이 묻어 있다. 이런 말씀은 매우 신비롭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5절). 예레미야가 산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그의 부르심은 매우 이례적이다.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세 왕은 여호아김, 여호아긴, 시드기야이다. 여호아김 왕 때 이미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정복되었고, 마지막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이 격랑의 시대에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이 예레미야인데, 이 부르심이 예레미야에게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3. 정황상,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가 청소년 시절을 보낼 때인 것 같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나타나 그를 부르실 때 예레미야는 이런 말을 하며 그 부르심에 저항한다. “저는 아이라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6절). 이사야 선지자의 대답,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세요!”와는 매우 대조적인 대답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예레미야의 저항은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절대적인 경험이기에 결국 그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다. 순종은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자유의 완성이고 은총의 수용이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임하는 법이다. (폭풍 속에서도 고요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갖게 된다.)

 

4.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보듯) 구한말 한국의 역사를 떠올려 보면, 예레미야의 부르심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10절). 남유다 왕국(이스라엘)의 멸망은 국제관계가 얽히고설켜서 발생한 일이다. 그 격변이 왜 발생을 했으며, 그 격변을 통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 격변이 남유다 왕국을 비롯한 세상의 나라들을 어떠한 미래로 이끌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말씀 선포가 예레미야의 소명인 것이다.

 

5. 이런 소명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 두 가지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는 ‘나도 이 사람처럼 소명을 받았으면 좋겠다.’라는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는 반응이다. 소명(召命)은 문자적으로 ‘어떤 일이나 임무를 하도록 부르는 명령’을 뜻한다. 이걸 좀 더 강력하게, 은혜롭게 표현하면, 소명이란 ‘부름 받은 목숨’이라는 뜻이 된다. 좋은가, 부담되는가?

 

6.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시다가 열여덟 해 동안 귀신 들려 앓으며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성을 치료하시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4장에서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과 연관된 이야기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포하신다.

 

7. 그런데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병든 여성을 치료한 행위를 두고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린다. 치료 받은 당사자는 당연히 너무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데 회당장으로 대표되는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14절).

 

8. 안식일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안식에 대한 선취이다.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런 안식일에 병에서 놓임을 받는 것, 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안식을 얻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고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안식일에 발생한 일을 두고 불평했다. 그 불평하는 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통쾌한 한 방이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9.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말씀은 17절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여기에 보면, 부끄러워하는 자가 있고, 기뻐하는 자가 있다.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는 엄청 중요한 말씀이다.

 

10. 우리가 살면서 예레미야처럼 소명을 받고, 예수님처럼 이런 기적을 베풀 일은 별로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꾸 소명 받는 것에 대한 부담감, 기적(선한 일)을 베풀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기 쉽다.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지 못하고 남을 감동시키는 선한 일을 하지 못하면 신앙이 뒤처진 것처럼 주눅이 든다. 가령 이런 것이다.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아 주의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 기적(선한 일)을 베푸는 사람은 1등 그리스도인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2등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한다.

 

11. 그런데, 사실, 우리는 대개 평범한 그리스도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은 경험도 없고,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푸는 능력(선한 일)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하는 영성은 어떻게 하면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을까, 어떻게 하면 기적을 베풀 수 있을까,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온 무리가 예수님을 향하여 했던 바로 그 반응이다.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12.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자꾸 우리 자신을 예레미야와 동일시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 시 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렇다 보니, 예레미야와 같이 드라마틱한 소명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하고,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푸는 일(선한 일 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조바심을 내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에 기쁨으로 반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13. 주목받지 못하고 자신의 권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복음 이야기에 등장하는 회당장 같은 사람들이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 때문에 고생을 하던 한 사람이 그 병에서 놓임을 받게 되었는데,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런데, 회당장과 그 무리들은 거기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 은혜가 기쁨이 아니라 분노였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권위가 그곳에서 드러나지 않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에게 임한 것은 부끄러움뿐, 하나님의 은혜가 주시는 기쁨을 선물로 받지 못했다.

 

14. 물론 예레미야처럼 드라마틱한 소명을 받는 것을 갈망하는 영성도 있고, 예수님처럼 기적(선한 일)을 베푸는 것을 갈망하는 영성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특별하다는 것은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해서 들어주시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냥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임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 우리가 마음 쓸 일이 뭐가 있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것이다.

 

15. 우리가 배워야 하는 영성은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는’ 영성이다. 누군가 잘 된 것을 축하해 주고, 누군가 병에서/어려움에서 놓임 받은 것을 축하해주고,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을 함께 기뻐해 주고, 나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소한 하나님의 은총에 기뻐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영성. 기쁨을 주는 영성이라기보다 그저 기뻐하는 영성!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기뻐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 부끄러움에 처해지지 않기 위하여서라도, 우리는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미식’이란 말을 아세요?

 

3년 전, 팬데믹이 오기 전, 우리는 ‘창조론과 기후위기’라는 특강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창조론)이 어떻게 기후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었죠. 기억 나시죠? 그때 우리 ‘인류세’라는 용어가 무엇인지도 배웠잖아요. 인류세가 무슨 용어인지 모르는 사람은 세금의 한 종류인 줄 알지만, 이것은 기후위기에서 비롯된 지구과학(지질학) 용어입니다. 인류세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 파울 크루첸이고요. 2000년 2월 멕시코에서 열린 지구환경 관련 국제회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홀로세(Holocene)가 아니라 인류세(Anthropocene)에 살고 있습니다.”

 

홀로세는 약 11,650년 전 시작된 지질대를 말합니다. 홀로세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완전(Holo’)이라는 말과 ‘새로운(cene)’이라는 말이 합쳐진 용어로, ‘완전 새로운 시대’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빙하기(the last Ice Age)가 끝나고 시작된 홀로세는 지구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기후를 유지했습니다. 그 덕분에 현생 인류가 출현하고,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번성하고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죠. 그런데 지구 역사에서 지질대에 인류가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인류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힘에 압도되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류는 자연의 힘을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지질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는데, 20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인류는 자연의 힘을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지구과학적 현상을 일컬어서 ‘인류세(Anthropocen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지질대가 지구과학에서 공식적인 지질대 용어가 되었지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홀로세에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류세에 삽니다.

 

지구 역사에서 기후의 변화는 매우 자연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기후의 변화가 더 이상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 때문에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이것을 기후위기라고 부르는데, 자연적으로 온 위기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외부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온 위기면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을 텐데, 스스로 위기를 불러온 것이라면 아주 큰 문제가 됩니다. 지금 인류는 스스로 멸망을 향해 가는 중입니다. 지금 당장, 내가 나를 총으로 쏴서 죽이는 것만 자살이 아닙니다. 인류는 집단적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있는 중입니다. 집단적인 행동이다 보니 경각심이 덜 하고, 윤리적 부담이 적을 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라는 본질은 같습니다. 매우 심각한 상황이죠.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도서 중 <기후미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직업환경의학·생활습관의학 전문의 이의철 작가의 책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미식’이라고 하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을 ‘미식가’라고 하고요. 이러한 뜻을 가진 ‘미식’ 앞에 ‘기후’ 자가 붙어서 ‘기후미식’이라는 말이 탄생한 겁니다. 무슨 뜻일까요? 작가는 그 뜻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기후미식은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하고,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염두에 둔 음식을 준비하고 접대하는 행동을 말해요. 2019년 여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본 단어죠. 행사 홍보 깃발에 ‘기후미식 주간’이라고 써 있었어요. 프랑크푸르트는 2014년부터 매년 기후미식 주간 행사를 열어왔더라고요. 규모가 커져 지난해부터는 ‘기후미식 축제’로 이름을 바꿨고요. 음식을 기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단어를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그 이후 기후미식에 대해 알리고 있죠.” (한겨례 신문 인터뷰 중)

 

기후위기에 대한 의사 이의철 작가의 말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서 완전 다른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기후위기를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으로 생각하죠. 그래서 우리는 석탄 연료를 덜 쓰기 위한 방안들을 구체적으로 내놓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의철 작가의 말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일깨워 줍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한국인이 먹는 정도로 인류가 음식 섭취를 하려면 지구가 2.3개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동물성 식품 소비와 식용유 소비가 늘어서라고 합니다. 육류와 식용유 섭취가 늘면서 산림 파괴가 더 심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내놓은 2019년 8월 ‘기후변화와 토지’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인류가 식습관을 바꾸어 고기·생선·달걀·우유 등 동물성 식품을 순식물성(완전 채식) 상태로 바꾸면 온실 가스 배출량의 17.4%를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화석연료 소비를 줄여서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16.2%보다 높은 수치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류의 식습관을 바꾸는 일이 화석연료 안 쓰는 일 보다 지구를 살리는데 더 효과적이고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 이의철 각자의 주장이 매우 눈에 띕니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 탄소 배출에만 집중하기엔 기후위기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전방위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은 물론, 식습관을 바꾸는 것에 더해서 해양생물 보호도 시급한 과제라고 말합니다. 해양생물은 육상생물과는 달리 죽어서도 몸속에 저장된 탄소를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해양생물은 탄소 배출을 막아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빠서가 아니라 바빠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잘 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조금만 시간 내어 함께 배우고 깨우치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있을 텐데, 먹고사니즘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살다 보니 우리는 우리가 지금 죽음을 향해 달려 가고 있는 사실조차 모르고 삽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지금 배우고 격려하고 실천해야 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그동안 잠시 멈췄던 ‘기후위기 프로젝트’를 다시 가동하려고 합니다. 기독교 창조론에 대하여 공부할 뿐 아니라, 실제로 탄소배출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보다 우리의 식습관을 바꾸려면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며 어떤 먹거리들이 필요한지, 그리고 해양생물 보호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배우고 격려하고 실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합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기후미식 행사를 세화교회에서 열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배우고 격려하고 실천하면서 기후미식 행사를 차츰 키워 나간다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기후미식 축제처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이 시대를 선도하는 좋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배우고 격려하고 실천합시다.

Posted by 장준식

['로마서에 가면'을 읽고]

 

저자(비벌리 가벤타)는 '로마서에 가면' 다음 네 가지를 하라고 알려준다. 1) 지평을 살펴보세요, 2) 아브라함을 떠올려 보세요,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요, 4) 서로를 받아들이세요.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자신의 수업 때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로마서 과제를 못하겠다고 포기해 버린 한 학생처럼 로마서를 읽으며 로마서가 가진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저자의 바람은 충분히 성공적인 것 같다. 로마서에 가면 위의 네 가지 요점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하라는 저자의 말과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로마서에 가서 길을 잃지 않게 끔 충분히 이끌어 주는 네비게이션과 같다.

 

무엇보다, 내용이 논쟁적이지 않아서 좋다. 물론 저자의 입장과 해석이 깊이 들어간 책이지만 로마서에 대한 논쟁을 이끌지 않고 자신의 입장과 해석을 담담한 필체로 설명해 나가는 것이 꽤 설득력 있다. 저자는 겸손하게 로마서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해석을 내놓는다. 우리가 저자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더라도 저자의 겸손한 주장에 대하여 귀 기울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

 

이 책은 내가 평소에 기독교 복음에 대하여(또는 로마서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의문들을 잘 해소해 주었다. 미국의 복음주의 영향 때문에 한국 기독교가 가진 구원의 개인주의화에 대한 비판이라든지, 기독교의 '죄' 개념을 너무 협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라든지, 반대유대주의라든지, 행위의 문제, 그리고 공동체의 문제 등, 현재 교회 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어색하고 잘못된 신학적 논의들에 대해서 좀 더 정교한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백미는 3장과 4장이다. 3장에서는 윤리와 예배를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예배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환기시킬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예배를 그만 두는 것은 왜곡된 수많은 행동들의 원인"(163쪽)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신학적 분석은 이 땅의 교회들이 예배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도전을 안겨준다.

 

4장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은 그대로 옮겨적는 게 좋을 듯싶다.

 

[바울은 12장의 문맥에서도 이러한 이미지를 토대로 몇 가지 작업을 수행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로부터, 우리가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개념을 추론해냅니다. 서로 지체가 된다는 것은 곧 빠져나갈 수 없는 관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데 모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서로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개념은 주요 서구 세계가 가진 개인에 대한 숭배 ㅡ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요구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상상하게 만듭니다 ㅡ 와 공공연히 출동합니다.

긍정의 측면에서 보면, 바울은 자신의 논지를 발전시키는 도중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영적 선물들(은사들)을 통해 전체에 기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195-196쪽)

 

개인주의 사회, 세속사회, 자본주의 사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로마서가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위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사회는 '개인에 대한 숭배', 즉 개인의 우상화가 이루어진 사회이다. 개인에 대한 숭배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모든 가치의 최종 결정자이고, 자유는 개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개념이고, 세속사회는 신조차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건들 수 없다는, 즉 사적인 영역에서 신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자본(돈)이 가능하게 만든다.

 

흔히 교회를 공동체(community)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교회를 담임해 보면 교회는 공동체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교회는 '믿기로 결단한 개인들의 집합체'로 이해되고 운영될 때가 많다. 위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교회의 구성원은 서로 책임지지 않는다. 지체라는 개념이 없다. 자신의 취향에 안 맞거나 기분이 상하면 교회(공동체/지체)를 빠져나간다. 그러한 행위를 막을 수 없다. 교회는 이미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주의 사회, 세속사회, 자본주의 사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자발적 모임(은혜로 부름을 받은 모임이 아니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그것을 래디컬하게 적용하는 일은 언제나 큰 도전이다.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그토록 많이 하지만, 정작 성경을 정직하게, 합리적으로, 그리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읽는 일에는 늘 실패하는 한다. 성경을 정직하게 읽지 않으니, 교회가 바르게 세워질 수 없을 뿐더러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고 게토화되어 간다.

 

저자는 로마서에 가서 충분히 머물라고 조언한다.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로마서에 가서 충분히 머물 수 있을까? 충분히 머문다는 것은 구석구석 들여다 보며 그것이 구성하고 있는 전체의 의미를 충분히 묵상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로마서의 실제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모습에 비춰본 우리의 교회, 그리고 나 자신, 그리스도인들의 왜곡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충격이 없다면, 우리는 성경을 읽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로마서에 가면, 우주적 지평을 생각해 보고, 바울이 아브라함을 복음에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보고, 윤리와 예배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서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될 때, 우리는 충격을 넘어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로 전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전문가, 저자의 조언대로, 로마서에 가면,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싶다.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기 원하시는 것처럼, "나의 몸을 헌금함에 던지는" 신앙의 전회가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로마서에 가면

 

올해 상반기, 1월부터 5월 마지막 주일까지 우리는 구약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출애굽기>를 살펴봤습니다. 출애굽기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부르는 이유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출애굽 사건의 우주적 확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이야기들과 거기에서 전개되는 신학적 진술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우주적 구원 사건으로 해석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즉, 출애굽기 없이 신약의 복음서를 해석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은 신약에서 아주 정교하게 재현(representation)되고 있습니다. 구약을 어느 정도 깊이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약의 이해 정도가 갈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 경전인 구약성경(히브리 바이블)을 내버리지 않고 기독교 경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깊지 않았던 옛날 초기 기독교 때는 구약성경을 기독교의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마르키온이라는 영지주의자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는 구약성경을 배제한 신약성경만을 근거로 기독교 성경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 일을 열정적으로 진행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마르키온의 복음 이해가 얼마나 일천했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행히 정통 기독교 신학자들은 마르키온 같은 무지한 사람들의 과격한 행동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고, 지금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어우러진 66권을 기독교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모세입니다. 모세오경이라 불리는 토라(Torah)는 율법의 근간이 됩니다. 토라에 대한 이해 없이 유대교 신앙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좀 다르게 모세오경을 해석하고 이해하지만, 모세오경을 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모세오경은 신앙에 절대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울입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는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에 해당합니다. 신약성경의 절반 정도가 바울서신입니다. (물론 13개의 바울서신 중 7개만이 실제로 바울이 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다른 6개의 바울서신이 바울의 이름을 빌려 썼다는 것은 그만큼 바울의 영향력이 컸다는 뜻입니다.) 바울서신, 다르게 말하면, 바울을 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바울(서신)만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는 바울서신뿐 아니라 복음서, 사도행전,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 다양한 복음의 기록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 또한 필수적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난 기독교 2천년의 역사에서 바울서신만큼 기독교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성경도 없습니다. 바울서신을 어떻게 해석했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달라져 왔습니다. 일례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마르틴 루터 같은 경우도 로마서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했을 정도입니다. 그 이후에 특별히 개신교 신학은 바울신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이 갈려 왔습니다. 그만큼 개신교는 바울서신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올해 하반기는 로마서와 함께 하려 합니다. 9월 첫째 주일부터 로마서 설교를 하려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한창 준비 중입니다. 제가 그동안 목회하면서 로마서 설교를 세 번 했는데, 이번이 네 번째 로마서 설교가 됩니다. 이번 로마서 설교는 저에게도 매우 도전이고 뜻 깊을 것 같습니다. 목회와 학문의 경륜이 어느 정도 쌓인 지금, 예전과는 분명 다르게 로마서가 제 마음에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번 로마서 설교에서는 기존의 로마서 해석이 지닌 한계점을 넘어서 최신 로마서 연구가 반영된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가지 어려운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는 요즘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열어가고 미래를 계획하고 미래를 소망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중점을 두면서 로마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작업은 저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화교회 공동체가 올 해 하반기에는 로마서에 집중해서 함께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같은 뜻,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로마서를 제대로 묵상하며 배워보겠다는 의지와 은총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지길 기도합니다. 신앙의 깊이는 성경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정비례합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숨어 계십니다. 우리에게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숨어 계신 게 아니라 우리에게 발견되시기 위하여 숨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꺼이 만나 주십니다. 우리 함께, 로마서 가서 하나님을 만납시다. 로마서에 가면 하나님이 계십니다.

Posted by 장준식

신앙은 자기 혐오가 아니다

 

최근 출간된 책 중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다. 8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를 담담한 필체로 기록한 책이다. 그 중에 ‘끝없이 죄책감을 주는 교회’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교회를 떠난 이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인터뷰어가 이런 질문을 했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신앙심이 크게 고양된 시기나 경험 같은 것이 있나요?” 이에 대하여 인터뷰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삶이 힘들 때 하나님을 찾게 되고 신앙도 강해졌던 것 같아요. 첫사랑이랑 헤어졌을 때, 국가고시 앞두고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아요. 시험에 붙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모든 게 안될 것 같은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거든요. 그때 교회에서 한 3시간을 울면서 기도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아이 낳기 전에도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라는 느낌보다는 내 죄로 인해서 모든 것이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죄책감이 나를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했던 것 같아요. 결혼생활 중 가정폭력을 겪으면서 다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고, 그 이후로는 더는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56쪽).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죄’라는 개념을 통해서만 접하고 이해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감정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자기 객관화 개념이지 자기 혐오를 조장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죄란 하나님과 연합하지 아니하고는 온전한 존재를 구성할 수 없다는 존재론적인 통찰이다. 우리는 죄라는 개념을 통해서 인간인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을 객관적으로 알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파묻혀 있으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을 메타인지라고 부른다. 죄는 바로 메타인지에 대한 신학적 용어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남의 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죄에 대한 인식은 혐오를 불러오면 안 되고 자기 객관화, 상대방에 대한 객관화를 불러와야 한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신학적 메타인지를 통해서만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고, 하나님을 욕망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하는 개념이 바로 ‘죄’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죄’의 개념이 오용되고 남용되어 자기 혐오를 이루고 타인에 대한 혐오를 이루는데 쓰여왔다. 건전한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를 구분하는 방법은 ‘죄’의 개념을 어떤 식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건전하지 못한 교회, 특별히 이단교회는 ‘죄’라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기 혐오를 심어준다. 이는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불안을 유발하게 되고,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메카니즘은 한 인간을 착취하기 쉬운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위의 인터뷰이의 경우에서 보듯이, 죄책감에 물든 사람은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해도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모든 게 안될 것 같은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기도할 뿐이다. 죄책감은 결국 나를 망가뜨리고 관계를 망가뜨리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든다. 이렇게 죄의 개념을 자기 혐오를 이루는 죄책감의 측면에서 유용하는 교회는 떠나는 게 좋다. 신앙은 자기 혐오를 불러오지 않는다. 신앙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온전한 존재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자기 혐오/타인 혐오를 불러오는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는 빨리 떠나는 게 좋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8. 9. 18:48

하늘에 마음을 두고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

누가복음 12:22-34

 

주님,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치 부자 청년인양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근심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누구를 탓하고 비난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이미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힘을 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할 수 있는 한,

성경에서 말하는 구제를 행하게 하여 주셔서

이 세상이 좀 더 좋은 세상,

좀 더 하나님의 나라 다운 세상이 되는데,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탐심을 물리치게 하시고,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며

하늘에 마음을 두고 사는

거룩한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나

성령의 능력 안에서는 가능한 일이오니,

주여, 우리가 늘 성령 안에 충만히 거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보여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8. 9. 18:46

하늘에 마음을 둔 사람

(누가복음 12:22-34)

 

1. 탐심은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려고 하는 자기 구원의 욕망’이라고 했다. 몇 가지 살피고 넘어가야할 단어들이 있다. 첫번째로, 염려(메림나테)다. ‘염려’란 어떤 대상에 대해 괴로움을 느낄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염려에 대한 말씀은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도 이렇게 전한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염려가 안 좋은 것은 염려로 인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이 눈에 안 들어온다는 것이다.

 

2. 두번째로, 근심(메테오로스)이다. 근심은 높이 매달려 발을 디딜 데가 없기에 느끼는 걱정과 혼란을 뜻한다. 근심이라는 용어는 먹고 입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하려 드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염려와 근심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염려와 근심은 삶의 질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을 악한 것에 내어주도록 이끈다. 생명을 악한 것에 내어주는 사람은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있다가 서서히 악한 것에 마음과 생명을 내어주게 된다. 결국, 염려와 근심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못된 짓, 다른 이의 생명에 해를 가하는데 이르게 된다.

 

3.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이유는 염려와 근심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뿐더러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 악한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악은 하나님이 감당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날마다 이렇게 고백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그리스도인은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는 사람들이다. 염려와 근심은 필연적으로 악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4. 우리가 좀 더 자세히 풀고 넘어가야 할 용어가 있다. 누가복음 12장 25절과 26절의 말씀에 나오는 ‘자(페퀴스)’라고 하는 용어이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여기서 사용된 ‘자’라는 용어는 시편 39편 5절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된 용어이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시편 39:5).

 

5. ‘자’는 규빗을 가리킨다. 한 뼘 길이는 규빗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도량형으로 바꾸면,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길이다. 길이를 적용해서 해석하면, “너희 중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50센티미터라도 더 할 수 있으냐”이다. 키를 50센티미터 더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히브리어의 특징 중 하나는 공간적 단위로 시간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해야 옳다. “너희 중 누가 염려함으로 그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느냐”이다. 먹을 것, 입을 것에 관한 걱정으로 수명을 늘릴 수 없다. 그러므로 목숨과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근심하는 일은 무의미한 것이다.

 

6. 본문에서 가장 강력하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이것이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새의 경우를 통한 논증과 수명의 경우를 통한 논증, 그리고 들풀의 경우를 통한 논증을 들어서 ‘하물며 논리’를 통해 목숨과 몸이 먹는 것과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하니,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대해서 염려와 근심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7.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언뜻 보면 굉장히 은혜로운 말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간다. ‘먹고사니즘’은 쓸데없는 것이니까, 그런 거 다 내팽개치고 그냥 교회 일만 열심히 하면서 교회에서 살라는 뜻인가?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대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그냥 주구장창 교회일만 소중히 여기고 다른 일들은 대충대충 하라는 뜻인가? 그래도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이 없는 것일까? 그렇게 살면 엘리야처럼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뜻인가?

 

8. 누가복음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자, 소위 사회적 약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복음서이다. 그렇다고 누가복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그저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먹을 것 입을 것 다 공급해 주시니까 그냥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베어 있는 말이긴 하지만, 굉장히 현실에 대해서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인 속담이기도 한다.

 

9.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자포자기한 현실에 대하여 강력한 저항이요 희망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이 말 속에는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하여 아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통찰과 소망이 담겨 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모든 이들이 먹는 것과 입는 것 때문에 하는 염려와 근심에서 놓임(구원)을 받게 된다.

 

10. 구약성경에서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율법이 잘 지켜지면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받기 때문이고, 율법 정신이 지켜지면 그 누구도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염려와 근심을 하지 않고, 모든 이들이 더불어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는 문제는 단순히 종교적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문제고,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더불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 28:12).

 

11.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임재는 이렇게 나타난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33절). 팔아야 나눌 수 있는 것은 부동산이다. 집이나 땅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토지에 관한 율법의 정신이 담겨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분배를 통해서 소유하게 된 자신의 땅 외에 다른 이들의 땅을 더 소유할 수 없으며, 만약 다른 이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을 희년(Jubilee)라고 한다.

 

12. 누가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구제(charity)’는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차원의 일이 아니다. 성경의 구제는 단순히 자기의 소유 중 얼마를 떼어서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다. 성경의 구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이러한 구제는 하늘에 마음을 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령한 행위이고 믿음의 행위이다. 구제는 사회적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그 근원에서부터 해결하게 해 주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이다.

 

13. 사실, 복음서의 말씀은 너무도 전복적이라, 우리 시대에 이 말씀을 온전히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다. 기독교 인구가 줄어드는 원인이 여러가지 있으나, 사람들은 대개 교회 구성원(목회자나 성도들)의 부조리를 그 일차적인 원인으로 지적한다. 그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나 정확하지는 않다.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나? 다른 말로 해서, 일차적으로 “땅(집)은 하나님의 것이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나? 그래서 자기에게 분배된 땅이나 집 외에 다른 땅이나 집에 대한 탐욕을 버릴 수 있나? 게다가, 혹시 어떤 이유로 다른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땅이나 집을 자신이 가지고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그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원래 주인(또는 땅이나 집이 없는 이)에게 되돌려줄 수 있나?

 

14. 이러한 일은 교회의 구성원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전복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에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단순히 교회 구성원의 부조리 때문이라고, 모든 쇠퇴의 원인이 교회 자체에 있는 양 손가락질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누가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구제(charity)’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누가 자기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사람이 있는가? 다른 말로, 땅이나 집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필요 이상의 땅이나 집을 아낌없이 내어놓아 땅이나 집이 없어 염려와 근심 가운데 사는 이들을 구제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2절). 왜 제자들을 향해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할까? 당연하다. 일단 이렇게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려는 자 자체가 적고, 그렇게 산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더 많은 땅과 더 많은 집을 소유하기에 혈안인데, 자기 혼자서 땅과 집을 팔아서 구제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

 

16. 이 말씀을 나누고 있는 우리들조차도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에 대해서 아주 냉소적인 마음을 갖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게 가능해? 이러다 나만 오히려 가난해지는 것 아니야? 이러다 나만 바보 되는 거 아니야? 나는 이 말씀을 선포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강요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이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한 지를 말씀에 비추어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땅에 있는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하늘에 있지 못한 지를 보았으면 한다.

 

17.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죄책감을 주려는 게 아니다. 죄책감을 발생한 문제, 당면한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다. 죄책감만 갖는 이들은 그냥 죄책감 속에서 생명을 소진하고 말 것이고, 인생을 한 발자국도 전진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모습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탐심을 물리치는 것, 즉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 하는 욕심을 내려 놓는 것, 그리고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는 것, 즉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 다른 말로 해서, 모든 이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악한 것에 생명을 빼앗기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것 때문에 아직도 세상에는 가난이 끊이지 않아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우리의 믿음의 분량만큼 더 좋은 세상,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면 좋겠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하늘에 마음을 둔 사람이 되어가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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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2. 8. 9. 18:42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호세아 11:1-11, 누가복음 12:13-21)

 

주님, 힘을 좀 내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불안한 이유, 우리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무엇도 영원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구원을 주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유혹하는데

우리는 그것에 이끌려 그것을 통해 구원을 갈망하고

구원을 확보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영원하시며 참된 구원을 베푸실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주님,

우리는 어떤 어리석은 자입니까?

어리석은 부자처럼, 또는 호세아서의 이스라엘처럼 자기 스스로 확보한 구원에 의지하면서 만족하며 살가는 자입니까?

아니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오직 구원은 하나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믿으며

주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겠다고 결단한, 어리석은 자입니까?

이것도 어리석은 자이고, 저것도 어리석은 자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자로 살아가기 보다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은 자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길이고

우리를 부르신 길이고 좁은 길이고, 결국 승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시나무처럼 우리의 마음을 떨게 만드는 세상에 굴복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탐심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십자가 위에서 몸소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8. 9. 18:40

어떤 어리석은 자 what kind of fool am I?

(호세아 11:1-11, 누가복음 12:13-21)

 

1. 솥뚜껑을 보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배고픈 사람은 먹는 게 생각날 것이다. 가마솥에 끊인 국이 생각나든지, 아니면 솥뚜껑에 구워 먹는 삼겹살이 생각날 것이다. 또한 한국 속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를 떠올리며 자라나 거북이 같은 것을 생각할 것이다. 이는 모두 솥뚜껑과 연관된 언어들이다. 이렇게 어떤 것을 매개로 다른 것을 연상하고 설명하는 것을 ‘비유’라고 한다.

 

2. 비유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서 우리가 모르는 다른 어떤 것을 설명해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자라나 거북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려면 서로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설명해야 할 텐데, 서로 솥뚜껑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있다면, ‘자라 또는 거북이는 솥뚜껑처럼 생겼어’라고 설명할 때, 자라나 거북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3. 비유는 대상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묘사해 주고 설명해 주고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지만, 한계를 지니고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솥뚜껑이 곧 자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호세아서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비유적이다. 인간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랑에 빗대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4. 호세아서는 크게 두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는 남녀 간의 사랑(부부 간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다. 남녀 간(부부 간)의 사랑과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남녀 간(부부 간)의 사랑과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비이다. 우리가 온전히 경험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 간(부부 간)의 사랑이나 부모 자식 간의 사랑에 빗대어 말해진다.

 

5.  호세아서 11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부모 같은 심정으로 자식 같은 이스라엘을 얼마나 절절하게 사랑하시는 지를 알 수 있다. 호세아서 앞부분에서 비유로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 간(부부 간)의 사랑이라 격렬하다. 거기엔 격정과 질투, 그리고 분노가 가득 차 있다. 그런데 호세아서 후반부에서 비유로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라 애달픔이 가득 배어 있다. 하나님은 자식 같은 이스라엘에게 걸음마도 가르치고, 품에 안아서 얼루기도 하고, ‘사랑의 줄’로 이끌기도 하고, 멍에를 벗겨 주기도 하고, 먹을 것을 주기도 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양육했다. 아주 정성스럽게.

 

6. 대개 보통 이렇게 양육을 받으면 자식은 부모를 알아보고 부모의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가가 보여주고 있는 자식 이스라엘의 모습은 전형적인 배은망덕의 모습이다. 이런 자식을 후레자식(bastard/막돼먹은 놈)이라고 한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 11:7). 한 마디로, 자식 같은 이스라엘은 부모 같은 하나님을 떠났다는 뜻인데,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까?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떠났을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로 간다.

 

7. 누가복음에 나오는 소위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는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을 때 발생한 이야기이다.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한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재산이 많았던 집안인데, 아마 아버지가 죽고 나고나서 재산 분쟁이 있었던 모양이다. 재산 분쟁을 하고 있는 형제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1). 그리고 나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를 좀 더 깊게 설명하기 위해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8. 비유 속에 등장하는 부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20절에 나온다. “어리석은 자여!(You fool)” 비유 속의 부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왜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렇다면, 현실 속의 형제들, 즉 재산을 가지고 서로 분쟁하고 있는 이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라가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부자’처럼 어리석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하다.

 

9.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삼가 모든 탐심(All kinds of Greed)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절)라는 말씀을 설명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용어는 ‘탐심(플레오넥시아)’이다. 탐심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해명하는 것이 핵심 포인트이다. 탐심하고 비슷한 용어는 탐욕, 욕심, 욕망 등이 있다. 탐심에는 ‘질이 더 좋은, 우수한, 더 탁월함, 더욱 위대한, 더욱 긴, 더 큰 부분’을 의미하는 단어 ‘플레이온’이 들어가 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소망하면서 산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질이 더 좋고 우수하고 더 탁월한 것을 사고 싶지, 질 나쁘고 형편없는 물건을 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10.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어리석은 부자’라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지향은 그 어리석은 부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와 똑 같은 삶의 방식 가운데 살면서 그를 욕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 또는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도 그렇게 ‘탐욕스럽게’ 살면서, 왜 아닌 척하는가? 곡식의 소출이 풍성하면 더 큰 곳간을 지어야 하고, 곳간이 가득 차면 평안한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소망하며 산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여!’라는 소리 들어도 좋으니까, 부자로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11. 성경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모두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탐심이 구원을 방해한다. 그래서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 탐심이 작동하는 방식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도 탐심이 작동한다. 탐심은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려고 하는 자기 구원의 욕망이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욕망이 꿈틀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는 말로 포장하고, 삶의 구원을 위한 개인의 노력을 최고의 가치로 부추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개인이 노력한 만큼 ‘소출을 쌓아 놓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지 그 분배가 노력에 비례할 때는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만, 반비례할 때는 불의하다고 생각하며 폭동을 일으킨다.

 

12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그러한 우리의 생각을 전복시키신다. 부자는 자신이 소출이 많아 곳간을 크게 짓고, 큰 곳간을 가득 채운 것에 만족하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절). 부자의 만족은 다른 만족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을 확보했다는 데서 오는 만족이다. 우리도 그렇게 산다.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직장, 집, 자동차, 각종 재산들, 등을 보면서 우리는 만족해 한다.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감사를 ‘하나님’에게 드린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여 얻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안심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삶의 토대가 여전히 ‘소유’에 있다는 것이다.

 

13. 그런데, 어리석은 부자 비유 말씀에서 아주 기막힌 반전이 일어난다. 부자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 원래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논리상 맞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소출을 도로 찾으리니 그래도 네가 평안하겠느냐?”

 

14 위의 두 가지 말씀 중, 우리는 어떠한 말씀에 더 분노할까?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일까, 아니면,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아마도 모든 사람들)은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더 분노할 것이다. 왜 그럴까? 탐심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확보한 구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일까, 아니면,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일까? 후자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후자처럼 산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느라, 힘들고 어렵게 산다.

 

15.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분노를 사고 있는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들이 부모와 같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고, 결국 앗수르에게 기대어 살았다. 그런데 어떤가? 그들이 기댔던 앗수르는 영원히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만족할만한 구원을 베풀었는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기댔던, 구원을 간구했던 바로 그 앗수르에게 망한다. 그리고 앗수르는 영원했는가? 아니다. 앗수르는 얼마 안 가서 바벨론에게 망한다. 이스라엘은 영원하신 하나님, 그들에게 참된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만을 갈망했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영원하지 못한 것에서 구원을 갈망하다가, 갈망하던 바로 그것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만다.

 

16.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부자가 ‘어리석은 자여’라는 호칭을 들은 이유는 그가 스스로 구원을 확보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단순히 구원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뻔한 설교인가? 그렇지 않다. 구원을 스스로 확보한, 부자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별로 없다. (요즘 불평등의 문제는 최고로 심각하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서 수많은 염려 가운데 살아간다. 삶에 걱정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근심 걱정 가운데 살아간다. 왜 그럴까?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여 확보한 ‘소출’을 구원의 토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17. ‘어리석은 부자’에 이어 나오는 말씀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눅 12:22-23). 그러면서 예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절)라는 말씀을 하신다.

 

18. 세상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라고 말한다. 자기의 구원은 자기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정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근심과 염려 가운데 치열한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성경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목숨과 몸을 위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평강 안에 머물라고 말한다.

 

19. 우리는 여기서 결단에 직면하게 된다. 어떤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인가?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려고 했던 부자를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며 한탄하신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여 사는 듯한 부자를 부러워하고 그 사람처럼 열심히 살라고 부추긴다. 그러면서, 구원을 하나님께 맡기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한다. 이렇게 세상은 ‘어리석은 자’와 ‘어리석은 자’가 공존하고 대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어리석은 자가 되고 싶은가? What kind of fool am I?

 

20.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었던 그 사람, 무리 중에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요청했던 그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여전히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느라 형과 재산 분할 소송을 진행하여 자신이 소송을 통해 확보한 재산에 만족해하며 그 재산에 기대어 살았을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는 것을 깨닫고 넉넉한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사는 세상이 이해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을까?

 

21. What kind of fool are you? 여러분은 어떤 어리석은 자인가?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열심을 다해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인가? 아니면, 열심히 살고 기쁘게 살지만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삶이 기쁘고 즐거워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인가?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려는 자에게는 불안이 엄습해 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원은 주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를 평안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결국 구원의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어떤 어리석은 자인가. What kind of fool am I?

 

* 이 글은 2017년 11월 23일 포스팅한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의 확장 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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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