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돼먹은 추노꾼들의 세상

“언년아~” 추노꾼, 대길이의 음성이 쩌렁쩌렁 들린다. “가슴을 데인 것처럼 눈물에 베인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괴롭다”, 주제곡이 흐른다. 추노꾼 이야기. 조선시대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2025년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들’은 도망친 노예 취급 당한다. 그들은 추노꾼에게 잡혀 온갖 모욕을 당하고 송환 당해야 하는 노예일 뿐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불법 체류자들을 추방하기 위한 ‘앱’(CBP Home)까지 생겼다. 테크놀러지를 탑재한 추노꾼 같다. 이 ‘앱’은 불법 체류자들이 자발적으로 미국 땅을 떠날 것을 압박한다. 

일론 머스크는 언론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사회복지기금을 사용해서 불법 체류자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을 유권자로 만들어 표를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회복지기금을 삭감하면 불법 체류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잘못된 방식으로 지지층을 끌어 모으는 민주당을 견제할 수 있다고 했다. 한 마디로 개소리(bullshit)다. 

정복, 약탈, 학살. 미국의 역사는 이 어두운 단어와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은 형태와 방법만 바뀌었지, 미국 사회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최근 출간된 책 <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의 심장이라 불리는 ‘실리콘밸리’가 어떻게 정복, 약탈, 학살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는지 파헤친다. 

팔로알토에는 스탠포드 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팔로알토를 중심으로, 구글(마운틴 뷰), 메타(멘로 파크), 애플(쿠퍼티노) 등, 굴지의 IT 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다. 실리콘벨리 중에서도 팔로알토는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힌다. 실리콘밸리가 원래 공기 좋은 곳이지만, 그 중에서도 팔로알토의 공기는 남다르다. 

<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는 블링블링한 팔로알토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린다. 팔로알토에서도 미국의 ‘정복, 약탈, 학살’ 역사가 반복된다. 1850년 캘리포니아에 불어온 골드러시 당시 팔로알토에 당도한 백인들은 그곳의 원주민들(인디안)을 정복하고, 그들을 약탈하고 학살한다. 이러한 그림자는 실리콘밸리의 기업 문화에 깊이 배어 있다. ‘정복, 약탈, 학살’. 즉, 극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효율성의 극대화가 필요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존재는 가차 없이 퇴출시키는 것이다. 현대판 우생학이다.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와 실리콘밸리의 아이콘 ‘일론 머스크’는 정확하게 미국의,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정복, 약탈, 학살’의 역사적 맥락에 서 있다. 이들의 사고 방식은 철저하게 ‘제국주의’적이다. 이들은 현대판 우생학의 자식들이다. 이들에게 정의(justice)는 힘 센 자 중심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들의 행보를 서포트 하는 세력이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성경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로 가득 차 있는데, 제국주의를 관철시키려는 트럼프와 머스크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아무래도 ‘다른’ 성경책을 읽는 게 분명해 보인다. 

윤oo이 구치소에서 풀려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구치소에서 성경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으로 김치찌개를 먹었다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미국과 한국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보면서, 성경(그들의 성경)도 싫어졌고, 김치찌개도 싫어졌다. 

막돼먹은 추노꾼들을 개과천선시킬, ‘언년이’가 필요한 세상이다. “언년아~~~”

Posted by 장준식

쓸모를 고민하는 신앙

우리는 종종 신앙을 ‘얼마나 뜨거운가’, ‘얼마나 열정적인가’로 평가하려 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책망받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 신앙의 본질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쓸모 있는가’에 대한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계 3:16)는 평가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신앙의 열정과 무관심의 문제로 해석하지만,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이 표현의 의미는 ‘유용성’과 관련이 있다. 라오디게아 도시를 흐르는 물은 골로새의 차가운 물도,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수도 아니었다. 그들의 물은 미지근하고 쓴맛이 강해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는 신앙의 문제가 단순히 열정의 유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역할과 쓰임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있었다. 그들은 도시가 지진으로 무너졌을 때도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재건할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그들의 부유함이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라고 자만했지만, 정작 예수님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그들의 문제는 편안함과 자기만족이 영적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돈이 있고, 필요한 것이 채워지면 하나님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신앙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고민을 멈추었다. 그래서 책망받았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으면 신앙이 해이해지고, 가난하면 신앙이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잠언 30:7-9에서 아굴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 이유는 너무 부유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너무 가난하면 도둑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즉, 신앙의 핵심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돈이 많아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면 신앙은 미지근해지고, 가난해도 하나님을 원망하면 신앙이 식어버릴 수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 받은 이유는 그들이 부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유함 속에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힘이 적었지만,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들었다.

예수님은 "나는 네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흰 옷을 사서 입어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계 3:18)라고 말씀하신다. 불로 연단한 금은 ‘세상의 부요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영적 부요함을 구하라’는 뜻이다. 흰 옷은 ‘하나님의 의로 입혀진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다. 안약은 ‘영적인 눈을 떠서 진리를 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쓸모를 간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와 함께 먹겠다”(계 3:20)고 말씀하신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했겠지만, 실제 삶에서 예수님을 의지하는 법을 잊어버린 교회였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통해 문을 열지 않는다면, 신앙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나의 쓸모를 간구하는 과정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미지근한 신앙’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역할을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너희를 토해낼 것이다"라는 무서운 경고를 받았다. "나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있으니까 충분해." "교회 봉사도 하고 헌금도 했으니까 됐어."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하나님께 더 집중하면 되겠지." 이러한 태도가 쌓이면, 신앙은 점점 미지근해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쓸모를 고민해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가 곤고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신앙은 나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 받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가? 신앙이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간절히 겸손하게 기도하며 ‘쓸모를 고민하는 신앙’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인내의 미학

인내는 신앙의 가장 위대한 덕목 중 하나다. 신앙의 여정을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시련과 도전이 닥쳐온다. 때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좌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너를 지키리라”(계 3:10).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를 결코 헛되이 두지 않으시며, 그것을 기억하시고 보상하신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크지 않았고, 사회적 영향력이 미약한 공동체였다. 그러나 그들은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유대인 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이 그들을 배척하고 박해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시며 “열린 문”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역설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겉으로는 약해 보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강한 교회였다. 세상은 힘과 권력을 숭배하지만, 하나님은 겸손한 믿음과 인내를 귀하게 여기신다.

성경은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수많은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과 욥이다. 요셉은 젊은 시절 형들의 시기로 인해 애굽으로 팔려갔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했고,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었다. 또한 욥은 극심한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심지어 육체적인 고통까지 당했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전보다 더 큰 복을 주셨고, 그의 믿음과 신실함을 인정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스마트폰으로 몇 초 만에 정보를 얻고, 온라인 쇼핑을 하면 하루 만에 물건을 받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시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인내’라는 덕목은 점점 더 잊혀지고 있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고, 고난이 닥쳤을 때 즉각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조급해지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우리와 다른 시간을 사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 기회를 자주 잃곤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꾸 신비를 잃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인내의 미학’을 가르쳐 준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버티는 것이 아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며 기다리는 태도이다. 인내는 희망이다. 우리의 신앙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과정이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희망을 품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능동적인 태도이다. 인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선물을 믿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인내는 믿음의 가장 깊은 속성이다.

신앙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믿음이 연약해질 때도 있고, 기도가 공허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인내할 때마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신다. 고난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삶이야말로 가장 복된 삶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거든, 이 말씀을 기억하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너를 지키리라”(계 3:10). 우리의 신앙과 삶이 위험할 때, 이 말씀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힘들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내를 보시고, 우리의 삶을 지키실 것이다. 믿음의 경주에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자. 그분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환란 날에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깨어 있지 못한 교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어떤 교회는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이다. 사데 교회가 그랬다. 겉으로는 번성했고, 명성이 있었으며, 평판도 좋았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네가 살아 있다 하는 평판을 가졌으나, 너는 죽은 자다”(계 3:1).

이 말은 교회(신앙)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안에서는 메마르고 힘을 잃은 상태.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며, 세상과도 멀어지는 삶. 그것은 곧 뒤처지는 삶이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생명이 단순한 습관이 되고, 숨은 쉬고 있으나 살아 있는 것 같이 않은 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삶은 점점 무력해진다.

뒤처지는 것은 무섭다. 한때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 기쁨이었지만, 지금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수 있다. 예배가 부담스럽고, 기도가 공허하게 느껴지며, 말씀을 들어도 마음 깊이 와닿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깨어 있지 못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방치하면, 결국 신앙은 점점 더 깊이 잠들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다.

혹시 이런 상태에 처해져 있을 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희망을 준다. "깨어 있으라. 굳건하게 하라. 기억하라. 순종하라. 회개하라" (계 3:2-3).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는 길, 뒤처진 신앙을 회복하는 길, 뒤처진 인생을 끌어 올리는 힘이 여기에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눈을 뜨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두고, 관계를 회복하며,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신앙은 기계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신앙이다. 신앙의 길에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라이너 쿤체의 시 <뒤처진 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그는 뒤처진 새를 바라보며 그 새에게 자신의 힘을 보낸다고 말한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 우리가 뒤처졌을 때, 다시 날아오를 수 있도록 힘을 보내신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뒤처진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기다려 주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교회가 진정 살아 있으려면, 화려한 예배당이나 큰 행사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먼저이다.

사데 교회처럼, 우리의 신앙도, 삶도 한때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식어버렸을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여전히 손을 내밀고 계신다. 일어나고 싶어도 잡아줄 손이 없을 때 우리는 절망의 늪에 빠져 죽음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은 절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손을 잡을 때까지 손을 내밀고 계신다. 그러니, 그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길 바란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보내는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우리 신앙이 다시 살아나는 날, 우리는 진정으로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는 자들이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서로를 돌보며, 살아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자. 이렇게 살아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다. 

Posted by 장준식

위험한 신앙, 저항하는 예배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예배는 신앙의 선언이며, 동시에 세상의 질서에 대한 저항이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펼쳐지는 하늘의 예배는 당시 소아시아 교회들이 직면한 현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영적 환상이 아니라, 로마 황제 숭배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켜내려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강력한 메시지였다.

1. 보좌 앞의 유리 바다: 혼돈을 넘어선 질서
고대인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광활한 궁창 위의 바다에 세워져 있다고 상상했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질서를 의미하는 공간이었다. 세상의 혼돈과 폭력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앙은 바로 그 보좌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2. 네 생물과 많은 눈: 불의에 대한 증언
네 생물(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은 우주를 상징한다. 그들의 몸을 덮고 있는 수많은 눈(eyes)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고난과 불의를 증언하는 상징이다.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 폭력의 희생자들, 정의가 짓밟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미한다. 예배는 이처럼 세상의 아픔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자리이다.

3. ‘거룩하다 거룩하다’의 선언: 장차 오실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지배하는 분을 향한 고백이다.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고통받는 자들에게 가장 큰 위로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춘향이가 변 사또의 횡포 속에서 이 도령을 기다리듯, 억압받는 성도들이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의 표현이다.

4. 황제가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로마 제국은 황제에게 ‘우리 주, 우리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바치게 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성도들은 그러한 칭호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임을 선포한다. 이것은 단순한 경배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 우리가 몸과 마음을 어디에 드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선언이다. 예배는 황제 숭배에 대한 저항이었고, 오늘날에도 세상의 거짓된 권력과 이념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중심이어야 한다.

5. 예배는 저항이다
출애굽기의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예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애굽기가 가르쳐주는 예배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억압을 거부하고, 자유를 선언하는 행위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어떤 모습인가? 고대 시대에 비추어 볼 때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문명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시대의 예배는 시간이 흐른 만큼 달라져 있는가? 우리의 예배는 충분히 저항적이며, 충분히 자유한가? 예배에 야성이 살아 있는가?

교회가 힘을 잃은 이유는 바로 예배의 야성과 저항의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권력과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았는가? 말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외치면서, 삶으로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는가?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예배는 세상의 거짓과 불의에 맞서는 신앙의 결단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우리가 올리는 기도가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 되려면, 우리의 삶이 예배와 일치해야 합한다. 황제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신실한 예배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위험한 신앙이며, 저항하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Posted by 장준식

도전을 이기는 신앙

버가모 교회는 두 얼굴을 가진 교회였다. 한쪽은 자랑스러웠다. 적대적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고, 순교자 안디바는 그들의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다. 반면, 부끄러운 얼굴도 있었다. 발람과 니골라 당의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진 이들도 있었다. 이 두 얼굴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현대인의 신앙은 버가모 교회의 현실처럼 양면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표면적 박해는 덜할지 모르지만, 거짓된 가르침과 세속적 유혹이 교묘히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있다. 세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괜찮아,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모두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러나 그 속삭임은 때로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고, 부지불식간에 진리를 버리게 만든다.

우리는 오늘날 무수한 '발람의 가르침' 속에 살고 있다. 그 가르침은 편리함을 약속한다. 타협하면 더 쉽게,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 주어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회개하고, 거짓된 가르침에서 떠나 바른 믿음 위에 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생명의 초대이다. 이 초대는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배부르게 하는 '감춰진 만나'와, 하늘의 잔치에 들어갈 '흰 돌'을 약속한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삶의 피로와 분주함, 세속적 유혹, 그리고 교회에 대한 실망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춰진 만나를 줄 것이다. 흰 돌을 줄 것이다." 이는 단순한 약속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이다. 우리가 흔들릴 때 붙잡을 수 있는 반석과도 같은 말씀이다.

버가모 교회의 순교자 안디바처럼, 우리의 믿음도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그 고난 속에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거짓된 속삭임 속에서 진리를 붙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주님께서 준비하신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 우리 각자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기는 자로 부름받았다. 이김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던지는 거짓 속에서도,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께 집중하자. 우리가 주님을 붙들 때, 주님은 우리를 승리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감춰진 만나와 흰 돌을 소망하며, 오늘도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당신에게 주님의 평안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죽도록 충성하라: 신앙은 집중력의 문제이다

역사 속에서 서머나 교회는 고난의 상징이었다. 박해와 빈곤, 그리고 비방이라는 삼중고 속에서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서머나 교회의 이야기는 단순한 고대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생생한 도전을 던지는 메시지이다.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실 때, 이는 단순한 신학적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삶을 가득 채운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건네진 위로의 속삭임이었다. 그분은 그들의 고난을 아셨다. 그들의 빈곤을, 그리고 그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몬 비방의 고통을 아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역설적이다. 세상은 충성의 한계를 요구한다. 이 정도면 됐다, 여기까지 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충성에는 한계가 없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신실하셨던 그분처럼, 우리 역시 끝까지 충성하라는 도전을 받는다. 이는 신앙이 단순히 머릿속에 머무는 사상이 아니라, 삶의 전부를 요구하는 헌신임을 깨닫게 한다.

서머나 교회가 그토록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부유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평가하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은 생명의 관을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영원한 가치를 발견했다. "네가 실상은 부유한 자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선언이다.

오늘날 우리는 서머나 교회처럼 극심한 박해를 경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의 박해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피로와 분주함, 세속적 유혹, 그리고 교회에 대한 실망이 우리의 신앙을 흔든다. 정신을 딴 데로 돌리게 만드는 이 시대의 스펙타클(화려한 이미지) 속에서,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도전이다.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신앙은 우리를 생명의 관으로 인도하며, 둘째 사망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끈다.

"죽도록 충성하라." 이 말은 단지 고난을 감내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신실함의 본질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끝까지 집중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집중)하셨듯, 우리도 끝까지 그분께 충성(집중)할 때, 생명의 관이라는 약속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가? 우리의 충성은 어디까지인가? 이 질문에 답하며, 우리는 서머나 교회의 유산을 살아내야 한다.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이야말로, 참된 부요함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길이다.

Posted by 장준식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한 한마디 논평]

1. 유승원 목사가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하여 '유감'이라며 쓴 글이 이슈가 된 듯하다. 

2.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헤이스의 용어로는 '회개')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한 유승원 목사의 입장에 대하여 나는 도리어 '유감'을 표명하고 싶다. 

3. 보수적인 한인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감'을 잃으셨나,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4. 리처드 헤이스가 성소수자들에게 사과한 이유는 리처드 헤이스의 성경 주석이 성소수자들을 공격하는데 근거로 쓰였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상'을 만든 데에는 자신의 다이너마이트 발명이 선하게 쓰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는데 쓰이는 것에 대한 '회개'의 마음이 담겨 있다.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한 유승원 목사의 '유감' 표명은 한국의 보수 교회에 그렇게 쓰일 것이다. 성소수자들을 공격하는데 근거로 쓰일 것이다. '거 봐라, E. P. 샌더스와 리처드 헤이스의 제자인 유승원 목사도 동성애를 반대한다!' 

5. 유승원 목사는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한 근거로 감리교 신학(사변형)을 들고 있다. 유승원 목사 본인이 나사렛 교단 출신이고, 그곳의 교수를 지냈는데, 감리교 신학의 사변형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나사렛 교단도 웨슬리언이기 때문이다.

6. 성경, 전통, 이성, 경험,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이다. 어떤 것이 다른 것에 대하여 우위를 점하지 않는다. 

7. 보수 신학이 계속 난항을 겪는 이유는 성경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보수 기독교 신앙이 자꾸 세상과 충돌을 일으키고, 발목을 잡고, 뒤처지는 이유는 성경을 고착된 '이데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8. 그런데, 좀 솔직해지면 좋겠다. 성경은 하늘에 뚝 떨어진 하나님 말씀 자체가 아니지 않는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성의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과 성경을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말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비이성적 행위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컨텍스트 안에서 '해석'의 작업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9. 내 눈에는 동성애 문제를 성경에 근거하여 확정적으로 보는 것은 창세기에 근거해서 창조의 문제를 확정적으로 보면서 현대 과학의 발견을 배척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10. 성경에서 동성애에 대한 평가는 이방인, 노예, 여성의 문제처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없다는 진술은 매우 폭력적이다.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동성애는 '죄'라는 목소리를 내니까, 동성애는 죄가 맞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말은 성경을 폭력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이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의 상황과 달리 동성애를 법으로 보호하는 사회이다. 

11. 성경에서 몇 군데 언급되고 있는 동성애 관련 구절을 들어 현대 사회의 동성애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전형적인 침소봉대이다. 만약 성경 시대에 동성애 문제가 현대 사회처럼 주목 받는 문제였다면 성경은 다르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성경이 그 당시 사회적 약자들(이방인, 노예, 고아, 과부)을 따스하게 품었던 것처럼 그렇게 따스하게 품었을 것이다. 

12.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국가 폭력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국가 폭력은 인류에게 가장 큰 과제이다. 국가 폭력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광화문에 100만명 모아 놓고 한 마디도 성토하지 않으면서, 성경에서 거의 포착되지도 않는 동성애 문제를 가지고서는 광화문에 100만명 모아 놓고 성토하는 집단이 정말 성경을 공경하는 정상적인 집단인가. 

13. 리처드 헤이스의 '회개'를 배워 목회 현장에서 싸워볼 의지 없이 그냥 '유감'을 표명하는 일, 그것도 매우 수사적으로 유감을 표명하는 일이 좀 유감스럽다. 

14. 한국교회가 지금 싸워야 할 대상은 분명한데, 난데없이 동성애 이슈를 말하는 것도 불편하다. 약자는 좀 내버려두고, 국가와 헌법을 유린하는 사악하고 힘센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는 데 힘을 모으면 좋겠다.

 

(2025년 2월 21일에 쓴 글을 늦게 올림)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3. 13. 06:30

라오디게아 교회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
(요한계시록 3:14-22)

주님,
라오디게아 교회가 받은 책망을 
마음 깊이 새깁니다.
쓸모가 없어 내뱉음을 받았던 교회.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한 우리를 발견합니다.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지 않고
마치 우리는 아무런 도움이 없는 것처럼
순간순간 기도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주님,
회개합니다.
주님께서 문 밖에 서서 기다리시는데
우리는 ‘기도’라는 행동을 통해 문을 열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달라지겠습니다.
작은 일에라도 쓸모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기도로 시작하겠습니다.
기도를 통해 문을 열어 드리고
내 안에 들어오신 주님과 동행하겠습니다.
우리의 쓸모를 생각하겠습니다.
주여,
우리를 통하여 주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3. 13. 06:25

빌라델비아 교회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
(요한계시록 3:7-13)

주님,
인내만큼 좋은 것이 또 어디에 있는가 싶습니다.
험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그것을 이길 힘은 인내 밖에 없는 듯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
참으로 보잘것없는 교회였지만,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가장 크게 칭찬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너를 지키리라!”
이 말씀이 너무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세상의 인내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는 소망이고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는 주의 따스한 손길을
경험하는 통로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인내하게 하시고
그 인내 안에서
주의 따스한 손을 붙잡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인내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