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게 이 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 파울로 코엘료가 쓴 연금술사라는 책의 한 대목입니다. 

 

옛날부터 연금술은 일종의 마술로 여겨져 왔습니다. 값싼 철이나 납 같은 금속을 잘 정련해서 값비싼 금으로 만드는 기술입니다. 고대인의 눈에 이러한 기술은 마술로 보였겠죠. 현대 기술로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특정 원소들에게 특정 에너지의 방사선을 투사시키면 원자의 핵이 변형되면서 금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성공률과 비용입니다.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률도 낮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금을 만드는 것 자체가 경제적 효용성이 없다는 것이죠. 성공률이 가장 높은 광물이 백금인데, 백금은 금보다 더 비싸기 때문에 비싼 백금으로 그보다 더 싼 금을 만드는 일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어서 시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실 연금술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매우 철학적입니다. 납과 같이 무지몽매한 인간을 금과 같이 쓸모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연금술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죠. 다른 금속을 금으로 변화시키려 한다든지, 사람을 금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데에는 금이라는 금속이 가지고 있는 속성 때문입니다. 금은 다른 금속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개 대부분의 광물은 시간이 지나면 다른 성분을 지닌 다른 광물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은 변화라는 것을 모르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모습 그대로 있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중에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10). 사실 최고의 연금술사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흙과 같은 나를 단련하셔서, 정금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십니다. 정금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변해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절대 바꾸지 않는, 변함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금보다도 더 귀한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는 정금같이, 정금보다 더 귀한 존재로 은총을 누리면서 살아갈 것이요,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먼지 티끌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정금보다 귀하게 만들어 주시는 연금술사,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인생을 맡겨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인생을 복되게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2. 8. 00:59

아내는 성자다

아내는 하루하루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밥짓기

설거지

빨래

방청소

현대인들이 시간낭비라며

끔찍이도 싫어해서

감정이 없는 기계들에게 맡겨버리는 그 일들을

아내는 몸소 감당하느라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책을 읽지 못해 바보가 되어 가고

예배를 드리지 못해 영성이 바닥나고 있다고

때로는 투덜거리지만

아내는 여전히 집안 일 하느라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누가 인생을 보람차게 사는 사람일까

누가 영적인 삶을 풍성히 누리는 사람일까

 

사람들은 인생을 보람차게 살기 위해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다가

실증 나면 금새 집어치우고 만다

사람들은 밀려오는 인생의 허무함을 달래보려

영적인 삶을 추구해 보지만

인내를 가지고 진짜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어찌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한다고

보람찬 인생이 될 수 있으랴

인생의 허무함이 어찌 한 두 번의 영성 수련으로

극복되고 가려질 수 있으랴

 

인생은 어차피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 아니던가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그것과 공명을 이루어내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나는

밥짓기

설거지

빨래 방청소

처럼

소소해 보이는 일들을 위해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성실히 감당하는 아내를 보며

인생의 참된 보람이 무엇인지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성실히 살아내는

아내야 말로 다름아닌 성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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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2. 6. 06:22

2012 2 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가복음 1:29-39

제목: 복음은 능력이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는 것에서부터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을 내쫓을 것을 행하십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과 관련이 있는 행동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향해 온 존재를 트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어울리지 않는 악의 세력이 물러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도여행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한 집안의 어머니가 누워 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계신 관계로 그 집은 당연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을 겁니다. 악은 늘 이러한 모습을 띱니다. 그 위치에서 본인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하나 비면 주변 사람들의 삶이 여간 버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축구 경기에서도 선수 하나가 반칙을 여러 번 해서 퇴장 당했을 경우, 그 선수가 맡았던 포지션이 비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에게 그만큼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악은 그런 식으로 공동체의 활기를 빼앗고, 공동체를 우울하게 하고, 공동체를 수렁에 빠뜨립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장모의 열병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열병을 우습게 볼 수 없습니다. 옛날은 요즘과 달리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병은 곧 죽음으로 치달을 수 있는 치명적인 병이었습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예수님께서 일으키십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이것 또한 장황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간단하게, 몇 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몇 마디 안 되는 짤막한 표현이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개의 단어에 지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으키다(egeiro)”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종들다(diakoneo)”는 것입니다. 우선 일으키다라는 단어는 마가복음에서 매우 강력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으키다는 행위는 어떤 사람의 힘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신 것처럼, “일으키다는 힘이 전가되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몬의 장모가 예수님에 의해 일으킴을 받았다는 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시몬의 장모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볼 때 조심해야 할 것 중 하나인데,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일으키다라는 말이 이렇게 의미 있는 말이 되는 이유는 마가복음 16 6절에서 예수님은 이 단어를 본인에게 직접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 6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기사가 담겨 있습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여기에서 시몬의 장모에게 쓰였던 일으키다라는 단어는 그가 살아나셨고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조금 잘못된 번역이고, 그 어감이 살아나지 않는 번역입니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풀어서 번역하자면,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졌다.”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장모가 일으켜진 사건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사흘만에 일으켜진 부활 사건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일으켜진 사건과 예수님이 부활한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위에 임한 하나님의 능력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몬의 장로가 일으킴은 받은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으킴의 사건은 곧바로 시몬의 장모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종 드는 일과 연관 됩니다. 우리가 눈여겨 살펴야 할 두 분째 단어가 여기서 등장합니다. 우리 나라 말로 수종들다로 번역된 이 단어는 영어로 “serve”입니다. 사실 수종들다는 어감이 좋지 못합니다. 시쳇말로 누구 밑에서 딱가리 또는 시다바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심부름 정도의 하찮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수종들다보다는 우리에게 조금 더 친숙하고 점잖은 단어로 번역하면 섬긴다정도가 나을 듯 합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서 일으킴을 받아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종들었다는 것은 심부름 정도의 하찮은 일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이로움을 끼칠 정도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이것 또한 예수님 당신의 사역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똑 같은 단어를 당신의 사역의 성격을 설명하시는 데 사용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45). 시몬의 장모가 수종들었을 때를 표현했던 그 단어와 예수님께서 섬기려오셨다고 말씀하실 때의 그 단어는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시몬의 장모의 섬김처럼 수종 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열병에서 일으킴을 받은 시몬의 장모가 본문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단순히 병석에 누웠다 고침을 받은 가엾은, 그러나 축복받은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그 몸에 지닌, 섬기는 참된 제자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진술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후에 당신에게로 오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복음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병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질병이 아닙니다. 병원 가서 치료 받고, 약 몇 알 먹으면 낫게 되는 그러한 단순한 병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은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병은 악의 보이는 실체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병든 사람은 우선 가정의 큰 짐이 됩니다. 가정의 각자 구성원은 곧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자녀를 많이 낳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병은 가정의 경제를 위태롭게 했습니다. 이것은 곧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빼앗아 가는 데까지 연결됩니다. 가정이나 공동체에서의 영예로운 지위를 박탈당함으로 소외된 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요즘 시대는 병이 이러한 식으로 가정이나 사회에서 작용하지 않습니다. 가정에 병든 사람이 한 명 있다고 그 가정의 생계가 치명적으로 어려워지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웬만한 병은 모두 치료가 가능합니다. 또한 병들었다고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요즘에 우리가 병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러한 느낌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병을 바라보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고대 사회)의 사람들에게 이란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악의 실체였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칠 때 귀신이 나갔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병을 일으키는 악의 실체를 귀신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이렇게 악의 실체가 무너진다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실제적인 세력이 맥을 못 추고 물러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며 하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기쁜 소식(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드는 원인이 귀신 때문이라는 것을 믿는 사회에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문제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아마도 사는 동안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 문제들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온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삶 속에 실제적으로 깃드는 능력입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 때문에 열병에 걸린 것처럼 누워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리고 우리가 속한 더 큰 공동체 내에서도 그저 주저 앉아 웅크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는 이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들여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우리에게 들려오는 이 복음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신 그 목적에 맞게 우리 각자를 있어야 할 자리로 복귀시키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듣고도 일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헤매고 있는 이유는 그 복음에 우리의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시몬의 장모의 손에 닿았다는 것은, 시몬의 장모가 복음에 온 존재를 던졌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시몬의 장모는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수종들 수 있었습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온 존재를 걸고 살 때 우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결정적인 사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이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 자체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집중하면서 살아갈 때 복음의 능력, 일으킴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집중하면서 살아갈 때 일으킴을 받아 우리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음의 능력에 우리의 삶을 맡겨 봅시다. 그 능력이 우리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병든 몸을 낫게 할 것이며, 우리의 병든 마음을 치유할 것이며, 우리의 무너진 삶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해야 하는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에 온 삶을 걸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 시간 결단하십시오.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뒤 덮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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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2. 5. 05:05

백중지세(伯仲之勢): 인물, 기량, 지식 등이 서로 비슷해 우열을 가릴 없다는


위나라 황제 조비는 '전론(
典論)'에서, ()나라의 대문장가인 부의와 반고 두 사람의 문장실력에 대해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뜻으로문인들이 서로를 경시하는 것은 예부터 그러하였다. 부의와 반고의 실력은 백중지간이었다. [文人相輕 自古而然 傅儀之於班固 伯仲之間耳]'라고 평했습니다. 백과 중은 본디 형제의 순서를 구별하여 부르던 말로 맏형을 백, 둘째를 중, 셋째를 숙(), 막내를 계()라 불렀습니다. 따라서 백중은 형과 아우 또는 맏이와 둘째라는 뜻인데, 형제는 보통 외모나 품성이 매우 비슷하여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을 백중지간이라고 하였고 후에는 백중지세라는 말이 더 많이 쓰였습니다. -전론(典論)-

 

자본주의의 새로운 삶의 원리인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신자유주의 기본 원리는 무한경쟁입니다. 경쟁은 기본적으로 우열을 바탕으로 진행됩니다. 상대를 이기지 못하면 내가 밑으로 내려갑니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원리입니다. 이게 사람이 사는 세상인지, TV에서만 보던 동물의 세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경쟁은 사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타락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같은 가치로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것은 더 귀하고, 어떤 것은 덜 귀한 것이 없습니다. 자연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 것도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인류 최초의 가정에서도 타락한 인간의 경쟁심이 살인을 불러왔습니다. 예배는 경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경쟁적으로 예배 드리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이 그것입니다.

 

경쟁이 들끓는 곳일수록 타락이 극심해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고린도 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경쟁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급기야 자신들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서로 줄을 세웠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2).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무엇인지 조금만이라도 맛본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경쟁이라는 단어를 그의 사전에서 지워버리게 될 것입니다. 경쟁은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 만들어낸 타락한 행동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백중지세입니다. 누가 누구보다 잘 난 사람이 없고, 모두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대로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야 할 형제자매입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이 세상에 저항하십시오. 경쟁해서 이기려 들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요 계명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의 방식입니다. 경쟁하는 자가 이기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이기는 세상이 천국입니다. 이 땅 위에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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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III

2.2. 소명과 자질의 변증법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소명이 먼저일까? 자질이 먼저일까? 우리는 흔히 소명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아니 소명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소명의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의 소명의식이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듯 하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이 꽂히는 순간, 더 이상 아무 것도 귀에 안 들리고 눈에 안 보인다. 그때부터 소명의식에 대해서 의심을 갖는 것은 불신앙이 되어 버리고, 자신의 목회적 소명의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면 모두 사탄의 농락으로 여긴다. 정말 소명이 전부일까?

 

한국교회는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부족하다. 그리고 소명에 대한 검증 절차 또한 부실하다. 여기에는 문화적인 이유와 신학적인 부재의 이유가 도사리고 있다. 일단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소명에 대한 성찰을 신학적으로 하지 못하게 만든다. 소명을 무당 신내리듯한 그 무엇쯤으로 생각한다. 신학교를 다닐 때 수업 시간에 한국 샤머니즘의 대표적인 의식인 굿에 대한 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영적 존재에게 점지를 받은 예비 무당은 그때부터 무당수업을 받는데, 자신이 평생 모시고 살 영적 존재에게서 신 내림을 받을 때까지 정성스럽게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신 내림을 받고 무당으로 안수받는 마지막 의식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작두타기이다. 신내림을 받은 처녀 무당(무당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무당이라는 뜻)은 맨발로 작두 위를 걷고, 날 선 칼을 깔아놓은 그네를 타는데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참으로 신기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무당의 본업을 수행한다. 신기한 것은 예비 무당이 영적 존재로부터 점지받는 과정이 예비 목회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받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비 무당이 점지받고 나서 고민하는 모습이 소명받고 고민하는 예비 목회자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점지 받은 예배 무당은 결국 영적 존재의 점지(부르심)순종한다. 예비 목회자가 그러하듯.

 

이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은 분명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무당의 신내림과 목회자가 소명 받는 것이 같을 수 있어?” 물론 본직적인 차원에서는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구별하고 구분해낼 수 있는 신학적이고 방법적인 잣대를 구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잠재의식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정신에 오랫동안 깃들어온 샤머니즘적인 정서를 어떻게 걸러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목회자가 무당 신내리듯이받은 소명은 아예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검증을 무색하게 만든다. ‘내가 하나님께 소명 받았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소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문헌을 보면 한 사람이 목회자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기나긴 성찰과 검증을 한 기록들이 즐비하다. 교회는 처음부터 소명에 대하여 성찰하고 검증했다는 뜻이다. 소명에 대하여 성찰하고 검증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라, 신앙적인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소명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검증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 경향이 강한 한국 교회에서 소명에 대하여 성찰하고 검증하지 않는 것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꼼꼼하게 한 신학자이다. 그는 소명을 성직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성직세속직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명을 성직에만 국한시키는 한국교회의 관행과는 완전 딴 판이다. 칼빈은 소명을 직업과 연관시킨다. 칼빈은 직업(calling)’소명(calling)’과 같은 단어를 써서 표현한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 직업이란 소명과 같은 것이다. 우리 말로는 칼빈의 직업 개념을 천직이라고 번역한다. 소명을 직업(천직)의식으로 확장시킨 칼빈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소명이 아니라, 자질이 된다. 이를 목회직에 적용해 보면, 목회직을 수행할 때 중요한 것은 소명이 아니라 자질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것이 있다. 소명 없이도 자질만 있으면 목회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칼빈의 소명 개념은 일차적으로 신앙을 전제한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성직과 세속직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성서의 한 구절을 들어 주석적으로 더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요한복음 1 43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다나엘이 예수께 소명 받는 장면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을 부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1:51). 이것을 꼼꼼히 주석하기 위해서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지만 지면이 허락되지 않으므로 핵심만 짚고 넘어가자면, 소명(부르심)이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명의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소명의 개념이다. 우리는 자꾸 소명의 개념을 무엇인가를 하는 것의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정작 복음서에서는 소명을 무엇인가를 아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들(, , 죽음)에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둘째, 인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이 진리에 나를 매는 것, 이것을 토대로 삶을 사는 것, 이것에 모든 인생을 거는 것이 소명(부르심)’ 받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된 주석작업을 바탕으로 좀 더 자세히 씌어진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여기 블로그에서 "부르심이란 무엇인가"라는 설교문을 읽어보시라.)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의 소명 설화를 토대로 소명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나면 칼빈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소명은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이지, 우리가 언뜻 이해하고 있듯이 어떤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부르심의 범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소명을 받았다면, 칼빈이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은 나의 천직(calling, 소명)’이 되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은 목회직을 수행하는 사람만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의사를 하든, 변호사를 하든, 택시기사를 하든, 식당 아줌마로 일하든, 환경미화원이든, 무엇을 하든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명과 자질의 변증법이 발생한다. 존재론적으로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소명이 아니라, 자질이 된다. 목회직은 목회의 소명 받은 사람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에 자질이 있는 사람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직이든, 판사직이든, 그에 대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그 일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어떠한 직이든 그 일을 수행하는 데는 갖추어야만 하는 자질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여기서 목회자의 교권이 왜 무너졌는지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소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없는 자가 목회직을 수행하고 있고, 목회직에 대한 자질이 없는 자가 소명이라는 자의적인 착각에 빠져 목회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바야흐로 21세기이다. 아직까지도 잘못된 소명의식에 사로잡혀 목회적 자질을 갖추고 있지도 않으면서 목회직을 수행하려 드는 어리석은 목회자의 영성은 분명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의 영성에도 훨씬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16세기를 거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21세기에서 목회할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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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대림절은 하나님 아버지께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이후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강림절을 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완성을 이룹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강림절 후 첫 번째 주일을 삼위일체주일로 지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찬양하기 위해서이지요.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매우 독특한 교리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정통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잣대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 삼위일체 교리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우선적으로 담겨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인가 아닌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정통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생겨난 이단 중 가장 끈질긴 이단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는 이단입니다. 현재 유니테리언이라는 교단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잘라 말합니다. 육신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에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고 모세나 마호메트 같은 위대한 선지자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통 기독교와 이단 또는 타종교와 구분되는 지점이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느냐 아니냐, 바로 이 지점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교파는 일단 정통 기독교의 범주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크게 가톨릭,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이 세 교파는 정통 기독교라고 말하는 겁니다. 삼위일체 교리 이외의 것들은 소소한 논쟁에 불과할 뿐, 삼위일체 교리를 건들지 않는 이상,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을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모두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많은 공부와 묵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탈도 많고 말도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삼위일체 교리는 벌집과도 같다는 겁니다. 어설프게 손댔다가 이단으로 몰려 출교(excommunication)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그 신비로운 하나님을 이해해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신비란 모르는 것이 아니라 감춰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려고 노력하고 간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신비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 30. 06:18

2012 1 2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8:1-13

제목: 사랑은 덕을 세운다

 

고린도는 우상이 판을 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복음 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지역뿐만이 아니라, 평생 우상의 그늘 아래서 살던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한 지역과 개인의 삶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가 자연스러운 곳, 그리고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에 익숙한 사람이 신앙을 갖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를 전파하는 일, 그리고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을 잘못 이해하면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주고자 했던 교훈을 놓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오늘 말씀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피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말씀의 핵심이 절대로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이 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심각한 요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어떠한 교인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인이 그것을 봤습니다. 그 교인이 노발대발 합니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어떻게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냐고요. 그러나 우상의 제물을 먹은 그 교인은 이렇게 맞받아칩니다. 고기는 고기일 뿐이지 이게 우상에게 바쳐졌다고 해서 무슨 효력이 있냐고요. 그러면서 이 사람은 그러한 것에 얽매여서 무슨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냐고 오히려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그 사람을 나무랐습니다. 이 문제로 고린도교회는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파와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 이렇게 나뉘어서 죽어라 싸웠습니다.

 

사실 이러한 비슷한 문제가 현재도 교회 안에 편만합니다. 한국교회는 처음에 이와 비슷하게 제사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제사 드린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제사 드리면서 절을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 등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장례식장에 가서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국문화는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에게 두 배 반의 절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상주에게는 맞절을 한 배 반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장례식장에 가면 기독교인들은 고인에게 절을 하거나, 상주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앞에서 묵념(기도)하고, 상주와도 목례 정도 나누고 맙니다. 지금은 오히려 이러한 기독교 장례문화가 편만해져서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다시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돌아가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은 이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먹어도 상관 없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된다파가 승리의 함성을 질렀을까요? “그것 봐!”하면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파를 나무랐을까요? 사도 바울은 문제의 핵심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피력합니다. 그것을 피력하는 핵심 구절이 바로 8 1절의 말씀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 구절을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지식은 나쁜 것이구나, 무식하게 사는 것이 좋구나!’ 사도 바울은 지식은 나쁘고 사랑은 좋은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지식이 없으면 인생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당신들은 못 배웠어도 자식들은 교육 많이 시키려고 뼈빠지게 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지식이라는 것을 잘못 소유하게 되면 오늘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진, 그러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지식은 중요한 것이지만 지식만 쌓는 것은 남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지식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지식이 남을 살리고 이롭게 하는데 쓰여질 수 있습니다. 지식에 사랑을 더해 덕을 쌓은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지성인이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결정적으로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파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지식의 핵심 내용이 6절입니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여기서 핵심은 한 하나님, 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라는 뜻은 이 세상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사람들이 행하는 우상숭배는 코미디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있지도 않은 신에게 바친 제물에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도 이러한 지식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음식을 먹어도 상관 없고, 장례식장 가서 예를 갖추어 절을 해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제사음식은 그냥 음식일 뿐이고, 고인에게 절 하는 것은 그 고인이 무슨 이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절을 하는 것이 우리 문화에서 예의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지식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은 교만하다는 뜻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공동체에 고집스럽게 적용하면 그 지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최고의 잘못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는 지식이 더 있는 사람도 있고, 지식이 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지식 수준이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 한 편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제가 쓴 시입니다. 제목은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입니다. 부제는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입니다.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

 

어린 시절 비 올 적마다 엄마가 만들어 주신 도너츠.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다. 기름에 튀긴 거라 끔찍하고 그런 걸 정신 없이 먹었다는 것이 끔찍하다. 그런데 그 시절엔 그것이 상식이었다. 기름에 튀긴다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했을 뿐이고 그런 사실에 풍요롭다고 느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나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독을 주신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트랜스 지방이 엄청 들어간 기름에 튀긴 도너츠를 간식으로 주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엄마의 사랑에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엄마의 상식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그것이 엄마가 자식들에게 베푼 최고의 사랑이었다. 사랑의 행위는 늘 바르고 정직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사랑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고 상식을 비껴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는 만큼, 자신의 상식 선에서만 사랑을 베풀 수 있다.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은 이미 인간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 상식만큼만 사랑을 이해하고 받으면 된다. 그래서 난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엄마의 그 끔찍한도너츠가 그립고 또 그립다.

 

저희 어머니가 올해로 76(36년생)이십니다. 우리 어머니 세대에는 트랜스지방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 그 당시 트랜스지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치고, 트랜스지방에 대해서 지식이 없었던 어머니가 사랑으로 만들어 준 도너츠 간식을 보고 어머니 앞에서 어머니는 참 무식하다며 내팽개쳐 버렸다면, 트랜스지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저는 지식이 많은 아주 똑똑하고 훌륭한 자식입니까? 아니면 후려 아들놈입니까?

 

세상적인 지식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충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목사입니다. 제가 아는 것만큼 여러분들을 지도하고 가르친다면, 아마도 여기에 앉아 계실 분 한 분도 없을 겁니다. 제가 아는 것과 여러 분이 아는 것이 달라 수많은 충돌을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의학적 지식 만을 가지고 우리를 진찰한다면 우리는 의사 앞에서 얼마나 큰 면박을 받고 상처 받겠습니까? 다시는 그 의사를 만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여기서 자유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온 자유를 말합니다.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안 그리스도인은 우상제물을 먹는 것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없는 사람, 아직까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믿음이 약한 자들은 우상제물을 먹는 것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우상제물을 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압니다.

 

이 문제가 단순히 유식과 무식의 문제 아님을 유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유식과 무식의 문제로 보았으면 이렇게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 문제가 거론된 고린도전서가 성경에 포함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 문제가 왜 중요하냐면, 이것이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제물을 먹어도 된다파의 경솔한 행동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구나!” 이 마음에 담력을 얻어 우상 숭배를 다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우상을 믿는 일을 어느 정도 병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다시 먹게 되는 일은 그들이 믿음 좋은 사람들처럼 그 우상제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믿으면서 동시에 우상도 섬기고 있었는데, 우상제물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우상숭배를 지속해서 해도 되는구나라는 타락한 믿음을 담대하게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이것은 곧 라고 사도 바울을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 문제를 끝맺음 합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것이 믿음인데, 이것만 가지고 신앙생활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믿음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핀잔 주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신앙생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된 자유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면 안 됩니다.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영어로 “Love builds up”입니다. “build”세운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up”이 들어가면 세우되 끝까지 온전하게 세운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 말로 이것을 덕을 세운다로 번역했습니다. 참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믿음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교회를 온전히 세웁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가정을 온전히 세웁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온전히 이웃을 세웁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나 자신을 온전히 세웁니까? 온전한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인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우리가 아는 이상, 우리의 믿음생활은 사랑그 자체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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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2. 1. 28. 00:28

사불급설(駟不及舌):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도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 / 소문은 빨리 퍼지니 말을 삼가라는 뜻


자공을 보고 극자성(
棘子成)이 어느날 물었습니다. "군자(君子)는 그 바탕만 있으면 되지 어찌해서 문()이 필요합니까?" 이 말을 듣고 자공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안타깝다. 그대의 말은 군자답지만, ()도 혀에 미치지 못한다. 문이 질과 같고 질이 문과 같다면 호랑이 또는 표범의 가죽이 개나 양의 가죽과 같다는 것인가." 자공은 말 조심하라는 말로 극자성을 꾸짖었습니다.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

 

위의 자공의 가르침에서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질과 형식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 조심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불급설(駟不及舌)이라는 고사성어는 번째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에서는 본질과 형식의 문제는 내버려두고, 말조심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합니다.

 

어느 앞에는 “Beware of Dog”라는 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개조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집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개가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금방 달려들듯이 위협적으로 짖어댑니다. 개조심이라는 팻말이 없었으면 아마도 까무러칠 겁니다.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입만 열면 까무러칠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정도라면 사람은 애초부터 주변에 “Beware of Mouth 말조심이라는 팻말을 달고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욕설과 험담이 나오는 사람에게는 다가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에 물려 죽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조심 대한 교훈은 어디에나 등장합니다. 성경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이 다른 가르침과는 달리 도덕적 가르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복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 성경에 말조심에 대한 교훈이 나온다는 사실은 말조심과 구원이 연관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야고보서 3장은 온통 말조심에 관한 교훈으로 가득 있습니다.

 

어느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보이지 않는 사람의 내면을 있습니다. 망원경으로는 우주를 내다볼 있고, 현미경으로는 입자를 들여다볼 있는 것처럼, 말은 사람의 마음을 보게 주는 도구입니다. ‘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 속담이 있지만,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에는 분명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제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다면, 야고보서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입에서 어떻게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올 있겠습니까? 심은 나고 심은 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할 있게 해주는 가늠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 말이 어느 누구, 지극히 작은 하나를 실족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Beware of Mouth”, 서로 간에 말조심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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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 26. 04:57

어릴 적 TV 광고에 나온 우루사

파김치가 되어서 집에 들어서는 아저씨를 보며

저 아저씨는 왜 저러나싶었다

백일섭 씨가 우루사를 외치며

파김치가 된 아저씨를 일으켜 세울 때

우루사에 전염된 듯 그 아저씨는 힘 차게 일어섰다

 

내 나이 이제 마흔

TV 광고에 나오던 그 아저씨의 나이가 되었다

이제 나는 그 아저씨가 왜 그런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저씨처럼

매일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서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우루사였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우루사를 샀다

백일섭 아저씨처럼 우루사 먹고 힘차게 일어서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우루사를 먹어도 피로가 회복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일까?

우루사의 약효가 잘못일까?

아니면 내 몸이 잘못일까?

 

아내는 매일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서는 나를 보며

이제는 짜증나서 못 참겠다고 하며

언젠가는 파김치 같은 나를

저녁 반찬 삼아 잡아먹을 기세다

 

겁난다

아내의 기세도 겁나지만

이렇게 피곤에 못 이겨 그냥 쓰러져 버릴까 봐 겁난다

이렇게 마흔에 들어선다는 것은 겁나는 일인가 보다

 

나는 오늘도

어릴 적 보았던 우루사 광고의 약효를 순진하게 믿어 보려 한다

물 한 컵과 우루사 한 톨

피로야 제발 좀 물러가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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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인생은 스트레스의 연속입니다. 감기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지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적당히 다루어주지 않으면 어떠한 병을 유발해서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 말에 한()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 나라의 독특한 정신의학적 용어입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Han)’이라는 말을 그대로 표기해서 쓰고 있습니다. 대개 한은 한국의 여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마음의 병입니다. 삶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적당히 풀어주지 못해서 그냥 마음에 쌓이고 쌓여서 결국에는 곪아 터진 형태의 병입니다. 한이 잘 삭으면 예술적으로 승화하지만, 잘못 삭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법입니다.

 

성경에 보면 스트레스를 잘 극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두 사람이 나옵니다. 사울 왕과 다윗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한 적의와 살의에 사로잡혀 평생 다윗을 죽이려 쫓아다니다가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음의 위협을 받는 가운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잘 다스려서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은 태평성대 때 지은 것들이 아닙니다. 고난과 환란 가운데, 스트레스가 최고조로 달해 있을 때 지은 것들입니다.

 

실례로 시편 34편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블레셋 가드 왕 아비멜렉에게로 도망갔다가 그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스트레스가 올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울며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스트레스를 잘 다스려서 거기에서 오는 기운을 돌려 예술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스트레스가 올 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다윗에게 창을 던지고 무당을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었느냐에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인생이 갈렸다는 것에서 우리는 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십니까?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법을 다윗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받는다고 주변 사람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주변 사람은 내 스트레스를 받아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스트레스 풀려고 죄 짓는 길에 들어서지 마십시오. 그 죄의 대가를 꼭 치르게 될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시고, 하나님 앞에서 소리지르시고,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스트레스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쌓아둘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스트레스를 쌓아 둘만한 공간과 여유가 없습니다. 스트레스는 꼭 풀어야 합니다. 다윗처럼, 건전하게 푸십시오. 스트레스를 잘 풀어야 하늘의 복을 받습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