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17. 02:16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

창세기 29

(창세기 26:12-33)

 

우리는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을 잘 모른다. 오히려 싸워서 이기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손자병법에서도 가장 좋은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매우 이상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다투지 않고번성하는 법은 어울리지 않는 말 같다. 우리는 다투지 않고서 번성하는 법을 잘 모를뿐더러, 세상은 그런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성경을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법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것은 싸우는 길이 아니라, 평화롭게 사는 길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이야기에서 본다. 이삭은 어떻게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삶을 살았을까?

 

요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전능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이 가득하다. 돈을 많이 벌어 값비싼 자동차나 개인 비행기 또는 보트를 사는 것이 부의 상징이다. 현대인들에게는 그런 것을 가지면 인생이 풍요로울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그렇다면 이삭의 시대에는 무엇이 가장 중요했을까?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과 물이었다. 사실 지금도 인간에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만 현대인들은 발달된 농업과 관계 시설 때문에 식량과 물의 중요성을 망각했을 뿐이다. 망각했다고 해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거의 망각 속에 있다.

 

이삭은 기근이라는 현실에 맞서 생존 투쟁을 했다. 그 결과 애굽으로 피난 가는 길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 그랄 땅에 거주하게 된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 땅에 거주했다는 것은 기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삭은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얻는다. 이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삭 사이에 맺어진 계약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약속하시기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라고 하셨다(26:3).

 

이삭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지 보자.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13, 14). 그런데 이것이 그만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를 산다. 예나 지금이나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일은 드물다. ‘시기는 참 무서운 감정의 상태이다. 시기란 다른 사람의 외모나 소유, 재능 등을 시샘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을 말한다. 시가란 단순히 부러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미움이 싹트는 마음이다. 미움이 싹트면 거기에는 어김 없이 폭력이 발생한다.

 

생명을 직접적으로 해치거나, 생명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어떤 것을 해치는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 생명과 직결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과 물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에 대하여 시기하는 마음이 들어 폭력을 휘두르는데, 이삭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앗아가지는 않지만, 생명과 직결된 물을 빼앗아 가는 것을 통해 이삭에게 폭력을 가한다.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14, 15).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우물을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고, 농사지을 땅까지 빼앗는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16). 이 정도까지 나왔으면, 이삭이 생존을 위해 블레셋과 전쟁을 벌일 만도 하다. 그런데 이삭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잘 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받은 감사를 기억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믿음의 조상으로서 이삭이 위대한 이유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 일이 잘 풀릴 때 이 약속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 약속은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믿음 있음과 믿음 없음, 참된 감사와 거짓 감사는 잘 됐을 때 상대방에게서 받는 시기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통해서 구별할 수 있다. 믿음과 감사에는 다툼이 없다. 믿음과 감사에는 그저 나눔과 양보만 있을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잘 된 것이 하나님께 받은 복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나누지 못하고 양보하지 못하고 다툼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믿음도 감사도 아니다.

 

이삭은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맺은 땅이나, 아버지 때부터 사용해 오던 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블레셋과 다투지 않는다. 이삭에게 중요한 것은 백 배의 결실을 맺은 땅이나 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삭은 진실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나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고 사는 믿음의 사람에게 다른 것은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 다투지 않는다.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이사 한 뒤, 거기에서 예전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또 팠다. 그러나 이번에도 블레셋 사람들의 횡포가 있었다. 그래서 이삭은 다른 곳에 우물을 팠다. 그런데 그랄 목자들과 이삭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을 일컬어 에섹(억압하다, 강탈하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툼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곳에 우물을 또 팠다. 그런데 또 다툼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을 일컬어 싯나(대적)라고 불렀다.

 

우물로 인해 계속되는 다툼을 피하기 위하여 이삭은 삶의 터전을 계속해서 옮겼다. 그가 마지막으로 판 우물은 르호봇(넓은 곳)인데, 이 우물을 팠을 때 드디어 다툼이 없었다. 더 이상의 다툼이 없는 우물을 판 후, 이삭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22).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맺은 브엘세바의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판 우물들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하며 블레셋 사람들과 다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투지 않고 나누고 양보함으로 다툼이 벌어지지 않을 때까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싸워서 이기는 것만 배운 현대인들이 보기에 답답할 수 있으니, 오히려 이것은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을 잘 모르는 현대인들이 배워야 하는 삶의 다른 길이다.

 

이삭이 걸어간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의 길이 옳았다는 것은 이삭 스스로 증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툼을 일으킨 상대인 블레셋 사람들이다. 이삭은 그랄 땅에서 브엘세바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거기에서도 우물을 판다. 고대 사회에서 우물을 판다는 것은 요즘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고, 우물을 팔 때마다 성공적이었다.

 

다투지 않고 계속해서 나누고 양보하면서도 번성한 이삭에게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찾아 왔다. “아비멜렉과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브터 이삭에게로 온지라”(26). 자신을 찾아온 블레셋 사람들을 보고 이삭은 또 시비를 걸러 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삭은 그들에게 거칠게 묻는다.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27).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의 반응이 의외였다. 시비를 걸러 온 것이 아니라, 이삭과 평화 협정을 맺으러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삭과 평화 협정을 맺기로 작정한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그러면서 이삭에게 자신들을 해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블레셋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이삭이 자신들보다 강성하게 된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삭에게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기 원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블레셋은 참 약은 족속이다. 이삭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계속 훼방을 놓더니, 자신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으니까 이제 와서 평화 조약을 맺어 위협적인 존재를 쫓아버리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블레셋의 약은 꼼수를 몰랐을 리 없었지만 이삭은 그들을 쫓아버리는 대신 오히려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준다. 그리고 그들의 제안대로 평화 조약을 맺고 그들을 평안 가운데 보내준다.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낯선 광경이다. 교회 다니면서 수도 없이 믿음과 감사, 나눔과 양보의 삶을 들었음에도 실제 삶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은 드물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다투지 않고 번성했던 이삭의 삶은 단순히 구약 시대의 가치로 생각하면 안 된다.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다른 삶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을 이 세상과 싸워 이기는 법으로 잘못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과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가르쳐주는 다퉈서 번성하는 법과는 다른 삶을 사시다가 이 세상에 의해 죽임 당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옳았다는 것을 부활을 통해 확인해 주셨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삭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삶을 살겠다는 태도의 전환이다. 물론 이렇게 살겠다는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손해 보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은 나누고 양보하는 것을 미덕이라 보지 않고, 바보스런 짓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나만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다투지 않고 번성하는 법, 십자가의 길을 좁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믿음과 감사에는 다툼이 없다. 무엇이든 거기에서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 하나님 나라의 삶이 들어서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삶의 방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자,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길을 걸으면서 받은 복 때문에 진실되게 감사하는 자, 그런 자는 결코 다툼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저 나누고 양보할 뿐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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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14. 11:23

고통의 문제

(삼상 1:1-18)

 

어두운 사사시대가 가고 있다. 사무엘이 탄생한 시기는 사사시대의 마지막 시기였다. 사사기를 통해 본 이스라엘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룻기를 통해 본 이스라엘은 희망이 싹텄다. 문제는 어둠을 볼 것인가, 희망을 볼 것인가이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어둠을 보고, 어떤 사람은 희망을 본다.

 

희망은 어떻게 오는가? 사사시대를 지나면서 누군가는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 빛의 세계가 나올 거라는 희망을 갖고 끊임 없이 기도했을 것이다. 희망은 기도와 함께 온다. 기도에 어떤 효력이 있다기 보다, 기도를 통해 희망의 하나님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어두움을 물리치고 희망의 빛을 주시는 분이다.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오늘 이야기는 그 희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준다. 사무엘의 아버지는 엘가나이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 가운데 살던 레위 지파 그핫 계열의 후손이었다(대상 6:22). 그에게는 부인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한나고 다른 하나는 브닌나였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했고, 브닌나는 자식 없는 한나를 조롱했다. 다시 말해, 불임의 문제와 그로 인한 삶의 고통이 자리잡고 있다. 희망은 그냥 오지 않는다. 이러한 고통-어둠을 뚫고 온다.

 

사무엘은 그냥 태어난 인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태어난 인물이다. 그가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빛을 가져다 줄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오늘 한나에게 닥친 시련을 통해서 고통의 문제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고통의 문제에 집중한다는 것은 곧 삶의 문제에 집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살아 숨쉬는 것은 모두 신음한다. 몸부림치지 않으면 살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는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의 삶이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다음의 세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마음이 슬프냐”(8),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10),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15). 이처럼 한나의 마음이 마치 전쟁터와 같이 되어서 혹독하고 잔인하게 시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나의 삶이 그렇게 고통 가운데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남편 엘가나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5, 6). 엘가나가 한나에게 얼마나 잘 했는지는 다음 구절이 보여준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8).

 

겉으로 보기에 한나는 오히려 기쁨에 겨운 것처럼 보인다. 남편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살만하다. 그런데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한나의 삶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나 고통은 다른 곳에서 온다. 삶의 문제는 깊은 곳,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다. 정작 나를 괴롭히는 고통의 문제는 누군가와 나누기도 쉽지 않다. 나누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삶의 깊은 고통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없고, 보여준다고 한들 그것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의 경우를 보자. 그의 고통은 자식 없음에서 왔다. 그런데 그러한 고통을 누군가와 나눈다고 한들, 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롱거리가 된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나는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왔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10).

 

굉장히 뻔한 말 같지만, 정작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지 않는다. 고통의 문제를 마음에 품고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학대하거나, 또는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것을 통해서 고통의 문제를 잊어보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고통의 문제로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결국 우울증을 거쳐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고통의 문제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사회적 고립 상태로 들어선다.

 

한나는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왔다.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구원)해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서원 기도까지 한다.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

 

성경은 한나의 기도 내용을 이렇게 짧게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한나의 기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12). 사실 기도 시간은 내면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간절한 마음을 지니고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의 기도는 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 그 간절함 때문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시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이다.

 

실로의 성전에서 드려진 한나의 기도는 그곳을 지키고 있던 엘리 제사장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엘리가 보기에 한나는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는 한나가 취해서 취기에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해했다. 엘리는 한나를 이렇게 꾸짖는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14). 엘리의 꾸짖음에 한나는 이렇게 항변한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15).

 

여기서 한나가 엘리를 내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내 심정을 통한 것이라고 말할 때, ‘통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샤파크인데, 이는 쏟다’, 엎지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내 심정을 통한 것이라는 말은 내 심정을 쏟아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해 준다.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께 나아와 쏟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고통의 문제에 짓눌려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이 일에 너무도 서투르다. 내 안에 해결되지 않는 고통의 문제를 안고 살다 보니,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인데도, 거기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렇다 보니, 인생에 평안이 없다. 내 안에 평안도 없고, 대인관계에서도 평안이 없다.

 

사람의 삶의 문제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에 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남의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를 지닌 자는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 쏟아내야 한다. 그래야 평안을 얻을 수 있다.

 

한나가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 진실되게 쏟아놓은 것을 안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평안을 빌어준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7). 이에 대해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도달한 것을 확신한 한나는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19). 그리고 한나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다.

 

삶의 희망은 이렇게 고통-어둠을 뚫고 지나갈 때 온다. 왜 인생은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도대체 왜 인생은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고통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 신비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고통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나침반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같은 문제를 놓고 상반되게 반응할 수 있다. 어떤 이는 고통을 통해 어둠을 보고, 어떤 이는 고통을 통해 희망을 본다.

 

십자가의 어둠에서 부활의 희망을 보는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십자가의 어둠 앞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고통의 어둠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와 고통을 쏟아 놓는것이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예수 믿고 죽은 후에 천당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나를 괴롭히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은 미래적이 아니라, 현재적이다. 언제까지 고통을 쏟아놓지 못해 자신을 괴롭히고, 남을 못살게 굴면서 살아갈 것인가? 언제까지 평안 없이 살 것인가? 바로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고통스러운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오라. 그리고 쏟아 놓으라. 그리고 이 음성을 들으라. “평안히 가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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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6. 22:19

사사 시대의 타락과 거룩

(19:22-26, 4:7-12)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은 이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이것은 마지막에만 나오는 구절이 아니라, 사사기 전반에 걸쳐 나오는 사사 시대에 대한 평가이다. 같은 구절이 176절에도 등장하고, 이야기의 말머리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라는 요약된 말로 자주 등장한다.

 

왕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고,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사기와 룻기는 같은 시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두 곳에서 읽은 이야기는 사뭇 너무도 다르다. 같은 시대에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 한쪽은 말 그대로 타락을 보여주고, 다른 한쪽은 말 그대로 거룩을 보여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은 일종의 메타포로 봐야 한다. 물론 이스라엘에 물리적인 왕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정말로 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왕정국가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왕이 존재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국가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라는 진술은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시내산 계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쉽게 말해, 시내산 계약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사사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왕이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제 1~3계명을 어긴 것이나 다름 없다. 십계명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하나님만이 그들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상황을 다른 말로 우상숭배라고 부를 수 있다. 우상숭배란 무슨 거창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

 

왕이신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한 눈 팔 때 생기는 현상이 바로 타락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처음 인간에게서도 나타난 현상이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처음 인간이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아 생긴 인간의 타락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니, 그들의 눈에는 다른 것이 들어왔다. 즉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있어 타락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은 그 행위에 있지 않다. 문제는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시야에서,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오직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었다.

 

타락의 내용은 3무 현상으로 나타난다. 무감각, 무절제, 무질서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무감각이다. 무감각이 무절제와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 타락의 내용인 무감각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사사기의 이야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사사기 본문은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레위인과 그의 일행이 집으로 돌아가던 중 하룻밤 유숙하게 된 베냐민 땅의 기브아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타락에 대한 기사이다. 레위인 일행은 하룻밤 유숙하기 위해 기브아 마을로 갔지만, 거기서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한 노인이 그들을 집으로 맞이했는데, 그는 그곳 기브아 출신이 아니라, 레위인과 마찬가지로 에브라임 출신이었다. 노인 집에서 유숙하며 한창 즐겁게 쉬고 있을 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나타나 이들을 괴롭힌다.

 

우선 불량배들의 무감각을 보자. 이들은 노인의 집에 나타나 노인의 집에 유숙하고 있는 사람을 내어 놓으라고 한다. 그들과 관계하겠다고 한다. 여기서 관계란 성관계를 의미한다. 그들의 무감각을 보라. 그들의 눈에는 노인의 집에 유숙한 사람들이 극진히 대접해야 할 손님으로 보이지 않았다. ‘손대접하기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윤리였다. 손님이 손님으로 보이지 않고, ‘관계의 대상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들의 감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준다. 전혀 상대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무감각의 현상이 불량배들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불량배들의 횡포에 노인과 레위인은 맞서지 않고, 그들의 횡포를 잠재울 방안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주는 것이었다. 레위인의 첩과 관련된 이야기는 19장 전반에 걸쳐서 나온다. 그런데 레위인의 첩은 이야기에서 이름도 없고, 말도 없고, 힘도 없는 약자로 그려진다. 상대적으로 강자인 노인과 레위인의 눈에 약자인 레위인의 첩이 인식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첩을 불량배들에게 내어준다.

 

불량배들이나 노인이나 레위인은 상대적으로 강자들이다. 그들이 약자인 레위인의 첩을 철저하게 유린한다. 약자인 레위인의 첩은 사로잡히고, 배반당하고, 능욕당하고, 고문당하고, 끝내 살해당하고, 몸이 찢기고, 몸이 흩어진다. 그야말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들에게 비극과 죽음의 시대인 것이다.

 

이처럼 타락이란 단순히 흔히 말하는 죄가 판을 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타락이란 결국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들에게 비극과 죽음이 임하는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악을 말한다. 구조적으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비극과 죽음을 안겨주는 사회, 개인적으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비극과 죽음을 안겨 주는 삶, 이것이 바로 타락이다.

 

이와는 매우 대조적인 이야기가 룻기에 나온다. 같은 시대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이야기가 날 올 수 있을까, 매우 놀랍다. 룻기의 본문은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보아스가 아내로 맞이하는 룻은 레위인의 첩처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였다. 룻은 모압여인이었고(이방인), 남편을 잃어 오갈 데 없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그를 보호해줄 가족이라는 울타리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남편뿐만 아니라 시아버지 그리고 시아주버니까지도 모두 세상을 떠나, 홀로된 시어머니와 생계를 꾸려갔다. 룻은 그야말로 약자 중의 약자였다.

 

그런데 룻기의 이야기는 사사기의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이름 없는 자, 약한 자 룻이 보아스라는 경건한 이스라엘의 한 남자의 눈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름 없는 자, 약한 자가 이름 있는 자로 바뀌는 지를 말해 준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진술이 거짓 진술인 것처럼, 보아스는 늘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살았는지, 그가 처음 자기의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 하는 인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일꾼들에게 먼저 복을 빌어 준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기시를 원하노라”(2:4). 사사기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기브아의 노인이나 레위인, 그리고 불량배들은 처음 만남에서 여호와의 복을 비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의 필요, 관심사만 늘어 놓았다. 특별히 기브아의 불량배들은 복을 비는 말과는 전혀 반대인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인가! 이와 대조되는 보아스의 축복은 이 얼마나 경건한 모습인가!

 

하나님에 대한 보아스의 집중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고엘법)’의 율법에 따라 룻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데, 그 과정을 살펴 보면 절대로 질서를 어기거나 인내심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라고 함부로 룻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3:6-15).

 

기업 무를 자, 고엘법은 룻처럼 약자를 보호하는 법인데, 궁핍한 때에 밭을 되사는 것이나 가난할 때 자신을 판 이스라엘인 노예를 자유롭게 하는 법이다. 이런 매입과 무르는 일은 가까운 친척의 의무였다(25:25-54). 룻과 나오미는 궁핍하여 죽은 시아버지의 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땅을 누군가가 사줘야 하는데, 그 땅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땅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 땅으로 먹고 살던 룻과 나오미까지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척이긴 했지만, 고엘법을 준수해야 할 첫 번째 의무자는 아니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존재했다. 고엘법을 준수해야 할 입장에서 보아스가 마음대로 고엘법을 실행할 입장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아스는 동분서주한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무질서하게 행동하지 않고 고엘법을 시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가까운 친척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벌인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이 고엘법 시행 의무를 포기한 후, 자기에게 차례가 돌아왔을 때 합법적으로 고엘법을 시행한다. 엘리멜렉의 땅을 샀을 뿐더러, 그 땅을 통해 먹고 살던 룻과 나오미까지 거둔다.

 

거룩이란 이처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행복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타락이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비극과 죽음을 가져다 주는 것인 것과는 매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사는 것인데, 그것은 실제의 삶에서 거룩한 삶을 일구는 것을 말한다. 거룩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거룩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인데,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가 있다. 거룩이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처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다. 그들을 착취하고 유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빵을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행복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사사 시대에 걸쳐 있는 타락은 그들의 부도덕함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시선을 따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가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위와 쾌락만을 위해 오히려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희생시키는 일만 했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피조물로 인식하지 못하는 타락한 마음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착취하고 유린하게 되어 있다. 상대방을 자신의 화풀이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둔 경건한 자는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피조물을 아름답게 여겨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상대방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줄 안다. 그야말로 거룩한 삶을 가꾸어 간다.

 

누가 여러분의 왕인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왕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한 삶을 사시라. 거룩이란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이름 없는 자, 약한 자에게 있다. 그러니,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 오히려 그들을 복되게 하라.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괴롭히는 타락한 자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름 없는 자, 약한 자를 복되게 하는 거룩한 자로 살 것인가? 도대체 누가 여러분의 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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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3. 04:32

순종 - 사는 길

창세기 28

(창세기 26:1-11)

 

아브라함의 시대는 가고, 이삭의 시대가 왔다. 아버지가 죽고 자기 자신만 남았다는 것은 이제 자기 자신이 삶의 어려운 결정들을 홀로 감당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우리 삶에는 어려운 일들이 참 많다. 감당해야 할 어려운 일들도 많지만, 선택해야 할 어려운 일들도 많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는 올바른 선택이다. 어떤 선택이 내 삶을 온전하게 이끌 것인가?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고 나서, 이삭에게 어려운 문제가 닥쳤다. 아버지 때처럼 기근이 닥친 것이다. 이 기근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삭에게는 굉장히 큰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처럼 하고 싶은 심리가 있다. 왜냐하면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보고 들은 것이 아들에게는 일종의 전설로 새겨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행동과 말은 아들에게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한다.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은 아버지의 삶의 여정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그 옛날 기근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겪은 일과 거기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은혜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겪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삶의 지혜를 하나씩 전수해 주었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그러한 가르침을 마음 속에 간직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삭은 아버지 때처럼 기근이라는 어려움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이삭이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당연히 아버지의 가르침을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기근이 왔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었다. 이삭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자신도 가족들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래서 여장을 꾸려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랄이라는 지역에 이르렀다. 거기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을 만났다.

 

그런데 성경은 그랄 땅에서 이삭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명령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2).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약속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이 땅에 거류하면”, 즉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거주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순종은 참 신비스러운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가 일러준 삶의 지혜에 순종했다. 그래서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삭은 참된 지혜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순종의 가치를 잘 모른다. 순종은 불편하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명령하시는 것이라면 모를까, 부모든 스승이든 지도자든 사람들이 하는 말에 순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많다.

 

물론 때로 순종이 부조리해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순종의 가치는 그 순종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그 마음 자체에 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신다.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했다. “기근이 나면 애굽으로 내려가라!” 하나님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한 이삭의 마음을 보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나아갈 바가 무엇인지 온전히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지시하신 사항은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랄 땅에 머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그 이유는 아내 리브가 때문이었다. 그랄 사람들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리브가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이삭은 고민됐다.

 

그런데 이삭의 고민은 아버지의 해결 방법과 똑 같은 것이었다. 그 옛날 아버지 아브라함도 기근 때문에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아내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인 일이 있었다. 물론 이삭은 아버지로부터 기근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사건도 들었을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처럼 자기의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아버지 아브라함의 처신이 생각났던 것이다.

 

이삭이 그렇게 한 이유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가벼운 두려움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낀 두려움이었다. 치안과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추어진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무엇인지 마음에 잘 와 닿지 않겠지만, 실제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인간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 경우에 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는 생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드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방어체계이다.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것은 이성적인 생각이나 행동은 아니다. 그런데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는 우선 살고 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무엇이든지 생명을 건질만한 변명을 에둘러대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일러준 삶의 지혜가 크게 작동한다. 그 결과, 이삭은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 속이고,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이라 속인 것 때문에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리브가를 누군가에게 실제로 빼앗길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한 위험 속에서 이삭은 리브가와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우연히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그것을 목격한다.

 

순종의 힘은 여기서 발휘된다. 일이 상식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흘러간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을 알게 된 아비멜렉의 상식적인 행동은 누이라고 속인 이삭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처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이 상식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일로 인해 이삭은 오히려 두려움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삭과 리브가의 사이가 부부 사이라는 것을 확신한 아비멜렉은 이삭을 왕궁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따져 묻는다. “그가 분명이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으냐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9, 10). 이에 대해 이삭은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9).

 

일의 정황을 모두 파악한 아비멜렉은 이렇게 선포한다.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11). 애굽 땅이 아닌 그랄 땅에 거주하게 된 이삭과 리브가가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순종의 가치를 발견한다. 순종이 바로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순종을 배웠다. 그리고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배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구원이다. 실제로 이삭은 삶 속에서 순종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신비롭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벌벌 떨던 이삭과 리브가는 순종을 통해서 마침내 안위를 보장 받는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어쩌면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전해준 인생의 지혜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고, 실제적인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그랄 땅에 거주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삭은 오히려 거기서 안위와 평안을 맛보는, 그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순종은 어렵지만, 어려운 길이 아니다. 오히려 순종은 죽을 것 같지만 사는 길이다. 무엇이 나를 살게 할 것인가 고민될 때 두 눈 딱 감고 순종하는 것이 오히려 사는 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를 그냥 놓아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게 사는 길이란 다른 것에 있지 않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곧 사는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만나주신다.

 

순종의 신비는 십자가에서도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런데 거기에서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순종에 살고 순종에 죽는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자는 순종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순종이 곧 사는 길이다. 순종의 신비가 우리의 인생을 신비롭게 이끌어 줄 것이다. 사는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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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29. 22:05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롬 6:12-23)

 

교회 다니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이다. 너무 많이 듣다 보니까 익숙하고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상 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죄라는 말뿐만이 아니라, ‘라는 말도 많이 듣는다. 그런데 도대체 란 무엇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이라는 말은 거부감까지 든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는 말씀까지 있는 것 같은데, 종이라는 말은 왠지 꼬리 중의 상꼬리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증거하는 복음은 말 그대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정체성이 바뀐 그리스도인에 대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죄의 종은 무엇이고, ‘의의 종은 무엇인가?

 

우선 죄에 대해서 알아보자. 죄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설명하시겠는가? 죄라는 것을 떠올리면 실정법적인 죄부터 생각할 것이다. 살인, 강간, 강도, 유괴, 납치 등을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은 죄가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그보다 근본적인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죄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상태를 가리키는 메타포이다. 죄라는 말만큼 자기 자신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는 말도 없다.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죄는 휴브리스라고 하는데, 이는 스스로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것, 신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 모든 관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것이다(마커스 보그,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202).

 

그러니까 죄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부여되는 메타포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과도하게 부풀려서 신 같은 존재로 여기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한 개인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집단이나 국가, 또는 인류 자체에서도 발생한다.

 

교회라는 집단도 스스로를 과도하게 부풀리면 그 자체가 신적인 존재가 되어 거기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적절한 희망을 주고 그에 상응한 과도한 요구를 할 수 있다. 사실 이단들이 이렇게 작동한다. 이단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집단을 과도하게 부풀려서 자신들이 무슨 진리를 담보하고 있는 듯 자기 자신을 꾸미는 것이다. 이단 교주에게서 특히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데,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 거의 신적인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이단 교주의 특징이다.

 

국가라는 집단도 그렇다. 이것은 사무엘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데,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권(국가)의 병폐를 지적하며 왕을 세워달라는 그들을 설득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생각은 왕이 세워지면 국가가 자신들의 당면한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헛된 바람이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국가는 왕을 내세워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렸고, 그러다가 결국 그 누구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고 만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국가가 하나님을 대신 하지 못했다.

 

죄의 종이 된다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 신과 같이 되려 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 모든 관계의 중심으로 놓으려고 하는 속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태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을까?

 

여기서 용서에 대한 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 보자. 죄의 종을 용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죄의 종이 용서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흔히 용서를 눈감아줌정도로 생각한다. 만약 용서가 그런 뜻이라면, 죄의 종에 대한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서 신과 같은 존재로 남고 싶어하는 존재를 용서해 준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부풀릴 테니까. 이런 경우, 오히려 용서가 그들의 존재의 부풀림을 정당하게 해주는 구실만 마련해 줄 뿐이다. 용서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자기 자신을 부풀려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이단 사이비가 작동하는 기재이다. 용서와 구원을 그런 식으로 수여해준다. 자기 자신을 마음껏 부풀릴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죄의 종의 상태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를 그냥 용서해 주고, 그 상태를 그냥 인정(구원)해 주고 만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마음껏 부풀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이단 사이비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용서와 구원은 차원이 다르다. 말 그대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존재의 변화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변한다는 것은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 18). 여기서 죄로부터 해방되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부풀려서 신처럼 되고자 하는 그 욕망, 상태에서 벗어난 상황을 말한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가? 바로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함으로 가능하다. 그러면 교훈의 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을 마음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을 표현한 말이다. 다시 말해 믿음이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 사도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이다. 그들은 법 아래 있기를 좋아한다. 그 단적인 예를 바리새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에게 법은 자기 자신을 부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남들이 지킬 수 없는 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풀렸다. 법을 지키지 못하는 남들과 같지 아니함을 자랑스러워 하며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시기를 바랬다.

 

사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 자기 자신을 부풀리기 위해서는 남들과 자신들을 경계 짓는 법이 더 필요하다. 대표적인 예가 대학입시이다. 대학입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을 만드는 이다. 좋은 점수를 받아 소위 명문대학에 가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 신처럼 부풀려진 명문대학생들은 그때부터 남들 위에 군림하게 되고 자신이 남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그러한 입시제도를 철폐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남들과 구별하고 차별하는 그 어떠한 을 완전히 허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허무신 분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공부 못하는 이들도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현실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공부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할지.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처사를 얼마나 불공평하다고 느낄지.

 

그러나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의 관심이나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놓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을 말한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구분하는 그 어떠한 (잣대)’을 모두 허무는 일을 말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와 너의 관계를 정립시켜주는 (잣대)’로 작동하게 끔 하는 것이다.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다음의 시가 그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기러기 떼가 북반구로 날아가는 동안

지구에도 밤은 찾아오고

공원의 벤치에서 홈리스들은 아침을 맞네

 

집이 없는 사람에게

벤치는 집일까 침대일까

잠자면서도 출렁이는 보트피플들은 구유에 담긴

예수처럼 어리고 슬프다

 

기러기를 길들이면 정말로 거위가 될까?

거위는 새로 얻는 집을 사랑할까

 

지구의 북반구에서 완결되지 못한 이야기를

남반구에서 시작하려 한 건 누군가의 잘못

흩날리는 페이지들이 꿈속에서 가벼운

집을 짓는다 나더러 부수라고

 

코와 입과 눈이 섞인 얼굴들이

꿈속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동안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하재연 시집,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중에서>

 

바울 사도는 말한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21). 여기서 그 때란, 죄의 종이 되었을 때를 가리킨다. 자기 자신을 마음껏 부풀려 자기 자신이 신이 된 양 하면서 살았을 때 결국 거기서 맺어지는 열매는 죄의 열매 밖에 없다. 살인, 강간, 강도, 유괴, 납치 등,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실정법에 저촉되는 끔찍한 범죄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부풀려 살다가 좌절하게 되면서 저지르게 되는 죄의 열매들이다. 결국 자기 자신을 부풀려서 사는 사람에게 닥치는 것은 사망(죽음)’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음이 있으니,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지는 복음이다.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22). 자기 자신을 부풀리는 일을 그만두고, 다시 말해, 다른 사람(존재)과 나 자신을 구분하려는 을 무너뜨리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되는데, 결국 그 열매의 끝은 영생이다.

 

의가 곧 하나님이시니, 하나님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의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된다. 영생이란 영어로 ‘eternal life’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열매를 맺고 사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삶이 곧 구원의 삶, 영생의 삶이 되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자기 자신을 부풀리면서 살아봤자,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 그렇게 살아가라고 부추긴다. 세상의 모든 시스템이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사실 우리는 의식 못하는 가운데 거기에 놀아나는 것뿐이다. 정신을 좀 차려서 세상을 바라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중요하다. 나 자신을 부풀리면서 살아봤자 결국 내가 두 손으로 얻어낼 수 있는 열매는 죽음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거룩한 삶을 만들어 가시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을 약속하신다. 그것을 그냥 선물로 주신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 이 세상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면, 이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못 견디는 죄의 종으로부터,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의의 종으로 존재의 변화를 이룰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자유함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사(공짜로 주시는 선물)로 주시는 영생(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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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26. 13:08

장자권 쟁탈전

세기 27

(창세기 25:27-34)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것이 하나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자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속성상 하시는 모든 일이 사랑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물론 보통 사람들에게 이것은 별다른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에 주저 없이 아멘으로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맞닥뜨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이 혼란스러운 신앙을 불러 일으킨다. 특별히 삶을 깡그리 파괴할만한 위력을 지닌 사건이 삶 속에 발생했을 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한 없이 무력해 보이는 인간에게 그나마 주어진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기도일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해 안 된다고 고래를 절래절래 흔들다가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면 어느 순간 이해가 된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물론 그 기도 또한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특별히 기도복음서라 불리는 누가복음은 겟네마네 동산에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22:44).

 

하나님의 주권은 신비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길이 기도이다.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는 길을 가는 것은 쉽지 않다. 기도는 쉽지 않다. 한 번의 기도로 하나님의 신비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기도는 한 순간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 걸어가야 할 순례이다. 이처럼 기도는 인간에게 숙명이다. 기도는 자신의 얄팍한 욕망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에 도달하는 순례이다. 기도가 이렇게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깨달아도, 이미 기도의 순례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위해서 기도했고, 리브가는 태중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불임이라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이삭은 기도했고, 하나님은 불임의 신비에 응답해 주셨다. 그래서 리브가는 그 신비를 열어젖히고 잉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리브가의 뱃속에서는 신비로운 일이 또 일어났다. 두 아이가 발을 걷어차며 서로 싸우는 듯한 상황이 매일 연출됐다. 그래서 엄마 리브가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이런 응답을 받았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쟁탈전이 복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엄마 리브가는 하나님의 신비에 마음을 두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하나님의 신비였다. 보통 어린 자가 큰 자를 섬기는 것이 이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는 그 반대였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삭은 에서를 더 사랑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에 접한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 편애 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집중했다는 뜻이다.

 

복중에서의 장자권 쟁탈전은 에서의 승리였다. 에서가 먼저 나왔다. 그러나 쟁탈전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쟁탈전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세상에 나왔다. 장자권 쟁탈전의 최후 승리자는 누가 될 것인가?

 

에서가 먼저 세상에 나옴으로, 사실 에서는 장자권 쟁탈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서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만다. 장자권을 하찮게 여긴 것이다. 일의 사정은 이렇다. 에서는 사냥꾼이었다.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사냥을 하고 돌아온 에서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마침 쌍둥이 동생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다.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던 에서는 야곱에게 그 죽을 달라고 한다.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야곱은 에서에게 장자권을 팔라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서는 야곱의 제안을 넙죽 받아 든다. 그 이유가 이렇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배고파)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업도록 살피라”(12:16). 히브리서는 음행하는 자와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동급으로 말한다. 음행하는 자란 누구인가?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음행하는 자는 우상숭배자를 일컫는 말이다. 또는 자기 부인이나 남편을 버리고 다른 여자나 남자에게 관심을 두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우상숭배를 가리킬 때 음행하는 자라는 메타포를 쓰는 이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자나 음행으로 결혼을 파기하는 자나 똑같다. 우상숭배자는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고, 음행으로 결혼을 파기하는 자는 자기의 부인이나 남편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다. 결국 에서를 음행하는 자와 동급으로 설명하고 있는 히브리서는 에서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죄를 범했다고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자는 망령된 자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헛것 취급하는 것만큼 큰 우상숭배가 어디 있는가? 그야말로 에서는 헛된 짓을 하는 망령된 자인 것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다. 그렇다면 장자의 명분이 왜 중요한가? 첫째로, 장자는 두 배의 분깃()을 받는다.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 받을 때, 만약 아들이 세 있다면 아버지의 재산을 네 등분 해서 두 아들에게 한 분깃씩 나누어 주고, 두 분깃은 장자가 갖는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분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두 분깃을 물려 받을 만큼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역사가 장자에게 임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장자는 축복권을 가지고 있다. 뭔가를 나누어 주려면 그만큼 더 많은 풍요로운 속에 있어야 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축복은 장자에게서 나와 그 아래로 흐른다. 장자가 축복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축복을 귀하게 여겨 그대로 복을 내려 주신다.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장자만이 가지는 권리이다.

 

셋째로, 장자는 예배를 수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예배를 수행한다는 것은 레위 제사장들이 성전의 일을 맡아 보면서 누렸던 은총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대제사장은 공동체를 대표하여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였다. 예배를 수행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뜻이다.

 

장자의 명분이 지니고 있는 이 세 가지의 권리를 종합해 보면, 결국 장자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함으로 삶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식을 얻는 것,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만큼 인생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인간에게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공허함(emptiness)이다. 인생은 공허하다.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정말 처절하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별의 별 짓을 다한다. 그러나 채우지 못한다. 솔로몬의 고백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려봤지만, 그는 그 어느 것으로도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도서 12:1-2).

 

안식은 오직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텅 빈 마음에 당신의 생기(루아흐)를 불어 넣어주실 때만 비로소 우리는 안식에 거할 수 있다.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아무리 건강하게 살아도,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으로 살아도, 가장 안타까운 상황은 삶 가운데 안식이 없을 때이다. 안식이 없는 삶은 살아 있으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장자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 가까이 함으로 안식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그리스도의 장자권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서의 장자권을 누린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장자권을 포기할 수 없다. 장자권 쟁탈전에서 승리하지 않을 수 없다.

 

절대로 에서처럼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돈 몇 푼 때문에, 피곤하다고, 귀찮다고,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장자권을 빼앗아 가려는 마귀의 술수가 매일 같이 삶 속에서 일어난다. 베드로 전서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이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피 흘리기까지싸워야 한다. 장자권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다. 장자권 쟁탈전에서 승리한 자는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에서처럼 망련된 자가 되어 장자권을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에서의 후손이 아니라, 야곱의 후손이다. 장자권 쟁탈전의 승리를 거머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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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6. 25. 11:11

이방인

 

나는 발견되지 못한다

너를 발견하지도 못한다

나를 발견하기 위해 현미경이 필요한 것도

너를 발견하기 위해 망원경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눈 뜨기만 하면 발견할 수 있는

너와 나

그러나 세상은 장님의 눈동자처럼

어둡다

 

아기는 발견되기 위해 울며 태어나고

꽃은 발견되기 위해 예쁘게 피어난다

비는 발견되기 위해 옷을 적시고

바람은 발견되기 위해 창문을 흔들어댄다

 

그러나

아기는 금방 늙고

꽃은 어느새 시들고

비는 지나쳐 가고

바람은 도깨비처럼 자취를 감춘다

 

카프카의 이방인은

발견되기 위해 총을 쐈을까?

가룟 유다는

발견되기 위해 배신 했을까?

그럼 예수는 발견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을까?

 

울어도 웃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듯

눈이 내린다

내리자마자 땅 기운에

녹아버린다

 

너무 까매서 잠 들 수 없는 밤

너무 하얘서 뛰 놀 수 없는 낮

세상은 온통

부조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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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6. 25. 09:54

숙명

 

배가 고프다

고통이다

고픈 배를 달래면

고통이 사라질까

숟가락을 든다

식욕의 고통이 사라지고

배고픔의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손과 입은 수 없이 키스한다

뇌하수체가 만족 호르몬을

흘려 보내면

손과 입은 이별하고

또 다른 고통이 밀려 온다

배부르다

고통이다

부른 배를 달래면

고통이 사라질까

점점 빵빵해져

그런 나를

생명이라 부를 수 없다

매일같이

고통과 고통 사이를

오가는 나는

그래서 인간인 거다

천사는 배고프지 않겠지

물론 배부르지도 않겠지

고통은 인간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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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15. 23:19

성령의 교제

(고린도후서 13:11-13)

 

설교 제목이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성령교제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생명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생명의 영,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어떤 다른 존재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다.

 

본문의 마지막, 13절은 이렇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문구는 예배 말미에 축도로서 사용된다. 한글로는 교통하심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부분이, 바로 교제(코이노니아)’이다. 원문에 충실해서 번역하면, “성령의 교제가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상 교통이나 교제나 코이노니아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다. ‘교통은 서로 상호 간에 일어나는 그 무엇을 전제한다. 코이노니아라는 것은 상호 간에 일어나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코이노니아는 헬라어이다. 이것을 라틴어로 옮기면 콤뮤니오(communio)’라고 하는데, 여기서 영어의 ‘communion’이 나왔다. ‘COMMUNION’이 무엇인가? 성찬식을 일컬어서 ‘Holy Communion’이라고 한다. 이것을 우리나라 말로 옮기면, ‘거룩한 교제가 된다. 성찬식은 거룩한 교제이다. 왜 거룩한 교제인가?

 

성찬식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는 그것을 통해서 어떠한 마법적인 힘을 수여 받기 위함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어떤 사육제의 의식을 행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살을 못 뜯어 먹어서 안달 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식인종이 아니다.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에 살과 피를 입은 실체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렇게 내 눈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

 

실체, 교제, 일치라는 말을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 또는 오류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담보 받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수여의 개념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는 말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수여 받는다라는 개념이 아니다. 만약 구원을 수여의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면, 예수와의 교제는 필요 없어진다. 이는 마치 어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적선하는 것과 같아진다. 부자와 가난한 자와의 교제가 없어도,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적선을 통하여 무엇인가 받을 수 있다.

 

구원은 수여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다. 오늘의 핵심 단어로 다시 표현하면, 구원은 교제의 개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놓치고 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수여받는 데서만 그친다. 그렇다 보니, 구원이 무슨 물건 사듯 믿음이라는 재화()’을 통해서 살 수 있는 것처럼 전락하고 말았다.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물건 사듯이,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 속에는 구원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구원과 거룩한 교제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교제 없이 구원을 얻을 길은 없다.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교제 없이 구원만 받기를 바라는 것은 일 하지 않고 임금만 받기 원하는 게으른 종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너무 구원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구원은 우리의 일차 목표가 될 수 없다. 구원이 일차 목표가 되는 한, 모든 것은 상대화 되고 만다. 구원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은 수단이 되고 만다. 구원이 목표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조차도 구원을 이루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이러한 오류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구원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구원은 목표가 아니라 선물이다. 우리의 일차 목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는 남녀가 깊은 사랑 가운데 빠지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자녀와 같은 것이다. 자녀를 목표로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사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녀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교제는 성령에 참예한다는 뜻이다.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이다.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은혜는 값 없다라는 뜻이다. 값 없는 은혜는 오직 사랑에서만 올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은 은혜다. , 값 없다. ‘값이 없다는 것은 싸구려라는 뜻이 아니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는 뜻이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결단코 인간은 값 없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nature)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향(orientation)이다.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고 성향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신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의 역사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무슨 역사를 이루는가? 고린도 후서의 핵심 말씀은 517절에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는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역사를 이루신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교인들끼리 분열이 심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성령의 교제를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분열이 심한 교인들끼리 서로 잘 지내라는 권고의 측면이 아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11).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핵심 단어는 이것이다: 기쁨, 온전, 위로, 한마음, 평안.

 

이러한 것들은 그저 이들이 서로 잘 지낸다고 해서 오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표지들(signs)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불러오는 새로운 피조물은 기뻐하고, 온전하며, 위로 받으며, 한마음이 되며(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 평안(안식)하게 된다.

 

교제란 바로 이런 것이다. 교제란 만나서 희희락락거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제, 성령의 교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 가운데로 들어가는 신비이다. 구원이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목표다.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선물이다.

 

성령의 교제는 성령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령의 일은 그리스도의 일과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성도들 가운데 오신다. 성령의 교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에게 문안한다.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자들은 기뻐하고, 온전하며, 위로 받으며, 한마음이 되며, 평안 가운데 거한다. 그러니 어찌 거룩한 입맞춤으로 성도와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우리를 단순히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서로 잘 지내는 것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 구원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빛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그 새로운 창조의 빛 가운데 거하게 된다. 성령의 교제가 바로 그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얼마나 은혜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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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하며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저는 이 문구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늘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다.” 정말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교회라는 것을 빼면 그 무게가 2그램도 안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를 팔할이나 키워준 교회가 바로 벌떼교회입니다. 서른, 잔치를 시작하기 위해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 제 인생은 온통 벌떼교회와 뒹굴었으니까요. 그래서 벌떼교회는 제게 참 특별합니다.

 

제 인생과 연관된 벌떼교회뿐만이 아니라, 벌떼교회는 그 역사 자체가 참 특별합니다. 벌떼교회를 다니는 모든 분들이 그 특별함을 인식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깊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헌신된 일꾼들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그 특별함은 1930년 정초, 덕적도에서 있었던 한 부흥집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외갓집은 율곡 이이의 학맥을 잇는 정통 한학자 집안으로서 서인 계열의 정부 고위관리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외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 덕적도로 귀양살이를 오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외갓집은 덕적도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1930년도 정초에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한 겁니다. 감리교 목사로서 한국의 4대 부흥사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용도 목사가 1930년 정초에 덕적도로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온 겁니다. 외할아버지(오지섭목사님)께서 청소년 시기에 그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셨다가 이용도 목사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통 한학자 집안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는데,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외할아버지를 통해 내려진 신앙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결국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신앙의 씨앗은 담쟁이넝쿨이었나 봅니다. 담쟁이넝쿨이 온 담에 퍼지는 것처럼, 외할아버지를 통해 뿌려진 신앙의 씨앗은 금방 온 집안에 퍼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퍼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집안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영접을 넘어 외할아버지와 그 자손들이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중에 벌떼교회로서 눈 여겨 볼 수 있는 것은 1954년 여름, 연세대학교 기독학생회 회원으로서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벌떼교회(당시 과천하리교회)를 세웠던 학생들 중 송인호, 김광현 두 사람입니다. 송인호(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역임)는 저희 어머니(오세숙 사모)의 당숙이시고, 김광현(정신여고 역사교사 역임)은 저희 어머니의 4촌 오빠입니다. 결국 벌떼교회를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저희 집안 분들이셨던 것이죠.

 

저희 집안은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이어 받아 성장한 집안으로서, 외할아버지께서는 유명한 부흥사셨고, 그 자녀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는데, 감리교 역사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많은 목사를 배출한 집안입니다. 특별히 한국 선교사로서 목원대학교를 세운 도익서(찰스 스톡스) 박사 그리고 목원대학교의 초대학장을 지내신 목원이호운 학장(찬송가, ‘부름받아 나선 이몸작사가)과 깊은 인연이 있는 집안으로서 외할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저희 아버지 모두 도익서 장학금으로 신학공부를 하셔서 목회자가 된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용도 목사와 한국 4대 부흥사 중 한 명으로 추앙 받고 있는 박재봉 목사는 저희 집안의 사돈이십니다. 박재봉 목사의 집안도 그 형제와 자녀들이 모두 목회자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귀한 집안인데, 그 중에서 박재봉 목사의 동생인 박재훈 목사는 한국 찬송가 사()에 길이 남을 분입니다. 그분이 지으신 찬송가로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서 돌아오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등이 있고, 우리가 어려서부터 즐겨 불렀던 수많은 동요들 중 펄펄 눈이 옵니다”, “산골짜기 다람쥐”, 그리고 어머님 은혜등이 그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박재봉 목사의 야사 중 유명한 것은 한국 주먹계를 주름 잡던 시라소니를 전도한 사건입니다. 시라소니 아들도 목회자가 되었는데 현재 저희 집안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교류 중에 있습니다.

 

벌떼교회는 태생부터가 참 특별합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희망의 촛불을 밝히기 위한 청년들의 선교사업을 통해서 생겨난 교회로서, 그 태생이 선교적입니다. 20세기 신학의 교부로 추앙받고 있는 칼 바르트가 교회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들의 공동체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망권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떼교회는 그 증언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로서 태생된 벌떼교회에 그 증언의 역할을 특별하게 감당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담쟁이넝쿨과도 같은 목회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장윤식 목사가 이 교회의 담임을 맡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굉장히 역사적입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벌떼교회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저희 집안 어른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그 자손이 우연하게 목회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필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신앙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아우로서 곁에서 지켜본 형님 장윤식 목사는 우리 집안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가장 닮은 목회자입니다. 강직한 성품도 그렇고, 불 같은 메시지도 그렇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열정이 그렇습니다. 저는 고백하기를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라고 하지만, 형님 장윤식 목사를 들여다보면 나를 키운 건 십할이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인생에서 교회를 빼고 나면 어떤 인생의 무게가 남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교회와 목회자가 이토록 한 몸, 한 뜻, 한 역사를 지니기는 정말 힘듭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특별한역사하심이 없으면 이토록 절묘한 조합은 나오기 힘듭니다. 이는 마치 지구와 달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주변을 공전하며 영향을 주고 받는 오묘한 섭리와도 같습니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합니다. 인간의 삶 측면에서 60년은 이제 황혼으로 접어든 시기이지만, 하나님의 타임테이블 가운데 놓여진 벌떼교회는 이제 청춘의 시기로 들어섰다는 생각을 합니다. 새로운 성전 건축과 함께 벌떼교회는 이제 막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역사를 지닌 교회, 목회자와 함께 이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만들어 가는 벌떼교회에 몸담은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으신 분들입니다.

 

R. M. 크리소스톰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꿀벌이 다른 곤충보다 존경 받는 까닭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사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 희망으로 탄생한 벌떼교회,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교회가 가진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아 집니다. 특별한 역사와 사명을 가진 벌떼교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를 부지런히 지켜내는 꿀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벌떼교회 출신이며

장윤식 목사의 아우이며

컬럼버스감리교회 담임인

喜樂堂 장준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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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