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신학]

 

정치신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인류 역사가 모더니티(Modernity)를 거치면서 공공영역에서 '종교'를 몰아낸 행위를 뒤집는 것이다.

 

이성과 과학의 힘에 밀려 공공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난 '종교'는 더 이상 공공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의견'을 내기 힘들어졌다. 공공영역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더이상 종교의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서는 현대 사회에 깊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공공영역에서 더 이상 종교의 지혜를 듣지 않게 된 것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특별히 허무주의의 문제, 물질의 노예가 되는 문제, 환경파괴의 문제 등)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맞닥뜨린 '파국' 앞에서 다시 생명의 가치를 되살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공공영역에서 종교의 지혜를 발현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해졌다.

 

정치신학은 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정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전부터 '두 왕국 이론'은 이 세상에 마치 두 왕국(교회와 정부)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하고, 두 영역 간의 파워게임이 발생하는 것처럼 사유되어 왔으나, 그것은 '두 왕국 이론'에 대한 비참한 오해이다. 이러한 조악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적대적으로 싸우고 있다.

 

정치신학은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어떻게 견인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종말론적 정치 비전이다. '주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고백은 이 세상에 대한 거부나 저항이 아니라, 우리가 두 발 딛고 사는 이 땅, 이 세상의 나라에 대한 긍정이며, 이 땅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이다.

 

정치신학은 이 죄악 많은 세상에 대한 비판이나 저주나 멸망의 선포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랑의 보듬음이다. 공공영역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한복판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끔 공공영역을 이끄는 것이 정치신학이다. 그러므로 요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신학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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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형도의 시 '소리의 뼈']

 

김교수님의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드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1989년 3월 7일 새벽, 29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기형도, 그리고 그가 남긴 시는 그 이후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유고시집으로 발간된 <입 속의 검은 잎>을 읽는 것은 그당시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의 시가 유명해진 것은 그의 시집의 제목을 정하기도 하고 그의 시에 대한 평론을 쓴,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 김현의 공로가 큽니다. 김현은 기형도 시에 녹아 있는 '죽음'의 모티브에 주목했고, 그래서 시집의 제목도 '입 속의 검은 잎'이라고 정했죠. 기형도의 시 '입 속의 검은 잎'이 그의 시 세계를 대표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기형도의 시는 한국 예술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시 제목을 딴 영화도 두 편이나 있습니다. "봄날은 간다"와 "질투는 나의 힘"이 그것이죠. 그리고 그의 시 "우리동네 목사님"은 '진보적인' 목사님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기도 했죠.

 

위의 시 "소리의 뼈"에 등장하는 김교수처럼, 때로는 저도 강단에 올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내려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가 말했듯이, 설교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설교'를 통해서 말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불완전하고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그래서 매주 '설교'를 해야하는 목회자로서, 불가능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늘 불안한 마음과 부족한 마음,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가 설교하려고 주일 강단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려오면, 교회가 갑자기 술렁대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심정으로 매주일 강단에 섭니다. 내가 지금 뭔가 설교를 하고 있으나, 나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심정. 나는 침묵할테니,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라는 심정. 우리 모두, 설교 시간에 발생하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집중하는, 좋은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침묵해야 하는데, 오늘도 말이 많았군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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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 문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큐티의 영향으로 성경을 '구절구절' 읽고 묵상하는 데 익숙하다. 구절구절을 읽다 은혜되고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는 구절에 밑줄을 진하게 긋고, 읊조리고, 외우고, 흐뭇해한다. 그리고 그 말씀 구절을 붙들고 하루를 승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구절구절 읽고 큐티하는 방식은 '은혜'가 될지는 몰라도 신앙의 성장을 가져오지 못한다. 한국교회가 영적인 성장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성경읽기 방식을 바꿔야 한다. 큐티식 구절구절 읽기 방식에서 벗어나 성경 각 권마다 발생하고 있는 목회적 또는 신학적 상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저자가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 지를 면밀히 살펴 봄으로써 현재 우리의 삶에서 또는 역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적용하여 삶과 역사를 조망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는 성경읽기를 해야 한다.

 

전체를 조망하는 성경읽기는 하루 아침에 되지 않는다. 인내와 열심을 가지고 믿음의 경주를 달리듯 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이 믿음의 경주에서 낙오되는 구성원이 없도록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

 

믿음의 성장은 나이 먹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세심한 돌봄과 끈질긴 인내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앙의 성장을 일으키는 성경읽기가 아닌, 하루 반짝 은혜만 받고 마는 성경읽기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그런 성경읽기로는 이 악의 시대를 건널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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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발전]

 

이성의 발전 역사를 보면, 이성은 사물(자기 바깥의 존재)을 '파악'하는 기능을 가지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파악'은 분석해서(또는 분해해서 / 조각조각 나누어) 손에 쥔다는 뜻이다. 이성의 파악 능력은 인간이 사물을 지배하는 능력을 갖게 해주었다. 즉, 인간이 사물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입장에 올라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이 지닌 '이성의 능력' 때문이다.

 

그런데, 이성의 발전이 가져온 결과는 참담해 보인다. '사물'을 조각조각 내서(파악해서) 그것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고, 이성을 가진 인간은 우쭐해졌을지 모르나, 사물이 가진 '신비'는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인간의 마음과 현실을 황폐하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 파악해서 자기 아래 둔 존재에게서 '황홀감'을 느끼거나 '경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은 사물을 활용하거나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게 만드는 일에는 탁월해졌으나, 사물을 자기의 대화상대로, 즉 친구로 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한 없이 외로운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성의 발전을 되돌아 보고, 이성을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사물을 지배하기 위해 이성을 발전시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 (외롭게)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인간은 이성을 발전시키되, 사물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무엇보다 사물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그 사물과 거룩한 사귐을 갖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일찍이 신앙의 선조(선배)들은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믿음은 이성의 반대말이 아니라, 이성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이다. 믿는다는 것은 사물을 파악하여 자기 아래 두는 행위가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거기에서 신비를 발견하여 그 신비 안에 감추어진 신적 아름다움과 거룩한 사귐을 갖는 것이다.

 

인간이 이 우주에서 외롭게 쓸쓸히 죽어가지 않으려면, 이성을 버리고 믿음으로 회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발전시키되 믿음을 지향하는 이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신비한 이 세계는 '파악'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장준식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명칭의 의미]

 

'무기원'을 상정하는 온당한 이름은 '성부'입니다.

그리고 '무기원'을 지닌 낳음을 받은 자의 합당한 명칭은 '성자'입니다.

또한 무기원적으로 생기거나 발출 혹은 유출하는 존재의 적절한 이름은 '성령'입니다.

The Proper Name of the Unoriginate is Father, and that of the unoriginately Begotten is Son, and that of the unbegottenly Proceeding or going forth is The Holy Ghost.

(Gregory of Nazianzos, Fourth Theological Orations, 19)

.........................................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명칭을 '인간적인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안 된다. 예수가 하나님의 '자식'이어서 '성자'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여서 '성부'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성부'와 '성자'의 개념은 신학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본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더욱이, '성부'와 '성자'의 개념은 기독론의 발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기 위해서 고안된 언어이다.

 

성자를 '독생자(only begotten son)'이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님에게 자식이 단지 한 명 뿐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독생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기 위해 고안된 언어이다. 하나님에게 '낳음을 입은 자'는 오직 '성자' 밖에 없다. 그래서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질을 갖는다. 즉, 성자는 하나님이다.

 

성령에게는 'unbegotten'이라는 용어가 붙는다. 이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본질이기는 하나, 성자와 다른 위격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과 예수의 신성(Godhead)을 '성부'와 '성자'로 표현하는 것은 가부장적 표현 방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명칭을 굳이 여성적으로 바꾸려 한다면, '성모'와 '성녀'로 바꾸어야 할까?

 

'성모'는 이미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어진 명칭이다. 그러면, 어떻게 바꿔야 할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명칭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과 관계를 더 잘 설명해 주는 명칭을 고안해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교부들이 발전시킨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일일히 반박하며 그 용어를 더 잘 개진시켜야 할텐데, 그게,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신학적 논의를 잘 간파하여, 이것이 가부장적인 표현이 아닌, 신학적 표현이라는 것을 충분히 숙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더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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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만장일치가 줄어 들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선행에 있어서의 관대함이 감소하는 것과 비례하여 만장일치(unanimity/consensus)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 당시에, 그들은 자기 소유의 집과 농장들을 팔곤하였다. 스스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려고,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비용을 사도들에게 제공하곤 하였다.

 

이제 우리는 인색해서 십일조를 내는 것조차도 하지 않으며, 그리고 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팔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동산을 매입해서 늘리기를 좋아한다.

 

우리에게 신앙의 활기는 시들어짐에 따라서 믿음의 능력은 점점 더 희미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시대를 살펴보면서, 주님은 복음서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 올 때에 참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시니라."

 

우리는 그의 예견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있어서, 의의 법에 있어서, 사랑에 있어서, 선행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도 다가올 두려운 일들에 대해서 묵상하지 않으며, 아무도 주님의 날과 하나님의 진노, 불신자들에게 쌓이는 심판, 배교자들에게 지정된 영원한 고통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믿는다면, 우리 양심은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그러나 우리 양심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믿는다면, 주의할 것이고, 만일 주의한다면, 빠져나올 수 있을 텐데.

...............................................................................

 

이것이 누구의 글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보면, 이것은 요즘 시대의 어느 '선지자'가 이 시대를 개탄하며 쓴 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은 3세기에 살았던, 교부 키프리아누스(Cyprian)의 글이다. 그는 주후 250년경 노바티안(Novatian)으로 인하여 벌어진 교회의 분열 사건 때문에 쓴 '교회의 일치(on the unity of the catholic church)'에 대한 글 말미에서 위와 같이 그 당시 교회의 사태를 진술한다.

 

키프리아누스의 이러한 서술은 위안인가 절망인가. 위안의 측면에서 보자면, 현재 교회의 행태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는 게 위안이고, 절망의 측면에서 보자면, 교회의 행태의 이러한 역사는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니라는 게 절망이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나 하는 것일까. 요즘 "스스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려고", 선행하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십일조 내는 것도 인색해진 초라한 믿음과 부동산(재산)을 늘리기에 급급한 욕망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마치 '하늘'이 없는 것처럼 산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활기는 점점 시들어가서 더 이상 시들 것이 없는 것처럼 말라 비틀어졌고, 믿음의 능력은 점점 희미해져서 더 이상 능력이 없는 것처럼 무능하기 짝이 없다.

 

키프리아누스는 묻는다. 우리는 사도적 전승을 잘 지키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며 그분의 법을 지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말한다. "만일 당신이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He can no longer have God for his Father, who has not the Church for his mother)."

 

어머니(교회)를 모르니, 아버지(하나님)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에게 '교회'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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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21. 5. 26. 05:47

놀이터

 

바람은 새들의 놀이터

사랑은 사람들의 놀이터

 

새들도

사람들도

잃어가는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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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5. 26. 05:46

성례전적 삶을 간구하는 기도

(열왕기하 5:1-14)

 

주님,

성령을 간구합니다.

또한 성령의 임재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이끄는 성례전적인 삶이

불가능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이들 간의 불화와 분쟁, 그리고 전쟁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이들의 불의와 무례, 그리고 무관심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들의 확신이 더 깊어 가는 이 때에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성령의 강림입니다.

주여,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인데,

우리의 삶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이 몸소 경험하도록

이끌고 있습니까?

주님,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드러내는 성례전적인 삶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 자체가 영광스러운 삶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에게

구원이 되는 거룩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드러내는 주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 감각으로 경험하도록 이끄시고,

우리도 동일한 일을 감당하도록 부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26. 05:43

그리스도인의 성례전적 삶 (Christian life as a sacrament)

(열왕기하 5:1-14)

 

지구상에서 가장 문제적인 도시는 예루살렘이다. 종교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성지로 생각하는 세 개의 종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수많은 분쟁을 겪었다. 그리고 그 분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다행히도 국제사회의 압박 때문에 최근 일어났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에 휴전협정이 맺어졌지만, 두 진영 사이에 있었던 분쟁 때문에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시민들 수백명이 목숨을 잃고, 가자 지구 도시 자체가 마비 상태에 빠졌다.

 

지인이 나에게 물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고. 이번 분쟁으로 인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피해 규모를 보면, 이스라엘이 거의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을 학살한 것처럼 보인다. 질문은 그랬지만, 그 질문에 담긴 더 깊은 의미는 예루살렘의 평화는 어떻게 오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물론, 지인이 나에게 걸어온 질문은 무슨 깊은 학문적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답답해서 한 말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사실, 굉장히 난감한 문제이다. 문제가 난감한 이유는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대표하고,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이슬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두 거대 종교가 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평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의 문제는 굉장히 난감하면서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적 문제만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문제도 개입되어 있어, 그 문제를 푸는 해법은 굉장히 복잡하다.

 

나는 그 질문에 간단하게 이렇게 답했다. “종교가 없어지거나, 아니면, 역사가 끝나거나. 마라나타!” 인간들 사이의 분쟁, 또는 전쟁을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을까? 더군다나, 예루살렘이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종교 때문이니, ‘종교가 없어지거나’라는 대답은 사실 굉장히 절박한 말이다. 평안을 위해서 종교를 가지는데, 그 종교가 오히려 분쟁과 전쟁을 불러와 서로의 생명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니, 차라리 ‘종교’라는 것 자체가 없으면 서로의 생명을 해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더불어서 인간 사이에 있는 분쟁과 전쟁,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은 인류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에, 예루살렘의 평화의 문제는 역사가 끝나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이라는 절망감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른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끝장 내시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마라나타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왜 나는 성령강림절(오순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의 분쟁을 이야기하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 전개되는 성령강림 사건을 본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일이다. 세계 각국에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 그리고 오순절 축제를 ‘관광’하러 온 수많은 외국인들(이방인들)이 모여들었던 오순절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특별한 일이 발생했다. 오순절 축제에 걸맞은 매우 흥분되고 기이한, 축제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성령강림사건이다.

 

성령강림 사건의 요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을 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들이 방언을 했다는 것은 쉽게 말해,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뭐가 그리 큰 일인가. 중요한 것은 방언이 아니라, ‘그 방언으로 무엇을 말했는가’이다. 그 상황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한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구네레에서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9-11).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방언(외국어를 유창하게 한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큰 일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큰 일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은혜가 보이게 드러났다는 데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큰 일(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경험했다는 뜻이다.

 

즉,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연장선 상에 있는 사건이다. 성령강림 사건은 기이한 일(우리가 흔히 방언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현상의 발생)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게 드러나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즉 그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온 감각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진 결과,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 감각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 결과는 이것이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끔 하는 사건이 발생하니까,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발생한다.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요즘은 많은 이들이 종교를 떠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믿던 이들도 신앙을 버린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끔 해주는 사건보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경험을 사람들이 더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위에서 이야기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이다.

 

유대인도 하나님을 믿고, 팔레스타인의 무슬림들도 하나님을 믿는다. 두 진영 모두 전쟁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인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니, 거기에 무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하는 것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전혀 안 계신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가 공적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우리가 읽은 열왕기하의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에는 이와 사뭇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성례전적 삶,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끔 하는 경험을 이끌어내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배울 수 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아주 실제적인 문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을 어떻게 멈출 수 있고, 어떻게 예루살렘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아만 장군의 나라, 아람(지금의 시리아)과 이스라엘은 서로 적대관계였다.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다. 두 나라는 전쟁을 했다.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평화가 없는 것처럼 그랬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2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비극이다. 우리는 나아만 장군보다 전쟁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긍휼하고 정의로운 마음이 필요하다. 실제로, 나아만 장군 아내의 몸종인 ‘어린 소녀’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나아만 장군을 가까이에서 본 ‘어린 소녀’는 나아만 장군이 가지고 있는 삶의 아픔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되었다. 나아만 장군은 크고 존귀한 자였으나 치명적인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불치병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가 ‘나병’을 앓았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나병이 아니라 ‘악성 피부병’이다. 만약 그가 나병을 앓았다면 분리 수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리 수용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나아만 장군의 고통을 본 ‘어린 소녀’는 장군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3절). 전쟁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자기에게 고통을 가한 자에게는 저주를 퍼붓는 법이다. 그런데, ‘어린 소녀’는 원망보다는 용서를 택한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를 보면, ‘어린 소녀’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어린 소녀’의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펼친다. 왕을 만나 적국에 가는 것을 허락받고, 선지자에게 줄 선물을 가득 마련해 자기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며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러 간다. 이 이야기의 중심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람 왕의 편지를 받고 두려워하자, 사신(메신저)을 보내 이스라엘의 왕을 안심시키는 엘리사의 말에서 발견된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8절).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선지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는 일을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과 일치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도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언(Prophecy)을 한다. 예언이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에, 즉 우리의 삶에 어떻게 드러나실 지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끔 하는 일이다. 이처럼, 나아만 장군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였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사람이므로 아람 신의 존재는 알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병을 고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온 이유는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며, 자신의 병을 고치는 일에 엘리사 선지자가 화려한 제의를 행하고, 자신에게 엄청난 일을 요청할 것을 예상하며 갔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병 고침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 고치는 방법이 너무 보잘것없었다.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10절).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쉬운 것도 못한다. 오히려 화를 내며 돌아선다. 만약, 그에게 현명한 부하들이 없었다면, 그는 병도 고침 못 받고, 하나님을 아는 기회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마음 내키지는 않았지만,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다. 그랬더니, 정말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일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을 알게 된 이야기이다. 어린 소녀의 용서의 마음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6장 23절에서 끝나는데,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된 아람은 이스라엘과 섣부르게 전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아람 왕은 자신의 도발 계획이 매번 수포로 돌아가자 나아만 장군을 스파이로 의심하지만(명시적으로 나아만 장군을 의심했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나, 정황상 그렇다),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람의 군대는 엘리사의 존재를 아람 왕에게 알린다. 그리고, 아람 왕은 엘리사를 죽일 계략을 꾸민다.

 

자기를 죽이러 온 아람 군대를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사마리아성으로 유인한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몰살시키고자 한 이스라엘 왕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고 살려주라고 말한다.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왕하 6:22).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아람 군대가 썼던 방법을 따르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을 선택한다. 아람 군대는 포로를 자신들의 노예로 데리고 갔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랬더니,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가 생겼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왕하 6:23).

 

평화는 용서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용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일이다. 용서는 엄청난 성례전이다. 용서의 경험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람의 전쟁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는 주인인 나아만 장군을 용서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를 알려 주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지만,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엘리사는 자기를 죽이러 왔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마리아성에 갇힌 아람 군사들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다.

 

‘어린 소녀’의 용서와 엘리사의 용서는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다.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가치를 놓치면 안 된다. 나의 작은 용서가, 또는 힘겨운 용서가 어떠한 위대한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용서(순종)를 들어 쓰실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평화는 사람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여질 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여진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드러나고 높여지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다. 그러한 삶을 성례전적 삶이라고 한다. 성례전이란 바로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경험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 우리 시대에, 또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 볼 수 있는 일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을 하니, 하나님을 원래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을 보고 “내 생각이 맞어.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점점 세속화되어 간다. 세속화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없는, 하나님의 존재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강요를 통해서 갖게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요즘 시대는 더 그렇다. 어떻게 종교적 신념을 강요할 수 있나. 요즘엔 그랬다가는 잡혀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어느 시대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게 끔 해주는 믿는 이들의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 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가 용서를 통해 나아만 장군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엘리사가 자기를 죽이러 온 아람 군대를 용서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람 사람들이 경험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는 성례전이 되어야 한다.

 

성령강림절(오순절). 예수의 제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끌었다. 덕분에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전쟁의 소식만 늘어가고, 죽음의 소식만 들려오며,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시는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늘어가는 이 때에,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없다고 하는 확신하게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즐비한 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삶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높이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진 가장 깊은 질문이고 도전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끄는 성례전적 삶. 우리는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끄는 성례전적 삶을 가능케 하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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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정치신학 ㅡ 정치경제학]

 

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을 통해 그것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악한 일들의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조력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는 정치신학과 정치경제학이다.

 

신학의 정치적 측면, 그리고 경제의 정치적 측면을 본다는 것은 신학과 경제가 지배자들에 의해서 자기 지배를 공고히 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신학'을 말한 카를 슈미트와 '정치경제학'을 말한 카를 마르크스에게서 만천하에 드러난 사실이다.

 

종교(신학)와 경제는 사람들이 '삶'을 의미 있고 평안하게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몰두할 수밖에 없는 분야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 삶의 전부다. 경제는 인간 삶의 전부다. 그렇게 모든 사람의 삶의 문제에 해당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종교와 경제를 이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의 모든 삶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경제를 통한 지배계급의 지배는 점점 더 교묘해지고 있고, 점점 더 세련되어지고, 점점 더 종교화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에서 귀족정으로, 그리고 지금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입고 지배계급은 생존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노예제도에서 봉건제로, 그리고 자본가-노동자 제도(자본주의)로 발전했다.

 

18세기에 등장한 자본주의 제도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등에 업고 등장했지만, 그것은 아주 세련된 노예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에서 이제 금융자본주의로 그 모습을 탈바꿈하여, 아주 교묘하고 절묘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정치신학과 정치경제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현대사회에서 종교(신학)와 경제가 인간의 해방을 위해 봉사하지 않고 인간의 억압을 위해서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이용당하고 있는 종교와 경제는 자신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만큼 그 억압과 착취의 메커니즘이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신학과 정치경제학 공부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는 지배논리, 즉 억압과 착취 메커니즘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공부이다. 만약 그 억압과 착취의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신학(신앙생활)을 하거나 경제생활을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과 착취의 희생자가 되기 십상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과 착취의 조력자가 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불쌍한 인생을 살거나 죄짓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인, 특별히 목회자들은 정치신학과 정치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 공부의 시작은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이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