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4. 07:29

요셉의 지혜

창세기 58

(창세기 46:28-34)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는 사랑과 관련 있다. 그 상대가 무엇인지는 상관 없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단절될 때 인간은 슬퍼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사랑이 단전될 때 인간은 더욱 슬퍼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수많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들이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를 위한 장미>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섬뜩한 사랑을 그린 소설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몰락한 미국 남부의 명문가의 마지막 후예인 에밀리는 아버지가 죽은 뒤 시에서 세금면제의 예우를 받으며 남부의 자존심의 대명사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도로 포장공사의 현장감독으로 온 호머 베른이라는 호탕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남부 귀족의 딸과 한갓 북부 노동자에 불과한 그들의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에밀리는 약국에서 쥐약을 사고, 상점에서 남자용 옷가지도 사들인다. 그러한 에밀리의 행동에 마을 사람들은 못마땅한 듯 수군거린다. 그 날, 호머 베른이 에밀리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지만 그 뒤로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남자가 여자를 버리고 떠난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은 가끔 창문 안쪽에서 에밀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뿐, 시간이 흘러 그녀의 머리카락은 철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에밀리는 마침내 세상을 떠난다. 마을 사람들은 에밀리의 장례를 위해 그녀의 집으로 몰려 가는데, 그들은 굳게 닫혀 있던 2층 방 침대에서 오래된 백골 한 구가 웃는 모습으로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는 누군가 계속해서 누워 있었던 것처럼 움푹 들어간 자리를 발견한다.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베개에서 머리카락 한 올을 들어 올렸는데, 그것은 에밀리의 철회색 머리카락이었다.

 

사랑의 마음은 이렇게 집요하다.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 때문에 연인과의 사랑이 좌절을 겪게 되자, 에밀리는 쥐약으로 연인 호머 베른을 죽인 뒤, 자신의 침대 위에 눕혀 놓고 그의 곁에서 평생을 지냈던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 때문에 독약을 마시고 죽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보다 더 애절하고 섬뜩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일도 사랑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마음껏 사랑을 나누게 될 때 한없는 행복에 젖는다. 인간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더불어 이루어진 사랑 이야기이다. 오늘 우리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극 한 편을 보게 된다. 아들이 죽을 줄로만 알고 통한의 세월을 살았던 아버지 야곱과 당당하게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어 나타난 아들 요셉의 재회이다.

 

20여년이 지난 뒤, 극적으로 만난 아버지와 아들은 목을 어긋맞춰 안고 오랜 시간 동안 펑펑 운다. 이들의 울음에는 단순히 보고 싶은 그리움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리움보다 더 큰 아픔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 야곱의 눈물에는 자식을 잃은 참척의 고통이 담겨 있었고, 아들 요셉에게는 형들에게 버림 받은 상처의 고통이 담겨 있었다. 이들의 눈물은 그 어느 눈물보다 뜨거웠다. 살아 있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을 겪은 후 흘리게 되는 눈물이 다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재회는 기쁨보다 아픔이 앞섰다.

 

눈물은 마음의 고름이다. 육체에 상처가 났을 때 고름이 차오르듯이, 마음에 상처가 나면 눈물이 차오른다. 육체에 고인 고름을 다 짜내야 상처가 낫듯이, 마음에 고인 눈물을 다 흘려야 마음의 상처가 낫는 법이다. 육체의 고름을 짜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듯, 마음의 고음을 짜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고름도 무르익어야 짜내지는 법이다. 지금, 야곱과 요셉의 마음의 고름은 무르익어 철철 흘러나오고 있다.

 

마음의 고름을 다 짜내어 아픔이 진정되자,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감동적인 말을 한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30). 한을 품으면 눈 감기 어렵다. 눈을 감아야 할 때 망설임 없이 눈을 감을 수 있는 것만큼 복된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축복 가운데 눈을 감는 사람이 얼마큼이나 되겠는가.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어도 그게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인 것 같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오른 것은 바로 이러한 축복을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입에서는 감사의 언어가 흘러 나왔다. 이보다 아름다운 언어가 어디에 있겠는가.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이것은 신앙인들이 사는 동안 끊임 없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복이다. 오늘 눈 감게 되더라도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는 감사의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복된 것이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요셉은 아버지가 거느리고 온 70명의 식솔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아버지와 형들을 위한 현실적인 계획을 마련한다. 애굽의 바로 왕은 전에 말하기를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고 했지만, 아버지 야곱은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내려왔다. 애굽 왕은 야곱 가족들에게 몸만 와도 된다고 했지만, 목축업이 가업인 야곱은 식솔들뿐 아니라 모든 가축들도 끌고 내려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요셉은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요셉의 계획은 매우 지혜로운 것이었다. 우선, 그는 애굽 왕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형들이 왕의 윤허대로 애굽 땅에 도착한 것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하고자 했다.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32). ‘몸만 오라고명령했던 애굽 왕의 명령에 반하여 야곱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는데, 이것은 애굽 왕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 왕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그들이 몸만 오지 않고 모든 소유를 이끌고 온 이유를 설명한다. 그들은 목자들, 즉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요셉은 아버지와 형들에게 애굽 왕이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묻거든 목축업을 하는 자들이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쳐 준다. 그러면서 단순히 목축업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대대로 목축업을 하는 집안 인 것을 강조하라고 말한다.

 

요셉이 이렇게 계획을 꾸민 이유는 그래야 아버지와 그의 식솔들이 고센 땅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센 땅은 목축업을 하기에 좋은 땅이었다. 게다가 애굽의 총리 대신의 가족들이 대거 애굽 땅으로 이주해 온 것을 모든 사람이 환영해 줄리 만무하다. 사람들은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면 거칠어지는 법이다. 요셉의 가족들이 목축업을 하는 목자라는 것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힌 자들에게 안심할 수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목축업을 하는 목자라는 말은 그들이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애굽인들과 히브리인들이 함께 섞여 사는 것은 많은 갈등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오히려 이렇게 따로 떨어져 사는 것이 평화롭게 사는 방법이었다. 일례로, 종교적인 측면에서 애굽인들은 소를 신성시한 데 반해 히브리인들은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다. 한쪽에서는 소를 신성시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들이 신성시 하는 소를 죽여 제사 드리는 데 사용한다면, 이는 불 보듯 뻔한 갈등을 유발시키는 요소였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다른 사람이 사소하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법인데, 종교적인 문제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끔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요셉의 계획은 매우 지혜로웠다. 이렇게 요셉이 지혜로운 계획을 마련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주된 관심사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요셉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의 총리 대신 자리를 보존하는 것도 아니고, 부와 명성을 유지해 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개인적인 꿈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애굽의 왕에게 충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요셉의 주된 관심사는 아버지와 그의 모든 가족이 애굽에서 안전하게 지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요셉이 자기 가족만 챙기겠다는 가족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요셉에게 가족을 지키는 일은 단순히 가족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신앙의 문제였던 것이다. 게다가 야곱은 애굽으로 이주를 결심한 뒤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음성을 듣지 아니했던가.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46:3).

 

지혜는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질 때 생겨난다. 요셉에게 당면한 문제는 아버지와 그들의 가족들의 안전이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큰 민족을 이루려면 가족들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바로 그것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집중했을 때 요셉에게서는 가족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지혜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살면서 지혜롭지 못할 때가 많다. 지혜롭지 못하여 일을 그르치고 한탄의 세월을 보내게 될 때가 있다. 그러한 때를 생각해 보면 모두 지혜롭게 일을 대처하지 못해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다 보면 잠깐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 몰라도, 결국에는 더 큰 일이 발생하며 공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드리는 데 부름 받는 자들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에는 그러한 저급한 신앙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곧 나 자신의 이익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생명과 평화이다. 요셉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할 때 지혜가 생겨 모든 가족들을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생명과 평화의 뜻을 마음 속에 품고 집중한다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과 평화’, 여기에 집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요, 하나님의 지혜를 폭포수 같이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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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1. 02:51

나의 의는 아직 건재하다 (친구 1 - 엘리바스)

욥기 2

(욥기 6:24-30)

 

욥기는 지혜문헌이다. 지혜는 하루 아침에 축적되지 않는다. 욥기가 지혜문헌이라는 뜻은 욥기에 제시되고 있는 지혜가 하루 아침에 깨달아진 진리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삶을 꿰뚫고 나온 진리라는 뜻이다.

 

욥기서는 총 4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구성이 매우 짜임새 있고 촘촘하다. 욥은 하나의 잘 짜여진 드라마 같다. 거기에는 주연과 조연들이 있는데, 주연은 욥이고, 조연은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라는 지혜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이야기 전체의 줄거리는 동방의 의인이라 불리는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신실하고 부유했던 그의 삶이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겪게 되는 인생의 갈등을 그렸다. 그가 그렇게 어려움을 겪게 되는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는데, 사탄의 참소에 의한 하나님의 허락이 작용한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에 동의하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지만, 욥기가 씌어진 시대는 대개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욥이 겪은 어려움이 보이지 않는 힘(신 또는 사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인식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어떤 경로를 통해 일어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신앙을 가진 자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믿지만, 신앙이 없는 자들은 그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섭리든 우연이든 우리가 겪는 삶의 고통은 우리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가져오고 그 어려움 가운데 어떠한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도 허무해진다는 것이다. 즉 고통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삶의 현실이라는 뜻이다.

 

욥이 재산과 자식을 잃고, 그리고 몸에 병까지 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친구 세 명이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온다. 욥기서의 이야기는 욥과 그 친구 세 명이 주고 받는 지혜의 언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언변의 관점 포인트는 자신의 의로움을 완고하게 주장하는 욥과 그러한 욥의 불의함을 지적하는 친구들의 지혜이다.

 

욥은 자기 자신이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자신에게서 어떠한 불의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욥은 더 고통스러워 한다. 어떻게 의인이 이렇게 고통을 당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욥의 관점은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 의인이 어떻게 고난 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면, 고난은 의인이 받으면 안 되고 악인이 받아야 한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이나 예수의 십자가 사역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특별히 신명기서에는 이런 말까지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1:23).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도 논증하고 있는 내용인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구원)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예수가 죽은 후 당돌하게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강력히 요청한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배경은 그가 경건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인데, 경건한 유대인이란 율법을 잘 알고 율법 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뜻한다. 신명기서 21장에보면 나무에 달린 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율법적 지침이 나온다. 그 부분을 직접 보자.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1:22-23).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당돌하게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한 것은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주님)로 고백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가 경건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을 온전히 준행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의 그러한 행동이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 된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의 아들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부활 역사 때문이다.

 

이처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의 가르침 가운데 살았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인식하기에는 매우 큰 어려움이 존재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예수가 메시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라면, 또한 그가 정말로 의인이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사람들의 신앙을 방해한다. 이러한 의문을 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경건하고 건전하게 갖기 위해서라도 욥기서에 제시되고 있는 고난 받는 의인에 대한 통렬한 주제에 대한 깊은 성찰은 꼭 필요하다.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토로하는 욥에 맞서 그의 친구 세 명(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을 정죄한다. 그들의 논점은 이것이다. 고난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에 온다는 것이다. , 그들은 인과응보론을 주장한다. 욥이 이렇게 고난 당하는 이유는 그에게 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래서 욥의 세 친구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에 맞서 욥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욥기서의 구성은 매우 탄탄한데, 그 이유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일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욥기서의 이야기 전개는 우선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고난에 대한 탄식을 늘어 놓으면, 그에 대하여 욥의 친구가 한 명씩 대응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두 세트가 진행되고 나서, 엘리후라는 젊은 지혜자가 등장하여 욥과 세 친구들의 잘못에 대하여 지적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끝으로 하나님이 등장하여서 모든 문제를 정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욥기서를 읽으면서 견지해야 할 자세는 일단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욥기서이기 때문에 욥의 편에 서서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없고, 욥의 주장과 세 친구의 주장을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분석하는 것이 제일 좋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의 주장이 인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큰 지혜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 우리는 욥이 주장하는 것처럼 의로운 데도 고난 가운데 처하기도 하고, 우리의 연약함 또는 죄 때문에 고난 가운데 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욥기서 3장에서 욥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견지하며,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일에 대하여 읍소한다.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죽음을 동경하고, 삶에 회의를 느끼는데, 결코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러한 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더 괴롭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당황해 한다. 그의 탄식은 고난 받는 의인의 탄식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보통 신앙생활 하면서 이러한 것에 대한 가르침은 별로 없다. 우리가 삶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 그저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며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탓하며 우선 회개부터 하려 든다. 물론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죄의식부터 갖고 보는 것은 건전한 신앙이 아니다. 물론 살다 보면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많지만 인생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의 뜻(의지)과는 상관 없이 나에게 닥쳐 오는 불행과 어려움이 많다.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을 모두 자기 자신의 부족함 때문인 것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 우선 그 상황에 대해서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탄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문제 자체에 대한 인식을 정확하게 가질 수 있다.

 

이 과정이 없으면 우리는 대개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칼 융이 이런 말을 했다.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은 운명이 된다.” 이것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다. “의식되지 않는 불행은 운명이 된다.” 어떤 사람이 불행을 겪고 있는데 그 불행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 불행을 반복하게 되거나 그 불행 가운데서 헤어나오질 못하게 된다. 대개 불행하게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인식 능력은 형편 없이 결여되어 있다. 일례로 알코올 중독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지금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는 인식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거기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자기는 지금 괜찮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반주는 건강에 좋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알코올 중독 가운데 살다가 그렇게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또 하나의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죄의식이 그 불행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작용하기 때문이다. 배우 성유리가 주연한 누나라는 영화에서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 극중 성유리는 물에 빠지는데 자기를 구하고 죽은 동생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의식 때문에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그 폭력을 통해 자신의 죄의식을 씻으려 하는 행동패턴을 보인다. 이것은 불행한 일보다 더 불행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행동 패턴을 보인다. 자신의 불행을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 그 불행을 자기의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에 저항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불행한 인생을 살다 간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욥기서에서 욥이 견지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배울 필요가 있다. 자기에게 닥친 불행을 자신의 탓으로 금방 돌려 버리면, 우리는 평생 그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불행을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에 불행이 일상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에 대하여 엘리바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사한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 그러면서 그는 욥에게 자신의 죄로 인한 징계를 인정하라고 촉구한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5:17).

 

이러한 주장을 펴는 엘리바스의 입에서 인생에 대하여 큰 통찰을 주는 지혜의 말이 쏟아진다.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5:6-7). 이 지혜는 불교의 그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라고 부른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러한 를 느낀다. 그래서 고개를 끄떡이게 되지만, 정말 인생이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우리는 왜 이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내야만 하는가?

 

욥은 엘리바스의 권고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물론 욥은 엘리바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엘리바스의 인생에 대한 통찰도 모두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통찰이 욥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욥의 항변이 정곡을 찌른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6:25).

 

우리는 남을 쉽게 정죄한다. 특별히 고통을 겪는 자들에 대해 쉽게 말을 내뱉는다. 물론 그들을 정죄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욥이 말하는 것처럼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지’, 옳은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옳은 말조차 삼갈 필요가 있다.

 

인생은 어렵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도 아닐뿐더러,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도 아니다. 욥기서를 읽으면서 가져야 할 가장 큰 자세는 열린 마음이 아닌가 싶다. 욥의 주장도 맞고, 친구들의 주장도 맞다.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자신의 문제를 다각도로 진단해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도 죄의식에 물들어 버린 현대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욥의 자세를 배우는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뻔뻔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의식되지 않는 불행은 운명이 된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불행을 온전히 인식하는 인식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불행이 인식되지 않으면, 불행이 불행인지 모르고 그렇게 불행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행복이지 불행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품 안에서 우리 모두가 행복하길 원하신다. 그 행복의 시작은 내 삶 안에 일어나고 있는 불행한 일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욥처럼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저항하는 것이다. 욥은 말한다.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6:29). “나의 의는 아직 건재하다.” 새겨들어야 하는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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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8. 06:51

야곱의 희생제사와 그 의미

창세기 57

(창세기 46:1-27)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예배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먼저 발현되고, 그 은혜와 사랑을 몸소 체험한 자들이 그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다. 거꾸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예배의 개념은 완전히 이방인의 예배 개념이다. 이런 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이지만, 그 복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거나 하나님께 잘 보였을 때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보상은 은혜가 아니다. 값 없이 주어지는 것만이 은혜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꾸미지 않았다. 그는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자식 잃은 아픔의 세월을 그저 견디면서 살아왔을 뿐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 요셉의 고백에서 드러났듯이,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5,7,8).

 

야곱의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셨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이 곧 인생 가운데 아무런 어려움이나 고난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인생의 신비이다. 성경은 온통 이러한 인생의 신비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들에게 지혜의 창고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들에게 등불인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참척의 고통(자식을 잃은 슬픔, 세상의 슬픔 가운데서 가장 참혹한 슬픔) 가운데 살던 야곱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는다.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애굽의 왕이 야곱의 모든 식구들의 이주를 권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꿈 같은 소식을 들은 야곱은 드디어 애굽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고 짐을 꾸려 애굽으로 떠난다.

 

야곱이 살던 곳은 헤브론이다. 헤브론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려면 브엘세바라는 곳을 꼭 거쳐야 한다. 그런데 브엘세바는 어떤 곳인가? 브엘세바는 야곱에게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화친을 맺고 언약을 세우며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곳이며, 할아버지도 거주하던 곳이었고, 아버지도 거주하던 곳이었고, 자기 자신도 거주하던 곳이었다. 삼대에 걸친 인생의 스토리가 가득한 곳이다. 그곳을 지나면서 야곱은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역사적인 장소에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린다.

 

브엘세바에서 드리는 희생제사는 야곱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삶의 스토리가 담긴 제사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삭을 희생제사의 제물로 드리려 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희생제물을 준비해 주셨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 아찔한 이야기의 끝은 여호와 이레라는 은혜의 고백으로 마무리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하셨던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그의 마음, 곧 그의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예배자들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행위나 제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삶 그 자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영적 예배의 매개체가 우리 자신의 몸, 즉 우리 자신의 삶 전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인류의 타락()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예배자의 참된 예배를 제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가인과 아벨은 동시에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올려 드렸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로서 자신이 수확한 곡식으로 제사 드렸고, 아벨은 목축업을 하는 자로서 자신이 기른 양을 잡아서 제사 드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혹자는 아벨이 피와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말한다. 히브리서에 이런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22). 이것은 너무 신약성서의 관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 문제를 해결하려는 편협한 시각일 뿐이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가인이 드린 곡물이나 아벨이 드린 동물이나 모두 미느하'로 표현하고 있다. ‘미느하' '선물'(膳物)이라는 뜻과 '소제'(素祭; cereal offering)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무엇을 제물로 드렸느냐는 별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 무엇이 이들의 제사를 갈랐는가?

 

창세기 4장은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제물을 받으셨는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4:4-5). 여호와께서 제물을 받으실 때 단순히 제물만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제물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은 아벨 그리고 가인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예배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말씀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제사(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이 아니라, 그 제사(예배)를 드리는 자의 삶과 인격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이유는 제물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인격의 차이에서 왔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것을 드리고 아무리 많은 것을 드려도, 드리는 자의 삶과 인격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선지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다. 사울 왕의 잘못된 제사를 꾸짖었던 사무엘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

 

북이스라엘의 패역한 제사행위를 꾸짖은 아모스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도 각각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1-24).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이사야 선지와, 미가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도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이사야 1:11).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예레미야 7:4-6)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예레미야 7:11, 표준새번역).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 우리는 브엘세바에서 또 한 번 예배자로 나오는 야곱을 발견한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때 그는 그의 모든 자손들과 함께 제사를 드렸다. 특별히 그 제사에 야곱의 열 한 아들이 참여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세겜과 벧엘에서 제사 드린 후에 그 동안 야곱이 하나님께 제사드렸다는 기사는 없다. 아니 제사드릴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인지 모르겠다.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야곱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세겜에서 딸 디나가 강간당했고, 그 일로 인해 디나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사람들을 속여 그들을 도륙함으로 복수했다. 그 일로 인해 야곱은 세겜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세겜 사람들의 복수의 칼날이 들이닥칠까 봐 두려워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었고,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살던 헤브론에 정착해서 살던 중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남기고 간 아들 요셉마저 잃는 참척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런 고난의 연속 가운데서 야곱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나오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예배자로 나아오려면 희생제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삶과 인격이 중요한 것인데 그 동안 야곱의 아들들이 보여주었던 삶의 모습은 전혀 인격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시기와 질투 가운데 치졸한 행동을 일삼았고, 전혀 책임 있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동생을 죽였고(물론 노예에게 팔았지만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아버지에게 거짓말 했고, 무책임한 삶을 살았다. 이들은 전혀 예배자로서 희생제사의 자리에 나올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야곱이 겪은 고난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서 자신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일어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다는 것이 드러났고, 야곱의 아들들은 기근 때문에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갔다가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 속에서 삶과 인격의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야곱에게는 희생제사를 드릴 '이유'가 생겼고,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희생제사를 드릴 '자격'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서, 그리고 희생제물이 아닌 삶과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린 희생제사는 야곱에게 또 한 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사실 야곱은 두려웠다. 낯선 땅 애굽으로 가는 것이 두려웠다기 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자기 자신에게 전해진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기근이 들었을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간 것은 아니었다. 그때 하나님은 아무 말씀 없으셨다. 아버지 이삭도 기근이 들었을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그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야곱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함부로 애굽으로 내려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희생제사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셨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신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3-4).

 

야곱의 희생제사는 (삶과 인격)으로 드린 거룩한 산 제사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에게 나타나서 현재 야곱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셨다. “어디에 있느냐 보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 야곱이 들은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내가 처한 상황과 현실이 어떠하든지, 어떤 두려움 가운데 있든지,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이고, 걸어가는 발걸음을 암사슴 같이 기쁘고 즐겁게 그리고 가볍게 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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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5. 03:13

함부로 감사하지 말라

욥기 1

(욥기 3:20-26)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건너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내 마음도 함께 따가주~”

 

봄이 오면 꽃이 핀다. 참 기어코 꽃이 핀다. 우리의 기분이나 환경과는 상관 없이 꽃이 핀다. 그래서 봄꽃은 우리에게 희망을 전달한다. 꽃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저렇게 찬란하게 피어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본다. 그러나 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게 녹녹하지는 않다. 봄에 핀 꽃은 혹독한 겨울을 참아내고 이겨낸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의 꽃은 감사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사할 줄 모르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그 감사의 꽃을 피워내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쉬우면 안 된다. 자연인이 꽃을 보며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듯이, 신앙인은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 어느 지식보다 오묘하고 그 어느 지혜보다 경이롭다.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담아내야 하는 신앙인의 감사는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값비싸다. 우리는 그것을 욥의 이야기를 통해 배운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욥기서는 그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1:1). 그런데 그의 인생에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시련이 닥친다.

 

그에게 시련이 닥치게 된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작용한 것으로 서술된다. 하늘 나라에서 욥에 대한 참소가 있었다. 사탄은 하나님께 이르기를 욥이 그렇게 밤낮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물이 넘쳐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욥의 모든 소유를 걷어 가시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사탄의 계획을 허락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성경은 언제나 다음의 두 가지 상황을 함께 제시한다. 1) 부재하는 무자비한 신의 세계. 2) 범재하는 자비한 신의 세계. 부재하는 무자비한 신은 인간의 불행을 방관하는 것처럼 보인다. 범재하는 자비의 신은 세계를 돌보며 피조물의 입에서 감사가 흘러나게끔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상황에서 매우 헷갈려 한다.

 

사람들이 신앙을 갖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부재하는 무자비한 신의 세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여다 보면 우리는 신의 존재보다 신의 부재를 경험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일례로, 한국 사회는 세월호 사건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만큼 세월호 충격에 아직도 휩싸여 있다. 아마도 21세기 한국 역사에서 세월호 사건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은 역사의 푯대가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서 한국 사회가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전진하게 되면 세월호 문제를 잘 풀어서 그렇게 된 것이고, 한국 사회가 후퇴하면 세월호 문제를 잘 풀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의 미래의 지표가 될 수 밖에 없다.

 

많은 신앙인들이 세월호 사건을 생각하면서 이런 질문한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는가?” 이 질문은 인간이 겪는 비극적인 순간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질문이다.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유대인 대학살이 진행되었을 때도 유대인들은 죽어가며 똑 같은 질문을 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

 

비극적인 일을 겪는 이들에게 그 비극적인 일에서 자신들을 건져줄 메시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들이 평소에 메시야라고 믿으며 찬양했던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야 말로 부재하는 신의 무자비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사탄의 참소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욥에게 말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친다. 그에게 닥친 고난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간접적인 것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것이다. 우선, 욥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는다. 여기에는 자식들도 포함된다. 모두 소중한 것들임에는 틀림없으나 욥 자신이 아니라 욥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간접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욥은 이렇게 자신의 소유를 잃었을 때 가슴이 찢어졌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한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

 

사실, 자식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었음에도 이런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욥은 이것만 해도 초인적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를 조금만 잃어도 밤잠을 자지 못해 수척해진다. 그런데 이것은 시대의 반영이기도 한 것 같다. 욥기가 씌어진 시대는 지금 시대처럼 소유에 대한 집착이 덜 했다. 요즘 시대는 소유가 미덕이고 소유가 곧 생명인 시대인 것처럼 세뇌 당한 시대이다. 물질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으니, 요즘 시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욥의 고백을 보면 전혀 이해 가지 않는다. 모든 소유를 저렇게 잃고 어떻게 저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소유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찬양하는 욥의 모습을 보고 사탄은 한 가지 더 시험하기를 하나님께 청한다. 바로 욥 자신의 몸을 직접적으로 치는 시험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욥기 2:5,7).

 

모든 소유를 잃고 절망 가운데 있던 욥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직접적인 육신의 고통이 닥쳐온다. 욥은 어떤 질병에 의해 온 몸에 종기가 났고, 그 종기 때문에 육신이 너무 괴로워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었다 (욥기 2:8).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욥의 아내는 신앙을 잃은 듯한 말을 내뱉는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적인, 아주 인간적인 솔직한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기 2:9). 이 진술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고발이요, 다른 하나는 욥의 자기 의에 대한 고발이다. 의로운 욥에게 이러한 고난이 닥쳐 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르게 보면, 욥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불행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찾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고, 이렇게 고통 받으면서 자기 자신의 의 때문에 하나님께 하소연 하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두 번째가 더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솔직히 두 번째 이유 때문에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 탄원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크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감사해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에 욥은 끝까지 자신의 의로움을 지킨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기 2:10). 사실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설교자들의 편집의 함정이 그것이다. 보통 설교자들은 욥기에서 이 부분만 떼내어 설교한다. 그러면서 욥처럼 어느 상황에서도 이렇게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욥기서를 좀 더 읽어 보면 바로 다음 장에서 상황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욥기서 3 1절을 보자.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에게 닥친 불행한 일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의 절친 세 명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방문한다. 그러나 친구 세 명은 욥에게 닥친 그 처절한 불행을 직접 눈으로 보고 할 말을 잃는다. 그렇게 친구들과 욥은 칠일 밤낮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는데, 욥이 비로소 입을 연 것이다. 그때 욥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감사가 아니라 저주였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 휩싸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저주를 퍼붓는다. 태어난 것을 저주하고, 죽음을 동경하고, 삶에 회의를 느낀다. 욥기서 전체를 보면, 욥의 처절한 몸부림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욥의 처절한 몸부림은 감사가 아니라 탄원이다. 욥기서의 저자가 신앙인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감사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한 탄원의 늪을 지날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욥기서 3장은 신앙인이 꼭 배워야 하는 신앙의 감정이다. 고통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섣부른 감사를 드리기 이전에, 탄원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이 없으면 감사는 값싼 감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지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무조건 감사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는 자를 찾으신다. 고통 당하고 있으면서 그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탄원하지 못하는 자의 입술에서 무슨 신령한 감사가 나올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욥기서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신앙의 신비가 아니다.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의 입술에서는 섣부른 감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말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시편 22편 첫 구절이기도 한데,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상황을 무조건 받아 들이는 감사의 신앙이 아니라 먼저 그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인간의 솔직한 마음을 담은 탄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믿는 신앙인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임재보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는 불행한 일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한 불행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게 된다. 불행한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인간의 불행을 전혀 돌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무자비함 앞에 당황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불행한 일보다 더 불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본의 기독교인이자 문인이었던 엔도 슈샤쿠는 이렇게 묘비를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릅니다.”

 

불행한 일, 그토록 슬프고 외로운 일을 겪으며 이렇게 가련한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냐고따져 묻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한 신앙인은 없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고통에 대하여 따져 묻는 것은 차라리 의로운 일이다. 절대로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다. 욥기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그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삶을 살면서 어려움을 겪고 불행을 겪어 고통 당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다른 무엇보다 탄식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오히려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다.

 

고통 당하고 있는데, 불행을 겪고 있는데, 나에게 일어난 일을 전혀 이해 할 수 없는데, 그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께 함부로 감사 드리지 말라. 그냥 지금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솔직한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하라. 욥기서 3장에 나오는 욥의 탄식으로 탄식하라. 그래야 산다. 그래야 마지막 피어나게 될 감사의 꽃이 찬란한 것이다. 그래야 감사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이 순간만큼은

뻔뻔한 욥이 되어라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왜 이처럼 고통에 처해져야 하는지

따져 물었던

용감한 예수가 되어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값싼 감사가 아니니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수줍은 어리광이 아니니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억지 같은 투쟁이니라

네 비천함에 대한 저항이니라

너의 불행을 방관만 하고 있는,

무자비한,

부재하는 신에 대한 고발이

거꾸로 솟는 핏방울처럼

네 목젖을 힘껏 울리게 하라

가랑비 같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말지어다

폭풍우 같은 분노의 눈물을 흘릴지어다

감사하는 자가 칭찬 받는 시대가 아니니

애통하는 자가 위로 받는 시대이나니

복을 받으려거든

우주의 법정에서

준엄하게

신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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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5. 5. 22. 11:59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이 순간만큼은

뻔뻔한 욥이 되어라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왜 이처럼 고통에 처해져야 하는지

따져 물었던

용감한 예수가 되어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값싼 감사가 아니니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수줍은 어리광이 아니니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억지 같은 투쟁이니라

네 비천함에 대한 저항이니라

너의 불행을 방관만 하고 있는,

무자비한,

부재하는 신에 대한 고발이

거꾸로 솟는 핏방울처럼

네 목젖을 힘껏 울리게 하라

가랑비 같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말지어다

폭풍우 같은 분노의 눈물을 흘릴지어다

감사하는 자가 칭찬 받는 시대가 아니니

애통하는 자가 위로 받는 시대이나니

복을 받으려거든

우주의 법정에서

준엄하게

신을

기.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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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1. 06:41

기쁨의 향연

창세기 56

(창세기 45:16-28)

 

정체를 밝힌 요셉과 형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이제 기쁨의 향연이 벌어진다. 이런 장면을 보는 일은 기쁘다. 살맛 난다. 우리 삶 가운데 이러한 기쁨의 향연이 날마다 벌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고, 우리가 살면서 이루기를 바라는 삶의 모습 아니겠는가. 인생은 환대 받을 때 기쁘다. 예수께서는 모든 자들을 환대하셨다. 환대 받지 못해 외로움에 치를 떨던 자들을 환대 해주셨다. 그 자체가 바로 구원이었다.

 

예수께서는 병에 걸려 사회로부터 버림 받았던 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공동체가 그들을 환대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죄를 지어 사회적으로 소외 당하던 자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복귀시켜 공동체가 그들을 환대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누가복음 19장의 사케오 이야기이다. 사케오는 세리로서 유대인 공동체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소외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케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해주시고, 그를 아브라함 공동체에 복귀시켜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는 이 진술이 가진 정치사회적 함의는 매우 레디컬하다. 여기서 잃어버린 자란 환영 받지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환영 받지 못하는 자는 잃어버린 자이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은 잃어버린 자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요셉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다.

 

양식을 구하러 온 형제들은 처음에 애굽의 총리(요셉)에게 환대 받지 못하는 것 같아 두려워했다. 그러나,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의 형제 요셉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고 환대하는 것을 알고 형들은 기뻐했다. 환영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일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제 그들은 환영 받는 상황에서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다.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왕과 신하들도 기뻐하며 그들을 환대해 준다. 왕과 신하들이 요셉의 형제들을 환대할 수 있는 이유는 요셉 때문이었다. 요셉의 덕과 인품, 그리고 그의 사회적 공헌이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해 결국 버림 받은 요셉이 이렇게 애굽에서 존경 받는 인물로 자라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요셉이 애굽에서 환영 받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품에 있었을 때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색동옷을 입었으나, 바로 그것 때문에 요셉은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다. 환영 받지 못하는 곳에서의 요셉의 삶은 괴로움 그 자체였다. 결국 환영 받지 못한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환영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결말이 슬프다.

 

환영 받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은 기쁘지 않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환영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동물도 마음이 움츠러든다. 하물며 사람이랴. 사람은 환영 받지 못하면 마음이 움츠러들고 삐뚤어진다. 대인관계에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대부분은 환영 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좋지 않는 것이 외로움이다. 환영 받지 못하면, 외로워지는데, 외로움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상처(정신적 상처)를 준다. 몸이 아픈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범죄를 저지른다. 범죄를 저지르는 가장 큰 이유는 환영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의 개념도 있지만, 오히려 환영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 자기의 존재감을 그렇게라도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는 아무도 자기를 환영해 주거나 알아주지 않으니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어두운 욕망이다.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2:18).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 옛날 성경은 이 부분은 독처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독처한다는 것은 혼자서 외롭게 산다는 뜻이다. ,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이어서 아담의 돕는 배필인 여자 하와를 창조하신 이유가 사람(아담)은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하는 이유는 생물학적 생산을 위한 것도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외로움을 면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외로움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녀가 만나 결혼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오히려 결혼이 외로움을 더 극대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때가 있다. 이런 것이 인간의 연약함(죄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외로움을 극복하도록 하시기 위해 결혼이라는 것을 제정하셨는데 막상 결혼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더 큰 외로움을 생산해 내는 것은 인간이 가진 비극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르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2-25).

 

소외감, 외로움은 인간에게 치명적이다. 인정 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한다는 현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을 왜곡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성격(기질)에 따라 그 현실을 체념하거나 그 현실에 공격을 가한다. 체념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이 세상과 작별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공격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자신처럼 아프게 만든다. 둘 다 비극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요셉이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고, 소외 당하고 외로움에 처해지고, 결국 버림 받았지만,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체념하거나 공격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애굽에서 환영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한 곳에서만이라도 환영 받는다면, 다른 곳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유지하며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아버지 야곱 또한 외로움 가운데 살았다. 사랑하는 부인 라헬을 잃고, 사랑하는 부인이 낳은 아들 요셉을 잃고, 그는 외롭게 살았다. 열 한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과 소통이 잘 된 것 같지 않다. 더군다나 야곱은 아들들을 신뢰하지 못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는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결국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과 애굽의 왕에게 환대를 받아 기쁜 마음으로 애굽의 왕과 요셉이 제안한 애굽으로의 이주 소식을 아버지 야곱에게 알리고자 길을 떠난다. 요셉은 형들에게 옷 한 벌씩을 주고, 동생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챙겨 준다. 요셉과 형들 사이의 불화의 원인 중 하나가 이었는데, 바로 그 옷이 화해의 선물이 된다. 참 의미심장하다. 또한 요셉은 형들에게 여러 가지 아름다운 선물과 곡식을 가득 실어 아버지에게 돌려 보낸다. 그러면서 이렇게 당부한다.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겉으로 보면 요셉이 철없는 형들을 걱정해서 말한 것 같으나, 이것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다투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가즈떨다, 흔들리다, 동요하다는 뜻으로, 흔히 두려움을 묘사하는데 쓰이는 단어다. 그래서 유대인 랍비들은 이러한 의미를 살려 요셉의 형들이 많은 물품을 싣고 가나안으로 가는 동안 강도들을 만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도록 격려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르우벤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잘못에 대해 서로 탓하지 말라는 당부로 해석한다. 아무튼, 요셉은 끝까지 형들과의 화해가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요셉의 걱정대로, 또는 당부대로, 형들 일행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린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26).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해한다. 여기서 어리둥절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푸그는 문자적으로 무감각해지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에 근거해서 상황을 다시 표현해 보자면, 야곱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전혀 믿지 못할 신빙성이 없는 말로 들었다. "니네들이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안 믿는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과 얼마나 서원한 관계 속에서 외롭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그 옛날 요셉이 들판에서 죽었다고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보고할 때, 그들은 피에 젖은 옷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그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말해 놓고, 이제 와서 요셉이 살아 있고,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다는 것이 어떻게 야곱의 귀에 곧이곧대로 들리겠는가.

 

이 외에도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신뢰를 잃은 일이 많다. 장남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통간을 하질 않았나,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 강간 사건 때 아버지 모르게 세겜 사람들을 모두 도륙내어 아버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게다가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보내 놨더니, 시므온을 볼모로 잡히게 해 놓고 돌아 왔으며, 양식 값을 치르기 위해 준 돈도 자루에 도로 가지고 와 놓고 왜 그것이 여기에 들었는지 모르겠다며 이상한 말을 해댔다. 또한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베냐민을 내놓으라고 협박 아닌 협박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 야곱이 어떻게 아들들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요셉과 애굽의 왕이 보여준 환대가 닫혀 있던 야곱의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아들들의 말을 못 믿었지만, 요셉과 애굽의 왕이 보내온 환대(암나귀 열 필에 가득 실린 선물과 양식들)를 보고 야곱은 아들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그 상황은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27).

 

그렇다.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 기운이 소생했다. ‘기운이 소생했다는 말은 영이 살았다는 말이다. , 무감각해졌던 마음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들들을 믿지 못해 외로움 가운데 살았던 야곱의 마음이 다시 환해졌다는 뜻이다. 요셉을 잃고 아픈 가슴을 부여 안고 살았는데, 게다가 이제 베냐민 마저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살았는데, 비로소 야곱의 마음에 기쁨이 돌아온 것이다.

 

인간의 기쁨은 외로움이 극복될 때 온다. 환영 받지 못할 때 인간은 외로움에 던져지지만, 환대 받을 때 인간은 외로움을 극복하게 된다. 환대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구원의 빛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을 때 죽음에 처해졌지만, 팔려간 애굽에서 환대 받았을 때 자존감을 회복하여 과거의 어두운 상처를 씻어내고 형들과 화해할 수 있었다. 형들은 양식을 구하러 가서 애굽에서 환영 받지 못했을 때 마음이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요셉과 애굽의 왕에게 환대 받았을 때 기쁘고 즐거운 마음 가운데 그 동안의 죄책감을 씻어 버리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야곱은 외로움 가운데 살았지만,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외로움을 극복하고 자식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풀고 새로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기쁨의 향연을 보는 일은 가슴 벅차다. 그 기쁨이 바이러스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옮겨지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누구든지 소외되는 자가 없도록 누구든지 환영하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자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우선 배제부터 하는 사회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엔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외로움에 던져지지 않으려고, 상대방에게 인정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현대인들의 몸 짓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현대인들의 우울증은 바로 이렇게 소외되어 외로움 가운데 처해지는 데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 진다.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외로움에 처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외로움에 처해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환영해 주었듯이, 우리도 서로 환영하면서 살자. 그것이 그리스도의 기쁨이요 우리의 기쁨이요, 결국 구원의 기쁨이다.

 

Posted by 장준식

가인의 후예에서 아담의 후예로

 

미국은 졸업의 계절이다. 졸업한 이들의 웃음이 담긴 사진이 도처에서 올라온다. 그러나 졸업한 이들의 희망찬 웃음은 사진에서만 볼 수 있다. 현실은 정말 냉혹하기만 하다.

올해인가 작년인가, 연세대학교 졸업식에 이런 현수막이 걸린 적이 있다. "연대 나오면 뭐햐나, 백순데.."

 

요즘엔 아무리 높은 학위를 받아도 갈 데가 없다. 학위가 다 자기만족에 머무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자기 만족이라도 받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인 시대이다. 자기 만족도 없는 사람들은 사회의 낙오자인양 죄책감마저 드는 시대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그래도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처럼 그나마 낫다( 3:17). 수고하면 그나마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인은 이런 형벌을 받는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12).

요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라 가인의 후예인 것 같다.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수고한 만큼 먹고 살 수 없으니 말이다.

 

땅을 아무리 갈아도 효력이 나지 않는데, 땅 가는 것 자체로 만족을 얻으며 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정신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래도을 먹을 때 오는 만족만큼 근본적이고 더 큰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자기만족만 누리다가 그렇게 그냥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 즉 일명백수로 살다가 삶을 마감할 수는 없지 않는가.

 

1994년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라는 곡을 발표하여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이젠 생각해봐 대학 본 얼굴은 가린 채 근엄한 척 할 시대가 지나버린 건 좀 더 솔직해봐 넌 할 수 있어.”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에서 가방 끈 길게 만들어 주는 데만 관심 있는 한국 교육 현실을 비판했다. 서태지는 가방 끈이 길어야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는 신화를 깨고자 했다. 그런데 과연 깨졌는가?

 

한국 사회의 학력 인플레이션 현상은 단순히 가방 끈을 늘려 보겠다는 관심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가방 끈이라도 늘려야 빡빡한 현실이 좀 달라질까 시도해 보는 젊은이들의 절박함이 담겨 있는 슬픈 이야기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바라지도 않는다. 아무리 땅을 갈아도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 가인의 후예에서 벗어나, 그래도 평생 수고하면 먹고 살 수는 있었던 아담의 후예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학위를 받아도 갈 데가 없고, 목사 안수를 받아도 갈 데가 없는 답답한 현실에 신음하고있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 솔직히 가장 큰 문제는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현실인식능력을 찾아보기 힘들고, 현실에 처절하게 저항해 보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 박약하다는 것인 것같다.

- 사회체제의 불의에 대해 사자후를 토하는 젊은 마르크스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 비극적인 삶의 현실을 뚫고 지나가는초인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 사회체제가 불의한데 개개인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불의한 사회체제를 바꾸기 위해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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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7. 22:54

멈춤과 나눔

(왕상 10:23-25, 전도서 1:2-3)

 

현대인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멈추는 일과 나누는 일이다. 더 힘든 건 멈춰야 하는 것을 알고 나누어야 하는 것을 하는 데 그것이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경제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개념에 의해서 돌아간다. ‘신자유주의경제 개념의 핵심은 무한경쟁이다. 발전을 위해 경쟁은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무한으로 치달을 때 거기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인간성 말살이라는 요소이다. 무한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람의 가치는 상실되고,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자기 자신 또한 넘어야 할 으로 간주되는 상황에 이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두 무한경쟁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커다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소소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멈추는 것을 싫어한다. 멈추면 짜증난다.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다 빨간 신호등에 걸렸을 때 계속 달리지 못하고 서야 하는 것 때문에 짜증난다. 바쁜 시간에 스쿨버스를 만나면 짜증난다. 물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멈춰 서야 하는 것이지만, 전진하지 못하고 서야 하는 상황에 짜증난다. 병원 가서도 몇 분 보지 않는 의사를 만나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짜증난다.

 

우리들은 어느새 나누는 일 또한 힘들어 하게 됐다. 서로가 다 어려운 시절에는 나누며 사는 게 오히려 미덕이었다. 내가 좀 가진 게 없어도 모두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남들보다 조금 못 가진 것을 못 견뎌 하는 시대가 됐다. 남들보다 좀 못 가지면 인생의 낙오자인 양 매우 불쾌한 생각과 더불어 모멸감을 느끼는 세상이 됐다. 게다가 풍요로운 세상에 살다 보니 나눔에 대한 감각이 거의 죽은 상태가 됐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 어려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리고 나눔이라는 가치 또한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자기 포장 수단으로 전락한 것도 문제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풂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의 주가를 높이려고 한다. 나눔 또한 철저하게 산업화된 것이 현실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성경의 인물 중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솔로몬이 수위를 차지한다. 성경의 인물에 빗대어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솔로몬과 같이 부귀 영화를 누리는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성경의 저자가 솔로몬의 부귀 영화를 기록한 이유는 솔로몬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솔로몬의 부와 명성을 부러워한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왕상 10:23).

 

실제로 솔로몬의 부와 명성은 에 달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값비싼 예물을 가지고 솔로몬을 찾아왔다. 솔로몬은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와 명성은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만약 솔로몬에 대한 기록이 열왕기상 10장으로만 끝났다면, 성경의 가르침은 부귀와 영화(부와 명성)’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솔로몬에 대한 기록을 한 장 더 할애한다. 열왕기상 11장에 기록된 솔로몬은 이전 열 장에 걸쳐 묘사되고 있는 솔로몬과 사뭇 다른 솔로몬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던 솔로몬이 여색과 우상숭배에 빠져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나라를 두 동강이 낸 주범으로 지목된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주극생란 낙극생비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술이 극에 달하면 난리가 나고 쾌락이 극에 달하면 슬퍼진다는 뜻이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 126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이다.

 

이 성어는 전국시대 제() 나라의 종횡가 순우곤(淳于髡)의 일화에서 유래한다.

 

순우곤(淳于髡)은 제()나라 사람의 데릴사위(지위가 낮아 죄수와 거의 같은 대우를 받았다)였다. 그는 키가 일곱 자도 안 되지만 익살스럽고 변설에 뛰어나 제후들에게 자주 사신으로 갔으나 굴욕을 당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제위왕(齊威王)8년에 초()나라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제나라를 쳐들어왔다.

 

제나라 위왕은 순우곤을 사자로 삼아 조()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게 하였고, 조나라 왕은 정예 병사 10만 명과 전차 천 승()을 주었다. 초나라는 이 말을 듣고 밤중에 군대를 이끌고 가 버렸다.

 

위왕은 몹시 기뻐하여 후궁에 주연을 준비하여 순우곤을 불러 술을 내려주며 이렇게 물었다.

 

“선생은 어느 정도 마셔야 취하시오?”

 

순우곤이 대답했다.

 

“신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

 

위왕이 말했다.

 

“선생이 한 말을 마시고 취한다면 어찌 한 섬을 마실 수 있소? 그 이유를 들려줄 수 있소?”

 

순우곤이 대답했다.

 

“대왕이 계신 앞에서 술을 내려 주신다면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곁에 서 있고 어사(御史; 문서와 기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뒤에 있어, 신은 몹시 두려워하며 엎드려 마시기 때문에 한 말을 못 넘기고 바로 취합니다.

 

만일 어버이에게 귀한 손님이 있어 신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꿇어앉아 앞에서 모시며 술을 대접하면서, 때때로 끝잔을 받기도 하고 여러 차례 일어나 술잔을 들어 손님의 장수를 빌기라도 하면 두 말을 못 마시기 전에 즉시 취합니다. 만약 사귀던 친구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뜻밖에 만나면 너무 기뻐 지난날 일을 이야기하고 사사로운 생각이나 감정까지 서로 터놓게 되어 대여섯 말을 마시면 취합니다.

 

만약 같은 고향마을에 모여 남녀가 한데 섞여 앉아 서로 상대방에게 술을 돌리며 장기와 투호 놀이를 벌여 짝을 짓고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아도 벌을 받지 않고,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금하는 일이 없으며, 앞에 귀걸이가 떨어지고 뒤에 비녀가 어지럽게 흩어지는 경우라면 신은 이런 것을 좋아하여 여덟 말쯤 마셔도 약간 취기가 돌 뿐입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 술자리가 끝나면 술 단지를 한군데로 모아 놓고 자리를 좁혀 남녀가 한자리에 앉고 신발이 뒤섞이고 술잔과 그릇이 어지럽게 흩어지고(杯盤狼藉) 마루 위의 촛불이 꺼집니다. 주인은 저만을 머물게 하고 다른 손님들을 돌려보냅니다. 이윽고 엷은 비단 속옷의 옷깃이 열리는가 싶더니 은은한 향내가 퍼집니다. 이때 신의 마음이 몹시 즐거워 한 섬은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故曰酒極則亂,樂極則悲).’라고 하는데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사물이란 지나치면 안 되며, 지나치면 반드시 쇠합니다.”

 

이러한 말로(위왕에게) 풍간하였다. 위왕이 말했다. “좋은 말이오.”

 

위왕 그 뒤로 밤새워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고, 순우곤에게 제후들 사이의 외교 업무를 맡겼다. 왕실에서 주연이 있을 때마다 순우곤이 항상 왕을 모셨다.

<출처: 김영수의 [나를 세우는 옛 문장들]>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진다.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도 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과유불급"의 출전은 《논어(論語)》〈선진편(先進篇)〉에 공자(孔子)와 제자 자공(子貢) 간의 문답에서 찾을 수 있다.

 

자공이 공자에게 다른 제자인 자장(子張)과 자하(子夏)에 대해 물었다. "(:자장의 이름)와 상(:자하의 이름)은 누가 어집니까?"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하니, 다시 자공이 반문하기를 "그럼 사가 낫다는 말씀입니까?"하니, 공자는 다시 답하기를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子貢 問師與商也 孰賢,  子曰 師也 過 商也 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지고,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모자라고 도달하지 못한 것이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는 않지만, 극에 달하고 지나친 것은 그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솔로몬의 부와 명성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기억하면서, 솔로몬이 썼다고 알려진 성경의 다른 이야기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전도서에 등장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2-3).

 

무엇이든지 극에 달아 슬퍼지는 것, 무엇이든지 지나쳐 인생을 망쳐버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멈춤과 나눔에 있다. 인간은 자신이 관리할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는 분량 외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은 모두 욕심이다. 신약성경의 야고보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

 

우리가 사는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체제는 인간을 무한경쟁으로 내몰아 모두가 욕심가운데 살게 만든다. 멈추고 나누는 것보다 끝까지 질주하고 남들이 따라 올 수 없는 부를 축적하는 것을 미덕인 양 선전한다. 나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일단 쌓아놓고 보는 게 먼저라는 식이다. 기부금도 일단 쌓아 놓고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정도의 기부금을 내야 경쟁에서 온전히 이긴 사람처럼 대우 받는다. 그러니 현대인의 인생이 얼마나 피곤한가. 서로가 서로를 못살게 구는 것을 넘어 자신이 자기를 못살게 군다. 요즘 서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주제의 책은 단연 자기계발서이다. 자신이 잘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결국 자기 자신이 아직 덜 계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계발만 더 잘 되면, 무한경쟁에서 승자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나 자신 또한 나에게 극복해야 할 적이 되어 생명을 향유하지 못하고 생명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진하고 마는 불행한 인생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성경과 교회는 어떠한 메시지를 던져주어야 할까? 바로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통해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이 사회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 성경의 멈춤과 나눔의 메시지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네준 빨간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하는 메시지, 그 메시지를 통해 가상현실(무한경쟁)에서 나와 자신의 삶을 영유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바로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특별히 모세 오경 전반에 걸쳐 강조되는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과 희년 사상인데, 그것이 담고 있는 뜻은 멈춤과 나눔의 가치에 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멈추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면 그 가치가 상실된다. 아무리 나쁜 일도 일단 멈추는 데서부터 다시 회복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통해서 안식일의 가치를 실현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것이 멈추는 순간이다. 부활은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모여 작은 부활절로서의 주일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세상의 변혁(변화)에 대한 이야기이지 그저 신기하고 놀라운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멈추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하고 잠 못 이루는 일이 어디에 있는가. 나누지 못하는 것만큼 가난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멈춘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실존을 깨닫는 일과 같다. 영어단어 ‘handful’손으로 움켜쥘 만큼의 뜻을 가지고 있다. ‘손으로 움켜쥘 만큼많다는 뜻이 아니라 적다는 뜻이다.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인간의 위()는 자신의 주먹만하다. 주먹만한 위에 채워 넣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은 그야말로 ‘handful’하다. 그러므로 많이 먹으면 탈이 나지만 적게 먹으면 오히려 편안하다.

 

좋은 것뿐만 아니라 해로운 것도 손으로 움켜쥘 만큼만 하다가 멈춰야 한다. 그래야 몸이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생을 망치지 않을 수 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이러한 것도 극에 달하면 결국 자기 몸만 상하고 자기의 인생과 상대방의 인생을 망치고 만다. 우리는 복음서의 이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절대로 나누지 못한다. 나눔은 마음이 풍요로운 자가 누리는 생명의 향연이요,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내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자기 삶 속에 구현하는 놀라운 신앙 행위이다.

 

어느 누군가가 혼자만 돈을 많이 벌어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헌금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어느 누군가가 혼자만 돈을 많이 벌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금을 많이 내어 놓을 들 무슨 소용이 있나. 물론 그렇게라도 공공선을 이루는 것은 그렇게 나무랄만한 것은 못되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렇게 차선책을 택하도록 이끌지 않고, 삶 자체가 나눔의 삶이 되도록 도전한다. 가령, 회사의 사장이 사장이니까 자기 자신이 돈을 많이 벌어 교회에 헌금 많이 하고 사회에 기부금을 많이 해서 자기 혼자만 영광 받는 자리에 서지 말고, 자기 자신이 좀 덜 가져가더라도 직원들에게 수익을 더 분배하여 직원들과 그 기쁨을 나누는 것이 궁극적인 나눔의 삶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보다 많이 벌어 혼자만 기쁘고 즐거워 하나님께 많이 드리고 사회에 기부 많이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수익분배의 구조를 철저한 나눔의 구조로 혁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풍요로운 듯하면서도 인생이 슬픈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극에 달하도록 우리 모두를 무한경쟁에 치닫게 하는 이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왜 주일을 지키는 지, 왜 우리는 예배하는 자들로 하나님께 나오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지는 법이다. 극에 달하면 생명의 가치를 상실하고 결국 상대방을 소모하고 자기 자신을 소모하여 소멸될 뿐이다. 상대방과 자기 자신을 소멸하는 일에서 해방되는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 그 능력이 우리 삶 속에 실제적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자, 그런 자는 주일(안식일)과 예배의 가치가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고 거기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줄 안다. 주일과 예배의 가치는 멈춤과 나눔에 있다. 멈추라, 그리고 나누라.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우리가 생명을 누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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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4. 05:37

나는 요셉이라 (구원의 신비)

창세기 55

(창세기 45:1-15)

 

하나님은 역전의 용사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이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요셉은 곤경에 처한 동생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으려 하는 형들의 모습을 보고 이제 자기 자신의 정체를 그들에게 밝혀도 되는 시점에 왔다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물이 서서히 뜨거워지다 임계점에 도달해 수증기를 내뿜으며 끓어 오를 때와 같다. 임계점에 도달한 물이 보글보글 끓어 오르며 공중에 수증기를 풀풀 내뿜듯이, 요셉은 감정의 임계점에 도달해 그 동안 꾹꾹 참았던 눈물을 펑 터뜨린다. 요셉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바로의 궁중 사방에 퍼져나갔다.

 

꺼이꺼이 울면서 요셉은 자기 자신의 정체를 형들에게 드러낸다. “나는 요셉이라 (I am Joseph!).” 요셉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형들에게 가장 먼저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다.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존재가 요셉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형들은 요셉이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둥절해서 아무런 반응도 못한다.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인간의 속성 중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에게만 오감을 열어 놓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면 인간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떤 이에게는 인지되고 어떤 이에게는 인지되지 못한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뒤 허탈한 심정으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과 함께 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런데 두 제자는 자신들과 함께 걷고 있는 존재가 부활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들의 오감은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게 된 것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성만찬을 행하며 그들의 오감을 열어주셨을 때이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24:30-31).

 

신앙이란 닫힌 오감(감각들)을 여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영안을 연다라고 말한다. 처음 인간은 오감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타락이란 오감이 닫혀 버린 것을 말한다. 오감이 닫혀 버린 타락한 인간(죄인)은 더 이상 진리(하나님)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매우 편협한 존재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해방자인 것은 우리의 오감을 열어 하나님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오감을 회복한 신앙인 요셉의 고백을 들어보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5). 이것은 평범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신앙 고백이 아니다. 형들에게 두 배로 복수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키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신앙 고백한다.

 

신앙은 삶의 해석학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이는 신앙(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것은 신앙을 왜곡한 말이다. 물론, 신앙을 아편으로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나 있는 법이다. 일례로 부엌 칼은 요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쓰는 사람도 있다. 부엌 칼은 원래 음식을 만들어 생명을 살리는 데 써야 온전한 것인데, 반대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데 쓰는 사람은 부엌 칼의 용도를 심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을 심하게 훼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이 바로 신앙을 아편처럼 사용하는 이들이다. 참 불쌍한 사람들이다.

 

신앙은 오감을 열어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 요셉의 스토리를 알거니와, 요셉과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 속에 무슨 기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요셉과 같은 삶을 산 사람이 있다면, 요셉처럼 권력을 쥐게 되었을 때 십중팔구 그 권력을 이용하여 원수 갚는 데 썼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신앙을 통하여 오감을 열어 젖힌 참된 신앙인이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불행으로 보지 않고,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다. 요셉은 타락한 오감을 제대로 회복한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모름지기 신앙이란 바로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로의 새창조 역사를 보이는 법이다.

 

요셉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렇게 밝힌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7). 여기서 후손(쉐에리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쉐에리트남은자, 남은 것, 살아남은 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 ‘후손은 극심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자를 뜻한다. <생명 보존과 후손> 모티브는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흐르는 가장 중요한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도 이 모티브이고, 요셉도 결국 이 모티브를 가진 이야기이다. 이후 출애굽 이야기도 같은 모티브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참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구원 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타락한 구원을 갈망하는 자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의 극대화를 위한 욕심을 채울 뿐이다. 하나님이 생명이시고,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로의 거듭남이 바로 구원이다. 이러한 거듭남 없이 구원을 논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요셉이 형들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 형들을 괴롭혔던 이유는 형들에 대한 복수를 실행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던 형들이 얼마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존재로 바뀌었는가를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요셉은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형들에 의해서 버림 받았다. 그런, 요셉은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 받았다. 또한 베냐민은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비로소 깨달은 형들에 의해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형들 자신 또한 그렇게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난 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생명 또한 구원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요셉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설명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끔 형들의 오감을 열어젖히는 작업을 한다. 요셉은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12).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비로소 깨달은 형들은 이제 그 동안 막혀 있었던 오감을 열어 현재 자신들 앞에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받아 들인다. “자기 아우 베냐민을 목에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고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14-15).

 

구원 받지 못한 자,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 생명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가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자, 진리(하나님)를 향해 오감이 열리지 못한 자, 여전히 타락한 자, 죄인은 생명을 헤치는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다. 형들이 그랬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어떻게 하면 요셉의 생명을 빼앗을까에만 골몰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은 생명을 무참히 짓밟았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동생의 울부짖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 울부짖음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둘러 앉아 점심 도시락을 까먹었다. 양심에 아무런 가책이 없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쳤던 군중들도 그랬다. 그들은 예수가 누군지 몰랐다. 그들은 예수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며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자들에게 편승하여 사납게 외쳤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들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마땅히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아무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로마 총독 빌라도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는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알고 물은 것이 아니라, 모르고 물은 것이었다. 아니, 비웃음의 물음이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 일리가 없다는 물음이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요셉이 자기의 정체를 밝히며 나는 요셉이라!”고 했을 때 형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를 밝히셨을 때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16:8).

 

신앙은 오감을 여는 작업이다. 오감을 여는 작업은 쉽지 않다. 신앙은 한 순간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동의 장치가 아니고, 산을 오르는 지난한 과정과도 같다. 그래서 신앙을 일컬어 순례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의 작업을 통해 오감이 열린 신앙인은 요셉이 보는 것처럼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보게 된다. 형들은 요셉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살리시고 그 흉측한 죽음을 생명의 도구로 삼으셨다.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시고 그 흉측한 십자가를 생명과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구원의 신비이다.

 

그 구원의 신비는 온통 생명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신앙인은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방식이다. 그것을 보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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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5. 5. 12. 10:42

이방인

 

나는 누군가에게 이방인이다

아니 나는 모두에게 이방인이다

저녁거리,

그 쓸쓸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노을로

고개를 돌리는 건

여기에서는 불경한 짓이다

그 너머 있는

무지개 마을을 상상하는 건

여기에서는 교수형감이다

이들에게 어제는 먼 미래와 같고

먼 미래는 태초와 같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마음조차

괴로운 상상인 것은

이들에게 내일은

아직 경험되지 못한

감각의 바깥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석양에 기울어지는 그림자만

나를 바싹 뒤쫓았을 뿐,

내가 거리를 돌며 본 건

옛날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에게서 발견한 오싹한 느낌,

그들은 모두 예전에

죽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도대체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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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