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

 

子曰, 非其鬼而祭之 ,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자왈, 비기귀이제지, 첨야. 견의불위, 무용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조상의] 귀신이 아닌데도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고, 의로운 것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非其鬼而祭之비기귀이제지를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에게 예배하는 행위에 비견할 수 있다. 이런 자에 비견되는 것이 바로 의로운 것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 자이다. 공자는 이런 자를 일컬어 용기 없는 자라고 한다.

 

성경의 증언은 일관되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義라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의로움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의와 대면하는 일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의에 죽고 의에 산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를 행하다 불의한 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빛으로 바꾸어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다. 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런데, 이 세상은 어둠이기 때문에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더러 그 빛을 싫어했다. 그래서 세상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끌어다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로운 것을 보고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의로운 것이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의로운 것) 그것을 전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살았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의로운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단행위이다. 그것은 믿는 자가 아니라, 용기 없는 자에 불과하다. 믿음은 결단이다. 절대적으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인 파울 틸리히는 이것을 존재에의 용기(the courage to be)’라고도 표현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이다. 세상은 의로운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서슴없이 불의를 행한다. 오히려 불의를 행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이다. 즉 비겁한 세상이다. 비겁한 자들이 잘 사는 세상이다. 용기 있는 자는 거지 꼴로 병신취급 받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의로운 일이다. 그러니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포장하는 일은 쉽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의로운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로운 것을 보고 행할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용기가 있는가? 그런 용기를 지닌 자에게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를! 아니, 그런 자만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리라. 의로운 것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 용기 없는 자는 세상에 속한 자요, 의로운 것을 보고서 행하는 용기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 그래서 난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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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이름 없는 도시 번지 없는 집에

아무도 모르게 눈이 조금씩 퇴화되어 가는 새들이 산다

어쩌다 차려진 밥상엔

뱃고동 소리만 들리는 소라 게가 올라오고

하루에 반나절도 햇볕을 못 쐐

영양실조에 걸린 산나물이 노랗게 오그리고 있다

눈이 퇴화되면서 방향감각을 잃은 새들은

바람이 부는 날에만 산책을 나간다

바람은 그들의 네비게이션이다

가늘어진 날개를 펴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안간힘을 쓰며 날개를 펴는 이유는

남은 깃털을 바람에 날려 보내기 위함이다

바람 부는 날

우리는 새들이 나는 것은 볼 수 있어도

그들이 죽는 것은 볼 수 없다

바람 부는 날

바람이 새들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새들이 바람을 건너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이 세상과 이별하고 마는 것이다

바람 부는 날

우리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깃털은

희미하게 살다간 어떤 새의 마지막 눈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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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이 먼저다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而學文"

자왈, "제자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증이친이. 행유여력, 즉이학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는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집을]떠나서는 우애로우며, 삼가고 믿음이 있으며 널리 대중을 아끼면서도 어진[] 사람을 가까이한다. [이것들을] 실천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곧 글(학문)을 배운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공자의 인간론의 핵심은 인()인데,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또는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다움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서 학문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목회하면서 가장 황당한 상황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 믿음 좋은 신앙인이라 여기며 교회 봉사(주일성수, 헌금, 교회의 각종 행사 참여)를 열심히 하는 이를 만날 때이다.

 

한국 교회의 신앙은 '믿음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 무엇보다 '믿음'을 갖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사람됨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믿음'을 먼저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급선무이고, 나머지는 구원 받은 후에 해결해도 된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녕 기독교인은 구원에 환장한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소위 정통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는 구원파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플라톤의 개념을 빌려오자면, 이것은 구원을 너무 이원론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독교의 교리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의 교리를 그 시대의 언어로 옮기기 위해 헬라철학을 빌려온 것일 뿐 그렇다고 헬라철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헬라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바탕으로 이원론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지만, 정작 성서의 사상은 이원론을 거부하고 전인적이고 종말론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여기서 전인적이라는 말은 소위 육체와 영혼이 구분된다는 이원론적인 사고가 아니라, 육체와 영혼은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성서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부활을 통해서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육체와 영혼의 통합이다. 그리고 부활은 이 세상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체를 향해 되어져가고 있음에 대한 비전(하나님의 계획)이다.

 

사람됨을 생각지 않는 믿음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사람됨 없는 구원은 기독교의 구원이 아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사람됨의 믿음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사람됨의 구원이다. 믿음을 통해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실현하지 않으려는 자는 공자님의 말씀처럼, 오히려 믿음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 믿음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됨이 먼저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람됨에 대한 표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자,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자를 믿음 있는 자라고 부르지, 믿음 있는 자가 곧 사람을 사랑하는 자,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자라고 하지 않는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구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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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거울을 들여다 본다.

거울 속에는

나를 닮은 녀석이 둘이나 있다.

그런데 그 녀석들은

어쩐지 나의 과거를 닮았다.

그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기억 저편에서

내 어린 시절이

듬성듬성 밀려온다.

어떤 것은 아련하고

어떤 것은 시리다.

 

거울을 들여다 본다.

거울 속에는

나를 닮은 노인네가 둘이나 있다.

그런데 그 노인네들은

어쩐지 나의 미래를 닮았다.

그 노인네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미지의 저편에서

내 미래의 현실들이

헐레벌떡 차오른다.

어떤 것은 글썽대고

어떤 것은 후련하다.

 

거울을 들여다 본다.

거울 속에는

나와 두 녀석과 노인네들이

한 쪽을 향하여 공존하고 있다.

안부를 묻는다.

잘 있다.

잘 있다.

그리고,

……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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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4. 12. 14. 08:05

작은 여우

 

작은 여우 한 마리가 길바닥에 죽어 누워 있다.

건너기 어려운 길도 아닌데

여우는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죽은 것 같다.

 

건너기 어려운 길도 아닌데

여우가 죽어 누워 있는 것은

전적으로 여우의 책임이다.

 

이것은 사악한 진술이다.

 

어쩌면 여우는 시력장애를 앓았을지 모른다.

눈이 어두워 달려 오는 차를 못 봤을 가능성이 있다.

 

여우는 정신적 장애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우울증이 심해서 자기도 모르게

자살충동이 일어나

달리는 차 바퀴로 뛰어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우는 잠시 정신이 다른데 팔렸을지 모른다.

요즘 힘든 일이 있어서 그거 신경 쓰느라

잠시 정신이 딴 데 가 있어서

달려오는 차가 안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모든 것을 여우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보다

더 사악하고 슬픈 건,

며칠이 지났는데도

차가운 땅 바닥에 죽어 누운 작은 여우를

아무도 거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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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4. 11. 30. 06:08

낙엽

 

낙엽이 굴러다닌다.

굴러다니는데 아무것도 필요 없다.

바람만 불어주면 된다.

낙엽은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바람은 '그냥' 분다.

그냥 부는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낙엽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낙엽은 바람이 불 때

그 바람에 몸을 맡길 뿐이다.

낙엽이 굴러다닌다.

바람이 불면 구르고

바람이 안 불면 멈추어 선다.

낙엽은 그렇게 굴러다니다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러고 보니,

바람은 낙엽의 환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낙엽은 바람으로 환생하여

낙엽을 자기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만남은

저렇게도 서걱대는 것이었구나.

지금

내 눈 앞에서 낙엽을 굴려대는 바람,

어떤 시절을 살던 낙엽이었을까.

낙엽이 굴러다닌다.

바람이 분다.

서걱대는 것이 꼭,

에덴동산의 열매를

한 입,

베어먹을 때 나는 소리 같다.

,

아스라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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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알라

 

교계의 상황을 보면, 개혁의 목소리가 높다. 그래서 이런 저런 활동들을 통해 개혁을 하려는 시도들이 엿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활동은 기득권자들을 향한 저항이 대부분이다. 참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들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들도 결국 새로운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개혁의 대상을 향해 외치는 개혁의 주체들은 분명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해 간다.

 

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아비규환과 같은 상황에서 진정한 개혁이란, 내 생각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흙탕물을 휘저으면 흙탕물은 계속 탁한 상태만 지속될 뿐이다. 흙탕물은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게 최고다. 그러면 어느 정도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앙금이 가라앉고 투명한 물을 볼 수 있게 된다.

 

자연을 고치겠다고 휘저으면 자연은 더 망가지고 만다. 자연을 고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사람 손이 타면, 무엇이든 망가지고 마니까.

 

교회 개혁을 위해 뭔가 해보려는 시도들은 참 칭찬할만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그 시도들이 또다른 흙탕물을 생산해 내는 것은 아닌지, 성찰이 꼭 필요한 것 같다.

 

, 그런데, 무엇인가를 가만히 냅두기에는 인생이 너무 심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무엇인가를 계속 하려고 드는 것 같다. 결국, 성자란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을 잘 견디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그냥 잠잠히 자기 자신이나 잘 달래며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개혁이 아닐까?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주체는 늘 교집합이다. 누가 누구를 개혁하랴.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이 문구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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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대화는 대등한 위치에 섰을 때만 가능하다. 관계가 대등하지 못하면 대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복종만이 발생한다.

 

종교가 과학과 대화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종교와 과학이 대등한 위치에 섰다는 뜻이다. 그 동안 종교는 다른 분야의 학문을 그저 '시녀'로만 보아 왔다. 철학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래서 중세신학자들은 이런 말까지 했다. '철학은 종교(신학)의 시녀이다."

 

물론, 종교가 과학을 자신과 대등한 위치로 인식했다기 보다, 과학이 종교의 수준으로 상승했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옳은 표현 같다. 서로 간의 이해 관계가 어찌되었든, 현재 종교는 과학과 대화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개봉된 영화 <인터스텔라 Interstellar>는 그 동안의 종교와 과학 간의 대화의 정점에 서 있는 것 같다. 종교의 독점적 주제인 종말과 구원의 문제가 과학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상황적 배경은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지구인들의 생존 위기이다. 환경 파괴로 인해 더 이상 양식이 없어 모든 생존자들이 곧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절망적인 상황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려는 몸부림이 표현되어 있다.

 

멸망해 가는 지구인들을 구원할 프로젝트의 이름은 <나자로 프로젝트>이다. 나자로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죽어 장사된 뒤 사흘 만에 예수의 신적 능력을 통해 되살아난 인물이다. 이왕 성서에서 프로젝트의 이름을 따올 거면, 궁극적 부활인 <그리스도 프로젝트>로 할 것이지, <나사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것이 흥미롭다. 어쩌면 이것이 과학이 가지고 있는 예수의 신적 능력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시아의 구원 능력을 표현하기에는 오히려 나자로를 끌어 들이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나자로 프로젝트는 두 개의 플랜을 갖고 있다.  플랜 A는 거대한 우주선을 띄워 생존자를 모아 지구를 탈출하는 방안이다. 플랜 B 1천개의 인공수정란를 외계로 보내 인종을 새롭게 퍼뜨리는 계획이다. 플랜 자체가 과학적이다. 그 어디에서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종말론적 신적 개입이 없다.

 

영화의 재미는 우리가 평소에 접하기 힘든 천체 물리학 이론이 이야기 전개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중력, 상대성이론, 웜홀, 그리고 블랙홀 등이 그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천체 물리학 이론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으로 보여준다. 일례로, 생존에 대한 희망을 품고 우주 여행을 떠난 쿠퍼 일행이 10년 전 정착 가능한 별을 찾아 먼저 떠난 우주비행사의 신호를 좆아 들어간 밀러 행성은 중력으로 인한 시간의 왜곡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쿠퍼 일행은 밀러 행성에 단지 3시간 남짓 머물렀을 뿐인데, 지구 시간으로 23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다. 또한 블랙홀을 통과한 몇 분의 시간이 지구 시간으로 56년을 허비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시간이 시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의 줄거리 중 가장 압권은 쿠퍼가 블랙홀을 통해 사건의 지평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은 시간의 이편과 저편, 또는 시간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빨아들여 새로운 공간인 사건의 지평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책장을 사이에 두고 사건의 지평이 구분되고 있는 장면이 참 흥미로운데, 이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는 반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책장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진 사건의 지평의 비밀을 풀어낸 쿠퍼의 딸(머피)은 어릴 적 서재에서 경험했던 신비로운 유령 또는 중력의 작용을 해독함으로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 젖힌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유레카!”

 

인류는 과학의 힘으로 멸망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블랙홀을 빠져 나온 쿠퍼는 딸(머피)이 창조해 낸 새로운 구원의 세상(구퍼 정거장)으로 구출되어 지구 시간으로 거의 80년 만에 딸(머피)을 만난다. 우주에서 겪은 시간의 왜곡 현상으로 실제 나이는 124세이지만, 여전히 지구를 떠날 때의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쿠퍼는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있는 늙은 딸’(머피)을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눈다.

 

I knew I’d see you again.”

(“나는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어요.”)

아빠가 묻는다.

How?” (“어떻게?”)

“Cause my daddy promised me.”

(“왜냐하면 아빠가 나랑 약속했기 때문이죠.”)

 

종말과 구원을 과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이 영화의 마지막은 차라리 종교적이다. 이 영화가 과학적이든 종교적이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종말과 구원은 우리 인류에게 닥친 현실의 문제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이다. 구원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종교적이냐 과학적이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에게 구원을 실제적으로 가져다 주기 위해서 종교와 과학의 끊임 없는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종교와 과학, 대화의 끝에 발견한 구원의 길을 마주하며 함께 이렇게 외치는 날을 기대한다. 과학적으로 유레카!” 또는 종교적으로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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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1. 10. 02:47

사랑하다 죽으라

(레위기 19:1-18)

 

종교는 삶의 의미를 묻는다. 의미를 묻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것은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하는 독특한 점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이런 것을, 영적이다,라고 한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의미를 묻다 간다. ‘죽음자체에서도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의미 없는 죽음은 없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 거기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공허함을 느낀다. ‘내가 지금 무엇하는거지?’라며, 힘들어 한다. 인간이 힘들 때는 육체의 노동이 고될 때가 아니다. 노동을 고되게 하는데, 내가 지금 이것을 왜 하는지, 의미를 못 찾을 때 힘들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인간은 오히려, 그 노동을 즐거워한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삶의 의미를 질문하다. 창세기는 내가 왜 태어났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의미에 대답을 준다. 또한 이렇게 태어났는데, ‘왜 세상은 이렇게 어렵고 힘들지?’라는 질문에 의미를 준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이렇게 어렵고 힘든 삶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지?’라는 질문에 의미를 준다. 그리고, 레위기는 이렇게 해방된 삶을 어떻게 향유해야 행복하지?’라는 질문에 의미를 준다.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찾게 해 준다. 우리는 계속, ‘의미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의미를 묻지 않으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물은 의미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능에 의해서 살아갈 뿐이다. 물론, 본능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인간에겐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의미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이다.

 

레위기는 어려운 것처럼 느껴진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어내려가다 처음 봉착하는 난관이 레위기이다. 창세기, 출애굽기는 스토리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그런데, 레위기는 법전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 쉽지 않다. 그래서 어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사실, 레위기는 우리가 해방된 삶에서 어떻게 인생을 향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꼭 넘어야 하는 산과 같다.

 

레위기는 율법을 기록한 곳인데, 내용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 맺는 법, 그리고 이웃과 관계 맺는 법이 그것이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것인데, 참된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침을 주는 곳이 레위기이다.

 

우리는 대개, ‘에 대해서 오해한다. 법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오해다. 물론 억압적인 법도 있다. 자유를 제한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법도 있다. 그것을 악법이라고 한다. 그러한 법에는 철저하게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레위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법은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법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지켜주는 법이다.

 

자유는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공공선을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는 것도 자유이지만, 공공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자기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도 자유의 범주에 들어간다. 나 좋자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철저하게 공동체적인 개념이어야 한다. 상호간에 서로 만족할 때, 가장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지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레위기의 핵심 내용이다.

 

레위기는 제사법부터 시작한다. 제사법은 하나님과의 관계 맺는 법에 대한 것이다. 해방된 삶의 향유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극대화시키신다. 자유의 극대화는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나오는 최고의 선물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통해, 우리의 자유를 극대화시켜 주신다. 죄는 우리의 자유를 옭아 매는 올가미와 같다. 쇠창살이 감옥이 아니라, 죄 자체가 쇠창살 없는 감옥이다. 죄지은 인간은, 용서 받기 전까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쇠창살에 가두어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죄를 지으면, 두 다리 뻗고 자기 힘들다. 그러나, 용서 받으면,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 다리 뻗고 자도록 해주시는 분이다.

 

제사법에 대한 것이 열 장에 거쳐 나오고, 레위기 11장부터 나오는 것은 정결법이다. 정결법은 단순히, 깨끗하고 부정한 것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니다. 정결법은, 본인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이웃의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고, 그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법이다. 본인과 이웃의 자유를 극대화하기 위한 법이다.

 

일례로, 12장에, 산모 정결법이 있다. 산모는 남자 아기를 낳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다. 부정하다는 것은 아무도 그를 만지거나, 그가 아무와도 접촉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출산으로 인해 극도로 약해진 산모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출산으로 극도로 약해진 산모를 못살게 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남자 아기를 낳은 산모는 삼십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기 때문에, 30일이 지난 후에다 성물을 만질 수 있고, 성소에도 들어갈 수 있다. , 30일이 지나지 않은 산모는 밖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 이것은 산모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다른 예로, 13장과 14장은 나병 환자에 대한 정결법을 진술하고 있다. 나병이라고 확진 된 환자는 격리 수용된다. 그리고, 스스로,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이렇게 외쳐야 한다.”부정하다 부정하다.” 그리고, 부정한 동안 진영 밖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을 나병 환자의 인권 제한이라고 보면 안 된다. 옛날에는 전염병이 돌면, 인구의 대다수가 죽었다. 지금처럼 백신이 잘 발달 되어 있어서, 질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병이 돌면, 무조건 죽었다. 나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것은 나병 환자도 보호하고, 병이 들지 않은 이웃들도 보호하는 법이다. 병 때문에 서로를 제한하고 구속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레위기에 나와 있는 법을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 할 수 없지만, 모든 법의 근간은 본문말씀에 집약되어 있다. 본문의 1절부터 8절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규례들이고, 9절부터 18절까지는 이웃과 사회를 향한 규례들이다.

 

하나님을 향한 규례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라는 말씀이다. 거룩함을 이야기하면서, 부모와 안식일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 ‘부모는 자신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기억하는 것이고, ‘안식일은 쉼에 대한 것이다. 부모님을 기억하라. 부모님에게 잘하라. 이게 현실에서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잘하고 싶어도, 이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분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거룩과 부모와 연관된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거룩이 안식일, 쉼과 연관된다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쉬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를 빼앗긴 사람이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을 단순히 주일에 교회 나오라는 말로 오해하시면 곤란하다. 쉼이란 단순히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쉼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쉼은 우리의 자유와 직결된다.

 

9절부터 나오는 이웃과 사회를 향한 규례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 대한 배려와 상대방에 대한 폭력 금지, 그리고 상대방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 잘못했을 때, 견책하는 것(꾸짖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려주는 것)을 주문한다. 견책하는 이유는 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인지 인식하게 해서 또 다시 잘못으로 인해 서로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줄여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로 요약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규례와 이웃에 대한 규례를 종합하면, 해방된 삶을 어떻게 향유해야 의미 있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인데, 한 단어로 집약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참 자유를 누리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삶의 가치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을 남녀간의 사랑으로 너무 축약시키지 말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말처럼 사랑은 굉장히 광범위하고 심오한 개념이다.

 

한 번 생각해 보시라. 마음껏 사랑하고 계신가? 내가 정말, 자유롭다는 것은, 마음껏 사랑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참된 자유를 누리는 자는, 마음껏 사랑한다. 이 마음에 가장 샘솟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자는,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고, 미움에 사로잡혀 괴로운 날을 보낸다. 미움은 자유 하지 못한 자에게서 나오는 죄악의 올가미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이 마음에 미움이 가득하신가?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은 해방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이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신가? 그냥 누구를 보든,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예뻐 보이시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해방, 구원, 자유를 누리고 계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짧다. 의미를 찾기 전에, 아니, 의미를 묻기도 전에 훅 지나가 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짧은 인생, 우리는 무엇을 하다 갈 것인가? 남을 미워하고 정죄하는 일에, 이 짧은 인생을 허비하기에는 너무도 아깝고, 어리석다. 사랑만 하다 가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인데, 누군가를 미워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사랑할 시간이 얼마나 없는지 한 번 보시라.

 

동영상 상영 --> https://www.youtube.com/watch?v=I0e-7qRBuj0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특별히, 여러분의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얼마 없다. 우리의 기대수명은 80살 정도이다. 계산해 보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얼마나 없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죽는다. 먼 훗날 죽는 것이 아니라, 곧 죽는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미워하다?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사랑하다 죽으라.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자유를 누리는 자만이 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참 자유를 얻으셨는가? 구원 받으셨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사랑하다, 죽으라. 서로, 사랑하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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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11. 8. 05:06

가을 풍경

 

눈물 어린 눈동자 같이 투명한 하늘로

푸드득 날아오른 새가 

털어낸 깃털이

허공을 떠돈다

 

예쁘게 늙어가고 있는 단풍나무는

하늘을 마주보며

수줍은 듯

살며시 떨고 있다

 

일 마친 일꾼들은

도구를 손질하고 있는데

얼굴에 미소를 띈 것이

오늘밤 한바탕 마셔제낄 모양이다

 

낙엽이 뒹굴다 내 앞에 섰다

밟아 본다

바스락 하는 것이

간지러워 낄낄대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저녁 메뉴는 연어구이라지?

쩝쩝대며 연어속살을 파먹을

식구들의 식탁은 마침내

알래스카 불곰들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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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