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단 한 가지 / 짤막한 계명을 받았습니다. / 사랑하십시오. /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 침묵하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을 하십시오. /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십시오. / 용서 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 하십시오. /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 이 뿌리에서는 선한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습니다.”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이 한 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얼마나 마음을 울리는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마음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욕심이고 교만입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하기 전에, 사랑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늙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 말도 바로 이겁니다. “소자야, 서로 사랑하라!” 그래서 요한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성경(요한복음, 요한 1,2,3서 등)을 보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3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사도 요한이 소자야, 서로 사랑하라!”라고 외치고 다닌 것은 그의 스승이었던 예수님께 배운 것을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보다 후대의 인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따랐던 어거스틴도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장 중요한 일을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타락한 마음이겠지요. 타락한 우리 마음은 사랑하는 일을 잊고 자신의 욕심을 먼저 채우려고 하고, 사랑하기보다 남을 흠집 내고 헐뜯고 말 만들어 내기에 바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교회는 서로 사랑하기에 바쁜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모두 사랑에 근거한 선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해서 하는 말과 행동입니까? 그렇다면 소신을 갖고 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말과 행동을 조심하십시오. 그것이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힘써 지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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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5. 14. 03:48

2012 5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로마서 13:8-14

제목: 사랑, 불가능한 가능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 가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때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윤리가 사랑인데, 그것을 가장 잘 펼쳐 보일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게다가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성서정과의 주제 또한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계명을 받은 우리들, 그리고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질문해 봅시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 명령을 받아 든 우리들은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는 성경이 이상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초등학교 시절, 보이스카웃이나 아람단 같은 단체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람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초등학교 6학년 때, 3공수여단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공수여단의 구호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참 멋진 말 같지만, 이것만큼 모순되는 말이 없습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되게 합니까? “안 되는 것은 포기하라!”라든지, “되는 일을 찾아 되게 하라!”라는 말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는 한국이 군사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말도 안 되는 무식한 구호가 난무했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똑같아 보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내리고 그것을 실천하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군사독재 시절 공수여단에서 보았던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구호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이상한,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는 깡패집단 인가요? 하기야 말씀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보아,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능력이 기독교인에게는 부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지, 믿음만 가지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우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고 우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얼마 전 그러한 우매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금식을 열흘 동안 하다 쓰러졌는데, 사모님이 믿음으로 낫게 하겠다고, 그리고 목사님은 금식하다가 쓰러진 것이기에 삼일 만에 부활할 거라고(일어날 거라고), 믿음을 가지고 쓰러진 목사님을 방치하다가 죽게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목사님을 부검해 본 결과, 쓰러졌을 때 손을 썼다면 살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그냥 방치해서 죽게 만든 그 사모님은 경찰에 구속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에모든 것이 들어 있고, 사랑할 때 모든 율법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면서, 왜 사랑의 빚은 져도 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랑할 때 모든 율법이 이루어질 정도로 위대한 것일까요?

 

이것을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것을 보면, 사랑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그 무엇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사랑을 일차적으로 꽃피워야 할 가정을 들여다 보면, 우선 사랑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부부 간의 사랑도, 부모자식 간의 사랑도 어딘가 모르게 날마다 불안합니다. 부족합니다. 특별히 부모자식 간의 사랑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원하고 숭고할 것 같으나, 들려오는 뉴스를 보면 자식을 그냥 방치하는 비정한 부모도 많고, 부모에게 몹쓸 짓을 하는 후려 자식도 많습니다. 사랑이 저절로 되어야만 할 것 같은 부모 자식 간에도 그러니, 남남인 이웃에 대한 사랑은 묘연해 보이기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오늘 말씀은 갑자기 뚝 떨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13장에 나오는 말씀이니까, 그 이전에 사도 바울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논증한 상태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것을 율법과의 문제에서 풀어냅니다. 사도 바울은 더 이상 우리는 죄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의 법 아래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우리 인간에게서는 가능하지 않은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하나님 고유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들은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아닌 일그러진 사랑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사랑은 늘 부족하고 만족함이 없으며 선한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사랑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사랑이 화살이 되어 가슴에 꽂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인생을 살만큼 사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불가능한 사랑의 행위를 가능한 것이 되게 하는 능력은 무엇일까요? 그 능력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옵니다. 11절 이하의 말씀은 그 상황을 종말론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자다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빛의 갑옷을 입자등의 표현은 종말론적인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표현들입니다. 이는 우리의 현실이 지금 우리가 눈에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서 우리의 영적 현실이 바뀌었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영적 현실이 어둠에서 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각성할 때 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이 영적 각성은 14절의 말씀에서 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때 가능해 집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만이 우리의 영적 현실을 올바로 바라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사랑의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봐야 하는 이 시기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부모님을 사랑해야 되는 데 왜 나는 부모님과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을까? 남편, 또는 아내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남편 또는 아내가 낯설기만 할까?(연애 할 때는 상대방의 몸에서 애기 향기가 나더니, 이제는 독소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식들에게 더 잘 해 주었어야 하는데, 뭐가 그렇게 살기 바쁘고 힘들었는지 더 잘해 주지 못한 자식 생각만 하면 가슴이 메어오지 않으십니까? 충분히, 그리고 서로 만족할만하게 사랑을 받고 베풀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삶의 모습 가운데 혹시 가슴 아파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 죄책감에 싸이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그렇게 주저 앉을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게 되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명령하고 있듯이,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것도 빚지지 않은 자, 즉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능력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룰 때만 가능합니다.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영적 현실에 눈을 뜰 때만 가능해집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실존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온 존재를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면 이룰수록 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멀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고, 있는 듯 존재가 희미했던 어머니가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남편 또는 아내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를 서로의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식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식을 한 인격체로 대하며 자식을 위한 진정한 밑거름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이웃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을 때 너무 좌절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함으로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랑의 능력이 충만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동영상을 하나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부모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부모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뿐만이 아닙니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다 이웃(타자)인데, 이웃(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를 절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웃(타자)가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서 동영상을 감상해 보십시오.)

 

동영상 클릭 -->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6872966

 

우리의 모자란 마음 때문에 상대방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는 상대방을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모자란 마음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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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양이 길을 잃어버린 것은 양의 실수입니다. 우리가 고생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실수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교만해서, 버릇이 없어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쳐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해서 우리가 잘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 잘못 때문에 구원을 포기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유보하시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죄인 가운데는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 죄인이 있습니다. 탕자가 되었어도, 하나님을 등뒤로 하고 세상에 가서 인간적으로 살고 죄에 빠져 괴로워하다가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죄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문을 열고 밤이나 낮이나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죄인은, 스스로는 절대로 죄 가운데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죄인이 있습니다. 이런 죄인들을 위해서 목자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도, 길을 잃은 양도, 하나님의 인내가 없었다면 구원 받기 힘듭니다. 내가 주님 품으로 돌아온 것은 내가 영특하기 때문에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서 빠져 나올 수 없었던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인내 덕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랍 속담에 "태양만 비추면 사막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밝은 태양만을 원하지만 태양만 계속되면 우리 인생은 사막이 되고 맙니다. 우리 인생이 촉촉하고 푸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좋아합니다.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원한다면 소낙비를 각오해야 합니다. 소낙비가 없이는 결코 일곱 빛깔의 무지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지개와 같은 인생을 원한다면 때로는 아픔과 고통의 소낙비를 맞아야 하고 견디어야 합니다.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래 기다리고 기도하는 사람이 무지개를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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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5. 7. 02:16

아들에게 들려주는 히브리서 이야기 1

 

아들아, 이제부터 아버지가 네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눈과 귀를 아버지가 하는 말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너의 온 존재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10:17)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으시면 우리는 들을 수 없고, 결국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이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께 온 존재를 다하여 반응하는 것이란다. 아들아, 이제부터 아버지가 네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온 존재를 걸어 들어야 하는 믿음의 행위란다.

 

히브리서를 누가 썼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말을 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누구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란다. 왜냐하면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 서신을 누가 쓴 것인지 밝히지 않고 있단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말씀이 단순히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은연중 보여주고 있다. ‘이건 내 말이 아니라 성령님의 말씀이다. 그러니 온 존재를 걸어 들어라!’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란다.

 

이 히브리서의 수신자를 보통 히브리서 공동체라고 부른단다. 히브리서에서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꼭 필요한 상황에 처해 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한단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은 것이지. 이 서신을 받아본 히브리서 공동체는 로마에 살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몇 가지의 상황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첫째로,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 이들은 당황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초대교회의 모든 그리스도 공동체는 이 문제 때문에 매우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단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 중에 얼마나 빨리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으로 얘기하신 것도 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16:28). 이 말씀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실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 둘씩 죽어가는 상황에서 초대교회 공동체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이러한 심란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초대교회 지도자들, 특별히 사도들은 무단히 애를 썼단다. 이런 말씀으로 위로한 구절도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사실 이 상황, 즉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상황은 예수님의 승천 사건이 있은 후 2000년이 훨씬 지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00년이란 세월 동안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은 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아예 재림 불감증이 걸린 상태에서 살아가기 때문이지. 예수님께서는 안 오시는 것도 아니고 더디 오시는 것도 아니고, 지금 오고 계신단다. 예수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이란다. 엘리야 선지자가 손바닥 만한 구름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비구름이 몰려 오는 것을 알아채서 준비 했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고 계신 예수님을 보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란다.

둘째로, 히브리서 공동체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이유는 박해와 핍박이었다. 박해란 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으로부터 학대 받는 것을 가리키는데,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 공동체에 학대 받는 상황이 그것이었단다. 이를 잘못 오해하면, ‘유대교가 기독교를 박해했다는 단순 논리에 빠지기 쉽다. 그렇게 되면 히틀러가 저질렀던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는 것이지. 이 상황은 절대 그런 상황이 아니란다. 유대교가 기독교를 핍박했다는 뜻이 아니라, 유대교의 핵심 원리가 기독교의 핵심 원리를 잠식해 들어갔다는 뜻이다. 유대교의 핵심 원리는 율법이다. 기독교의 핵심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율법은 자기 의이고, 십자가는 은혜인데, 이 둘이 서로 충돌했다는 뜻이다. 율법과 십자가의 관계를 집요하게 분석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란다. 그의 서신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이 두 원리(율법과 십자가(복음))를 파헤친 깊은 신학적 논증이라고 할 수 있지. 율법과 십자가의 충돌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란다. 이것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역사와 그 길을 같이 걸어온 문제야. 아마도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끝나지 않을 논쟁이 될 것이다. 물론 성경을 통해서 이미 십자가의 은혜가 율법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 이 둘은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가려내기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란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끝난 문제이지만 실천적으로는 아직 헷갈리는 문제라는 뜻이다. 아직까지도 기독교인들 중에는 십자가의 은혜로 살지 못하고, 율법의 자기 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자기 의’,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의로운 존재가 되려는 마음이 바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기 때문이란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늘 조심해야 한다. ‘날마다 죽지않으면 은혜가 아닌 자기 의로 살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쨌든 히브리서 공동체는 지금 십자가의 은혜로 살기를 포기하고 율법의 자기 의로 살아가던 때로 되돌아 가려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에게 처음 믿은 바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는 서신이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다시 집중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정신이 흐트러지면 혼란을 겪게 마련이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듭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깨어라는 말은 정신 차리라는 뜻이란다. 한문으로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란 말을 할 때의 상태이고, 속담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란 말에서 느껴지는 정신 차림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정신을 엉뚱한 데 팔게 한다. 초점을 흐트러뜨리고 목표를 교란시킨다. 결국 중간에서 포기하게 만든다. 그게 이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해야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지금 히브리서 공동체에게 이런 세상에서 정신 차리고 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 차려서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는 것이다. 아들아, 히브리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도 이 점을 잊지 말기 바란다. 정신 못 차리면 성령으로 시작한 일 육체로 마칠 수 있음’( 3:3)을 유념하거라. 이것은 곧 재앙이요, 죽음이다. 이 사망의 위협에서 우리를 건져주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말씀이란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2. 5. 2. 23:28

탄식: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성령을 연결시키는 고리

( 8:26-28)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진술을 들으면 기분 나빠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만사형통이라고 부르는 원리가 여기에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만사형통하게 된다는데, 이 말씀을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주어진 로마서의 말씀은 그렇게 단순한 논리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탄식이라는 단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 이전에 줄기차게 인간의 탄식과 피조물의 탄식에 대해서 설명했다. 죄와 율법의 문제를 논하면서 우리 인간의 처한 상황이나 피조물이 처한 상황이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절망할 것도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의 법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이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 없다.

 

탄식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소망이라는 두 요소를 동시에 내포한 행위를 가리킨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죄의 법과 성령의 법 사이에 놓여져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령의 법이 우리의 삶 가운데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적인 삶은 여전히 죄의 법 아래 놓여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긴장감 가운데 있다. 우리의 현실은 죄의 법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당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의 미래는 성령의 법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처지에서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기본적으로 탄식의 기도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기도할 때는 아프지만 기도가 끝나면 기쁨이 몰려오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탄식의 기도에는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소망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아주 힘이 되는 성령의 사역을 말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이 탄식할 때 성령께서도 탄식으로 모든 피조물과 연대(solidarity)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탄식은 피조물의 탄식과는 성격이 다르다. 성령의 탄식은 인간(그리스도인)이나 피조물의 경우와는 달리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피조물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중보기도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 피조물의 연약함은 무엇인가? 우리의 연약함은 당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없는 무지함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이 상황에서 성령은 말없는 탄식(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한다. ‘말없는 탄식이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신다는 뜻이다.

 

근본적으로 성령의 일을 우리가 감지할 수는 없다. 성령은 우리가 흔히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이 부릴 수 있는 영이 아니라, 무한히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뜻은 성령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성령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중보기도는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성령의 생각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신다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내주하시는 성령과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일치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입술에, 우리의 어깨에, 우리의 머리 위에, 우리의 발등에 앉아 계신 분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술을, 우리의 어깨를, 우리의 머리를, 우리의 발등을 살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입술로 또는 어깨와 머리와 몸을 흔들며 격하게 기도할 수 있다. 거기에 경건함과 간절함이 실려 있는 것처럼 꾸며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전혀 경건하지 않고 간절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기도를 외식하는 기도라고 한다. 이런 기도는 성령께서 전혀 말 없는 탄식으로 도와줄 수 있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오해한다. ‘말 없는 탄식으로 도와주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대충대충 기도해도 알아서 도와주실 거라고. 당신의 뜻대로 부름 받은 사람은 대충대충해도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거라고.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다. 기도할 때, 이 마음 속에 성령의 탄식과 통하는참된 탄식이 없다면 성령께서는 말 없는 탄식으로 우리와 연대하실 수 없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을 한 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참으로 현재 받는 고난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가! 또한 그 구원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고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이 마음 속에 참된 탄식이 있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현재의 고난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 이 고난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그 마음이 창자가 끊어질 듯 하다. 또한 고난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면서 이미 구원 받은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기뻐한다. 피조물은탄식한다. 고로, 존재한다(구원받는다).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4. 26. 02:41

망양지탄(望洋之歎):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감탄한다는 말 / 남의 위대함을 보고 자신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한다

 

먼 옛날 황하에 하백(河伯)이라는 강의 신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금빛 찬란히 빛나는 강물을 보고 감탄하여 '이런 큰 강은 달리 또 없을 거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늙은 자라가 해 뜨는 쪽에 있는 북해(北海)가 훨씬 크다고 말했습니다. 하백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가을이 오자 황하는 연일 쏟아지는 비로 몇 배 더 넓어졌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하백은 문득 늙은 자라의 말이 생각나서 북해를 한번 보기로 하고 강을 따라 갔습니다. 하백이 북해에 이르자 그곳의 해신인 약()이 반가이 맞아 주었습니다. 북해의 해신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자 파도는 가라앉고 눈앞에 거울 같은, 넓은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세상에는 황하 말고도 이처럼 큰 강이 있었단 말인가...' 하백은 이제까지 세상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북해의 신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였구려. 대해(大海)를 모르면 그대는 식견이 낮은 신으로 끝나 버려 사물의 도리도 모를 뻔했소. 그러나 이제 그대는 거기서 벗어난 것이오' -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 -

 

식견이 좁은 사람을 일컬어 우물 안 개구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은 식견이 좁은 것과 관련이 매우 많습니다. 알지 못하면 가만히라도 있어야 하는데, 식견이 좁은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줄로 착각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리인 양 우겨댄다는 겁니다. 이는 단순히 교육수준의 높고 낮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마음이 열려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식견이 좁은 사람의 예로 바리새인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공부를 적지 않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율법의 전문가들입니다. 이들의 율법해석과 율법지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모든 관리들도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을 따라 일을 처리해야만 그 권위를 인정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식견이 생각보다 높고 크지 못하다는 것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율법의 끝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메시아의 오심과 동시에 끝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올바로 해석하고자 노력하고,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자 노력한 이유도 오실 메시아를 흠없고 티없는 가운데 맞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오실 메시아를 맞이한다는 것은 오실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율법이 대망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하나님 나라인 예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는커녕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결국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이 목숨을 걸고 율법대로 살아낸 이유가 바로 메시아 때문인데, 그 메시아를 손수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으니 이는 손수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들은 결국 율법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살지 못하고, 그저 율법의 닫힌 세계에만 살았던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살았다면,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했을 때, 즉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오셨을 때 그를 메시아로 알아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식견이 좁았기 때문입니다. 식견이 좁았던 바리새인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보였고, 이는 교만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진리에 대하여 몸과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 날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정적입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확정된 진리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깨어 기도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만이 우리의 식견을 넓히는 일이요, 교만해지지 않은 길이요, 구원을 놓치지 않을 유일한 방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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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버나드 쇼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호랑이를 죽일 때는 그것을 스포츠라고 한다. 호랑이가 인간을 죽일 때는 사람들은 그것을 재난이라고 한다. 범죄와 정의와의 차이도 이것과 비슷한 것이다."

 

요즘 국제사회의 화두는 인권이다. 국제사회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는 미국이 내세우는 최대의 명분은 인권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명분 또한 인권이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지역의 대학교(Columbus State University) 교수 한 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김일성 탄생 100주년(2012 4 15)을 맞아 탈북자들의 증언이 담긴 북한 관련 비디오 상영이 학교에서 있으니 와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모임은 김일성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는 아니고, 반대로 북한 정권을 규탄하는 내용의 비디오를 상영하는 행사였다. 비디오 상영은 1시간 20분 정도 지속되었는데, 15명 남짓한 학생들이 심각하게 탈북자들의 증언이 담긴 비디오를 시청했다.

 

물론 비디오의 내용은 심각했다. 거기에 등장하는 탈북자들은 모두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인물들이고 북한 정권에 대해서 억하심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 그리고 자료 화면을 통해서 증언되는 북한의 인권은 참으로 참담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아 탈북했으니 그들의 마음이야 얼마나 분노가 가득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선이다. 이들은 그것을 보면서 분명 정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북한의 인권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쳐갔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미국 영화를 보면 대부분 정의의 사도가 악당들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것들이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선과 악의 구조가 편만한 영화를 보면서 자신들 미국인을 선의 축에, 나머지를 악의 축에 감정 이입시킨다. 얼마 전에 본 미국 영화 <Act of Valor>도 그런 류의 영화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세계 각국에서 테러와 싸우는 미군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인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 한 군인의 삶을 다루고 있었다. 그 영화 속에서 미군은 인권과 평화의 수호라는 기치 아래 수 없는 악당들을 최신식 무기로 괴멸한다. 어려움 속에 처해 있는 자기 편을 살려내기 위해서 악당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로 그려진다. 악당들이 저지르는 살인은 범죄이고, 인권을 위해, 평화를 위해 자신들이 저지르는 살인은 정의이다.

 

나는 이러한 형태의 인권보호평화유지를 보면서, 무엇이 인권보호이고 무엇이 평화유지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미국인들은 위의 영화를 보면서 미군이 아슬아슬하게,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이마에 땀이 흐르게 할 정도로 스릴 있게 자기 편을 구해내는 장면을 보면서 환호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자기 편을 구해내면서 어쩔 수 없이 죽여야만 했던 악당들의 인권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국제사회의 힘겨루기에서 단연 화두는 인권이지만, 나는 그것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인권은 그저 그들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명분일 뿐이다. 힘 센 나라가 힘이 약한 나라를 억누르기 위한 조작된 핑계일 뿐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관심 갖는 것은 인권, 즉 사람답게 살기가 아니라 기득권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더라도 그 메커니즘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이 만일 민중들의 눈에 보기에 부당했다면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많은 민중들은 봉기했을 것이다. 민중들의 눈이 아무리 어두워도 정당과 부당의 최소한의 차이쯤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민중들을 로마 당국이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긍정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을 뿐 아니라, 그의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면서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이것은 그들 민중이 예수의 죽음을 정당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로마는 평화를 원했고,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기득권을 원했다. 표면적으로만 그 표방하는 것이 달랐을 뿐이지, 그 심층적인 욕망은 모두 한결 같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유지하고 싶었던 것에 불과하다.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원수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 눈에는 피눈물 나게 될 것이다!”라는 무서운 속담이 무색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예수는 자신의 눈에 눈물 나게 한 자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안아 주셨다. 그리고 더 이상 눈물이 없는 세상으로 모두를 이끌어 주었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 능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권이 화두인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 알게 모르게 나 자신을 정의의 축에 놓고 타자는 악의 축에 넣은 뒤, 자신이 하는 일은 정당하고 남이 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타락한 마음에 젖어 사는 우리들. 내가 남을 죽이는 일은 정당한 일이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헤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으면 좋겠다. 무엇이 진정한 인권인지. 무엇이 진정한 평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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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4. 19. 03:16

갈불음도천수(渴不飮盜泉水): 목이 말라도 '도천'(도둑의 ) 물은 마시지 않는다 / 아무리 가난해도 나쁜 짓으로 돈을 벌지는 않는다

 

도천(盜泉)은 산동성 동북쪽에 있는 샘입니다. ()나라 육사형(陸士衡)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천의 물은 마시지 않겠네. 아무리 더워도 악목(惡木) 그늘에서 쉬지 않겠네'라고 고결한 선비의 정신을 읊었습니다. 한편 공자는 해가 질 무렵에 승모(勝母)라는 마을에 이르렀지만 어머니를 이긴다는 그 마을 명칭이 마음에 걸려 거기 묵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도천이란 샘을 지날 때도 목이 말랐지만 눈길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 '설원(說苑) 설총(說叢)' –

 

요즘은 이런 꼬장꼬장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도둑의 물이면 어떻고 어머니를 이기는 마을이면 어떠하냐, 내 마른 목을 채우는 게 먼저고, 내 피곤한 몸을 쉬게 하는 게 중요하지, 이런 마음이 판을 칩니다. ‘모도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우세인 세상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이 승리의 깃발을 들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형편의 세상에서 나 혼자만 잘난 척할 수 없습니다. 나 혼자만 의로운 척할 수 없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대충 넘어가야 맘 편하고 몸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 혼자만 잘해서는 소용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이 어떠하든 나 혼자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은 참으로 어린 생각이요 더 나아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중 스탠리 하우어워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If we want to change our way of life, acquiring the right image is far more important than diligently exercising willpower.”

 

썩은 세상에서 나 혼자만 잘 하면 된다고 의지력을 기르는 것은 얼마 오래가지 못합니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 즉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혼탁한 세상에서 나 혼자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에 젖은 독야청청한 인물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흐름을 바꾸는 일은 절대로 혼자서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겁니다. 한 몸을 이루어 함께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가라고 말이죠.

 

그런데 요즘 교회는 한 몸을 이루어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일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 몸을 이루어 세상 속에 뛰어들어 광란의 파티를 즐기고 있는 듯 합니다. 앞다투어 수천억 원이 드는 건물을 짓는다든지, 안면몰수하고 담임목사직을 세습한다든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치권과 결탁하여 여론몰이를 한다든지, 도둑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 어머니를 이기는 마을에서 잠을 청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허무하면서도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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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2. 4. 10. 02:38

군자불기(君子不器) :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 참된 인물은 편협하지 않다

 

공자가 한 말로 군자란 그 크기가 물건을 담는 데 불과한 그런 그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누구나 군자는 아닙니다. 지식과 아울러서 인격도 동시에 갖추고 덕을 실천하는 참된 인물이 군자입니다. 오기와 아집, 편견과 독선을 부리는 그런 편협한 사람은 결코 군자가 아닙니다. 융통성이 풍부하고 포용력이 많은 인물이 참된 인물인 것입니다. 성인군자라고 할 때 성인이나 군자나 모두 참된 인물을 말합니다. -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성인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인군자라는 말은 인간에게 쓰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성인군자로 표현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본 사람이면,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은 이 세상의 여느 성인군자중 한 사람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은 인류를 위한 구원 사건이 되는 겁니다. 구원은 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만 가능한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에게서 참된 종말론적 구원을 보았다는 것이죠. 그러한 거룩한 무리인 그리스도인은 그야말로 성인군자같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그릇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걸쳐 산상수훈을 설교하십니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의, 그들보다 나은 의를 강조하시면서 그리스도인의 그릇이 어떻게 그들과 달라야 하는지 율법을 재해석하시면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드러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위의 고사성어에 비추어 들여다보면, 결국 그리스도인은 지식과 아울러 인격도 동시에 갖추고 덕을 실천하면서 사는군자 같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정리해주고 있은 성경구절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1)입니다.

 

오기와 아집, 편견과 독선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능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뜻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이용하려 들 뿐입니다. 그러나 융통성이 풍부하고 포용력이 많은군자 같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종말론적 구원을 맛본 사람들이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참된 복된 인생임을 알고 그렇게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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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태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귀가하던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물탱크에 유기한, 차마 떠올리기 싫은 사건입니다. 범인의 이름이 흥미롭습니다. 김길태인가 했더니, ‘길에서 태어났다해서 길태라고 합니다. 이름처럼 갓난 아기 때 교회 앞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32년 전 그 어느 누군가에 의해 시작된 비극입니다. 버려진 그를 교회의 지인을 통하여 현재 양부모가 입양하여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학교 시절 입양 사실을 안 그는 그때부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친구도 거의 없고, 양부모의 말도 잘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접하면서 범인 김길태를 나무랄 수 있고, 그를 길에 버린 친부모를 나무랄 수 있고, 맡았으면서도 잘 키워내지 못한 양부모를 나무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일입니다.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도 같아서 어느 한쪽이 잘못되면 어느 한쪽에서는 그 대가를 꼭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32년 전 한 아기가 길에 버려진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인 것입니다. 그냥 안타까워하고 말 일이 아니라, 기도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픔이 어느 누구에게 실제적으로 영향을 끼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혀를 쯧쯧 차면서 안타까워하지만 그 일은 나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무심하게 넘기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사회는, 우리 인간관계는 서로가 모두 얽혀 있습니다. 마치 한 몸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비극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비극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아픔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것이 우리 인간 사회이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선한 일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기쁨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있는 자리에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 되고 선한 일을 하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이 땅 위에 천국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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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