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6. 10. 10. 16:12

돌아온 레퍼(Leper)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17:11-19)

 

주여, 돌아온 레퍼(Leper)가 되게 하옵소서.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구원에 방해되는 것들을 차별하며 사는

영적 레퍼(Leper)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품어,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는

참 구원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돌아온 레퍼(Leper)들이니이다.

가다가 깨끗함을 입어 영광 돌리며

주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 드리오니,

우리에게 말씀 하옵소서.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여,

우리는 이 말씀에 힘 입어 평안히 가겠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9. 13:41

돌아온 레퍼(Leper)

(눅 17:11-19)


공교롭게도 오늘은 한글날이다. 한글 창제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중국(중화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독립선언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 한국(조선)은 한자를 빌어 그 음을 표시했다. 그것을 차자표기라 한다. 문자를 빌어서 표기한다는 뜻이다.

 

한문차자표기의 가장 큰 문제는 한문은 뜻 글자이기 때문에 어휘(Vocabulary)가 엄청 많아서 일반백성들이 한자를 모두 습득하여 문자를 표기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근본적인 이유에는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칭하였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세종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훈민정음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중세국어

현대국어

나랏말ᄊᆞ미中듀ᇰ에달아

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서ᇰ
니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
몯ᄒᆞᇙ노미하니라
내이ᄅᆞᆯ爲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ᆯ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
便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나라의 말이 중국과 서로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한글의 창제는 변방, 변두리의 한 작은 국가에 불과한 조선이 큰 국가(중화민국)의 종속관계에서 벗어나게 만든 해방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말할 수 업는 질곡 가운데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현재 이렇게 세계에 우뚝 선 국가로 존속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한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한글이라는 언어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종대왕은 하나님께서 한민족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혜 중 하나이다.

 

주변부로 밀려나 존재감 없이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모멸감이란 죽는 것보다 힘든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해서든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고 중심에 서서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실 그것 때문에 인생이 피곤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자기 힘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행복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자기 힘으로 아무리 싸워도 공동체(사회)의 중심부로 들어서는 게 전혀 불가능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레퍼(Leper)이다. 그 당시 나병환자들은 절대로 유대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나병이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차라아트로 표기하는데, 이는 ’, ‘징계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성경에서는 대개 차라아트나병(문둥병, 한센병)’이라고 표기하는데, 사실 이는 광범위한 피부질환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차라아트에 걸린 병자들을 모두 나병환자로 볼 필요는 없다. 다만, 피부병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도 난치병인 것이 많아서, 그 당시에는 피부병(차라아트)’하나님께 맞아서 생긴 병으로 생각했다. 다른 말로, ‘차라아트는 죄로 인해 징계 받는 것이는 생각이 고대유대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통념이었다.

 

죄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낙인은 파급력이 엄청나다. 우선 차라아트에 걸린 당사자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책망하게 되는 일만큼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책망하면 화(anger)가 나지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책망하게 되면 고통(suffering)’이 온다. 고통은 죽음보다 무서운 거다. 고통에 처한 자는 누구든지 죽기를 갈망한다. 고통 당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기 때문이다.

 

죄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낙인이 가져오는 두번째 파급력은 타인(다른 이들, 이웃)에게서 오는데, 그들은 차라아트를 지닌 자들을 멀리하게 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해치는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보호본능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차라아트를 지닌 자들과 가까이 하면 그들의 차라아트가 자신들에게 옮을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병환자들을 멀리했다.

 

결국, 나병환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지역, 즉 변방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그러한 곳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11). 우리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라는 말을 들으면 여기가 어떠한 곳인지 전혀 눈치를 못 채지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곳이 어떠한 곳인지 다 알았다. (일례로, ‘예수께서 미아리를 지나시다가라는 표현을 외국인이 들으면 무슨 뜻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만, 한국인들은 미아리가 어떠한 곳인지 다 아는 것과 같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우연히 만나신다.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변방의 나병환자촌에까지 퍼진 모양이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에 나병환자 열 명은 멀리 서서 예수님께 이렇게 외친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

 

이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간청이었다. 기독교의 기도 전통에서 주님께 드리는 기도 중에 가장 위대한 기도는 바로 이것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Lord, have mercy). 주님께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게, 그분의 자비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기도할 때 너무나 많은 것을 간구한다. 그러나 최고의 기도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것을 안다면, 주님께 드리는 기도는 매우 겸손해질 것이다. 많은 말을 하여야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거라는 잘못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짧은 기도를 간절하게 드리기만 해도,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라. 나병환자들의 그 짧은 간청에 주님께서는 응답해 주신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에게 별다른 말씀 없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 이것은 이해하기 힘든 치료방법이다. 병자의 입장에서, 또는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적절한 반응은 자비를 구하는 나병환자들을 불러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별다른 치유행위를 하지 않으시고, 그저 그들에게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항하여 예수님께 어떠한 치료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들에게 자신들의 몸을 보이러 길을 떠난다. 사건은 그 길을 가는 중에 발생한다. 오늘 말씀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

 

바로 여기에서부터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본문은 그 어떠한 일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15). 열 명의 나병환자가 길을 가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중 한 명의 나병환자만이 돌아왔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은 왜 돌아왔으며, 나머지 아홉 사람은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이 이야기를 통해서 누가복음 저자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오늘 말씀에 대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낮은 수준의 해석은 이것이다. ‘은혜를 입으면 감사해야 한다.’ 물론 본문에서 그러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만은 않다. 은혜를 입었으면 감사하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은혜를 입었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겨나는 거다. “아무튼,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야!” (사랑하는 여러분,) 최선을 다해서, ‘머리 검은 짐승이 되지 마시라.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는데, 그 중에 한 명만 돌아와 주님께 엎드려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나머지 아홉 명은 머리 검은 짐승이 되고 만다. 어떤 이들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이유를 그들이 자신들의 나병치유를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가한다.

 

보상 받으려 순종하는가? 바로 앞에 나오는 무익한 종의 비유에서 보듯이, 순종은 보상의 개념에서 보면 안되고, 순종은 겸손의 개념에서 봐야 하는 게 맞다. , 우리는 보상 받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무익한 종이기 때문에 생득적으로(naturally)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누가복음의 저자가 돌아온 레퍼(Leper)’의 이야기를 통해서 머리 검은 짐승이 되지 말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 실마리는 16절 말씀이 가지고 있다.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열 명의 나병환자 중, 아홉 명은 유대인이었고,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다. 여기에는 매우 정치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구원 메커니즘이 들어 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데 익숙하다.

 

레위기에 보면 정결의식법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레위기에 보면, 부정한 자는 제의(제사,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고, ‘제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정결한 자 뿐이다. 그들에게 제의(제사)’에 참여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는데, 그들은 제사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구원을 확보하고 확인했다.

 

그런데, 만약 부정한 자 또는 부정한 것에 접촉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일은 생명처럼 소중했다. ‘차라아트’(나병환자)’는 정결한 자의 구원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었다. 그래서 정결한 자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부정한 자(차라아트)를 공동체 밖으로 쫓아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이기적이고 차별적인 신앙이다. 자기의 구원에 방해되는 것을 쫓아내는 것이 옳은 일인가? 쉽게 말해, 나 살자고 다른 이들을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옳은 일인가? 인간의 죄된 본성의 측면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측면, 기독교의 진리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 괴변에 불과하다.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레퍼(나병환자)는 분명 길을 가다가 자신들의 병이 나았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신들의 몸을 보이고,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는 것을 확인 받은 뒤, 유대공동체로 복귀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유대공동체로 복귀된 뒤,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해서 (분명, 또는 아마도) 자신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다른 차라아트(나병환자)’들을 차별하며 살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그냥 일반 사람들보다 나병환자들을 차별하는 데 더 열심을 보였을 지 모른다. 어떻게 얻은 구원인가? 갖은 모멸감을 참아내며 얻어낸 구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사마리아인 레퍼(나병환자)는 달랐다. 그는 깨끗함을 받고,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감사드렸다. 사실, 사마리아인 레퍼는 아홉 명의 유대인 레퍼보다 그 아픔이 두 배인 사람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죄인으로 낙인 찍힌 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공동체에서 원래 제외된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인 레퍼는 두 번 죽은 자와 같았다.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한 번 죽고, 사마리아 공동체에 의해 두 번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사마리아인 레퍼가 제사장에게 가서 그의 몸이 깨끗함을 입은 것을 보여 보았자, 그는 여전히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방인에 머물 것이 뻔했다. 다른 말로 해서, 사마리아인 레퍼는 나병에서 깨끗함을 얻었다 한들, 여전히 구원 받지 못한, 구원공동체에서 제외된, 버림 받은 자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바로 그 돌아온 레퍼(Lper)’에게, 돌아와 엎드리어 감사드리는 레퍼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신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생각해 보라. 누가 참으로(진정으로) 구원 받은 자인가? 제사장들에게 깨끗함을 입은 것을 확인 받고 공동체로 복귀하여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하여 여전히 자신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들을 차별하며 사는 아홉 명의 레퍼들이 구원 받은 자인가, 아니면, 주께로 돌아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선포를 가슴에 안은 한 명의 사마리아인돌아온 레퍼(Lepere)’가 구원 받은 자인가?

 

도대체 우리에게 구원은 무엇인가?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해 다른 이들보다 깨끗해지는 것’, ‘우위에 올라서는 것이 구원인가? 참된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정결해지고 구원받아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완전한(fully)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돌아온 레퍼가 어떻게 살았을 것 같은가? 그가 나병에서 깨끗함을 입고 공동체로 복귀되어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해 자신의 구원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차별하며 살았을 것 같은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참된 구원을 받은 자 답게, 공동체의 다른 레퍼들(구원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차별하지 않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기의 형제로 받아들이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참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영적인 레퍼이다. 우리는 모두 깨끗함을 입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보혈로 우리를 깨끗케 하셨다. 깨끗함을 입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깨끗함을 입은 것을 확인 받기 위해 제사장(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에게 가서 굽실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자신의 구원에 방해되는 것을 차별하며 사는 것을 아닌가.

 

우리는 모두 돌아온 레퍼가 되어야 한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해야 한다. 구원에 방해되는 것들을 차별하는 아홉 명의 나병환자와 같은 자들이 되면 안 된다. 우리는 구원 받은 자로서 세상에 나아가 구원에 방해되는 것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돌아온 레퍼(Leper)’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주님께서 돌아온 레퍼인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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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0. 7. 03:35

길을 걷다가

 

벽이든 낭떠러지든 앗질한 것이 앞에 있는 게 나아

그러면 눈을 감을 수 밖에 없거든

눈을 감으면 상상을 하든 기도를 하든

앗질한 것을 넘어서게 되거든

벽을 뚫고 지나가든 낭떠러지를 도약대 삼아 하늘을 날든 하거든

길을 가면서 눈 감을 일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거야

눈을 감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착각하는 지루한 눈을 갖게 되거든

그것은 길을 끝까지 가보지 않았다는 불성실함을 보여주거든

길을 걷다가 앗질한 것을 만나거든 되돌아 갈 생각 말고 눈을 감아봐

눈을 감고 상상을 하든 기도를 해봐

앗질한 것 뒤에 있는 신세계가 어둠을 가르며 네게로 돌진해 오는 게 보일거야

눈을 감는 건 비겁한 게 아니라 최후의 수단인 거야

최후의 수단이 있는 한,

우리는,

길 걷는 걸,

멈출필요없는거야

 

* 앗질한은 아찔한의 의태어 (, 하고 놀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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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0. 7. 03:34

흔적

 

발자국은 몸이 눌리는 중력만큼 흔적을 남기지만

심장은 사랑의 무게만큼 흔적을 남긴다

돌아서서 갈 곳이 없다는 것은 축복이다

여기까지 힘들게 온 흔적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없다

네가 지우지 않아도 바람이 지운다

바람은 너를 따라다니는 운명이다

흔적이 깊이 패인만큼 바람은 세차게 분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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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8

상대방이 나를 만족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

내가 상대방을 만족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

물론 내가 나 자신을 만족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

만족에 대한 부담감에서만 자유로워져도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행복할 수 있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7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시편 99:4)

 

주여, 우리는 불쌍한 백성들이니이다.

정의를 사랑할 줄 모르는

무능력한 왕이

우리를 통치하기 때문이니이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주 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나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7

정말 힘 센 사람은 절대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폭로할 뿐이다.

정말로 힘 센 사람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린다.

그리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간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6

베네딕도 성인의 '정주(Stabilitas)'라는 개념이 참 좋다. 정주란 자기 자신 곁에 있는 것, 즉 자신의 암자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사막 교부들의 교부집에 이런 말이 있다. "암자에 머무르며 너 자신과 노동에 집중하여라. 밖으로 나가는 것이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큼 너의 성장에 이로움을 가져다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방랑 ''는 영혼의 성장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일종의 '버티기'가 결국 영혼을 빚어가는 것 같다. 지금의 답답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저런 일을 해보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현재 속한 공동체(가정이든 교회든 회사든) 안에 머무르는 '정주'의 훈련이 쌓이지 않으면, 결국 공동체를 떠난다 해도 별다른 성과를 내기는 힘들 것이다.

 

사막 교부의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한 수도승이 아르세니오스 원로에게 말했다. "저는 금식도 못하고 일도 못하니 나가서 병자라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괴롭습니다." 그러자 거기서 악의 싹을 알아본 스승은 그에게 말했다. "가서 일하지 말고 쉬면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자거라. 그러나 암자를 떠나지는 마라!"

 

우리는 우리가 속한 '암자'를 끊임없이 떠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부질 없는 일이다. 베네딕도 성인의 '정주'는 요즘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 깨달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그저 침묵 가운데, 정주할 뿐.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5

현실, 뒤에 있는 진실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이렇게 살지 않을 텐데...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6. 14:54

즐거움은 지나치면 음란으로 빠져들 수 있고

슬픔은 지나치면 상심으로 빠져들 수 있다.

그러니, 절제할 일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6. 14:44

죄인을 불러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마가복음 2:13-17)

 

주여,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옵소서.

우리는 죄인이니이다.

우리를 불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옵소서.

죄인의 자리에 그냥 두지 마시고,

우리를 불러 거듭난 생명이 되게 하옵소서.

주의 부르심은 새창조의 부르심이니이다.

주께서 불러 주신다면

우리가 어떠한 죄의 자리에 있든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를 따르며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겠나이다.

카라바조의 그림 <세리 마태를 부르심>에서와 같이

새창조의 손가락을 우리들에게 내밀어 주사

우리도 마태(레위)처럼

죄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의 거룩한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임을 믿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6. 14:36

레위의 아픔, 레위의 희망

(마가복음 2:13-17)

 

오늘 이야기는 마태복음 9장과 누가복음 5장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레위를 부르시는 이야기, 집에서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이야기, 그것을 보고 바리세인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이야기, 그것을 들으시고, 자신이 온 이유를 밝히시는 이야기이다.

 

오늘 말씀의 핵심 구절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이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오시는 이유는 의인을 구원하고 죄인을 심판하러 오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러한 통념을 뒤집는 것 같다.

 

레위를 부르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 핵심 구절들의 의미를 파악해 보자. 레위는 누구인가? 레위의 직업은 세리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의 명단을 보면 이렇다: 시몬 베드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나인(아람어, 열심당원) 시몬, 가룟 유다

 

그렇다면, ‘레위는 누구인가? 레위는 마태의 다른 이름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세리 레위라 소개되어 있고, 마태복음에는 세리 마태라고 소개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레위라는 이름보다 마태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마태복음의 영향이 크다.

 

세리 레위에게는 아픔이 있었다. 레위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레위는 레위 지파 사람이었다. 레위 지파는 자기 분깃을 따로 갖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나의 분깃이라는 믿음으로 살던 성별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열한 지파의 땅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의 십일조에 의존하는 생활을 했다.

 

그런데, 레위는 지금 로마의 세금 청부업자로서, 하나님이 아닌 로마가 그의 기업이 되었다. 그로인해 레위는 동족들(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되었다. 그의 이름(레위)과 현실(로마의 세금 청부업자)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이것이 레위의 아픔이었다.

 

죄인이란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거나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죄인의 범주에 들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리세인들은 하나님의 법(율법)을 잘 지켰는데,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죄인이라 칭하며 그들과 같지 않음을 공적인 자리에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며 살았다.

 

레위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되어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괴로워했을 것이 뻔하다. 그러한 그의 심정이 카라바조의 <세리 마태를 부르심>이라는 그림에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확대된 그림을 보면, 세리 레위(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돈 세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돈 세는 일 외에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그의 어두운 표정이 그림에 잘 드러나 있다.

 

본문 말씀에 보면, 그림과 같이 예수님은 그런 죄인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신다. “나를 따르라!” 카라바조의 그림은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을 예사롭지 않게 표현한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손가락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실 때 가리키던 손가락과 같은 손가락을 묘사하고 있다.

 

즉 세리 레위(마태)의 부르심은 예사로운 부르심이 아니라, 새창조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은 죄인을 죄인의 자리에 그냥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 그것이 바로 레위의 희망이요 기쁨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그냥 두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신다. 그가 어떻게, 어떠한 연유로 죄인이 되었는지, 즉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신 뒤,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신다. 예수님은레위만이 아니라 다른 죄인들과 세리들도 함께 부르셨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15).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그러한 광경을 보고 언짢은 말투로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 마태복음 1119절에 보면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부른 것을 볼 수 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대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여기서 친구는 헬라어의 필로스를 가리키는데, 이는 가까이 지내는 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질문해보자. 예수님은 정말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는가? 필로스의 뜻대로라고 하면 만약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다면, 예수님도 세리나 죄인 신분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과 가까이 지내는 죄인이나 세리가 아니라, 세리와 죄인을 불러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또 한 번 알게 된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과 같은 분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을 불러 그들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생명을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께서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생각하여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 병을 고치는 의사가 병든 자에게 다가서는 것처럼, 생명을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다가서시는 것은 당연하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의 정의는 죄인과 사귐을 갖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죄인을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죄인과 가까이 하다가 오히려 그들이 죄인에게 물들어 죄인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선포는 레위에게 희망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희망이다. 우리도 레위처럼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얼마든지 죄인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다. ‘여호와께서 나의 기업이라는 것을 레위지파 출신의 레위(마태)가 알지 못했을 리 없다. 그래서 레위는 아픈 사람이었고, 죄인이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죄인의 자리에 내몰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때마다 의기소침할 필요 없다. 우리가 이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죄인의 자리에 들어서면 안 되겠지만, 우리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 없이 죄인의 자리에 들어섰을 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는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레위와 같은 아픔이 있는 자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그들은 자신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죄인의 자리에 내몰려 큰 죄책감에 싸여 생명을 망가뜨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자들에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죄인을 불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우리는 죄인과 친구될 수 없다. 자칫하다가는 죄인에게 물들어 우리도 똑같은 죄인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그들이 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면, 죄인의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죄의 자리에서 건져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 복음은 죄인의 자리에 앉아 신음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다.


* 카라바조의 <세리 마태를 부르심> 그림은 김학철 교수의 해석에 빚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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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10. 4. 06:01

겨자씨 믿음을 간구하는 기도

(17:5-10)

 

주여, 겨자씨 믿음을 주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너무도 자주 믿음을 더해 달라고 탐욕스럽게 간구하나이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해 달라고 간구했을 때

주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을 더해주는 대신

무익한 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겨자씨 믿음을 가질 것을 말씀하셨나이다.

겨자씨 믿음은 종의 믿음이요,

무익한 종이 고백했던 것처럼

겸손과 순종의 믿음이니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인생과 사명이라는 핑계 하에

온갖 할 일과 계획을 세워놓고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믿음을 간구하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인생과 사명은 더 이상 자신의 일이 아니요

성령의 일이라는 것을 간과하는 순간

우리가 구하는 모든 믿음은 탐욕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며

무슨 일을 해야 하나이까?

우리는 그저 주만 바라보는 무익한 종이니이다.

탐욕을 채우는 믿음 더하기를 욕망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겸손과 순종으로

주께서 일하시고 이루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겨자씨 믿음을 지닌

무익한 종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우리가 인식 기관(특별히 눈)으로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마음을 빼앗기는 것들은 대개 '악마성'을 내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겉으로 포장된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악마성'을 경험하고 나면 절대로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러나 뒤에 숨어 있는 악마성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악마성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고 난 후에 악마성을 경험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주목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악마성'을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내 그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을 빼앗기지 않도록 구원의 빛을 던져준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구원을 가져다 준다. 생명을 망치는 악마성을 품고 있는 거짓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 14:05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5-10)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제자도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제자도하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물론 행위를 거룩하고 정의롭게 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거기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이를 놀부증후군이라 할 수 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는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전례동화이다. 그 이야기에서 보면, 흥부와 놀부는 똑같이 제비 다리를 고쳐주는데, 그 결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흥부는 복을 받았는데, 놀부는 벌을 받았다. 왜 그런가? 그들의 행위가 결과를 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도(Intension)가 결과를 갈랐다. 흥부는 선한 마음, 놀부는 악한 마음을 대표한다. 이처럼, 행위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정신, ()’이다.

 

이와 같이 제자도는 어떠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의 문제, 정신의 문제이다. 제자도에 대해 하인리히 아놀드는 이렇게 말했다. “제자도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려 우리 안에 사시게 하는 것이다. 제자됨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은 누가복음 9장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도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어떻게 사냐?’ 일례로, 오늘 본문말씀과 가까이에 있는 제자도를 들여다 보자. 171절에서 4절에만 해도 2개의 제자도가 나온다. 하나는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자세이다. 우선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한 경고에서 보면, 제자도는 작은 자 하나라도 절대로 실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게 낫다고 한다. 두 번째로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자세에서 보면, 제자도는 자신에게 범죄한 형제에게 경고하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되, 죄를 짓고 일곱 번이라도 회개하면 계속해서 용서하라고 한다.

 

이게 쉬운가? 욕 나올 정도다. ‘더러워서 제자 못해먹겠네!’ 할 정도다. 인생을 돌아보면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한 일이 한 두 개인가? 나는 조지아에서 10년 동안 담임목회를 하며 대략 3천 번 정도의 설교를 했다. 목회자로서 나도 설교를 통해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한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개척 초기(목회 초기)에 한 실수인데, ‘부모 공경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말씀에 자기 의가 들어가는 바람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나의 설교가 부모님을 잘 공경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던 그분에게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설교했어야 하는데, 자기 의를 넣어서 설교하다 보니 그러한 일이 생겼다. 그때부터 나는 절대로 설교에 자기 의를 표출하지 않는다.

 

대개 그리스도인이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경우는 바로 어떠한 말이나 행동에 자기 의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자기 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면 어떠한 일을 잘 하지 못해 죄책감을 지니고 사는 사람에게는 큰 상처가 되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도 모르게 자기 의를 드러내느라 작은 자 하나를 얼마나 실족시키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우리는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의롭게하면 안 된다. 우리에게 무슨 의가 있는가? 의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우리는 그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참 어렵다.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제자도는 더 어려워 보인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게 범죄하기는 쉬워도 나에게 범죄한 상대방을 용서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범죄했을 때 상대방에게는 용서해 주기를 당연히 바란다. 그러나 상대방이 나에게 범죄했을 때는 당연히 상대방을 죽여버리고 싶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라고 요구하신다. 이게 가능한가? 요즘엔 나한테 실제적인 피해를 끼치는 범죄가 아니라 단순히 좀 쳐다봤다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세상인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제자들도 이러한 가르침 앞에서 당황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제자들(오늘 말씀엔 사도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제자들을 사도들로 표현하는 것도 누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이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해 보인다.)은 예수님께 이렇게 간구한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이런 제자도 앞에서 우리도 제자들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주님, 이런 것을 어떻게 실천합니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옵소서.”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요청에 대하여 다소 엉뚱한 말씀을 하신다. 그냥 속 시원히, “옛다, 믿음을 받아라!”라고 말씀해 주셨다면 손쉽게 끝나는 문제일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더해주시지 않고,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니라”(6).

 

이것은 믿음이 있으면 갑자기 괴력이 생겨서 뽕나무를 뿌리째 뽑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말씀에 언급되는 뽕나무는 무화과나무과의 뽕나무(Mulberry Tree)로서 뿌리를 깊고 넓게 내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지금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도가 뽕나무를 뿌리째 뽑는 게 어려운 것처럼 어렵다는 뜻이다. 제자도가 어렵다는 것을 예수님이 모르는 바가 아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도를 이루는 방식이 제자들이 생각하는 믿음을 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제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을 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바로 겨자씨 믿음이다.

 

30년 전, 1986년도 8월에 선친께서 생애 처음 성지순례를 다녀오셨다. 그때만 해도 가족 중에 누가 해외 여행을 나가면 온 가족이 공항(김포공항)으로 배웅을 나가던 시절이었다. 생애 처음 가시는 아버지의 성지순례에 삼촌들, 이모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까지 모든 분들이 총 출동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아버지는 성지순례를 다녀오셔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신비한 이야기와 네 가지의 신비한 물건을 가져오셨다. 두 가지의 신비한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하나는, 사해바다에서 수영을 했더니 몸이 저절로 둥둥 뜨더라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고(사진으로 증명), 다른 하나는, 유럽에서는 물을 사먹어야 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지금은 물을 사먹는 게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네 가지의 물건을 가지고 오셨는데, 요단강 물, 감람나무로 만든 십자가, 감람나무로 만든 리코더, 그리고 겨자씨였다. 현재, 감람나무로 만든 십자가는 서울 어머니 집에 걸려 있고, 감람나무로 만든 리코더는 내 보물 1호이고, 요단강 물과 겨자씨는 사라졌다.

 

여기에, 요단강 물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물을 사 드시고 남은 빈 페트병에 요단강 물을 담아 오셔서 집 냉장고에 잘 보관해 두셨다. 그런데, 어느 주일 오후, 형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날씨가 더운 탓에 우리 집에 들어오자 마자 냉장고를 열면서 시원한 물을 찾았다. 형 친구는 마침 냉장고에 들어 있던 페트병에 담긴 요단강 물을 그것이 그냥 일반 물 인줄 알고 홀짝 다 마셔버렸다. 요단강 물은 그렇게 존재를 감췄다. 요단강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갑자기 믿음이 막 솟아날 것 같은가? 요단강 물을 마신 형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신 분은 이따 (식사 시간에) 물어보시라.

 

나는 그때 처음으로 겨자씨를 보았다. (그 이후로 나는 머스타드 소스를 좋아하게 됐다. 특별히 나는 허니머스타드 소스를 좋아한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대개 이렇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법이다.) 겨자씨는 굉장히 작다. 눈 어두운 어르신들은 안 보일 정도로 작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그토록 어렵게 보이는 제자도를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도대체 겨자씨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실마리는 이어 나오는 7절에서 10절 말씀에 있다. 예수님은 겨자씨 믿음을 말하신 후, ‘무익한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종은 철저하게 주인에게 속해 있다. 종은 바깥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들어와서 주인이 차려놓은 밥상을 날름 받아 먹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고된 노동 후에도 집에 돌아와 주인을 위해 밥상을 차려야 하는 존재이다. 종이 그렇게 한다고 주인이 종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종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10).

 

겨자씨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겨자씨 믿음이란 겸손의 믿음, 순종의 믿음을 말한다. , 위에서 하인리히 아놀드가 제자도를 “제자도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려 우리 안에 사시게 하는 것이다. 제자됨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문제이다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믿음이란 내가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시도록 우리 안에 주께서 사시도록 나를 내어 드리는 일, 그 분이 역사하시도록 물러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인생과 사명은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우리는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명을 갖게 된다. (공동체의 사명, 개인의 사명)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사명을 아름답게 완수하기 위해서 기도하며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운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여러분의 인생과 사명을 아름답게 완수하기 위하여 어떠한 계획을 하며 사시는가? 이렇게 사시는가?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정말 이렇게 사는 분이 있다면, 둘 중 하나다. 신앙의 경지가 하늘에 닿은 분이거나, 한량이거나.

 

"계획은 있지만, 계획 없이." 이 말은 참으로 무책임한 말 같지만, 기독교 영성에서는 꼭 필요한 말이다. 계획 없이 어떻게 인생을 살 수 있는가. 20141월 어느 신문매체에 실린 김정운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명강사, 전 명지대교수, 인기 작가, 김선도 목사의 아들)의 인터뷰 기사가 내 마음에 도끼질을 했다. 이런 제목의 기사였다. “100세 시대인데 이렇게 대책 없을 수 있나!”

 

그 기사 인터뷰에서 김정운 교수는 이런 말을 한다.

 

교수를 그만둘 때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강의는 계속 들어올지, 책은 잘 팔릴지 누가 장담하나. 50세에 훌쩍 버리고 떠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추구할 세계에 대한 동기가 분명해야 한다. 지금 내가 사는 세계가 내가 추구하는 삶이나 세계가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할 때 떠나야 한다. 새로 시작하려면 버려야 한다. 내려놔야 다시 새로운 것을 쥘 수 있다. 아무리 직장에서 버텨도 60이나 65세면 쫓겨난다. 우린 그동안 대학까지 16년 정도 공부한 것으로 60세까지 버텼다. 이제 100세 시대인데 왜 남은 인생에 대한 투자는 하지 않는가. 날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의 삶과 인생을 성찰해야 한다. … 평균수명의 연장은 어마어마한 혁명이다. 사회구조의 변혁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100년을 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대책이 없을 수 있나. 모든 것이 엄청나게 변하고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100년을 살아야 하는데 50년을 사는 속도와 의식으로 살 듯 조급하고 불안하게 살면 탈진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이성과 영성을 동원하여 인생을(사명을) 열심히 계획해야 한다. 그래야 낭패보지 않을 수 있다. 현재를 계획해야 하고, 10년 후를 계획해야 하고, 20년 후를 계획해야 하고, 노후를 계획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후를 계획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계획하는 데 열정을 들이지 않으면 인생은 산으로 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자신의 모든 이성과 영성을 모두 동원하여 촘촘하게 짠 계획에 너무 얽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인생(사명)은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증언하고 있듯이, 성령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분이다. 성령은 결코 우리들이 촘촘하게 짜놓은 계획대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우리는 믿음을 '더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지만, 주님은 결코 제자들에게 믿을 더 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간구해야 할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알려주신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믿음을 더 가져서 무엇 하려는가? 결국 그것을 내 정욕에 쓰려는 것 아닌가? 믿음은 어떠한 것을 하는 능력이 아니다. 믿음이 있으면 병을 고치고, 손에서 장풍 나가고, 미래를 보고, 그러는가? 예수님께서 무익한 종의 비유에서 말씀하고 계시듯, 믿음은 나를 쳐서 주님께 굴복시키는 순종의 깊이이다.

 

인생(사명)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는 것을 간과한 모든 계획은 그것이 아무리 촘촘하고 잘 짜인 것이라 하더라도 '탐욕'에 불과하다. 탐욕은 개인의 인생(또는 공동체)를 세우지 못한다. 탐욕은 결국 인생(공동체)을 허물고 만다.

 

아골 골짜기를 아는가? 가나안 입성을 앞 둔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은밀히 파견하는 등, 가나안 땅의 관문인 여리고 성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하나님의 말씀에 힘 입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리고 성을 어렵지 않게 정복한다. 다음 정복지는 아이성이었다. 아이성은 여리고 성에 비하면 작고 형편 없는 성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는 손 쉽게 아이성을 정복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는 보잘것없는 아이성에게 대패하고 만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가?

 

아이성 패배는 한 사람의 탐욕 때문이었다. 유대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여리고성에서 노략한 물건을 탐욕스럽게 감추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너졌다. 이와 똑 같은 일이 신약시대의 초대교회에서도 있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아간과 같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탐욕은 초대교회 신앙공동체를 흔들었다. 그 탐욕 때문에, 결국 공동체도 위기를 겪고, 개인의 삶은 파탄에 이르게 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획은 있지만, 계획 없이" 인생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에게 도대체 얼마큼의 믿음이 필요한가. 믿음을 더 달라고 해서, 주님이 믿음을 더 주시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 하는가. 사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하면 그 능력이 나타난다. 결국 믿음도 우리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 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믿음을 더 달라는 탐욕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기 안에 있는 겨자씨 만한 믿음을 성령님께 맡기는믿음’, 그리고순종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사명)에는실패란 없다. 결국 성령이 하신 일이니까.

 

겨자씨 믿음을 간구하시라. 더하지 말고 오히려 빼시라. 나를 쳐서 주님께 굴복시키는 순종의 깊이를 간구하시라. 주께서 하시도록 우리 안에 주께서 사시도록 나를 내어 드리시라. 주께서 역사하시도록 물러서시라. 겨자씨 믿음으로 인생과 사명에서 승리하시는 믿음의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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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