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2주기에 즈음하여

ㅡ 에스겔 아내의 죽음과 성서 해석

 

나는 지난 10년간 약 3천 번의 설교를 했다. 자고 일어나면 설교를 해야 하는 ‘설교자의 운명에 갇혀 열심히 설교를 했다. 설교를 하면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것이 수 많은 스토리이듯이 성경을 구성하는 것도 수많은 스토리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스토리는 평범하지 않다. 지금까지 내가 다루었던 본문 중에 가장 충격적인 스토리는 에스겔 아내의 죽음이다(24:15-27). 에스겔 아내의 죽음은 에스겔서에 아주 짧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도 앞 뒤 문장이 있는 가운데서 아주 짧게 나온다.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24:18). 너무 짧게 나와 성경을 정독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정도다.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일을 담담하고 짧게 기록하고 있는 에스겔 선지자를 생각하니, 그 사람의 신앙과 내공 앞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하나님은 에스겔 아내의 죽음사건이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표징이 되게 하시고자 에스겔의 아내를 데려 가신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려니…”(24:16). 여기서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의미한다. 에스겔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의 아내였던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가장 소중한 것을 쳐서 빼앗으신다.

 

아내의 죽음과 함께 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은 아내의 죽음을 놓아두고 슬퍼하거나 울지 말고, 초상을 치르는 이들이 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오직 조용히 탄식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에스겔 아내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표징(Sign)’이다.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묻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일어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는 일이 예루살렘 백성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게 될 거라는 메시지이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성소(예루살렘 성전)’이다. 그리고 자녀를 둔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 아내 죽음의 표징을 통해, 그들이 성소와 자녀들을 잃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들은 모두 남의 일로 여겨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통 어떠한 일이 자기 자신의 일이 될 때만 관심을 갖는다. 이것이 성숙한 자, 또는 영성이 있는 자를 가르는 척도 중 하나이다. 성숙한 자 또는 영성이 있는 자는 어떠한 일이 자기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면서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과 끊임 없이 연대(solidarity)’한다.

 

이 부분은 정말로 조심하게 해석해야 할 본문이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이 부분을 설교하며 막말을 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하며 윽박지를 것이다. “하나님께 범죄한 이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길 수 있느니 조심하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니, 회개하라!” , 이 본문을 가지고 이러한 막말을 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설교자가 아니며,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하고 남용하는 것을 넘어, 성령을 훼방하는 중차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했다고 우리의 소중한 것을 마구 빼앗아 가시는 분이 절대 아니시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자기 자신(자기 아들)을 내어 놓으시는 분이다. 중요한 것은 그 표징을 우리가 잘 분별하여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회개하여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슬픈 일이 너무도 많다. 누군가에게 슬픈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심판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를 깨우치고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 위에 구현해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본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파렴치한 아버지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죽인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악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 그만큼, 악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정도로 무지하고 파렴치한 것이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그들의 부모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말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세상의 악이 세월호 아이들을 학살하였다. 세상의 악은 무구한 아이들을 학살하고도 떳떳하게 낯을 들고 다닐 정도로 무지하고 파렴치하다. 그들의 죽음은 이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표징이다. 그 표징을 보고도 이 세상의 악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뻔뻔한 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 파렴치하고 뻔뻔한 악과 맞서 싸울 용기를 갖지 못한다면, 그런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성소와 자녀들을 빼앗긴 예루살렘처럼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내 눈에 기뻐하는 것,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강과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길 줄 아는 연대(Solidarity)’이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에게 일어난 일,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부모들에게서 일어난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나의 일이다. ‘표징’인 세월호 참사를 보고도 침묵하며 연대를 소홀이 하거나,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 위에 실현하지 못한다면,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죄악 중에 패망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하리라”(24:23).

 

세월호 참사는 에스겔 아내 죽음의 사건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에스겔 아내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 예루살렘 백성들의 일이었듯이, 세월호 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다. 그러므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기 두려운 자, 지금 일어나 광화문으로 나가라.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게 만든 악에 맞서 싸우라. 세상 모두가 공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라. 그것으로 실재하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삶의 스토리를 만들라. 바로 당신의 삶에.


Posted by 장준식

대나무 예찬

 

우리 교회 마당 둘레에는 대나무가 많다. 바람이 세차가 불면 대나무에 부딪히는 바람소리는 폭포수처럼 시원하다.

 

사실 대나무는 사람들이 그렇게 선호하는 마당 식물이 아니다. 대나무를 키워 본 이들은 왜 그런지 알 것이다. 바로 대나무의 무지막지한 번식력 때문이다.

 

대나무는 마치 중세시대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처럼 순식간에 퍼지고, 징기스칸처럼 땅을 무섭게 정복한다. 게다가 대나무는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뿌리를 그물처럼 펼치기 때문에 뿌리째 뽑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무엇보다 대나무는 놀라운 성장 속도를 지니고 있다. 대나무의 성장은 마치 스펀지 같다. 성장이라는 인자를 쭉쭉 빨아들여 하루 아침에 놀랍도록 자기 자신의 키를 늘려 놓는다.

 

우리는 흔히 대나무를 통해 군자의 기개를 말한다. 군자는 대나무처럼 곧아야 한다고 말이다. 대나무를 보면 왜 선조들이 대나무에 비유해서 군자의 곧은 기개를 빗대어 말하는지 알 것 같다.

 

곧다는 것은 단순히 다 성장한 대나무처럼 반듯하게 하늘로 쭉 뻗어 올라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곧다는 것은 대나무처럼 뿌리를 깊게 내리고 웬만해서는 절대로 뽑히지 않을 중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늘 성장시킬 줄 아는 것이며, 무엇보다, 세찬 바람을  맞닥뜨리더라도  시원하게  흘려  보낼  줄 아는 삶의 여유를 지니는 것이다.

 

뿌리내림, 성장, 여유,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군자의 덕()임을 대나무가 가르쳐 준다.


Posted by 장준식

칠병이어 이야기와 배고픈 목사

 

이 탐욕의 시대에 목사는 참 배고픈 사람이다. 탐욕이 샘솟을 때, 나는 번민하게 된다. 탐욕을 부추기는 '광고'들은 마치 사탄 같다. 그러나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탐욕에 마음을 빼앗기고 굴복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래서 다행이다. 너무 멀리 떠나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어, 더 이상 나에게 탐욕이 작용하지 않는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무리들을 먹이시는 이야기가 두 개 나온다. 하나는 '오병이어' 이야기, 다른 하나는 '칠병이어' 이야기이다. 나는 이 두 이야기 중 '칠병이어'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서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8:2-3).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이야기에서 무리들은 그저 해가 저물어 배가 고팠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마음만 먹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칠병이어의 이야기에서 무리들은 예수를 따라다니느라 며칠씩 굶었고, 너무 멀리, 광야까지 따라 나왔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칠병이어 이야기에서 예수를 따라 광야까지 나온 무리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도 어쩌다 보니 (물론 부르심에 의해서 그렇게 된 거라는 신앙고백이 있지만) 예수를 광야까지 따라 오게 됐다. 이젠 너무 멀리 떠나와서 되돌아 갈 수도 없다. 이제, 이 나이에, 내가 목사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른 것을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기쁨과 유익을 주겠는가.

 

광야까지 따라 온 무리들에게 오직 희망은 예수 외에는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품은 희망을 꺾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를 통해 그들을 배불리 먹이신다. 일곱 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넉넉히 먹이신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 있어, 이 탐욕의 시대에 탐욕조차도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는 신세에 처해진 나 같은 사람에게 칠병이어의 말씀은 힘이요 능력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니,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기에 이 말씀이 힘이요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아니한가. 돌아갈 수 있는 곳까지만 따라 나선다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힘들고 어려워 애굽의 고기가 생각나서 다시 돌아가겠다고 패악을 저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 인생을 살겠는가. 어차피 길 떠난 인생이라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가서 그 무엇도 나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해져, 가는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그 무엇'에게 던지는 것이 멋진 인생일 터.

 

나는 예수를 따르다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이른 '배고픈 목사'.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4. 7. 00:25

마흔 고개

 

드디어 죽음이 내 등 위에 올라탔다

이제부터는 언덕 아래로 고꾸라지는 거다

그 동안 언덕을 넘지 못할까 봐 얼마나 땀 흘려 왔던가

 

흙먼지가 나랑 같이 뒹군다

이게 시작인 거다

흙먼지랑 친해지지 않으면 안 되니까

 

청춘에게 죽음은 신기루지만

마흔 고개를 넘어선 인생에게는

오아시스다

 

이제 죽음의 샘물을 마시러 가는 거다

눈이 밝아지면

그때 비로소 생명이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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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4. 7. 00:23

존재의 이유

 

너는 거기에 있어.

내가 발견해 줄게.

존재해봐.

존재한다는 건 기적이야.

기적을 포기하는 자는

못다 핀 꽃 한 송이보다 못한 거야.

못다 피더라도

존재했다는 것 때문에

그것은 영원성을 갖게 되는 거야.

그렇기에

하루살이도

태아도

사산아도,

어젯밤 허무하게 죽은

그 아이도,

영원히 살게 되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왜 존재하겠어.

존재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들겠냐고.

너는 너기에 있어.

내가 발견해 줄게.

더 이상 두려워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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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4. 7. 00:16

도마뱀의 탄식

 

이럴줄 알았으면 잠이나 더 잘 걸 그랬어.

겨울잠 자는 동안

추운지 몰랐고

세월 가는지 몰랐고

세상 변하는지 몰랐어.

그야말로 꿈 속에 살아서

한 숨 쉴 일 없어

팔랑팔랑 거렸어.

나를 깨운 건

지나가는 행인의

재채기였어.

어쩐지 나른했고

어쩐지 코가 간질거리더니

잠에서 깨어보니

아지랭이 춤추는

봄이 온거였어.

꽃내음을 따라

동그란 은신처를 빠져나와

첫발을 세상에 내디뎠는데,

글쎄,

이렇게 덫에 걸려버렸네.

나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어.

꿈이었으면 좋겠어.

아직 잠에서 깬 게 아니라면 좋겠어.

하늘은 저렇게 푸르고

햇살은 이리도 따스한데,

내 몸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어.

인생 정말 일장춘몽이네.

나는 지금 덫에 걸린채

비닐봉지에 싸여 쓰레기통에 막 버려졌어.

이럴줄 알았으면 잠이나 더 잘 걸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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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6. 4. 7. 00:11

나는 죽어서 빛이 되고 싶어

 

나는 죽어서 빛이 되고 싶어

별빛도 좋고

달빛도 좋고

햇빛도 좋아

이건 너무 거창한가

그럼

창문에 나부끼는 별 그림자

출렁이는 강물에 새겨지는 달 그림자

버즘나무 밑으로 스며드는 해 그림자

이런 게 되어도 좋아

그림자도 빛이니까

이런 것도 거창하다면

반딧불이 빛이 되면 어때

아이들의 오그린 손바닥만한 빛이지만

한 여름 밤을 다 채우고도 남을 만큼

낭만적이잖아

다만

눈빛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만나본 세상의 모든 눈빛은

슬펐어

빛이 슬프면 안 되잖아

빛은 희망이어야 되잖아

나는 죽어서 빛이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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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6. 4. 7. 00:10

고흐의 그림을 봤다

 

고흐의 그림을 봤다

거기에 사람이 누워 있다

그 사람에게서 물감이 솟아난다

어떤 것은 하늘 색이고

어떤 것은 별 색이고

어떤 것은 나무 색이다

어떤 것은 밝은 색이고

어떤 것은 어둔 색이고

어떤 것은 희미한 색이다

그 사람의 표정이 밝으면

그 사람에게서 솟아나는 물감은

해바라기 꽃이 되고

그 사람의 표정이 어두우면

그 사람에게서 솟아나는 물감은

별이 빛나는 밤이 된다

고흐의 그림에서 사람을 봤다

이제 보니 고흐는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 사람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슬프지만 따스하다

그래서 고흐의 그림은

찬란한 휴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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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4. 11:54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요한복음 20:19-23 / 사도행전 5:27-32


부활한 이후가 더 문제이고, 더 중요하다. – “진짜 그 일이 벌어졌으니 어쩔껴? 또는 (줄여서) 이젠 어쩔껴?”

 

아이를 갖고 싶은 부부가 아이가 잘 안 생겨서 고생했는데, 어느 날은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아이가 생겼다고! 그러면 이제 그 부부는 어떻게 해야하는 건가? 당연히, 아이를 잘 키울 생각을 해야 하고, 이제 부모로서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이들에게 아이가 생겼는데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이를 잘 키울 생각도 안 하고, 부모로서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도 불쌍해지고, 부모도 불쌍해진다.

 

어떤 사람이 좀 몸이 안 좋아서 그 증상에 해당하는 병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암이었다. 너무 놀라서 그는 병원을 찾아 정밀검진을 받았다. 그런데, 다행히 암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하겠는가? ‘괜히 걱정했네.’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려했던 대로 위의 사람이 암에 걸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니야, 나는 암에 걸린 게 아니야. 병원 진단이 잘못 된 거야. 별 문제 없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잖아. 나는 암에 걸린 게 아니야. 그럴 리 없어.’하면서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받아 들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행복의 첫 걸음, 책임 있는 인생, 의미 있는 삶을 향유해 가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자신의 현실(현재)있는 모습 그대로받아 들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번민하는 이유는 자신의 현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신의 현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과 타협하고, 자포자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의사들에 의하면, 대개 암 환자들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 자체를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 암환자에게 의사가 환자분에게는 암이 있습니다라고 전하면, 암환자의 처음 반응은 이런 것이다. ‘내가 왜?’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들도 똑 같은 반응을 한다. 사랑하는 이들(자식이든, 남편이든, 여기서 예외는 부모님이다.) 갑자기 죽었을 때, 또는 예상치 못하게 죽었을 때 사람들은 대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힘들어 한다. ‘? 내 아이가 왜? 내 남편이 왜? 내 아내가 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힘들어 하는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고나 병에 의해서 자기 몸에 장애가 생긴 사람들이라고 한다. ‘내가 왜?’

 

어떠한 일들은 모두 가능성이다. 임신, , 갑작스런 상실(죽음), 장애. 문제는 그러한 가능성이 진짜 나의 현실에서 발생한 후의 삶이다. “진짜 그 일이 벌어졌으니 어쩔껴? 또는 (줄여서) 이젠 어쩔껴?” 우리의 인생은 사건이 발생한 후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불행과 행복의 갈림길에 여기에 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본인이 죽임을 당할 것과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게 될 거라는 것을 몇 번 말씀하신다. 그때만 해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냥 가능성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그 일이 정말로 벌어졌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 당했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것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 부활하셨다! 이것을 믿으시는가?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가? 그게 쉽지 않는 거다. 오늘 말씀에서도, 부활하신 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나타나신다. 제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붙잡혀 십자가 처형 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숨어 있었다. 바로 그곳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이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은 아마도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마디는 이것이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당연하다. 두려워 떨고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강이다.

 

정말로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 부활하셨다. 현실이었다. 제자들이 그것을 있는 모습 그대로잘 받아 들였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매우 잘 알려진 의심 많은 도마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전한다.

 

우리도 얼마든지 의심 많은 도마가 될 수 있다. 그러면서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나도 도마처럼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과 옆 구리에 난 창 자국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면 믿을 수 있을 거야!’ ㅡ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거나,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하거나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 발생하면 우선 믿지 않는다. 위에서 충분히 말씀 드렸다. 현실 거부가 일어난다. 자신의 다리가 잘려 나간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다리가 잘려 나간 것을 믿지 않으려 든다.

 

우리는 의심 많은 도마의 이야기를 보면서 도마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거참,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더니 믿음이 별로 없네.’ 전혀 그렇지 않다. 도마는 훌륭한 사람이다. 도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보고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다. 우리가 과연, 도마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는가?

 

그렇다면, 제자들은 다른 이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부활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바로 그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자.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1, 22).

 

성령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도 통할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있는 모습 그대로볼 수 없다.

 

예수께서 일으켜 지셨다. 스스로 사는 게 아니다. 스스로 죽음에서 벌떡 일어서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 주시는 거다. ,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러니, 믿음 없으면 그 하나님의 일이 눈에 안 들어 온다.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보고도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다.

 

여러분에게 질문한다. ‘성령 받으셨는가?’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우선, 예수의 부활이 믿어지면, 벌어진 일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우리는 성령 받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인생을 살아간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죽었겠는가. 저 사람을 믿지 못하는데 나의 몸을, 나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가. 은행을 못 믿는데, 은행에다가 돈 집어 넣을 수 있나. 투자할 수 있나. 사기 당하기 십상이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 세 가지가 생긴다. 평강, 담대함, 능력. 당연하다. 하나님을 믿는데, 이 마음에 평강이 없을 수 없다. 하나님이 손잡아 주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데, 그런 능력의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데 평강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거다.

 

삶이 불안하신가?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니, 불안해 하지 마시라. 마음에 평강이 오면, 그와 동반되는 것이 담대함이다. 담대함이 어떻게 표출되는지는 사도행전의 본문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 죽을까 봐 두려워서 숨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뒤, 그들은 담대하게나아가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들의 담대함을 보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거의, ‘죽일 테면 죽여봐라!’라는 태도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공회에 잡혀 갔던 베드로와 사도들은 담대하게 그들과 맞서 복음을 전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 능력이 생긴다. 능력이란 창조성을 말한다. 없던 일이 생기거나, 안 되던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능력을 오해하면 안된다. 능력을 가지면,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하늘을 날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돈을 많이 벌게 되거나, 잘린 손이 다시 생겨나거나, 암이 낫거나,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능력을 가지면,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땅에서 열심히 살게 되는 것, 복권에 당첨되지 않아도 되도록 열심히 일하는 것, 돈을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알뜰살뜰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 잘린 손이 다시 생겨나지 않더라도 나에게 손이 하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 암이 낫지 않더라도 그 암으로 인해 죽게 될 것을 인정하고 인생을 의미 있게 마무리 하는 것,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죽은 이의 넋을 기리며 그 사람의 몫까지 열심히 사는 것, 이런 것이 오히려 능력인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능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 부활의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 안에서 부활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예수님께서 그러셨 듯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받고,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변화, 능력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문제, 이웃의 삶의 문제, 이 세상의 악함,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일들, 이런 것들을 놓아두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잠을 이기게 되고, 게으름을 이기게 되고, 분주함을 이기게 되고, 세상의 정욕을 이기게 된다.

 

사도행전에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 시(한 시간, one hour)’도 깨어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얼마나 기도에 힘쓰게 되는지 나온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3:1). 그러다, 이들이 다리 불구자를 고치는 역사까지 벌인다. 기도의 사람이 되는 능력이 임하길 바란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아시겠는가?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예수의 부활을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을 받아 예수의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인 자의 삶은 그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삶이 된다. 평강과 담대함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는다. “진짜 그 일이 벌어졌으니 어쩔껴? 또는 (줄여서) 이젠 어쩔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현실을 직시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는 믿음의 자녀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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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