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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0.29 종교개혁의 원리가 부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
  2. 2019.10.29 여인들의 반란
기도문2019. 10. 29. 05:42

종교개혁의 원리가 부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

(출 1:15-2:10)


주님,

생명을 구원한 자가 누구인지 보게 하소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바로는 생명을 죽이려 했지만,

아무런 힘이 없던 산파들과 모세의 어머니, 그리고 바로의 딸,

즉 여인들은 생명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여인들에게 나타나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원리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가

그 여인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이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여인들에게 주셨던 신앙의 가치들을 부어 주셔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이 이루지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29. 05:38

여인들의 반란

(출애굽기 1:15-2:10)

 

종교개혁주일이다. 종교개혁주일은 우리 개신교인들에게는 참 특별한 날이다. ‘개혁을 했다는 말은, 살면서 뭔가 잘못된 것을 발견했다는 뜻이고,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뜻이고, 그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뜻이다. 서양사에서는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는 말이 굉장히 넓은 의미에서 쓰인다. 종교개혁은 단순히종교하나 만의 문제를 발견해서 개혁한 사건이 아니다. 중세의 삶에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와 신앙의 문제만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의미를 다루고자 한다.

 

종교개혁의 3대 원리는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믿음 sola fide”, 그리고 오직 은혜 sola gratia”이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러한 개혁의 원리를 말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이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던 역사적 맥락은 없어지고, 우리에겐 위의 세 개의 개혁의 구호만 남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구호만 외칠 뿐, 그 구호가 담고 있는 개혁의 의미를 묻지 않고, 그 구호가 신앙을 규정해 주는 배타적 기준으로만 자리잡았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오직 성경을 외치지만, 살면서 삶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의 삶을 가꾸어 나갈 때,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으며, 무엇을 삶을 가꾸어 나갈 자양분으로 삼는가? 직접적인 형태로 질문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종이쪼가리에 불과한가, 아니면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생명책인가? 무엇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게 하는가?

 

또한, ‘오직 믿음을 외치면서, 우리는 정말 믿음 있는 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히브리서에 이르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2)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정말 우리의 삶의 원리를 믿음으로 삼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개혁은 구호가 아니라 현실이다. 개혁은 현실을 바꾸겠다는 의지이다. 개혁은 구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건 아닌 것 같아!’라고 하는 현실인식과 (생명)의 가치를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와 사명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 개혁은 성공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삶의 가치를 지니고 살아가는가? 다른 말로 표현해서, ‘왜 사는가?’ 우리는 삶의 가치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 즉 왜 사는지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한심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는다. ‘왜 사니?’ 스티브 잡스 이야기를 해야겠다. 잡스는 굉장히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세운 회사에서 해고를 경험했다. 그러다 다시 그 회사에 취직한다. 11년 만에 애플로 다시 돌아온 잡스는 직원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자신의 핵심 가치, 회사의 핵심 가치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한다. 애플의 핵심 가치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다니는 Fitness 센터(24hous Fitness)의 사명이 이렇다. 러닝머신 위에 있는 TV에 매일 같이 뜬다. “We are passionate to help people change their lives through fitness.” 나는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한다. 그들의 사명이 정말 맞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이유도 삶을 바꾸어 보려고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나의 사명,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도 묵상한다. 뛰면서 묵상한다.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내려놓을 수 없는 엄청난 신앙의 가치가 있다. “신앙을 가지면 자기의 인생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본문은 신앙을 가진 이들의 믿음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본문은 신앙이 있는 자,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한 자들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대결이 그려지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는 애굽의 지존 바로()였고,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는 힘 없는 여인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힘 센 애굽의 왕(바로는 이름이 아니라, 애굽 왕의 칭호이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지만, 힘이 없던 여인들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다. 우선 등장하는 여인들의 이름은 십브라와 부아(Shiphrah and Puah)’이다. 애굽 왕은 힘 없는 히브리 여인들이었던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이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16).

 

한 나라의 왕에게서 이러한 명령을 받으면, 보통 사람 같으면 왕의 말을 두려워 하여 왕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애굽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다”(17).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다른 누가 아닌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만을 두려워 하는 것! 애굽 왕은 자신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며, 갓 태어난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생명의 출산을 돕는 산파들은 생각이 달랐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은 애굽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나는 남성이지만, 나는 자주 여성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성 산파들이 애굽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한 이유는 그들의 생명에 대한 원초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 아이를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키워 산고와 함께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이 갖는 생명의 경험과 그러한 경험을 전혀 하지 못하는 남자가 갖는 생명의 경험은 절대 같을 수 없다. 남자가 철이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물론 여성이 사회성이 부족한 이유는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렇다’,는 속설도 있다.) 여성들은 남자들보다 생명에 대한 책임 의식이 훨씬 높다. 그래서 생명을 돌보는 일에 대한 여성의 책임은 위대하다.


애굽 왕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산파들을 불러 위협한다. “왜 내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려 주었느냐?”(18). 왕의 위협 앞에서도 여인들의 기지가 대단하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19).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왕 앞에서도 이렇게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 산파들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Fear of God)’ 때문이었다.


여기서 누가 생명을 보듬고 살리고 있는가? 스스로 힘이 있다고 생각한 애굽 왕이 생명을 보듬고 살리고 있는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생명을 헤치고 죽이려 했다. 생명을 보듬고 살리는 존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한여인들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 구원의 위대한 역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 여인들의 믿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그 신앙에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애굽 왕에 대한 여인들의 반란을 이끌어낸다.

 

애굽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여, 생명을 보듬고 지켜낸 산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떠한 은혜를 내리시는지 보라.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신지라”(20-21). 여기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고 할 때, ‘그들의 집안은 영어로 ‘the house of the mother’이다. 우리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상한 속담이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성경은 완전히 다른 말을 한다. 그들의 집안이 잘 된 것은, 그들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어머니 때문에 잘 되는 집안, 여성들 때문에 잘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본문에서 또다른 여인을 본다. 그의 이름은 요게벳이다. 히브리 여인들이 가진 믿음은 요게벳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산파들은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중년의 여성들이었겠지만, 임신한 요게벳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산파들에게는 삶의, 그리고 신앙의 연륜이 있었겠지만, 요게벳은 그러한 것이 별로 없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러나, 요게벳 또한 산파들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신앙을 가진 히브리 여인이었다.

 

그도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애굽 왕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리고 세 달 동안이나 살려 두고 아기를 감춘다. 그러나 더 이상 아기를 감출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무시무시한 결단을 한다. “아기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에 떠나 보낸다. 이것은 아기를 죽음에 내모는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아기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다. 본인이 데리고 있으면 아기는 죽게 되겠지만, 하나님께 맡기면 살게 되리라는 믿음에서 온 결단의 행위이다.

 

신앙은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돌보려는 의지이다. 부모의 가장 큰 죄는 자식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자신이 자식을 좌지우지 해보겠다고 하는 의지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보지 못하니, 신앙은 점점 수그러들고, 삶의 고민만 늘어가는 것 아닌가.

 

요게벳의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경험하게 이끄는지 보라. 본문에는 또 한 명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바로의 딸(하젭수트 / 성경에는 그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이집트 문헌을 통해 학자들이 밝혀낸 이름이다.)이다. 바로의 딸은 누구보다도 애굽 왕의 명령을 준행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나일강에 발견한 히브리 남자 아기를 죽이지 않고, ‘건져내어살린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바로의 딸이 나일 강 가를 거닐 때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5-6).

 

히브리 사람의 아기인 것을 알았다면, 상식적으로 바로의 딸은 그 아기를 죽였어야 한다. 그러나, 그 아기를 보았을 때 바로의 딸의 마음은 강팍해진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겼. 이것은 요게벳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요게벳이 어떻게 바로의 딸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나. 바로의 딸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다!

 

세상을 바꾼 일,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는 이렇게 힘없는 여인들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힘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여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신앙이 세상을 바꾼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가치이다.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무엇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신앙)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담대함을 주고, 지혜를 주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과 생명 자체를 맡길 수 있는 믿음(보이지 않지만, 어떻게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을 준다. 바로 그 믿음이 세상을 바꾼다.

 

나는 이 이야기가 종교개혁의 가치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한 개혁이라고 생각한다. 1) 산파들은 오직 성경의 가치를 구현했다. 그들은 애굽 왕의 말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했다. 2) 요게벳은 오직 믿음의 가치를 구현했다. 요게벳은 아기를 나일강에 띄우면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 아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다. 3) 바로의 딸은 오직 은혜의 가치를 구현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바로의 딸은 아기를 죽이지 않고 살렸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아기 모세는 물에서 건져냄의 은혜를 입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권했다.

 

우리는 신앙의 가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신앙이 나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오직 성경!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 하라! 오직 믿음! 하나님께 맡기라! 오직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진 신앙의 가치를 힘써 지켜 나가자. 하나님은 힘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세워 가시는 게 아니라, 신앙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세워 가신다.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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