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18. 12:00

보답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룻기 2)

 

설교자로서 설교하기에 쉽지 않은 성경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사기입니다. 사사기를 단순하게 보면 영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사들의 영웅담이어서 재미있는 것 같지만, 그 실체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굉장히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체적인 내용과 흐름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된말로 짜증나게 합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설교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사기와 함께 룻기를 주셨습니다. 룻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룻기는 사사시대에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몰락을 그리고 있는 반면, 룻기는 그러한 혼란과 어둠의 시대 가운데 저만치 혼자서 피어나는 제비꽃과 같이 희망과 빛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참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타락할 대로 타락해서, 거기에서 어떠한 희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숨만 나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희망은 맨 나중에 죽는다라는 러시아의 속담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희망만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세상은 룻기서와 같이 희망을 주는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환해집니다. 예배 시간에 성경 읽기는 설교를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자는 설교할 뿐입니다. 설교말씀보다, 성경말씀을 더 사모하십시오. 그래야, 설교말씀이 귀에 들리는 법입니다. 성경말씀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설교말씀에만 관심을 두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들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자신만 증폭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해서이지, 우리 인간을 증폭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가 곧 구원입니다.

 

룻기의 1장 말씀은 나오미의 기구한 인생과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모압 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으로 오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1:22).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라는 시간적 배경은 어떠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도착한 나오미와 룻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이삭줍기에 나섭니다. 요즘에는 이삭줍기 같은 것이 없지만, 옛날에 이삭줍기는 가난한 자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이삭줍기를 못하면 그야말로 거지 신세가 되어 빌어먹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삭줍기는 가난한 자의 마지막 자존심인 셈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방인이었던 룻이 낯선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마음이 조렸겠습니까?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사는 저는 그 마음이 이해 갑니다. 차별 중에 가장 극복하기 힘든 차별이 인종차별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인종차별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요즘 한국도 다문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데, “완득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다문화사회의 문제를 소프트하게 그린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터전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나, 다문화가정 친구들에게 잘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실 겁니다. 이방인이고, 여인이고, 남편도 잃은 상태의 룻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놓여진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줄타기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자 중에 가장 소외된 자였습니다.

 

그녀가 베는 자를 따라 이삭줍기를 하다가 우연히엘리메렉(룻의 시아버지)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형도 낯설고, 문화도 낯설고, 사람도 낯설었던 룻이 무엇을 알아서 보아스의 밭에 들어갔겠습니까? 게다가 베는 자를 따라 이삭줍기 하려면 허리를 숙이고 정신 없이 이삭을 주워 담아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삭 줍는 여인이 룻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도 이삭줍기는 경쟁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겠습니까?

 

우연히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것은 말로 설명 안 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필연적인, 그리고 감사와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그러한 우연, 즉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없다면 역사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거기에 우리는 감사하고 감탄할 뿐입니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보아스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친족이고, 유력한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유력한 자라고 하는 것을 보니, 사회적 지위와 덕망이 있는 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모습을 한 번 보시죠.

 

보아스는 일터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일꾼들에게 이런 인사를 건넨닙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God be with you!” 보통 사람 같으면 일꾼들에게 이런 인사를 먼저 건네지 않을 것입니다. 잔소리부터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복을 먼저 빌어줍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보아스의 축복을 받은 일꾼들은 거기에 복 비는 말로 보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God bless you!” 참 훈훈한 장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 꼭 나타나야 하는 훈훈한 장면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복을 빌어 주는 것입니다. 복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이 최고의 복입니다. 여기에서 아멘안 하시는 분은, 그래도 복은 이 최고지, 생각하시는 분이죠? 복 중에서도 최고의 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 목사님도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이런 말을 했다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영성신학자 안셀름 그륀의 책을 즐겨 읽습니다. 그의 책에서 배워 실천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을 위해서 복을 비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여러분들을 위해 복을 빌고 왔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저를 통하여 하늘의 복을 받으셨습니다(안 받으시겠다는 분은 다시 돌려주십시오.). 저는 목사로서 하루의 일과를 어쩔 수 없이기도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굉장히 힘듭니다만, 큰 특권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빼먹지 않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생각하며 그날 만나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축복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 내려 주소서.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를 입게 하소서!” 그러면 내가 만나는 사람은 그냥 일반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냥 일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복덩이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들은 제 눈에 다 복덩이로 보입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고 만났는데도, 나를 들이받는 사람도 있습니다(지금 조시는 분, 또는 딴 생각 하시는 분!). 복이 둥글둥글하게만 올 거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복은 때로 뾰족하게도 옵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복을 간구했다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뾰족하게 오는 복덩이에게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십니다. 진심으로 기도하고 난 후에 오는 뾰족한 복덩이는 은혜입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어느 집단이든 구성원들 간에 어떠한 말을 주고 받는지 보면 그 공동체의 미래가 보입니다. 가정에서부터 부부 간에, 부모 자식 간에 서로 복 빌어주는 말을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별히 부부 간에 의식적으로 복을 빌어주는 말을 잘 해야 합니다. 인간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해가는 존재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a becoming being, 즉 되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되어가는,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사람은 그냥 그 자리에 결코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남녀의 관계(부부의 관계)가 참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동화 속에 나오는 고운 말을 씁니다. “공주님, 왕자님, 나의 로테, 나의 네페르타리” “내 눈에는 그대가 천사로 보여, 내 눈에는 그대가 아름다워요, 내 눈에는 너 밖에 안 보여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언어가 매우 인간적으로 바뀐다. 가장 인간적인 말을 씁니다. “이 인간, 저 인간그러다 더 심해지면 언어가 동물적으로 갑니다. “XX, XX”. 그러나 끝에 가서는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외계어를 씁니다. 그러다가 서로의 보금자리인 지구를 떠나게 되는 겁니다. 각자가 왔던 화성과 금성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죠.

 

제 생일이 36일인데, 얼마 전 생일 날, 케이크 자르고 밥상 차려주는 집사람이 고마워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영숙이, 오빠 사랑하지?’라고 물어봤는데, 우리 집사람이 대답하기를 생일 날 죽고 싶어하더군요. ‘내가 애들 때문에 산다.’해서 한바탕 웃은 적이 있습니다. 연애할 때는 그렇게 내 몸에서 애기 냄새가 난다고 좋아하더니, 요즘에는 내 몸에서 독소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만 뜨면 해독 주스를 들이댑니다. 내 몸에 있는 독소를 빼내야 한다면서요. 그거 먹느라 정말 힘듭니다. 안 먹으려 하면 도끼눈 뜨고 바라봅니다.

 

50, 60, 70대 남자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50대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형님들, 내가 오늘 아침에 집사람한테 밥 좀 차려 달라 그랬다가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60대 남자가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동생은 아무 것도 아녀, 나는 오늘 집사람한테 어디 가냐고 물어 봤다 죽는 줄 알았어.” 가만히 듣고 있던 70대 남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동생들, 말도 마, 나는 오늘 아침 눈 떴다고 죽는 줄 알았어!”

 

서로 복을 빌어줍시다. 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요, 라는 마음이 들어도 복을 빌어줍시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서로 복을 빌어주는 고운말을 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일의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했는데, 말씀을 전하는 목사인 나에게는 이 말이 정말 실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정말 언어는 존재의 집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내 존재가 달라집니다. 목사의 특성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는데, 그 사람이 쓰는 언어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에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납니다. 정말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을 비는 언어와 감사의 언어는 분명 하나님의 복을 불러오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연습해봅시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를 입게 하소서!” 부부끼리 복을 빌어주는 말은 이겁니다. “사랑해. 고마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힘내요. 내 맘 알죠?” 사실 최고의 복을 빌어주는 언어는 신체 언어입니다. 부부끼리는 뽀뽀가 최고의 복 빌어주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뽀뽀를 자주합니다(물론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보십시오. 복을 빌어주는 행위가 입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손과 발이 실천하게끔 해줍니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을 보시죠. 보아스는 룻에게 선대합니다. 보아스가 일터에 와서 처음으로 한 말은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을 보고, “저 여자는 뭐냐? 왜 남의 밭에 와서 허락 없이 이삭을 줍는 것이냐? 당장 내쫓아라!”라고 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복을 비는 말을 해 놓고, 복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보아스는 복을 빈 자답게 룻에게 선대합니다. 1)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 자신의 밭에 머물 것을 허락합니다. 다른 밭에 가면 어떠한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자신의 밭에서 계속해서 이삭줍기를 해도 괜찮다고 선대합니다. 2) 그리고, 부리는 일꾼들에게 룻을 보호해 줄 것을 명령합니다. 이방 여인이고, 과부고, 젊은 여자로서 어떠한 해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보아스는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룻을 보호해줍니다. 3) 또한 마른 목을 축이게 해줍니다. 베는 자를 따라 허리를 숙여가며 이삭을 줍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금방금방 목이 마르기 마련입니다. 옛날에는 물 먹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먹어야 하는데, 물 한 모금 얻어 먹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이방 여인인 룻이 낯선 곳에서 물 얻어 먹는 일로 고초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보아스는 그러한 어려움으로부터 룻을 구해줍니다. 4) 마지막으로 보아스는 일 하던 중간에 룻의 배고픈 배를 부르게 해줍니다. 이삭줍기를 한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뜻인데, 가난하다는 것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삭줍기를 하느라 얼마나 배고팠겠습니까? 아마도 배가 등가죽에 붙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에게 선대합니다. 배부르게 먹여줍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복을 빌어주고 실제로 사람들에게 선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경건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이란, 야고보서 127절에 나와 있듯이,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때가 사사시대 입니다. 사사시대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사시대는 한마디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이 옳은 대로 행하던때였습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자기 자신의 생각이 미치는 대로 행하던, 하나님을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보아스가 롯에게 선대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나옵니다. 롯이 이방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을 택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바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경건입니다. ,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택한 룻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예뻐 보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보답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뜬구름 잡는 것처럼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임하는지 보십시오. 나락으로 떨어졌던 두 여인(나오미와 룻)의 삶이 점점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날, 룻이 보아스의 보리 밭에서 이삭줍기를 통해 소득 한 것이 보리 한 에바였습니다. 에바는 광주리라는 뜻입니다. 한 광주리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대단한 수확입니다. 이삭줍기 해서 그 정도의 수확을 얻기는 정말 힘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룻은 일하느라 배를 굶어 배가죽이 등에 붙어 돌아온 게 아니라 오히려 배부르게 돌아왔습니다. 오히려 음식이 남아 그것을 챙겨 가지고 와, 하루 종일 굶었을 시어머니를 봉양합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합니다. 음식을 구하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그 당시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하여 기업 무를 자(고엘법)’의 의무를 감당하게 하셔서, 룻을 보아스의 아내가 되게 하시고, 두 여인의 고단한 삶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보아스는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입니다. 룻기서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4:22).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와 룻, 그리고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든 피조물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여기에 모여서 예배 드리는 이유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룻의 아름답고 신실한 결단,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다!”, 이것을 결코 그냥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마음을 두고 살겠다고 다짐하는 자들을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답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순종이 만나면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순종했고, 보아스는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결국,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 모두는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말씀)와 인간의 순종은 역사를 바꿉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에서 분명히 보았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미련해 보이는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죽음만이 가득한 이 세상에, 생명의 희망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믿으십니까? 그것이 십자가처럼 미련해 보일지라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예수 믿는 자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절대적인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겠다고 신앙의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 결단이 여러분의 언어부터 바꾸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자의 언어는 은총의 언어, 축복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둔 마음이,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축복의 언어가 여러분의 삶으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복을 불러 올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구원의 역사, 새창조의 역사, 희망을 만들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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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17. 06:00

신앙은, 패러독스다

창세기 22

(창세기 22:1-14)

 

패러독스란 모순되어 보이나 진리를 보여주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학자 중에서 신앙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들 중 으뜸은 키에르케고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그의 책 <공포와 전율>을 통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그것을 통해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다른 상황을 설정하는 것으로 신앙을 풀어 나갑니다. 좀 길긴 하지만,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글을 직접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신앙에 대해서 많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1)

이른 아침이었다.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났다. 그는 나귀 등에 안장을 놓고 이삭을 데리고 그의 장막을 떠났다. 사라는 그들이 계속을 내려가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창문에서 그들을 전송하였다. 그들은 사흘 동안 묵묵히 나귀를 타고 갔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이 되어서도 아브라함은 역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눈을 들어 멀리 모리아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종들을 뒤에 남겨두고 이삭과 단 둘이서만 손을 잡고 산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이 여행이 그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를 이삭에게 숨기고 싶지가 않다.” 그는 조용히 섰다. 그는 한 손을 이삭의 머리 위에 얹고 그를 축복하였다. 이삭은 그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몸을 구부렸다. 아브라함의 얼굴 모습은 아버지의 사랑 그것이었고, 그의 눈 길은 부드러웠고, 그의 말은 엄하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삭의 마음에는 아무런 감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무릎을 끌어안고 발아래 엎드려 애원하였다. 이삭은 자신의 젊은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아름다운 희망을 위하여 애원하였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집에 있어서의 즐거웠던 일들을 아버지에게 회상시켰다. 이삭은 고뇌와 외로움을 회상시켰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붙들어 일으켜 자식의 손을 잡고 다시 걸었다. 아브라함의 말에는 위로와 격려가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 올라갔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때 순간적으로 이삭은 아버지를 외면하였다. 그러나 이삭은 다시금 아버지 아브라함을 바라보았을 때, 아버지의 얼굴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의 시선은 험상궂었고, 모습은 소름이 끼칠 만큼 창백하였다. 그는 이삭의 가슴팍을 움켜잡고 땅 위에 내던지며 외쳤다. “어리석은 자야! 너는 내가 너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나는 우상숭배자다. 너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믿고 있느냐? 아니다. 이것은 나의 욕망이다!” 그때 이삭은 벌벌 떨며 불안에 싸여 부르짖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땅 위에서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저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용히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늘에 계신 주여, 저는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삭이 당신에 대한 신앙을 잃느니보다는 오히려 그가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믿는 편이 좋습니다.”

 

(2)

이른 아침이었다.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났다. 그는 그의 늙은 신부 사라와 포옹하였다. 그리고 사라는 자신의 치욕을 제거해 준 이삭에게, 그녀의 자랑이고 모든 후손들을 위한 소망인 이삭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묵묵히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눈길은 땅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나흘 째 되는 날에 가서야, 그는 눈을 들어 멀리 모리아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다시금 땅 위로 돌아갔다. 그는 말없이 불을 지필 장작을 포개놓고, 이삭을 묶고, 말없이 칼을 뽑았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양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 양을 제물로 드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 이날부터 아브라함은 노인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신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삭은 이전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눈이 흐려졌다. 그는 다시금 기쁨을 볼 수 없었다.

 

(3)

이른 아침이었다.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났다. 그는 젊은 어머니 사라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사라는 그녀의 즐거움, 영원한 기쁨인 이삭에게 입맞춤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생각에 잠겨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났다. 그는 이전에 황야로 쫓아버린 하갈과 그의 자식을 생각하였다. 그는 모리아 산에 올랐다. 그리고 칼을 뽑았다.

조용한 저녁나절이었다. 아브라함은 홀로 나귀를 타고 나갔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 이르렀다. 그는 얼굴을 숙였다. 그는 이삭을 바치려고 한 사실,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해 의무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죄를 용서해 주십사 하고 하나님에게 애원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나귀를 타고 혼자서 외로운 길을 다녀왔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최선의 것, 그것을 위하여서는 자신의 생명을 수천 번이라도 기꺼이 내던져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려고 한 일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죄라고 한다면, 만약 그가 그렇게까지 이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용서받을 수 있는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연 이보다 더 무서운 죄가 있을 수 있을까?

 

(4)

이른 아침이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는 길을 떠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사라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충실한 종 엘리에셀이 그의 길을 인도하였으나, 그는 도중에 다시 되돌아갔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서로 의좋게 나귀를 타고 모리아 산까지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용하고 차분히 번제를 올리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하였다. 그러나 그가 뒤로 돌아서 칼을 뽑았을 때, 이삭은 아브라함의 왼쪽 손이 절망적으로 움켜쥐어져 있으며, 그의 전신에는 전율이 흐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사라는 달려가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삭은 신앙을 잃고 말았다. 세상에서는 이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이삭은 어느 누구에게도 그가 본 일을 말하지 않았고, 또 아브라함은 그 일을 어느 누가 보았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키에르케고르, 공포와 전율, 다산글방, 21-26>

 

우리는 창세기에 있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다가 22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 성서기자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신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1).

 

우리의 일상에서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것은 실정법 상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이를 제지할 것이고, 그를 일컬어 미친놈이라고 할 것입니다. 일상에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어나면 분명히 손가락질 밖에 못 받을 이러한 일에 대해서 성경은 왜 기록하고 있을까요? 아들을 바친 아버지의 이야기를 조금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신앙이란 미친짓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렇게 미친짓 같은 신앙을 갖느니, 그냥 평범한 선한 양심대로 세상을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시험하고자 하신 그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1절 말씀은 그 일 후에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 일이 무엇인지 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후, 하갈과 이스마엘 사건 때문에 한 바탕 어려움을 겪습니다.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문제는 잘 해결된 듯 보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들과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그 내용은 창세기 2122절부터 30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도 받았고, 집안의 불화의 싹이었던 하갈과 이스마엘 문제도 잘 해결되었고, 게다가 정착해 살고 있는 블레셋 땅의 주민들과도 평화조약을 맺어, 그야말로 여러 가지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평화를 누릴 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는 법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평안을 달라고 하나님을 그렇게 찾아대다가도 막상 평안에 이르면 그 평안을 가져다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언약함입니다. 그렇다고, 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살겠다고 자신에게 평안이 이르는 것을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잠언 30장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처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를 묵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 듯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구했을 때 그것이 내게 주어졌는데, 그것이 헛된 것인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인지 알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사모하게 되었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금방 잊어버리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매우 고무적인 겁니다.

 

사람은 평화로울 때 또는 만사가 잘 풀릴 때 그 마음을 달아볼 수 없습니다. ‘시험의 때에 그 마음이 보이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그 시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달아보시는 시험이었습니다. 1절에서 쓰인 시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니싸인데, 이것은 시험하다, 입증하다, 증명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나옵니다만, 하나님의 시험은 누군가의 신앙을 잃어버리게 하고 사악한 의도를 가진 시험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달아보고 하나님께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은혜의 시험인 것입니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아브라함에게 그야말로 시험이 닥쳤습니다.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 정말 눈에 넣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을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든 겁니다. 그냥 보기에도 참 불합리한 명령을 받아 든 아브라함, 한 번 저항해 볼만도 한데, 성서기자는 그가 어떠한 고민도 한 흔적이 없는 것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번제 장소까지는 3일이 걸렸습니다. 그 삼일 동안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을 하며 갔을까요? 아마도 수많은 고통의 파도가 가슴을 요동쳤을 겁니다. 그러한 마음을 상상해서 옮겨놓은 것이 위에 있는 키에르케고르의 글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에게 감정이입을 해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앙이란 불합리해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처럼 보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무지막지한 명령 앞에서 그것을 의연하게 실행한다는 것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신앙은 패러독스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일 길을 걸어가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려고 온 힘을 다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모리아 땅의 한 산에 도착했을 때, 그는 종들을 세워두고 아들 이삭과 단 둘이 산으로 올라가면서 이곳에 온 목적이 예배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이것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온전히 준행할 목적이었다면, 여기서 우리가라는 말은 빠져야 합니다. 돌아올 때 이삭은 없고 아브라함만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19절에서 아주 명쾌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를 위해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올라갑니다. 아들 이삭은 번제를 위해 나무를 지고 올라갑니다. 그때 이삭은 아버지에게 질문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심장을 파고 드는 질문이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대답을 해줍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서 번제단을 쌓는 것이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와 함께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은 것으로 시작해서, 나무를 벌여 놓고’, 이삭을 묶고’,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을 죽이기 위해 칼을 잡아 빼 듭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수많은 화가의 상상력을 자극시켰습니다.  그 중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가장 유명한데, 그의 그림을 보면 이삭의 표정이 압권입니다. 공포에 질린 표정을 너무도 잘 표현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바로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멈춰 세웁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렇게 두 번 부른 것은 상황이 그만큼 긴박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즉각 반응합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사실 이러한 반응은 보이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을 두고 있지 않거나 깨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도 이러한 반응은 보기 불가능합니다. 사무엘도 엘리 제사장 문하생으로 제사장 수업을 받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죠. 엘리 제사장의 가르침을 받고서야 비로서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늘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마음을 허탄한 데 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의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리아 산에서의 이삭 번제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의 마음을 확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숫양을 번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것을 일컬어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조상은 불완전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을 일컬을 때도 쓰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신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 자체는 굉장히 패러독스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그렇습니다. 인간의 부족한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이상한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은 양 막무가내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신앙이란 패러독스해 보이지만,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능력입니다. 신앙 사건 중 가장 패러독스한 사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말도 안 되는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구원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요? 그것이 구원 사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께서 끝까지 하나님께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면서까지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한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그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우리의 주님으로 높여 주셨습니다.

 

명확히 이해되고, 기분 좋게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임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패러독스이기 때문에 불합리한 형태로 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적분별력이 필요한 거고, 그 능력을 입기 위해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일이 필요한 겁니다.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것(아들)과 바꿀 수 없었습니다. 신앙 없는 우리는 자주 그런 실수를 범합니다. 유한한 것을 위해 영원하신 하나님을 희생시킵니다.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택할 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우리의 인생에게 필요한 것들을 여호와 이레로 준비해 주십니다. 그러나, 유한한 것을 위해 영원하신 하나님을 저버린다면, 그 유한한 것이 오늘 피었다 지는 들에 핀 꽃과 같은 우리네 인생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패러독스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당황하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함으로 여호와 이레의 만복을 누리시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www.columbuskmc.org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10. 06:27

이삭 - 구원의 웃음

창세기 21

(창세기 21:1-7)

 

드디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게 된 아브라함과 사라, 얼마나 기뻤을까요? 아마도 세상이 달라 보였을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의심의 장막도 걷혔을 것이고, 하나님을 의심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오히려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도 들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도 느꼈을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공고해졌겠죠.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면 신앙이란 단 번에 성취할 수 있는 어떠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 약속의 성취까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까? 사실 그 약속의 성취까지 보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약속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확실하지만, 그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고되고 지난한 훈련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겠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나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3:12-14).

 

믿음을 경주로 표현하는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믿음이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한 가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과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경주하는 동력 또한 믿음의 속성임을 볼 수 있는 것이죠.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주대토(守株待兎) 라는 고사성어를 만든 일화가 믿음에 대한 좋은 예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나라에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오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덕분에 토끼 한 마리를 공짜로 얻은 농부는 농사일보다 토끼를 잡으면 더 수지가 맞겠다고 생각하고는 농사일은 집어치우고 매일 밭두둑에 앉아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가 오기만 기다렸습니다.[守株待兎]  그러나 토끼는 그곳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농부 자신은 송()나라 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밭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농사를 망친 것은 물론입니다.

 

여기서 믿음에 대한 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농부의 믿음은 그루터기를 지키면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는 토끼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겁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주실 거라는 약속을 믿는 그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농부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범하기 쉬운 오류가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약속이란 무미건조하고 일방적인 선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약속)을 맺으셨다는 것은 인격적인 사귐 가운데 거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간의 깊은 신뢰가 없으면 약속(언약)은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언약)하신 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맺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농부가 범한 실수는 이런 것이죠. 농부가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는 토끼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런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겁니다. 그의 일방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이죠. 거기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놓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너무도 일방적일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란 인격적이고 상호관계적이고 사귐적인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적 관계에 들어갔다고 하면서도 결국 신앙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전혀 인격적이지 않고 사귐적이지 않고, 하나님과 배타적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실 이런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이란 헛것을 의미하는데, 헛것인 어떠한 존재나 사물에게 마음을 두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하기도하지만, 그것보다 더 끔찍한 우상숭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헛것취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하나님을 헛것 취급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면서 살다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떠한 문제를 맞닥뜨렸다던지 아니면 마음 속에 간절히 원하는 어떠한 욕망이 생겼을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적어도 이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수많은 실수를 범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그러한 행동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랬다는 겁니다. 실수를 범하고 반항을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그렇게 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습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녀가 부모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사고 치고 다니면 부모는 자녀의 그러한 모습에 화가 나긴 하지만 적어도 나 몰라라 하지는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발생합니다. 요즘엔 사고 치고 다니는 부모도 많습니다. 그런데 자녀와 부모 간에 인격적인 사귐이 바탕이 된 경우에 자녀든 부모든 사고 치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의 지혜를 맞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모와 자녀 간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간에 어떠한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사고 치고 다닐 때 서로에게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어구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약속의 성취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입니다. 이 말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한 마디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까지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가장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깊은 속성입니다.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언약 안에서 당신의 의무를 온전히 수행하시는 분입니다.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조마조마한 순간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이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깊은 인격적인 사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었던 아브라함은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필요한 모든 제반 사항을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아브라함은 죽을 위기에서 구원 받기도 하고, 육신의 생각이 낳은 것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 등 끊임 없는 돌보심 가운데 약속의 성취라는 짜릿한 순간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약속의 성취인 아들 이삭은 그 이름의 뜻이 웃다입니다. 이 웃음은 단순히 창세기 18장에서 보았던 사라의 실소가 아닙니다. 이 웃음은 또한 단순히 기쁨의 웃음이 아닙니다. 이 웃음은 질적으로 다른 웃음으로 그 동안의 서러움과 고통을 말끔히 씻어주는 구원의 웃음입니다. 그야말로 약속의 성취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단순히 기쁘고 좋은 일이 아니라, 그냥 아들 하나 얻었다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라,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을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죠. 아들 이삭을 얻은 사라의 기쁨을 한 번 보십시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6). 이 웃음은 단순히 기쁜 웃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에게 아들이 생겼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을 당한 당사자들만 웃고 맙니다. 일례로, 우리 아들이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다면 우리 집에는 참 좋은 일이지만, 그래서 우리 가정은 웃겠지만, 그 소식을 듣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웃어주는 일은 드뭅니다. 왜냐하면, 남이 잘 되는 것은 배가 아픈 법이니까요.

 

그런데, 믿음이란, 그 믿음이 인도하는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질투의 대상도 아니고 질투를 유발하지도 않습니다. 구원이란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부러움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과 구원은 모두가 웃을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주신 웃음은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구원의 웃음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안아 든 그녀의 웃음 소리를 들은 주변의 모든 이들이 함께 웃을 수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돌보시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구원의 은혜고 역사인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는 한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믿음을 하나님께 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의무이고 권리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전혀 없는 빈 껍데기 믿음입니까? 아니면 비록 실수투성이고 때로는 아픔을 낳는 육신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믿음입니까?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깊은 사귐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우리를 기쁨으로 이끄실 텐데, 그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 같지 아니한 구원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이 세상입니다. 한 번 한바탕 웃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 바탕 웃고 나도 인생 그대로인 헛된 웃음이 아니라, 한 바탕 웃고 나면 인생이 달라지는 구원의 웃음을 웃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만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구원의 웃음을 안겨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품에 안은 이삭같은 바로 그 웃음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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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7. 03:32

그리스도의 영은 생명의 영이다

(겔 37:1-6; 8:6-11; 11:39-44)

오늘 우리가 읽은 세 개의 본문 말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어 있는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죽었다, 산다! 한 마디로,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사실, 잘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죽었다 살아난다는 것이 진짜 가능할까?’ 이런 의심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Nothing)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은 새로운 생명, 즉 새하늘과 새땅이 창조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일컬어, “생명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숨쉬고 살고 있으면서도 생명, 즉 살아있다고 느끼기보다는 죽음, 즉 죽어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별별 행동을 다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카니발(사육제)입니다. 그 시간만큼은 자신의 생명이 소멸되어 간다(죽어간다)는 것을 잊고자 한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것이지요.

 

또한 자신의 삶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일수록 주목 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을수록 주목 받고 싶어합니다. 납득할 수 없는 행동과 말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자살소동이나 자살도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자신이 안고 있는 죽음의 상태를 알리고 싶은 것이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 인간 세상이 지니고 있는 아픔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겔서를 보십시오. 얼마나 죽음이 가득 차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마른 뼈가 가득하다는 말은 죽음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현실상황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른 뼈는 그들의 삶이 절망 자체요, 죽음 자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이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겠습니까? 자비나 인권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고, 온통 죽음으로 가득 찬 이야기들뿐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했을 때 예루살렘 주민들은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삶의 보금자리가 파괴되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절망 가운데서 적군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짐승처럼 남의 나라에 끌려왔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생명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온통 사방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마른 뼈의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것 밖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물론 에스겔이 본 마른 뼈 골짜기만큼 대량의 죽음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이 온 우주를 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른 뼈 꼴짜기에서 발견하는 죽음이나 요한복음의 나사로의 죽음이나 그 본질은 똑같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뭉뚱그려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말레이시아 여객기가 인도양에서 실종된 사건으로 239명의 생사가 확인되고 있지 않고 있지만, 그건 여객기 실종으로 인해 239명이 죽은 한 사건이 아니라, 239가지의 사연을 가진 239가지의 죽음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도 마찬가지 입니다. 6백만 명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아우슈비츠라는 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6백만 가지의 죽음의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얼마나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건들입니까? 우리는 TV 매체나 역사교과서를 통해서 이러한 일들을 접해서 남의 일 같아 별로 신경 안 쓰고 살아가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숨이 콱 막히는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 누구도 나사로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오셨다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소망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오지 않으셨고,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예수님의 탓은 아니지만 오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지 않은 예수님이 원망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죽지 않게는 할 수 있지만, 죽은 후에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혹시 살아나더라도 마지막 날에, 즉 부활의 때에 살아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지금 당장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거라는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후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방문해서 그들을 위로하며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다른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의 입술에서는 엄청난 고백이 나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믿음의 고백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향해 엄청난 일을 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일입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4)이나 지나서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들의 진짜 모습입니다. 아무리 꾸미고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가려지지 않는 인간의 본래의 냄새입니다. 죽음의 냄새가 얼마나 지독합니까? 사는 동안도 그 죽음의 지독한 냄새를 펄펄 풍기면서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살고 있으니까 생명 냄새를 더 풍겨야 할 사람인데, 그러지 못하고 죽음의 냄새를 더 풍기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생명보다 죽음과 더 가깝게 지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운명은 죽음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참으로 비통한 인간 현실입니다.

 

에스겔이 본 마른 뼈 골짜기 환상이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보고 있는 현실이나 모두 죽음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도 절망하고 있고, 마르다와 마리아도 눈물에 젖어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이 끝나는 것 같습니다. 이게 인생이라고 허무에 젖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까지가 믿는 이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이나 똑같이 보는 우리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이 현실 너머의 것을 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 골짜기를 보여주시면서 단순히 이것을 보고 너희의 현재 상태를 좀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상태는 이렇게 마른 뼈가 가득한 죽음의 상황이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런 마른 뼈까지도 생명을 입히실 수 있는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말라는 희망을 전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마른 뼈 골짜기를 보여주시면서 질문하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이에 대해 에스겔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성경이 점잖게 기록하고 있어서 그렇지, 에스겔의 대답은 점잖은 대답이 아닙니다. 절망과 공포가 가득 한, 그리고 짜증이 가득 한 대답입니다. 한 마디로 볼멘 소리입니다.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렇게 볼멘소리 하는 에스겔 앞에서, 그가 똑똑히 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 때 그러셨듯이 마른 뼈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무덤에 누워 있는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른 뼈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겁니다. 그랬더니, 나사로가 죽음에서 일어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대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도대체 깨달아지거나 믿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마른 뼈에 살이 붙고 생기가 넣어져 살아나고,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무덤에서 나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막 일어납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긍정해 버립니다. 성경에서 그런가 보다 하니까 그렇다고 생각하고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믿음 있는 것 같지만, 믿음이 전혀 없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의 실제를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에만 젖어 있어, 생명을 간구하는 능력이 상실됐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에 눈이 번쩍 뜨여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을 한 번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죽음의 일 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을 하는 자들은 그 너머에 있는 생명과 평안을 봅니다. 그러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육신 너머에 있는 영의 일, 생명과 평안을 볼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안에 품을 때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증거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즉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되고,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온통 생명을 보게 됩니다. 온통 생명의 일만 보는 우리의 삶 속에는 당연히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게 되겠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마른 뼈 같다고 실망(절망)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우리 삶 가운데 있는 죽음을 보지 않고 생명을 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절호의 기회 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한 기회입니다.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삶의 현실, 우리가 거기에 살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그냥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어려우세요? 힘드세요? 죽겠습니까? 그럴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그러면 생명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보입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생명을 보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생명을 보니까,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자처럼 생기가 넘치게 살아갑니다. 어깨를 좀 펴십시오.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살을 붙이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며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귀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헛된 영이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생명의 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거하는 자에게 임하는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더라도 생명을 가져다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 겪게 되는 마른 뼈와 같은 상황에서뿐만이 아니라, 진짜 우리가 죽음을 맞게 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영이 결국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부활절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마른 뼈와 같은 소식, 무덤과 같은 소식들뿐이지만, 그런 소식들 앞에서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오빠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막막하게 서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하셨던 말씀과 질문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고 계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생명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이 안에 품고 사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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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3. 05:56

선지자 아브라함

창세기 20

(창세기 20:1-18)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이 또 발생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일어났던 일인데, 그때와는 장소가 좀 다릅니다. 그때는 애굽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지금은 가나안 땅 남부지역인 네게브의 그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상황도 좀 다릅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애굽에서의 일은 아브라함이 아직 자식에 대한 약속을 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약속을 받은 뒤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달라졌는데도, 여전히 같은 일을 벌이고 있는 아브라함이 좀 이상해 보이긴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들기에는 인간의 마음이 부족한 것이겠죠.

 

그리고 이 사건은 이전 장에서 보았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과의 연관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도 불구하고 멸망 당했지만, 이번 사건에서 아비멜렉 가문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멸망을 피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이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데, 과연 아브라함이 감당한 선지자의 역할이란 무엇인지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등 족장들이 거주지를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아직 거류민이었고, 게다가 그는 유목민이었습니다. 유목민이란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며 가축들을 키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축들에게 꼴과 물을 먹이기 위해서 꼴과 물을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삶은 아브라함에게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였습니다. 아마도 마므레에서 네게브 지역으로 옮겨간 것도 새로운 목축지를 찾아 나선 것이겠지요.

 

유목민은 가는 곳마다 거기에 이미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짐승도 자기 영역 침범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호랑이 같은 맹수는 자신의 영역을 돌면서 자신의 분뇨 같은 것으로 영역 표시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대적자가 있으면 가서 목숨을 내놓고 싸웁니다. 영역을 지키는 것은 곧 생명을 지키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누군가를 순순히 받아 줄 사람은 없습니다. 묘한 긴장감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싸움이든 타협이든 어떠한 갈등을 통해서 서로 간의 공생점을 찾아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랄 지역으로 이동했던 아브라함과 그곳에서 이미 터 잡고 살고 있던 아비멜렉 간의 공생점은 사라를 아비멜렉이 차지하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라가 일종의 화해를 가져온 것이죠. 이것을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성매매같은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지금의 문화와 그 당시의 문화는 천지차이입니다. 그러한 문화적 차이를 전제해 두고 읽어야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단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일촉즉발의 갈등은 사라를 통해서 잠재워지는 듯 합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한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일의 상황을 의롭게 드러내십니다. “[보라!]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여자다”(3). 이에 대해서 아비멜렉은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4,5). 이러면서 아비멜렉은 자신의 순전함을 주장합니다. 순전함에 대한 아비멜렉의 주장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시면서 아비멜렉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일러 주십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아비멜렉은 즉시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사라는 어떠한 욕도 당하지 않고, 아비멜렉으로부터 풀려납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만나 크게 힐책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를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9). 이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두 가지 변명을 합니다. 첫째,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11)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해 그런 거짓말을 했다는 것인데, 위에서 살펴봤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 가운데서도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 중 하나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니까 선하고,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모두 악하다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영적인 교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제한하는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한 방식으로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우리 멋대로 제한을 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교만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실제로 그의 아내 사라가 그의 이복 누이라는 변명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본토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때 자신들을 지킬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지혜가 상대방에게는 멸망을 가져오는 치명적인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는,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는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사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느 한쪽이 멸망하고 마는 제로섬게임 같은 것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함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합니다.

 

아브라함의 변명이 아비멜렉에게 수긍이 가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비멜렉 측에서는 이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이방인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후한 처분을 내려줍니다.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15). 이 뿐만 아니라, 이유야 어찌되었든 잠시나마 욕을 보였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놓아주면서 사라의 수치에 대하여 그냥 넘어가지 않고 최대한 보상을 해줍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있었던 갈등은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의 마지막 마무리를 아브라함에게 맡기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자가 누리는 특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 더 의로고 온전함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브라함을 앞서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일의 마무리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넘어갑니다.

 

아브라함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하는지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17).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아비멜렉 집안은 대가 끊길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등이 풀리면서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을 통해 하십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일컬어 선지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선지자란 앞 날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란 신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아브라함의 역할은 병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이 좀 더 광범위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선지자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지닌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에게 속한 자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은 아마도 살해당할 것이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대가 끊길 것이다인 듯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줬던 것이 선지자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선지자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있던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번 일에서 아비멜렉 보다 의롭거나 완전하지 못했지만 갈등과 문제를 마무리 짓는 결정적인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말할 수 없는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선지자라고 일컬음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최선을 다해 의롭고 완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노력해야겠지만, 그러한 것과는 상관 없이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갈등의 마무리 방점을 찍는 특권은 그리스도인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1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문제와 갈등의 마무리에 방점을 찍을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은 희희낙락 거릴 상황이 아닙니다. 이것은 굉장히 두렵고 떨리는 상황입니다.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잘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생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도가 한 사람의 생명(인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웃을 일이 아니라, 두려운 일입니다.

 

선지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 받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유는 바로 그가 오늘 말씀에서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그의 집안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신실하게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통해 아비멜렉은 멸망에서 벗어났습니다. 선지자 아브라함의 기도는 사람을 살리는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아비멜렉 집안의 태를 여는 기도를 통하여 복의 근원이 된 선지자 아브라함, 그러나 정작 자신의 아내 사라의 태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사라의 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궁금증과 함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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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30. 23:01

눈을 뜬다는 것

(요 9:1-12, 5:8-14)

 

레슬링 선수와 소방수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소방수가 이깁니다. 왜요? 소방수는 물불 안 가리니까요! 그러면 소방수와 눈 먼 사람(장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눈 먼 사람(장님)이 이깁니다. 왜요? 보이는 게 없으니까요!

 

50, 60, 70대 남자의 대화

50– 아내한테 배고파서 밥 차려 달랬다 죽는 줄 알았어요.

60– 아내한테 어디 가냐고 물어봤다 죽는 줄 알았어.

70오늘 아침에 눈 떴다고 죽는 줄 알았어.

 

도대체, 눈을 뜬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보지 못하는 자들보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고, 보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온 겁니다.

 

요한복음에는 두 부류의 대조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나면서부터 눈 먼 자이고, 다른 사람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눈 먼 자는 나면서부터 어둠 가운데 살았습니다. 눈 먼 것까지 힘겨운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살아야 했습니다. 눈멂은 이 사람에게 인생 전체에 새겨진 주홍글씨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나 신체장애는 죄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신체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죄인이 되는 것이죠. 참으로 불합리한 생각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불합리하고 죄악된 생각을 예수님께서 뒤집으시는 이야기입니다.

 

종교는 이처럼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 곳곳에서 폭력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폭력이 가해지면 사람들은 저항하지 못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눈먼 이 사람도 저항하지 못하고, 평생 자기 자신을 죄인 취급하면서 죄책감에 싸여 낮고 낮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길 가시던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을 돌아보셨습니다. 함께 가던 제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종교적 관습에 젖어 있었습니다. 맹인으로 난 것은 본인이든 부모이든, 누구든지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저렇게 맹인으로 난 것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다! 저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위대한 일을 보아라!” 예수님은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그 당시의 통념을 뒤집으셨습니다. 물론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것을 그렇게 몰아 넣는 것은 불합리한 종교적 폭력에 불과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혹시 질병에 걸렸거나 자기 신변에 우환이 생기면 우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싸인인가?’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죄책감에 싸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좀 잘못된 것이 있다 싶으면, 하나님께 나아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죄의 깊이보다, 우리의 죽음의 깊이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는 말할 수 없이 깊습니다.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고,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아주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눈먼 자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컬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빛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갑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확인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바리새인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눈 뜸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그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보십시오. 맹인은 계속해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바리새인들에게 진술합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바리새인들은 질문합니다. “그 사람(예수)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답답한 맹인은 이렇게 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 말에 격분해서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다 눈 뜬 그 사람에게 욕을 하면서 말합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랬더니, 눈 뜬 사람이 한탄하면서 말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면서 눈 뜬 사람은 그 사람,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면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다가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납니다.

 

이 일을 듣고 예수님은 그 눈 뜬 사람을 만나 위로해주십니다. 그를 당신의 제자 삼으시고,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를 알아보았고, 눈을 뜨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눈을 뜨셨습니까? (웃을 때 눈 뜨고 웃으라!) 여러분은 보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까? 이렇게 다시 질문해 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 우리가 말로는 예수님이 보인다 안 보인다 어느 쪽이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장성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사람은 맹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몸에 익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게 몸에 익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이 눈을 뜨면, 마냥 좋기만 할까요? 제가 지금 눈 뜨지 말고 그냥 맹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떠야죠, 병이 나아야죠.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눈을 뜨고 병이 낫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가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보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도 빛 가운데서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눈을 떴는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의 자녀로 살지 못할 거면 오히려 눈을 그냥 감고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필연적으로 빛의 자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안 그럽니까?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맹인이 눈을 뜬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와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하고 병든 것들을 고쳐주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지긋지긋한 질병도 좀 나았으면 좋겠고, 지긋지긋한 경제적 어려움에서도 좀 벗어났으면 좋겠고, 예수님의 은혜로 남편, 부인, 자녀 등 가족이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보기 원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욕심을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맹인처럼 행동합니다. 어둠에 휩싸여서 어두운 일을 합니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일들을 서슴없이 합니다. 왜요? 맹인이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그렇게 삽니다. 마음이 어둡고 행동이 어둡습니다. 남을 헤칠 생각만 하고, 남을 헐뜯을 생각만 하고, 남을 미워할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울 생각만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생각만 하고, 사회(공동체)를 분열시킬 생각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그럽니까? 내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이 거룩한 빛을 비추시는데, 어두운 마음이 들고 어두운 행동을 할 겨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면, 에베소서 5 9절 말씀처럼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형제와 자매를 어떻게 도와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의 허물을 어떻게 덮어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를 어떻게 용서할까를 생각하고,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하면서 자기 자신을 감출 줄 알고,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빛이신 예수님이 보이는 건지, 안 보이는 건지. 다른 무엇보다 삶의 열매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하고 세상 사람들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세상 사람들이 이깁니다. 그들은 눈 먼 사람들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물불 안 가리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어차피 집니다. 예수님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싸우느라 괜한 에너지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이면 어둠의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 있는데 어떻게 어둠의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이면 빛 가운데 거해서, 빛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진리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눈을 뜨셨습니까?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그러면 빛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억지로 빛의 열매를 맺으려 하지 마시고,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빛의 열매가 삶 속에서 맺히게 될 것입니다. 눈 뜨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비추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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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30. 22:58

목마른 세대

(출애굽기 17:1-7)

 

<목마른 사슴> 찬양으로 시작

 

출애굽해서 광야로 나왔던 이스라엘 신광야라는 곳을 지나면서 르비딤이라는 곳에 장막을 쳤다. 그러나, 이들에게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물이 없었다. 물은 생명에 필수품.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거칠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모세와 더불어 다퉜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내가 이 백성을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일강을 치던 그 지팡이로 호렙 산에 있는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석을 치니, 거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단순히 물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의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렀다. 그 뜻은 다투다이다. 이스라엘의 목마름은 단순히 물 없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의 목마름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얼마 전 설교에서, 현대인들이 얼마나 을 안 먹고 사는지, 그래서 몸에 심각한 탈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몸에 탈수현상이 일어나면 건강을 헤칠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짜증이 자꾸 나기 때문에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기 힘들다.

 

미국 중고등학교에서 지금 차차 실행하는 것이 있는데, 아이들 등교시간을 한 시간 늦추는 것이다. 실제로 등교시간을 한 시간 늦추고, 아이들이 잠을 더 잘 수 있도록 했더니,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훨씬 더 부드러워져서 수업성취도도 좋고, 친구들 간의 다툼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거칠어지게 되어 있다. 힘들고 짜증나니까,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줄어들고, 오히려 사소한 일에 대해서 다투고 마음 상하게 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식량이나 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영적 빈곤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목마름 중에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가장 심했던 것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가장 큰 사회적 문제다. 영적인 목마름. 배고플수록 아무거나 집어 삼키듯이, 영적인 목마름이 심할수록 아무거나 집어삼킨다. 공수부대요원들 산악훈련하면서 아무것도 못 먹고 며칠 굶으면, 지나가는 뱀이 그냥 음식으로 보인단다. 영적인 목마름이 심하니까, 요즘 이단사이비, 미신이 판을 친다. 영적으로 목마르니까, 아무거나 막 삼키는 거다.

 

우리 인생 가운데, 목마름을 채워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영적인 목마름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데 있다.

 

구약의 출애굽기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하는, 서신서의 말씀은 로마서인데, 로마서5장에 보면 그것이 잘 나와 있다. 51절과 2절 말씀을 그대로 읽어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고픈 배를 채우고 나면, 즐거워진다. 마른 목을 축이고 나면 즐거워 진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채우고 나면, 즐거워지게끔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이다. ,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으면, 즐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고픈 배도 채웠고, 마른 목도 축였고, 갖가지 욕망들을 다 채웠는데도 여전히 목마른 자기 자신을 보며 당황해 한다. 온전한 즐거움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오늘 다른 말씀과 함께 보기로 되어 있는, 복음서에서 본다. 그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이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목마른 여인이 나온다. 이 여인도 자신의 삶에 닥친 여러 가지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던 여인이다. 이 여인의 개인사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 여인에게는 과거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현재 어떤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윤리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여인이 얼마나 인생에 대해서 목말랐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삶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인생이 목말랐던 이 여인, 남의 눈을 피해 마른 목을 축이러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길었다. 그리고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목마름을 전혀 채워주지 못했다. 그러다, 한 유대인 남자를 만났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인생에 깊이 베어있는, 그러나 해결할 수 없었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외쳤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삶이 즐거워졌다. 참 신비로운 일이다.

 

지금 이 시대는 목마른 세대다. 물 대신 마실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을 물로 착각하고 마시다, 심한 탈수증에 시달리는데, 그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다. 자신의 짜증이, 자신의 불만족이, 자신의 어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른 채,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다.

 

지금 세대가 겪는 가장 심한 탈수증은, 영적인 탈수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세대다. 광야의 이스라엘 세대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세대다.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영적인 탈수증세를 극복하는 길은 생명의 물인 예수는 마시는 것이다. 그 마시는 행위를 기독교적인 용어로, ‘믿음이라고 한다.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둘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나고, 우리의 영적인 탈수증세를 극복할 수 있다. , 영적인 목마름을 채울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만족함 가운데, 생명의 온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생명의 물로 내어주어 마시게 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선포하는데도 예수를 생명의 물로 받들고 마시지 못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예수를 생명의 물로 마시겠는가? 그렇다면 저와 함께 이 찬양을 부르자.

 

<우물가의 여인처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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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7. 05:54

마음의 문화

창세기 19번째 시간

(창세기 19:30-38)

 

소알로 피신한 롯과 두 딸, 그들은 거기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산에 올라가서 살게 됩니다. 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소알로 가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죠.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롯은 자신의 뜻대로 소알 땅으로 가지만, 결국 못 버티고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산으로 쫓겨 갑니다.

 

롯이 살던 고대사회는 현재의 문명과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되어 있지만, 옛날 고대사회에서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이사가 자유롭지만, 옛날에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다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고 도전이었습니다. 이미 거기에 형성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소돔 땅에서 거주하던 롯도 겪은 바입니다. 문제가 발생하자, 소돔 사람들은 롯을 거류민으로 비하하면서 그를 헤치려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재물이 많은 상태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소돔 땅에서조차 그럴 진데,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로 피난한 소알 땅에서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죠.

 

공동체를 형성해 간다는 것과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간에 무던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롯처럼 이렇게 산으로 쫓겨 갑니다.

 

산으로 쫓겨간 롯의 가족에게 참으로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요즘 말로 19금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바로 근친상간입니다.

 

근친상간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산으로 도망한 이들은 동굴 속에서 은둔하며 살게 됩니다. 소돔 땅에서 많은 재물을 내세워 떵떵거리며 살던 때와는 완전히 반대의 삶입니다. 거지를 넘어서 거의 짐승처럼 살게 됩니다. 그런데 롯의 두 딸은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을 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 가자”(31, 32).

 

물론 롯의 두 딸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닥친 급작스런 일련의 일들 때문에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엄마는 소금기둥이 되어서 죽었죠. 아버지는 소돔을 멸망시킨 재앙 때문에 벌벌 떨고 있죠. 약혼자들은 소돔과 함께 멸망했죠. 자신들이 누리던 풍요는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죠. 어디 하나 마음 둘 곳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자신들의 배필을 구할 수 없다고 단정지었던 것 같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정신 차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평소에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막상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대처하기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례로, 미국에는 곳곳에서 동물들이 자주 튀어나오는데, 여러분이 운전하다 사슴이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사슴이 튀어나오면 무조건 받는다라는 마음을 정해 놓지 않으면, 우물쭈물하다가 사고 날 가능성이 큽니다.

 

큰 일을 겪을 때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면 엉뚱한 결정과 함께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바로 롯의 가족처럼 말이죠. 위기의 상황에서 잘못된 생각을 한 롯의 두 딸은 정말로 온 세상의 도리를 따르지 않고, 이방인들조차도 저지르지 않는 근친상간을 저지릅니다.

 

돌아가는 일을 보십시오. 두 눈 뜨고 보기에 참 민망합니다. 아버지와 동침하기 위해서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입니다. 권력, , , 여색(남색) 등 사람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은 온통 죄 밖에 낳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언제나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모습을 하고 있어 사람을 홀립니다. 창세기에도 그런 기사가 있지만, 영어로 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영웅 서시인 <베어울프>도 그런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서사시는 몇 년 전 안젤리나 졸리를 주인공으로 해서 영화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어글리한 괴물 그렌델의 어미 역으로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했었는데, 겉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괴물 그렌델 보다 더 흉측한 모습을 감추고 있던 것이 그렌델의 어미였죠. 그렌델의 어미를 죽이러 갔던 영웅들은 그렌델의 어미의 아름다운 자태에 반해 결국 그렌델의 어미에게 오히려 농락을 당하고 맙니다. 그런 유혹을 이겨내고 결국 그렌델의 어미를 죽이는 영웅이 베어울프인데, 그 과정이 정말 힘겹습니다.

 

롯의 두 딸은 이틀 상간으로 차례대로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들어가서 그와 동침을 한 뒤 아이를 생산합니다. 첫째 딸이 생산한 아들의 이름은 모압. 둘째 달이 생산한 아들의 이름은 벤암미. 이들은 이스라엘 주변에서 그들을 평생 괴롭혔던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죽을 까봐 두려워 안전한 곳을 찾아 도시문명을 떠나 산으로 들어갔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오던 시대의 문화는 떠나지 못했습니다. 소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이유는 그들의 타락한 문화 때문이었습니다. 두 천 사가 소돔 땅에 살던 롯의 집을 방문했을 때 소돔 사람들이 두 천사와 상관하기 위해서 어떻게 거칠게 나왔었는지,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아 알고 있습니다. 문명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문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척도는 눈에 보이는 문명에 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에 있습니다. 문명은 눈에 담지만, 문화는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롯의 가족은 눈에 담았던 문명을 떠날 수는 있었지만, 그래서 산으로 갔지만, 이들은 마음에 담았던 문화는 버릴 수 없었던 것이죠. , 모름지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마음의 문화입니다. 이 마음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했어도 문화가 타락하면 그 문명은 멸망하게 됩니다. 바벨론, 로마 등 역사상 세계를 호령했던 나라들이 모두 그런 절차를 밟았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아무리 겉으로 보이는 삶이 풍요롭고 남들의 부러움을 살지라도, 즉 개인의 문명이 휘황찬란해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가 타락해 있으면, 개인이 파산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죠. 우리는 그러한 기사를 종종 접합니다. 특별히 로또에 당첨되어서 일확천금을 쥔 사람들의 비참한 최후를 종종 접합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식상한 것 같지만, 진리를 전하고 있는 잠언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이 마음 속에 이미 들어간 것을 지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마음 속에 타락한 마음이 들어가 있는데, 그것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이 마음이 품은 것이 무엇입니까? 탐욕입니까? 두려움입니까? 그렌델의 어미처럼 흉측한 것입니까? 물론 자기를 마음에 품어 달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품으라고 핏대를 높여 말하는 것은 오히려 볼품도 없고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에 거리껴 하고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등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그것과 정대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하고,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합니다. 정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을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래서 여전히 전쟁터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바탕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전쟁에서 어떤 문화가 승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분명 그 운명을 달리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사탄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 전쟁이 없기에 오히려 마음이 평안한 상태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탄의 마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전쟁 상태에 놓여 있어 평안치 못한 상태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 하나님의 샬롬(평화, 안식)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현재 어디에 해당되시는지요?

 

한바탕 마음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 무섭고 귀찮아서, ‘살던 대로 살다 죽을래’, 그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살아 있으나 죽은 인생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된다면, 그 인생은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는, 생명이 철철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를 바르게 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마음의 평안을 누리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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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3. 22. 13:51

어린 왕자의 고백

 

애초부터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은 없다

옆 집 사는 철수는 켄타우로스 별에서 왔다

그래서 걔가 좀 반신반인처럼 별난 데가 있는 거다

초등학교 때 짝꿍 영희는 어떻고?

걔는 전갈자리 별에서 왔다

그래서 걔는 독을 품고 있는 거다 건들면 죽는다

고등학교 때 학생주임, 일명 미친개는

사냥개자리 별에서 왔다

그래서 학생주임은 그렇게 물어댔던 거다

그래서 자기가 온 별이 보이는 북위 42도에만 가면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댔던 거다

어제 안 사실인데

우리 집사람은 토끼자리 별에서 왔단다

어쩐지 가끔 귀여운 구석이 있더라 했더니

우리 집사람은 토끼풀이 그렇게 좋단다

토끼풀꽃반지 끼면 공간이동 할 태세다

 

애초부터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은 없다

모두 엄마 자궁을 게이트 삼아

우주 공간에서 텔레포트해서 지구에 온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별난 거다

별의 별 사람 다 있는 거다

밤 하늘의 별만큼

별난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지구별을 만들다가도

샛별 같은 미련이 동터 올 때쯤

사경을 헤매는 아지랑이처럼 차르르 사라지는 것은

자기 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 거다

 

나는 어느 별에서 왔는지 궁금하다고?

그건 비밀이다

물론 당신이 어느 별에서 왔는지 나에게 말해준다면

나도 내가 어느 별에서 왔는지 말해 줄 거다

그런데 그걸 꼭 말해야 아나?

별스런 내가 안 보이나?

그런 걸 물어보려는 당신도 참

까만 밤 한 구석에 팔랑팔랑 박힌 별처럼

총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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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0. 04:03

소알 밴댕이 소갈딱지의 최후

창세기 18

(창세기 19:15-26)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긴박성은 성경의 큰 주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급하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감추어져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긴박성을 동반합니다.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할 때도 그랬고, 예수님이 이어서 천국을 선포할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온통 긴박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발맞추어 긴박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동틀 때라는 시간 자체도 긴박성을 말해 줍니다. 사건은 두 다리 뻗고 잠든 한 밤 중에 일어나거나, 늘어지게 낮잠 자고 싶은 오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건은 늘 긴박성을 동반하고 일어납니다. 동틀 때, 천사들은 롯을 재촉합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그런데 문제는 재촉하는 천사들이 아니라, 거기에 반응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입니다.

 

우선, 생명이 죽고 사는, 이렇게 긴박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결국 롯의 사위들은 롯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긴박성이 잘 전달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소통의 실패입니다. 소통의 실패는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천사들은 재촉하는데, 롯은 지체합니다. 천사들의 긴박성이 롯에게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롯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갑니다.

 

하나님은 롯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천사들은 지체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을 강제로 이끌어 냅니다. 천사들은 그들을 일단 성밖으로 이끌어 낸 후,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지만, 그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려면 우리 인간 쪽에서의 책임적인 응답도 필요한 겁니다.

 

롯을 보면 그에게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황이 긴급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롯은 계속하여 자기 자신의 형편만 생각합니다.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을 받아 들고 거기에 온전히 순종하기 보다, 자신의 요구를 말합니다. 이것은 당대 의인이라고 칭송을 받았던 노아의 순종과 비교해 볼 때 너무도 차이가 나는 반응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는데, 롯은 방주를 지으라는 것도 아니고 산으로 도망치라는, 비교적 쉬운 명령인데도 불구하고 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롯에게 드리운 비극의 그림자들입니다.

 

롯이 천사들에게 부탁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그 성읍의 이름은 소알입니다. 소알의 뜻은 작다는 뜻입니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말이 그것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자가 작을 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사실 문자적으로 아무런 관련은 없습니다. 영어로 소알은 ‘zoar’로 표시합니다.

 

작은 도시 소알로 도피하고자 한 롯, ‘소알이라는 도시가 그의 마음을 나타내주는 그림언어(메타포)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드넓으신 은혜를 담아내기엔 얼마나 작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게 순종하지도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하여 롯을 구원해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천사들은 롯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롯이 소알에 도착할 때까지 소돔과 고모라에게 내릴 유황과 불을 잠시 유보합니다. 그리고 롯이 소알에 도착한 것을 확인 한 뒤 비로소 유황과 불을 내려 소돔과 고모라를 다 엎어 멸하십니다.

 

그런데 소알로 도피하던 중, 롯의 가족에게 비극이 발생합니다. 사실 이것은 예견된 일입니다. 본문에 나온 말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더라”(26). 천사들이 이르기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롯과 그의 가족은 처음부터 천사들이 내리는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스스로 탈락하게 된 겁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롯이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곳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29). 롯이 구원받은 것은 롯 자신 때문에 아니라,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고 감사드릴 일이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구원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순종하는 가운데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주체적으로 응답하지 못하면 롯처럼 아무리 긴급한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지체하게됩니다. 그것 자체가 스스로의 인생에 비극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롯과 그의 가족은 천사들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이끌려 나오면서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겁니다. 욕심은 인간의 마음을 작게 만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혼동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올바른 선택하는 것을 가로 막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로 보전되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욕심으로 작아진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만으로 만족을 못합니다. 아니 그보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큰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그 작은 마음이 담아내지 못합니다. 담아내지 못하니까 결국 그 작은 마음이 담아낼 수 있는 분량의 탐욕스러운 작은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겠죠.

 

구원의 장소로 롯이 택한 곳이 소알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화적입니다. ‘작은 것이라는 뜻을 가진 소알로 목숨을 부지하러 달려가다 결국 작은 것에 대한 집착을 못 버리고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 그녀만이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지만, 그것은 롯과 그의 가족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렇게, 소알 밴댕이 소갈딱지의 최후는 비극적이고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밴댕이라는 물고기는 하도 성질이 급해서 사람에게 잡히자 마자 죽어버린답니다. 그만큼 속이 좁아서 스트레스를 받자마자 죽는 것이죠. 소갈딱지는 마음속의 속된 말인데, 밴댕이가 작은 물고기라 그 내장이 작은 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 속이 하늘처럼 드넓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내지 못하면, 우리가 롯의 가족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그 최후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썩어져 갈지라도, 그 마음은 하늘을 담아낼 정도로 드넓도록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긴박성을 갖고 있습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긴박하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감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음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때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소알에서 있었던 롯의 가족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좀 길지만 중요한 말씀이니 그 말씀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17:28-33).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긴박하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작은 것에 집착하느라 작아져서 드넓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담아내지 못하는 소알과 같은 밴댕이 소갈딱지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의 최후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최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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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3. 16. 02:56

영원

 

시를 읽지 않고 보낸 날들

그 날들을 생각하면

내 삶이 왜 시적이지 못한 지를 알겠다

무한으로 치닫는 삶

결국 죽음과 충돌하게 될 운명 앞에서

영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건

내가 영원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봄에 기어코 피어나는 잡초들도 아는 것을

나는 왜 모를까

그래서 나는 잡초보다 잘 난 것이 없다

 

따스한 봄날

햇살을 향해 가슴을 열어놓으니

엽록소가 알알이 들어와 박힌다

그리고 나는 시를 읽는다

이제 곧 광합성작용이 일어날 것 같다

그러면 마음이 푸르러질까?

 

잡초만큼만이라도 푸르러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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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10. 05:02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향하여

( 2:15-17; 3:1-7)

 

지난 수요일, 참회의 수요일 (Ash Wednesday)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에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은 40일을 의미합니다. 참회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주일은 빼고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여기서 중간중간 끼어 있는 주일40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기도 할 때, 주일은 금식기도를 안 하는 것도 좋습니다. 금식기도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거나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은 어떻게 정해지는지 아십니까? 춘분이 지나 오는 보름달 후 첫 번째 주일이 부활절 입니다. 춘분은 대개 3 21일쯤 됩니다. 그 후 보름달이 얼마나 빨리 뜨느냐에 따라서 부활절이 빨리 오느냐 좀 늦게 오느냐 결정되는 것이죠. 올해 같은 경우는 춘분인 3 21일을 지나, 보름달이 뜨는 날이 4 14일이기 때문에, 보름달이 뜬 그 날 이후 첫 번째로 맞는 주일이 4 20일이기 때문에 부활절이 4 20일로 정해진 것이죠. 이 법칙만 알면 매년 부활절이 언제인지 스스로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참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 40년이고,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셔서 금식하시며 하나님을 만난 기간이 40일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마귀의 유혹이 왔습니다. 교회가 40일을 정해 사순절로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40일 간의 영적 훈련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유혹이 들어있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고,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부분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창세기의 말씀만 읽었고, 복음서의 말씀은 대부분의 분들이 너무 잘 아시는 이야기라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창세기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이 엮여 선포될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 주신 후 어떻게 우리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죄는 미스터리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떻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왜 죄가 당신의 창조세계에 들어오게 놓아두셨는지, 등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창세기가 이런 것들에게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약간의 이해를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창세기는 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들어온 것은 미스터리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미스터리는 신비인데, 이는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체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고, 파악되어 가는 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비는 종말론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종말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도 드러날 것이고, 죄의 신비도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현재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거나 등한히 할 것이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그것에 대한 실체를 알아가도록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이야기와 복음서의 이야기는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론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정황은 이렇습니다. 우선 창세기에서 보면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를 꼬드겨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합니다. 뭔가 솔깃한 것을 인간에게 던져주어서 그것을 덥석 물게끔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가 제시하는 솔깃한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대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일이었습니다.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하며 꼬드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유혹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바로 이 마음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피조물로 살기보다 인간은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삽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뭔가를 좀 아는 것처럼 살게 된다는 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입니다. ‘안다는 것은 히브리어의 야다라는 말인데, 부부관계에서 서로를 알듯이 훤히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우리의 인생이 불안하고 답답한 이유는 우리는 한치 앞도 우리의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당이나 점집이 잘 되는 겁니다.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구와 앞날을 알려주는 무속의 기능이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 그들은 정말로 무엇인가를 알게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3:7a). 그런데 하나님처럼 되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낭만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첫 번째가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된 것인 것을 보면 말입니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이런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시장에 가서 거위 한 마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다음날 거위가 낳은 알을 가져다가 요리 해 먹으려고 거위 집에 갔는데, 가서 보니 거위가 낳은 알이 그냥 알이 아니라 황금알이었습니다. 너무도 신난 농부는 아내를 불러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거위는 하루에 한 개씩 매일 아침 황금알을 낳았습니다. 그 덕분에 농부 부부는 점차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 부부는 서로 말하기를, 하루에 한 개씩만 황금알을 낳으니까 감질 난다는 겁니다. 한꺼번에 많은 황금을 손에 넣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생각하기를 거위의 배를 가르면 거기에는 수 많은 황금이 들어 있을 거고, 그것을 차지하면 감질나게 하루에 한 개씩 황금알을 가질 필요 없이 한 번에 엄청난 부자가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농부 부부는 칼을 가져다가 거위의 배를 가릅니다. 물론 거위는 죽었죠. 그러나 거위의 배를 들여다 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거위도 잃고, 황금도 못 찾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만 마음을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 은혜가 족합니다. 한 눈 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한 눈 팔게 하는 유혹들이 엄청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이 타락의 순간이고 죄악에 빠지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스스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교만이 싹트는 순간인 것이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 이야기 나오는 사탄의 유혹도 매우 매력적입니다. 1.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2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천사들이 네가 땅에 닿기도 전에 너를 받들어 줄 것이다. 3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는 교만한 마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우쭐해지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의존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서 산다는 뜻이지, 하나님처럼 스스로 복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유혹 받습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된 양 행동하고 싶어 합니다. 뭔가를 아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되는 법, 그리고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광야에서 시험 당하시는 것과 똑 같은 시험이 왔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하는 비아냥거림이 들려왔습니다. 우리 상식에서도 십자가에서 핵폭발과 같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사건, 그리고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가던 예수를 바라보면서 조롱하던 사람들이 알아듣고 볼 수 있도록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났으면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더 잘 믿었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신적인 힘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 인간의 무력한 죽음만이 십자가에 걸려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만족하는 법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굉장한 겁니다. 지식과 생명의 일치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을 통해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그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부끄러움(shame)’만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생명이 자꾸 일치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곤욕이고 아픔입니다.

 

일례로 노벨상의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통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자기가 발명한 다이나마이트가 새 문명을 건설해가는 어려운 공사에 이바지되는 것은 기뻤으나 전쟁에 이용되어 많은 사람을 죽이는 힘이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지식이 생명과 일치하지 못하고, 결국 생명을 헤치는 일에 쓰이는 것을 보고 절망한 것이죠.

 

우리는 내가 뭔가를 좀 아는 것을 가지고 삶을 꾸려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풍성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지 못할 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참된 지식, 지혜는 우리는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데, 우리가 가진 지식은 생명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 같아 당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바로 이것을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순종. 순종이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어쩐지 생명으로 나를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를 참된 생명 가운데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 그것이 순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순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십자가를 피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알량한 지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맡겼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그랬더니 거기에서 생명이 꽃처럼 피어났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태초의 인류 때부터 그런 일이 인류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지식과 생명의 일치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일이 참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향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터득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4:1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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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 23:10

텐트(장막) 치고 사순절 맞기

마태복음 17:1-9

 

예수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신인가? 예수라는 이름은 지난 2천 년 동안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거리를 주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하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갈릴리지역에서 주로 활동을 했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끊임없이 예수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왔습니다. 기독교회가 내린 최고의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다. Vere Homo, Vere Deus. 이 말은 50%는 인간이고, 50%는 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들 중에는 그런 존재가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 말은 100% 인간, 100% 신이라는 뜻입니다. AD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확정된 교리입니다. 이후로,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모두 이단(정통이 아닌, not 나쁜놈)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각각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통해서 선포해왔습니다. 우리는 별로 생각 없이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보내지만, 사실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교회력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즉 참 사람됨을 증거합니다. 어떻게 증명합니까? 예수는 여느 사람들처럼 여자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에 물론 신성을 증명하는 요소가 가미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긴 태어나는데,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동정녀탄생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인성(사람됨)이 성탄절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제 예수의 신성(하나님됨)이 주현절기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주현절기는 동방박사의 이야기와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세례식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리고 오늘, 주현절기가 끝나면서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또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해서 주현절기는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신성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예수의 신성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늘, 산상변모사건을 전해주고 있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의 하나님 됨을 깊이 묵상합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진술에 의하면, 오늘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수난 예고를 하신 뒤 엿새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이 장면은 분명히 구약의 두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과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처럼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상대로 씌어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늘 이런식으로 구약과의 연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즉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고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예수께서 높은 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전해진 하나님의 의와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예언이 바로 예수에게서 성취될 거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 갔던 세 제자는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희한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는 장면입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리고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제자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모두 두려워 떨었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에스겔도 그랬고, 다니엘도 그랬고,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베드로는 횡설수설하면서 예수님께 제언을 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우리도 중요한 장면,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은 비디오나 사진으로 담아두려고 합니다. 옛날에는 그러한 장치들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풍습에는 그것을 저장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절기(일종의 기억장치)입니다. 일례로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을 우리가 비디오나 사진에 담아두는 것처럼 담아둡니다.

 

이스라엘에는 장막절(초막절, 수장절)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들은 이 절기를 통해서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생활 한 것을 기념했습니다. 광야에서 텐트를 치며 생활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죠. 광야생활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위대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기간이었죠.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께 초막을 셋 지어서 여기에 있자고 하는 것은 바로 장막절에 지었던 그 텐트를 의미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초실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입니다. 이 유대인의 절기 중, 장막절(초막절)이 가장 큰 절기였는데, 이것을 통해서 베드로는 변모사건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주님, 기념 사진 하나 찍어 놓죠!” 정도가 될 겁니다.

 

이런 가운데 놀라운 일이 연속하여 벌어집니다. 갑자기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구름은 신적표상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는 구름이 몰려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구름 속에서,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라고 하십니다. 모세도 사라졌습니다.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그들 눈 앞에 여전히 서 계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고,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신 것은 부활을 연상시킵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 부활 사건이 바로 구원 사건입니다. 그것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변모사건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빛에서 보지 않으면, 변모 사건도 그 빛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있은 뒤, 베드로가 어떻게 이 변모사건을 증거하고 다녔는지, 그리고 이 변모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는 베드로후서 1 16절 이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은 분명히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음성이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 드리며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들려야 합니다. 이 음성을 들은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들려진 이 음성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과 똑같이 들은 분은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예수를 메시야로, 예수를 구원자로, 예수를 주님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될 겁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사실,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합니다. 성찬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찬식 때 단순히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내 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요, 내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고백입니다. 내 살과 내 피가, 내 살이 아니고 내 피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살이고 그리스도의 피인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부활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변모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내 몸과 내 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로 삽니다. 그게 나에게 의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이제 이번 주 수요일에 있는 참회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기가 시작됩니다.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시간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간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 앞에 다가온 사순절 동안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요즘 텐트 치며 야영하는 레저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텐트는 장막인데,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장 가까이 체험한 것을 기념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의식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풍요로운 요즘, 우리는 광야와 같은 삶의 조건을 일부러 조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한다는 조건을 다 갖추어 놓고 살면,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만족을 조장합니다. 참된 만족이 없으면서도 우리는 만족을 조장합니다. 특별히 세상에서 말하는 풍요로움을 통해서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마치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이렇게 만족을 조장합니다. “내가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영혼아 여러 해 쓸 문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2:18-19).

 

우리는 재물의 풍족함에 취해, 영혼의 빈곤함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며 삽니다. 이와 같았던 어리석은 부자에게 다음과 같은 선언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12:20-21).

 

재물에 집착할수록 영혼이 빈곤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람의 속성 중 하나가 바로 만족이 없을 때 어딘가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하나님께 노출(올려드림)시켜 드리십시오. 밥도 좀 굶어보고, 잠도 좀 안 자보고, 가난한 자에게 가진 것을 일부러 나누어 주고 좀 빈털터리로 살아 보기도 하고, 자발적인가난에 한 번 처해 보십시오. 만족이 없으면서 애써 만족하는 것처럼 재물로서 만족을 조장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만족이 없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노출(올려드림)시켜 보자는 겁니다. 즉 우리의 삶을 광야와 같은 삶으로 한 번 만들어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지, 즉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족시키시는지 한 번 체험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순절기를 맞는 것은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의 심정으로,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께 인도하심을 받을 때의 심정으로,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몸소 체험하겠다는 영적인 갈급함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사순절기 동안 여러분이 각자 치시게 될 텐트는 다르겠지만, 여러분이 만나게 될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사순절기가 눈 앞에 왔습니다. 텐트 치고 사순절기를 맞읍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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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27. 06:22

소통 문제

창세기 17

(창세기 19:1-14)

 

2004년에 만들어진 <Crash>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인종과 계층 간의 차별, 즉 소통의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서로에 대한 편견 때문에 겪는 아픔 그리고 화해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 중에서 명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이란인 가게에 문이 고장 나서 그것을 고쳐주러 간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은 자물쇠는 고쳤지만 문 자체가 문제이니 문을 꼭 고치라고 일러줍니다. 하지만 이란인 가장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돈을 돌려 달라고 고함칩니다.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은 돈을 돌려 주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란인 가족의 가게는 강도를 맞고, 문을 고치지 않은 것 때문에 보험금 처리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가게가 털려 화가 난 이란인 가장은 화풀이를 하기 위해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그에게 총을 겨누며 강도 맞은 피해 보상을 하라며 윽박지릅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의 어린 딸이 아빠를 향해서 뛰어듭니다. 동시에 이란인 가장은 방아쇠를 당깁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디오) www.youtube.com/watch?v=Tjct4zCo_Qg

 

다행히도 이란인 가장의 총에 들어있던 총알은 공포탄이었고, 열쇠수리공의 딸은 무사했습니다. 가게로 돌아간 이란인 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소녀는 나의 천사야.”

 

이것 외에도 제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백인 경찰에게 부당하게 검문을 당하며 치욕을 겪은 방송국 PD 흑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흑인 부인이 교통 사고를 당해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동차가 폭발하기 직전 본인을 구하러 온 경찰관이 바로 자신들을 욕보인 그 백인 경찰관이었습니다. 그 경찰관의 얼굴을 알아본 흑인 부인은 “no, not you”하면서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경찰관에게 구조받기를 거부합니다. 백인 경찰관은 사력을 다해 흑인 부인을 설득해서 자동차가 폭파되기 일보 직전에 그녀를 구출합니다.

 

모두 소통의 문제 때문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아무리 사실을 말하고 도와주려고 해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오늘 말씀에는 크게 네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천사들, , 소돔사람들, 그리고 롯의 사위들입니다. 이들 간에 일어난 소통의 문제를 하나씩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천사들과 롯 사이에는 소통이 잘 되는 듯 합니다.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있었다는 것은 소돔 사회에서의 롯의 사회적 위치를 말해줍니다. 성문은 장로들과 공직자들이 앉아서 법적인 문제를 논하거나 판결하는 장소였습니다. 롯이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소돔의 지도자 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은 소돔으로 들어온 천사들을 영접합니다. 롯이 그들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들을 알아본 것과 똑같이 롯도 그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극진히 영접했습니다. 뭔가 좀 특별한 기운이 그들에게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롯이 두 천사를 영접한 소식이 소돔사회에 금방 번져나갔나 봅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무섭게 소돔지역 사방에서 노소를 불문하고 롯의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롯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합니다.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5). 여기서 상관하다라는 말은 그들과 성관계를 갖겠다는 뜻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소통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소돔사람들과 천사들 간의 소통의 문제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니까, 결국 소돔사람들과 하나님 간의 소통의 문제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 땅에 천사들을 보내신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을 멸하시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소돔사람들이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면 소돔 땅에 도착한 천사들을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이들이 롯에게 천사들을 내놓으라고, 그들과 관계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소통을 거부한 처사입니다.

 

둘째는 소돔사람들과 롯 간의 소통의 문제입니다. 롯은 두 천사를 내놓으라는 소돔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롯은 두 천사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그들을 윤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합니다.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7-8). 롯은 소돔사람들과 소통을 해보려고 그들을 형제들아라고까지 부르며 적극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러나, 롯의 그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소돔사람들이 롯을 다음과 같이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너는 물러나라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9a).

 

문제가 발생하니, 평소에는 모르던 것이 드러납니다. 롯은 소돔사람들을 형제라고 불렀는데 반해, 소돔사람들은 롯을 거류민으로 불렀습니다. 롯의 노력과는 달리, 소돔사람들은 롯을 자신들의 공동체 안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죠. 서로 간에 소통이 안 된 겁니다. 지금 소돔사람들은 롯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어느 설문 조사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뭔데 그러세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선생님들은 허무해집니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에게 자신은 아무런 존재가 아닌 것이라는 자괴감 때문입니다. 롯은 평소 소돔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을 형제로 생각했는데, 지금 소돔사람들은 롯을 이방인 취급하는 겁니다.

 

이렇게 소통이 부재하니, 폭력사태가 발생합니다. 소통이 부재하고, 관계가 상대화 되면 거기에는 어김 없이 폭력이 발생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폭력을 행사하려면 일단 소통의 부재를 내세워야 하고, 상대방을 상대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명한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소통이 잘 되는 상태를 나와 너의 관계로, 소통이 잘 안 되는 상태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소통이 잘 되는 나와 너의 관계에서는 절대로 상대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소통이 잘 되지 않는 나와 그것의 관계로 서로의 관계가 상대화되면 거기에는 각종 폭력이 난무하게 됩니다.

 

롯과의 관계를 상대화시킨 소돔사람들은 자신들의 욕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끝내 폭력을 휘두릅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9b). 이런 상황에서 만약 두 천사의 개입이 없었다면 롯은 큰 화를 당했을 겁니다.

 

상황이 다급해진 두 천사는 자신들이 이곳 소돔 땅에 온 이유를 롯에게 알립니다.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13). 그리고 천사들은 롯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립니다.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12).

 

이 말을 들은 롯은 다급한 마음에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빨리 일어나 소돔땅을 떠나라고 일러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번 소통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위들이 장인의 말에 순종하여 다급하게 그 자리를 떠났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그와 반대의 행동을 전합니다.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14b).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이것은 롯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 때문입니다. 롯은 소돔사람들에게서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합니다. 천사들과 상관하리라고 성내며 달려드는 소돔사람들에게 천사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두 딸을 내놓으려고 합니다. 롯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온 천사들을 보호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결혼을 앞 두고 있는 두 딸에게 험한 꼴을 당하게 하는 처사는 이해하기 힘든 겁니다.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 딸을 내놓으려고 하는 롯의 모습을 예비 사위들이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장인 롯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위들이 장인 롯의 말을 믿지 않고, 농담으로 여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Crash>나 오늘 말씀이나, 소통의 문제 때문에 벌어진 참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픕니다.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서로를 상대화시키고, 서로에 대한 편견 때문에 차별이 발생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발생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의 그림자만 드리워집니다.

 

아무리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생명의 말씀은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소돔땅을 구원하러 간 것이지 멸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결국 소돔땅이 멸하게 된 이유는 소돔사람들이 천사들, 즉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장인 롯이 사위들에게 찾아가 구원 받을 방도에 대해서 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발생한 소통의 부재는 결국 사위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비극을 발생시킵니다. 이렇듯, 소통의 부재가 발생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소통이란 결국 상대방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기능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만약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저를 신뢰하지 못하고 저를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가 전하는 말씀이 약장수의 허튼소리로만 들릴 뿐,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이 저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저를 신뢰하고 저를 마음으로 사랑하신다면, 제가 전하는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실 겁니다.

 

소통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소통이 잘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생명을 보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소통이 잘 될 수 있도록 평소에 주님을 가까이 해야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소통은 인격적인 사귐이 있을 때에만 잘 되는 법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사귐을 갖고 계십니까? 2천년 전,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셨을 때, 그리스도와의 소통에 성공한 자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와의 소통에 실패한 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통에 실패하여 멸망 받은 소돔사람들과 같이 되지 말고, 소통에 성공하여 구원 받은 롯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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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23. 23:56

거룩이란 무엇인가?

(레위기 19:1-2, 9-18)

 

자고 일어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각종 사건들이 전해져 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한인 입양아를 살해한 혐의로 현직 국가정보요원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양아버지에 의해 살해된 한인 입양아의 나이는 세 살이었고, 부검해 본 결과 뇌의 진액이 신체 곳곳에 스며들 정도로 심한 구타를 당해 죽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끔찍한 일을 보면, 절대로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한국에서는 13, 15살 먹은 어린 조카를 임신시키고 출산까지 하게 한 삼촌의 범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욕 때문에 소녀들의 소중한 삶을 무참히 짓밟은 이런 인면수심의 인간을 보면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어떤 중년 여인이 이혼소송을 냈는데, 그 이유가 남편의 종교 강요 때문이랍니다. 남편은 가족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교회에 헌금을 바쳤답니다. 그 액수가 처음에는 수 천, 그리고 나중에는 수 억 원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게다가 남편은 교회를 잘 안 나가려고 하는 부인과 자녀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가족들 간에 불화가 생기고 급기야 이혼소송까지 갔는데 법원은 남편의 잘못된 종교 강요로 인해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판단과 함께 부인의 손을 들어 줬습니다. 종교 문제로 이렇게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보면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성경에도 보면 거룩하지 못한 일들이 즐비합니다. 대표적으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인 유다의 부정과 다윗 왕의 간음이 있습니다. 유다는 두 아들 엘과 오난이 죽자 셋째 아들 셀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계대결혼법을 어기며 며느리 다말을 시집으로 돌려 보냅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을 합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동침 사건을 보면서 거룩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이 이야기를 당당하게 싣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동침을 통해서 난 베레스와 쎄라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또한 다윗 왕의 간음 사건은 매우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자신의 음욕을 채우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장수의 부인인 밧세바를 왕궁으로 범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장수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 전사하게 만듭니다. 물론 나단 선지자의 폭로를 통해 다윗 왕이 회개하긴 했지만, 이스라엘 최고의 성군이라고 하는 다윗이 이러한 일을 벌였다는 것 자체가 거룩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2). 하나님 당신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선 거룩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인 거룩을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느냐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레위기서의 이 말씀을 살펴 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오늘 말씀과 관련된 것을 토대로 가르침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이웃사랑법이 레위기서에서 비롯됩니다. 레위기 18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것을 보면, 거룩이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라라는 말씀 뒤에 이어지는 레위기의 규례들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한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이웃과의 관계법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넓게 말해서, 레위기 19장에 등장하는 규례들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배려하고(respect) 공경해야(honor)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웃)과 어떻게 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웃이란 이런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the poor), 거류민(the stranger), 이웃(fellow), 품꾼(laborer), 귀먹은 자(deaf), 맹인(blind), 부자(the rich), 친족(kinsman), 동포(countryman).

 

가난한 자와 거류민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9-10). 거룩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거류민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들의 최저 생계를 보장해 주는 것. ‘이것도 내 꺼, 저것도 내 꺼, 다 내 꺼야라면서 혼자서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거룩이라는 겁니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여기서 이웃이란 지리적 위치에서 내 옆집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삶 가운데서 만나서 삶을 나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13a). 거룩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내가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 만나는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면 그것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세워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에 생명력이 넘치게 할 수 있을까, 하면서 그들을 오히려 섬기는 것이 거룩입니다.

 

품꾼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13b). 품꾼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참 대견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죠. 남에게 빌어먹는 게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해서든 삶을 꾸려가려고 몸부림 치는 사람들입니다. 품꾼은 그날 벌은 돈으로 그날 먹거리를 사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굶주리게 됩니다. 그래서 품꾼의 삯은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주어야 합니다. 주지 않고 그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붙들고 있으면, 품꾼은 꼼짝없이 굶어야만 합니다. 거룩이란 이런 것입니다. 일 한 것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 자신의 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의 배까지도 생각하는 것.

 

귀먹은 자와 맹인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14). 저 사람이 안 들린다고 저주하면 안됩니다. 저 사람이 안 보인다고 그 앞에 장애물을 놓으면 안 됩니다. 안 들리기 때문에 더 조심해서 말해야 하고, 안 보이기 때문에 그의 앞에 장애물이 있다면 치워주어야 합니다. 거룩이란 이런 것입니다. 저 사람은 안 들릴지 몰라도 하나님은 듣고 계시며, 저 사람은 안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이 뒤에 붙는 겁니다. 더 나아가, 지금 내 눈 앞에 그 사람이 없다고, 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 그 사람의 인격에 흠집을 내는 것 또한 거룩하지 못한 겁니다. 지금 내 앞에 없어서 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고 흠집을 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런 일을 하면서 낄낄거리며 웃을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 듣고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와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15). 재판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나면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데, 특별히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공의라는 개념을 들어 거룩을 표현합니다. 재판을 할 때, 올바르게 재판하기 위해서 동정도 아첨도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동정표를 얻기 십상입니다. 부자는 아첨표를 얻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하면 공의가 제대로 서지 않게 되고, 관계가 어긋나게 되며 결국 이것은 거룩과 멀어지는 상황을 낳게 됩니다.

 

친족과 동포와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17-18). 살다 보면 가족 간에도 미워하고 원망할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마음으로 미워하면 서로 간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마음으로 미워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개념에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랑이 가득해야 하는데, 그곳에 사랑 대신 미움이 자리한다면 그것은 이미 거룩한 모습이 아닙니다. 미움을 마음에까지 남기지 마십시오. 그것이 형제와 이웃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할 뿐만 아니라, 내 삶까지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마음에 미움을 안고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은 주어진 본문 내에서만 거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만, 혼자 있는 고요한 시간에 레위기서를 찬찬히 들여다 보십시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말씀 아래, 거룩이 무엇인지 제시되는 것은 모두 이웃과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지만, 그것을 우리 인간 존재에 가져오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예배 잘 드리고, 교회에서 봉사 잘 한다고 그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사람에게 붙는 수식어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23절 이하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배제한 거룩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과의 관계만 올바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거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시는데,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거룩한 예배란 우리가 얼마나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거룩한 예배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부족한 예배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예배나마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길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이웃관계를 맺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respect & honor).” 이것이 거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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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