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와 교회론

 

플라톤은 정치철학 분야에 있어 기여한 바가 크다. 그의 책 <국가>는 정치철학 분야에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거기에 플라톤은 '철인왕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철인(철학을 하는 사람)이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 이유는 철인이야 말로 진리의 원형인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한 자이기 때문에, 진리의 정치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을 비판한다. 그가 정치의 본질을 간과하고 진리의 정치를 주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의 본질은 정치란 진리 실현의 장이 아니라 인간 복수성(아렌트의 용어다)에 기반을 둔 다양한 의견의 각축장이라고 말한다.

 

아렌트가 플라톤의 진리의 정치에 맞서 제시하는 정치 개념은 '의견의 정치'. 아렌트에 의하면 의견이란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과 고유한 처지를 따라 형성된 것이다. 인간의 복수성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존재이고 정치란 각 사람의 의견을 모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아렌트가 가장 비판하는 내용은 '진리주장의 폭력성'이다. 그녀는 현실 정치에서 진리를 적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현실 정치에 진리를 적용하면 폭력만이 발생할 뿐이라고 말한다. 현실에서 진리를 완전히 파악하고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대개 교회를 '진리 실현의 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로 목회자들에게서 그러한 생각이 만연하다. 마침 그러한 성경구절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는 말씀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8:32)는 말씀이 대표적이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 교회는 자기의 정체성을 '진리 실현의 장'으로 여길 가능성이 크다.

 

아렌트는 철인왕이 진리의 이름으로 국민들을 길들이려고 노력하고, 그러다 보면 거기에 폭력이 나타날 개연성이 높다고 비판한다. 진리의 정치가 작용하면 지도자와 일반 시민들 사이에 지배자와 피지배가 관계가 형성될 뿐 아니라, 수직적 위계질서가 생겨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성은 자신을 '진리 실현의 장'이라고 인식한 교회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너무 높다. 목회자는 스스로를 '철인왕'으로 생각할 여지가 높다.

 

진리의 정치의 이러한 위험성을 안다면, 그리고 인간의 복수성의 중요성을 안다면,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진리 실현의 장'으로 두지 말고, '의견 정치의 장'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목회자는 자신을 철인왕(또는 믿음왕)으로 자리매김할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산파'로 인식하는 게 좋다. 그래서 목회자는 교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도록 도와 진리를 발견하게 하고, 각자의 의견의 민주적 교환을 통해 가장 진리에 가까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의견의 정치'를 실현하는 게 좋다.

 

그러나 대개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목회자) '의견의 정치'를 꺼려한다. 의견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시끄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시끄럽지 않고 질서 있게 조용히 운영되는 것은 교인들의 바람이라기 보다 교회 지도자(목회자)의 바람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침묵이 강요될 때가 많다. 교회를 시끄럽게 하면 사탄의 하수인으로 몰려 어려움을 당할 뿐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의견의 정치'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의견의 정치를 실현하려면 덕을 갖춘 시민성을 견지해야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의견의 정치가 실현되려면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리스도의 덕'을 갖춘 성숙한 교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 성숙함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의견만 개진하려 든다면, 오히려 '진리의 정치'를 펼치는 것만 못하게 교회 공동체가 산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교회 구성원은 자신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개진하며 서로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렇게 교회 공동체를 성숙하게 세워갈 수 있다면, 그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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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0. 22. 02:21

베드로의 증언에 긴박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2:22~41)

 

주님,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몰라보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증언과 같이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였습니다.

주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그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안절부절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자는

그들과 똑같이 오늘도 예수를 부인하며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입니다.

마치 왕이 없는 자들과 같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임을 깨닫고

그의 주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된다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의 사건과 함께 임하신 새로운 창조의 세계,

종말을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22. 02:18

우리가 어찌할꼬

(사도행전 2:22~41)

 

요즘은 카카오톡 안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문맹률이 낮고, 스마트폰(컴퓨터) 보급률이 높기 때문이다. 문자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근본적으로 이러한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자만큼 소통하기에 편리한 것이 없다. 그런데, 문자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아낼 수 있지는 못하다. 그게 문자의 한계다. 가령, 카톡을 할 때 문자로 미묘하고 깊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다 담아내기 힘들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이모티콘이다. 이모티콘은 문자의 그러한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게 끔 도와준다.

 

문자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때, 이모티콘을 적극 활용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문자는 보낸 이의 감정보다는 받는 이의 감정이 더 쉽게 개입되기 때문이다. 문자 소통 방법은 문자를 보낸 이의 감정과 상관없이, 받는 이의 감정에 따라 문자가 해석될 여지가 너무 높다. 그래서 보내는 이는 자신의 감정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이모티콘을 활용하면 좋다. 그래야 문자 소통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며 소통에서 생기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 있다.

 

성경은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고 성경 문자에 이모티콘이 들어가 있어서 그 문장이 담고 있는 감정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례로, 본문에서 베드로의 설교가 끝난 직후 그의 설교를 들은 예루살렘의 거류민들(유대인들)이 한 말을 적은 우리가 어찌할꼬의 문자에서 우리는 어떠한 감정이 느껴지는가? ‘뭐 어쩌라고?’의 감정이 느껴지는가? 아니면,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질문처럼 느껴지는가? 아니면, 급박함이 느껴지는가? 문자 소통은 화자보다는 청자의 입장에서 해석될 여지가 너무 많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다. 상상력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구성한다. 인간이 지금 이렇게 동물과 차원이 다른 문명 세계를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상상력때문이다. 그 가장 큰 두 가지의 예가 국가와 돈에 대한 상상력이다.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국가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국가와 돈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개념적인, 상상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국가를 실재처럼 상상하고, 돈을 실재처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국가를 이루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 생명을 바친다. 굉장히 기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본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을 동의한 유대인들이라고 상상하며 말씀을 들어보라.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상상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면, 베드로의 증언(설교)을 듣고 나면 어떤 마음이 들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입에서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질문이 동일하게 나올 것이다. 왜 그런가?

 

본문은 성령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상대로 행한 증언(설교)이다. (설교는 태생적으로 증언이다.) 예루살렘의 주민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던 자들(그리스도인)’에게 발생한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현상을 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이 어찌된 일이냐?”(2:12). 이에 대해 베드로는 열한 사도와 서서 이 일이 어찌된 일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 앞에서 증언(설교)을 한다.

 

베드로가 증언(설교)을 위하여 인용하는 성경은 요엘서이다. 요엘서는 말세(종말)’에 대한 예언을 다루는 선지서이다. 요엘 선지자는 종말에 벌어질 일들에 대하여 말한다. 종말에는 하나님의 영(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고, 하늘과 땅에 어떠한 기사와 징조들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참된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베드로의 증언의 핵심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승천을 종말론적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사건은 종말의 시간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깨달음이고 생각의 전환이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줄 알았는데 거꾸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고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혁명)’이라고 부른다. 베드로는 지금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예수의 사건은 시간의 질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종말이 이 시간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우리는 더 이상 그냥 시간을 살지 않고, 종말의 시간을 산다.

 

종말의 시간이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한 새 창조의 시간이다. (종말은 멸망의 시간이 아니다. 심판은 존재를 새롭게 하기 위한 과정이지, 존재를 괴롭히는 멸망의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부활은 하나님이 전 우주에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사망을 무력화시킨 사건이다. 더불어 예수가 누구인지 드러나는 사건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다!

 

베드로는 이 일을 다윗이 예언자로서 증언했다고 논증한다. 그 논증을 위해 쓰인 말씀은 시편 16편의 말씀이다.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시편 16편의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윗은 고백하기를,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하게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9-10)라고 한다. 베드로는 이 부분이 다윗의 예언이라고 말한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했지만, 그의 고백대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게 아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다윗은 죽지 않아야 한다. 다윗은 죽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말씀이 다윗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 거룩한 자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 거룩한 자당신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자(하씨드카)’라는 뜻이다. 또한 여기서 은총은 문맥상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몸과 영혼을 분리해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지금 증언한다. 하나님께 그 은총을 받은 자, 주의 거룩한 자가 바로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증언(설교)를 통해서 예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밝힌다. 첫째, 부활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말한다. 둘째, 부활을 통해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 지금 오순절 아침에 여러분이 본 사건(광경),은 하나님이 여러분이 십자가에 위에서 죽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자신의 우편에 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성령을 받아, 모든 육체, 모든 만민에게 부어주셨다!” 이게 바로 요엘서와 시편에 예언된 것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큰 일이라는 것이다. 성령이 오신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및 그의 주 되심의 사건에 대한 증거이다.

 

,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처음 시작할 때, 주문했다. 자신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것을 동의한 유대인이라고 상상해 보라고. 그러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의했던, 또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던 청중들이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다! 그들이 주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그들은 큰 일 난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말하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태복음 21:33-40)와 같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태복음 20:1-16)과 헷갈려서는 안된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천국이 무엇인지를 비유를 설명하신 것이고,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유대 지도자들과의 권위 논쟁을 할 때 하신 비유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우선시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런데,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그들이 행한 일이 어떤 일인지 낱낱이 드러난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들을 농부들에게 주고 떠났다. 시간이 지나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 열매를 얻으려고 사람을 보냈다. 처음에는 종을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종을 잡아 죽였다. 그렇게 몇 번을 주인은 종들을 보내 포도 열매를 얻으려 하지만, 농부들은 그 종들을 다 죽인다. 그러자 주인은 마음을 바꾸어 자신의 아들을 농부들에게 보낸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라고 말한 뒤, 주인의 아들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여버린다. 이 이야기를 마치며 이런 질문이 뒤따른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여러분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농부들이고, 마침내 주인이 포도원을 찾았을 때, 여러분은 어떠한 반응을 보이겠는가?

 

베드로의 증언(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이렇게 반응했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 말이 어떻게 다가오는가? ‘뭐 어쩌라고고 다가오는가?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지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질문처럼 다가오는가? 아니면, ‘아 큰 일 났구나.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 망했구나.’라는 탄식이 섞인 급박함으로 다가오는가? 이러한 급박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사건이 여전히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사건이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는 차원이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급박하여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38). 이것은 대단한 역전이다. 무지 가운데서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자신들이 죽인 바로 그 예수가 자신의 구원자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성경이 쓰여진 이유는 바로 예수의 사건을 소상히 보면서 우리에게도 무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이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의 급박한 질문을 던졌던 것과 동일한 질문을 던지게 끔 하기 위해서이다.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또는 그 증언을 동일하게 전하는 설교자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가 어찌할꼬?”의 긴박한 마음을 가지게 된 분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려 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사망 권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 받은 자 답게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라. 죽음이 두려워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죽음이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삶을 살라. 그러다 죽어도 괜찮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성령의 능력 안에서 부활하게 될 테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난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너무도 기쁘고 감사하다. 이렇게 멋진 삶을 살게 해 주신 주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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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