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음모론보다 더 무서운 백신 폴리틱스(Vaccine Politics)

 

팬데믹이 시작됐을 때 마스크를 써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시끄럽더니, 이제는 백신을 맞아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시끄럽다. 정부와 다국적 제약회사 주도로 개발된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은 그동안 백신을 만드는데 사용된 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mRNA 방식이 그것이다. 새로운 백신의 효능에 대한 충분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당국의 말과 새로운 백신에 대한 효능을 불신하는 측의 말 중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아직까지 백신 효능에 대한 장기적이고 충분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개발된 백신을 맞는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우려하는 것은 백신 음모론이 아니라, 백신 정치(Vaccine Politics)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하여 지난 1년여동안 전세계는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다. 반사이익을 누린 집단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전체적으로는 세계 경제가 휘청거렸던 것은 사실이다. 정부 주도 하에 진행되고 있는 백신 정책은 경제를 되살려 놓기 위한 목적에 의해서 펼쳐지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이 ‘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에 큰 우려를 보낸다. 그리고 경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백신접종에만 있는 것처럼 정책을 펼치는 것에 또한 큰 우려를 보낸다. 왜냐하면 정부 주도의 정책은 팬데믹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도 없고, 그에 대한 대책도 없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에서는 팬데믹의 발생 원인을 중국에서 찾고자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는 정치적 공세일 뿐이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알려졌듯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수공통감염병’이다. 인간과 짐승이 공통으로 감염되는 바이러스 질병이라는 뜻이다. 인수공통감염병이 발생하게 된 근본원인은 짐승이 인간 세계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짐승이 왜 인간과 물리적으로 더 가까워졌을까? 인간들이 짐승들의 서식지를 파괴했기 때문에, 서식지가 줄어든 짐승들은 ‘살기 위해’ 인간들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인간들과 물리적으로 가까워진 짐승들은 자신들의 지니고 있는 바이러스를 우연하게 인간들에게 옮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과 같은 대참사를 피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일은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활동을 줄여야 하고, 그동안 망가진 산림을 복구하는데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책정하여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이것을 집행하는 나라는 없다. 미국의 예만 보더라도 막대한 구제금융지원은 현 상태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일 뿐, 인간들의 활동을 줄이고 망가진 살림을 복구하는 데 편성된 예산이 전혀 없다. 아예 그런 발상 자체가 없다.

 

소포클래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보면 무대의 배경인 테바이에 역병(전염병)이 돌고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는 역병이 돌게 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하여 외삼촌 크레온을 델포이에 파견하게 된다. 그곳에서 크레온이 받은 신탁, 즉 역병이 돌게 된 이유에 대한 신탁은 오이디푸스 왕 이전의 왕, 즉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가 아직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는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가 누군인지 알고 있다. 바로 오이디푸스 왕이다. 그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이었다.

 

요즘은 종교가 죽은 개 취급을 받고, 과학이 우대 받는 시대라 소포클래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신탁을 받는 일은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요즘은 이성과 과학이 신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성과 과학이 신탁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다. 그것이 근대의 인류문명이 이룬 성과 중의 하나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그 이성과 과학이 어떻게 쓰이느냐이다. 이성과 과학이 ‘합리성’을 가지고 공정하게 쓰인다면 문제 없겠지만, 이성과 과학은 그 옛날의 종교적 신탁처럼 정치에 쓰이는 게 문제이다.

 

현대사회에서 이성과 과학이 정말 올바른 신탁의 역할을 감당하려 한다면,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원인과 그 해결방안을 정직하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성과 과학 가라사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원인은 바로 인간들에게 있나니, 생태계를 혼란시키고 파괴할 정도로 과도한 소비생활을 줄이고, 그동안의 과도한 욕망을 회개하고, 무너진 생태계를 복구하는데 그동안에 쌓은 경제적인 부와 기술을 쏟아부으라. 그렇지 않으면, 곧 영원한 멸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라.”는 신탁이 필요한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자본주의와 국가 정책은 오직 지금까지 누려오던 풍요를 지속시키고자, 팬데믹 속에서도 경제를 유지하고, 팬데믹 이후에 더 큰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정책들로만 가득하다. 그것을 위해서 ‘백신접종’만이 오직 구원의 길 인양 시민들을 호도하는 국가의 정책이 백신 음모론보다 더 무서운 것 아닌가. 우리 몸에 이미 바이러스를 물리칠 수 있는 면역체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자연적으로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국가적으로 홍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자본을 경제살리기에 투자할 것이 아니라 팬데믹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생태계 복원에 투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신 음모론에 의해서 백신을 맞지 않게 되면 집단 면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경제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 그리고 백신 음모론에 휘둘려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은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비난, 그리고 백신 음모론에 휘말리는 것은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합류하는 멍청한 짓이라는 정치적 조롱 등은 모두, 우리가 얼마나 자본주의와 그 체제를 유지하려는 국가 정책에 저항없이 따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사증거들일 수 있다.

 

나는 백신 음모론을 거부한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더 거북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경제논리에만 매몰돼 이 시대의 진정한 ‘신탁’에 눈과 귀를 닫고 있는 지배자들과 그들을 무조건 따르는 피지배자들의 사악함과 무기력함이다. 팬데믹 구제금융 정책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해오던 소비를 멈추지 않고 할 수 있어 안심이고 즐겁고 기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로 그 끊임없는 소비 때문에 생태계는 더 망가지고 서식지를 잃은 짐승들은 물리적으로 인간들과 더 가까워져 앞으로 어떠한 인수공통감염병이 또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더 두렵다. 누가 이 두려운 미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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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4. 26. 13:39

부활의 현실을 살아내길 간구하는 기도

(행 4:5-12)

 

주님,

부활의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부활의 현실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습니까?

복음은 우리에게 부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부활의 현실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라고 초대합니다.

우리는 그 복음의 초대를 받아들였습니까?

주님,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는 이 디스토피아시대를 건너는 힘은

오직 부활의 현실을 받아들여,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려고,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하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죽은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지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현실을 가져다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시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의 현실을 살아내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4. 26. 13:34

십자가와 처럼과 구원

(사도행전 4:5-12)

 

부활의 영(성령)이 임한 제자들의 삶은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사도행전에 기술되고 있는 ‘역사/work’들은 그 당시의 유일회적인 역사(work)가 아니다. 성전 미문(Beautiful)에 있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이’가 일으켜진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장애가 치유되는 사건이지만, 심층적으로는 구원 사건이다(죽은 자 가운데서 주님이 일으켜지신 것처럼, 이 사람도 일으켜진다). ‘일어남’을 통해서 그는 두 발로 걷고 뛰고 한 것을 넘어서, 그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생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치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애가 치유되고, 병이 낫는 등의 소위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느냐 모르게 되느냐’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시간(역사)을 뚫고 들어온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 부른다. 감동적이어서,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해서 은혜가 아니라, 우리 피조물들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불가항력적인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에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압도적으로 임한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전 미문 사건 때문에 사도들이 유대인들의 공의회 앞에 서 심문을 받게 된다. 사도들이 자기들(공의회) 손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역사(work)’를 행했기 때문이다. 공의회 앞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이 받았던 질문을 똑같이 받는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들의 권세가 지금 위협당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가 권세를 위협받으면, 거칠어지는 법이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한다.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받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복음의 내용 –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9-10절). 이것은 정말 대단한 대답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때, 자기들도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까봐 도망쳤던 사도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똑 같은 사람인데, 부활의 영을 받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된 것은 그가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같은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다른 세계에 가는 것이다. 같은 세계에 살면서 달라질 수는 없다. 사도들은 이제 부활의 영 안에서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 나라(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게 되었기 때문에, 이전에 자신들이 살던 세계에서의 말과 행동을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새롭게 살게 된 하나님 나라의 말과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이 세상에 머물러 살면서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말하고 행할 수는 없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따른다는 것은 부활의 현실, 즉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들어선다는 뜻이다. 여전히 이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세상에 살게 되었기에, 사도들은 다른 말과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부활의 현실을 가져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말과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이’를 고쳐준 것이고, 공의회 앞에서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였던 것이다.

 

심리학에서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이라는 게 있다. 대상은 영어로 'object'라 한다. 이것을 분석하면, '내 앞에 ob' + '던져진 ject'이다. 즉, 대상이란 ‘내 앞에 던져진 현실 또는 존재’를 말한다. 그러므로 '대상관계이론'이란 내 앞에 던져진 대상적 현실(존재)과의 부단한 소통을 말한다. 이 대상관계이론은 주로 아동심리학에서 아이들과 특별히 엄마 간의 내적/심리적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사용이 되는데, 아기에게 '대상(내 앞에 던져진 존재)'은 엄마이다. 그래서 아기는 대상적 존재인 엄마와 끈임없이 소통을 하며 성장한다. 내 앞에 던져진 존재, 또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대상이 나에게 어떠한 소통을 해 오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성장은 달라진다. 

 

2019년도에 만들어진 공상과학 영화 <I Am Mother>가 있다. 미래의 이야기이다. 미래에는 여자의 자궁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엄마의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기계에서 아기가 태어난다. 그리고 그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역할을 해주는 사이보그(로봇)을 만나게 되고 그것의 돌봄에 의해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세상이 정말로 오게 될지 모르겠다. 여러가지 정황상, 아마도 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은 이것이 주제가 아니니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자.)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그런 세상이 도래하기 전, 어쨌든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가장 먼저 ‘대상’으로 만나게 된다. 아기는 태어나서 세상이라는 대상에 던져지게 되고, 엄마라고 하는 대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다른 말로 이것은 아기에게 ‘엄마’라고 하는 존재가 곧 아기의 온 세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성장하면서 엄마의 세계를 벗어나 다른 대상을 계속하여 만나게 되고, 그래서 대상의 확장이 이루어지겠지만, 어쨌든, 아기는 태어나서 확장된 세상을 만나기 전, ‘엄마’라는 세상을 만날 수밖에 없다. (남성중심세상 X, 자본중심세상 X, 엄마중심세상 O / 엄마 같은 교회)

 

그래서 심리학의 대상관계이론은 한 사람이 아기 때에 엄마와 어떠한 내면적인/심리적인/심층적인 관계를 맺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정체성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심리치료를 위해서 아기 때의 온 세상이었던 엄마와의 대상관계를 바로잡아주는 것은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다. 심리학에서는 아기 때의 엄마와의 대상관계가 어땠느냐가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상관계이론에서 설정한 이러한 문제의식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다. 아기 때 엄마와의 대상관계가 아주 좋았어도 성인이 되어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고, 아기 때 엄마와의 대상관계가 아주 좋지 않았어도 성인이 되어서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대상으로 누구를 만나느냐가 정말 중요!)

 

우리는 대상관계이론이 주는 통찰력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은 평생에 걸쳐, ‘내 앞에 던져진 현실(또는 존재)’과의 부단한 소통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대상관계이론의 통찰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보면, 우리 앞에는 불가항력적인(은혜로) ‘내 앞에 던져진 현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현실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다. 그것과 어떠한 소통을 이어 가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들 앞에 던져진 ‘부활의 현실’을 부인하는 공의회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이 되는 이들을 제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을 미워하며 살 뿐이다. 그러나, 자신들 앞에 던져진 ‘부활의 현실’과 적극적으로 소통한 사도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았다. 그것은 부활의 세계, 하나님 나라, 구원의 삶이었다. (단순히 보여주는 게 아니라 초대하는 것. 너희도 이렇게 살라!)

 

우리는 부활의 현실과 어떤 대상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 성경은 우리 앞에 부활의 현실을 내 던지고 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내 앞에 던져진 부활의 현실’과 우리는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가? 우리는 결단에 놓여 있다. 부활의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모른 척할 것인가. 구원의 현실과의 부단한 소통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게 된 사람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시는 윤동주의 ‘십자가’라는 시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라는 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요한 행은 ‘처럼’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이라고, 한 문장으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처럼’만 따로 떼어내, 그것으로 한 행을 이룬다. ‘처럼’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김응교 교수의 시해석을 한 번 들여다보자.

 

사실 ‘처럼’만 이렇게 한 행으로써 있는 시를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 시가 아니더라도 영어 시, 일어 시, 중국어 시에서 ‘처럼’만 한 행으로 된 시를 본 적이 있나요?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윤동주는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길이 ‘행복한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타인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고통을 나누는 순간, 개인은 ‘행복한’ 하나의 주체가 됩니다. 그러나 ‘처럼’이라는 직유법처럼 그 길은 도달하기 힘든 삶이지요.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 삶, 윤동주는 그 길을 선택합니다. (김응교의 저서 <처럼>에서)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종교시로 읽는 사람은 없다. 윤동주를 종교 시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윤동주의 시와 삶에서 사람들은 ‘숭고미’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에 의해서 압도당하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대상으로서의 윤동주는 사람들에게 숭고함을 전달해 주기 때문에, 그의 시에 특정 종교의 용어인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등의 단어가 들어갔어도 그것을 특정 용어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편 용어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윤동주의 숭고미에 압도되어, 그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된다.

 

나는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부활의 현실인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되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미 안에서 그분 ‘처럼’ 살고 싶다는 거룩한 욕망이 분출되는 것, 그래서 이제 이 세계를 떠나 부활의 세계, 하나님 나라를 살겠다는 결단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믿는다. 그러한 삶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던져지는 대상으로서, 그 존재 앞에 던져지는 부활의 현실로서, 그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려는,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고 하는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윤동주의 시에서 ‘십자가와 처럼과 구원’을 본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사도들에게서 동일하게 ‘십자가와 처럼과 구원’을 본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대상(object/그 존재 앞에 던져진 존재(현실))'이다. 대상으로서의 존재인 '내'가 대상으로서의 존재인 '너'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인간의 과제이다. 우리가 대상으로서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현실은 무엇이겠는가. 부활의 현실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 미문에 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이’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베드로와 요한은 그에게 부활의 현실을 준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내’가 대상으로서의 ‘너’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려는,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고 하는 삶. 그것이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고 아무리 작은 구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겨자씨와 같아서 그 구원을 받은 이가 나중에 어떠한 존재로 성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활의 현실을 경험한 우리가 할 일, 이제 이 세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사는 우리들이 할 일은 사도들처럼, 윤동주처럼, “십자가와 처럼과 구원”을 생각하며, 만나는 이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려고,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고, 부활의 현실을 사는 것이다.

 

부활의 현실이 가져다주는 구원을 생각해 볼 때, 기독교 문화 위에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총기사건과 폭력사건과 혐오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들이 부활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살았다면,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고, 어떻게서든 구원이 되려고 할텐데, 오히려, 구원이 아닌 죽음이 난무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 어느때보다도 부활의 현실이 강한 바람같이, 불의 혀같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또한 지구의 날을 지키며 예배 드리는 이 날, 우리 인간은 지구 자연에게 어떠한 대상인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연(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을 가져다주고 있는가.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기후위기와 그로인한 일련의 자연재해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부활의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처럼 자연에게 어떻게서든 구원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어떻게서든 죽음을 가져다주려 하는 나쁜 존재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는 이 디스토피아 시대를 건너는 힘은 부활의 현실을 모른척하지 않고 정직하게 맞닥뜨리는 데 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부활의 현실’이 던져져 있다. 부활의 현실을 받아들여 부활의 현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구원, 생명을 어떻게서든 이웃들에게 가져다주려 하고, 부활의 현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구원, 생명을 어떻게서든 자연에게 가져다주려는 “십자가와 처럼”의 신앙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니, 진실하게 부활의 현실을 살고, 부지런히 부활의 현실을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되자.

 

대상인 내가, 대상인 너에게 아름답기를!

대상인 네가, 대상인 나에게 아름답기를!

그렇게 아름다운 대상들이 서로 소통하며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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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독교의 시간관]

 

우리는 흔히 기독교의 시간관을 '일직선적 시간관'이라고 생각한다. 창조에서 시작해서 종말에 이르는 시간관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시간관에 대한 명백한 오류이다.

 

'일직선적 시간관'은 기독교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자본주의는 시간의 차이를 통해서 이윤을 창출하는 구조인데, 새로운 제품이 낡은 제품을 밀어낼 때 이윤이 발생한다. 낡은 제품은 과거이고, 새로운 제품은 현재이다. 과거가 물러나고 현재가 도래하고, 미래가 곧 올 거라는, '일직선적인 시간관'이 성립되어야만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시간관을 '일직선적 시간관'으로 오해하는 것은 자본주의 논리를 종교화시키는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일직선적 시간관을 갖지 않는다. 기독교는 종말론적 시간관을 갖는다.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 인간의 시간(역사) 안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밀고 들어온 시간을 종말론적 시간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적 시간관에서 구원이란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는 것, 과거를 현재로 대체하고, 현재가 미래로 대체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그러한 방식으로 임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종말론적으로 임한다. 즉, 기독교의 구원은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 인간의 시간(역사)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또는 은혜로 밀고 들어오시는, 또는 이미 오신, 성육신 사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역사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는 생각은 기독교의 생각이 아니다. 역사가 마냥 흐른다고 구원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역사 안으로 뚫고 들어온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역사에서 희망을 보는 게 아니라, 역사를 뚫고 들어오시는 그리스도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의미 있는 것이다. 역사 안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구원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역사에 매이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자유롭다. 이미 역사 안에 임한 그리스도의 구원을 신앙을 통해 자기의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제 기독교인은 그 자유를 통하여 역사 안에 존재하는 '악'과 맞서 싸울 수 있다. 인간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Posted by 장준식

[목소리를 높이라 Raise your voice]

 

미국 뉴스는 연일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의 용의자 전직 경찰관 데릭 쇼빈의 유죄 판결에 대한 논평으로 가득하다. 어제, 판결이 나오기전 미국사회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돌았다. 정부는 유죄 판결이 안 나올 만약의 경우에 발생할 폭동에 대비하여 경계를 삼엄히 했었다. 다행히 배심원 전원 찬성의 유죄 판결이 나왔고, 데릭 쇼빈은 2급 살인죄(살해 의도가 없는 살인죄)로 수감되었다.

 

정부가 폭동을 염려하여 경계를 삼엄히 한 것은 판결이 유죄로 나오지 않고 무죄로 나올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당연히 살인죄를 적용해야 할 판결이 무죄로 끝난 경우가 너무도 빈번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한 우려와는 달리 유죄 판결이 나왔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근 아시안 혐오 범죄와 연관해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면, 배심원 전원의 유죄 판결이 나온 배경에는 전국적으로 발생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큰 힘이 된 것 같다. 법이라는 게 원래 이현령비현령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사회 분위기에 따라서 법적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만약 무죄 판결이 나왔다면, 정부에서 감당 못할 폭동이 일어날 게 뻔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불의한 일을 경험했을 때 그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다시 깨닫는다. 요즘 발생하고 있는 아시안 혐오 범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을 촉구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들은 불의한 일, 부당한 일을 당해도 사회적 약자(마이너리티)로서 합당한 저항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영어가 서툴러서 그런 면도 있으나 불의에 저항해서 결국 피해를 더 보는 것은 저항한 당사자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미국에서 아시아인들의 존재감은 매우 미미했다.

 

미국 사회 저변에는 엄청난 심리적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백인들은 죄책감(guilty)에 시달리고, 흑인은 분노(anger)에 시달리고, 아시아인들은 두려움(fear)에 시달린다. 이러한 세 가지의 심리적 불안은 끊임없는 갈등을 미국 사회에 만들어 내고 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저마다 바람직하지 못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내면적인) 심리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 자체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사회 자체가 언제나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뜻이다. 이런 심리적 불안은 총기사건을 통해 계속해서 분출되고 있다.

 

이번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나 아시안 혐오 범죄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불의한 일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불의한 것을 불의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불의는 내면화된다. 내면화된 차별과 혐오는 언제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누가 어떤 곳에서 희생자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사회 구성원들은 늘 불안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Black Lives Matter"라는 사회적 운동, 즉 목소리를 높이는 운동이 없었다면,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대한 용의자 판결이 어떻게 나왔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건의 용의자 데릭 쇼빈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법이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사회적 요구가 정의롭기 때문에 나온 판결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의로운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정의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소리 높여 알려야 한다. 정의에 대한 그 간절함이 사람과 사람의 마음에 공명될 때, 법은 비로소 정의를 관철시키는 데 봉사하게 될 것이다.

 

불의한 일에 희생당한 모든 이들과 그들의 유가족, 그리고 정의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평안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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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4. 21. 07:03

냉소와 비관을 물리치기를 간구하는 기도

(눅 24:44-49)

 

주님, 어쩌다 보니

우리는 비관과 냉소가 판을 치는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다 보면

우리도 비관과 냉소에 휩쓸려

폭력과 혐오와 극도의 이기주의에 물들게 생겼습니다.

주님, 부활을 통해

제자들이 가졌던 비관과 냉소의 마음을 물러가게 하시고

그들에게 새소망을 가져다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새소망을 부어 주옵소서.

부활 신앙 안에서

우리의 삶 전체가 기도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그리고 하루를 마칠 때 만이 아니라

하루 종일 매순간마다 내가 행하려는 일, 내가 맞닥뜨린 일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두기 위하여 짧은 기도를 끊임없이 드리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열어 주시면,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그 일이 성공했든 실패했든 상관없이

무슨 일이든지 거기엔 감사와 소망이 넘치게 될 줄 믿사오니,

주여,

우리의 삶을 엄습해 오는 비관과 냉소를 물리쳐 주시고,

감사와 평안을 선물로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망을 가져다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4. 21. 07:00

열어 주소서

(누가복음 24:44-49)

 

누가복음, 하면, 세 가지의 이야기가 떠올라야 한다. 첫째는 ‘탕자 이야기’, 둘째는 ’삭개오 이야기’ 그리고 셋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이다. ‘탕자 이야기’와 관련된 찬송은 ‘나 주를 멀리 떠났다’가 있고, ‘삭개오 이야기’와 관련된 찬송은 ‘보고싶어 보고 싶어 예수님 얼굴~’이 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찬송은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가 있다. 성경의 유명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은 대개 회화(그림)이나 음악으로 표현되어 있다.

 

누가복음 24장은 부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죽은 후,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준비한 향품을 들고 예수의 무덤을 찾는다.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이들은 그 사실을 열한 사도에게 알리고, 그 중 베드로는 여인들의 부활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가 죽은 예수를 쌌던 세마포만 남은 빈무덤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는 길게 이어진다. 두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는 그들과 함께 동행하며 그들에게 부활의 현실을 알려주고, 두 제자는 열한 사도에게 달려가 예수의 부활을 알린다. 그러는 중 예수는 그들에게 나타나 부활의 현실을 알린다. 여인들의 무덤 방문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로 이어지고, 열 한 사도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며 그들에게 부활의 현실을 알려주시는 예수의 선포로 끝나는 이 부활 이야기의 정점은 44절에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44절).

 

예언의 성취. 이것은 누가복음이 가진 중요한 신학이다. 모세의 율법(오경)과 선지서, 그리고 시편을 비롯한 성문서, 즉 모든 구약성경(히브리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는 신학, 이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이다. 44절의 구절 중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라는 말은 ‘신적 당위성이나 필연’을 말할 때 등장하는 단어이다. 한국어 어휘에는 이것을 대치할 만한 단어가 없다. 가령 이런 것이다. 우리 나라 말에, ‘용안’이라는 말이 있고, ‘수라상’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임금(왕)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이다. 이 말을 아무에게나 사용하면, ‘역모’로 죽는다. 이처럼,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동사는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 쓰는 단어이다.

 

예언의 성취는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부활은 신적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하늘에서 이룬 뜻이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큰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어떠한 것이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부활 사건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부활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처음부터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의심했다. 예수를 가까이서 따라다녔던 사도들도 처음에는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예수께서 부활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선포하신 뒤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을 때”였다. 다른 말로 해서, 예언의 성취,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는 일이라고 고백하며, 또한 그것을 증언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삶의 일상이 기도 안에 있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침에 기상하자 마자 하루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성령의 능력 안에 있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고, 출근하면서도 기도하고, 업무를 시작하면서도 기도하고,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도 기도하고, 밥 먹을 때도 기도하고, 일과를 마치면서도 기도하고, 잠 자리에 들면서도 기도하고, 잠든 중에서도 이 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때그때 매순간마다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도를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몰아서 하거나,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몰아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그것보다 더 좋은 기도의 습관은 그때그때 매순간마다 짧게 기도하는 것이다. 000 집사님 가게에 심방 갔을 때 생긴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옆 가게로 잔돈을 바꾸러 간 000 집사님이 돈을 바꾸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갔더니 얘네들 기도하는 시간이에요. 바닥에 양탄자 깔아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얘네들한테 많이 배워요.” 여기서 얘네들은 누구겠는가? 무슬림들이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메카를 향해 양탄자를 깔고 기도한다. 기독교인이 무슬림처럼 할 필요는 없지만,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계속하여 드리는 일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야한다.

 

4월 말에 책이 한 권 나온다. 공저한 책인데, 그동안 가스펠 투데이(Gospel Today)에 실린 글을 모은 책이다. <예술신앙의 정원>, 이 책에 내 글이 7편 실린다. 책출판이 막바지에 있어 마지막으로 교정을 부탁하는 메일과 함께 출간되는 책의 교정판이 왔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내 글을 읽었다.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읽으면서 든 생각은 ‘내가 이런 글을 어떻게 썼을까’이다. 도저히 내가 쓴 글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감사’였다. “나, 이런 감동적인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야”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감사의 고백이 나왔다.

 

사실 그렇다. 답답한 현실을 보면, 나의 부족함을 보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내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어쩌다 일이 잘 되면, 우쭐대기 십상이고, 일이 안 되면 낙심하기 십상이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우쭐과 낙심의 널뛰기를 하는 듯하다. 여기엔 감사와 평안이 깃들기 힘들다. 감정의 소모, 체력의 소모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쳐가는 삶을 살아간다.

 

요즘은 특히나 비관적인 생각과 냉소적인 마음을 갖기 쉬운 세상이다. 온통 들려오는 뉴스는 ‘죽음’에 대한 뉴스, ‘폭력’에 대한 뉴스, ‘미움’에 대한 뉴스, 등 사람의 몸과 영혼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뉴스들 뿐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는 안 되고, 이 세상은 소망이 없으니, 그냥 나나 내 가족이나 잘 챙기자 하면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변한다. 그러한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마음이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범죄로 표출된다. 우리가 지금 ‘아시아 혐오 범죄’의 타겟이 되어 있어 피해자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안에도 비관적인 생각과 냉소적인 마음에서 오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얼마나 깊은 혐오가 자리잡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비관과 냉소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이 열리는 것이다. 매일, 매순간 기도하는가? 무슨 기도를 하는가? 신적 당위성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뜻이 하늘에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가? 우리는 기도하면서 상상해야 한다. 부활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은 비관과 냉소 속에서 자기만 살 궁리를 하겠지만,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비관과 냉소를 거부하며, 비록 지금 현실에서는 비관과 냉소가 판을 치지만, 죽음(가장 큰 비관과 냉소)을 이기신 예수께서 이미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믿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정혜윤의 책 <앞으로 올 사랑> 마지막 챕터에 보면 ‘바빌로프(Nikolai Ivanovich Vavilov)’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기근과 감염병은 언제나 인류에게 큰 위협이었다. 러시아도 늘 기근과 감염병에 시달리는 나라였다. 바빌로프는 어려서부터 식물 표본과 어학 공부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는 나중에 특히 종자에 매력을 느껴 종자를 모으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종자를 모은다. 그가 종자를 모으면서 한 일은 “이상 기후로부터 작물을 지켜내는 법을 아는 농부들을 찾아 인터뷰를 했고 종자 심는 법을 배워 꼼꼼히 기록”한 일이다.

 

레닌 그라드에 식물 연구소를 차려 종자를 모으고 종자를 연구하여 기근을 퇴치하려는 꿈을 가졌던 바빌로프에게 큰 시련의 시간이 찾아온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에 의해 바빌로프는 잡혀가고, 바빌로프가 없는 상황에서 곧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종자를 지켜내기 위한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동분서주한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하면 2백만 점이 넘은 보물 같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을 파괴할 거라 생각하고 관련자들 수백명을 투입해 박물관의 작품들을 옮기는 작업을 했지만, 정작 히틀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아니라 스탈린의 무관심 속에 놓여 있던 바빌로프가 모은 38만개의 종자였다.

 

누가보다도 비관적이고 절망적이고 냉소적인 상황이었다. 바빌로프는 그를 시기하는 세력들에 의해 역적이 되어 총살형 선고를 받고, 종자를 보호해야할 스탈린은 종자에 관심이 없었고, 전쟁은 발발하여 독일군은 몰려오는 상황이었고, 추웠고, 배고팠다. 그러나,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끝까지 종자를 지켰다. 그 상황을 전하고 있는 문장은 이렇다.

 

연구원들은 문을 닫아건 채 얼어붙을 것 같은 음습하고 차가운 지하실에서 남은 종자와 씨감자를 지켰다. 추위로 몸이 얼어붙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교대로 근무하며 계속 종자를 지켰다. 바빌로프의 동료 중 가장 헌신적이던 아홉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들은 끝내 자신이 돌보던 씨앗을 먹지 않았다. (276쪽).

 

굶주려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어떻게 씨앗을 먹지 않았을까?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의 한 작가가 바빌로프의 동료였던 바딤 레흐노비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 인터뷰에서 여러 달 굶주리는 동안 어떻게 씨감자를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었냐는 질문을 받은 레흐노비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하는 게 힘들었죠. 매일 아침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손발을 움직이기도 몹시 힘들었답니다. 하지만 씨앗을 먹지 않고 견디는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그럴 먹는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씨앗에는 나와 내 동지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들어 있으니까요. (278쪽)

 

이에 대해, 정혜윤은 이런 문장을 이어간다. “그들은 씨앗이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되고 무화과나무가 되고 오렌지와 올리브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 밀밭이 되는 모습과, 그것들이 빚을 받아 크고 튼튼해지는 모습과 벌과 나비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270쪽). 비관과 냉소 속에서, 지키고 있던 씨앗 종자들을 다 먹어버리고 함께 공멸할 수도 있었던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비관과 냉소가 가져다주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자신들을 내몰지 않고, 씨앗이 품고 있는 그 가능성들을 상상하며 끝까지 그것들을 지켜냈다. 죽음으로!

 

비관과 냉소가 판을 치고, 그 어두운 마음 때문에 폭력과 혐오가 판을 치고, 오직 자기와 자기 가족들 만의 안위를 챙기려는 이기심이 극도로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부활 신앙이 더 필요한 이유는 그 비관과 냉소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서 갖게 되는 비관과 냉소를 물리치고,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열어 주시면,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안 될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기 전에, 기도하고 하라. 그러면 그 일을 마친 뒤에,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해냈지?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이 일을 하도록 열어 주셔서 할 수 있는 거야!”라는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그러한 감사가 쌓이면, 다른 사람을 혐오할 일이 무엇이 있는가? 비관과 냉소 가운데 폭력과 혐오와 극심한 이기주의로 치달을 수 있지만, 부활 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께서 열어 주실 것이고, 주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셨다는 감사의 고백이 쌓이고 쌓이면,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감사를 나누게 될 것이다.

 

부활의 신앙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하기 전에, 짧게 기도하는 습관을 세우라. “주여, 열어 주소서. 주여,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주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일을 행하게 하소서. 주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비관적인 생각과 냉소적인 마음이 판을 치는 시대에, 부활 신앙을 통해 비관과 냉소를 물리치고, 매순간의 기도를 통해 삶을 감사와 평안으로 채우며, 냉소와 비관을 잠재우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시 세워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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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21. 4. 18. 08:06

[시론] - 황인숙의 시 ‘떨어진 그 자리에’

 

언제까지라도

떨어진 그 자리를 지킬 고양이였는데

어떤 모진 발길이 쫓아버렸을까

부디 그 아가씨가 데려간 것이기를!

아, 나도 떨어뜨려버린

그 고양이

 

ㅡ 황인숙의 시 ‘떨어진 그 자리에’ 부분,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에 수록

 

이야기는 화장을 하다 떨어뜨린 화장수 뚜껑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바닥에 떨어진 뚜껑을 찾으려 이리저리 헤매다 결국 찾아낸 뚜껑. 주우려다 “떨어진 그 자리에” 있는 뚜껑을 보며 시인은 “지난 가을 늦은 밤”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후암동 종점에서 시인이 본 것은 “문 닫힌 가게 앞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노란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왜 풀 죽은 얼굴로 가만히 엎드려 하염없이 찻길을 지켜보고 있을까? 시인의 짐작은 그 고양이가 누군가에 의해 유기된 것에 이른다. “누군가 차를 몰고 지나가다 그 자리에 떨어뜨리고 쌩하니 가버렸나 봐.”

 

어떤 아가씨가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을 보고 지나칠 뿐 하루의 일과로 인하여 피곤한 시인이 가엾은 고양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으로 고양이를 지나쳐 시인은 집에 이르러 깊은 잠에 빠졌다. 동틀 때 잠에서 깨어나 시인의 머리를 가장 먼저 스치고 지난 것은 어젯밤 그냥 지나쳐버린 그 가엾은 고양이였다. 그래서 시인은 “가책에 싸여 달려갔다.” 그러나,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그 고양이는 떨어진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지 않았다. 누가, 어떤 모진 발길이 “떨어진 그 자리를 지킬 고양이”를 쫓아버렸을까?

 

베네딕도(Benedict of Nursia) 성인의 '정주(Stabilitas)'라는 개념이 있다. 정주란 자기 자신 곁에 있는 것, 즉 자신의 암자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책에 이런 말이 있다. "암자에 머무르며 너 자신과 노동에 집중하여라. 밖으로 나가는 것이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큼 너의 성장에 이로움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화도 나온다. 한 수도승이 아르세니오스 원로에게 말했다. "저는 금식도 못하고 일도 못하니 나가서 병자라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괴롭습니다." 그러자 거기서 악의 싹을 알아본 스승은 그에게 말했다. "가서 일하지 말고 쉬면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자거라. 그러나 암자를 떠나지는 마라!"

 

무슨 일을 하든 한 곳에서 오래 머무는 일은 일종의 수행처럼 여겨져 왔다.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한 곳에 정주하여 머무르며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러한 것을 허용치 않는다. 모든 것이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간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현상을 일컬어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라고 불렀다. 사회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액체처럼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그러한 ‘안정적인 삶’의 향수에 젖어, 액체처럼 유동하는 사회를 힘들어 하며 견딘다.

 

더군다나 느닷없이 불어 닥친 바이러스 팬데믹 현상으로 인하여 삶의 안정성은 더 위협받고 있다. 비즈니스가 묻을 닫아야만 하는 현실, 다니던 회사를 그만 다녀야 하는 현실, 그래서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한숨 짓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실 속에서 우리 모두는 불안에 떤다. 문닫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다는 소식, 목회를 그만 두고 다른 직업을 갖는 목회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 또한 마음을 아프게 한다. 떨어진 그 자리에서 자리를 지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지키던 자리를 떠나야만 한다는 현실 앞에서 “떨어진 그 자리를 지킬 고양이였는데 어떤 모진 발길이 쫓아버렸을까”라며 가슴 아픈 질문을 던지는 시인의 문장을 보며, 떨어진 그 자리를 신실하게 지킬 사람들이었는데 어떤 모진 ‘발길’에 의해 그 자리에서 쫓겨난 모두가 “부디, 이 어려운 시대를 잘 살아내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21. 4. 14. 08:37

[마음 아팠던 성금요일의 아침 풍경]

 

고난주간/부활절 임에도 모여서 마땅히 불러야할 찬양을 못 부르고 마땅히 받아야 할 말씀을 받지 못하는 이 때에, 나는 고난주간 내내 각 가정 심방을 돌고 있다. 사랑으로 환대해주는 교회 식구들의 집을 방문하여 함께 예배드리며, 고난주간에 불러야 할 찬송과 나누어야 할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한다.

 

나는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개인적으로 준비한 선물과 교회에서 사순절 기간 동안 프로젝트로 진행한 Homeless Care Bag(우리는 이것을 Blessing Bag이라 부른다/사진)을 가지고가, 예배 드린 후 나누어드리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실리콘밸리 지역은 홈리스 문제가 참으로 심각하다. 세계를 선도하는 초일류 기업이 즐비한 곳이고, 세상에서 가장 막대한 부를 창출해내는 곳 중 하나이지만, 그 이면에는 홈리스와 같은 사회적 문제들이 아주 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길거리를 지나가다 홈리스를 만나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생필품들을 조금씩 담은 "care bag"을 만들어 교회 식구들에게 나누어주고, 홈리스를 돕는 일에 모두가 동참하고 있다.

오늘 아침, 000 권사님 댁 심방을 하러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는데, 아파트 직원 몇이 나와서 한 여성 홈리스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철문 안의 아파트 단지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단지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는 홈리스를 직원들은 내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여성 홈리스(아마도 정신이 반쯤 나가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 같은)는 직원들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단지 바깥으로 쫓겨나가고 있었다.

 

이미 철문 밖으로 쫓겨나가 그 얼굴과 말에 억울함과 비참함이 섞여 나오고 있을 때, 나는 가지고 다니는 홈리스 캐어 백을 하나 꺼내들고 철문 사이로 그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캐어백을 받아든 그녀는 "이것을 정말로 자신한테 주는 거냐"고 물으며, 백 안에 들은 물건들을 살피며 연발 "Thank you"를 외쳤다. 캐어백을 품에 안고 자리를 떠나면서 소리내어 엉엉 우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성금요일 아침, 슬픈 풍경을 바라보며, 가슴이 너무 아팠다.

 

성금요일 아침, 이 슬픈 풍경을 돌아보며 촛불을 켜지 않을 수 없었고, 이렇게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세상에 태어나 같은 하늘 아래 있는데, 왜 누군가에게 이 세상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후, 지옥으로 가셔서 그곳의 영혼들까지도 보듬어 안으신 주님께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얼른 오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그 날을 다시 한 번 소망하며 기다려본다.

나는 손이 짧아 그녀에게 캐어백 밖에는 전달해주지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녀를 구원해 주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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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앞으로 올 사랑]

 

교회 식구들과 지인들의 부활절 선물로 내가 택한 것은 정혜윤 CBS 피디의 저서 <앞으로 올 사랑>이다. 이 책의 시의적절함(relevance)은 두말할 필요 없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기후변화와 팬데믹 상황 속에서 죽음이 난무하는 이 디스토피아 시대에 어떻게 인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우리의 가슴을 파고드는 질문이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 저자가 주목한 책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데카메론은 14세기 중반 유럽을 휠쓸었던 흑사병의 고통 가운데 나오는 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나온 책 치고 그 내용이 매우 발칙하기 때문이다. 흑사병으로 죽음이 난무하던 시대에 '사랑'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와 이야기를 진행한다. 10명의 젊은 남녀가 모여 열 가지의 주제에 대하여 한 사람씩 돌아가며 나눈 이야기 형식을 담은 <데카메론>처럼, 정혜윤은 그 열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물론 정혜윤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두,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기후변화와 팬데믹 위기 상황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방송사 피디로서 정혜윤은 수많은 이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그들과의 인터뷰는 이야기의 좋은 재료이다. 또한 그녀는 일상의 이야기와 더불어 본인이 읽은 소설의 이야기를 또다른 재료로 활용한다. 일상의 이야기와 소설의 이야기는 절적하게 버무려져, 우리 시대을 보듬는 '복음 같은 이야기'가 된다. 

 

최근 정혜윤 피디가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인류세'가 무엇인지 모른단다. 인류세를 '세금'으로 안단다. 또한 도시가스랑 온실가스를 구분하지 못한단다. 이런 웃픈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기후위기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지,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았다. 정 피디는 한국에 해양생물보호구역(Sanctuary)를 만들고 싶다 했다. 예전에 함께 갔던 몬트레이의 해양생물보호구역이 너무 부럽다 했다.

 

나는 한국이 하두 미국을 따라하는 터라, 한국에도 해양생물보호구역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아예 꿈도 못 꾼단다. 모두 고기를 잡아 먹을 줄만 알았지, 보호할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산단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해양생물보호구역을 한국에 설치하는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앞으로 올 사랑>은 정말 따뜻한 책이다. 인간성이 파괴되고 있는 이 디스토피아시대에, 인간성의 파괴를 막고,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뭐니뭐니해도 '사랑'의 힘을 다시 회복하는 수밖에는 없다. 요즘은 '사랑'이라는 개념도 너무 사사화되고 개인화되어서 '공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이지만, 원래 사랑의 개념은 사적인 개념이 아니라 공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좀 더 사랑을 파고 들어가면, 사랑은 신적 개념이다. 모든 생명은 신의 사랑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근본적으로 공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고 나면, 현재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을 돌아보며 마음의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 때문에 쓰레기 하나를 버리더라도, 음식을 먹더라도, 일상 속에서 그 마음의 불편함을 덜어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변화는 바로 그러한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마음의 불편함은 우리가 아직도 우리의 생명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죽음이 난무하는 이 디스토피아 시대에 아직도 삶을 선택하고자 하는 자에게 이 책을 읽어보기를 간절히(강력히 보다 강력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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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4. 13. 12:11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

(행 4:32-35)

 

주님,

경제적 평등이 부활의 증언이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경제적 평등은 너무도 묘연한 것이고

너무도 현실에서 먼 이야기라

경제적 평등이 부활의 증언이었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잘 다가오지 않습니다.

더욱이 기독교 국가나 기독교인의 비율이 높은 나라들에게서

경제적 불평등 현상이 더 심한 것을 바라보면서

부활의 증언이 얼마나 땅에 떨어지고 짓밟혔는지를 보게 됩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며

예수의 부활을 믿고 증언한다고 하면서도

부활의 증언이 경제적 평등으로 나타났던 성경의 이야기를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신화적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 이 시간,

부활의 증언을 다시 듣고 우리의 마음을 고쳐먹게 하옵소서.

회개하게 하옵소서.

경제적 평등은 부활의 증언이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고백하며

경제적 평등은 정치로 오는 것이 아니고 신앙으로 온다는 것, 그래서,

신앙은 그 어떤 정치보다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게 하옵소서.

이 부활의 증언이 현실에서 계속 좌절되고 부대끼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부활의 증언을 포기하지 말고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우리가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고백하며

아낌없이 나누고, 또 나누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4. 13. 11:59

부활의 증언

(사도행전 4:32-35)

 

얼마전 이런 글을 써서 포스팅 한 적이 있다.

 

[요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책을 보다 이런 문장을 읽었다. "I was country, when country wasn't cool(컨츄리 음악하는 것이 멋지지 않았던 때에 나는 컨츄리 음악을 했다(또는 컨츄리 음악을 좋아했다))." 이것은 바바라 만드렐(Barbara Mandrell)의 컨츄리 송의 가사인데, 제임스 스미스가 존 카푸토를 묘사하면서 가져다 쓴 문장이다. 그는 존 카푸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Caputo was an Augustinian before being an Augustinian was cool(카푸토는 어거스틴주의자가 되는 것이 멋졌던 시기 이전에 어거스틴주의자였다)"

 

이런 문장을 보면서,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나는 모태신앙이고, 1930년도부터 기독교신앙을 가지게 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이 멋진 일이 되기 이전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기에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역사에서(또는 미국 역사에서) 현재만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때가 있었나 싶다.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고, 목사를 먹사라 하며,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회악이라고 비난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훗날, 나는 오늘날을 뒤돌아보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멋지지 않았던 때에도 그리스도인이었다. I was a Christian when being a Christian wasn't cool." 이렇게 고백하기 위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 또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전에도 그리스도인이었고, 오늘도 그리스도인이며, 내일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사실 이런 고민은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나만, 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만 이런 고민을 한 것이 아니다. 여호수아서에서도 비슷한 고민과 고백이 등장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나는 이전에도 그리스도인이었고, 오늘도 그리스도인이며, 내일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동일한 맥락의 고백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러한 고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전하는 사도행전을 가만히 읽다 보면, 그때(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와 지금 시대 간의 신앙의 괴리 현상이 발견되어 적지 않은 당혹감을 경험하게 된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이때의 경험은 육적 경험과 더불어 그것을 넘어선 영적 경험이다)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키워드는 ‘부활의 증언’이었다. 이것은 그들 만의 독특하고 유일회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다. 부활의 증언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자, 또는 믿는 자에게서 발생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우리의 삶 가운데, 이 보편적인 현상이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의 삶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의 삶의 키워드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나의 삶의 키워드는 ‘부활의 증언’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물론 교회에 와서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부활의 증언’보다 ‘성공’이 삶의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이렇게, 신앙과 일상의 영역을 분리하여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신앙의 영역에서는 ‘부활의 증언’이 키워드 일지 몰라도, 그것이 삶의 전영역의 삶의 키워드가 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한 혼란과 비극을 가져오고 있다.

 

부활은 신앙의 영역에서만 발생한 일이 아니다. 부활은 삶의 전영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부활은 모든 시공간을 덮는 사건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을 우주적 사건이라고 칭한다. 이 세상 구석구석 부활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부활 사건은 땅 끝까지 전해져야 하는 보편적 사건(누구나 알아야 하고,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성령을 받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증언은 사도행전 2장 14절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광장에 서서 소리 높여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가 부활의 증언을 마치자,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어딘 가에서는 이러한 일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는 더 이상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곳에서, 어떤 시대를 살고 있길래, 이런 일을 경험하기 힘들까. 이런 생각을 하면, 설교자로서 무력해지기도 한다.

 

사도행전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부활의 증언을 했을 때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았다.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치는 이야기는 재미난 것을 보여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쳐주는 이야기는 주일학교 때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찬양 때문이다.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사건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공의회에 잡혀간다. 그런데, 공의회에 잡혀간 이유는 그들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쳐 주어서가 아니다. 그 상황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한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되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행 4:1-2). 베드로와 요한이 공의회에 잡혀간 이유는 ‘부활의 증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즘 예수의 부활의 증언을 하다가 핍박을 받는 일은 없다. 적어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는 그렇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부활의 증언’을 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4장에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생소한 풍경이다. 다른 부활의 증언 사건들은 실제 우리 삶 속에서 발생한다고 해도, 그렇게 큰 저항감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핍박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본문에서 증거되고 있는 풍경이 현실에서 성취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저항이 심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누가는) 경제적 분배 행위(경제적 평등/요즘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경제적 불평등과는 달리)를 ‘부활에 대한 증거’로 제시한다.

 

우리는 정치적 핍박은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경제적 평등은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의 증언을 반쪽만 하는 것이다. 부활의 증언은 정치하고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경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 우파, 또는 기독교 보수주의(또는 복음주의)의 사악함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부활의 증언을 정치하고만 연결시킨다. 그들은 부활의 증언을 경제적 평등과 연결시키는 것을 꺼려한다. 이것은 비겁한 일이다. 그들은 그렇게 ‘성경, 성경’하면서도 실제로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고, 부활의 증언인 경제적 평등을 철저하게 외면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평등을 마르크스주의로 생각하면, 그것은 부활의 증언을 매우 오해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기독교의 경제적 평등은 닮은 구석이 있지만,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는데,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적 평등(공산주의)는 무신론적 경제의 평등이지만, 기독교의 경제적 평등은 명백한 ‘부활의 증언’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적 평등은 모더니티의 산물이지만, 기독교의 경제적 평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선물’이다.

 

본문을 차근히 다시 읽어보면 이렇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33-35절). 여기서 보면, 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의 실제적인 결과, 열매, 선물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부활의 증언이 온전히 전해지는 곳에 나타나는 현상 중 매우 고무적인 현상은 바로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부활의 증언이 온전히 선포되는 곳에 오는 것은 마음의 평안이 아니라 물질의 평등이다. (부활은 우선적으로 심리학이 아니라 경제학이다!)

 

사도행전은 부활의 증언을 통해 주님의 선물로 임하는 경제적 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뒤, 부활의 증언이 긍정적으로 작동한 예와 부정적으로 작동한 예를 하나씩 전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작동한 예는 바나바라 일컬어졌던 레위 사람 요셉의 이야기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는 부활의 증언을 듣고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둔다. 부정적으로 작동한 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통해 제시되는데, 그들은 부활의 증언을 듣고 소유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온전히 내놓지 못하고 얼마간 감추었다가 결국 생명까지 빼앗기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요즘 부동산 문제로 대표되는 경제적 불평등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부활의 증언’이 얼마나 희귀한 세상이 되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더욱이 지구에서 가장 부자 나라들은 대개 기독교 국가이거나 기독교 비율이 높은 나라들인데, 그러한 부자 나라들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부자 나라들과 가난한 나라들 사이에 경제적 불평등이 심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만 보더라도,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증언’을 입으로만 하고, 삶으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를 보게 된다. ‘부활의 증언이 실종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경제적 평등은 정치 또는 국가 정책으로 오지 않는다. 정치 또는 국가의 권력은 경제적 불평등을 더 조장할 뿐이다. 그것이 정치 또는 국가 권력이 지닌 현실적인 한계이다. 그들은 힘 있는 자들을 우선시하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평등은 부활의 증언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경제적 평등은 부활의 증언을 삶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온다. 부활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부활의 현실을 사는 자는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는다. 지금 이러한 부활의 증언을 들으면서 이러한 부활의 증언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부활의 현실성을 전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경제적 평등이 부활의 증언이었다’는 엄연한 성경의 증언은 이 시대에 가장 외면당하는 부활의 증언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성경을 금쪽같이 여기면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고 비극이다. 예수 믿으면 꿈이 이루어지고, 잘 먹고 잘 살게 되고, 평안이 온다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경제적 평등이 부활의 증언이라고, 부활의 증언을 하는 자, 또는 부활의 증언을 들은 자는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멋지지 못한 이유는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잘 먹고 잘 살지 못해서, 평안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멋지지 못한 이유는 부활의 증언이 경제적 평등으로 이어지는 부활의 현실성이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사회 속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고, 아무리 정부에서 훌륭한 정책을 내어놓아도, 정치나 국가가 경제적 평등을 이룰 수 없다.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한다. 경제적 평등은 부활의 증언이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증언을 현실로 살아간다면, 정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증언한다면, 선물처럼 임하는 것이 경제적 평등이다. 경제적 평등은 정치로 오는 것이 아니고 신앙으로 온다. 그래서 신앙은 그 어떤 정치보다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부활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자기의 것(property)’라 주장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선포하며, 최선을 다해 나눔의 삶을 살자. 그리하여 정치보다 신앙이 위대하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자. 그러면, 초대교회에서 발생했던 바로 그 일, “부활의 증언을 보고들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의 역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개독교라고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에 칭송을 받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질문한다. 당신의 삶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성공인가, 부활의 증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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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