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ㅡ 내 슬픔을 누구에게 호소하리?

 

러시아의 문호, 안똔 체호프의 <슬픔>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부 이오나이다. 마부 이오나는 얼마 전 아들을 잃었다. 그것이 그가 최근에 겪은 사건이다. 그러나 그에게 그 사건 자체가 어떤 긴장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그는 사흘 동안 병원에 누워 있다 간 아들의 죽음을 주님의 뜻으로 돌린다. 물론 이것은 신앙고백적 차원이라기 보다, 아들의 허무한 죽음에 대한 아픔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허무하게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부 이오나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혼자서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지만, 누군가와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그나마 위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마차를 탄 손님들과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긴장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자신의 아픔을 나누고 싶어하는 한 아버지의 애달픈 마음과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 무관심한 사람들의 마음 사이에서 묘한 긴장이 흐른다. 이제 긴장은 아들이 죽은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하려는 사람과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 사이에서 온다.

 

모 인터넷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내가 믿었던 신앙이 나를 배신했다.” 세월호 사건으로 외동딸을 잃은 한 어머니의 슬픔에 관한 기사이다. 그런데 기사를 보면, 그의 슬픔은 세월호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려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위 소설의 주인공인 이오나의 상황과 똑같다. 세월호 사건으로 외동딸을 잃은 그 어머니에게서 새롭게 생겨난 긴장은 이렇게 표출되고 있었다. “말로는 아픔을 같이한다고 했다. 공감한다고 했다. 이해한다고 했다. 그런데 말뿐이었다. 행동이 없었다. 기도로만 아픔을 풀어 가고, 기도로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나와 유가족을 상처가 있는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으로 대했다. 자신들의 틀 안에 우리를 가두어 놓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고, 한 형제자매라고 말하지만 뒤돌아서면 남이었다. 우리를 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필요할 때만 형제자매이고, 정작 내가 어렵고 힘든 때가 되니 등을 돌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관심이었다.”

 

체호프가 그의 소설 <슬픔>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견디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만 남을 뿐이다. 일어난 사건의 피해자는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쩌지 못한다. 그것이 가장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다만 피해자는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슬픔을 말하고 싶어한다. 혼자 생각하면 끔찍하니까 누군가와 함께 그 슬픔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회복의 메커니즘이다.

 

지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정부도 국회도 교회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미 일어난 사건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유가족들에게도 체념이라는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부나 국회를 보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닌 사건 자체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새로운 긴장이 생겨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슬픔을 나누는 일이다. 체호프가 주목했듯이, 정부와 국회 그리고 교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견디는 유가족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슬픔을 나누고 싶어하는 유가족들에게 그만 말하라고 하는 사람이 가장 나쁜 사람이다. 소설 <슬픔>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들이 죽은 지 벌써 일주일이 되어가는데, 그는 아직 그 누구와도 제대로 말을 해보지 못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바로 이런 마음일 것이다. 그들은 아직 그 누구와도 제대로 말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만 말하라니? 소설 속에서 아들을 잃은 이오나는 혼잣말로 이렇게 속삭인다. “혼자 있을 때는 아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에는 아들 생각을 할 수 있지만, 혼자서 생각하거나 아들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견딜 수 없이 두렵다……”

 

왜 대통령은 국회 연설 하러 가면서, 자신들의 슬픔을 들어달라는 유가족들의 절규를 그냥 지나치는가? 왜 국회의원들은 유가족들의 슬픔을 들어주지 않고, 일어난 사건에만 집중하는가? 왜 교회는 그들의 슬픔을 들어주지 못하고, 그들과 제대로 말 한 번 나눠보지도 않고, 서둘러 귀를 닫는가? 유가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들은 그들의 슬픔은 말하고 싶어한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그들의 슬픔을 제대로들어주자. 혼자 방구석에서 눈물 흘리며 가슴을 치며 벽에 대고 말하게끔 내버려 두지 말자. 제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을 견디고 있는그들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들의 슬픔은 아직 충분히 말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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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에서 한 남자가 외쳤다.

드넓은 툰드라 지역,

그곳에 사는 동물들은 그곳의 혹독한 겨울을 피할 수 없어

온몸으로 그 혹독함을 이겨낸다.

처절하다.

그 처절함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 한 종의 동물만이 그 혹독함을 피한다.

바로 새.

다른 동물들은 짧은 다리로 드넓은 툰드라를 벗어날 수 없어

그곳에 적응해 산다.

그러나 새는 드넓은 툰드라 지역을 벗어나게 해 주는

날개를 가졌다.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날 수 있는 새만이 혹독한 겨울을

혹독하지 않게 벗어날 수 있다.

지루한 일상의 툰드라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

날개를 달을지어다.

고단한 일상의 툰드라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에 오를지어다.

날개가 돋아 오르는 자만이

탈출할 수 있으리라.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

날갯죽지가 간지러워,

난 지금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으로 간다.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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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공식

 

사랑은 삶의 예술입니다.

그것이 존재케 하려면 창조의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지요.

신뢰라는 토대도 있어야 하고,

용서라는 버리기의 기술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함께 시간 보내기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술이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듯이,

사랑도 삶에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입니다.

사랑은 존재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상태로 존재합니다.

사랑은 창조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형상을 드러내는 신비입니다.

저절로 빚어지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눈물과 땀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맛 있고, 그 잎사귀는 묘약입니다.

우리를 배부르게 하고, 아픈 곳을 치료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따스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데,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 부릅니다.

사랑은 수고의 열매라는 것,

잊어서는 안 되는 공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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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구원론

대속이 아니라 참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한다. 이것은 구원이 대속적 구원이 아니라, 참여의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통상적으로 '대속적 구원'이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 또는 예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가르침인 것 같다. 크로산과 마커스 보그는 그들의 책에서 이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니다. 특별히 최초의 복음서라고 알려진 마가복음은 그 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마가복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는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책을 보면, 예수의 복음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교회의 정황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의 구원'에서 '대속의 구원'으로 신학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 후대에 씌어진 성경으로 갈수록 그 정황이 드러난다. 마가복음과 히브리서를 대조해보면 그 정황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상황이 박해에서 제국의 지지로 바뀌면서, 교회의 가르침은 '참여'보다는 '대속'쪽으로 구원론이 기울어진다. 그럴수밖에 없다. 권력을 거머쥔 교회가 대중들을 콘트롤 하기에는 '참여'보다는 '대속'이 훨씬훨씬 수월하고 '은혜스럽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부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대속의 교리는 대중들을 위협하기에 좋은 문구이다.

 

성만찬은 원래 그리스도와의 일치, 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를 뜻하는 것이었는데, 요즘 교회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대속교리가 낳은 병폐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는 이미 오해를 낳아,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믿음이란 원래 '참여'의 의미를 갖고 있지, 어떠한 특정한 교리를 믿거나, 특정한 인물(예수)을 그저 의지하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 도반으로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 구원이란 그 길에 들어섬이지, 믿음으로 인해 어떤 상태나 공간으로의 이동(천국으로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철저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이 생각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 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대속이 아니라, 참여이다. 예수는 오늘도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당신의 일에 우리가 참여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인생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부활'에로의 여정이다. 그래서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죽음이 뻔히 보이는데, 두렵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위로를 얻으리.

 

나는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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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0. 16. 05:51

보라, 아들이다!

(레아의 슬픔과 사랑)

창세기 36

(창세기 29:31-35)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가사 전문)

 

교회에서 애창되고 있는 찬양곡이다. 우리는 이 찬양을 함께 부르면서 서로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상대방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래가 교회에서 가장 애창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그만큼 서로 사랑하면서 살고 있지 못하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 한다. 잘 지켜지는 것은 강조할 필요 없다.

 

초등학교 시절(1980년대) 미술 시간에 가장 많이 그렸던 그림은 두 가지였다. 반공 포스터와 불조심 포스터. 반공 포스터는 군사독재 시절, 그리고 북한과의 이념 대립에 국가의 에너지를 전부 쏟고 있었던 시절, 반공에 대한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불조심 포스터를 그때 그렇게도 그려댔던 이유는 그만큼 불사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어린 시절 내가 경험한 산불만 해도 수 차례 된다. 산불 진화 장비가 변변치 않았던 시절이라 산불이 한 번 나면 엄청난 피해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잘 지켜지지 않았던 불조심에 대한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생겨난 가장 유명한 불조심 포스터 문구는 바로 이것이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잘 지켜지는 것은 강조할 필요 없다. 문제는 잘 지켜지는 것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언제나 문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것에서 발생한다. 결혼생활의 기본은 사랑이다. 그런데, 야곱의 결혼 생활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야곱의 첫 번째 부인인 레아에 대한 야곱의 사랑이었다. 이야기는 그 사실을 이렇게 전한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31).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사랑 받지 못했다에 대한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미워하다이다. ,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미워했다. ‘미워하다사랑하지 않는다보다 더 적극적인 감정의 표현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받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매우 원초적이다. 또 한 가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받고 싶은 욕망만큼 사랑하고 싶은 욕망도 매우 원초적이다. 사랑의 욕구가 원초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이라는 뜻이다. 생명이 존속하려면 세 가지가 기본적으로 필요한데, 그것은 사랑과 영양분과 휴식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창조기사가 담고 있는 매우 원초적인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1:26-28), 사람(아담과 하와)에게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다.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사랑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원초적으로 말하자면,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말은 성관계(Sex)’에 대한 말이다. ‘성관계는 사랑의 다른 말이다. 많은 경우 성()을 타락한 형태로 경험해서 그렇지, 성은 생명에 담긴 매우 원초적인 속성이다. 사랑과 성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것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구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를 통해서 밝혀진 사실이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성관계를 통해서 유지된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해서, ‘성관계를 많이 가지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 말과 똑 같은 것이다. “많이 사랑하라.” 그러므로 생명은 기본적으로 사랑을 통해서 유지된다. 이것은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매우 원초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지면의 모든 식물과 짐승들을 주시면서 그것들이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고 말씀하신다(1:29-30). 생명은 존속하려면 영양분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며 그것이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많이 먹으라는 표현이다. 먹고 싶은 욕망은 생명 보존을 위해서 생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먹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휴식)하신다. 당신의 안식은 모든 피조물에게 전가되어, 안식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로 생명 안에 원초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휴식은 옵션이 아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자본주의 산업 사회가 만들어낸 허탄한 신화이다. 쉴 새 없이 기계처럼 자기 몸을 굴려대는습성이 사회에 자리 잡은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적어도 전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밤에 일하는 법은 거의 없었다. 조명의 발달로 비교적 환하게 밤을 대하는 현대인들은 옛날의 밤을 무섭게 덮었던 어둠을 이해하지 못한다. 옛날 밤에 가장 밝은 것은 대보름 달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밤이 되면 사람들은 무조건 쉬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휴식은 옵션이 아니다. 휴식은 생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속성이다. 사람은 휴식하지 못하면 죽는다. 일 하는 것만 너무 강조하는 사회이다 보니 휴식하는 것에 별로 신경 못쓰는 일이 많은데, 휴식은 게으른 자의 미련함이나 가진 자의 여유가 아니라 생명의 원초적 욕망이다. 그러므로 휴식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모두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굶고, 쉬지 못하는 일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린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형상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뭉개지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없다. 거기에는 거룩함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이 살아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거기에 거룩함이 묻어난다.

 

레아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하고 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남편 야곱에게 사랑 받고 싶은 레아의 원초적인 욕구는 처절하다. 간절하고 처절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아의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 그리고 레아는 아들을 낳는다.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여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레아는 아들을 낳은 뒤,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짓는다. ‘르우벤보라, 아들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랑 받지 못하고 있는 슬픔 가운데서 외쳐 나온 레아의 기쁨이었다. 또한 이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위로였다. 그리고 이것은 남편에게 사랑 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레아의 소망이었다. 이제, 남편이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는 기대였다.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32절 후반부).

 

그런데 레아의 소망과 기대와는 달리 레아는 여전히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짓는다. ‘시므온듣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샤마에 명사형 접미사를 붙여 만든 이름이다. ‘시므온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비록 남편의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태를 열어 또 다른 아들을 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베어 있는 이름이다. 그러나 여전히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레아는 남편과 진정한 연합을 원했다. 그 동안 레아는 남편과 성관계를 갖긴 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연합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세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의 이름을 레위라고 짓는다. ‘레위의 뜻은 연합된 자이다. 레아가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을 통해서 우리는 레아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34).

 

세 번의 아들을 출산하는 과정을 통해 레아의 신앙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네 번째 출산이다. 레아는 임신해서 네 번째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그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유다찬양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앞의 세 번의 출산과는 달리 더 이상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포기한 것은 아닐까이다. 만약 그렇다면, 네 번째 아들에게 레아는 유다(찬양하다)’라는 이름보다는 '아자브(떠나다, 포기하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레아는 그렇게 하지 않고,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것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욕망하던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만족하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큰 사랑, 절대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작은 사랑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고 받는 사랑은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마음에 깊은 만족을 주는 큰 사랑, 또는 절대 사랑은 되지 못한다. 사랑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주고 받는 인간의 죄성(罪性)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큰 사랑, 절대 사랑을 주고 받게 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기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랑의 원초적 속성뿐만이 아니라, 그 사랑을 충만하게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할 피조물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가 또한 보여준다.

 

사람은 사랑 없이 못산다. 그래서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갈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완전한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 불완전한 자기애, 즉 에로스의 사랑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모두 자기의 욕망에만 근거한 에로스 사랑뿐이다. 그 사랑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생명을 헤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아가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작은 사랑(에로스 사랑) 때문에 실망하여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생명을 위해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그래서 절실하다.

 

레아는 세 번의 출산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남편 야곱의 사랑보다 더 크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렇다고 물론 레아에게 남편 야곱의 사랑이 필요 없어졌다거나 남편을 무시하게 됐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더 큰 사랑, 절대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레아는 작은 사랑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레아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 그 사랑 안에서 계속해서 복을 받는다. 이후 레아는 두 명의 자녀를 더 출산하고, 자신의 몸종을 통해 두 명의 자녀를 또한 출산한다. 몸종의 자녀까지 합해 총 8명의 자녀를 자신의 발 아래 둔다. 그 뿐만 아니라, 야곱의 자녀들 가운데 구속사의 중심에 있는 레위(레위지파, 제사장지파)와 유다(왕의지파, 그리스도의 조상)는 다름 아닌 레아의 태에서 나온 아들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그만큼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된다. 충만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한다. 사랑 하고 사랑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거룩해진다. 그리고 그 생명의 원초적인 욕망인 사랑을 충만하게 나눌 수 있는 길은 큰 사랑이시고 절대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그래서 레아의 이 외침, “보라, 아들이다!(르우벤)”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외침이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의 입술에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유다)”를 넣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참 고맙다. 사랑 받지 못하여 슬프지 않기를, 사랑 하지 못하여 슬프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했을 때

참 많이 노력해야 했습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남편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울어야 했습니다.

남편을 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

내가

나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화를 내야 했습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

내가

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참아야 했습니다.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윤리 때문에 ......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을 하니

사랑하는 일이 쉬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일이 기쁨이 됩니다.

사랑하는 일이 감사가 됩니다.

 

(민혜숙의 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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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0. 5. 23:12

계시: 해와 율법과 그리스도

(시편 19편)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그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배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계시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까? “계시(Revelation)”는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실까?

 

시인은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토라)이다. 자연이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하는 인식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와 맞닿아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지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물론 자연에게는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3). 말을 해야 존재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고 서로의 존재를 가슴 속 깊이 느끼듯이, 피조물은 조물주의 사랑을 말 없이 드러낸다.

 

특별히 시인이 주목하는 피조물은 해이다. 해를 통해서 시인은 자연의 질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시인은 아침이 되어 해 뜨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것을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해를 위해 하늘에 장막(텐트, )을 지어 주셔서 밤새껏 해가 쉴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보금자리에서 밤새껏 쉬다가 아침이 되어 떠오르는 해는 얼마나 큰 기쁨을 전해주는가! 아침에 떠오른 해는 저녁이 돼서 질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나누어 준다. 그 열기, 그 사랑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6)

 

자연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여, 그것을 노래한 시를 소개한다.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한 박두진의 <>라는 시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평론가들은 박두진의 시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일종의 '메시아'의 상징이며,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매개적 존재로 표현된다.” 자연이 인간에게 일종의 메시아의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숨결 때문이다. 물론 자연 자체는 (메시아)’이 아니다. 자연 자체를 신으로 보는 사상을 범신론이라고 한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자연이 바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연은 하나님의 숨결을 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 이것을 일컬어 범재신론이라고 한다. 범재신론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담아낸 신론으로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잘 설명해 준다.

 

시편 기자처럼, 또는 박두진 시인처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하는 일은 시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시인은 눈에 보이는 너머의 것을 형상화시킬 줄 아는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우리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시인이다. 만약 이 찬송가를 사랑한다면 이미 시인이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찬송가 79,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시인은 다음으로 율법에 주목한다. 시인에게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 할 어떤 규율, 법이 아니다. 율법은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한다. 율법 자체에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계시되고 있는, 율법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을 베풀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이 세상 그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고, 참된 지혜를 주며, 참 기쁨과 의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그래서 시인은 율법을 사모한다. 그것은 순금보다 더 귀하고, 꿀보다 더 달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뿐더러, 율법을 오히려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바울 서신에 보면(로마서, 갈라디아서), 율법과 복음이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기독교인들은 복음은 좋은 것이고 율법은 나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구원은 복음으로 받는 것이지 율법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을 잘못 이해한 탓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율법은 지식(우리가 이것을 해서는 안된다)이라는 힘을 주지만, 그 지식은 함께 본래적으로 복종할 힘(우리는 이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마커스보그, 첫 번째 바울의 복음, 235). 반면에 신앙은 안에서 그 법에 따를 힘을 불러일으킨다”(같은 책 235). ,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우선성이지 율법의 폐지가 아니다. 율법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이 배제된 상태로 인간의 삶에 주어진다면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숨결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경우를 보자. 2012년 대한민국의 보성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고,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명, ‘보성 삼남매 사건이다. 한 교회의 목사가 자신의 자녀 셋을 죽인 사건이다. 그가 자신의 자녀 셋을 죽인 이유가 어처구니없다. 다음의성경구절이 그들의 행동을 부추겼단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기 아니하리라”(잠언 24:13).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Sheol 죽음)에서 구원하리라”(잠언 24:14).

 

죽은 삼남매 중 어느 한 명이 죽기 전 이러한 일기를 남겼다. “2012 1 20일 목요일 TV를 보았다 재미있다 런닝맨이 재밌었다.” 런닝맨을 재미있게 본 아이들이성경에 의해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었다. 숨지기 열흘 전부터 축귀 의식이 아이들에게 행해졌고, 금식 명령이 내려졌다. 결국 몸이 허약해진 아이들은허리띠와 파리채로 채벌을 당하다 쇼크사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을에서 구원하기 위한 행위였다고 부모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성경이 런닝맨보다 못한 존재로 추락한 순간이다. 런닝맨은 아이들에게 재미라도 줬다. 그러나 이 경우, 성경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죽음을 주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이것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숨결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율법은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한다. 우리가 경전으로 생각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성경은 복음의 율법이다. ,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기독교의 여러 종파 중, 특별히 개신교는 설교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을 만큼 성경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통해 영혼이 소생되고, 지혜롭고, 마음이 기쁘고, 눈이 밝아 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장애를 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말로, 성경 공부를 그렇게도 많이 하고 설교 말씀을 그렇게도 많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영혼이 소생되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고, 마음이 기쁘지 못하고 눈이 오히려 어두워졌다면, 그래서 스스로 괴로움을 느끼고 여전히 남을 정죄하고, 악한 일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있다면, 그는 신앙이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자연과 율법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시인이 십자가 사건을 보았다면 무슨 고백을 했을까? 이런 고백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드러남은 모두 여기에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이 아니라, 궁극적인 계시, 즉 하나님 스스로를 세상에 보이신 절대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이상, 자연도 율법도 그 빛을 잃고 우리의 모든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 그 자체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땅에서 활동하실 당시,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누어주신 빵을 얻어 먹기 위하여 예수를 따라 다녔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 자신이 하늘에 내려온 산 떡이라는 비유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셨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예수에게서 을 얻어 먹을 수 없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예수를 떠나간다. 그 모습을 모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을 다가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은 배타적인 말씀이 아니라, 매우 포괄적이고 긍정적인 말씀이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이 말은 예수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배타적인 진술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생명이시다라고 하는 우주적인 선포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생명이라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인 생명, 즉 하나님을 경험한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가르침), 죽음(십자가)와 부활에 관심을 집중하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생명을 건다. 그것이 곧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1장에는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온다. 짧은 비유라서 그것을 그대로 옮겨 본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21:28-32).

 

우리는 어떻게 자연과 율법과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이처럼, 신앙 있는 자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것에 놀라워하며 찬양하는 자가 신앙 있는 자이다. 신앙 있는 자가 율법(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소생되고 지혜롭게 되고 마음이 기쁘고 눈이 밝아진 자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자이다. 신앙 있는 자가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자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한 자이다. 신앙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자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한 자이다. 다른 말로 해서, 열매를 보면 그가 신앙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12장이 증거하는 메시지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 (12:33-37)

 

(자연)와 율법(성경)과 그리스도에 드러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정말로 만났는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관심이 있는가? 거기에서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무엇보다 궁극적 생명 사건이고,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시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이것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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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0. 2. 05:57

야곱의 결혼

창세기 35

(창세기 29:1-30)

 

야곱은 지팡이 하나 들고 집을 나섰다.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하란 땅에 있는 외삼촌 집으로 피신 하는 중이다. 그가 걷는 길은 불안하다.

 

잃어버렸습니다 /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 두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어 / 길게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 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시 <> 전문)

 

야곱은 길을 걸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있는 길을 걸었다. 아침에 출발한 길은 저녁에 당도하고, 끝없이 걷다 멈춰선 곳에 놓여 있는 돌 하나를 베개 삼아 길 위에서 잠을 청했다. 야곱은 돌 베개를 베고 바로 누웠다. 하늘이 보였다. 하늘은 까맸다. 까만 밤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별들은 눈에 부딪히는 순간 눈물로 변했다. 벌거벗긴 채 내몰린 한 마리 어린 짐승처럼 야곱은 울었다. 눈물로 자기 안에 있는 부끄러움이 씻어질 때까지 울었다. 그리고 잠 들었다.

 

야곱은 꿈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꿈 속에서 만난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깨끗이 씻겨진 야곱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다.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듯이, 가인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5).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희망을 품고 길을 다시 걸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부끄러웠던 마음은 이제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열심히 걸었다.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땅을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며칠을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은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는 진술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뒤 품게 된 희망과 맞닿아 있다. 야곱은 그 땅에 이르러 눈을 들어 주변을 자세히 보았다. 그가 그 땅에서 처음 발견한 것은 우물이었다.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He looked and saw a well in the field)”(2). 성경에서우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모두 새로운 사건이 전개되고, 하나님의 복이 발생한다. 야곱의 고된 여정 가운데 우물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 그가 인생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복이 그의 인생 가운데 창조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우물과 관련된 중요한 일화들을 보자. 리브가도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온 아브라함의 종을 우물가에서 만났고(24:16), 후에 십보라도 남편이 된 모세를 우물가에서 만났다(2:15-17). 우물은 하나님의 복의 상징이며, 생명을 공급받는 장소였다. 이렇듯, 야곱이 길을 걷다 우물을 만나게 됐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그의 인생 가운데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야곱은 우물을 만났다. 그는 우물에 가서 물 한 잔 얻어 먹으며 생기를 되찾았고, 우물을 들여다 보며 우물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시 <자화상> 전문)

 

야곱은 우물 속에서 미워할 수 없는 한 사람을 발견한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우물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장소이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삶 속에 펼쳐진다는 것을 뜻한다.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셨던 것과 다르지 않다. 야곱은 고향 땅에서 부모님 곁을 떠나올 때 이러한 약속을 받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28:3). 우물에서 무엇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야곱은 우물에서 만난 동방 사람들에게 혹시 라반을 아냐고 묻는다. 자신들은 하란 땅에서 왔고 라반을 안다고 대답한다. 삼촌 라반의 안부를 물은 뒤, 이어지는 장면은 기적과 같다. 다름 아닌,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이 삼촌 라반의 양 떼들을 몰고 그가 서 있는 우물가로 오고 있었다. 우물에서 야곱과 라헬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야곱은 라헬이 몰고 온 양 떼에게 우물물을 먹이고, 자기의 신분을 밝힌 뒤, 라헬을 붙들고 운다. 그간의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지는 순간이다.

 

야곱은 삼촌 라반을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물은 뒤, 하란 땅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삶은 그가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시 <새로운 길> 전문)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한 달 동안 편안하게 지내다, 이제 본격적인 생활인으로서 그곳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말하라”(15). 결혼을 위해서는 지참금이 필요했던 시대에 살던 야곱은 부모님을 떠나 빈손으로 왔기 때문에 결혼을 위한 지참금이 없었다. 야곱은 결혼을 위해 지불해야 할 지참금을 자신의 노동력으로 대신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18).

 

속임수로 남의 것을 빼앗기만 하며 살았던 야곱의 인생이 달라졌다. 야곱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 원했다. 고대 근동의 풍습을 기록하고 있는 누지 문서에 따르면 지참금은 대개 은 30-40 세겔 정도이다. 10 세겔은 목자의 1년 임금에 해당하므로,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을 봉사하겠다고 한 것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통상 지불해야 하는 지참금보다 많은 액수를 지불한 것이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시 <십자가> 전문)

 

우리 인생 가운데 요행은 없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이다. 속이고 빼앗는 것은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그 대가는 혹독하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열매가 달고 영광스럽다.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속이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가는 책임 있는 존재로 거듭났다. 요행을 바라며 가는 길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걷는 길은 겉으로 보기에 같아 보이지만 차원이 다른 길이다.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나 그 열매가 다르다. 길을 가며 통과하게 될 시간의 질이 다르다.

 

야곱은 이제 속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담지한 자로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희망 가운데 살게 되었다. 그는 라헬을 아내로 맞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라헬을 위해, ‘모가리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흘렸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20).

 

칠 년을 며칠 같이 성실하게 일한 야곱에게 드디어 결혼식 하는 날이 다가 왔다. 야곱은 삼촌 라반과 맺은 계약대로 칠 년 동안 열심히 일했고, 이제 그의 권리를 행사한다.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21). 라반도 야곱의 요구를 묵살하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며 결혼식을 거행한다. 잔치가 끝나고 밤이 왔다. 이제 야곱은 라헬에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라반은 라헬 대신에 레아를 야곱에게로 들인다. 밤에 품었던 여인이 라헬이 아니라 레아라는 것을 아침에야 비로소 알게 된 야곱은 삼촌 라반에게 따진다.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25).

 

이 일을 놓고 야곱과 라반 사이에 주고 받은 말은 모두 야곱의 가슴을 후벼 팠다. 야곱이 라반에게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한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으로 다가왔다. 자기 자신이 속이는 자였기 때문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속이는 자는 달콤하지만, 속임을 당한 자는 쓰다. 야곱은 그 쓴 맛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라반은 야곱에게 이렇게 변명한다.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26). 이 말은 형보다 앞서려 했던 야곱의 행적에 대한 고발로 작용했다. 야곱은 라반에게 더 이상 따져 들 수 없었다. 그래서 야곱은 삼촌 라반의 요구대로 칠 일 동안의 레아와의 결혼식을 마치고, 그 이후에 라헬을 아내로 맞이 한다. 또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대가로 지불해야 할 지참금을 칠 년 동안의 노동으로 다시 지불한다.

 

야곱에게 있어 두 번째 칠 년은 단순한 지참금이 아니었다. 속이는 자로 살던 야곱이 이제 속임을 당하는 자로서 겪게 된 아픔 가운데, 지난 날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참회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참회록을 쓰지 않은 인생은 진정 거듭났다고 말할 수 없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내 얼골이 남아 있는 것은 /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24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 시 <참회록> 전문)

 

이렇듯 야곱의 결혼은 참회의 시간이요, 참회로부터 맺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었고, 레아와 라헬은 실바와 빌하를 몸종으로 얻었다. 야곱의 참회와 라반의 속임수, 그리고 이 네 여인의 역동적인 인생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무엇을 만들어 가게 될 지, 우물 들여다 보듯, 가만히 들여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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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27. 03:22

약속의 성취

창세기 23

(창세기 23:1-2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0, 12).

 

사라가 죽는다. 돌아보면 수고와 슬픔뿐인 삶을 127년 동안 살다 죽는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종속된 존재로 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도반(길벗)으로서, 그리고 돕는 배필로서, 또한 아브라함과 함께 언약을 받은 만국의 어머니로서 세상을 살다 죽는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언약의 담지자라는 것을 말해 주는 징표는 다른 누구의 태가 아닌 바로 사라의 태를 통하여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라는 어머니다. 사라는 여자를 대표하고, 언약의 통로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창조의 약속인데, 하나님의 창조는 어머니 사라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대지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다. 대지가 없으면 생명이 없고, 대지가 오염되면 생명이 위태로운 것처럼, 어머니 사라가 없으면 하나님의 창조도 없고, 그의 믿음이 오염되면 약속도 위태롭다. 그녀가 없으면 약속의 성취도 없다. 그래서 사라는 생명과 창조의 통로인 어머니요 대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창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두 가지, 자손과 땅이었다. 창세기 21장에서는 두 가지 약속 중 자손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보았고, 22장에서는 언약의 위기를 보았고, 23장에서는 또 하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본다. 그런데 두 가지 약속이 모두 사라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약속의 자식 이삭이 어머니 사라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에 들어왔다. 이제 눈에 보이지 않던 약속의 땅이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창조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아내 사라의 죽음은 통렬한 것이었다. 사라가 숨을 거둔 장소는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이다. 이곳이 바로 마므레인데, 이곳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진 뒤 하나님으로부터 땅에 대한 약속을 받고 처음 옮겨간 곳이다(13:18). 그때만 해도 아브라함은 땅에 대한 약속이 바로 그곳에서 이루어지게 될 거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준비하시고 계신다. 지금 당장은 막막해 보여도 날마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다 보면 믿음(하나님의 약속)이 형상화되는 날이 온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음을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망자(죽은 자)를 예우하는 일은 죽은 시체를 잘 매장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흙에서 온 인생이 흙 속에 잘 묻히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인생도 없다. 그래서 옛날에는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 죽은 자들은 땅 속에 묻지 않고 땅 바닥에 놓아 들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다. 그것은 인간이 당하는 수치 가운데 가장 큰 수치 중 하나였다. 열왕기상에 나오는 아합과 이세벨 이야기에서 엘리야가 그들에게 전한 예언이 그런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왕상 21:23). 아합과 이세벨이 행한 극악무도한 죄의 심판으로 그들은 엘리야의 예언대로 그렇게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한다.

 

아브라함은 평생의 도반(길벗)이자 돕는 배필이었던 아내 사라의 삶을 예우하기 위해서 그녀의 죽음 앞에 슬퍼만 하지 않고 일어나 그녀의 무덤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헷족속에게 가서 죽은 아내를 매장할 땅을 줄 것을 요청한다. 이제 아브라함은 헷족속과의 긴장감 도는 흥정을 시작한다.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 아브라함은 헷족속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입니다”(4). 이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은 아내 사라를 매장할 수 있는 땅이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목적에 집중하는 사람은 그 나머지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낮출 준 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낮추면서 헷족속과 교감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핵심을 말한다. “죽은 제 아내를 장사 지낼 수 있게 여러분들의 땅을 제게 좀 나눠 주십시오”(4).

 

이에 대한 헷족속의 반응이 참 다행스럽다. 헷족속은 자기 자신을 낮춘 아브라함을 높여준다. “내 주여, 들어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입니다. 우리 묘지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골라 돌아가신 부인을 장사 지내십시오. 어른께서 돌아가신 부인을 장사 지내신다는데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자기 묘지라고 해서 거절할 사람이 있겠습니까?”(6). 이는 아브라함이 나그네와 거류민으로서 약속의 땅에 살면서 얼마나 덕망 있는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자성어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말이 있다. 이는 덕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 따르는 무리가 있다라는 뜻이다. 누구를 대할 때 나 자신이 조금 손해 보며 대한다면 반드시 많은 이웃이 생겨 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 또한 나 자신보다 약한 자를 돌봐주고 훈훈한 인정을 베풀면 서로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바라 보게 되므로 어찌 외로울 있겠는가. ‘()’이란 자기 희생이다. 덕을 쌓는다는 것은 자기 희생, 즉 사랑을 통해서 쌓는 것이다. 덕은 용서하고 용납하고 이해하고 희생하는 것을 통해 쌓는 것이다. 이렇게 덕스러운 마음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둔 자들에게 오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살면서 그곳을 다스리고 있던 헷족속과 충분한 교감을 가졌다. 덕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충분한 교감을 갖는 것은 참 중요하다. 충분한 교감이 없는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교만과 욕심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한 교감을 쌓은 후에 말하는 것은 서로의 것을 나누는 사랑의 행위가 된다.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는 사귐의 행위가 된다.

 

여기까지 보면 헷족속이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매장할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 값을 충분히 지불하고자 한다. 제 값을 지불하고 합법적이고 영구적인 소유권을 갖기 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라고 공짜로 얻기를 원하거나 헐 값에 땅을 사고자 하지 않는다. 그에 정당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하고자 한다. 이것은 십자가에서도 나타나는 대가의 완전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구원을 싼 값에 이루시거나 헐값에 이루지 않으신다.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인 이유는 값싸게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이 아니라,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온전한 대가를 지불한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신적 능력이다. 그래서 본 회퍼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값비싼 은혜(teure gnade)’라고 부른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윤리를 넘어선 신앙의 행위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그런 신앙의 행위와 동떨어질 때가 많다. 거룩한 노동을 '헌신과 봉사'로 탈바꿈시켜 노동력을 착취하는 교회의 비루한 행동은 멈추어야 한다. 담임목사가 부교역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목회자의 노동력을 '헌신과 봉사'로 착취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때로 교회에는 도대체 인권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는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것을 훈련으로, 헌신으로, 봉사로 미화시킬 때가 많다. 노동력과 '헌신과 봉사'는 구분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헌신과 봉사는 감사와 찬미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 행위이지만, 교회 안에서의 노동력은 그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되는 것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 행위이다.

 

교회의 일꾼(교회에서의 노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서원한 고귀한 직분'이다. 그러나 그것을 빌미로 부당한 노동력 착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신과 봉사'를 빌미로, 교회의 일꾼(담임이든 부담임이든, 전임이든, 파트타임이든, 교회 일반 사무직이든 관리직이든)의 노동력이 착취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 일이 교회에서 얼마나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작정했다'는 신앙적 결단이 곧 인권과 노동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유린당하고 착취당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매장지이자 하나님께 받은 약속의 땅을 매입하는 데 정당한 대가(상인이 통용하는 은 400 세겔)를 모두 지불하고 헷족속이 모두 보는 앞에서 그 땅이 자신의 소유지가 됐음을 선포한다. “성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18). 헷 족속이 무상으로 주겠다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이렇게 약속의 땅을 한 켠 얻으며 정당한 대가를 모두 지불하려고 했던 것은 약속의 아들을 얻는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정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아브라함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매우 혹독했다. 약속의 자식이니까 어렵지 않게 낳을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모든 대가(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믿음이 모든 대가였다)를 지불하고 약속의 자식을 어렵게 얻었을 뿐만이 아니라, 얻은 자식을 지켜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100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까지 하셨다. 그 모든 시련과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냈을 때 비로소 자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땅을 구입한 것은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이다. 그러나 이것은 약속의 성취일 뿐이지 완성은 아니다. 이것은 성취의 시작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새창조에 대한 종말론적 성취요 비전인 것처럼, 사라의 매장지는 땅의 약속에 대한 종말론적 성취요 비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 이제부터 그 비전의 완성을 향해 달음질 해야 하는 것처럼, 사라의 죽음과 매장지의 구입을 통하여 이제 시작된 땅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약속의 완성을 향해 달려야 하는 그들의 비전인 것이다.

 

사라의 죽음은 남편 아브라함에게도 아들 이삭에게도 큰 아픔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사라의 죽음이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비전과 삶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비통한 것이기도 하지만 축제이기도 하다. 바로 아래의 시처럼.

 

축제

 

축제다

독수리 대여섯 마리의 흥분

날갯짓

쪼는 부리

통통통 구르는 발

 

그들의 축제는

아마딜로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세상이 늘 그렇듯이

아마딜로의 죽음은

이중적이다

 

슬픔이며 기쁨이다

상실이며 기회다

곡이며 흥이다

 

피곤과 지루가 베어 있는 오후

무심한 햇살은

껍데기만 남은 독수리 한 마리가

아마딜로와 같은 운명으로

저만치 널브러져 있는 장면을

조명처럼 비추고 있다

 

저것은 또 누구의 축제 현장이었을까

(장준식 作)

 

과거에 나는 없었고, 미래에도 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오직 현재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존재하는 현재를 시점으로 과거와 미래는 같을 수 없다. 내가 현재에 존재하면서 해야 할 일은 과거와 미래가 동일한 세상으로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나로 인해 과거에는 없었던 그 무엇이 미래에 존재케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처럼 기도하고, 사라처럼 헌신하고, 헷족속처럼 협력하는 이 땅의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이전의 세상과 그리스도 이후의 세상은 같지 않다. 그리스도 이전의 세상은 약속의 세상이고, 그리스도 이후의 세상은 약속 성취의 세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이후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약속의 성취 안에서 약속의 완성을 향하여 미래를 열어젖히며 살아간다.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있어 사라 죽음 이전의 세상과 그 이후의 세상은 같지 않다. 사라의 죽음을 통하여 열려진 미래가 그들 앞에 놓여 있다. 사라의 생명을 통해 존재하게 된 약속의 자식이 사라의 죽음을 통해 존재하게 된 약속의 땅에서 이제 약속의 완성을 향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라의 죽음은 비통이 아니라, 축제로 승화된다.

 

이처럼 죽음은 단순한 존재의 소멸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악마적인 그 무엇도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믿음으로 끊임 없이 삶의 현실을 뚫고 나간다면, 어느 순간 틀림 없이 맞닥뜨리게 될 죽음은 단순한 사라짐이 아니라 미래를 열어젖히는 축제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삶의 토대를 마련하고 끊임 없이 거기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 부르는데, 바로 그것이 철저한 현실인 죽음을 순간영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삶의 정열 아니겠는가(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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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19. 06:31

이삭의 결혼

아브라함이 받은 범사의 복

창세기 24

(창세기 24: 1-67)

 

사라는 죽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한 켠을 차지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헛된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그 죽음이 누군가의 인생에는 거름이 되어 새로운 삶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사라가 죽기 전에 어떤 유언을 남겼겠는가? 그리고 그의 죽기 전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었겠는가? 아마도,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이 좋은 처자와 결혼하는 것 아니었겠는가. 엄마는 죽었지만, 엄마의 소망은 죽지 않는다.

 

창세기 24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1). 어떻게 보면 참 모순 된 말인 것 같다. “늙음과 복이라는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늙는 것을 부끄럽게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허상일 뿐이다. 늙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신비한 일이다. 다른 말로 늙음은 신비이다. 늙음 속에는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 늙었다는 것 자체가 복이다. 복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늙겠는가. 그러므로 현대 사회는 늙음을 신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고대인의 영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늙음의 신비에 눈 뜰 때, 우리는 늙은 이들을 천대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서 그들을 마음으로 존경하고 우대하게 된다. 늙은이를 존경하는 일은 사회적 규범이나 의무 또는 윤리를 넘어선 신비에 대한 눈뜸이다.

 

아브라함은 범사에 복을 받았다. 이 구절을 영어로 보면 이렇다. “The Lord had blessed Abraham in every way.” 여기서 ‘every way’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이것은 어떤 길을 가든 무엇을 하든 복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참 쉽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범사에(every way)’에 복 받기를 끊임 없이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길이, 무엇이 복된 길이고 복된 일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을 가고 우리 앞에 놓여진 일을 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예배해 놓으신 복된 길, 복된 일이라면 우리의 발걸음과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범사에 복을 받은 것에 대한 증거가 바로 이삭의 결혼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음에 대한 고통을 이겨내고 이제는 아들 이삭의 삶을 돌본다. 이삭을 결혼시키는 것이 나이 많은 아브라함의 마지막 과제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중 땅에 대한 것은 이제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이제 남은 약속은 자손에 대한 것인데 그것은 아들 이삭의 삶을 통해서 성취되어야 한다. 그 출발점이 결혼이었다. 그러므로 이삭의 결혼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이 중차대한 일을 진행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종들 중 가장 신실한 종을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이삭의 결혼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맡기면서 이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지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다음의 의식(ritual)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데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어으라”(2).

 

의식(Rituals)은 사소하고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구원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하여 쉴새 없이 정신 없는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구원은 일상의 구원이다. 우리가 아무런 의미 없이 반복하는 듯한 그 지루한 일상은 사실 우리 인생의 전부이다. 인생은 뭔가 특별한 일로 구성된 무엇이 아니라, 일상으로 구성된다. 일상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매우 의미 있고 특별하다.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다. 우리는 일상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고 식사하고 일하고 누군가와 만나고 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것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그것을 지루하고 권태롭고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그러한 일상생활 때문에 이렇게 생존해 살아가는 것이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일상은 매우 소중한 것이고 우리의 삶의 전부이다. 그런 일상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바로 의식(Rituals)을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의식을 행한다. 가령 결혼을 한다든지, 졸업을 한다든지, 생일이라든지, 그런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의식을 통하여 그날 또는 그것을 환기시킨다. 의식이 왜 특별한 날에만 행해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의식은 특별한 날에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자체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일상을 사소함에서 구원할 수 있다. 밥 먹기 전에, 잠 자기 전에, 잠에서 깨어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누군가를 만나기 전, 그 일상이 지장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짧게 의식을 행한다면 우리가 이제 맞닥뜨리게 될 일상은 사소하고 지루하고 권태로운 것에서 구원된다.

 

의식을 통하여 어떤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한다. 아브라함 입장에서 이삭의 결혼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 일 수 있으나, 아브라함의 종의 입장에서 이삭의 결혼은 그저 또 하나의 지루한 일상일 수 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일상인데, 이삭의 결혼을 수행해야 하는 종의 입장에서는 이삭의 결혼이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것만큼 중차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또 하나의 수행해야 할 지루한 일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알았던 것일까? 아브라함은 종에게 이삭의 결혼을 그냥 맡기지 않고 의식을 통해서 맡긴다. 이삭의 결혼이 얼마큼 중요한 것인지 종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허벅지에 밑에 손을 넣는의식을 통해 아브라함의 종은 그가 맡은 일을 지루한 일상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정신 차리고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중차대한 일로 승화시킨다.

 

의식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그의 종에게 내린 명령은 이것이다.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3-4). 종의 임무는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 땅이 아닌, 아브라함의 고향 하란 땅에서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은 그 임무를 받아 들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서 만약 그렇다면 이삭을 그 여자가 살고 있는 땅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5).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지침을 내린다.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6). 여기서 ‘~하도록 하라는 히브리어 히샤메르 레카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매우 강력한 표현으로써 결코 이삭을 그리로 데라고 가지 말 것에 대한 당부이자 주의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이토록 강력하게 이삭을 그리로 데리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신앙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선택을 받아 가나안 땅에 왔고, 하나님께서 이 가나안 땅을 자신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삭은 이 땅을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 이삭의 결혼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 땅을 떠나서 결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삭의 아내를 찾는 일은 아브라함 집안의 개인적인 일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결정하고 진행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내가 하는 이 일이 과연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는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있는가를 살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의 결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언약도 중요하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시하고,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결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 놓고 하나님 보고 그 결정을 인정하시든지 말든지 하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는 데 있어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 시킨다든지, 자신의 고향 땅에서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삭을 그쪽으로 보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결정하고 선택하고 일을 진행시켜야 하는 거룩한 의무가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한 질문을 뒤집어 보면 이런 것이다. 주인님, 왜 쉬운 길이 있는데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십니까? 이삭을 가나안 여인과 결혼시키면 얼마나 쉽습니까? 여자를 주인님의 고향 땅에서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것보다 이삭을 그리로 데리고 가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이렇게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십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의 종만이 갖는 의문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흔히 갖게 되는 의문이요 유혹이다.

 

아브라함은 쉬운 길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면서, 그리고 쉬운 길을 생각하는 그의 종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그의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He will send his angel before you!)”(7). 언약 안에 머물러야 하는,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걸어 가야 하는 어려운 길을 택하면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며 쉬운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의식(Ritual)을 통하여 이제 이삭의 결혼은 아브라함에게나 그의 종에게나 똑같이 매우 특별한 일상, 중차대한 일로 승화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될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를 만나게 된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데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2). 정말 멋진 기도다.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같이 따라 해야 하는 기도이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며 그 길을 가는 우리에겐 끊임 없이 기도가 필요하다.

 

생각해 보자. 의식을 통해서 이삭의 결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종이 잠시라도 딴 맘을 먹게 되면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일단 길을 떠나면 그 길 떠난 사람의 행방은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는 확인할 길이 거의 없다. 그리고 변변한 교통 수단이 없었던 그 때에, 먼 곳을 여행하며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종이 딴 맘을 품고 얼마쯤 가다가 아무 여인이나 데리고 와서 주인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한 것처럼 일을 꾸민다 해도 그것을 알아차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보라. 언약 가운데서 진행된 이삭의 결혼이 얼마나 은혜 가운데 진행되는지. 아브라함의 믿음과 종의 신실함은 연합을 이루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낸다. 아브라함이 종에게 선언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를 아브라함의 종보다 앞서 보내셨고, 종은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끊임 없이 기도하면서 그 길을 걸어갔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선언한대로,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이 기도한대로, 종은 한 여인(리브가)을 만나게 되고, 리브가와 그녀의 가족 모두의 동의 하에 은혜롭게 리브가를 하란 땅에서부터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온다. 이 일이 진행되는 가운데 리브가와 그의 가족의 입술에서 나오는 신앙의 고백을 들어보라.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0-51).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이루어진 이삭의 결혼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이삭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오랜 시간 동안 괴로운 시절을 보냈던 이삭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약속의 아내 리브가를 보고 기뻐했다. 엄마는 죽었지만, 죽지 않은 엄마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이삭이 눈 앞에 서 있는 리브가를 더욱더 기쁘게 맞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엄마 때문이었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사람에게는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존재가 한 없이 더 귀해 보이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삭이 리브가를 맞아 아내로 삼고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던 엄마의 죽음이 준 또 다른 선물이다. 참 눈물 나는 장면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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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18. 05:12

야곱의 하나님 경험

창세기 34

(창세기 28:10-22)

 

형 에서의 복을 가로 챈 뒤, 궁지의 몰린 야곱은 엄마 리브가의 권유대로 집을 떠나 하란 땅으로 향한다. 길을 떠나기 전, 다행히도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고 가지만, 그 축복이 그의 인생에 어떻게 작용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길은 멀고 험하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뒤에 나오는 야곱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지팡이 하나만 의지한 채 집을 떠났다(32:10). 아무것도 걸치지 않을 채 엄마의 자궁을 통해 세상에 던져진 인생처럼, 그의 인생은 무(nothing)에서 시작된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마음 속은 번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그가 길을 가다 날이 저물었을 때 어떤 집을 찾아가 유숙을 청하지 않고, 그냥 노숙하게 되는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이는 마치 창세기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모습과 유사하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1). 아무것도 없고, 혼돈과 공허만 가득한 상태, 바로 야곱의 삶과 같다. 이것을 볼 때, 인생은 혼돈과 공허만 가득한 빈 상태(nothing)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창조와 다르지 않다.

 

야곱은 어느 집에 들어가 유숙을 청하지도 못하고, 괴로운 마음에 짓눌려 그냥 거리에서 노숙한다.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잠을 청해보려고 주변에 있는 돌을 하나 가져다가 베개를 삼아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꿈에서 야곱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사닥다리를 본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를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 이것을 무슨 현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까?

 

야곱은 지금 그 어디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냥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은 비참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가 꿈 꾼 대로 사닥다리가 이 땅에서 저 하늘 꼭대기에 닿았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고 버려진 것 같아도, 그가 보지 못하고 있을 뿐 결국 이 땅의 인생이 저 하늘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사닥다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자들(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 의지할 데 없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보호 하고 계신다는 현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꿈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들었던 음성과 같은 것이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13-14). 그리고 여기에 더 하여, 그의 고단한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까지 받는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자신의 현실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의지할 데 없는 것 같고, 온통 혼돈과 공허뿐인 것 같았던 인생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야곱은 하나님을 이렇게 경험하고 나서 인생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그 동안 하나님이 늘 자신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했던 야곱은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기 계신다. 나와는 상관 없는 곳, 다른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계신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바로 여기에 계신 것을 깨달은 야곱의 첫 번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이것은 그냥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이다. 귀신 나올 것 같은 등골이 오싹한 기분 나쁜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의 막혀 있는 오감이 하나님을 향해 전부 열리게 되면서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등골이 오싹한 기분 나쁜 두려움은 그 자리를 얼른 피하게 하지만, 거룩한 두려움은 바로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리게 한다. 야곱은 거룩한 두려움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바로 그곳에서 제단을 쌓는다. 자신이 베고 잤던 돌을 기둥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한 뒤, 그곳을 벧엘이라고 불렀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저 하늘에 있거나 어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집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만난 곳, 하나님을 만나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한 곳, 하나님을 만나 제단을 쌓는 곳, 하나님을 만나 예배 드리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다. , 하나님은 어디 다른 데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바로 지금 여기에 계신 분이다.

 

야곱은 거룩한 두려움 가운데 예배 드린 뒤, 하나님께 서원한다. 서원은 어떤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신비한 체험에 뒤따르는 자발적인 감사의 행위이다. 야곱의 서원을 보면, 그는 어떤 조건 하에서 자신의 서원을 이행할 것처럼 보인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20-21).

 

그런데 이것은 어떤 조건이라기 보다, 이미 야곱에게 주어져 있는 은혜이다. 하나님은 이미 야곱과 함께 하셨고, 이미 야곱이 바라는 대로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야곱의 서원은 조건이 충족되면 성립되는 서원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서원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소원을 아뢰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어떻게 하겠다는 서원도 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입다의 서원이 그 경우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자신을 맞으러 나온 사람 중 첫 번째 나온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었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의 서원도 그러한 서원이었다.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었다.

 

예레미야서에는 아주 특이한 서원이 나온다. 레갑 족속의 서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명하여 레갑 족속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포도주 마실 것을 권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을 불러 놓고 포도주를 권한다. 그런데 레갑 족속은 그 권유를 뿌리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살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 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35:6-9).

 

레갑 족속의 서원은 매주 자발적인 서원이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매우 고무적이고 의미심장하다. 레갑 족속의 서원은 지극히 준엄한 생활을 하면서 족장들의 간소한 생활방식의 모범을 배우려 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레갑 족속이 하고 있는 것은 가나안 문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이 받아들인 농경문화는 부를 축적하고 그 안에서 온갖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 가나안의 농경문화는 성적타락은 물론이요 종교적 타락을 불러왔다. 그리고 모든 것을 그저 소비만 하는 문화였다. 과연 현재 소위 선진국들이 지향하고 누리는 소비문화와 다를 바 없다. 레갑 족속은 그러한 타락하고 소비적인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서 서원했던 것이다. 소비를 위해 무분별한 자원 낭비를 조장하는, 그래서 지구온난화 문제로 생태계의 위기를 겪고 있는 현재의 지구적 위기를 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 진지하게 이행해 볼만한 서원이다. 저항은 살기 위한, 생명을 위한 몸부림이다.

 

야곱의 서원은 이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해주시는 은혜에 응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이다였다(21-22). 여기에서 십일조가 나오는데,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로 읽으면 곤란하다.

 

십일조는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는 대표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분의 일을 떼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 십분의 일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십분의 일은 단지 소유의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을 떼어서 하나님께서 십일조 드리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이행해야 할 의무를 다 했다고 말하는 것은 착각이고 교만이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야곱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고백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언제든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에 응답하여 자기 자신도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겠다는 신앙고백이다. , 야곱은 이제부터 하나님 안에서 삶을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안과 밖은 구분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있게 된 것이다. 야곱은 이제 하나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빚어져 가는 거룩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 경험은 그를 구원으로 인도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구원의 약속이다. 고대인들에게 땅과 자손은 자신의 생명을 길이 잇는 영생이나 다름 없었다. 땅이 그들의 어머니였고, 자손이 그들의 생명이었다. 그래서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곧 구원에 대한 약속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경험은 구원의 경험이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거룩한 두려움의 경험이다.

 

야곱은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를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바로 여기에 계신 것을 깨달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를 경험한다. 그 사닥다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야곱이 꿈 속에서 하나님 경험을 통해 비로서 깨닫게 되었듯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닥다리가 우리의 현실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깨닫고 나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현실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게 되고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그리스도인, a follower of Christ)가 될 수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뜻이 임마누엘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봄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 공허와 혼돈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현실을 본다. 그 현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영생(하나님의 생명)의 현실이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현실은 죽음과 혼돈,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이 가득한 것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새창조의 사역이다. ,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며, 우리에게 무한한 생명의 나라를 안겨 주신다.

 

이것을 경험하는 자, 이것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께 서원할 수 밖에 없다. 그 서원은 다름 아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구원이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현실을 경험하는 자, 하나님과의 일치되는 거룩한 두려움 속에서 영원한 생명(하나님의 영)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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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