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8'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10.18 대형교회는 왜 위험한가 1
  2. 2019.10.18 책 욕심

대형교회는 왜 위험한가

 

"전체주의나 독재국가는 주관적 관계를 소멸시키고 객관적 관계로만 사회가 유지되도록 획책한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아렌트는 사회를 존재케 하는 객관적 관계를 말하면서 동시에 인간적 유대관계인 주관적 관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객관적 관계란 상인과 구매자, 교수와 학생, 부모와 자녀 같은 관계를 말한다. 주관적 관계는 이러한 객관적 관계 사이에 있는 유대관계를 말한다. 객관적 관계는 맺어졌으나, 그들 사이에 유대관계가 없을 수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주관적관계, 즉 유대관계는 소멸될 수 있으나, 객관적 관계는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 자식 간에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그들의 관계가 객관적 관계인 부모 자식 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대형교회의 위험성을 본다. 대형교회는 그 규모와 구조로 인해 교인들 간의 유대관계, 즉 주관적 관계가 소멸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대형교회는 자연스럽게 전체주의나 독재국가 형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대형교회는 객관적 관계만이 존재하는 삭막한 조직이 되고 만다. 그러한 단점을 보완하려고 대형교회에서는 소그룹 모임 같은 것을 활성화시키지만 역부족인 이유는 그것이 교회의 지도자들, 특별히 담임목사와의 소통을 원활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 대다수의 교인들은 담임목사와 어떠한 유대관계도 가질 수 없다.

 

주관적 관계가 소멸되고 객관적 관계만 존재하는 조직이 왜 문제일까? 그것은 아렌트의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잘 드러나 있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 프로그램을 주도했던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이스라엘의 전범 추적자들에게 발각되어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뒤 재판을 받는다. 그 재판에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참관했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서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구상한다.

 

우리는 흔히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악마의 모습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관찰한 전범 아이히만은 매우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악이란 악한 사람에게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람에게서도 발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그러한 상황을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대입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검토가 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말했는데, 아이히만이 바로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객관적 관계만이 존재하는 전체주의 조직 내에서 반성적 사유(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능력)’를 하지 못하고,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조직의 명령에만 충실하게 복종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자그마치 600만명이라는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것이다.

 

마틴 부버는 그의 책 <나와 너 Ich und Du>에서 인간의 관계가 나와 그것(I-it)’의 관계에서 나와 당신(I-Thou)’의 관계로 진행되어야 함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다. 아렌트의 용어로 다시 표현하자면, 관계는 객관적 관계에서 주관적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관계에서는 어떠한 생명력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하버마스가 그의 책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간관계 사이에 소통적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고 전략적 행위만 이루어진다면 한 조직의 구성원은 그 조직의 이익에 희생당할 위험성을 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주의적 구조를 지닌 집단에서는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소통적 행위보다는 의도한 목적을 이루려는전략적 행위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이게 바로 대형교회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의 문제이다.

 

우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두 대형교회인 명성교회와 사랑의 교회의 사태를 바라보면서 의아해한다. 그렇게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이고 그렇게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왜 그 교회의 교인들은 그 교회의 지도자를 추종할까? 그 이유는 그 집단 내에서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소통적 행위보다는 의도한 목적을 이루려는전략적 행위가 지배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주관적 관계를 소멸시키고 객관적 관계 속에서 반성적 사유를 하지 못하고 객관적 관계에서 오는 책임만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구조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교회는 객관적 관계에서 주관적 관계로 그 관계가 발전해 나가야 하며,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소통적 행위 위에 의도한 목적을 이루려는전략적 행위, 즉 선교행위가 이루어져야 하는 민주적 공동체이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그 구조상 주관적 관계와 소통적 행위가 적극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형교회의 운명이 달렸다. 그러나 대형교회의 습성상 이 한계를 극복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조적 악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지혜가 더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나 아렌트와 교회론  (0) 2019.10.22
실리콘밸리의 철학  (0) 2019.10.19
공의회, 오리엔트 정교회, 동성애 문제  (0) 2019.10.12
나무를 사랑한다면  (1) 2019.09.24
I am OK  (0) 2019.09.22
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9. 10. 18. 06:20

책 욕심

 

나는 물욕심(物慾心)이 별로 없다. 목회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부분이다. 물욕심이 많은데, 그것을 참으면서 목회하는 게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런데 나는 물욕심이 없어서 그것을 참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무용한 것들을 좋아한다. , , 바람, 웃음, 농담, 이런 것말이다. 그렇다 보니, 좋은 집을 봐도 별 감흥이 없고, 좋은 차를 보아도 타고 싶은 욕심이 없다. 다행히 아내도 나와 비슷한 성품을 지녀(물론 아내는 나처럼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꽃 사다주면 핀잔만 듣는다.), 우리 가정은 물욕 때문에 고통 당하지 않는다.

 

나는 돈을 거의 쓰지 않는다. 별로 사고 싶은 것도 없고, 쓸 데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넉넉치 않은 생활비로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다만 아이들이 커 가니, 아이들의 교육비 정도는 부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유일하게 돈을 쓰는 때는 책을 살 때다. 학창시절, 엄마가 주는 용돈을 아껴, 매주 시집을 한 권 샀다. 내가 대학교를 다닐 당시 시집은 한 권에 5천원 정도 했다. 엄마가 하루에 용돈을 5천원 주셨는데, 하루에 4천원 정도 쓰고, 천원을 남겨 5일 모아 매주 시집 한 권을 샀다. 그렇게 소중하게 구입한 시집이라서 그런지, 지하철을 타고 등교와 하교를 하며 읽는 시는 왠지 모르게 꿀맛이었다.

 

나는 지금도 사고 싶은 책이 너무 많다. 그동안 수천권의 책을 샀고, 수천권의 책을 읽었지만, 아직까지 사서 읽고 싶은 책이 수천권이다. 나는 책을 살 때 알라딘US를 이용하는데, 그 사이트의 보관함에는 사고 싶은 책 수천권의 리스트가 보관되어 있다.

 

나는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책을 산다. 사서 읽고 싶었던 책을 주문하여 그 책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마치 애인을 기다리는 시간처럼 기쁘다. 그리고 마침내 책이 도착하면, 포장을 뜯을 때의 기쁨이란 연애편지를 뜯을 때의 기쁨과 같다. 당장 그 책들을 다 읽지 못해도, 두 손으로 받아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그리고 내가 돈이 생기면 책을 사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문화'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서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사는 것만큼 훌륭한 공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옛날에는 '도서상품권'이라는 것이 있어서, 누군가 그것을 선물해 주면 너무 좋았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도서상품권이 없어 약간 서운하다. 나는 '스폰서'를 가지고 싶은데, 마음껏 책 사보라고 스폰해주는 사람(또는 기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요즘은 스마트 폰이 발달하여 동영상이나 전자책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독서를 하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나는 아직도 마른 책장을 넘겨가며, 연필을 들고 글쓴이의 생각을 따라가며, 때로는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생각을 적어가며, 천천히 글쓴이와 대화하듯 독서하는 것을 좋아한다.

 

독서 경력이 쌓이고, 독서를 많이 하다 보니, 독서의 노하우도 꽤나 생겼다. 좋은 책은 마지막 장까지 독자를 이끄는 힘이 있고, 별로인 책은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같은 짚신이지만 매끄러운 짚신과 껄끄러운 짚신의 차이와 같다.

 

나는 독서를 할 때, 한 권의 책만 읽지 않는다. 대개 한 번에 5-6권을 동시에 읽는다. 독서 경력이 쌓이고, 독서의 노하우가 쌓이면 이렇게 된다. 나처럼 독서 경력이 많은 분들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대여섯권의 책은 대개 장르가 모두 다르다. 시집, 소설, 철학서적, 전공서적, 대중서적, 이런 식이다.

 

나는 독서를 하고 나면, 반드시 그 독서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 이게 독서의 백미다. 독서를 하면 영감이 솟는데, 솟아나는 영감은 나의 영혼 속에 찰나의 시간만 머물기 때문에, 부지런히 받아 적어야 한다. 게으른 자는 창조자가 될 수 없다. 그렇게 영감을 통해 받아 적은 글들은 정신 차리고 보면 도저히 ''가 썼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아름답다. 그것을 바라볼 때의 환희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블로그를 두 개 운영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손으로 읽은 낙서판>이다. 거기에 올라간 글이 합해서 1,350개 정도 된다. 아직 안 올린 글을 합치면, 2천개 된다.)

 

독서를 할 때 '문학책(, 소설)'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하다. 나는 어떠한 책을 읽을 때 문학을 인용하지 않은 작가의 책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문학을 인용하지 않으며 써내려 간 작가의 사유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학을 인용하지 않는 작가의 사유는 유연하지 않고 독선적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 수많은 욕심 중에 '책 욕심'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며칠 전,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무슨 행복으로 살아?" 나의 삶에는 여러가지 행복이 있지만, 무엇보다, '책 욕심'의 행복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그 행복을 여기에 적어본다.



'풍경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낚시 멀미 경험  (1) 2020.01.18
쏘나타  (0) 2019.11.05
중학교 추억 소화  (1) 2019.09.02
엄마, 사랑해  (0) 2019.05.16
나이키와 고무신  (1) 2019.03.13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