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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4.07.27 한국 신학의 위치
바이블 오디세이 II2024. 7. 27. 06:09

예루살렘 공의회: 환대를 열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제1차 전도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귀환한 바울과 바나나 일행은 전도여행에서 이룬 성과를 교회 공동체와 나누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몸을 추스르며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어떤 무리들 때문에 안디옥 교회는 한바탕 소동을 겪는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어떤 무리들은 안디옥 교회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 이방인들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 교우들은 이들의 한 수 ‘가르침’에 적잖은 반감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행 15:2).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진술이 그 당시 어느 정도의 충격적인 상황인지를 피부로 느끼려면, 우리 시대에 발생하고 있는 동성애 문제를 떠올리면 된다. 이게 보통 논란과 분쟁을 가져온 게 아니다.

 

율법의 문제는 바울 서신 곳곳에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로마서에서도 할례와 절기, 그리고 음식 문제가 로마교회를 괴롭혔다. 로마교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례, 절기, 음식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식별 장치처럼 작동했다. 이것은 구별인가, 차별인가. 구별과 차별은 맞물려 있다. 구별은 평등에 기반하지만, 차별은 차등에 기반한다. 구별은 ‘우리는 다르지만 나는 너랑 잘 지내고 싶어!’이지만, 차별은 ‘나는 너랑 같지 않다. 그래서 나는 너랑 밥을 같이 먹을 수 없어!’이다. 차별의 근본에는 구원의 문제가 깔려 있다. ‘나는 구원 받지만, 너는 구원 받을 수 없어.’

 

‘구원 받고 싶으면, 너는 나랑 똑같아져야 해!’ 배제와 차별, 그리고 폭력은 이렇게 발생한다. 우월감은 ‘나는 구원 받은 존재이고, 너는 구원 받지 못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병리적 생각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 욕을 먹고 저항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이다. 구원을 둘러싼 우월감. 그래서 그리스도교인들의 선교(전도)나 봉사는 시혜적(우월한 위치에서 베푸는 선행)이고, 폭력적(나랑 똑 같은 존재를 만들려고 하는 폭력과 억압)이다. 구원은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 전혀 아닌데, 구원이 차별의 조건으로 작동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폭력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율법의 문제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 큰 소란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것이 폭력 사태로 번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 진영 간에는 의견 충돌(dissension)과 공적인 논쟁(debate)가 있었다. 의견의 충돌이 있을 때 공적인 논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어떤 것을 결정하는 것은 폭력일 뿐이다. 초대교회의 양대 산맥,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이 논쟁적인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하여 공의회를 연다. 예루살렘 공의회. 이것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공의회이다. 공의회는 보편적인 신앙을 도출하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의 산물이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공의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편 신앙을 위해서 열심히 모였고, 치열하게 논쟁했고, 권위를 확보하여 선포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발생하는 문제들도 이런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유대 그리스도 진영은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적용해야 할 법이다. 할례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전력이다. 만약 유대 그리스도인 진영이 보편적인 지지를 받았다면, 우리는 현재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했을 것이다. 대략적으로, 돼지고기를 못 먹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이방 그리스도인 진영은 베드로의 증언과 바울과 바나나의 증언, 그리고 주의 형제 야고보의 설득을 통해 의견을 표출했다. 이 중 베드로의 증언이 인상적이다. “너희가 어찌하여 제자들의 목에 멍에를 메어 하나님을 시험하느냐? 주 예수의 은혜로 우리도 저들과 똑같이 구원 받는다고 믿는다”(행 1:10-11). (We believe that we are saved through the grace of the Lord Jesus, in the same way as they also are.) 베드로는 구원을 말할 때 유대인을 중심에 놓고 말하지 않고 이방인을 중심에 놓고 말한다. 이게 정말 인상적인 증언이다. 그들(이방인들)이 우리(유대인들)처럼 구원 받는 게 아니라, 우리(유대인들)가 그들(이방인들)처럼 구원 받는다. 비교 대상을 자기들(유대인들)로 삼지 않고 그들(이방인들)로 삼았다. 기준이 ‘내’가 아니라 ‘너이다. 놀라운 고백이다. 그렇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는다. 구원은 선물이다. 선물이기 때문에 구원은 결코 차별의 준거가 될 수 없다.

 

격렬한 논쟁이 있은 후,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 사항을 공포한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행 15:28-29). 이것은 모두 그 당시 성행하던 그리스-로마 종교행위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렇게 결정한 것의 속뜻은 ‘누가 주님인가’를 분명히 하는 신학적 조치였다. 로마제국과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이끄는 신앙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이 결정은 즉시 안디옥 교회(이방인들의 교회)에 알려졌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환대가 열린 것이다.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를 추가적으로 행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된다. 구원은 환대이다. 주님이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이다. 환대는 이런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우리 시대는 환대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자기랑 똑같지 않으면(신분, 외모, 배움, 소유 등)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랑 똑같아지라는 요구와 저 사람이랑 똑같아지려는 욕구만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주님의 환대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우리도 이 시대의 불의한 풍파에 휩쓸려 요구와 욕구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닌지, 깊이 돌아볼 일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차별 가득한 세상에 균열을 내야 한다. 요구와 욕구를 환대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 요구와 욕구가 아니라 상대방(타자/이웃)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구원의 은혜를 함께 누리는 환대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와 생명이 달려 있다. 우리는 잘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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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한국 신학의 위치]

 

서구(유럽)신학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신학이다. 그래서 때로는 안쓰럽고 애처롭다. 계몽주의 이래 서구사회에서 종교(그리스도교)는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중세에 천하를 호령하던 그 기세와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에게 개무시 당하게 된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 보니, 서구신학은 옛영광을 그리워하며, 또는 되찾으려고 노력하며, 또는 그나마 존재하는 조그마한 영광이라도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서구신학은 온갖 사회적 이슈와 연결을 지어 자기의 존재성을 호소하고, 세상을 향해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고 유지하고 있는지, 또는 어떻게 사회 발전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애처롭다. 마치 사랑 받지 못하는 자가 사랑 받고 싶어서 내는 기죽은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외침'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에는 현실을 향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담겨 있다. 빈곤과 사회적 억압, 그리고 정치적 혼란을 통해 고통 받는 민중을 향한 애닮은 마음이 담겨 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종교(그리스도교)는 서구사회처럼 무시 당하지 않는다.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지 않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서구신학처럼 인정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은 무력하다. 사회 정의를 외쳐도 좀처럼 변혁을 일구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외침'이 공허하다. 깊은 정말이 베어 있다.

 

서구신학과 라틴 아메리카 신학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신학은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일까? 민중이 자취를 감추고, 이제 부르주아와 부르주아가 되고 싶은 사람들만 가득한 한국에서 신학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한국사회는 서구사회와 달리 다종교 사회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사실을 부인하려 든다. 한국사회는 서구사회처럼 한 번도 크리스텐덤을 이룬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크리스텐덤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국사회에는 다른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사회 인식이 결여된 것이다.

 

한국사회는 서구화된 사회이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종속에 가깝게 묶여 있다. 한국인은 서구 문물을 소비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통시키고 소비한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 교회는 서구로부터의 "온갖 영향의 결과이며, 우리 속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게 없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발견한 게 아무것도 없다. 독창적이고 원래대로 명징한 게 아무것도 없다."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이 뿌리 내린 사회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무한경쟁 체제이다. 말이 좋아 무한경쟁이지, 결국 힘 있는 자(경쟁력 있는 자)가 힘 없는 자(경쟁력 없는 자)를 무한히 착취하는 구조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쟁력을 갖추려고 영혼을 갈아넣고, 경쟁력에서 도태되지 않으려고 경쟁자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경쟁에서 이기려고 종교를 이용한다.

 

그래도 한국은 아직까지 지정학적으로 극동 아시아에 위치해 있고, 인종적으로 아시아인이며,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서서히 서구화되긴 했지만, 문득문득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의심과 울분이 솟아오르기도 한다.

 

한국신학은 서구신학과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과는 다른, 어디쯤에 놓여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처한 현실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신학은 다종교 사회 상황에서, 서구화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에 억눌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한국인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놓고, 새로운 사회 인식의 출현과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위해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새로운 사회 인식의 출현을 돕는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스펙타클'이 무엇인지 폭로하고, 스펙타클을 걷어내 사람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 인식을 가지고 '이건 아닌데...'라는 내면에서 올라오는 음성을 듣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에서 성경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안심이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교회에서 성경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저모양이고, 한국사회가 저모양이라면, 성경은 믿을 게 못되고 공허한 것이고 쓸모없는 것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저모양이고, 한국사회가 저모양인 것은, 다행히도 성경이 정직하게 선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오히려 밝다. 그리고 해야할 일이 너무도 명징하다. 성경을 정직하게 읽고, 성경을 정직하게 선포하는 일, 그것이 우리들의 주어진 과제이고 사명이다.

 

다행히, 이런 자각과 노력이 곳곳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성경을 오용하고 남용하는(abuse) 무리들이 많지만, 그리고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그들이 아직도 교회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그에 맞서 그리스도교의 위대함과 전복성을 제대로 알리려고 하는 '빛과 소금'같은 사람들이 많다.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교단과 상관없이 연대하여 새로운 사회 인식의 출현을 도모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일이 더 많아지고 깊어지기를 바란다.

Posted by 장준식