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31'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10.31 좋은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2. 2019.10.31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3. 2019.10.31 할로윈
기도문2019. 10. 31. 07:13

좋은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시편 142:1-7)

 

주님,

기도할 때

주님 앞에 전제를 붓듯 토로하며 기도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가 예배로 승화될 줄로 믿습니다.

오른쪽을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우리의 연약한 인생을 기억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은 외롭고 쓸쓸하고 힘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오른쪽에서 분깃이 되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마음이 상하여 죽을 지 모릅니다.

주님, 우리의 분깃이 되어 주소서.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셔서

구원 받은 거룩한 자가 되어

우리를 둘러싼 의인들과

주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게 하소서.

주님께서 우리의 분깃이 되어 우리를 구원해 주심을 믿고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의 삶을 살게 하시어

상한 영혼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좋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31. 07:12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시편 142:1-7)

 

한국교회가 실패하고 사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이유는 만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성육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신앙이다. 그런데, 어느덧 한국교회의 신앙은 (말씀)’말 있고 육신이 없어졌다. 형체가 없는 말은 유령일 뿐이다. 형체가 없으니, 거룩한 것 같고 신령한 것 같으나, 결국 그 실체가 없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실체를 만들어 퍼뜨린다. 말만 난립하고 있다.

 

복음은 성육신을 말하는데, 실제 기독교인의 삶은 탈육신을 지향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은 일상의 언어를 요구하는데, 실제 기독교인은 자신들만의 은어를 사용한다. 은어를 아는 사람들끼리는 좋고, 은어를 알아들으니까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는 지는 몰라도, 결국 이것은 성육신이 되지 못하고 탈육신이 된 유령의 복음을 생산하고 만다.

 

본문은 마스길이다. 잘 구성된 지혜의 시라는 뜻이다. 이 시는 기도이다. 전형적인 탄식의 기도이다. 다윗을 내세워, 기도를 구체화시킨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엔게디 동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라고 구체화시킨다. 이렇게 구체화시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더 자극시켜 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이 기도를 구체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자는 소리 내어기도한다. 2절에서 토로라는 단어를 쓰는데영어로는 ‘pour out’이라는 단어를 쓰고, 구약성경적 의미는 전제를 말한다. 기도자는 소리 내어 기도를 하는데, 마치 전제를 붓듯이 하나님께 쏟아 놓는 것이다. 기도자의 기도는 그냥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예배의 의미를 담은 기도인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이렇게 전제를 붓듯이 하나님께 쏟아 놓을 때,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예배가 된다는 것을 알면 좋다.

 

기도자의 절망은 매우 깊다. 3절에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했다는 말은 히브리어의 아타프를 번역한 것인데, ‘아타프약해지다, 사라지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기도자는 그의 영, 즉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용기, 열정 등이 약해져서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것만큼 절망이 없다. 사람은 몸이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마음이 힘들어서 죽는다. 용기와 열정이 사라지면, 사람은 급격하게 약해진다.

 

기도자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유대인들에게 오른쪽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기도자는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돌보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오른쪽은 법정에서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변론하시기 위해서 서시는 자리이다. 가난한 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스스로 도울 힘도 없고, 도움을 청할 여력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냥 억울하게 죽고 만다. 우리가 가난한 자 되기를 싫어해서 그렇지, 사실은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기도자는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세 가지의 도움의 손길이 없다고 호소한다. 첫째, 아무도 기도자를 아는 사람이 없다. 여기서 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나카르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의 뜻이다. 기도자는 하나님께 호소한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셨으면 하고 간구한다.

 

둘째, 기도자에게는 아무런 피난처가 없다. 아무도 피난처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적들이 죽이려고 쫓아오는데, 아무도 숨겨주는 이가 없다면, 죽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셋째, 기도자에게는 아무런 돌봄이 없다.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 매우 적막한 인생이다. 외로움에 죽을 것 같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기도자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께서 기도자의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분깃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분깃은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게 땅 분배를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분깃은 분배받은 땅이라는 뜻이다. 분배받은 땅이 없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과 같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 모른다. 그러나, 기도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분깃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는 없을까? 우리는 하나님께 분깃을 달라고 요구하지, 하나님 자체가 분깃이라고 고백하지 못한다.

 

이 세상의 삶은 마치, ‘분깃을 차지하려고 혈안인 전쟁터 같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다. 분깃을 차지하여, 생명을 보존하려고, 우리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가. 그러한 모습을 스스로 돌아볼 때, 자신이 괴물 같기도 하고, 초라하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시라는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정말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선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기도자는 탄식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분깃이 되어 주셔서, 생명을 보존해 주실 것을 믿는다. 기도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욕망의 표출로 보면 안 된다. 하나님 잘 믿으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벌이는 분깃 전쟁에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셔서,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살게 해 주실 것이라는 욕망의 표출로 보면 안 된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눈을 구체적인 삶의 현실로 돌려야 한다. 기도자가 탄식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는 외롭고 쓸쓸하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오클랜드 주유소 정차 중 만난 흑인 아저씨 이야기 다짜고짜 차를 닦아준 이야기 무슨 대가를 바라면서 한 건 아니지만, 끼니를 얻어보고자 한 최선의 행위 그래서 돈을 약간 건네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육신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 말씀이 임한 성육신의 몸이 되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구성원들끼리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서로 지켜보아야 한다. 피난처가 되어 주어야 한다. 서로 돌봐 주어야 한다.

 

기도자가 고백하는 마지막 기도가 마음에 다가온다.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7절). 의인들이 누구인가? 관심 가지고 지켜봐 주고 돌봐 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전혀 없었는데,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생긴 것 자체가 구원 아니겠는가. 의인은 쉬운 말로 하면, 좋은 사람들이다. 좋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 그것만큼 삶을 살아가는 데 든든한 언덕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의 삶에, 나를 둘러주는 좋은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든든한 언덕이 되기를 바란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줄 때, 우리의 삶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지 않겠는가. 말만 하지 말고,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의 삶,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좋은 사람이 되어 주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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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Halloween is just around the corner

[할로윈]

 

할로윈 때가 되면 참 재밌는 현상이 벌어진다. 할로윈을 지키면 안 된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저항이 인터넷을 떠돈다. 마치 그들은 할로윈 때 나타나는 '유령/귀신'들 같다.

 

할로윈을 제대로 알자며,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매우 조악하다. 켈트족의 문화를 운운하며, 할로윈이 마치 '인신제사'를 조장하는 양, 그래서 할로윈을 지키면 참된 기독교인이 아닌 양, 할로윈을 지키지 않는 것을 통해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켜내야 하는 양 떠든다.

 

나는 실로 궁금하다. 그렇게 조악한 논리로 할로윈을 통해 자신들의 기독교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은 '유령'같은 무리들이 누구인지를!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기독교 절기 중에서 가장 지키면 안 되는 절기는 성탄절과 부활절이다. 예수님이 언제 태어나셨는지, 알려진 바 없다. 예수님이 언제 부활하셨는지, 알려진 바 없다. 성경은 그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와 부활 이야기를 '신앙고백적'으로 전할 뿐이다.

 

성탄절과 부활절은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신학화 작업을 통해, 그리고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있는 곳(로마/유럽)의 문화를 통해 제정되었을 뿐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성육신의 복음이지, 탈육신의 복음이 아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언제나 그 시대와 그 지역의 문화에 성육신 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떠도는 유령이 되지 않게 하려면, 기독교의 메시지는 부단히 그 시대와 그 지역의 '일상의 언어'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 일상의 언어가 바로 문화이다.

 

할로윈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Saint Evening이라는 뜻을 이미 담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켈트족에게 전파되었을 때, 농사의 풍성한 결실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그들의 전통에 복음의 메시지가 담겼다. 그래서 농사의 성공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유령들(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은 받아들였다.

 

만성절(All Saints Day)은 켈트족의 할로윈 문화를 통해 탄생했다. 켈트족의 할로윈 문화가 없었다면 물론 다른 문화를 통해서 만성절이 탄생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만성절은 켈트족의 문화를 통해 탄생되었다.

 

신화의 세계 속에 살았던 고대 사람들에게 농사를 짓고 그 풍성한 수확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마음이다. 아이를 임신한 뒤 순산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엄마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담긴 풍습이 할로윈이다.

 

21세기에 할로윈이 귀신을 물리치는 주술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할로윈은 그저 자본에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할로윈 때 팔려나가는 할로윈 물품은 1조원이 넘는다. 실로 어마어마한 시장이다.

 

온갖 탐욕에 물들어 맘몬의 유혹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작금의 기독교가 할로윈을 '귀신의 축제'라며 거부하는 것은 실로 코미디 같은 현상이다. 할로윈의 이교도 풍습에 자신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지 않겠다는 것일 뿐, 탐욕에 물든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의 탐욕을 얼마나 채우려 기도하는가.

 

보수 개신교인들은 할로윈을 더욱더 폄하하기 바쁘다. 시장의 자유를 그토록 수호하기 위하여 사회의 보수세력과 야합을 일삼는 보수 개신교 세력이 할로윈을 거부하는 것은 정신분열적 행동일 뿐이다.

 

10 31일은 개신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날이다. 만성절 전야제이기도 하지만, 종교개혁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복음을 일상의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까지 했다.

 

할로윈은 기독교인들이 지키면 큰 일 나는 마귀의 행사가 아니라, 기독교의 메시지를 '일상의 언어(문화)'로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 기회를 놓치고, 할로윈 문화를 배척만 한다면, 할로윈 문화를 즐기는 일반 대중은 자신들의 일상의 언어로 복음을 들을 기회를 또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할로윈이 기독교 전통에서 기독교의 성인(Saint)을 기리는 날인 것을 안다면, 할로윈에 세상 사람들은 귀신 분장을 하여 '하하호호'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기독교인들은 성경 속의 인물들(성인들) 복장을 하여 그들과 어울리며 복음을 전할 기회를 삼는 게 더 현명한 전략일 것이다.

 

할로윈(만성절) 11 1일인 이유는 히브리서 11 1~40절에 근거해서 만성절을 제정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기에는 '믿음으로 살다간' 기독교의 수많은 '성인들'이 등장한다.

 

할로윈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서구 문명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할로윈의 파도를 피할 수 없다. 파도는 피해서 피해지는 게 아니라 타고 넘어야 피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는가, 아니면 기독교인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은어를 사용하는가. 할로윈이 복음을 일상의 언어로 바꾸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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