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 타이틀 42 / Federal Title 42]

 

바이러스 팬데믹이 발생하고 나서 미국 연방정부는 타이틀 42라는 법령을 제정해서 미국 남부 국경을 통해서 망명을 하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이유로 그들의 망명신청을 거부해 왔다.

 

AP 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 법 때문에 이민자들은 2020년 3월 이후에 190만 회 이상 추방되었다. 세상이 혼란해지면 사람들은 보수적인 자세(자기 생명을 먼저 보호하려는 이기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이기적 존재'로 불린다.

 

법이라는 것은 참 묘한 것이다. 법은 자기의 테두리 안에 있는 존재를 보호하지만, 자기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존재는 철저하게 배제시킨다. 19세기 이후로 민주주의 체제가 각 국가의 운영 방식으로 들어서고 법치국가를 표방하는 국가가 늘어나면서 법의 중요성은 더 부각되었다.

 

법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현대사회는 법 문제가 아주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었고, 법 바깥으로 밀려나면 곧 죽음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법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깊어졌고, 법의 테두리 바깥에 머무는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명명한 철학자도 생겨났다.

 

연방 타이틀 42에 의해서 코로나19 확산 방지의 목적으로 망명 신청 거부를 당한 이민자들은 이 시대의 전형적인 '호모 사케르'이다. 그들은 법 바깥으로 밀려나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그들이 경험했을 이중의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자주 법조문과 성령의 법을 대조시킨다. 문자로 기록된 법령에 의해서 사는 자와 영혼에 새겨진 성령의 법에 의해서 사는 자를 대조시킨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은 법조문에 의해 사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자로 인식된다.

 

법조문과 성령의 법은 무엇이 다를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법조문은 안과 밖을 구분하고 차별한다. 법은 자기 테두리 안에 들어온 존재를 보호하지만(물론 이것도 모호하다) 자기 테두리 바깥에 있는 존재는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러나 성령의 법은 법조문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성령의 법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안과 바깥이 없다. 포괄적이다. 그래서 성령의 법은 모든 존재를 구원한다.

 

개개인이 성령의 법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시대인지 모른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법조문은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자기 안에 있는 존재만 보호하고 자기 바깥에 있는 존재에게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그러나 그러한 법조문을 가진 사회에 살고 있더라도 개개인이 성령의 법 안에서 산다면 법조문이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는 '호모 사케르'를 얼마든지 구원할 수 있다. 법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법,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기 보존 욕구가 강한 국가라는 체제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국가의 법 체계를 넘어선 성령의 법 안에 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세상이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더 중요하다. 국가(집단)은 자꾸 존재를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려 들겠지만, 그 소외되고 배제된 존재를 성령의 법으로 다시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땅에 성령의 법에 의해 움직이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법이 법조문을 넘어서는 아주 강력한 사랑의 법이라는 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법 바깥에서 죽으신 분이고, 호모 사케르로서 이 땅의 모든 호모 사케르를 구원하신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성령의 법으로 산다면, 그것만큼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연방 타이틀 42가 어서 빨리 폐지되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소망을 가져다주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기도문2022. 5. 30. 08:12

하나님을 메고 다니기를 간구하는 기도

(출 40:1-38)

 

주님,

출애굽기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경험의 일상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웁니다.

주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대면하여 만나시고

그 절대적인 경험을 일상에서도 이루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셨음을 봅니다.

주님,

우리도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악에 희생당하지 않고

저주의 길로 들어서지 않으며

온전하게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막이 필요함을 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보게 하시고

우리의 발걸음마다 하나님을 메고 다닐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과 지혜를 주옵소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몇 발자국 가다가 불평과 원망에 휩싸이게 되고

죄의 길로, 저주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우리의 연약한 삶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신앙의 일상화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주님,

성막이 완성되어 그 성막이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놓였을 때

그들이 그들의 두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의 일상 가운데서 보는 광경은

너무도 경이롭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두 눈으로 보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30. 08:08

하나님을 메고 다니라

(출 40:1-38)

 

1. 인간은 죄인이고, 세상은 죄로 물들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보존하고 싶지만, 때로, 우리에게 발생하는 일들, 또는 우리가 저지르는 일들을 보면, ‘죄’라고 하는 용어는 인간에게, 또 이 세상에서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이 고개를 들었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이 죄 많은 세상을 견딜 수 없기에, 이 죄 많은 세상을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간절함이 베어 있는 것이다.

 

2. 영국의 작가 존 번연이 1687년에 쓴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라는 소설이 있다. 존 번연이 활동하던 시대는 가톨릭에 의한 개신교 박해가 난무하던 때이다. 존 번연 자신은 종교가 없었으나 청교도였던 여인(Mary)과 결혼하여 개신교인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역경의 삶을 살았다. 박해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기 때문에, 그 당시 종교전쟁은 무서웠다.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아, 신앙을 갖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행위와 같았다. 요즘 우리가 헌법에 의해서 보장받고 있는 ‘신앙의 자유’는 오랜 세월 전쟁을 통해 일군 피의 열매이다.

 

3. 번연이 살던 시대의 국왕인 찰스 2세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제외한 기독교 교파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침례교도였던 존 번연은 비밀집회(허가 없이 복음을 전하는 집회)를 연 혐의로 12년 동안 투옥되었다. <천로역정>은 감옥에서 탄생한 불후의 명작이다. 존 번연의 인생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17세기(1600년대) 영국의 종교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고, 어떠한 분위기(또는 어떠한 심정)에서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으로 이주해 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4. 그런데, 그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참 재밌는 사실이 있다. 종교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을 밟은 청교도들은 미국 땅에서 또다른 박해를 저지르게 된다. 미국의 작가 나다나엘 호손이 쓴 <주홍글씨>라는 소설에 그 이야기가 잘 담겨 있다. 청교도들(Puritians)은 서방 기독교가 너무 제도화되고, 영국 국교회가 너무 국가중심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제도중심과 국가중심의 신앙을 거부하며 성경중심(복음중심)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겠다고 가톨릭, 또는 영국 국교회와 한 판 대결을 벌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고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미국 땅에서 자신들을 박해하던 이들과 다를 바 없이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도덕적으로 순결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이들을 처참하게 박해 한 일들을 보면, ‘이건 뭐지’라는 어리둥절한 마음을 갖게 된다.

 

5. 신영복 선생이 <담론>이라는 책에서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미를 여행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잉카와 아즈텍에는 전설이 있었는데, 수염이 하얗고 피부가 하얀 백인이 언젠가 자기들을 도와주러 나타나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미를 침략하러 갔던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그 전설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 전설 속의 인물인 양 행세한다. 남미는 콜럼버스가 상륙한 이래도 약 1,600만명이 살해당한다. 그래서 남미인들은 자신들을 속이고 점령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코르테스와 피사로를 원망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참으로 절묘했다.

 

6. 남미의 침략자들은 당연히 남미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온갖 술수를 부렸다. 침략자들과 함께 한 가톨릭 신부들은 전형적인 부패세력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남미인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을 했고, 또한 남미인들과 혼혈을 이루어 살았다. 그러는 와중에 1,600만명의 남미인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북미를 점령한 청교도인들은 남미의 부패한 가톨릭 신부들에 비해서 엄청 청렴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 청교도인들이 북미를 점령하면서 죽인 인디언의 숫자는 4천에서 6천만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신영복 선생은 이런 말을 한다. “부패와 청렴의 의미가 역전되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334쪽).

 

7. 부패세력은 그래도 자신들의 점령지 시민들을 개종하려고 노력하고, 그들과 혼혈을 이루어 살려고 노력을 했는데, 청렴세력은 개종이나 혼혈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인종청소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패한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를 보면 청렴한 사람들이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부패란 무엇이고, 청렴이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이렇게 알쏭달쏭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고, 이 세상은 죄에 물들어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8.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구약에서 출애굽기만큼 역동적인 복음을 증거하는 곳은 없다. 그래서 나는 출애굽기는 구약의 복음서라 부르는 것이다. 무엇보다 출애굽기는 우리 삶이 처한 현실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삶은 ‘광야’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애굽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애굽을 죄인의 삶이라고 칭하고, 가나안을 의인의 삶이라고 칭한다면, 우리의 삶은 죄인의 삶과 의인의 삶 어디쯤 중간에 있다는 것이다.

 

9.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죄인이 되기도 하고 의인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좀 더 부드러운 말로 고쳐서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형편없는 삶이 되기도 하고 좋은 삶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모세 오경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자면, 우리 앞에는 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놓여 있다. 신명기는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6-28).

 

10.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누차 강조하듯이,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은 절대적인 것이다. 시내산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들은 ‘광야’라고 하는 척박함과 무미건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애굽으로 되돌아 갔을 것이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출애굽기의 또다른 버전일 뿐이다. 이 책은 주인공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장망성/장차 망하게 될 도시/애굽)’을 떠나 천국(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또는 역경들을 담고 있다.

 

11. 출애굽기에서도 그렇고 천로역정에서도 그렇고, 이스라엘이, 또는 크리스천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산에서 내려와 성막(성소)을 만든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일상화시키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들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그저 척박한 광야 밖에 없었다.

 

12. 40장으로 되어 있는 출애굽기에서 장장 15장이 성막에 대한 이야기다. 열 다섯 장에 걸쳐 성막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누가 성막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일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아주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용이 너무 꼼꼼해서 지루하고 재미없다. 게다가 우리는 성막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우리의 일상과는 너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고 느낀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성막이 가진 의미를 함께 상실하고 만다.

 

13. 하지만, 적어도 한 번쯤은 출애굽기 25장에서부터 시작하여 40장에서 끝나는 성막 이야기를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삶을 꼼꼼하게 돌아보는 것이다. 나의 일상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나의 일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져 있는지. 하나님 경험의 일상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내 삶 속에는 성막이 세워져 있는지. 이러한 것들을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

 

14.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을 꼼꼼하게 지어서 비로소 봉헌한 날, 즉,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친” 후, 시내산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진중, 즉 이스라엘의 일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넘쳤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34-38 부분). 이스라엘은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한걸음한걸음 옮기는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은혜를 두 눈으로 보았다.

 

15. 이스라엘은 성막을 만들어 광야에서 그것을 메고 다녔다. 성막은 단순히 ‘물건이나 물품’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성막은 ‘하나님’이었다. 그들이 메고 다닌 것은 단순히 성막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메고 다녔다. 하나님을 메고 다니니 그들이 아무리 광야 길을 걸었지만 광야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길은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광야 길을 인도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길을 잃지 않고,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16. 너무 멋지고 장엄하지 않은가! 길을 잃어버리기 딱 쉬운 이 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 광야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 길을 잃지 않으려면, 길을 잃어 멸망의 도시로 되돌아 가거나, 길 가는 중에 죽어버리거나, 길 가는 중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에 휘말리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출애굽기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것’ 밖에는 없다. 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광야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저주의 길로 들어서 멸망하지 않고 복의 길로 들어서 천국에 이를 수 있는 방법, 복음을 알고 있다.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출애굽기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17. 하나님을 메고 다니라.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하나님을 메고 다니면,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여주실 것이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우리로 하여금 마시게 하실 것이다. 가야 할 방향으로 온전히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메고 다니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을 메고 다니라  (0) 2022.05.30
가능주의자  (0) 2022.05.23
언약의 피  (0) 2022.05.16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  (0) 2022.05.10
우리들의 십계명  (0) 2022.05.05
시내산에 오르라  (0) 2022.04.25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기도문2022. 5. 23. 15:02

예배 노동자(가능주의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출 36:1-7)

 

주님,

구약의 복음서, 출애굽기를 통하여

성막 이야기의 중요성과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

가능주의자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그 행복한 경험을

일상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예배는 노동인데, 우리는 예배를 만들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 위해서

어떤 노동을 하고 있는지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고

팬데믹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예배의 자리에 ‘힘을 다해’ 나오지 못한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제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사모하게 하시고

그 은혜의 샘물에 흠뻑 젖을 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들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내산에서의 절대 경험을

성막 제작을 통하여 가능하게 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우리도 십자가에서의 절대 경험을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일상에서 가능하게 하는

가능주의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함께 힘을 다해, 노동의 수고로움을 통해

예배를 만들어 가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그 어떤 것도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막아서지 못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성령을 통해 모든 것을 가능하게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23. 15:01

가능주의자

(출애굽기 36:1-7)

 

1. 1999년도에 개봉한 <박하사탕>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강렬하게 시작한다. 직업도 가족도 모두 잃은 주인공 영호(설경구 분)가 20년 전 첫사랑 순임이랑 소풍 갔던 곳의 철로 길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철규로 시작한다. 우리는 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가지고 있다. 우선 우리에겐 팬데믹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는 모두 이러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신앙생활의 풍경이 너무도 바뀌어 버려서 우리는 아직도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2. 사실, 풍경이 바뀐 것은 팬데믹의 영향도 있지만, 과학기술 발달의 영향이 더 크다. (물론 이외에도 정치, 경제적, 문화적 요인도 있지만) 만약 온라인 플랫폼이 발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과 사뭇 다른 신앙생활의 풍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신앙생활(교회의)의 옛 풍경을 되찾자고 온라인 플랫폼을 모두 없앨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안에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한결같이 스마트 폰(동네 사람 스티브 잡스, 공공의 적)을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스마트폰을 없앴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변화(비가역적 변화/irreversible change)이다. 적응하면서 건전한 문화를 창조해 나갈 수밖에 없다.)

 

3. 팬데믹과 관련된 것 말고, 우리들 인생 가운데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지 않은가? 대개 우리는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재미 있는 추억이 있거나, 아니면 사랑받았던 시절 말이다. 인생이 재미없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으면, 우울해지고 별로 살고 싶은 생각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 별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행복한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4. 나는 개인적으로, 돌아보면, 학창시절을 참 행복하게 보냈다. 특히,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3학년 때로 돌아가고 싶다. 왜 나는 학창시절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곰곰이 돌아보니까, 그 시절 나는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과 교회 학생부에서 정말 재미난 추억을 많이 만들었고, 무엇보다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참 많이 받았다. 내가 요즘은 그냥 전형적인 아저씨가 되어서 사람들이 잘 믿지를 않는데, 학창시절에 나는 늘 전교적으로 유명인사였다(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모두 그랬다). 돌아보면, 내 인생 가운데 지금이 가장 유명하지 않은 시절을 보내는 것 같다.

 

5.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이 있다. 발생했던(또는 존재했던) 어떤 일/사건/경험 등을 지금 다시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현재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특정한 시기,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기억하는 이유는 그 행복을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삶 속에 재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우리가 결혼을 하는 이유가 뭔가? (사랑해서!) 요즘엔 결혼이라는 것의 의미도 많이 퇴색이 됐다. 최근 뉴스를 보니까, 소개팅 앱이 있는데, ‘고학력자가 아니고, 연봉 3천 이하 남성’은 가입 자체가 안 되는 앱을 어느 결혼정보회사에서 개발해서 뭇매를 맞았다. 여성 가입 제한은 없는데, 남성은 이렇게 가입 제한을 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남자들이 이래저래 참 살기 힘든 사회인 것 같다.

 

6. 결혼은 일차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게 자유연애의 정신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런 가장 기초적인 사랑의 자유조차도 빼앗는 사회가 된 것 같다. (마르크스가 이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자본론을 쓴 것.)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게 아니라, 삶의 안위/신분상승, 이러한 사랑 이외의 가치가 사랑의 가치를 밀어내는 것 같다. 연애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하고, 결혼은 돈 많은 사람하고 하고, 뭐 이런 가치가 만연한 것 같다. 사랑의 가치를 좀 잘 보존하고 지키면 좋겠는데, 세상이 잘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가 사랑해서 결혼한다면, 결혼하는 이유는 연애할 때의 그 사랑의 상태가 너무 좋아서 그것을 영원히 재현(representation)하고 싶어서 결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재현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영원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랑의 가치를 보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위대한 것이다.

 

7.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구약성경이 중요한가, 신약성경이 중요한가? (엄마가 중요한가 아빠가 중요한가? 엄마를 더 사랑하는가, 아빠를 더 사랑하는가?) 기독교인들은 왠지 모르게, 신약성경을 구약성경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초대교회사 수업에서 공부했듯이, 그러한 생각은 영지주의적인 생각이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교회에 영지주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는 증거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 그래서 기독교 성경은 신구약(구약 39권/신약 27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8. 출애굽기는 구약의 복음서다. 신약의 복음서는 출애굽기의 재현이다. 좀 더 큰 틀에서 말한다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재현이다. 구약성경을 모르면, 신약성경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산으로 간다. 가장 심한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한 구약성경의 재현이다. 요한계시록을 잘 이해하려면, 로마제국에 대한 이해보다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가 더 광범위하게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공부 할 때, 구약성경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라. 그래야 신약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이 구약성경 공부 많이 한다고 절대로 유대인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9. 당장,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시내산 언약에서 핵심적인 용어는 8절에 나오는 ‘언약의 피(the blood of the covenant)’라고 했다. 이것은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마지막 만찬에서 재현된다. 마지막 만찬(성만찬)에서 핵심적인 용어가 무엇인가? 언약의 피’다. 이렇게 신약은 구약을 재현한다. 구약을 모르면 신약에 왜 그러한 용어와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다.

 

10. 출애굽기는 ‘복음’, ‘십자가 사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구약성경이다. 그런데 출애굽기 하면, 홍해 갈라지는 이야기가 너무 웅장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만 기억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크게 세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1) 애굽에서 나오는 이야기(열 가지 재앙과 홍해 이야기) 2)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이야기(십계명 이야기), 3) 성막 이야기. 그런데 우리는 출애굽기를 생각할 때, 성막 이야기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안타까운 현상이다. 출애굽기는 40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성막 이야기가 25장부터 40장까지, 장장 15장에 걸쳐서 나온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11. 출애굽기와 구약성경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난 주에 살펴 보았듯이) 출애굽기 24장 1-11절이다(언약의 피). 이곳은 시내산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이 체결되는 장면과 언약 체결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연회(잔치)를 벌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장면이 재현되는 신약성경은 복음서의 최후의 만찬 장면이다(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의 혼인잔치도 마찬가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피의 언약을 맺고 그들과 연회(잔치)를 벌인다. 우리는 이것을 ‘성만찬’을 통해 재현한다. 성만찬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예배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12. 출애굽기에서 성막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성막 세미나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성막에 대해서 자세하게 공부할 필요는 없다. 출애굽기 25장 이후를 우리가 잘 모르는 이유도 25장 이후에 나오는 성막에 대한 율례가 복잡하고 지루하기 때문에 읽어 내려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슨 암호 같기도 하고 방정식 같기도 하다. 그래서 골치 아프다. 그렇다 보니, 성막 이야기가 마음에 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성막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성막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13. 성막은 무엇일까? 성막은 시내산 언약의 재현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0-11). 이스라엘에게 이 경험은 절대 경험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이 너무 절대적이어서 그것을 영원히 현재화시키고 싶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그 사랑을 재현하듯이(로미오와 줄리엣 보면, 그 사랑을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서 재현할 수 없으니까 좌절하고 절망해서 독약 마시고 막 죽잖아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을 영원히 현재화시키기고 싶었다. 성막은 하나님 경험에 대한 재현이다.

 

14. 출애굽기에서 가장 따뜻한 구절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다.

 

“모세는,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주님께서 그 마음에 지혜를 더하여 주신 기술 있는 모든 사람, 곧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기꺼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불러모았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의 제사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데 쓰라고 가져온 모든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았다. 그런 다음에도 사람들은 아침마다 계속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 왔다. 그래서 성소에서 일을 하는 기술 있는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세에게로 와서, 이르기를 "백성들이,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는 데에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것을 가져 오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진중에 명령을 내려서 '남자든 여자든, 성소에서 쓸 물품을 더는 헌납하지 말라'고 알리니, 백성들이 더 이상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물품은 그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할 뿐 아니라, 오히려 남을 만큼 있었다. (새번역, 출 36:2-7)

 

15. 브살렐과 오홀리압. 성경을 읽어본 사람, 성경을 좀 아는 사람, 성경공부를 좀 해본 사람과 성경을 안 읽어본 사람,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 성경공부를 안 해본 사람을 구분 짓게 해주는 이름들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아는 사람은 ‘그래도 내가 성경공부를 좀 했구나’라고 생각하면 되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 분발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성경말씀은 문자가 아니라 인격이다. 사귐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공부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사귐을 가져야 아는 것이다. 성경을 아는 만큼 신앙이 깊어진다. 이것은 불편의 진리다. 성경을 모르면서 신앙이 깊어질 수 없다. 그것은 배우 정우성을 만난 적도 없고 사귐을 가진 적도 없으면서 정우성을 잘 안다고, 친하다고, 거짓말하는 것과 같다.

 

16. 성막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재현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것이 재현되려면, 성막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율례대로 성막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재현될 수 없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성막을 만든 사람들이다. 오늘 말씀 제목과 연관해서 다른 말로 하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가능주의자이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이다. 성막을 만든 이유는 시내산 경험의 일상화를 위해서이다. 천상에서의 축제가 일상에서 울려 퍼지게 한 자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가능주의자이다.

 

17. 성막과 성전의 기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기독교의 예배이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일상화이다. 2천년 전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있었던 유일회적인 구원 사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복음의 선포가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온 것이 예배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예배의 관점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말하면, 그들은 예배자들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많은 노동을 해야만 했다.

 

18. 우리가 잘 모르는 예배의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배는 ‘예전(Liturgy)’라고 부른다. Liturgy는 ‘노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막을 만든 사람들은 요즘말로 하면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을 통해서 성막을 만든 것이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 예배를 만든다는 것은 성막을 만드는 것처럼 노동이 필요한 작업이다. 노동만큼 창조적인 일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노동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창조해 낸다. 

 

(노동 안하고 돈 버는 것을 불로소득이라 한다. 노동 안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불로은혜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선물이라는 뜻은 노동(노력)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노동과 노력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닌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보잘것없는 노동과 노력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주신다는 의미에서 은혜인 것이다.)

 

19. 세상에 그냥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무엇이든지 노동이 필요하다. 피아노 잘 치는 거, 얼마나 힘든가. 엄청난 시간과 노력, 즉 노동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한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해서 엄청 노력을 한다. 아이들도 피아노 치느라 엄청 고생한다. 물론 이상한 현상도 있다. 피아노 배우기 싫다는 아이한테 그렇게 피아노 배우라고 푸쉬해서 아이가 피아노 배우고 난 후, 아이가 대학 들어갈 때 피아노 전공하겠다고 하면 부모들은 당장 때려 치우라고 한다. 애들이 헷갈려한다. 하기 싫은 거 배우라고 할 때는 언제고, 본격적으로 배워보겠다는데 이제와서 왜 때려치우라고 하는지.)

 

20. 우리가 출애굽기의 성막 이야기를 통해서 단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겠다. 예배는 노동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을 만들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가능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성막을 통해서 시내산에서 경험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일상화 할 수 있었다. 특별한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 경험의 일상화는 더 중요하다. 어떤 계기로 하나님을 만나고 영접한 경험이 중요하지만, 그 경험이 그때뿐이면 무엇 하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내가 언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될 뿐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 아득하죠. 시간이 지나면 감정과 감동이 없다.) 그러나 경험의 일상화는 절대 경험에서 온 풍성한 사랑과 은혜 안에 계속해서 거하게 한다.

 

21. 예배는 신앙의 샘물이다. 에스겔서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완전히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환상을 본다. 예배가 무너져 있으니, 이스라엘이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는지 모른다. (인생이 괴롭거든 자신의 예배를 돌아보라. 무너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배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결국 이겨낸다. 지금 아무리 행복해도 예배가 무너진 사람은 미래가 가장 불안한 사람인 거다.) 그래서 에스겔은 무너진 이스라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처지를 슬퍼하면서 기도할 때에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지는 환상을 본다. 그 환상은 너무도 자세해서 마치 설계도면을 보는 것 같다. 에스겔의 환상은 47장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에스겔은 성전에서 흐르는 물을 본다.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은 점점 많아지더니 강을 이루고 헤엄쳐서 건너지 못할 만큼 큰 강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큼 크고 깊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지만, 에스겔의 환상, 예배가 회복되는 환상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22. 출애굽기의 성막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노동을 통해서 성막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이 세워지면 좋겠다. 예배는 신앙의 샘물이다. 생수가 예배의 자리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은혜의 강에 몸을 담그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하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는 살지 못한다. 이것은 잔소리가 아니라 진리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내산의 경험이요, 십자가의 경험이다. 예배는 그 경험의 일상화이다. 예배를 만드는 자, 예배에 나오는 자는 모두 노동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만들고 나와야 한다. 우리의 노동이 하나님 만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가능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가.

 

23. 팬데믹으로 인하여 신앙의 일상이 형편없이 무너진 이 때에 우리 모두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힘을 다해 예배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이 어려운 시대를 넉넉히 이겨내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당신은 가능주의자입니다!” “당신은 예배 노동자입니다.” “우리 함께 힘을 다해 예배를 만들어 갑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을 메고 다니라  (0) 2022.05.30
가능주의자  (0) 2022.05.23
언약의 피  (0) 2022.05.16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  (0) 2022.05.10
우리들의 십계명  (0) 2022.05.05
시내산에 오르라  (0) 2022.04.25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민주주의의 위기]

 

"자유와 민주주의 원리상 피지배자에 의한 지배자의 통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정치적인 힘은 경제적인 힘을 통제할 수 있다. 경제권력은 정치권력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위협하는 힘이다. 피지배자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통해서 정치적 지배자를 통제할 수 있고, 그 통제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경제권력도 통제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176쪽)

 

한국의 국가체제를 고려해 볼 때 여기서 피지배자는 '국민'을 말하고, 지배자는 '선출직 공무원'을 말한다. 요즘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용어를 많이 접한다. 왜 요즘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것일까?

 

위의 문장을 통해서 파악해 보자면,

첫째, 피지배자에 의한 지배자의 통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일수도 있고, 경제생활(먹고사니즘)에 매여 있는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또는 여력없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오는 것 같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먹고사니즘의 지옥에 처박아 놓고 절대로 구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가진 결정적인 아킬리스건인데, 대한민국은 태생부터 국가-재벌 주도의 경제체제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즉, 한국에서 정치권력은 곧 경제권력과 그 뜻을 같이 한다. 정경유착이라는 말로 이것을 표현하는데, 한국의 상황에서는 정경유착보다 정경애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뜻이다. 이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길은 시민사회가 깨어서 민주주의의 원리가 잘 작동되도록 견제하고 요구해야 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나아갈 바를 생각해 본다. 교회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에 축복을 빌어주며 그들을 성화시키는 데 혈안이 되고 말면, 결국 민주주의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시민사회를 이끄는 리더가 되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견제하고, 그들에게 민주적 통제 안에 머물러 있기를 강력히 요구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주도해 나간다면, 교회는 민주주의의 견인차가 될 뿐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부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선(goodness)의 실험 현장이다. 인간이 선을 어느 정도까지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현장이 민주주의이다. 종말(선의 실현)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현장에서 선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어디까지 선을 실현할 수 있는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선의 실현을 끝까지 밀고 나가며 최선봉에 설 수밖에 없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민주주의는 이것의 실천이다.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기도문2022. 5. 16. 16:47

언약의 피를 간구하는 기도
(출 24:1-11)

 

주님, 구약성경에서도 신약성경에서도 핵심 단어는 ‘언약의 피’입니다.

우리는 언약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선다는 것은 삶이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달라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더 좋은 삶, 더 행복한 삶, 더 풍요로운 삶을 살기 원하는 우리들이지만,

막상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언약의 피’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삽니다.

그렇다 보니, 더 좋은 삶, 더 행복한 삶, 더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엉뚱한 것에 가까이 다가서서 그것을 향하여 은혜를 간구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주님, 우리는 오직, ‘언약의 피’를 기억합니다.

언약의 피를 무겁게 생각합니다.

언약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은총을 입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언약의 피를 기억하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다시 우리에게 뿌려 주옵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주님의 은총을 입고

삶의 모든 문제들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언약의 피. 언약의 피. 언약의 피.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날마다 언약의 피를 묵상하면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언약의 피를 모든 이들에게 쏟아부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16. 16:46

언약의 피

(출 24:1-11)

 

1. 군사부일체. 군주(임금)와 스승과 아버지는 동일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이 군사부일체라는 개념 때문에 기독교의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한국인들에게 잘 받아들여졌지만, 또한 왜곡되기도 했다는 생각.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다. 이런 개념은 잘 받아들여졌는데, 삼위일체의 개념이 너무 가부장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군사부일체라는 가부장적 개념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성경에서 군주와 스승과 아버지의 개념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모세가 유일하다.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책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르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모세라는 인물과 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나라의 근간이다. 모세의 신비로운 출생 이야기부터 그의 고난, 그리고 그의 능력과 활동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보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견주어서 전혀 손색이 없다. 오히려 모세와 같은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3.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모세의 위상은 넘사벽이 되어 간다.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 캠프를 치고 그곳에 머물지만, 모세는 하나님이 부르심에 따라 홀로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만나기를 반복한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장로 70명을” 데리고 시내산에 올라오라고 말씀하시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모세뿐이었다.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2절).

 

4. 24장은 시내산 언약체결식을 기록하고 있다. 20장의 십계명 이후에 24장의 언약체결식이 나오기까지 출애굽기는 각종 율례들(율법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즘 우리 시대에 직접 통용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정신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 정신은 한마디로 ‘정의(Justice)’이다. 정의의 핵심은 인권(human rights)에 있다. 인간의 권리(인간의 존엄성/dignity)를 보호하는 것. 그 중에서도 특별히 약자에 대한 인권 보호가 정의의 핵심이다. 사회적 약자는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일이 쉽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5.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례들(율법들)을 다 지키기로 “한목소리로 응답”하고, 언약식체결을 위한 준비를 한다. ‘정의’라는 말을 써서 다시 풀이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제단을 쌓고, 열 두 지파대로 기둥을 세우고, 소를 드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그리고 피(소의 피/제물에서 얻은 피)를 가지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대접에 담았다가 언약서를 낭독한 뒤 백성들에게 뿌렸다. 그러면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8절).

 

6. 현대인들에게 낯선 장면이다. 현대인들은 피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별히 한국인들에게 피에 대한 이야기, 하면 떠오르는 것은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피로써 의형제를 맺은 ‘도원결의’ 정도이다. (사슴 피, 돼지 피 경험) 그에 비하면, 성경에는 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제사는 온통 피 범벅이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피범벅 사건이다(Passion of Christ/ 두 눈 뜨고 보기 힘들다). 우리는 ‘예수의 보혈’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피의 무게’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를 흘린다는 것의 무거움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7. 본문 9절에서 11절은 구약성경을 통틀어서 가장 신비한 장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냥 다시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장면이 얼마나 신비한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사파이어)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9-11절).

 

8. 시내산 언약체결식은 장엄하다. 모세의 중재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다가서고, 시내산에서 피를 통해 언약을 맺는다. 그래서 그 언약을 ‘피의 언약’이라 부른다. 언약을 체결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축하하고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연회를 벌인다. 몇 마디 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연회를 하는 장면은 장엄하고 신비롭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라는 진술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만찬이라니!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다시 진술된다.)

 

9. 출애굽기 24장에 담긴 ‘시내산 언약체결식’은 그리스도인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마치 데칼코마니(데칼코마니아) 같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경험한 복음서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와 견주어 묘사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시내산 언약체결식 사건과 연관시켜서 해석했다는 것이다.

 

10. 마태복음은 모세오경의 형식을 빌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출생 이야기는 모세의 그것과 흡사하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이야기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전달해 주는 것과 흡사하다.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과 떡과 포도주를 나눌 때 예수께서 하시는 이야기는 시내산 언약체결식에서 모세가 한 이야기와 똑같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11. 그렇다면, 시내산 언약체결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무엇이 다른가? 시내산 언약체결식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향한 언약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언약이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열방)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보편적인 언약체결식과도 같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사람(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이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상관없이)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12. 출애굽기 24장의 시내산 언약체결식을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뿐이었다. 숫자로 하면, 74명(일흔 네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모세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전개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광야에서는 성막을 통해, 솔로몬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는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대제사장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오직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만 성막이나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었다. 즉,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었다.

 

13.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만큼 민주화 사건이 없다고 생각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은 특권계층만 누렸던 특권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은 그러한 특권을 없애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권리를 민주화시킨 것이다. 즉, 누구든지, 신분에 관계없이, 심지어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권리를 모두에게 안겨주셨다는 것이다. (혁명적이다. 뉴크리에이션!)

 

14. 시내산 언약체결식 때 모세는 제물의 피를 ‘언약의 피’라고 부르며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쏟아 부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백성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아주 특별한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마중물 삼아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그냥 피가 아니라 ‘언약의 피’이다.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신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피를 뿌리는 행위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아무때든지,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15.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 특권을 포기하고 산다. 또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특권이 주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사람들은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각종 행동들을 하지만,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와서 그 어려움들을 토로하고 문제 해결을 받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요즘엔 그것을 아는 사람들조차도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가 지닌 무거움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다.

 

16.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91장)에 이런 것이 있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거룩하신 주의 이름 너의 방패 삼으라 환난시험 당할 때에 주께 기도 드려라

존귀하신 주의 이름 우리 기쁨되도다 주의 품에 안길 때에 기뻐 찬송 부르리

우리 갈길 다간 후에 보좌 앞에 나아가 왕의 왕께 경배하며 면류관을 드리리

 

17. 언약의 피. 이것이 지니고 있는 무게감을 신중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언약의 피를 생각하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언약의 피에 힘입어 모든 것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다가서고, 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다가서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기를 바란다(키리에 엘레이손/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언약의 피가 우리를 살릴 것이다. 언약의 피가 우리를 새롭게 할 것이다. 언약의 피,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징표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언약의 피를 기억하고 그 피에 기대어 하나님께 날마다 가까이 나아오는 자에게 늘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을 메고 다니라  (0) 2022.05.30
가능주의자  (0) 2022.05.23
언약의 피  (0) 2022.05.16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  (0) 2022.05.10
우리들의 십계명  (0) 2022.05.05
시내산에 오르라  (0) 2022.04.25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기도문2022. 5. 10. 19:46

무거운 존재와 두터운 관계를 간구하는 기도
(출 20:12)

 

주님,

모든 것이 가벼워진 시대에

제5계명을 통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두터운 삶을 위하여

두터운 인간관계를 위하여

부모를 공경하는 일부터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무엇보다,

복음이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복된 일을 위해서

부모세대를 무겁게 대하는 자녀세대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시니,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모두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겠습니다.

부모세대는 부모세대 답게 존재의 무거움을 지켜나가고

자녀세대는 자녀세대 답게 존재의 무거움을 세워나가게 하셔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구원을

세상 끝날까지 잘 전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며

십자가에 올라

이 세상 모두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10. 19:44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

(출애굽기 20:12)

 

1. 아전인수라는 말이 있다. 자기 논에만 물을 댄다는 뜻이다. 무엇이든이 자기한테이롭게 행동하거나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이 쌓여서 요즘엔 성경 원어와 외국어 그리고 모국어(한국어)를 비교해 가면서 성경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해 가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이다. 우리는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읽다보니, 아무래도 한국적인 사고가 가미된 성경을 읽을 수밖에 없다. 히브리어의 ‘카베드’를 번역한 ‘공경’이라는 말은 유교적인 사고가 잔뜩 베어 있는 번역이다. 한자어 공경이라는 단어는 조상에게 제사드리는 형상을 가진 단어이다. 공경이라는 말에는 유교의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다. 그러나 막상 공경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베드’는 그러한 유교의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2. 제5계명에 해당하는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은 십계명 중에서 유일하게 동기가 부여된 계명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부분은 명령이지만,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내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 부분은 동기부여 구절(motivational clause)이다. 다른 계명들은 명령으로만 구성되어 있지만, 제5계명은 명령과 동기부여 구절이 함께 들어가 있다. 그런데, 동기부여 구절에서 우리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제5계명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부른다.

 

3. 한국어/또는 한국 사람의 특성상 동기부여 구절에서 눈에 들어오는 말은 ‘네 생명이 길리라’일 것이다. ‘네 생명이 길리라’, 다른 말로 장수다. 예로부터 장수는 ‘복’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제5계명을 말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의 복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아전인수식 해석이다.

 

4. 동기부여 구절에서 핵심 단어는 ‘땅(land)’이다. 제5계명에서 약속된 것은 ‘장수’가 아니라 ‘땅’이다. 그리고 이 땅은 그냥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땅이다.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할 때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장수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땅을 빼앗기지 않고 계속해서 그 땅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에게 땅은 요즘처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부동산이 아니다. 그들에게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징표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땅 매매를 할 수 없었다. 레위기에 나오는 희년법도 그것을 반영한다. 살면서 어려움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땅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했다고 할지라도, 희년이 되면 원래 주인에게로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한다. 땅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땅에서 그들이 오래오래 살게 된다는 뜻은 무엇일까? 이스라엘에게 땅은 기억이다. 그 기억은 무엇에 대한 기억인지, 이미 제4계명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를 말하며 서술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에게는 유일회적으로 발생한 출애굽 사건이 중요했다. 이것은 절대적인 구원 경험 사건이었다. 출애굽 하여 그들이 다다른 곳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렇기에 땅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는 성례전이 되는 것이다. 그 땅에서 사는 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시내산 언약)을 기억해야 한 한다. 이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져야만 하는 가장 중차대한 기억인 것이다.

 

6. 그러므로 십계명에서 “부모 공경”은 효의 문제라든지 또는 휴머니즘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부모 세대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 시내산 언약(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은 자녀 세대에게 반드시 전달되어야 한다. 요즘으로 따지면, 그 기억은 유전자 같은 것이다. 이 유전자를 전달해 주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머물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어떠한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는가?

 

7. ‘공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베드’이다. 카베드가 가진 뜻은 ‘무겁다’이다. 이를 적용해서 “부모를 공경하라”를 풀어서 설명하면 ‘부모를 무겁게 대하라’는 뜻이 된다.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의 말과 행동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신명기 21장에 보면,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 자녀 세대를 치리하는 법이 나온다. 얼마나 엄격한지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그 부분을 직접 인용해 본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신 21:18-23).

 

8. 무시무시하다.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 것을 ‘완악, 패역’이라 말하고, 그러한 완악하고 패역한 자녀 세대는 징계를 해야 하고, 징계를 했는데도 여전히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완악하고 패역한 자녀 세대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 그렇게 해도 그것을 죄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죄악을 제거한 선한 일이 된다. 요즘 시대의 사회적, 또는 법적 잣대로 재어보면 이것은 무지막지한 일이고, 자녀 세대가 처벌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녀 세대에게 해를 가한 부모 세대가 처벌을 받게 될 뿐이다.

 

9.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 자녀 세대를 왜 이렇게까지 무시무시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자명하다.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물려주는 기억(언약/구원사건에 대한 기억)을 절대적으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땅은 그 언약의 징표이다. 움직이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징표이다. 그 땅에서 길이 산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잘 살고 있다는 뜻이고, 그 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다.

 

10. 그러므로,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해야 한다. 가볍게 대하면, 부모 세대가 전해주는 언약이 매우 가벼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언약은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 1세대는 이미 다 죽었다. 출애굽 경험, 시내산 경험, 그리고 광야를 경험한 세대는 이제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아 든 것은 그 언약 이야기를 전수해 주는 부모 세대의 ‘말’ 뿐이다.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는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의 말(언약)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여(마치 그것이 살아 있는 존재인 것처럼) 소중하게 대하고 간직하고 또한 자기의 자녀 세대에게 동일하게 전달해 주겠지만, 부모 세대의 말을 귓등으로 알아들고 무시하고 경홀히 여기는 자녀 세대는 ‘그까짓 말’이라고 생각하며 그 언약을 하찮게 여기고 그것을 자신의 자녀 세대에게 전달하지 않을 것이다.

 

11. 지금까지 성경의 맥락에서 살펴본 제5계명은 매우 비장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가? 이 계명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고, 그래서 부모 공경을 잘 하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라고, 결국 사람들의 욕심을 자극하고 충족시키는 데 제5계명을 이용하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냥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굳이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를 묻는 이유가 무엇인가?

 

12.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현대 사회는 가부장적인 사회가 아니다. 가정 중심 사회가 아니다. 탈가부장적 사회이고, 개인 중심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부모 공경의 의미를 가부장적으로, 가정 중심적으로 말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부모 공경의 제5계명을 유교의 가부장적 사상인 군사부일체, 삼종지도, 이런 가르침을 서포트 하기 위해서 쓰는 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꼴이 되고 만다. 아마도,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은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성경에 대한 배경 지식이 일천할 때가, 제5계명을 완전히 유교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13. 그러면, 부모 공경에 대한 현대적 의미란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 어차피 더 이상 가부장적인 사회도 아니고, 유교사회도 아니고, 개인 중심 사회인데,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부모 공경이라는 제5계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왜 그런가?

 

14. 우리가 사는 시대를 무슨 시대라고 명명하면 좋을까? 17,8세기 유럽사회는 극장사회라고 불렀다. 그들의 옷차림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데, 그들의 일상복은 무대복처럼 화려했다. 그리고 그 시대의 관계성도 그랬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분히 해내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인정받는 시대였다. 지금 북한 사회는 17,8세기 유럽의 극장 사회와 비슷한 사회이다. 사회 전체가 마치 연극 무대 같다. TV에서 간혹 공개되는 그들의 열병식이나 사회적 행사를 보면,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다. 각자 역할이 정해져 있고,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한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래야 연극이 성공적으로 상연되기 때문이다.

 

15. 그러면, 우리 사회, 특별히, 한국사회는 무슨 사회라고 불러야 할까? 얼마 전까지 군사독재가 벌어지고 있었을 때 한국 사회는 군영 사회였다. 사회 전체가 마치 군대 같았다. 남북이 갈라져 있고, 군사적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안보가 가장 중요했기에(지금도 그렇다) 군인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군인이 정권을 잡은 사회이다 보니, 사회 자체가 군영 사회였다. 군대 문화가 모든 일상을 지배했다. 직장도 학교도, 가정도. 그러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가 민주화되고, 이제는 자본주의가 깊이 있게 사회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면서, 한국 사회는 ‘예능 사회’가 되어버렸다.

 

16. 다른 말로, 예능 사회는 모든 것이 예능화된 사회, 모든 것이 가벼워진 사회가 되었다는 뜻이다. 존재의 무거움을 찾아보기 힘들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존재가 가벼워야 한다. 이것을 경제적인 용어로는 ‘노동의 유연성’이라고 하는데, 노동의 유연성이란 인간이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어떠한 노동을 위해서라도 갈아 끼기 쉬운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회사는 노동자를 마음껏 해고할 수 있다. 반대로 노동자도 회사를 마음대로 이직할 수 있다. 1980년대만 해도 우리 사회에 없던 풍경이다. 최고의 이윤을 내기 위해서 회사는 노동자를 부리기 쉬운 상태(유연한 상태)로 만들려고 한다. 최고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최상의 가벼운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내가 원하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자본이 나를 선택하기 쉽게 존재를 만들어 놓는 것 / 돈 많이 주고 나를 데려다 쓰세요. )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모두 돈을 위해서 가벼운 존재가 된다. 밀란 쿤데라가 말했던 것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나는 이것을 예능 사회라 명명한다.

 

17. 이렇게 존재가 가벼운 사회, 예능 사회에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말할 수 없이 가벼워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적 문제들은 모두 서로가 서로를 무겁게 대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가볍게 대해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부모를 무겁게 대하지 않으니 패륜이 발생하고, 이웃을 무겁게 대하지 않으니 사람을 해치고 악을 저지른다. 자식을 무겁게 대하지 않으니 윤리를 가르치지 않고 남을 이기는 법만 가르치고 자식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하여 인간관계는 깨질듯이 깨지고, 두터운 인생, 두터운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니 우리의 인생은 늘 외롭다. 관계가 깨지는 것만큼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형벌이 있을까? 현대인은 그래서 두 가지의 병, 편집증과 우울증을 동시에 앓고 있다. 편집증은 너무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해서 발생하는 병이고, 우울증은 다른 이들과 유의미한, 두터운 관계를 맺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다.

 

18. 우리가 사는 시대는 존재의 가벼움, 관계의 가벼움을 벗어나 존재의 무거움, 관계의 두터움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조금 무겁게 세워나갈 필요가 있다. 자기를 쉽게 팔아버리는 유연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켜 나가는 존재, 인간관계에서 이익만 취하는 가벼운 관계 아니라 인관관계에서 유의미한 의미를 창조해내는 관계, 즉 두터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모두 편집증과 우울증으로 인하여 집단 자살의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충분히 그런 가능성이 존재한다. (미국 정보국에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푸틴은 극심한 편집증과 우울증에 오랫동안 시달려 았다고 한다. 편집증과 우울증이 한계를 넘으면 푸틴이 무슨 짓을 할 것 같은가. 핵 버튼을 누를 것이다. 이것은 집단 자살 행위다.)

 

19. 나의 존재와 상대방의 존재를 무겁게 여기고, 인간관계를 두텁게 만드는 일은 부모의 존재를 무겁게(카베드)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연습 상대가 필요하고, 연습을 할 때, 진지한 상대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부모님만큼 관계를 두텁게 만드는데 있어 좋은 연습상대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조금 실패하더라도 부모님은 우리를 기다려주고 용서해 주실 것이고, 우리가 관계를 두텁게 만드는 데 성공하면 부모님은 정말로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이 기쁘고 행복하신 것만큼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게 어디에 있겠는가.

 

20. 더군다나, 신앙과 복음의 측면에서도 존재의 무거움, 관계의 두터움은 너무도 중요하다. 요즘 시대는 복음이 잘 전달되지 못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요즘 누가 복음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가. 복음도 유일회적인 구원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말씀’으로 전하는 것인데, 두터운 신뢰, 두터운 관계, 무거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즉,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해서 무겁게 대하는 마음이 없다면, 복음은 잘 전해질 수 없다. 예전에는 부모님 따라서, 부모님 말씀 듣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 나오는 자녀 세대들이 많았으나, 요즘 자녀 세대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21.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는 연습을 시작하면 좋겠다. 또한 부모 세대도 자녀 세대에게 좋은 것(가치, 복음 등)을 물려주기 위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모 세대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고 실천하며, 자녀 세대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words)’을 통해서 말씀하신다(saying).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두터운 관계의 시작은 부모님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 나가는 데서 온다. 주님께서 도우실 것이다. 두터운 관계를 잘 형성해야 편집증과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능주의자  (0) 2022.05.23
언약의 피  (0) 2022.05.16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  (0) 2022.05.10
우리들의 십계명  (0) 2022.05.05
시내산에 오르라  (0) 2022.04.25
평강이 필요해  (1) 2022.04.21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근대(또는 현대/modernity)는 경제의 자본주의화, 그리고 정치의 민주주의화 시대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곧 '근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근대를 공부한다는 것, 근대를 직시한다는 것, 근대를 논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공부하고 직시하고 논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토대를 이룬 근대의 시민들은 그것들에 의해서 삶이 주조되어 왔다. 즉, 근대인(현대인)은 소비자로, 그리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소비자가 아니면, 그리고 민주시민이 아니면 근대를 사는 모던 보이(boy), 또는 모던 걸(girl)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근대인이다. 더 이상 19세기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오래 산 사람도 모두 20세기 사람이다).

 

근대(현대)의 기독교인들도 모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토대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벗어나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인들도 모두 소비자의 정체성과 민주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비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민주시민은 어떤 정체성을 갖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도 그렇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가치나 민주주의의 가치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가치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은 부합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극명하게 대치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무엇이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 극명하게 대치되는 것인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소비자로서의 그리스도인, 민주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소비자의 상태에서 복음을 소비하고, 민주시민의 상태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알게 모르게 갈등이 심화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이상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는 소비자의 정체성과 민주시민의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국가의 절대적 '폭력' 또는 '권력'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인데, 세속적 신(god)인 국가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늘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공부하지 않으면 기독교인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에서 '꼴통'이 되거나, 아니면 '배교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관찰되고 있는 대다수 기독교 신앙인들은 '꼴통'이 된 듯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야 건강한 신앙인, 그리고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건전한 경제와 정치 체제를 세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악의 기독교인은 그냥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가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신앙심이 아니라 무책임이다. 이는 전형적인 유체이탈 신앙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라는 말과 같다. 거룩이란 구별된 삶인데, 이 세상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는 삶의 태도만큼 구별된 삶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구원하신 이 세상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기 위해서, 현재 우리 삶의 토대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부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수적이다.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바나바

    어쩌다가 목사님 쓰셨던 글을 보고 이렇게 블로그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꼴통'이라는 단어가 다소 자극적이기는 하나, 전반적으로 맞는 평가인거 같습니다. 다만, '공부를 안해서'라기 보다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이원론적 기독교 세계관(소위 "기독교 이원론") 때문에 "꼴통"이 되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회 안과 밖을 나눠서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고, 하나님 나라와 아닌 것을 나눠서 '하나님 나라'와 '자본주의 및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것을 통해 손쉽게 전체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이 결국 "유체이탈" 신앙을 만들어 지금 신앙인들로 하여금 밟고 있는 그 곳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싶네요.

    깊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2022.05.08 19:25 [ ADDR : EDIT/ DEL : REPLY ]
    • 안녕하세요.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이렇게 댓글도 달아주시고, 고맙습니다.

      몇 가지 참고로 더 말씀을 드리면, 사실 기독교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이래 마치 기독교가 이원론적인 사고를 하는 종교로 오해 받는 듯합니다. 초대교회사를 공부해 보면,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기독교에 들어온 영지주의를 물리치려고 무단히 노력을 했거든요. 그런데, 영지주의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아직도 기독교에 남아서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고 괴롭히는 것 같아요.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 글에서 말한 적이 있고요,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 저의 <초대교회사> 강의에서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어요. 시간되시면 한 번 보세요.^^ 열 두 개의 강의로 구성되어 있는데, 초대교회사외 기독교 신앙을 좀 더 깊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실 거에요.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늘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길 빕니다.

      2022.05.11 18:52 신고 [ ADDR : EDIT/ DEL ]

기도문2022. 5. 5. 16:12

안식일 정신을 간구하는 기도
(출 20:1-17)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말씀이 그냥 언어가 아니라 인격이 되게 하신 주님,

우리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십계명은 주님의 말씀, 주님의 인격인 줄 믿습니다.

우리를 위한 십계명은, 우리들의 십계명입니다.

무엇보다

탐욕으로 힘들어 하는 우리들에게

안식일을 주셔서

아무 것도 안 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생명을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하게 하시고

우리가 우리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우시니 감사합니다.

발람의 나귀도 안식일 정신을 통해 생명을 지키고

선한 일을 도모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은 더욱더 안식일 정신을 통해

우리의 존엄성을 지켜 나가야 할 줄 믿습니다.

탐욕 때문에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처참히 잃어버린 이 시대에

십계명을 통하여,

특별히 모든 계명이 수렴되는 안식일을 통하여

인간의 가치를 되찾고 회복하는

행복한 일이 우리 삶 가운데 넘쳐나게 하옵소서.

인격이신 주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이 살아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5. 16:11

우리들의 십계명

(출애굽기 20:1-17)

 

1. ‘말씀’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인간이 인간인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말(word)’ 때문이다. 다른 말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말씀, 언어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소통을 한다. 그런데 이 소통이 단순한 소통이 아니라 아주 깊은 차원의 소통이다. 일상적 소통뿐 아니라 도덕적 소통도 한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다. 그들도 소통을 하긴 하지만, 언어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런 도덕적 관념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말씀, 언어를 통해서 그런 도덕적 관념을 갖는다.

 

2. 말씀이라는 것, 언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정체성 그 자체이다. 존재 그 자체이다. 언어가 없으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 특별히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 언어가 인간의 존재 근거라고 한다면,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이 존재 근거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 근거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고백한다. 이것은 개인적 신념이 아니라 보편적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존재의 근거로 알고 이해하고 믿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3.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소통을 하신 거다. 그런데, 말씀으로 말씀하셨다는 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해 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뜻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문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입혀진, 하나의 인격이다. 말씀이 문자가 아니라 인격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4. 출애굽기 20장은 십계명을 담고 있는 곳이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에게 십계명은 너무도 익숙하다. 그런데, 십계명에 대한 친밀도와 관심도는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떨어진다. 왜 그럴까? 십계명을 그저 고리타분한 율법으로, 잔소리로, 그냥 문자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십계명을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십계명이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십계명을 그냥 남몰라라 무시할 수 없다. 존재를 무시하는 행위가 가장 나쁜 행위이다. 존재에게는 무시가 아니라 환대가 필요한 법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5. 말씀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격이 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사귐을 가지신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인격이다. 그 인격적인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하나님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인격적으로 대할 때, 우리 안에는 두려움과 떨림이 있기 마련이다. 어마어마한 일 앞에서 두렵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6.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으로 다가오는 이 어마어마한 일이 환대가 되려면, 우리는 그 말씀을 향해 온 마음을 다해 우리의 존재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마음 상할 때가 언제인가. 환대 받지 못할 때이다. 환대 받지 못하는 곳에 머물고 싶은 사람은 없다. 나를 환대 하지 않는 사람과 사귐을 갖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불쾌한 경험이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험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만 환대의 마음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언뜻 보기에 하나님의 말씀(인격)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환대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십계명을 환대하지 않은 이유도, 십계명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7. 십계명, 여기에서 인격을 다 제거해 버리고 나면, 고리타분한 꼰대가 하는 잔소리 같다. 사실 우리는 십계명과 반대로 살아간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고 살며, 온갖 우상에 둘러싸여 그 우상을 좇으며 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만들며, 안식일을 하찮게 여긴다. 부모님의 인생에 관심이 없고,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는 우리 안에 만연해 있고, 우리는 온갖 탐욕 가운데 살아간다. 십계명이 인격이라면, 우리는 그 인격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이 뭔가, 정말 미워하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게 우리 삶의 형편이다.

 

8. 그러나, 우리가 십계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면, 십계명의 부드러운 손길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십계명은 10가지의 계명으로 되어 있지만, 이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계명을 고르라면, 제4계명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십계명은 성경에 두 군데 나온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이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은 똑같다. 그런데, 다른 부분이 딱 한 군데 있다. 그게 바로 제4계명이다.

 

9. 출애굽기 20장에서 제4계명을 말할 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그 이유가 다르다. 신명기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는 출애굽 사건, 즉 구원 사건 때문이다. 출애굽기의 십계명은 창조를 강조하고, 신명기의 십계명은 구원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 두 개가 다른 것으로 인식하지만, 실은 창조와 구원은 다른 게 아니다. 하나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곧 구원 사건이고, 구원 사건은 곧 창조 사건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놀라운 일(창조)인 동시에 선한 일(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돌보아 주신다.

 

10. 십계명은 대개 두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 있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향해 있다. 그런데, 이 둘이 모두 제4계명으로 수렴된다. 안식일. 안식일은 쉬는 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쉬는 날은 일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한 준비의 날 정도로 이해된다. 회사가 왜 우리를 쉬게 하는가? 일 할 때 더 열심히 일하라고 그러는 것이다. 우리는 좀 더 효과적으로 착취 당하기 위해서 쉼을 강요당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렇다. 그러나 십계명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그런 의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위에서 말했듯이, 십계명이 인격인데, 그것도 하나님의 인격인데, 하나님이 아무렴 우리를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해서 쉬도록 하실까.

 

11. 안식일에 대한 인격적 해석 중 가장 최고의 해석은 우리 시대 최고의 구약학자 중 한 명인 월터 브루그만이 말한 “안식일은 저항이다”가 아닐까 생각한다. 십계명이 하나님의 인격이라면,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도우실까? 우리가 엉뚱한 것에 우리의 생명이 빼앗기지 않도록 도우실 것이다. 우리의 귀한 생명이 엉뚱한 것에 의해 소모되지 않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우리의 생명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모든 시도로부터의 저항으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12. 우리가 왜,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가? 우리가 왜, 이웃의 것(무형이든, 유형이든)을 빼앗으려 하는가? 탐욕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계속해서 탐욕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그 끝없는 탐욕을 채우려다 보니, 자기 힘으로 안 되니까, 자기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니까, 우상을 만들어서 도움을 청하고, 나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을 훔쳐서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쉴 틈이 없다. 탐욕은 우리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13. 나를 가만히 안 놓아두고 못 쉬게 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름답게(토브) 창조하시고,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구원)하셨는데, 우리는 탐욕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선한 길에서 벗어나 악한 길로 간다. 즉,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dignity)을 짓밟아 버린다. 어떻게 할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지킬 수 있을까. 그 길이, 안식일에 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다.

 

14.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안식일 정신은 정치적으로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일례를 들어, 우크라이나-러시아 간의 전쟁을 끝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시민 불복종’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도 기독교 국가고, 러시아도 기독교 국가다. 푸틴은 수세주일에 얼음을 깨고 강물에 들어갔다 오는 수세의식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기독교 국가 간에 서로를 죽이는 살육의 전쟁이 왜 발생하는 것일까?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그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서지 않아서 그렇다. 말씀을 인격으로 생각하는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감히, 전쟁을 벌일 수 없다.

 

15. 민수기 22장에 보면, 아주 재미난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한걸음씩 나아갈 때,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의 진군 소식을 듣고 심란해 한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선지자 발람을 불러 진군하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사주한다. 두둑한 복채를 받은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발람은 나귀 한 마리를 대동하고 갔다. 조금 가다가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발람을 태우고 가던 나귀가 가다가 멈추고, 절대로 앞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발람은 나귀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나귀에게 채찍질을 해댔다. 그래도 나귀는 꿈쩍하지 않았다. 열 받은 발람은 나귀를 막대기로 패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귀가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 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16. 나는 이것이 놀라운 시민 불복종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나귀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귀는 그 자리에서 주인에게 불복종했다. 앞으로 나가면 죽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발람의 나귀만큼 안식일 정신을 철저하게 지킨 존재가 어디에 있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나귀는 발람의 불의한 일에 저항한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기를 통해서. 즉, 시민 불복종을 통해서. 다시 말해, 안식일을 지킴으로 인해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선한 일을 위해서, 동물도 이렇게 시민 불복종을 할 수 있는데, 동물도 이렇게 안식일 정신을 가지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하물며 인간이 못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이 이것을 못한다면, 동물보다 못한 존재인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

 

17. 십계명은 하나님의 잔소리가 아니다. 십계명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십계명은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고 지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격적 사랑이다. 탐욕을 부추겨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의 존엄성을 지켜 나가는 일, 우리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지켜 나가는 일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인격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 안으시는 주님의 말씀을 환대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쉼을 통하여,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를 한 순간도 쉬지 못하게 만드는 탐욕을 물리치고, 그 탐욕을 부추기는 사악한 세력들에게 저항하여, 우리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지켜 나가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약의 피  (0) 2022.05.16
부모 공경의 현대적 의미  (0) 2022.05.10
우리들의 십계명  (0) 2022.05.05
시내산에 오르라  (0) 2022.04.25
평강이 필요해  (1) 2022.04.21
샬롬은 어떻게 오는가  (0) 2022.04.12
Posted by 장준식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